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6. 12. 18. 11:37
李成桂(1335~1408)의 고조부는 高麗에서 蒙汗으로 歸化한 인물이고, 李成桂의 父는 蒙汗에서 高麗로 귀화한 인물이라 했다. 李成桂의 부 子春(소위 桓祖라는 시호를 받았다)은 恭愍帝 4 년에 처음으로 雙城摠管府 千戶 자격으로 高麗朝廷에 來朝하러 왔다고 했다. 李成桂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소위 穆祖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高宗 때 사람으로 蒙汗에 歸化,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濊貊族을 다스렸고, 李子春까지 蒙汗에서 벼슬을 살았다.

李安社가 蒙汗으로 귀화한 때는 高麗가 蒙汗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고 날조된 시기다. 高宗 때는 물론이고 蒙汗은 高麗를 한 번도 침입하지 못했지만, 高麗 高宗 때, 濊貊族에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濊貊族이 세운 金汗이 망한 것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한 때는 蒙汗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恭愍帝 때다.

李成桂 家系의 특징은, 한 마디로 기회주의자들의 집안이라는 것이다. 出世를 위해서라면, 國籍을 바꾸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李安社가 高宗 때 지의주사(知宜州事)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출세를 위해 과연 국적까지 바꾸었단 말인가. 그래서 지방 관리의 탄압을 받아 蒙汗으로 도망쳤다고 날조했다. 고작 地方 官吏의 보복이 무서워 高麗 영토를 벗어나 蒙汗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陸)은 타타르인이 주 활동 거점지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쓰고 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흥(永興)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쌍성총관)부(府)의 북쪽에는 만리장성의 관문이 있었다고 정사서가 쓰고 있다.
(http://www.chosunsa.co.kr/lec1/history1%2813-1%29.htm, 이성계는 타타르인)

萬里長城은 “李成桂는 타타르인”의 저자가 추측한 것이고, 실제로 實錄에는 萬里長城 이라는 말이 없다. 高麗長城이다.

高麗 元宗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정책은 확고하게 異民族과 섞여 살지 않는 것이었다. 蒙古가 雙城摠管府를 설치한 것을 기화로 蒙古의 일파인 숙여진 일부가 雙城摠管府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지명이 밀렸다.

중국 대륙의 지명 중 밀리지 않은 것은 長安(高句麗의 長安에 티벳고원 북부의 長安을 포겠으니까, 실제로는 밀린 셈이다)과 太白山, 桂林 정도일 것이다. 濊貊族은 高句麗 때 부터 柴達木盆地에 살았다. 高句麗와 大震國이 멸망할 때, 柴達木盆地에서 기어나오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우리나라에 의해 도로 柴達木盆地로 집어 넣어졌다. 12 세기 초 거란이 쇠한 것을 보고, 나라를 세울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깨달은 濊貊族은 中土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해서 柴達木盆地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백 여년 뒤, 蒙汗에 정복되고 말았다.

濊貊族이 살던 달단동(鍵輯洞)은 柴達木盆地에 있었다. 高麗가 권력투쟁으로 어이없게 柴達木盆地 등을 상실하자, 또 다시 濊貊族은 中土에서 기어나와 蒙汗 땅이 된 柴達木盆地로 들어갔던 것이다. 蒙汗이 濊貊族을 우대했다고 하지만, 겨우 예전에 살던 柴達木盆地로 밀어 넣은 데 불과하다. 그 정도 우대라면 우리나라가 대대로 濊貊族에게 해주었다.

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숙여진은 柴達木盆地에 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蒙汗人은 소수종족이라 長城 이북을 차지 하고도 방어할 병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같은 蒙古族인 숙여진과 거란을 활용했다.

雙城摠管府가 있던 黃河 하류 이북에도 百濟長城이 있었지만, 柴達木盆地의 북동쪽에도 長城의 끝자락이 길게 뻗어 있다. 高麗長城이다.

李安社는 다루가치(達魯花赤) 였다고 했다. 實史 에서는 東寧府는 1258 년, 雙城摠管府는 1270 년에 설치됐다. 實史에서는 쿠빌라이(世祖 1260~1294 재위)가 長城 이북을 가져가면서 蒙汗이 접수한 高麗 땅에 다루가치를 몇 년 간 설치 했지만, 날조사 에서는 西京과 西北面에 한해서 高宗 때 부터 景孝帝 때 까지 다루가치를 설치했다. 그러므로 李安社가 다루가치라도 되려면 西北面인 東寧府에 살아야지, 東北面인 雙城摠管府에 살아서는 안된다. 李成桂는 東寧府의 高麗長城 지역에서 살면서 삐뚤어진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李安社는 언제 출생했는지 알 수 없고 1274 년 까지 살았으므로 이미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할 당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李成桂가 자신의 고조부 李安社가 蒙汗에 귀화하기 전 까지 高麗人이며 “高宗 때 知宜州事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얘기 한다면 모두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知宜州事를 지낸 李安社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다면, 더욱 신빙성을 더해 주겠지만, 李安社의 출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全州李氏 족보에도 안 올랐던 사람이다. 高麗人 李安社는 존재하지 않았다.

李成桂의 父 子春이 高麗로 귀화하기 전, 雙城摠管府 격파에 절대적 협력을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 雙城摠管府 격파를 무려 12 년이나 앞당겼다. 李安社가 高麗人 이었다면 그런 구질구질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李安社가 蒙汗에 歸化한 후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살았던 東寧府는 濊貊族(숙여진)이 집단으로 이주해 우리나라의 감시를 받으며 천 년 동안 살던 柴達木盆地이다. 濊貊族이 中土로 들어간 후 柴達木盆地에는 高麗人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濊貊族이 柴達木盆地로 재차 이주했을 때는 高麗人과 같이 살았다. 그러나 高麗史와 世宗實錄에서 揆園史話에 이르기까지 濊貊族과 李成桂의 家系를 기록한 모든 기사는 李安社와 李成桂가 高麗人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를 中奴에게 주고, 中奴史를 우리나라 역사로 둔갑 시켰던 것이다.

李安社는 濊貊族이었던 것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歸化한 것은 李成桂가 21 살 때였다. 李成桂도 濊貊族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李成桂의 外家도 濊貊族 이라니까, 李成桂는 순수 濊貊族 혈통이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서 권력탈취를 위해 威化島 회군했을 당시, 東北面이 아니라 西北面의 濊貊族 천 여명이 밤낮을 달려와 지원했던 것이다(이성계는 타타르인).

李安社는 高麗人이 아니나 高宗 때 蒙汗에 귀화한 것은 맞다. 高宗 때 濊貊族이 세운 金汗이 蒙汗에 망했다. 李安社는 티벳고원 북부에 살다가, 金汗이 정복된 것을 계기로 蒙汗人이 되었다. 귀화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멸망하고 蒙汗 땅으로 변했으니, 그냥 蒙汗人이 된 것이다. 李安社가 蒙汗이 될 당시는 雙城摠管府는 커녕 東寧府도, 8 站(jamuchi)도 설치되기 전이다. 그래도 다루가치 까지 된 걸로 보아 蒙汗에 적극적으로 충성한 모양이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한 때는 蒙汗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恭愍帝 때다. 李成桂의 집안은 전형적인 機會主義者의 家系였던 것이다.

‘李’는 李子春에 이르러 恭愍帝로 부터 받은 賜姓이기 때문에 李安社는 李安社가 아니고, 이행리는 이행리(李行里 翼祖)가 아니며, 이춘(李椿 度祖)은 李椿이 아니다. 李安社는 金汗式 이름과 蒙汗式 이름이 있었고, 李行里와 李椿은 蒙汗式 이름밖에 없었다.

 

恭愍帝의 蒙古式 이름이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蒙汗은 자신의 딸을 대대로 高麗 皇帝에게 시집 보내는 수법으로 高麗에 빌붙어 살던 나라다. 高麗 皇帝의 은혜에 기대 산 나라였다. 高麗 皇帝가 그런 蒙汗의 이름을 가졌겠는가.

高麗 皇帝가 우리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蒙汗 皇帝의 손자가 되다 보니까, 몽고식 이름도 하나 붙여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자를 사용한지 2 천 년이 가까운 나라에서 맏이, 얼굴, 문서, 나무, 아이라고 열거해 통치자의 이름을 짓는가. 恭愍帝는 숙제(날조사의 忠肅王 1294~1339)의 둘째 아들이므로 설령 蒙古式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顔帖木兒는 될 수 있어도 伯顔帖木兒는 될 수 없다.

伯顔帖木兒는 원래 문자를 모르던 미개 종족에게 蒙汗國이 공문서(인구통계 등) 작성을 위해 붙여 주었던 이름의 하나로 시간이 흐르자, 미개 유목민족 스스로 애용하게 된 것이다. 伯顔帖木兒는 상식적으로 顔帖木兒의 형 보다는 자손일 확률이 높다. 아들을 더 낳을 계획인 蒙古人이 첫아들을 伯顔帖木兒라고 했다면,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첫 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안첩목아(顔帖木兒 ; 앤티무르)는 成桂의 曾祖 춘(椿)의 본명 이었다. 그런데 顔帖木兒의 아들 즉 子春의 몽고식 이름은 오서사불화(吾暑思不花)다. 伯顔帖木兒는 자연히 한 대 건너뛴 成桂의 본명 이었던 것이다. 한족으로 둔갑하면서 제 이름을 恭愍帝에게 떠넘긴 것이다.

成桂는 이두란(李豆蘭)과 결의형제를 맺었다지만, 원래 친형제간이다. 豆蘭의 본명은 帖木兒(티무르)다. 成桂는 伯顔帖木兒(빠이앤티무르)니까, 이 둘이 형제이었음을 알 수 있다. 成桂는 帖木兒가 태어날 때 까지 伯顔帖木兒라는 비천한 이름조차 없이, 이 새끼, 저 새끼로 불리던 종자였음이 분명하다. 7 살 까지 이름조차 없었던 伯顔帖木兒는 그 사실을 高鄒牟에게 슬쩍 떠넘겼다. 그런 천하디 천한 노예 종자가 유언비어를 유포해 高麗皇帝를 제거한 뒤 9999 개의 방을 가진 紫禁城을 짓고, 전세계에 군림하며 皇帝 노릇했던 것이다.

친형제간 이라서 한족으로 변신한 成桂는 濊貊族 帖木兒와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는 成桂의 둘째 처 姜氏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형제가 나란히 이모와 조카딸에게 장가든 것이다. 같은 姓氏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 고종, 이종 누이들은 물론 이모, 조카를 가리지 않고 妻로 삼은 것은 新羅가 아니라, 濊貊族을 포함한 蒙古族이었던 것이다.

帖木兒(豆蘭)는 伯顔帖木兒(成桂)와 吾暑思不花(子春)이 귀화한지 16 년 뒤인 1371 년(恭愍帝 20)에 高麗에 귀화하지 않았다. 帖木兒는 伯顔帖木兒의 동생이고, 吾暑思不花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비 吾暑思不花가 동족을 팔아 高麗에 東寧府를 넘긴 대가로 高麗에 귀화할 당시, 제 아비를 따라왔다.

東寧府 정벌이 1357 년 11 월에야 완료 되었으므로 吾暑思不花가 高麗로 귀화한 것은 1357 년 말 내지 1358 년이었다. 伯顔帖木兒(成桂)의 나이가 23 살 이었으니, 帖木兒는 10 살 전후였다. 그러므로 帖木兒는 千戶는 커녕, 百戶 조차 아니었다. 한족으로 둔갑한 伯顔帖木兒와 濊貊族 帖木兒가 형제간임을 부인하기 위해서 帖木兒가 吾暑思不花(子春)이 귀화한지 16 년 뒤에 高麗로 귀화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가 李氏朝鮮 개국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伯顔帖木兒와 朱元璋 사이의 연락책 이었기 때문이다.

顔帖木兒의 아들은 吾暑思不花, 吾暑思不花의 아들은 伯顔帖木兒와 帖木兒였다는 사실에서 成桂 집안은 姓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안사(安社)의 원래 이름은 뭘까. 한단고기에 나온다. 야사불화(埜思不花)다. 埜思不花와 吾暑思不花는 祖父, 孫子간이고, 伯顔帖木兒와 帖木兒는 형제간 이니까, 埜思不花의 아들 행리(行里)의 진짜 이름은 暑思不花나 思不花쯤 될 것이다.

날조사에서 成桂의 할아비는 椿, 아비는 子春이다. 그러나 누가 부모 이름에 子자 하나 붙여서 이름을 짓는가. 高麗에서는 없었다. 항렬에 따라 돌림자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成桂는 제 조상의 이름을 날조 하면서 무심코 濊貊族의 버릇을 모방한 것이다.

埜思不花는 본국(本國)이 아니라 번국(蕃國) 사람이었다. 元에 있으면서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274 년에 죽은 인간이다. 埜思不花는 향사(嚮使)도, 삭방도병마사(朔方道兵馬使)도 아닌, 東寧府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횡포를 부렸다. 天使 즉 天子의 사신 정지상(鄭之祥)을 맞아 “다시는 高麗를 섬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굴다가 철퇴에 맞아죽은 종자다.

埜思不花가 죽은 후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능력껏 출세에 도움 될 蒙汗 여자와 결혼 했음에도 萬戶인지 千戶(상상 속에서 천호가 된 帖木兒의 예에서 보듯이 百戶, 十戶 혹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인지 외에는 東寧府에서 직위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高麗가 東寧府를 공격하는 기회에 吾暑思不花는 제 동족을 팔아 高麗로 전향했던 것이다.

 

“滿州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滿州之讎爲不俱戴天則獨何故耶 揆園史話 序文)" “淸나라 황제에게 우리가 조상이 같음을 얘기하자(說淸帝 談同祖 揆園史話 漫說)." 淸나라 皇帝와 조상이 같은 건 우리민족이 아니라, 李成桂다.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이후 高麗 때 까지 단 한 번도 異民族을 皇帝로 삼은 적이 없다. 한단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濊貊族 李成桂가 우리나라 왕이 되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기원전 7197 년에 개천해 6 천년간 동아시아에 군림해온 나라 에서는 濊貊族은 절대로 皇帝가 될 수 없다. 濊貊族은 우리나라의 속민 이었다. 같이 섞여 산 것도 아닌, 그들만의 거주지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蒙古干涉期 이전 까지는 濊貊族과 한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아무리 恭愍帝 이후 濊貊族의 귀화를 허락했다 하나, 그런 濊貊族이 우리나라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熊氏族 女王이 배달 1 세 한웅 거발한(居發桓桓雄)과 혼인 했음에도 熊氏族의 첫 王儉(배달의 제후)이 나오기 까지는 무려 천 년이 넘게 걸렸다.

만선사관(滿鮮史觀)에 찌들은 자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麻衣太子 후손이 지도한 生女眞이 淸을 세웠다면서 淸이 우리나라라고 우긴다. 生女眞은 나라를 세우지도 않았고, 그러한 식의 논리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는 작태다. 초라하게 쪼그라든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짓이다. 新羅人이 生女眞을 지도해서 濊貊族이 세운 淸이 우리나라라면, 濊貊族을 王으로 받든 우리나라는 濊貊族의 나라란 말인가.

李成桂는 자신이 濊貊族 이라는 사실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꿨다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말 한 마디가 모든 진실을 알려준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洪武)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은 李成桂의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거짓인지 적시하고 있다.

세상에 自國史를 말살하는 인간이 어디 있던가.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조차 말살된 韓國史를 축소했을 뿐이다. 李成桂는 濊貊族이다. 李成桂에게 韓國史는 他國史였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살할 수 있었다. 李成桂에게 있어서 韓國史는 교환의 대가로 자신이 왕노릇할 수 있는 비싼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朝鮮人 보다 더 朝鮮人으로 살다간 沙也可도 있다. 沙也可의 영정을 보라. 거기서 倭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朝鮮人 보다 더 朝鮮人 같이 생겼다. 沙也可 金忠善은 생김새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정신 까지도 朝鮮人 이었다. 沙也可의 號는 中國을 그리워 한다는 慕夏堂 이었다. 우리나라 家門의 족보책을 뒤져 본다면, 李氏朝鮮이 얼마나 事大主義에 썩어빠진 나라인지 알 수 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王位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5300 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한 긍지 높은 민족이다. 李成桂가 濊貊族인 사실이 드러나면 아무도 李成桂를 우리나라 통치자로 추대할 사람은 없다. 濊貊族은 우리나라 땅에 등장한 기원전 19 세기 부터 朝鮮時代 까지도 줄곧 우리나라에 의해 멸시받던 종족이다.

李成桂는 江陵帝를 폐위 시키면서 신돈(辛旽 ?~1371)의 자식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江陵帝의 아들을 옹립했다. 결국 李成桂는 辛旽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옹립 했다는 모순에 빠진다. 高麗皇帝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해서 皇位를 계승할 수 없다고 李成桂 스스로 말했으니까, 高麗人도 아닌 濊貊族은 당연히 우리나라 皇帝가 될 수 없다.

그래서 李成桂는 高祖父가 高麗人 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濊貊族은 李成桂만이 아니다. 李成桂의 동족도 있고, 明으로 넘어간 濊貊族도 있었다. 李成桂가 濊貊族이란 사실은 明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李成桂가 濊貊族이란 사실은 李成桂가 皇帝가 되는 것을 막는 오직 하나의 결격사유였다. 高麗로 귀화한 濊貊族은 李成桂가 高麗人인척하고, 또 李成桂가 권력을 잡으면 그들에게도 유리 하니까, 입 다물고 있었지만, 明으로 간 濊貊族은 다르다. 李成桂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朱元璋에게 알려야 그들의 출세길이 열리는 것이다.

당연히 明은 협박했다. 단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네가 濊貊族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들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부러워 해왔다. 그래서 朱元璋과 李成桂의 자리만 바꾸자고 했다. 朱元璋은 한民族의 皇帝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中奴가 너무 미개해서 李成桂가 거부했다. 그런 나라의 왕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결과,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현 黃河 이남을 주고 대대적인 역사날조 작업이 진행 되었던 것이다. 三國, 大震國, 高麗의 正史만이 아니다. 배달에서 朝鮮, 大夫餘, 北夫餘에 이르는 正史에서 史草, 潛夫論, 通志·氏族略 등 온갖 문헌에 기초 자료에 해당하는 공적 장부까지 다 朱元璋의 손에 넘어갔다. 여기에 文學, 科學 분야의 서적까지 더해졌다. 三國의 正史書만 해도 수천 권이다. 李成桂가 넘긴 문헌이 수만 권인지, 수십만 권인지 짐작이 안 간다.

明이 高麗에 遷都를 요구했다는 말(高麗史節要 禑王 9 년)은 날조다. 明은 揚子江 이남을 차지했다. 高麗의 수도는 長安이다. 濊貊族이 요구했으면 모를까, 李成桂가 韓半島로 내빼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다.

高麗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자신이 실권을 잡고 있던 高麗末에 遷都를 단행했다. 그래야 高麗가 明에 영토를 빼앗겼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遷都한 시기는 昌王 때다. 江陵帝를 폐위하고 고작 9 살인 昌을 옹립한 것은 韓半島로 천도하기 위해서였다. 천도 후 李成桂는 10 살인 昌王을 시해(弑害)했다. 어린아이를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恭讓王을 옹립해 3 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역시 폐위시키고 시해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과거에 동아시아의 天子國이고 大帝國이었다 해도 高麗가 쪼그라든 초라한 나라였다면,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를 원하지 않았다. 똑같이 蒙古에 정복됐지만, 중국 대륙 중앙에 떡 버티고 있는 高麗와 국체조차 보존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중국. 몽고는 티벳고원 북부는 여지없이 정복했지만, 권력투쟁에 몰입한 高麗와는 전쟁조차 벌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너무도 차이 나니까,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5 천년 天子國 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高麗史에 長安城을 차지한 전쟁 및 다수의 전쟁 기록을 누락시킨 것은 李氏朝鮮 이었다. 高麗가 연전연승한 기록을 내버려두면, 李成桂가 중국 대륙을 朱元璋에게 준 사실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李成桂는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는데, 아무 거부감이 없었다. 濊貊族 이었으니까. 단지 왕노릇만 할 수 있으면, 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고 서슴없이 날조한 것이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이 李成桂가 濊貊族 이었음을 몰랐을까? 李成桂가 濊貊族임을 알았든, 아니든 광대한 우리 영토를 포기하고 역사를 말살 하는데, 동참 했다는 점에서 鄭道傳, 權近 등 소위 李氏朝鮮의 開國功臣들은 모두가 매국노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같은 민족인 新羅에게로 갔고, 발기(發岐)는 百濟로 갔다. 하지만 鄭道傳과 權近 등은 일신의 영화를 위해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에게 영토와 역사를 모두 다 주었다. 李成桂는 1 만년 韓國史에서 제1의 賣國奴다.


▲ 백상루(百祥樓) 백상루는 평안남도 안주읍성 서북쪽에 서있는 루대이다. 안주는 백제 때의 석성이다. 고려 때 처음 세워진 백상루는 조선시기 1753 년 읍성의 면모가 완성되면서 고쳐 지어지고, 관서8경의 하나로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내려왔다. 백상루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수의 푸른 물결 굽이쳐 출렁이는데,
수(隋)나라 백만 대군이 물고기가 되었음이여.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되는구나.

(
薩水湯湯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哂餘
)

隋나라 백만 대군? 百濟와 高句麗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 이었을 때, 백만 대군을 보유했다. 티벳고원에서 백만을 거느릴 수 있는가. 10 만도 벅차다.

조준(趙浚 1346~1405)이 明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읊었다는 시(百祥樓賦詩)는 乙支文德을 칭송한 것이 아니라, 역사날조 작업이 성공하고, 李成桂와 朱元璋이 땅을 나눠가진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지었다. 李成桂와 趙浚에게는 乙支文德 조차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蒙汗도 차지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를 蒙汗의 동족 李成桂는 역사날조 하나로 차지한 것이다.

 

三國史記는 明이 축소했다. 李成桂가 날조 중국사에 일치시켜 三國史記를 축소하기란 불가능하다. 李成桂에게 맡기면 어디를 어떻게 축소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사를 맞바꾼다 해도 축소 날조의 지침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날조 연호를 알아야 하고, 무얼 바꿀지 등등. 그 과정에서 三國史記의 천문기록은 빼버렸기 때문에 李成桂는 다시 三國의 天文記錄을 집어 넣어야 했다.

三國史記에는 온갖 인용 문헌이 등장한다. 소위 25 史는 시대구분만 해놓으면 책을 쓰기 전이라도 간단하게 이름 붙일 수 있다. 周書, 漢書, 三國志, 隋書...... 그 외 문헌은 우리나라 문헌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배구전(裵矩傳), 통전(通典), 회남자(淮南子), 논어정의(論語正義, 論語도 물론이고)는 원래 우리나라 책이다.

李成桂가 三國史記를 축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행한 사실만 알려져 있지, 三國史記를 수정했다는 기록이 없다. 高麗史 처럼 李氏朝鮮이 축소 했다면 6 번이나 수정 했다고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恭愍王以下事多不實宜更竄定 太宗實錄 恭愍帝 이후 왜곡과 날조를 더하고 李成桂에 관해서는 확실히 부풀렸다는 소리다)",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 잡히게 되었다(이씨조선이 史草대로 쓰지 않았다는 실토다)",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儒敎的이고 事大的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었다(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를 뒤바꾸었다는 소리다)", “이 부분을 實錄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實錄을 무시하고 썼다는 소리다)",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이때 우리나라에 귀화한 濊貊族 대부분을 우리나라 사람으로 둔갑시켰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내용을 더욱 날조했다는 뜻이다)",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체재를 바꾸면서 완전히 뜯어고쳤다는 소리다)"처럼. 高麗史를 날조하기 위해 늘어놓은 변명을 보면, 李氏朝鮮이 사실대로 역사를 쓰는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많은 李氏朝鮮實錄의 역사왜곡 사례들을 이 좁은 공간에 늘어 놓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 http://www.jeongdoryeong.net/josun_sillok11.html )를 참조하기 바란다.

李成桂 즉위와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해야 하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李氏朝鮮 중간에 느닷없이 三國史를 축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李成桂는 高麗의 황위를 빼앗느라 바빴기 때문에 朱元璋이 三國史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三國의 正史書는 놔두고 三國史記만 축소했다. 이렇게 축소된 三國史記는 李成桂 즉위 3 년에 간행됐다.

高麗史는 高麗에서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고, 李氏朝鮮이 창작했다. 高麗 역사책은 實錄과 史草 밖에 없었다. 三國史記 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李氏朝鮮은 高麗史를 편찬한다는 구실로 高麗史를 축소할 수 있었다. 李成桂의 즉위(1392)와 동시에 작업에 들어가 1451 년에 일단 완성 되었다. 60 년이나 걸렸다. 高麗實錄과 高麗 末의 史草를 기본 자료로 했다면서, 무려 6 번이나 고쳐 썼다.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유교에 입각하여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를 中奴에 대한 事大主義 국가로 만든 것이다.


▲ 大明混一圖



역사를 날조 하려면, 그에 선행해서 지명을 밀어낸 날조지도 부터 만들어야 한다. 中土의 지명을 밀어낸 시기는 李成桂가 실권을 잡은 高麗末 1389 년으로 추정된다. 1389 년, 朱元璋은 高麗 지도를 보고 大明混一圖를 만들었다.

동계의 화북 15 주가 몽고에 소속되어 쌍성총관부가 수립되었다.(살아 있는 한국사)

高麗 말 까지도 黃河가 金沙江이었다. 黃河를 밀어내 華北이라 쓴 날조지도를 보고 李氏朝鮮이 華北 15 州라 쓴 걸까. 일반적으로 高麗의 和州지역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고 말한다. 恭愍帝는 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和州牧을 설치했다.

周나라에서 지도를 제작한 관원이 직방씨(職方氏)? 周나라의 시조 后稷도 우리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周나라는 지도 제작을 하지 못했던 미개소국이다. 티벳고원 북부를 백 여개의 제후국에게 나눠주고 周王室은 고작 땅 한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지도를 제작한단 말인가. 周書? 먹고 살기에도 급급했을 周王이 무슨 史官을 두고, 史草를 쓴단 말인가. 明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고, 우리나라 지도를 베껴서 周나라가 쓰고 그렸다고 한 것이다.

宋이 만들었다는 화이도(華夷圖 1137 년에 만들었다)를 보면, 宋이 있던 티벳고원 북부는 대충 그리고, 우리나라 땅만 자세하다. 金沙江, 난창강(瀾滄江) 너머에는 지명이 몇 개 없다. 宋이 만든 지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明이 만들었다는 大明混一圖 역시 마찬가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대한 애착심이 없었던가. 高麗의 지도를 베끼면서 韓半島를 생략했을 뿐이다.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 明은 역사 맞바꾸기에 앞서 지명부터 밀어내야 했다. 그때 만든 것이 바로 華夷圖와 大明混一圖이다.

 

朱元璋과 李成桂 사이에 밀약이 이루어지자마자, 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 부터 朱元璋은 서둘러 지명을 밀어낸 중국 대륙 지도부터 만들고, 李成桂는 韓半島에 중국 대륙의 지명을 우겨넣었던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權近 外 1402)의 발문에는 權近이 蒙汗의 세계지도를 참고했으나 韓半島와 日本이 소략하므로 그것을 첨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蒙汗이 세계대제국을 건국했다면, 高麗 역시 아라비아(이 땅의 사학자들은 아라비아에서 한반도까지 航海를 해서 무역을 했다고 주장한다. 아라비아인들이 그처럼 항해에 능숙 했다면, 무역이 아니라, 세계정복에 나섰다. 西洋도 大西洋을 간신히 건너자마자 식민지 정복에 나섰다) 등과 세계 무역을 했다.

高麗는 세계 탐험까지 했던 나라다. 蒙汗은 천막 하나가 유일한 재산인 유목민족이다. 色目人이 아니라 雙城摠管府 땅의 高麗人이 蒙汗을 위해 일했다. 高麗人이 일한 과실이나 향유하던 蒙汗이 세계지도를 만들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원 지도는 高麗 지도니까, 韓半島가 소략일 턱이 없다.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원 지도를 지명만 바꿔치기해서 그대로 베낀 지도다. 결국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나 華夷圖, 大明混一圖는 우리나라의 세계관을 반영한 지도였던 것이다.

▲ 순우천문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1247)는 高麗의 천문도다. 지도도 못 만든 中奴가 天文圖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淳祐天文圖에는 종대부(宗大夫 : 韓半島에 나타나는 고유의 별자리)가 없고 韓半島는 독자 천문체계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916 년 부터 대대로 전왕조로 부터 천문대를 물려받아서 천문관측해온 나라다. 淳祐天文圖는 중국 대륙에서 제작한 천문도였던 것이다. 長安城(開京)에서 제작한 천문도일 것이다.

1389 년 高麗 지도를 베껴 大明混一圖를 만들고 나서 역사책 고치기에 들어갔다. 맨 먼저 날조한 것은 中國史가 아니고, 三國史記였다. 威化島 회군한 李成桂가 江陵帝를 내쫓고 내세운 昌王, 恭讓王은 합해 4 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축소한 三國史記는 李成桂 즉위 3 년에 간행됐다. 그러고서는 金富軾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三國史記 편찬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6, 7 년은 三國史記를 축소 하기에도 촉박한 시간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中國史는 明이 날조하고, 高麗史는 李氏朝鮮이 맡아 축소했다. 高麗史는 1451 년에 일단 완성했다. 60 년 만이었다.

“우리나라가 三韓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 高麗史).” 그렇다면 배달, 朝鮮 시대에는 中奴가 우리나라를 성실 근면하게 섬겼다는 소린가. 아니다. 李成桂는 三國史, 高麗史는 축소하고, 한단사는 말살했다. 그래서 이유(李瑈 1417~1468 李氏朝鮮의 世祖라는 濊貊族), 이광(李晄 1450~1469 李氏朝鮮의 睿宗이라는 濊貊族), 이혈(李絜 1457~1494 李氏朝鮮의 成宗이라는 濊貊族)이 그처럼 한단사 말살에 혈안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 역시 한단사, 三國史, 大震國史 등을 대대적으로 수거, 분서했음은 물론이다.

한단사(桓檀史)까지 축소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또한 일개 제후국의 역사가 유구할 수는 없으니 배달과 朝鮮은 존재 자체를 부정키로 했다. 한단시대 中土에는 독자문화란 눈 닦고 찾아봐도 없었다. 중국이 문화라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필히 한단사를 지워야 했다. 그래서 한단사는 李氏朝鮮 왕조 대대로 수거, 분서했던 것이다. 자신의 國號는 朝鮮 이라고 하면서,,,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李氏朝鮮은 날조 역사책에 부합하지 않은 모든 우리나라 역사책을 焚書하고, 明 으로부터 받은 날조 역사책을 보급했다. 그 외에도 李成桂는 배달 이후 축적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수많은 우리나라 문헌을 明에 건네 주었다. 온갖 책을 다 줬다. 文明大國 中國에 문학서적이 없어서는 안되지. 그래서 新羅人이 桂林을 두고 읊은 詩도 唐나라인의 작품으로 둔갑했다. 저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唐宋八大家들의 주옥같은 싯귀들을 기억하는가? 기막힌 현실이 아닌가?

濊貊族의 나라라 李氏朝鮮은 5300 년의 한민족 국가의 유산을 거식증(拒食症) 환자처럼 소모해댄 나라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高句麗의 천문도를 중앙부만 고쳤다. 그 천문관측 기술조차 우리나라가 물려준 것이다. 거북선(龜船)은 高麗 때의 전함이다. 火砲, 走火, 지화통(地火桶), 神機箭, 火車 모두 高麗 때 만들었다. 백자(白瓷)는 高麗 시대에 이미 시도됐다. 한글조차 高麗가 만든 문자다. ......

심지어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동안, 한문명이 퇴보했다.

 

당시 삼포(三浦)의 교역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산 비단이었다. 조선 상인들은 명나라의 비단이나 그 원료인 백사를 들여와 삼포 왜인에게 팔아서 짭짤한 이익을 남겼다.(역사스페셜 3 권)

慈烏支 한웅의 中土 정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淮垈에 자리잡고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역대 檀君이 양잠(養蠶)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비단 만들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 중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비단길 무역을 통해 西方과 무역했다. 비단이 주수출품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조차 비단길이었다. 李氏朝鮮은 黃河 이남을 明, 淸에 주고 韓半島로 내빼면서 비단제조 기술자까지 내팽개치고 온 탓에 비단 제작 기술까지 퇴보하고 말았다. 유구한 세월 선조들이 개발하고 개량해온 비단제조 기술까지 망각해 미개 明에 구차하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明의 비단 제조는 중국 대륙에 남은 우리민족이 맡았다.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에서 “마한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 한 것 또한 양잠법이 고대 동이족에서 시작됐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해가 뜨는 동방에 거대한 뽕나무인 부상수(扶桑樹)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거대한 뽕나무가 신목(神木)으로 있는 동방을 부상국(扶桑國)이라 이른 것도 고대 양잠기술의 전래와 무관하지 않다.(실증 한단고기)

해뜨는 동방은 東夷族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朝鮮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뽕나무를 神木으로 삼을 만큼 비단 제작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高麗史를 올린 모 사이트에 보니까, “神木으로 東海 중에 多生하여 兩水가 同根으로 相依相存하므로 扶桑이라 하며 日出處라고 하였는데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서는 扶桑國 즉 日出國이라 하는 뜻으로 日本을 말한 것임”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산해경 해외동경(山海經海外東經)은 보면서 “倭는 연(燕)에 속한다”고 한 구절은 못 봤던가? 이 당시, 중국의 해외는 바로 중국 대륙이었다. 중국 대륙 대부분을 차지한 우리나라가 金沙江 너머에 있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중국의 東海는 金沙江 이었다. 중국 대륙의 해뜨는 바다는 黃海는 될 수 있어도 韓半島 東海는 될 수 없다. 따라서 日本은 절대 扶桑國이 될 수 없다. 웃끼는 것은 일본역사날조의 대표격인 새역모에서 발간하는 日本史의 출판사 이름이 후쇼사(扶桑社)라는 이름이다. 왜들 친일에 목말라 하는가?

부상수(扶桑樹)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다. 그 扶桑樹가 있는 나라가 동쪽에 있어 日出處라 했다. 우리나라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민족을 東夷族이라 했다. 그 원뜻은 오랑캐가 아니고 동쪽에 사는 어진 종족, 근본인 종족이다. 오늘날 옥편을 찾아보면 夷는 ‘오랑캐, 동방동족,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평평하다, 평탄하다, 깎다, 온화하다, 안온하다, 기뻐하다, 크다’라는 뜻이 있다.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랑캐, 잘못, 상하다, 죽이다, 멸하다 등은 中土의 미개 오랑캐 華夏族이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 나온 후에 玉篇에 추가한 것이다.

倭에는 5 세기 말에야 양잠 기술이 도입됐다. 新羅人 진하승(秦何勝)의 선조가 건너가 양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양잠기술이 서툴렀는지 李氏朝鮮에 조공무역 하면서 15 세기 후반 이전 까지는 비단을 주수입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절대 扶桑國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그 어느 나라도 日本을 日出國이라 불러준 예가 없다.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심지어 면직물 제조법도 중국이 개발 했다고 날조했다. 그러면서도 “東夷族은 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는 後漢書의 기록을 三國志 에서는 “馬韓 사람들은 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曉蠶桑作縑布 三國志)”로 고친 것으로 만족했다. 머리가 안돌아가서 그렇다. 심지어 日本에도 솜이 있었다.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주동이 되어 신라를 침공하려 했을 때, 日本 만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어 大震國을 끌어 들이려고 했다면서 후지와라는 大震國의 사신 양승경(楊承慶)에게 솜 1 만 둔(屯)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사신에게는 관례적으로 솜 300 둔을 주었다고 했다. 大震國과 연합해 新羅를 침공 하겠다는 계획은 사실이 아니지만, 솜은 있었다. 그 솜이 어디서 건너 갔겠는가. 우리나라다.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오지 않았다. 티벳고원 북부에 사는 中奴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붓뚜껑에 木花씨를 넣어간 것이다. 중국이 처음부터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날조하다 보니까, 종이 위에서나마 우리나라 사람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가야 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이 白衣民族이라고? 신이경(神異經)에는 “동방에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들은 모두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검은 관을 쓰고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채색한 옷을 입고 있다(東方有人男皆縞帶玄冠女皆采衣)” 했다. 白衣民族은 中國과 日本이었다. 원래 물들이지 않은 천은 흰색이다. 채색할 여유조차 없어서 흰색 그대로 입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中奴는 “신자의 두 배의 ‘흰’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것이다.

◀ 각저총(角抵塚)에서 발굴된 삼족오(三足烏) 벽화

까마귀가 흉조(凶鳥)라고? 三神五帝本紀에는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하며 또 천왕랑(天王朗) 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烏羽冠)를 하사받는다(源花稱女郞男曰花郞又云天王朗自上命賜烏羽冠)”고 했다. 우리나라 고분 벽화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까지 나온다. 檀君世紀에는 8 世 檀君 우서한(于西翰=烏斯含) 때 “甲寅 7 년(B.C. 1987)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 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고 했다. 세발 달린 까마귀(三足烏)는 우리나라의 聖鳥 이므로 비범한 인물이 檀君을 찾아왔다는 뜻이다.

 


◀ 이성계(伯顔帖木兒 1335∼1408) 초상

우리나라는 高麗 시대까지 坐式生活을 하지 않았다. 立式生活을 하자면 좌식생활시 보다 더 많은 생활공간이 필요하다. 탁자에 의자, 침상 그리고 가구에 부딪히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東北亞로, 韓半島로 축소되다 보니까, 집 크기도 축소 되어야 했으므로 부득이하게 선택한 생활방식일 것이다. 무엇보다 濊貊族은 坐式生活을 했다. 濊貊族은 유목민이라 천막이 곧 집이었다. 아무리 크다 한들, 건축물 보다 천막이 클 수 없고 또 이동이 필요하면, 천막을 걷고 간단히 짐을 꾸려야 했다. 그러므로 濊貊族은 입식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종족이다. 우리나라는 濊貊族의 풍습을 받아들인 결과, 좌식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묘청(妙淸 ?∼1135)이 建元稱帝 하자고 했다는데, 高麗, 아니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建元稱帝한 大帝國이다. 妙淸은 또 金汗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高麗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며 西京으로 천도 하자고 했다는데, 이미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高麗에 조공하고 있었다. 妙淸의 亂은 中奴의 亂을 우리나라 역사로 바꾼 것이다. 三國史記의 저자 金富軾을 事大慕華者로 몰아가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한 것은 李氏朝鮮이 아니라 金富軾 이라고 덮어씌우기 위해서 中奴史를 高麗史로 날조한 것이다. 妙淸은 상당히 미신적인 인물로 나오는데, 中奴의 未開王은 혹할 수 있어도 科學의 나라 高麗의 皇帝가 넘어갈 수는 없다. 妙淸은 中土에서 권력다툼 했던 인물이다.

李成桂가 역사를 축소시킨 덕에 中國은 萬里長城 이라는 거창한 건축물을 벽돌 하나 안 쌓고 만들어냈다. 明의 날조사에서 雙城摠管府의 위치는 實史와 동일하다. 雙城摠管附는 長城 이남에 설치했다고 했다.

李氏朝鮮이 淸에 영토를 빼앗길 때마다 高句麗長城도 종이 위에서 滿州로, 韓半島 이남으로 밀려났다. 상상 속에서 쌓았기 때문에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丙子胡亂(1636 )으로 桑乾河 이서까지 빼앗기자, 雙城摠管府는 滿州에 그린 날조 高句麗長城 이남으로 옮겨왔다. 李氏朝鮮이 韓半島 이북을 다 빼앗기자, 高句麗長城은 東鴨綠江 이남으로 밀려났다. 雙城摠管府도 長城을 따라 움직였다. 雙城摠管府에 있다고 날조한 李成桂의 고향도 함경남도가 되었다.

역사를 축소하면 끝내 영토까지 다 상실해야 한다는 진리를 李成桂나 鄭道傳 등은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皇位를 찬탈 하려는 李成桂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종이 위에서 遼東을 상실한 李成桂가 高麗의 지배층을 이끌고 韓半島로 대이동하자, 朱元璋과 中奴가 티벳고원에서 빠져나와 長安城으로 들어간 후 우리나라의 복식으로 정비했다. 그걸 두고 “明의 복식은 唐, 宋代에 이미 수립 되었던 복식제도가 元代에 문란해 졌었기 때문에 건국 후 漢族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 되었는데 이 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明史 輿服條 참조)”고 기술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服飾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복식과 차이가 없다. 티벳고원의 지배층도 唐 때 부터 우리나라 복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李成桂가 高麗 皇位를 찬탈 했으니까 李氏朝鮮도 高麗의 복식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래서 李成桂는 百濟의 服飾을 기본으로 삼았다.

티벳고원의 中奴가 우리나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民生安定을 위해 인구 과밀한 江南에서 황폐한 江北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 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南에서 北으로의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났다”로 기술했다. 그러나 明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으니까, 江北으로 농민을 이주시킬 수도,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날 수도 없었다. 淸 이후에 날조한 대목이다.

朱元璋의 정치적 반대세력이라! 中奴를 억압하고 멸시하는 蒙汗의 지배에서 中奴를 해방 시켜준 것이 朱元璋이라 하지 않았는가. 朱元璋이 蒙汗을 내쫓고, 中土를 통일 했다면 政敵이 있을 리 만무하다. 朱元璋에게 반대하고 싶어도 밀어주는 세력이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비록 협박으로 달성한 것이라 해도 朱元璋은 中奴를 티벳고원 북부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다.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던 中奴가 어엿한 집에서 번듯한 옷을 입게 되었는데(이를 두고 庶民生活이 향상 되었다고 기술했다),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다가 번듯한 집안에서 그 짓을 하게 되었는데, 반대자가 나올 수 있는가. 미개 中奴가 우리나라 영토로 기어들자, 우리민족이 반발한 것이다.

李成桂와 高麗 지배층이 떠난 중국 대륙에는 여전히 우리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족이었다. 朱元璋 이하 中奴들은 高麗가 전쟁에 패했다고 속이고 들어 왔지만, 우리민족이 中奴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어째서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가 하잘 것 없는 中奴 따위에게 패했는지 납득이 될 리 없다. 朱元璋의 政敵은 우리민족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表裏不同한 인간 이었다. 한단사를 말살 하면서도 朝鮮을 國號로 쓰고, 大帝國 高句麗를 미개 中奴의 제후국으로 만들고서도 高句麗 天文圖를 구하기에 혈안이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한단 역사책 등을 수거해서 王宮 깊숙이 감추었다. 日本도 한단사와 우리나라 正史書를 모조리 숨겨 두었다. 중국도 우리나라 역사책을 기밀장소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개 中奴가 韓國史와 中國史를 뒤바꿀 수 있는가. 朱元璋 조차 까막눈 이었다. 한편 에서는 봉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朱元璋에 협력하여 韓國史를 中國史로 바꾸었던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 高麗史)”는 四不可論은 나중에 날조했다.

우선 중국은 단 한번도 大國이 아니었으며, 明도 마찬가지였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땅을 넘기기 전 까지는 明은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였다. 大國은 우리나라였고 小國은 中國 이었다. 그러므로 中國이 高麗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三國時代부터 여름철에 수많은 전투를 해왔다. 이상하게도 우리 역사를 장식하는 중요한 전쟁은 여름철(음력 4, 5, 6 월. 중국 대륙에서는 여름이 한반도보다 빠르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반론은 威化島 回軍 이전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火藥 발명국 高麗는 활을 못 쓰면 大砲, 走火, 鐵砲 등을 사용하면 된다.

遼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倭寇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倭寇는 중국 대륙을 침범하지 않았다. 韓半島에서만 노략질했다. 李成桂는 遼東을 넘어 遼西까지 갔다. 西鴨綠江을 건너 泰川(富江)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遼東征伐이라는 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