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발표한 뒤 경무대(지금 청와대)를 떠나서 이화장으로 갔다. 그는 수석국무위원이던 외무부장관 허정에게 과도정부 구성을 맡겼다.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4월 혁명이 심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이승만이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나도록 주선하는 등 혁명 과업 수행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을 보였다.

5월 2일 국회 본회의 결의에 따라 ‘국회위원선거법안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2일 선거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9일에 치러진 선거는 야당이던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민주당은 민의원 233석 가운데 175석, 참의원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헌법에 따라 8월 12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선출했다. 윤보선은 국무총리 후보로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17일에 열린 민의원의 국무총리 인준 투표에서 과반에 3표가 못 미치는 득표로 인준을 받지 못했다. 두 번째로 지명을 받은 장면은 찬성 117표, 반대 107표, 기권 1표로 총리가 되었다.


장면이 구성한 내각에는 4월 혁명 이전부터 <사상계> 동인이던 김영선이 재무부장관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4·19 이후의 혼란기에 틈만 나면 사상계사를 찾아와서 장준하와 함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그 무렵 <사상계> 동인들은 4월 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을 논의한 끝에 ‘국제연구소’를 차리기로 합의했다. <사상계> 편집위원들을 주축으로 학계, 언론계, 문화계, 경제계의 전문가 30여 명이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사상계사에 설치된 국제연구소는 첫 사업으로 연구위원들에게 비용을 지급하고 10여 개 부문에 걸쳐 논문을 작성하게 한 뒤 <사상계> 특별부록으로 출판했다. 연구소는 다양한 논의를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검토한 것은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국제연구소는 ‘국토의 개발이란 관점에서 치산, 치수, 항만, 도로,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의 이용과 개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 논문들을 <사상계>에 실었다.


어느 날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장준하를 찾아와서 “민주당 정권이 국토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데 그 사업을 맡아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영선은 정부조직법을 고쳐서 무임소장관이 그 사업을 주도하도록 할 계획이니 무임소장관을 맡으라고 장준하에게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이유는 국토건설사업은 관이 주관해서는 안 되고 반관반민 단체를 구성해서 범국민운동으로 해야 하며, 자신은 <사상계>를 버리고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선은 “당신은 정신 물질 양쪽의 일을 모두 할 수 있지 않으냐,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성공한 하나는 남지 않겠느냐”면서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사상계> 동인들도 김영선의 의견에 찬성했다. 특히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로서 <사상계> 동인이던 유창순도 그 일을 맡으라고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마지막으로, 사상계사를 운영해오면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영선은 국내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사상계>가 빚더미 위에 앉아 있다는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장준하는 그렇게 된 내력을 설명했다. 사상계사는 자유당 정권 시기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보도사진으로 유명한 <라이프>를 국내에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사업은 한때 제법 흑자를 내기도 했으나 자유당 때 600 대 1이던 달러 환율이 민주당 정권의 환율 현실화 정책 때문에 1100 대 1로 바뀌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본사로 송금해야 하는 돈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상계사는 3천만 환이라는 부채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상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거액의 빚이었다.


그런 사정을 듣고 난 김영선은 장준하가 진 빚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의 시책 때문에 생긴 불가항력의 소산이라고 말하면서 그 채무는 재무장관인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처리해 줄 테니 국토건설사업을 꼭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 장준하는 그 사업을 반관반민으로 하되, 자신은 순수한 민간인으로 참여할 것이며, 앞으로 적격인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 책임을 지겠다는 조건으로 그 일을 맡기로 했다.

국토건설본부장은 총리인 장면이 겸임했고, 장준하는 그 밑의 기획부를 이끌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본부장대리 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상계> 편집위원이던 장군 출신의 신응균, 교수 이만갑, 일제강점기에 한강대교를 설계한 것으로 실력이 널리 알려진 최경렬이 각각 관리, 조사연구, 기술 부서를 맡았다. <사상계>팀이 그 일을 완전히 책임지게 된 것이었다.

   
1960년 사상계 시절 사무실에서. ©장준하기념사업회

국토건설본부의 관리, 기술 부문에는 현역과 예비역 군인들을 상당수 기용했다. 그 무렵 군 내부에서 일어난 하극상 사건에 관련되어 예편당한 장교들이 그 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했는데, 그 가운데는 예비역 육군중령 김종필도 들어 있었다.

장준하는 그의 이력서가 자기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는 아직 초창기라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 그들의 기용이 천연되었던 것이지만 그때 그 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여 그들을 곧 기용시켜 함께 일을 했던들 5·16 군사쿠데타 같은 건 이 땅에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가 다 국운인 것만 같다.”(<장준하문집 3>, 37쪽)


국토건설본부가 맨 처음에 한 일은 대학 졸업자 가운데 군 복무를 마친 2천여 명을 공개 채용으로 뽑는 일이었는데 무려 1만여 명이 지원을 했다.

장준하는 그들을 일정 기간 훈련시켜 국토건설 요원으로 전국에 배치하고, 온갖 보고서들을 점검하고 전국 규모의 사업을 기획하느라고 <사상계>에는 ‘권두언’을 서너 번밖에 쓰지 못했다.


그들 대학 졸업자 2천 명 ‘특공대’의 역할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일만 하고 말라면 누가 거기에 만족하고 참여할 것인가. 장준하의 계획은 이들을 국가 공무원이 되기 위한 예비 수습 기간을 거치는 것처럼 6개월 동안 각처의 농어촌에서 봉사하며 일하게 한 다음 다시 불러들여 중앙관서에 기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간 전국을 순회시켜 건설사업 현황과 지방 실정을 함께 파악하게 하고 3년 후부터는 우선 지방의 군수 자리부터 모두 그들 국토건설 정예 요원으로 대체시킬 획기적인 안을 세웠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294쪽)


장준하와 함께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했던 이만갑(사회학자, 서울대 명예교수)은 ‘국토건설사업과 장준하 선생’이라는 글에 그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국토건설 요원들은 국토건설 사업이 착수되기 이전에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동요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장차 받게 될 처우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그러한 동태를 알았는지, 장준하 기획부장은 서울대학교의 문리대 강당에서 있은 국토건설 요원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자기 자신 요원들과 같이 빵조각을 저녁식사 대신 씹으면서 밤늦게까지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성심성의 소신을 피력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동요하여 이탈할까 생각했던 요원들도 마음을 돌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잡고 나라를 위해 한 번 일을 해보겠다고 다짐할 만큼 요원들간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고 한다.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 50년과 장준하>, 106쪽)


그러나 장준하의 원대한 기획은 1960년의 5·16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가 이끌던 ‘군사혁명위원회’가 국토건설본부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쿠데타세력은 장면 정부의 정책 가운데 국토건설사업만은 그대로 계승해서 시행한다고 포고문에 밝혔으나 그 사업의 정신적 바탕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장준하가 주도하던 국토건설본부가 우수한 인력을 뽑아 현장으로 보낸 것과 정반대로 쿠데타 세력은 깡패와 불량배들을 잡아들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우는 경제건설을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농업국으로 경제건설을 도시건설부터 한 나라는 아마 이 세상에 우리나라 하나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라 경제의 바탕이 농촌이니만큼 당연히 그 농촌부터 일으켜야 된다.
농촌이 부유해진 후에 그 과실로써 도회 건설을 하든지 공장을 짓든지 하는 것이 순서다. 전후 일본, 대만,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모두 그런 순서로 시작하여 오늘날 부를 누리고 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제일의 공업국으로 부를 누리고 있지만 그 기초는 농사부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며 남부의 목화농사가 아니었던들 절대로 오늘의 미국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공업이 농업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부유한 경제적 기초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농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제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는 공업화보다도 오히려 먼저 농촌의 부유화를 위한 강력한 시책이 최상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장준하문집 3>, 39쪽)


장준하가 국토건설본부 일을 하는 동안 김영선은 사상계사의 부채 3천만 환 가운데 1천만 환을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2천만 환을 갚지 않아 사상계사는 빚더미 위에서 허덕이다가 5·16쿠데타를 만나게 되었다. 장준하는 김영선한테서 받은 1천만 환 때문에 장차 ‘부패언론인’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