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정부가 계획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을 가로챈 박정희. | 박정희(일본군인)
2012.08.27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이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장면 정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 즈음에는 학생시위나 이익집단들의 시위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어,
사회안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의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장준하가 주도하는
국토건설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들에게 5.16 쿠데타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 정부가 시작한 것을 ‘표절’한 것이고, ‘새마을운동’은 장준하의 국토건설사업을 변용한 것이었다.
장준하는 민주당 정권 참여에 대해 언론인으로서는 ‘외도’였고
‘잘못’이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국토건설사업 참여는)나라를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내가 원래 표방하고 잡지를 시작한 그 언론의 본도에서는 일탈된 외도임이 틀림없다. …언론이란 항상 민중편에 서서 치자의 그릇된 정치로부터
그 민중을 보호하고 치자의 비정을 가차없이 고발하고 또한 민중을 대변하는 것이 본질이지만 사실 그 때는 대다수의 국민이 그 정권(민주당 정권)을
환영하였고 소망을 걸었던 시절이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주석
10)
이젠 박정희 대통령이라 부를 필요도 없다.
살인마 박정희씨는 독립군 장교 장준하를 제거하고
장준하 선생님이 오로지 가난한
국민을 위해 기획한 국토건설사업 기획안을 훔쳐서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나라를 발전시키는척
하였다.
즉 장준하 선생님을 짓밟아 국민의 영웅이 되어 오늘날까지 추앙을
받았지만
미련한 국민들은 그 정확한 진상을 알아 역사를 새롭게 보아야만할 의무가
있다.

사진에서 가운데 뼈부분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지름 7 CM의 쇠파이프로 위에서 힘껏 내리친것으로
보인다.
저것이 타박상이라고 하는 국립검사소는 뒷구멍으로 의사가 된 인간들만
있는가???
너무나 훌륭하신 분들을
반쪽바리 색히들이 도륙질한 지난 역사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출처 http://blog.daum.net/kim0909/18285609
제 2 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60.9~61.5)
한국사 잡글
/ 역사글 2013/06/01
6.25 전쟁을 지나면서 경제가 크게
곤핍해진 한국은 1950년대에 극적인 원조를 받으면서 전쟁에서 입었던 피해를 거의 다 복구하였으며 1956~7년이 되면 경제가
성장으로 반전하기 시작했다고도 평해집니다. 1958년에는 낮긴 하지만 2.7%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58년부터 원조가 급감하는 등
여건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경제 정책을 다룰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어느 정도 성장은 가능했다는
평가를 내릴 순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세우기로 하고 그 주에서도 전반 3개년
계획(1960~1962년)을 작성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국 정부로서는 최초로 구상한 경제개발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1960년
4월에 국무회의에서 각종 계수까지 확정짓고 의결되었으나 4월 혁명에 맞닥뜨리면서 백지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장면 정권에 들어와서 경제개발 계획은 좀 더 정돈되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 마침내 실시 전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자유당 시절의
부흥부에서 작성한 3개년 계획안에 바탕하여 신정부는 새롭게 5개년 계획(1961~1965년)을 짜고 소요 예산까지 편성했습니다.
계획안의 구체적인 자료는 발표된 적은 없었으나 계획의 기조, 전략, 추진 방식은 장면 총리나 김영선 재무부 장관의 1961년도
예산안 제출 당시 시정 연설과 제안 설명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밝혀진 장면 정부의 5개년 계획 지침은
"새로운 장기 개발 계획은 정부가 정책 수단을 가지고 추구할 수 있는 부문에 중점을 두고 그와 관련된 민간 부문의 자발적 활동을 유도할 수 있도록 한다"
는
것으로서 각 부문 별로 투자 소요액을 분리 계상하되 총 투자 가능량을 감안해 우선투자 순위에 따라 각 부문별 투자 분배를
책정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계획은 자유당 정부에서 균형적 성장을 지향했던 것과 달리 개발 우선순위에 따른 파급효과가 큰
부문의 집중적 성장을 꾀하는 한편 민간 부문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이 같은 "정부의 의도적 유도"라는
정책 의도는 군사 정부로 가서 "지도받는 자본주의"라는 말로 바뀌어 계승되었습니다.
2공화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계획안의 개발 전략은
1. 전력 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와 비료, 시멘트, 정유, 철강 등 수입 대체 산업의 건설
2. 농어촌 개발을 종합적으로 추진, 그 생산력의 증대에 의한 농어촌 소득의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3. 유휴자원의 활용, 특히 유휴 노동력의 생산적 흡수와 토지 등 자원 이용도의 증진
4. 도로, 항만, 철도 등 수송력의 확보와 기간산업의 확충 및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등
이었습니다. 이같이 당시 정부는 산업기반의 구축에 중점을 두고 이것을 위해 민간기업 참여를 최대화시키는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유휴자원의 활용은 실업자 구제와 토지 등 자원 이용도를 증진시켜 생산성 향상을 추구한 것으로 그 추진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방대한 규모의 국토건설사업이었습니다. 부흥부 기획국장을 역임했던 이기홍씨는 이러한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
장면 정부는 완성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다만 발표 직전에 쿠테타를 당해 국민에게 알릴 기회를 놓쳤을 따름이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일부 수치만 바뀐 채 골격이 쿠테타 세력에게 넘어 갔고 군사정권은 이를 자신의 작품인 양
발표한 뒤 그대로 실천했다. 따라서 60년대 경제성장의 밑그림은 장면 정부가 그렸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9월,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한편으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정부 시책으로 선택한다고
공표하고 재원조달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였습니다. 이 5개년 계획은 그때까지 산업개발연구원에서 연구, 작성했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을 기초로 성립했습니다. 자유당 정권의 3개년 계획과 민주당 정권의 5개년 계획의 실무자로 핵심적 역할을
맡은 김입삼(金立三, 전경련 부회장, 상임고문 역임)씨는 3개년 계획이 균형성장 이론에 입각해 각 부문의 균형적 성장이라는 형식에
치우친 반면 민주당 5개년 계획은 전략부문 중심 투자 전략을 바탕으로 짜여졌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전력, 석탄, 비료,
시멘트, 화학섬유, 정유, 철강과 농업을 선정해 자원, 기술을 집중시키고 타 산업에 유도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하는 불균형 성장
전략이었습니다.
또한 장면 정부는
앞서 말했듯이 1960년 9월 말에 미국에 공식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소요되는 외화자원 4억2천만 달러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민주당 정부의 구체적인 경제, 행정개혁 방안과 환율 현실화, 한일국교 정상회의 추진 등을 외교문서 양식으로 담은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을 10월 4일에 미 국무장관 크리스챤 허터에게 약속했습니다. 미 정부는 이 계획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에 고무된 장 총리는 1961년 7월에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해 지원을 요청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한 61년 3월에 한국을 방문한 찰스 울프 박사에게는 2월에 발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요강>을
설명하고 그의 조언을 받아 계획을 다듬었습니다. 이 정상회담에 앞서 실무접촉을 위해 1961년 5월 미국에 파견된 재무부
예산국장 이한빈, 이재국장 김영록, 부흥부 기획국장 이기홍을 통해서 미국 정부는 "한국의 5개년 계획에 소요되는 비용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전해주었고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국무부)의 강력한 지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5월 15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국무회의에 보고되었으며 바로 그 날, 부흥부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종합경제회의에서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개진한 인사말에서 당시의 긴급한 사정과 정부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개략적인 계획의 요강을 살필 수 있습니다.
"
발전시설, 제강시설, 비료, 시멘트 등 기간산업의 기존시설에서 우리는 이북에 9대 1정도로 처지는 비참한 현실에 있다. 이북과의
경제 전쟁에 이 같이 뒤떨어진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문제다. 과거의 그릇된 점들과 과오를 타파하고 비현실적인 금리나 환율
또는 세율들을 현실화하겠다. 또 부정축재와 부패 특권을 조성하는 경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 경제적인 기회의 균등을 이루겠다.
정부는 과학적이고 계수적인 원칙에 근거해 면밀한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교육 계몽 선전을 통해 국민의 경제 활동이 정부의 경제계획에
합치도록 유도할 것이다.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잠간 참고 모든 외국 원조와 도입된 이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면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총
50만Kw짜리 발전시설을 갖게 되면 우선 급한 전기문제는 해결될 것이며 비료, 제철, 시멘트, 방적 등 중요 산업시설을 2년반
내지 3년 후에는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도 독립 국가로서 경제적인 모든 체계를 거의 갖추게 되고 이북 집단의 경제
성장에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능가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 우리의 경제적으로 자립할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김입삼 씨는
"5.16
군사정부를 포함해 정권이 이보다 명백히 이북과의 경제 경쟁에서의 승리 의지와 자립경제의 청사진을 제시한 일은 없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군사정부는 쿠테타 이후 두 달만인 1961년 7월 22일,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김입삼씨의 증언으로는
장면정부의 계획안을 그대로 가져갔다면서 "방법론은 물론이고 세부 항목까지 거의 같은데 달라진 부분은 성장 목표를 연 6.1%에서
연 7.1%로 높인 것뿐"이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이기홍씨의 경우도 "장면 정부가 작성한 기존 계획안을 검토하는 데만도
1년은 걸릴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개발계획은 1962년에 새로이 시작했고 63년 이후에 정부의 외화보유고 허비와 통화발행 남발로 위기에 처하여
개정계획안을 실시한 뒤 64-5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일본과 기타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증가하는 자본 투자에 힘입어 본 성장 궤도로
올라섰으며 이 때 비로소 기간산업 일부와 산업발전을 지탱할 사회간접자본의 본 확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감격에 찬
수사로서 일컬어지는 저 "한강의 기적"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참고 : 장면 정권과 민주당(이형, 삼일서적, 2005), 제2공화국과 장면(이용원, 대한매일 3-5회), 부흥부 발표 1차 5개년계획의 개요(1960.5.21, 한국경제반세기 정책자료집, 조갑제)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c586&logNo=40190227498
참고
[역사바로잡기]장면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도용한 박정희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088378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를 이끌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993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발표한 뒤
경무대(지금 청와대)를 떠나서 이화장으로 갔다. 그는 수석국무위원이던 외무부장관 허정에게 과도정부 구성을 맡겼다.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4월 혁명이 심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이승만이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나도록 주선하는 등 혁명 과업 수행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을 보였다.
5월 2일 국회 본회의 결의에 따라 ‘국회위원선거법안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2일 선거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9일에 치러진 선거는 야당이던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민주당은 민의원 233석
가운데 175석, 참의원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헌법에 따라 8월 12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선출했다. 윤보선은 국무총리 후보로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17일에 열린 민의원의 국무총리 인준 투표에서 과반에 3표가 못 미치는 득표로 인준을
받지 못했다. 두 번째로 지명을 받은 장면은 찬성 117표, 반대 107표, 기권 1표로 총리가 되었다.
장면이 구성한 내각에는 4월 혁명 이전부터 <사상계> 동인이던 김영선이 재무부장관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4·19 이후의 혼란기에 틈만 나면 사상계사를 찾아와서 장준하와 함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그 무렵
<사상계> 동인들은 4월 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을 논의한 끝에 ‘국제연구소’를 차리기로 합의했다.
<사상계> 편집위원들을 주축으로 학계, 언론계, 문화계, 경제계의 전문가 30여 명이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사상계사에 설치된 국제연구소는 첫 사업으로 연구위원들에게 비용을 지급하고 10여 개 부문에 걸쳐 논문을 작성하게 한 뒤
<사상계> 특별부록으로 출판했다. 연구소는 다양한 논의를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검토한 것은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국제연구소는 ‘국토의 개발이란 관점에서 치산, 치수, 항만, 도로,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의 이용과 개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 논문들을 <사상계>에 실었다.
어느 날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장준하를 찾아와서 “민주당 정권이 국토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데 그 사업을 맡아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영선은 정부조직법을 고쳐서 무임소장관이 그 사업을 주도하도록 할 계획이니 무임소장관을 맡으라고 장준하에게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이유는 국토건설사업은 관이 주관해서는 안 되고 반관반민 단체를 구성해서 범국민운동으로 해야 하며, 자신은
<사상계>를 버리고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선은 “당신은 정신 물질 양쪽의 일을 모두 할 수
있지 않으냐,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성공한 하나는 남지 않겠느냐”면서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사상계> 동인들도 김영선의 의견에 찬성했다. 특히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로서 <사상계> 동인이던 유창순도 그
일을 맡으라고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마지막으로, 사상계사를 운영해오면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영선은
국내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사상계>가 빚더미 위에 앉아 있다는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장준하는 그렇게 된 내력을
설명했다. 사상계사는 자유당 정권 시기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보도사진으로 유명한 <라이프>를
국내에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사업은 한때 제법 흑자를 내기도 했으나 자유당 때 600 대 1이던 달러 환율이 민주당 정권의 환율 현실화 정책 때문에
1100 대 1로 바뀌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본사로 송금해야 하는 돈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상계사는 3천만 환이라는 부채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상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거액의 빚이었다.
그런 사정을 듣고 난 김영선은 장준하가 진 빚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의 시책 때문에 생긴 불가항력의 소산이라고 말하면서 그
채무는 재무장관인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처리해 줄 테니 국토건설사업을 꼭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 장준하는 그 사업을 반관반민으로
하되, 자신은 순수한 민간인으로 참여할 것이며, 앞으로 적격인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 책임을 지겠다는 조건으로 그 일을 맡기로
했다.
국토건설본부장은 총리인 장면이 겸임했고, 장준하는 그 밑의 기획부를 이끌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본부장대리 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상계> 편집위원이던 장군 출신의 신응균, 교수 이만갑, 일제강점기에 한강대교를 설계한 것으로 실력이 널리
알려진 최경렬이 각각 관리, 조사연구, 기술 부서를 맡았다. <사상계>팀이 그 일을 완전히 책임지게 된 것이었다.
|
 |
|
1960년 사상계 시절 사무실에서. ©장준하기념사업회 |
|
국토건설본부의 관리, 기술 부문에는 현역과 예비역 군인들을 상당수 기용했다. 그 무렵 군 내부에서 일어난 하극상 사건에 관련되어
예편당한 장교들이 그 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했는데, 그 가운데는 예비역 육군중령 김종필도 들어 있었다.
장준하는 그의 이력서가 자기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는 아직 초창기라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 그들의 기용이
천연되었던 것이지만 그때 그 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여 그들을 곧 기용시켜 함께 일을 했던들 5·16 군사쿠데타 같은 건 이 땅에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가 다 국운인 것만 같다.”(<장준하문집 3>, 37쪽)
국토건설본부가 맨 처음에 한 일은 대학 졸업자 가운데 군 복무를 마친 2천여 명을 공개 채용으로 뽑는 일이었는데 무려 1만여 명이
지원을 했다.
장준하는 그들을 일정 기간 훈련시켜 국토건설 요원으로 전국에 배치하고, 온갖 보고서들을 점검하고 전국 규모의
사업을 기획하느라고 <사상계>에는 ‘권두언’을 서너 번밖에 쓰지 못했다.
그들 대학 졸업자 2천 명 ‘특공대’의 역할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일만 하고 말라면 누가 거기에 만족하고 참여할
것인가. 장준하의 계획은 이들을 국가 공무원이 되기 위한 예비 수습 기간을 거치는 것처럼 6개월 동안 각처의 농어촌에서 봉사하며
일하게 한 다음 다시 불러들여 중앙관서에 기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간 전국을 순회시켜 건설사업 현황과 지방 실정을
함께 파악하게 하고 3년 후부터는 우선 지방의 군수 자리부터 모두 그들 국토건설 정예 요원으로 대체시킬 획기적인 안을 세웠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294쪽)
장준하와 함께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했던 이만갑(사회학자, 서울대 명예교수)은 ‘국토건설사업과 장준하 선생’이라는 글에 그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국토건설 요원들은 국토건설 사업이 착수되기 이전에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동요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장차 받게 될 처우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그러한 동태를 알았는지, 장준하 기획부장은
서울대학교의 문리대 강당에서 있은 국토건설 요원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자기 자신 요원들과 같이 빵조각을 저녁식사 대신
씹으면서 밤늦게까지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성심성의 소신을 피력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동요하여 이탈할까 생각했던
요원들도 마음을 돌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잡고 나라를 위해 한 번 일을 해보겠다고 다짐할 만큼 요원들간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고
한다.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 50년과 장준하>, 106쪽)
그러나 장준하의 원대한 기획은 1960년의 5·16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가 이끌던 ‘군사혁명위원회’가
국토건설본부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쿠데타세력은 장면 정부의 정책 가운데 국토건설사업만은 그대로 계승해서 시행한다고 포고문에
밝혔으나 그 사업의 정신적 바탕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장준하가 주도하던 국토건설본부가 우수한 인력을 뽑아 현장으로 보낸 것과
정반대로 쿠데타 세력은 깡패와 불량배들을 잡아들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우는 경제건설을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농업국으로 경제건설을 도시건설부터 한 나라는 아마 이 세상에 우리나라 하나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라 경제의 바탕이 농촌이니만큼 당연히 그 농촌부터 일으켜야 된다. 농촌이 부유해진 후에 그 과실로써 도회 건설을 하든지 공장을
짓든지 하는 것이 순서다. 전후 일본, 대만,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모두 그런 순서로 시작하여 오늘날 부를 누리고 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제일의 공업국으로 부를 누리고 있지만 그 기초는 농사부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며 남부의 목화농사가 아니었던들 절대로
오늘의 미국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공업이 농업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부유한 경제적 기초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농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제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는 공업화보다도 오히려 먼저 농촌의 부유화를 위한 강력한
시책이 최상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장준하문집 3>, 39쪽)
장준하가 국토건설본부 일을 하는 동안 김영선은 사상계사의 부채 3천만 환 가운데 1천만 환을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2천만 환을 갚지 않아 사상계사는 빚더미 위에서 허덕이다가 5·16쿠데타를 만나게 되었다. 장준하는 김영선한테서 받은 1천만 환
때문에 장차 ‘부패언론인’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계속>
|
|
|
------------------------------------------------------------------------------
출처 http://blog.daum.net/kim0909/18285609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c586&logNo=40190227498
참고
[역사바로잡기]장면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도용한 박정희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088378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를 이끌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