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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Choi 2021. 4. 12. 23:38

시편 9편



1. 9편은 승리를 노래하는 감사의 시입니다. 어떤 승리입니까? 불의하게 자신의 피를 흘리려는 원수들(12), 자신을 미워하는 대적들 앞에 있는(13) 다윗은 거의 사망의 문에 이른 듯 보입니다(13). 그들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웅덩이(함정)를 팠고 그물을 쳤습니다(15). 다윗은 불의한 자들에게 억울하게 송사를 당하고 있습니다(4). 다윗은 이 모든 상황에서의 승리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감사하며’ ‘전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합니다.’(1~2). 다윗의 찬양과 고백과 간증은 자기 삶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자신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경험한 다윗은, 딸 시온의 문에서(‘딸 시온’은 예루살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주의 찬송을 다 전하겠다고 말합니다(14).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이 1,2절과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복된 경험을 주십니다. 당신은 지금 이런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2.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다(4)’는 말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나는 내 권리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계시고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변호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로이며 자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를 지키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종종 우리 자신을 속이고 우리의 이익(명예)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을 내지 말고 명분을 걸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을 섬기고 겸손히 행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3. 7-12절은 과거 시제에서 미래 시제로, 개인의 문제에서 세계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지만(7~8)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비와 은혜를 나타내십니다(9~12).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8)’라는 말은 사람의 법정에서야 어찌 되든, 하늘 보좌에서는 공의로 심판한다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다윗은 공의로 판단하시는 위대한 왕의 법정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성도는 이 공의의 법정을 생각할 때 모든 비방 속에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압제 당한 자의 산성이 되시고(9) 주의 이름을 알고 그를 의지하고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며(10),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무서운 심판자시지만 자기 백성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12).

 

4.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10).” 하나님에 대한 무지 보다 최악은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최고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빛 가운데 있기에 불신의 악심을 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입니다. 이 체험은 영혼의 닻 같아서 시련과 고난의 시간에도 방황하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지성입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있을 수 있지만 지식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해의 빛을 비추십니다. 지식 없는 맹목적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지식 없는 믿음은 보지 못하는 눈과 같습니다. 무지한 열심은 저주를 받습니다. 때로 성경은 믿음을 지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바울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지식을 따른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5.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14).”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찬송을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의 행하신 일과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너무나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 제가 형식적으로나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도록 제 마음 깊은 데서 터져 나오는 감격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를 언제나 사망의 문에서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마음에 있는 자는 참으로 복을 경험하고 누리는 인생입니다. 이런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얼마나 선하신지 알고, 평생 그분을 말하고 선포하고 전도하며 사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6. 다윗은 열방과 개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에 떨어지는지를 보았습니다(15~16). 그리고 장래 공의의 심판과 더불어 나타날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17~18). 그날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의 날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19~20). 그는 모두가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인생은 히브리어 단어 ‘에노쉬’인데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기도는 연약한 인생인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입니다. 전투가 너무 치열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 우리는 든든한 우군에게 구조를 요청합니다. 우군은 우리가 믿음으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부르짖어 신호를 보낼 때까지 매복하여 숨어 있습니다. 전투에서 완패를 당해도 전능하신 자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7. 사람의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심판 날에 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인생이 인생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다윗은 그것을 배웠고 알았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그것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살아가는 복된 은혜를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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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찬미(1-8절)

시편 9편과 시편 10편은 본래 하나였다가 2개로 나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히브리어성경과 히브리어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 그리고 <70인역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성경>에는 모두 시편 9편과 10편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편에는 표제어가 있는 반면에, 10편에는 표제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9편과 10편의 내용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입니다. 거의 2절씩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한시(漢詩)는 끝자리의 운자를 맞추지만, 히브리 시는 첫 자를 맞추곤 했습니다. 시편 150편 중에는 알파벳 순서로 된 시편이 모두 8개가 있는데, 첫 시편이 9-10편이고,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19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176절이, 8절씩 22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즉 시편 119편 1-8절까지 8절은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되고, 9-16절까지 8절은 히브리어 두 번째 알파벳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22번째 알파벳까지 하면 176절이 됩니다. 이러한 시를 ‘알파벳 시편’이라 부르기도 하고, ‘답관체 시편(Acrostic Psalm)’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를 쓰는 이유는 시편을 좀 더 잘 외고, 가르칠 때에 편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우리도 성경에 여러 가지를 외울 때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곤 하지 않습니까?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과 같이, 시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외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뭇랍벤에서 ‘벤’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벤-야민’입니다. 그 뜻이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벤허’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는데 벤허가 ‘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이란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NIV영어성경은 ‘아들의 죽음을 노래한 곡조를 따라(To the Tune of the Death of the Son)’라고 표제어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어떤 배경으로 지어졌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2가지를 결심을 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둘째는 ‘지존하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역사(행하심)를 노래하는 것이고,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론 노래한다는 것은 목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다윗의 찬양과 경배가 되는 셈입니다.
크고 작은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치유자이십니다.”, 또 인생의 질곡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삶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형편없는 나에게도 한결같이 대해 주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십니다.” 또한 내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경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 이유를 3-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다윗이 드리는 감사와 기쁨의 이유는 원수들이 도망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의롭게 심판하신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시며,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의 삶이 그만큼 정결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음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몸부림이 세상적으로는 재미없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지켜 줍니다.

또한 이방나라를 책망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지우시고,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을 치를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고, 사랑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무리 원하였더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주셨고, 그 바닥을 마른 땅과 같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노예였기 때문에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차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조상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읍을 무너뜨렸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9-20절)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오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요새가 되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에 하나님께서 요새가 되심을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전쟁이 발발하면, 전후방이 따로 없고, 높은 곳 낮은 곳이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투기로 공격을 하거나 대포나 미사일을 날리면 높은 곳에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달랐습니다. 높은 곳의 요새는 전쟁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참된 요새는 자연 지형에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깊이 압니다. 시편 27:10에서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자기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적은 없지만, 혹 그런 처참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13-14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자들로 인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었지만, 하나님의 이끌어주심과 건져올려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던 소녀를 고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와 박수가 아니라 심한 매질과 감옥에 갇힘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는 그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사도행전 16:2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억울합니다. 바울 일행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감옥 안이었습니다. 그것도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찬송을 드렸다는 것은 빨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상황에서 찬송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을 진심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상황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진심으로 수용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어주셨고, 간수의 마음의 문도 열어, 그 집안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악인의 심판을 기원하며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9-2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지금 다윗의 기원처럼 시편에는 시인이 하나님께 악인을 벌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시인이 처한 상황이 악인으로 인해서 그만큼 처절하고 고달프고 힘들다는 의미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소연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욥의 친구와 같이 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의 틀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앙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또한 그 기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하여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물을 삼키며 감람산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편 3: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서도 압살롬과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을 내 손으로 해치우겠다고 달려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에도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2번이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한번은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고, 또 한 번은 머리맡에 있던 병과 칼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해가 되는 일도 많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역설의 진리의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가 삶으로 쓰는 시편은 우리의 인생 지도를 은혜와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는 믿음의 색종이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은총의 현장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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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편과 10편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고난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하나님 백성들의 노래입니다. 히브리어 사본과 대다수의 영어 번역본들은 두 개의 시편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70인역과 그 계열의 성경들은 9편과 10편을 하나의 시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두 시편을 그렇게 보는 이유는 시편의 각 2행들의 서두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두 시편이 공통된 주제와 구절들을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편의 표제어에 등장하는 '뭇랍벤'은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이 시편을 노래할 때 사용할 악기의 연주주법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 의미로는 '아들의 죽음에 관하여' 또는 '여성의 목소리로' 등이 아닐까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아마도 예상하기는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과 하나님의 승리케 해주심에 대한 감사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의 감정으로 불렀던 노래인 듯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 첫 서두에서 자신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들,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을 노래하겠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그 첫째로 4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둘째는 10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셋째는 19절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이 세 고백을 들으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역사란 말인가?’
성경속에서는 확실하게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만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출애굽하는 백성들을 인도한 구름기둥이나 불기둥, 홍해가 갈라지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히스기야처럼 예루살렘을 포위하하고 있던 앗수르의 18만 5천 대군이 하루아침에 죽어 극적인 승리를 얻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나아만처럼 죽을병에 걸렸으나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병이 나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편 기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것들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는 무엇이기에 오늘 우리까지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로 초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는 시편 기자가 4절을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심판대 위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원수들, 이방 나라들과 시편 기자 사이에서 하나님은 시편기자의 편을 들어주시며 변호하고 계십니다. 시편 기자에게는 9절처럼 압제당하고 환난당하는 자에게 요새로 나타나시지만, 원수들과 이방 나라에게는 책망과 심판을 내리십니다.

상황은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재판장입니다. 원수들은 나를 모함하고 저주하며 무너뜨리려고 송사를 걸고 있는 상황에서 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나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있습니다. 8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재판은 공의로 정직으로 심판하고 판결하심을 보여줍니다.

나의 원수는 우는 사자처럼 나를 삼키려고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원수가 어떤 모함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함과 함정에 걸리지 않을 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불순종의 마음이 강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자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정직할 수 있습니다. 편법과 불의로 일관된 삶은 공의의 하나님께 변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기적은 아니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의의 길을 것는 것, 이것이 시편기자를 의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입니다.


두 번째, 10절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으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의 행사를 선포하는 자, 늘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자를 12절에 '가난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교만하고 가득 채워진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만족스러우니 굳이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자신이 매우 가난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 알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인지하고 있기에 그는 간절히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마음으로 찾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습니다. 비록 13절의 말씀처럼 그가 사망의 문 앞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가운데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산상수훈의 제일 처음은 심령의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자신의 가난함을 알아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친히 다스려주시는 당신의 나라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소개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우리에게 그 가난함을 허락하셔서 늘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도록 하심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그들에게 참된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참된 승리가 무엇입니까? 16절처럼 하나님 그 자체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심이 곧 심판이 되어 의의 길을 걷지 않은 자, 하나님을 찾지 않은 자들은 스스로 올무에 걸리게 될 것을 노래합니다. 나를 가난하게 하셔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살아가기에 하나님의 현존앞에서도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입니다.


19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일 세 번째는 바로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은 실패하나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참 단순한 말이지만 그 말이 내 인생에 적용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우리는 늘 인생을 더 섬기려합니다. 인생이 주는 쾌락, 즐거움, 만족, 평안함을 따라 살아가려 합니다.

인생을 섬긴다는 것인 짧은 인생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죽을 때가 찾아옴을 잊고 살다가, 막상 닥쳐서야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지요.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살아지는 것입니다. 인생이 연약함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아야 더욱 더 나를 죽이는 참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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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편은 ‘감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1절)

우리말에는 주어가 먼저 나오지만 원문에는 ‘야다’, 즉 ‘감사하다’가 먼저 나옵니다(‘알다’로 알려진 ‘야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기본적으로 ‘고백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죄를 고백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동일하게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나 하나님의 성품 또는 속성을 회중 앞에서 고백하며 선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다는 또한 ‘찬양하다’, ‘감사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경탄과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감사는 그저 형식적으로나 예의상 ‘고마워요’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의 감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모든 일들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파르’는 기본적으로 ‘셈을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셈을 한 뒤 검산을 하듯이 ‘자세히 이야기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사람들에게 말해주겠노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2절)

시편 기자는 기쁨으로 터질 듯한 자신의 심경을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찬송하다’는 동사로 연이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들은 1절에 있는 동사들과 마찬가지로 주어가 1인칭, 즉 ‘나’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 사용된 표현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내가 감사하리라’, ‘내가 말하리라’,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즐거워하리라’, ‘내가 찬송하리라’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이토록 흥분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유를 3절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3절)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타나시면, 내 원수들은 뒤돌아서 도망을 치다가, 비틀비틀 넘어져서 죽고 맙니다

그리고 4절에는 원수들이 뒤돌아서 도망을 치다가 비틀거리며 죽고 마는 이유가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4절)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이 문장 맨 앞에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접속사 ‘키’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재판에 있습니다. 결국 시편 기자의 감사와 찬양의 중심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의롭게’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명사 ‘쩨데크’입니다. 이 단어는 ‘곧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곧은 자’, ‘막대기’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곧은 자’, 즉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으셨고 말씀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에 대해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허언이나 식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무이한 기준, 즉 절대적인 ‘의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감사와 찬양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결과가 헛되지 않았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기준이 되시는 말씀으로 다스리심, 즉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원수들’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무고하고 힘없는 자를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압제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시편기자는 그러한 자들의 종말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15~16절)

15절에 나오는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6절의 평행구처럼 ‘악인’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17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사람들입니다. 즉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린’ 사람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역시 이런 자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잊지 않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18절)

궁핍한 자,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가난이나 궁핍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첫 마디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역시 경제적인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연약함, 한계, 그리고 유한함을 아는 것입니다. 즉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하는 자가 곧 궁핍하며 가난한 자입니다. 은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에게 통쾌하게 보복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궁핍함과 가난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친히 자신의 인생에 찾아오셨음을 인해 내면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인생’에 지나지 않는 우리 자신을 신뢰함에 있지 않고, 절대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신뢰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기억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