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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숍 방문기] 티 팔레스 Tea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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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

2009. 12. 5.

 

 

 길 맞은편에서 찍은 티 팔레스. 

두 여인이 창가에 앉아 티 브런치를 즐기고 있다.



얼마 전 트와이닝의 '레이디 그레이' 시음기를 올렸다가 불량소녀 님으로부터 청탁의 탈을 쓴 숙제를 하사받은 적이 있다. 꽃다운 소녀 시절 선물 받았던 홍차의 맛과 향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며 그 '라벤더 꽃봉오리가 든 얼그레이'를 영국에서 한번 찾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일부러 시간 내지 말고 한가할 때 천천히 찾아봐 달라는 주문에도 불구, 차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 홍차 애호가가 저 커피 애호가도 알고 있는 라벤더 얼그레이를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나 싶어 곧바로 그 특별한 홍차를 찾아 삼만리 장정에 나섰다.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면서 영국 전역에서 런던 안으로 범위를 좁혀나가는 전략을 짜보았다.

일단, 세인즈버리즈, 테스코, 아스다, 웨이트로즈, 소머필드 같은 영국내 대형 수퍼마켓 체인에는 보통의 얼그레이만 있지 라벤더가 든 얼그레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흠.

그 다음.
해로즈, 포트넘 앤 메이슨, 트와이닝, 위타드 같은 

차 전문 매장.
역시 없다.

그 다음.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판매상. <징Jing>, <리프 숍Leaf Shop>, 
<티하우스Tea House> 등등.
여기에도 없다. 으음.

뒤지고 뒤지다가 뜻밖에도 런던 번화가 한복판에 떡 하니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작은 티숍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한국의 홍차 애호가들이라면 2005년판 이후 발행된 런던 여행 안내 책자에서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만한 '티 팔레스'가 바로 그 주인공. 드디어 라벤더 얼그레이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 젊은 여성이 영국인들에게 대량 생산된 티백 말고 질 좋은 잎차를 마시게 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2005년에 시작한 티숍이라니, 불량소녀 님이 이미 20여년 전에 맛보셨다던 그 라벤더 얼그레이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한번 가서 보기라도 하자. 이삼백년씩 묵은 기라성 같은 차 회사들이 지금껏 건재한데 누가 감히 이 뉴 밀레니엄에 새로운 차 회사를 또 시작하느냐.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날이 밝기가 무섭게 지도를 들고 집을 나서 보니 포토벨로 골동품 시장이 있는 노팅 힐 근처다. 그간 왜 이 숍을 못 보고 지나쳤을꼬.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주변 입지 조건에 비해 대로변이 아니므로 정작 매장 자체를 찾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자줏빛으로 매장 안팎을 치장한 것이 제법 분위기 있다. 저리도 잘 꾸며놓은 숍에서 과연 필요한 라벤더 얼그레이 한 통만 달랑 사가지고 나올 수 있을까? 외투 속 손지갑을 한번 꽈악 쥐어 본 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태연한 척 어슬렁거리고 있는 저 능구렁이 숍 매니저



틴들이 다 자줏빛이다. 보나마나 한 가지 디자인으로 통일된 틴에 손님이 주문한 차를 덜어서 담아주는 방식이렷다.

"헬로우, 저어, 차 살 건데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먼 데서 일부러 찾아온 관광객입니다." (→ 거짓말 술술)

"오브 코스 유캔, 대신 제가 꼭 들어가게 찍어야 합니다. 하하하." (→ 만만찮은 매니저)

 

 

 

 

 

 

 

 깔끔하게 필요한 것만 진열해놓아 인상적. 

덜어 파는 방식의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것.



틴 옆에 찻잎을 담은 작은 종지들을 일일이 같이 놓았다. 설립자가 젊은 여성이다보니 이런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구나 싶다. 사실, 차를 살 때면 누구든지 틴 열고 자기가 살 찻잎부터 보고 싶지 않은가. 포장을 뜯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이 티 팔레스 안에서는 찻잎 냄새 맡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국 차 회사로서는 유래가 없는 무려 160여종의 차와 인퓨전들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 160종이 다 진열돼 있는 건 아니지만 종지에 놓인 차들이 하나같이 향도 좋고 잎도 잘 생겼다. 물론 가격은 만만치 않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노라니 티 마스터로 보이는 아가씨가 친절하지만 다소 의기양양해 보이는 얼굴로 16쪽에 달하는 차 목록을 참고하라고 건네 준다. 얼 그레이만 무려 8종이다.

 

 

 

 

 

 

 

 커튼 너머로는 티 브런치와 아프터눈 티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소박하고 아늑하다.

 

 

 

 

 

 

 

 티 팔레스의 아프터눈 티 세팅. 

스콘 개수로 짐작컨대 3인 상차림인 듯



아프터눈 티로 유명한 런던의 몇몇 호텔들과 달리 이 티 팔레스에서는 티숍 안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티타임을 즐길 수 있다. 이미 다녀간 사람들의 블로그를 통해 티테이블이 어떻게 차려지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터라 차만 사갖고 가지 말고 티 브런치나 아프터눈 티도 좀 즐기고 가지 않겠냐는 티 마스터의 권유를 들었을 때는 그냥 빙긋이 웃어주기만 했다. 사실 한국의 홍차 애호가들에게 이곳의 아프터눈 티 세트를 권하고 싶지 않다. 값은 호텔의 반 정도 수준이지만 상차림은 내가 보기에 1/3 정도 수준밖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아프터눈 티를 박리다매로 제공하겠다는 건 발상부터 잘못되었다. 왜냐? 아프터눈 티는 '럭셔리'한 체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렴하게 먹을 거면 집에서 알뜰하게 잘 차려먹으면 될 일. 이건 그냥 내 생각이다.

 

 

 

 

 

 

 

  오늘의 차 시음 코너. 

매일 홍차 1종과 인퓨전 1종을 바꿔가며 선보인단다.



오늘 선보인 홍차는 이 티숍이 위치한 지명 이름을 따서 블렌딩한 '노팅힐Notting Hill'. 재미있는 이름이다. 아마도 이 티 팔레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차일 테지. 깊은 바닐라 향이 일품인 차였다. 옆에 놓인 과일 인퓨전도 맛이 나름 복잡하면서도 깔끔했다. 찻잎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고 이렇게 매일 다른 차까지 시음해볼 수 있도록 배려하다니, 사업적 수완을 떠나 정말 감각 만점. 과연 'Retail is detail'이다.

 

 

 

 

 

 

 

 필요한 차를 사고 문을 나서기 전 

아쉬운 마음으로 한 장 더.



일전에 영국인의 95%가 대량 생산된 수퍼마켓 티백으로 홍차를 즐긴다는 <영국차협회UK Tea Council>의 통계자료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 티 팔레스의 젊은 설립자도 바로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겨 영국인들에게 질 좋은 찻잎을 공급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이 숍을 열게 되었다 한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세련되고 아늑한 맛이 있다. 북적이는 하이스트리트에 자리잡은 위타드 숍들보다는 한결 고급스러운 분위기이긴 하나 문제는 가격. 이곳의 차는 포트넘이나 해로즈 보다도 평균값이 높다.

영국인들은 1인당 하루 평균 4잔의 홍차를 마신다. 그렇다면 4인 가족의 경우 하루 16잔의 홍차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물론 이들이 4잔의 차를 모두 집에서 마실 리는 없겠지만, 수퍼마켓의 티백 제품들이 기본 50개씩 들어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 가족이 4일도 못 돼 홍차 한 팩을 뚝딱 다 비운다는 소리다. 영국의 서민들이 이 티 팔레스 설립자의 바람 대로 질 좋은 차로 자신들의 일상을 적시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말.

그렇긴 해도, 외양의 화려함을 좇는 외국의 가향차 숍들과 우후죽순 들어서는 커피숍에 밀려(영국에 스타벅스 매장 너무 많다. 밉다.) 점점 더 위기에 빠져가는 영국의 홍차 시장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질 좋은 찻잎'을 놓고 고민하는 젊은 설립자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고 순수하기까지 하다.

1706년에 <트와이닝스>가 설립되고 그 일년 뒤인 1707년에 <포트넘 앤드 메이슨>이, <해로즈>는 1834년, 1886년 <위타드 오브 첼시>, 그리고 그로부터 119년이 지난 2005년 바로 이 런던에 새로운 티숍이 또 생겼다니, 옛것들로만 채워진 듯한 영국 땅에도 자꾸자꾸 새로운 것이 생기기는 하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불량소녀 님 덕분에 새로운 숍도 알게 되고 뜻밖의 차 기행도 하게 되었으니 이번 일은 어떻게든 감사를 드려야겠다. (또 숙제 없는지요?)

티 팔레스여, 앞선 회사들마냥 100년, 200년, 300년 뒤까지도 건재하기를.  



다음은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라프에 실린 평.

2005년 티 팔레스가 막 탄생했을 당시 쓰인 글이다.

재치있는 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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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영국의 일간지인 더 타임즈에 실린 평.

설립자 의도에 중점을 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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