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차와 과자, 치즈와 조제고기, 음식과 그릇, 음식우표, 음악, 영국 이야기

영국 남자들의 티타임

댓글 0

차나 한 잔

2009. 12. 6.

 

 

영국 남정네가 자기 집에서 차려 준 아프터눈 티 테이블.



영국인 친구가 크리스마스 전에 자기 집에서 차나 함께 하자길래 얼씨구나 하고 영감과 함께 다녀왔다. 영국에서 벌써 몇 년을 보냈어도 여염집 티타임에 초대 받기는 처음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후 네 시. 무슨 차를 하겠냐고 묻길래 평소 마시던 걸로 달라고 했다. 얼그레이를 내주겠단다. 신난다. 어디, 영국 남자가 집에서 차리는 티테이블은 어떤가 한번 보자꾸나. 

다시 안 올 기회다 싶어 흐뭇한 마음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기다렸다. 차를 준비하는 일은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한순간 진지하게 만드는지라, 이 친구 말 한마디도 없이 부엌에서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우리를 부른다. 집안은 어두우니 부엌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위치에 자리잡은 콘서바토리(사람의 휴식을 위한 유리 온실. 채광 좋고 정원을 내다볼 수 있으므로 분위기도 좋다.)에서 차를 즐기자고 한다.

아니? 찻잔이 웨지우드의 '와일드 스트로베리'가 아니냐!  

우리 한국 여인들의 꿈 그 웨지우드 말이다. 

 

슬쩍 찻잔을 가리키며 칭찬하니 이 친구 말이 점입가경이다. 

"어, 우리 가족의 상당수가 웨지우드에서 일했어. 도자기에 직접 그림 그리는 사람도 있어. 스톡-온-트렌트Stoke-on-Trent (우리나라로 치면 이천 도예촌 같은 곳)가 내 고향이야."

무엇이? 우리 집도 왕년에 한도자기 하던 집인데?

반가운 마음에 호들갑을 떨어 주고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찬찬히 둘러보니 큰 꽃병도 있고 브라스 촛대도 있다. 오, 남자들만 사는 집(게이 커플)이 제법이다. 꽃이 적당히 시든 것으로 보아 우리들 온다고 엊저녁이나 오늘 아침 신경 써서 사다가 꽂아 놓은 것이 아니다. 평소에 이렇게 분화도 아닌 절화를 즐긴다니 제대로 럭셔리인걸? 마당에 저렇게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 놓고도 집안에 또 꽃병을 두다니 역시 꽃과 차의 나라 영국이로구나. 감동.

티푸드로 뭔가 근사한 걸 내줄 줄 알았더니 내가 선물로 유리병에 담아 간 비스킷을 뚜껑만 열어 통째로 낸다. 하하하하. 그럼 그렇지, 역시 결정적인 데서 남자 티를 내는구나. 

차는 제대로 우렸다. 우리 한국인들은 영국 하면 홍차를 떠올리며 '차의 나라' 쯤으로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영국인들은 우리 동양인들을 볼 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차 우리는 데 온갖 정성을 다 쏟는 '정신 수양자'를 떠올리며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는 아마 일본의 영향이 없지 않겠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인이 녹차를 대하는 마음은 영국인이 홍차를 대하는 마음과는 확실히 다르지 않은가. 홍차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날씨에 지친 영국인들의 심신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그 무엇이라면, 녹차는 헬렐레 하던 정신을 바짝 죄어 주는 고삐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실은 차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어." 수줍게 고백하니, 옛다, 크리스마스 티 한 통, 하며 자기들이 평소 잘 즐기지 않는 묵은 차의 미니 틴까지 가져가라며 하나 준다. 아냐 됐어 소리 한번 않고 넙죽 받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차를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찬장에 진열해 놓은 온갖 접시와 티폿들 하며 부엌 천장에 매달아 놓은 머그들 하며, 구경거리 천지다. 근사하게 한 세트 마련해 보란듯이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여기저기서 하나씩 둘씩 모은 것들이라 알록달록, 안 어울리면서도 또 그 나름의 멋이 있다.

차를 마시고 있으니 우리를 초대한 그 마음씨 좋은 주인이 이번에는 비닐봉지에서 부시럭부시럭 건포도 몇 알을 꺼내 정원 한가운데 있는 나무 테이블에 올려 둔다. 늘 찾아오는 새가 있는데, 이렇게 티타임을 가지며 앉아 있을 때면 저도 티타임 하겠다고 찾아온단다. 정말로 실루엣이 예쁘게 잘 빠진 암컷 블랙버드 한 마리가 와서 슬금슬금 눈치 보다가 낼름 건포도를 집어삼킨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 다쓰베이더와 둘이 턱 떨어뜨리고 한참을 내다보았다. 차 마시면서 정원 내다보고 새 구경이라니, 정말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풍경 아닌가. 부러운 일상이다.







천장에 닥지닥지 매달린 머그들.
가만 보니 옷걸이. 재치와 운치가 동시에 느껴진다.








찬장의 그릇들.
부엌문의 저 스테인드 글라스도 따로 주문 제작해 단 것.








벽난로 위 선반의 탱커드와 장식품들.
셜록 홈즈도 다 있다.
나는 저 이국적인 브라스 커피 포트가 탐난다.

 

 

 

'차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아하는 기호식품은 소문 내라  (0) 2009.12.07
새해 첫 찻상  (0) 2009.12.06
선물하기 노하우  (0) 2009.12.06
영국 남자들의 티타임  (0) 2009.12.06
인도풍 티타임  (0) 2009.12.05
곰 괴롭히기 날  (0) 2009.12.05
바클라바 Baklawa  (2) 2009.12.05
제발  (0) 2009.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