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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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티드 크림 Clotted 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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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2009. 12. 6.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곁들인 스콘



오후 4시 즈음해 근사하게 차려먹는 '아프터눈 티'는 이제 홍차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이곳 사람들의 독특한 문화다. 영국에 여행와서 리츠나 클래리지 호텔 아프터눈 티세트를 맛보는 게 소망인 사람들도 여럿 봤다. 아프터눈 티 세트는


 샌드위치 서너 종류

• (오이 샌드위치와 훈제연어 샌드위치는 필수) 
 클로티드 크림clotted cream과 잼을 곁들인 스콘
 공들여 만든 작은 단것들 몇 가지
 홍차

• (얼 그레이, 다질링, 랍상 수숑 등 카페인 적은 오후용 차)


로 구성되며, 먹을 때는 대개 위에 쓴 순서대로 샌드위치 먼저 먹고 크림과 잼을 발라 스콘을 먹은 뒤 단것들을 집어먹으면 된다. 근사한 3단 접시에 담아서 내 오며 크림과 잼은 작은 그릇에 따로 담아 준다.


이 세 가지 차음식 중에서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곁들인 스콘만 따로 떼어 차와 함께 먹는 것을 '크림 티'라고 부른다. 아프터눈 티보다는 한결 가벼운 메뉴로, 영국인들도 파티나 모임이 아닌 일상에서는 아프터눈 티보다 크림 티를 먹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티룸은 물론, 여느 식당이나 심지어 펍 같은 곳에서도 오후 4시를 전후하여 이 크림 티를 내놓는 일이 허다하다. 간혹 '밀크 티'와 '크림 티'를 혼동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밀크 티는 말 그대로 '우유를 넣은 홍차'를 말하며, 크림 티는 홍차를 어떤 종류, 어떤 방식으로 먹던 상관없이 반드시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곁들인 스콘을 차음식으로 내는 찻상을 말한다. 생크림이나 버터 같은 스프레드는 안 되고 꼭 이 클로티드 크림이 들어가야만 '크림 티'가 성립된다.


물가 비싼 영국에서도 이 크림 티만큼은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가 있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관광객들에게 유리하다. 여러 곳의 크림 티 가격을 눈여겨보니, 아무리 돈 없는 가난뱅이라도 오후 4시가 되면 이 크림 티만은 꼭 사 먹을 수 있어야 된다는 어떤 사회적 합의가 있는 듯 보인다. 어지간해서는 3파운드가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1인용 찻주전자에 가득 담긴 홍차와 스콘 2개, 작은 딸기잼 1병, 클로티드 크림 1팩을 대접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크림 티를 제공하지 않는 곳일 경우 홍차와 작은 조각 케익을 따로 시켜서 먹을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크림 티보다 양과 질이 훨씬 떨어지는데도 돈은 더 많이 내야 한다. 카운터에 가서 "크림 티 주세요!"라고 씩씩하게 주문하되, 만일 3파운드보다 비쌀 경우는 대개 그곳이 미술관이나 박물관, 또는 유명한 교회 건물 같은, 무료로 개방하면서 관광객들의 기부금으로 근근히 살림을 꾸려가는 곳일 확률이 크므로 이런 곳에서는 왜 3파운드가 넘냐고 바득바득 따지지 말고 잘 구경한 후 기부하는 심정으로 말없이 값을 치르고 맛있게 드시도록.







 수퍼마켓에서 사온 클로티드 크림



크림 티 구성 요소 중 '클로티드 크림'이란 것은 좀 생소할 것이다. 생크림도 아니고 버터도 아닌 독특한 질감과 풍미의 크림인데, 현재 영국에서는 콘월과 데본, 이 두 고장에서 주로 생산하고 있으며 콘월 지방의 것은 유럽연합의 3대 식품 관리 정책 중 하나인 '원산지 표시 보호제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PDO'에 의해 지역 특산품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콘월과 데본, 이 두 고장이 서로 자기네가 원조라고 으르렁거리는 일은 이제 영국에서는 해당 지역 주민들 외에는 아무도 개의치 않는 해묵은 논쟁이 되었다. 두 고장 제품이 나란히 수퍼마켓 선반에 놓이는 일은 없으며, 영국의 수퍼마켓들은 대개 콘월에서 생산된 <로다스>사 제품만 취급한다.  
 
한국에도 이제 여기저기 티룸이 많이 생겼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클로티드 크림 구하기가 어려운 모양인지 방문기들에 주로 휘핑크림이나 버터가 제공된 사진들이 보인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클로티드 크림이 들어가 있다던데, 역시 한국의 홍차 시장은 일본에 비하면 아직 턱없이 작은 모양이다. 가만, 수입되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범홍차인 서명 운동이라도 해서 유제품 회사에 좀 생산해 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 스콘용 스프레드말고도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데.







뚜껑을 벗기면 바닥에 깔린 수건만큼이나 포실포실한
크림 더께golden crust를 볼 수 있다.



수퍼마켓에서 사 온 클로티드 크림의 포장을 벗기면 위의 사진에서처럼 먼저 샛노란 크림 더께를 볼 수 있다. 우리 눈에는 한갓 기름 더께처럼 보이는데도 영국인들은 이를 '골든 크러스트'라고 부르며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다른 크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클로티드 크림만의 특징인데다,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맛있는 성분들이 위로 떠 농축되기 때문이라고. 클로티드 크림을 제공할 때 1인용 작은 포장 용기 대신 큰 용기에서 덜어서 낼 경우에도 꼭 이 골든 크러스트가 포함되도록 담는 것이 중요하단다.







한 숟갈 푸욱 떠보니
더께 밑에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크림이…



이 클로티드 크림은 한 번 맛보고 나면 버터나 다른 크림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매혹적이다. 고밀도의 부드럽고 차가운 감촉과 그 고소한 맛은 한 번 맛본 이로 하여금 거의 중독의 지경까지 몰고가 삽시간에 늘어난 몸무게를 저울 위에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할 정도라는데. 그러고 보니, 영국인 친구 한 명도 예전에 "클로티드 크림을 조심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영국에 있을 때나 실컷 맛볼 수 있는 크림인데 이를 어쩔꼬.

참고로, 가디언 지에서 건진 영국의 크림 티 잘 하는 곳 목록을 걸어 둔다. 나는 아직 이곳들 중 어느 한 곳도 가 보지 못했다. 어차피 유명 티룸들도 콘월에서 갖다 쓸 게 뻔한 클로티드 크림을 관광객도 아닌 내가 못 구할 것도 아니니 굳이 이름난 곳 찾아다니면서까지 크림 티 사 먹을 필요는 못 느낀다. 뜨거운 스콘도 집에서 20분이면 후딱 구울 수 있고 말이다. 차라리 나로서는 푼돈 모아 더 근사한 호텔 아프터눈 티를 즐기는 게 낫겠다 싶다. 

그렇긴 해도 자꾸 밖에 나가 이것저것 눈으로 보고 직접 맛을 보아야 집에서도 제대로 흉내 낼 수 있다는 권여사님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언젠가는 저 목록에 있는 티룸 몇 곳 정도는 방문을 해볼 생각이다. 물론 이곳에 관광 오신 분들한테도 매우 권하고 싶은 영국 사회의 일면이니, 영국에 오시거든 <스타벅스> 가지 마시고 꼭 크림 티나 아프터눈 티를 즐겨 보시기 바란다. 

참, 한국의 홍차인들이나 베이킹인들의 블로그를 보면 "클로티드 크림의 지방 함량이 무려 55%가 넘는대!" 호들갑 떠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스콘이나 토스트에 버터는 아무렇지도 않게들 바르는 것을 본다. 만날 보는 흔한 버터라서 그런지 버터의 지방 함량은 기본이 80%가 넘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