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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기호식품은 소문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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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2009. 12. 7.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상. 
이제는 한국에 계신 분이 독일에서 건너온 차를 주문해 영국에 있는 한국인에게 일주일도 안 돼 다시 보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영국에 있으니 지금까지 영국 차만 줄곧 마셨겠구나 싶어 안됐는지 여러 분들께서 차생활의 편식을 보완해 줄 각종 국산차, 외국차들을 보내 주시곤 한다. 얼마 전 불량소녀 님께서 보내 주신 캐나다 특산 아이스와인 홍차를 마시고 즐거워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번에는 낭만소녀 님께서 우리 녹차와 독일 차들을 잔뜩 보내 주셨다. 참고로, 이 누리터에서 '소녀'라는 필명 쓰는 분치고 진짜 소녀는 드물다는 사실. 온갖 소녀분들은 거개가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다. 켈켈.


한국에서 이 로네펠트Ronnefeldt 차들은 꽤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하셔야 할 텐데 이렇듯 거금 들여서까지 단단의 차 블로그에 기여해 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면목없고 감사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차나 차 관련 용품들을 선물 받게 되면 새 게시물거리가 생겨서 신난다. 시간이 지나 선물은 사라지더라도 글과 사진을 남겨 두면 무시로 들여다보며 곱씹을 수 있어 좋다. 부엌 찬장 한쪽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흐뭇하다.

살면서 터득한 지혜 중 한 가지는 바로 자기가 좋아하는 기호식품이나 음식은 동네방네 소문 내고 볼 일이라는 것이다. 현명하기 짝이 없는 내 둘째 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빈대떡과 LA 갈비 좋아한다고 유난을 떤 덕에 이 두 가지 음식만은 혼자서 아무리 많이 먹어치워도 핀잔 받는 일이 없고, 명절 같은 때는 오히려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들이 갓 부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빈대떡을 할아버지 할머니보다도 먼저 먹을 수 있도록 따로 부엌으로 불러 챙겨 주시기까지 할 정도였다. 장가 들어서는 장모님까지 특별히 신경 써 명절마다 사위를 위해 맛난 LA 갈비를 준비해 두신다 하니, 나는 왜 진작 이런 꾀를 생각해 내지 못 했을꼬. 생각해 보면 빈대떡 싫어하는 이가 어디 있고, 달착지근 짭쪼름한 LA 갈비 마다할 사람이 또 어디 있나. 

뒤늦게나마 블로그까지 운영하며 차 좀 즐겨 보겠노라 동네방네 떠들고 나니 정말 주변의 고마운 분들께서 세계 각지의 귀한 차들과 그릇을 선물로 보내 주신다. 과연 좋아하는 것은 떠들고 볼 일이다. 홍차에는 전혀 관심 없으셨다던 낭만소녀 님이 내 블로그를 틈날 때마다 보시고 슬슬 흥미를 붙이기 시작하셨다는데, 얼마 전 한 잡지에 실린 로네펠트 광고를 보시고는 차 좋아하는 이 단단 생각이 나서 그 자리에서 당장 전화 주문해 보내셨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뜻하지 않게 내 둘째 오라비식 '나팔 불며 광고하기' 덕을 보게 돼 쾌재를 부르는 중이다. (오라버니 감사 드리오.)









행여 나무상자에 흠이라도 날까 포장 참 여러 겹으로 잘 해 놓았다. 한국에서는 로네펠트 차를 '품격'이니 '명품'이니 '유럽황실'이니 하면서 광고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이런 문구들에 약하다 보니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유럽에는 아직도 왕실이 있는 나라들이 제법 있는데, 아무래도 언론에 제일 많이 노출되고 영향력 있는 왕실은 영국 왕실이 아닐까 싶다. 영국에서도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마다 왕실에 납품하는 선별된 업체가 몇 개씩은 있지만 왕실 인증을 받은 물건이라고 해서 꼭 비싼 것들만 있는 건 아니다. 일례로, 당장 우리 동네 수퍼마켓에 가 보면 선반에서 왕실 인증 마크가 인쇄된 3천원짜리 평범한 가정용 밀가루, 2천원짜리 설탕, 천원짜리 덕용 성냥 등도 볼 수 있다. 비싸서 명품이 아니라 남들 안 할 때 선구적으로 사업을 일으켜 몇 백년이 넘는 지금까지 꿋꿋이 버텨온 회사들의 제품, 그렇게 오래도록 소비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제품들이 바로 명품인 것이다. 명품의 개념이 한국과는 좀 다르다.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 명품으로 광고하고 시음용이라며 무료로 차를 이렇게 저렇게 배포하는 것은 사실 우리들이 그렇게도 떠들어 대는 '유럽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다. 구매하기 전이나 구매 시 무료로 차 샘플 얻었다고 좋아하시는 분들도 가끔 보았는데, 그런 곳에 소요되는 비용은 판매하는 분들이 자선사업가가 아닌 이상 이미 비싼 차 값에 다 포함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샘플 여기저기 뿌리고 광고 요란하게 하는 회사의 화장품은 가급적 사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그런 식의 마케팅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정 소비자에게 보답을 하고 싶으면 무료 샘플 대신 연중 두어 차례 특별 할인 행사를 열어 일시적으로 값을 낮추는 경우가 더 많다. 선물 받은 걸 가지고 것참 깐깐하게 군다고 생각하겠지만 티백 선물 박스에 딸려온 고급 광택지의 브로셔들과 두꺼운 광고용 별지까지 붙여 놓은 샘플 티백들을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하는 소리다. 낭만소녀 님은 <LUXURY>라는 잡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주문하셨다 하니 한국 수입처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명품으로 광고하기로 한 모양이다. 광고 문구에도 온통 '명품' 'VIP' 일색이다. 한국에서는 차 한 잔도 '명품'자가 붙어야만 잘 팔리나. 하여간, 영국에서는 발에 차이는 홍차가 한국에서는 비싼 기호식품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니 여기 있을 때나 실컷 마셔 둬야겠다. 

마셔 보니 로네펠트 차는 전반적으로 좋은 인상을 준다. 맛도 향도 은은한데다 티백인데도 가루가 적어 우리는 시간도 제법 길고 목넘김도 부드럽다. 영국인들보다 더 무뚝뚝할 것으로 생각했던 독일인들의 이미지와 달리 포장도 감각적이어서 눈까지 다 즐겁다. 차가 괜찮으니 굳이 명품 운운하며 비싼 돈 들여 광고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좋으면 입소문 나기 마련인데 차라리 광고비 좀 아끼고 값을 좀 내려 주면 좋겠다. 

누리터에 뜨는 이 로네펠트 차들의 시음기 중 상당수가 한국 로네펠트 수입처 누리집에서 온 것들이다. 무료로 차 샘플을 나눠주고 자사 홈페이지에 시음기를 올리도록 하는 모양. 그렇게 모인 시음기 중 잘 된 것을 뽑아 상으로 차를 또 보내 주기도 하나 보다. 흐음... 잘 쓴 시음기라... 업체 입장에서는 칭찬 일색의 시음기가 잘 쓴 시음기 아닐까.

그런데, 독일이나 여기 영국 등 유럽에서는 로네펠트 우든 티 체스터에 티백이 각각 10개씩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왜 죄다 8개씩밖에 들어있지 않은 것인지? 2개씩 뺀 걸 가지고 무료 시음용으로 배포하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이 선물세트에서는 티백이 무려 16개나 빠진 셈이다.   






 유럽에서는 티백당 각각 10개씩 넣어 파는데
한국에서는 왜 값도 더 비싸면서 8개씩만 넣는 것인가.



보기만 해도 즐거운 색색의 티백들과 묵직한 나무상자는 과연 선물용으로 그만인 것 같다. 제법 규모 있는 문구 전문 매장 색종이 코너에 들어섰을 때의 행복감이 밀려 온다. 64색 색연필통 뚜껑을 열었을 때의 황홀감이 몰려 온다. 독일 차는 캐모마일 차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런 인퓨전까지 다 만들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저기 저 상자 뒤에 수줍은 듯 따로 서 있는 '크림 오렌지' 루이보스는 맛은 약간 느끼하지만 향은 꿈같이 달콤하고 수색은 단연 으뜸이다. 성탄용 식탁보와 촛대 사느라 가산을 탕진해 유리 티포트를 못 사고 있었는데, 이 크림 오렌지의 수색을 온전히 즐기려면 어디 가서 당장 하나 훔쳐 오기라도 해야 할 판이다. 관능적인 찻물의 빛깔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티백끈 대신 종이 손잡이가 달린 티백이라서 우릴 때 티포트의 형태를 좀 가린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긴 원통형의 카페티에cafetiere에서는 우리기가 매우 힘들다.









자, 이러이러한 차들이 들어 있으니 자세히 보시라. 저 페퍼민트의 철자, 독일스럽다[Pfefferminze]. 캐모마일도 마찬가지[Kamille]. 움라우트 붙은 이름도 다 있다. 과연 독일인들이 만들어 티백 포장도 자기네 자동차만큼이나 탄탄하다. 과일차들은 과일 홍차와 달리 향만 요란하고 맛은 빈약해 썩 즐기지 않는 편인데, 향초차 중에서 고전 중의 고전인 페퍼민트와 캐모마일만은 안 떨어뜨리고 꼭 쟁이고 있다. 지금껏 마셔본 수많은 페퍼민트와 캐모마일과 좋은 비교가 되겠구나 싶었다. 일단 페퍼민트는 훌륭했다. 페퍼민트 특유의 향 밑에 무엇인지 모를 우아한 지속음이 깔린다. 보라색 포장의 실버라임 블로썸에서는 달콤한 아까시꽃 향이 난다. 나머지 차들은 천천히 맛보면서 틈날 때마다 이 글 밑에 추가해야겠다. 위에서도 말했듯 티백이지만 가루가 남지 않아 목넘김이 부드럽다는 것이 로네펠트 인퓨전들의 가장 큰 장점이 되겠다. 홍차는 또 어떨지 궁금하다. 









그리하여 우리집에는 이제 티백용 나무상자가 두 개나 생겼다. 작은 것은 예전에 트와이닝 숍에 갔을 때 마련해 둔 것이다. 차를 즐기면서부터 도자기 감촉과 나무 감촉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나무상자 뚜껑 열어 이번엔 어떤 걸로 골라 마실까 하는 행복한 고민까지 다 하게 생겼으니 귀한 선물 보내주신 분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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