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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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live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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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야기

2012. 2. 6.

 

 

 

 

 

오늘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한 지 60년이 되었습니다. 재위 기간을 놓고 보면 역대 영국 왕 중 2위를 기록합니다. 2011년 5월 12일을 기점으로 조지 3세의 21,644일 기록을 깨 2위에 올랐으나, 빅토리아 여왕의 기록을 깨고 1위에 오르려면 아직 2015년 9월까지는 더 살아주셔야 합니다. 공식 기념 행사들은 올림픽 치르기 전 날씨 좋은 6월에 뻑적지근하게 할 모양인지, 오늘은 언론에서 그간의 행적을 살피고 공을 기리는 정도로 다들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재위 기간 중 캔터베리 대주교가 6번, 교황이 6번, 총리가 12번(!), 미국 대통령이 12번 바뀌었습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있겠지요.

 

왕위 계승자였던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하필 두 번이나 이혼한 경력이 있는 미국 여자와 결혼하려 들자 왕실과 국민의 공분을 사게 되고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물러나게 되죠. 훗날 나치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요. 말더듬증이 심했던 동생 조지 6세가 졸지에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마음 고생 몸 고생 많이 했습니다.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King's Speech》(2010)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버지 조지 6세와 달리 대중 연설을 똑부러지게 잘 하는 편입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TV에서 생방송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여왕의 대국민 연설을 내보냅니다.

 

영국인들 중에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단단도 영국 오기 전까지는 '훗, 21세기에 무슨 군주제냐' 하던 사람 중 하나였죠. 왕족과 귀족은 죄 놀고 먹는 사람들인 줄만 알았어요. 유럽에 유학하거나 여행해봤던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고 있는지를, 조상이 일궈놓은 것 유지·보수하느라 등골이 휘고 비용 마련을 위한 수익 사업 고안해내느라 밤낮 얼마나 끙끙거리고 있는지를요. 영국 드라마《다운튼 애비》만 봐도 알 수 있죠. 으리으리한 저택 꾸려나가기 위해 유럽의 귀족 도련님들, 생면부지의 미국 재벌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요. 애쓰다 애쓰다 안 돼 집을 결국 내셔날 트러스트에 맡기는 일도 허다합니다. 왕실 사람들은 그놈의 '노블레스 오블리쥐' 모범 보이느라 온갖 빡빡한 공식 일정을 소화해내야 하고 남자들은 전쟁의 기미만 보였다 하면 분쟁 지역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야 합니다. 고달픕니다.

 

영국에서 몇 년 지내며 관찰해 보니 이 입헌군주제라는 것, 그리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규정상 왕실은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도록 돼 있는데, 이 때문에 여왕은 투표도 하지 않고 특정 정당을 편들지도 않습니다. 사회가 정치적으로 양분되어 화합을 이루지 못 하고 끊임없이 소모적인 논쟁을 하려 들 때 이를 다독여주고 하나로 묶어줄 인물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유리합니다. 영국뿐 아니라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도 왕실이 있죠. 얼마 전 UN 보고서를 보니 유럽 입헌군주국들이 비교적 사회가 안정돼 있다는군요. 급변하고 불안정한 이 현대 사회에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왕의 헤어 스타일과 패션은 60년이 넘도록 이렇다할 변화가 없습니다.
☞ 여왕의 스타일 변천사

 

제조업자들, 온갖 종류의 디자이너들, 예술가들, 심지어 요리사들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 받고 출세하기 위해 이 왕실을 이용합니다. 한편, 음지에서 수고하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일년에 수차례 버킹엄 팔레스에 불려가 가든에서 다과를 대접 받으며 여왕에게 잘했다 칭찬 받는다는군요. 근사한 모자까지 다 맞춰 쓰고 한껏 멋 내고 가 실컷 기분 내다 돌아온다고 합니다. 60년 재위 기간 동안 궁전 뜰에 불려가 대접 받고 노고를 치하 받은 국민이 모두 합쳐 150만명이 넘습니다. 대통령이 치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골수 민주당 지지자가 한나라당 대통령이 주는 상 받고 마냥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일, 영국에선 이럴 걱정이 없다는 거죠.

 

영국의 군주는 또 거대한 영연방을 하나로 묶는 역할도 하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 땅에 전쟁이라도 나게 되면 이 나라들 다 와서 돕는 겁니다. 물론 영국도 그들이 어려울 때 가서 도와야 하고요. 서로 돕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우방국을 이렇게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산입니다. 영국인들은 매우 약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저렇게 잴 것 다 재보고 나서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러니 한국 포탈에 영국 왕실 기사 뜰 때마다 "21세기에 왕실 있는 미개한 나라"라는 헛소리 좀 하지 마세요. 무식해 보여요. 왕실 있는 북유럽 국가들과 영국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고 평등해요. 복지국가도 아닌 나라 사람들이 "불평등하다"며 복지국가들 걱정을 하고 있으니 짠해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도 기념 찻자리 가져야지요. 암요.

 

 

 

 

 

 

 

 

 

포트넘 앤 메이슨의 '쥬벌리 티Jubilee Tea'입니다. 작년 12월 출시되자마자 샀는데 오늘 벌써 마지막 티백을 우립니다. 그만큼 술술 넘어간다는 소립니다. 밀크티용 티백차치고는 우아한 맛이 납니다. 인도, 스리랑카, 중국 차를 혼합해 만들었다는데, 혼합차치고는 별 뚜렷한 맛 없이 순해서 하루 아무 때나 즐기기 좋습니다. 거창한 깡통에 비해 역시나 내용물은 사각 종이 티백이라 볼품은 없어요. 그간 잘 마셨는데 벌써 다 떨어져 아쉽네요. 이 제품은 어쩐 일인지 나오자마자 품절이 된 이후 재입고가 안 되고 있습니다. 좀 더 기다려 보렵니다.

 

 

 

 

 

 

 

 

 즉위 60주년 기념으로 언론에 배포한 사진. 할머니 86세, 할아버지 91세.
그리스·덴마크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60년 넘게 그림자 외조. 할아버지가 더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