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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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깡통,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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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2012. 10. 16.

 

 

 

 

 

차 고수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아마 비웃겠지만, 단단이 영국 와서 홍차에 막 입문할 당시에는 홍차 깡통이 주는 심미적 만족이 홍차 선택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곤 하였다. 영국에서 구할 수 있는 홍차들은 닥치는 대로 구입을 하고 주변의 고마운 분들로부터 다양한 차를 선물 받아 이런저런 우리기 실험을 해가며, 또, 차 관련 자료들을 찾아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영국에서는 홍차 구하기가 정말 쉽고 값도 싸다. 한국에서는 돈 드는 취미인 이 홍차 마시기가 영국에서는 취미라 하기도 민망한 일상의 일이니 여기 있을 때나 실컷 마셔 두자, 우리 부부는 둘 다 커피도 안 마시고, 술·담배도 안 하고, 돈 없어 외식도 잘 안 하니 저렴한 홍차라도 열심히 마셔 기분 내야겠구나 싶었다.

 

영국인들의 홍차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한 홍차 취미. 머리 좀 굵어지고 나니 이들의 수퍼마켓 저렴한 티백에 편향된 홍차 취향이 어느덧 우습고 한심해 보이기 시작했다. 멀쩡한 찻잎을 티끌로 만들어 종이에 가둔 뒤 머그에 우려 마신다니, 영국인들 수준도 알 만하구나. 게다가 우유와 설탕까지 넣는다고? 우유는 그렇다쳐도 설탕은 정말 경악할 노릇일세. 설탕차만으로는 부족해 버터와 크림 범벅 단것까지 곁들여 먹고들 있으니 거리에 그렇게 뚱뚱한 여자가 넘쳐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 영국 남자들이 중년 넘어 이중턱에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는데 반해, 여자들은 이상하게도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뚱뚱한 것 같다. 가만 보면 엄마가 뚱뚱한 집은 애들도 죄 뚱뚱한데, 아무래도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주전부리를 많이 하고, 자기 혼자 먹기 멋쩍으니 애먼 애들까지 꾸역꾸역 멕이는 게지. 영국 뚱보는 한국 뚱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데, 머리는 다들 조막만 하면서 가운데 토막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뒤룩뒤룩해질 수가 있는 건가? 거, 코쟁이 여자들 체형 참 희한할세.


홍차 취미가 무르익자 한푼 두푼 아껴 모은 돈으로 고급 찻잎들을 슬슬 집에 들이게 되었고, 중국 차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 중국 차도구까지 그럴듯하게 갖춰 '회감'을 논하고 '엽저'를 살피며 차를 마시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유와 설탕 없이 마실 수 있는 고급 차들이 주는 만족감과 행복감은 다구 욕심이나 책 소유욕마저 떨쳐버릴 가공할 것이었다. 제대로 된 다구에 정성껏 산차loose leaf tea 우리는, 이 소박한 의식이 주는 진진한 기쁨을 영국인들이 과연 알기나 할까? 끌끌.

 

 

 

 

 

 

 

 

 

그런데, 제대로 차를 우려 마시게 되자 곧 차 설거지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세 끼 식사와 세 번의 찻자리가 쏟아내는 설거지의 양이 어마어마했고, 타월 드라이까지 해야 하는 것이 아주 고역이었다. (영국 수돗물에는 허연 석회 성분이 많아 아끼는 그릇들은 설거지를 하고 나면 반드시 타월 드라이를 해줘야 한다.) 타향살이를 해서 그런지 영국에서는 이상하게도 집에 있든 밖에 있든 1년 365일 24시간 내내 춥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아마 공중 목욕탕과 온돌이 없어서일 텐데, 그 때문에 틈만 나면 뜨거운 차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저온에 우리는 녹차나 여리고 섬세한 백차는 곧 일상 찻자리에 드물게 올라오게 되었다. 이것들보다는 좀 더 강렬하고 뜨거운 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청차나 홍차가 단골로 찻상에 올라오게 되었는데, 청차는 홍차에 비해 값이 많이 비쌌으므로 이것 역시 일상 찻자리에는 드물게 올라오게 되었다. 그래, 역시 차 중에서는 가장 뜨거운 물로 우리는 홍차가 영국 날씨에 딱이구나. 밖에서 고생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난방비 아끼느라 히터 찔끔찔끔켜며 집에서 덜덜 떨고 있을 때, 이럴 땐 뜨겁고 진한 홍차 한 잔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에잇, 차 설거지도 귀찮다. 그저 머그에 티백이 최고다. 그런데, 그냥 마시기엔 티백은 좀 쓰잖나. 꼴꼴꼴. 우유를 넣으니 좀 낫구나. 앗, 집에 과자가 다 떨어졌네? 밀크티 마시고 있으니 단 게 먹고 싶은데, 으음... 설탕이라도 한 스푼?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먼길을 떠났다가 이렇게 해서 다시 수퍼마켓 밀크티 티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꽈당 물론 가끔씩은 고급 차를 제대로 정성껏 우려 마시기도 하지만, 요점은, 이제 더이상 영국인들의 홍차 취향을 비웃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차 문화를 갖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 홍차는 기호품이 아니라 생필품으로 분류된다. 하루에 몇 번씩 마시는 차를 서민이 마냥 비싼 찻잎으로만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매번 우아하게 다구 갖춰 우릴 수도 없는 것이다. 차 대국 중국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하게, 수시로 즐긴다잖나.


이따금 위 사진에서처럼 집에 있는 차들을 꺼내 동일한 조건하에 우려 놓고 티 테이스터처럼 폼 잡고 비교 시음해가며 차의 우열을 가리려는 현학성을 드러내곤 하지만, 수퍼마켓 차들은 경쟁이 하도 치열해 대개 큰 차이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차의 우열을 가리는 행위가 생각보다 의미가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좀 모자란 차를 만나더라도 그 모자람을 상쇄할 만한 여러 환경이나 요인들을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물 온도와 양을 조절한다거나, 부재료를 넣어본다거나, 초를 켠다거나, 음악을 튼다거나, 아끼는 찻잔을 꺼낸다거나, 좋아하는 과자를 곁들인다거나 하는 행위 등.)

 

좋은 차랍시고 집에 갖춰 놓아도 식구 개개인의 취향 차가 또 큰 변수가 되기도 한다. 밀크티의 경우, 혀는 둔해도 목구멍만은 아주 예민한 단단은 위의 세 가지 차 중에서 목넘김이 가장 부드러운 <요크셔 골드>를 으뜸으로 치는 반면, 다쓰베이더는 요크셔 골드의 명성이야 뭐 흠 잡을 수 없는 탄탄한 것이긴 하지만 다소 투박하고 거칠고 뭔가 2% 부족한 것 같은 저 <아마드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나 <링톤스 코니써>도 날카롭지만 나름 개성이 있고 산뜻하다 느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차를 놓고도 부부가 의견이나 선호도가 극명히 갈리는 일이 다반사.


게다가, 똑같은 차라도 우릴 때 물 온도나 부재료 첨가 등 조제법을 달리 하면 맛이 달라지고, 찻잔의 재질과 크기와 두께와 형태에 따라 맛이 또 달라지며, 곁들여 먹는 과자에 따라 또 달라지기도 하며, 그 날의 기분과 몸 상태와 혀 상태에 따라 또 달라지는 게 이 차 맛이란 말씀. 내가 볼 땐 이 중에서 차 마시는 순간의 심적 상태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

 

고로, 깡통이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홍차가 왠지 맛도 더 있을 것 같은 위약 효과placebo effect 비스무리한 것도 나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단단은 아직도 홍차 초보들처럼 깡통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먼길을 떠나 정처 없이 헤매다가 결국은 영국인들의 저렴한 티백 홍차 취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이 글의 요점이 되겠다. 영국에서는 어떤 차를 마시느냐보다 차 마시는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