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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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을 영국음식이라 부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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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2014. 7. 28.

 

 

 

다음Daum 첫 화면에 <미즈넷>이라는 공간이 있다. 여자들 수다 떨고 정보 교환하라고 만들어 놓은 곳인데, 거기 작은 방 중에 <미즈쿡>이라는 방이 따로 있다. 운영진이 선정한 몇몇 고정 필진이 요리 솜씨를 뽐내는 방인데, 나는 우선 <미즈쿡>이라는 방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음 운영진들 머리 속에는 집에서 밥 차리는 일은 여전히 여자의 몫이라는 한국식 고정관념이 박혀 있다. 여기 영국 같으면 그냥 <Recipes> 등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혼자 사는 남자나 자취 대학생, 혹은 남자만 사는 게이 커플 가정도 수두룩한데다, 설사 남녀가 같이 산다 해도 요리란 건 남녀 상관없이 누구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제 맞벌이 부부 많고 혼자 살면서 기똥차게 잘 해먹는 남자 많지 않나.

 

나는 이 <미즈쿡>에 올라오는 요리들을 열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데, 나이 든 주부들 중에는 밑반찬 주르륵 깐 가정식 백반이나 보양식 같은 것을 올리는 이가 많고, 새내기 주부들 중에는 음식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겉치장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 예쁜 음식들을 올리는 이가 많다. 깔끔하고 예측 가능한 모양새가 나와 줘야 하니 익히면 칙칙한 회색빛이 돌고 형태도 종잡을 수 없이 꿀렁해지는 생고기 대신 말 잘 듣고 때깔 고운 스팸이나 비엔나 소세지 등을 즐겨 쓴다. 빨간색 내는 방울토마토는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노란색 내는 달걀과 통조림 옥수수 알갱이와 가공치즈도 많이들 쓴다. 까만 김도 음식에 눈코입 붙이고 띠 두르는 데 많이 쓰인다. 게다가 밤낮 "냉장고 뒤져 휘리릭 만들었어요." 한다. 여염집 냉장고가 다들 대형마트 건물 신선식품 한 층을 망라하는 수준이다. 아마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두 가지가 아니었을 까 싶다.


1. 우리 집 냉장고에는 이런 게 늘 준비돼 있지. 왜냐하면 나는 '푸디'니까.
2. 난 이 정도 난이도의 요리쯤은 힘 안 들이고 '휘리릭' 만들 수 있지.


그래서 가끔은 그 "휘리릭" 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험악한 악플들이 닥지닥지 달리곤 하는 걸 목격하기도 한다. "이게 휘리릭 만든 거라고?!"


양식도 자주 올라온다. 영국음식도 종종 섞여 있다. 조리법을 어디서 보고 익혔을까 궁금한데, 나는 영국음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누리터에 영국음식이 올라오면 이게 영국음식이라는 걸 대부분 알아본다. 영국음식을 변형시켜 만든 음식도 알아본다. 지난 봄에는 나들이 음식인 스코치 에그Scotch eggs가 다음 첫 화면과 미즈넷에 몇 번 올라왔었다. 오늘은 불을 많이 안 써도 되는 찬 음식인 코로네이션 치킨Coronation Chicken이 올라왔다. 영국의 디저트나 티타임용 단 간식거리들도 자주 올라온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자기가 공들여 만든 음식의 제목이나 설명에 이게 영국음식이라고 밝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코로네이션 치킨'이라는 고유 이름이 있는데도 요리 이름과 국적은 사라지고 "카레를 넣은 닭가슴살"로 바뀌는 식이다. 여기에는 아마도 세 가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첫째, 자기도 어디선가 보고 따라해 놓고는 자기가 창작한 음식인 양 시치미를 떼려니 음식의 출처나 유래를 알면서도 일부러 밝히지 않는 것이다. 까만 마음의 발로이다. 아무래도 영국 음식은 이태리 음식이나 프랑스 음식보다는 덜 알려져 있으니 시치미 떼기 좋거든. '요리고수'라는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려면 좌우간 무조건 내가 고안한 레서피라고만 해야 하는 게 한국의 포탈 요리방 관행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타국 요리를 만들어 놓고는 냉장고에 있는 이런저런 재료를 가지고 본인이 뚝딱 창작해 만든 요리인 양 설명을 달아 놓는다. 논문 표절과 비슷한 경우인데, 아무도 모르겠지 하는 근시안적인 생각에서다.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요즘은 한국인이 안 가 있는 나라가 없으므로 잘 안 알려진 남의 나라 음식 갖다가 자기가 고안한 요리인 양 시치미를 떼면 곧 들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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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기가 만든 음식의 국적을 정말로 모를 경우다. 그래도 어디선가 보고 따라한 건 분명할 텐데, 조리법 출처도 안 밝히고 자기가 만든 음식에 대한 최소한의 공부도 안 하고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도 까만 마음에서다.

 

셋째, 영국음식이란 사실을 밝히면 내가 애써 만든 음식에 대고 먹어 보지도 않고 맛없어 보인다는 악플을 달까 염려돼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는 '미식의 나라'이고 프랑스 음식을 집에서 만든다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니 프랑스 음식을 만들어 올릴 때는 꼬박꼬박 이게 프랑스 음식이라고 밝혀 준다는 것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요리 이름이나 재료 이름도 용케 잘도 찾아서 적어 주고 있고. 진짜다. 포탈에 올라오는 요리 블로그들 글을 잘 살펴보라. 블로거들만 그런 게 아니라 잡지사들도 그런다. 며칠 전 한 여성지에서 특집으로 여름 베이킹에 관한 글을 냈는데, 영국 것을 무려 세 개, 프랑스 것 하나, 국적이 약간 애매한 것 하나를 조리법과 함께 소개했다. 그런데 그 다섯 가지 단음식 중 프랑스 것만 국적을 밝히고 있더라니까. 신문에서는 또 브리티쉬 클래식인 <브레드 앤 버터 푸딩>을 인기 후식으로 내고 있는 강남의 어느 레스토랑 소개를 하면서 "이 집만의 독특한 메뉴"라 쓰고 있질 않나.

 

프랑스인들이 크화썽과 커피 한 잔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 건 '쿨'한 것이고, 영국인들이 오후에 졸지 않고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 건 음식 후진국이라서 그런 것이고.


명성에 기댄다는 것, 편견에 갇힌다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니 프랑스 치즈들과 가공식품들이 맛과 품질에 비해 값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돼 있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

 

 

 

 

 

 

 

 

헤스톤 블루멘쏠의 스코치 에그 - 집에서 먹을 것은 노른자가 끈적하게 흘러내릴 정도만 익혀야 하고,

 

 

 

 

 

 

 

 

제이미 올리버의 스코치 에그 - 피크닉에 갖고 나가 먹는 것은 흐르진 않더라도 어쨌거나 촉촉해야 한다. 반 갈랐을 때 노른자가 냉면집 달걀처럼 너무 익어 회색 띠가 돌고 퍽퍽해진 것은 잘 못 만든 것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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