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차와 과자, 치즈와 조제고기, 음식과 그릇, 음식우표, 음악, 영국 이야기

[음식우표] 러시아 2005 - 블리니

댓글 6

음식우표

2014. 12. 2.

 

 

전체 113×110mm, 우표 한 장 30×40mm.
(클릭하면 큰 사진이 뜹니다.)

 

 

 

 

 

 

 

 

 우표 확대

 

 


러시아의 국민음식인 블리니blini가 우표에 담겼습니다. 단수는 블린blin이고, 블리니는 복수입니다. 블리니를 소개할 때 대개는 '러시아식 팬케이크'라고들 하는데, 제가 보기엔 두툼한 영·미식 팬케이크보다는 얇게 부친 프랑스 크레프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우표 전지 배경에 블린 한 장이 넓게 펼쳐져 있으니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크레프보다는 표면이 좀 더 거칠고 약간 더 두꺼워서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 블리니 실물

 

블리니는 러시아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아주 오래된 음식입니다. 노란색의 동그란 모양이 태양을 닮았다고 해서 겨울을 보내고 새 봄을 맞는 마슬레니짜Maslenitsa 축제 기간에 먹었고, 기독교가 들어오고 나서는 사순절Lent이 시작되기 전 일주일간 이를 먹었다고 하는데, 이 대목은 어째 영국의 팬케이크 이야기와도 비슷합니다. 영국에 팬케이크 뒤집으며 달리는 경주가 있는데 러시아에도 블리니 뒤집으며 달리는 경주가 있었다 하고요.

 

오늘날 블리니는 그냥 일상 음식으로 통합니다. 현지인들은 이를 주로 아침식사로 여긴다고 합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로띠 쁘라따(로띠 차나이)나 영미권의 팬케이크도 아침 음식이죠. (프랑스에서는 크레프를 언제 먹나요?) 저도 사실 아침에 호박 부침개나 부추 부침개 같은 걸 먹고 싶을 때가 있긴 합니다. 풀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먹던 습관이 있어 아침에도 기름진 음식을 잘 먹어요.

 

봄·여름 동안 부지런히 맛난 블리니를 부쳐 댄 여인은 추수철에 풍성한 수확을 얻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믿음들이 있어 여인들이 블리니 부치기에 정성을 많이 쏟았다고 하는데, 첫 번째 부친 것은 창가에 두어 가난한 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합니다. 부침개 부쳐 창가에. 훈훈합니다. 먹다 남긴 것도 아니고 먹기 전 첫 장을 말이죠. 남아서 남 주는 게 아니라 아껴서 남 주는 거라는, 시증조할머님의 이웃 돕기 실천법이 떠오릅니다. (부침개 첫 장은 항상 들러붙어서 망치기 마련인데 설마 그래서 남 주는 건 아니겠지요.) 갓 태어난 아기의 앞날을 축복하며 산모에게도 블리니를 먹이고 장례 때도 낸다고 하니, 러시아인들에겐 이 블리니가 그야말로 요람서부터 무덤까지 함께 하는 각별한 음식인 듯합니다.

 

블리니는 본래 귀리oat 가루로 만들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취향에 따라 어느 가루든 쓸 수 있어 밀가루 외에 호밀rye, 메밀buckwheat, 보리barley 가루도 쓰입니다. 얇아 보여도 누룩yeast을 넣어 부풀린 거라고 하네요.

 

 

 

 

 

 

 

 

아프터눈 티 테이블에 샌드위치 대신 올린 작은 블리니.

우표에서처럼 주황색 연어알과 검은색 철갑상어알을 곁들였다.

 


블리니는 영국 수퍼마켓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저도 몇 번 부쳐 본 적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러시아식으로 크게 부치질 않고 작게 부쳐 짭짤한 까나페용으로 많이 씁니다. 까나페용으로 부칠 때는 달걀 흰자를 따로 거품 내 섞기 때문에 도톰하면서 푹신하고 조직이 더 성깁니다. 아프터눈 티에 간혹 티 샌드위치 대신 올리기도 하고, 고급 레스토랑들은 전채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에 계신 분께서 블리니에 대해 사진과 함께 자세히 잘 써 주신 글이 있어 연결해 놓습니다. ☞ 러시아 현지의 블리니 모습

 

이 분 글에서는 안 보이지만, 원래는 주황색 연어알salmon roe과 함께 먹는 게 전통식이라고 하지요.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면 연어알을 곁들인 사진이 많이 나옵니다. 검은색 철갑상어알caviar도 같이 올릴 때가 있는데, 철갑상어알은 비싸서 아무나 막 먹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그런데, 저렇게 온 국민이 아침마다 알을 먹어제껴도 생태계엔 문제 없는 걸까요? 해당 생선들 씨 마르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나, 여기 영국인들이 아침마다 달걀 먹듯 늘 먹는 거라 하니 수급 조절 잘 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블리니에 곁들이는 부재료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연어알과 철갑상어알 외에도 고기, 생선, 버섯, 치즈, 양파, 감자, 사워 크림 등 짭짤한 것을 곁들여 식사처럼 먹거나, 잼, 꿀, 베리류, 농축유 등으로 단맛을 내 간식으로 먹기도 합니다. 크레프와 비슷하죠. 러시아와 프랑스는 과거 교류가 많았고 식문화에도 서로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양식을 먹을 때 전식-본식-후식 등의 코스로 시간 차를 두어 나누어 먹는 관습은 프랑스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비롯된 관습입니다. 그 전까지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우리 한국처럼 한상 차림으로 먹었었지요.

 

 

 

 

 

 

 

 


블리니 부치는 영상입니다. 크레프와 방법이 같습니다.

 

 

 

 

 

 

 

 



이번에는 크레프 부치는 모습입니다. 두 영상 모두 영업집을 다루고 있으므로 가정집에서 부치는 것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집에서는 T-막대가 없으면 반죽을 붓고 지짐판을 기울여가며 빙빙 돌려 펼쳐야 하죠. 블리니와 크레프의 차이점을 굳이 찾자면, 우선, 반죽이 좀 다를 것이고, 크레프가 블리니에 비해 좀 더 얇으면서 표면이 매끈하고 고른 색이 난다는 것, 윤기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약간 더 바삭해 보인다는 것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불이 약할수록, 약불에 좀 더 시간 들여 천천히 부칠수록 표면이 고와집니다. 블리니는 뒤집기 전에 표면에 기름칠을 한 번 더 해주네요. 이 두 번째 영상의 크레프, 참 얌전하게 잘도 부칩니다. 놀랍게도 프랑스가 아니라 뉴욕의 어느 카페입니다. 제가 본 그 어느 프랑스 크레프 집들보다도 빈틈없이 잘 부칩니다. 천성이 꼼꼼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온갖 기교를 부려 가며 '아트 블리니'를 부치는 모습입니다. 눈이 즐겁습니다. 아, 이거 또, 와플 기계는 안 사도 이 크레프 전용 지짐판과 T-막대는 하나 장만해야 하나 고민 되네요. 우리 집 영감이 이런 전병 좋아하는데.


우표에 블리니 외에 러시아식 홍차와 미니 베이글 비슷한 빵도 보이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따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