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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과자, 치즈와 조제고기, 음식과 그릇, 음식우표, 음악, 영국 이야기

신라호텔 라연 후기 La 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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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과 세계 음식

2021. 5. 1.

 

 

 

 

 

라연에 관해 썼던 글들을 먼저 읽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삼치는 맛있는 생선이었습니다

☞ 참 어려운 음식, 김치

☞ 아름다운 한식 그릇

☞ 한식 백반 구성 시 고려해야 할 점

한식 샐러드와 드레싱

 

 

미슐랑 별 세 개를 받은 식당이라고 하면 손님들은 '과연?' 하며 촉각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오감을 총동원해 평가를 하려 듭니다. 제가 이 블로그에서 밤낮 한식과 작금의 한국 식문화에 대해 지적질을 해 대니 한식을 깔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많이 계실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식에 맛있는 음식 많잖아요. 양념고기구이들도 참 맛있고요. 섬유질도 많이 섭취할 수 있고, 장내 유익균 조성에도 아주 유리한 식문화죠. 다만, 재료를 중복해서라도 많이 차려 내야 한다는 '가짓수 많이' 식단 구성 관습과 음식을 내는 방식은 좀 바뀌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식들이 지나치게 매워지거나 달아지는 것에도 비판적이고요. 

 

저는 사실 한식당에 대해서는 늘 연민을 느낍니다. 한상차림이든 코스든 한식당은 마른 수건 쥐어짜서라도 산해진미를 차려 내야 한다고 다들 기대를 합니다. 늘 보는 우리 음식이니 응당 값 싸면서 푸짐해야 한다고 여기죠.

 

미슐랑 가이드 서울판이 나온다 하니 수지 안 맞아 문 닫았던 호텔 한식당들이 부랴부랴 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그런데 애써 별을 얻은 한식당들도 명성이나 사명감 때문에 근근히 이어가지 이문이 많이 남지는 않을 겁니다. 서양에서도 미슐랑 별 얻은 식당들은 인건비, 재료비로 다 나가 이익이 안 난다면서요. 그러니 손 많이 가는 한식은 말할 것도 없죠.

 

치즈와 조제고기 사다 집에서 샤퀴테리 보드 즐길 때마다 저는 한식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쉽니다. 가장 인기 있는 서양음식인 이태리 음식을 떠올려 봅시다. 장인들이 수 백년에 걸쳐 다듬어 온, 그 자체로 완성도 있는 식재료들 덕에 한식처럼 고생고생해서 차려 내지 않아도 맛있고 보기에도 좋은 음식들이 뚝딱 나와 줍니다. 치즈와 조제고기만 잘 활용해도 맛 내느라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죠. 다채로운 파스타 건면들은 또 어떻고요. 게다가 이런 식재료들로 수출은 또 얼마나 많이 하게요. 갓 구운 피짜나 빵 위에 프로슈토 휘휘 감아 몇 점 올리기만 해도 근사하고, 치즈 슥슥 저며 흩뿌리기만 해도 맛이 풍성해집니다. 한식은, 어휴, 한 나절을 다 써 가며 반찬 서너 가지 만들어도 먹을 만한 밥상이 될까말까.

 

한식 준비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저는 라연에서 한 끼 184,666원 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비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 라연 한식기 예찬글에 있는 음식 사진들을 유심히 보셨나요? 눈썰미 있는 분들은 재료 다듬고 썰고 준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 (깨알 잘생긴 것 보고 깨알도 핀셋으로 하나하나 고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잘 준비해 내는 한식당은 맛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자선사업을 하고 있구나.'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연과 같은 층에 컨티넨탈 식당이 있는데요, 거기서 일하는 분 말씀에 의하면, 라연은 주방 인원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더군요. 한식이라서 값은 많이 받지도 못 하는데 준비 인력은 그토록 많이 필요로 하는 게 한식당들의 처지란 말이죠. 그릇 설거지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한식 파인 다이닝 식당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사합니다.

☞ 한식의 처지

 

이 날 라연은 어땠냐면요,

일단, 먹는 환경, 서비스 질, 음식 내는 품격은 최고입니다. 별 세 개, 당연합니다. 끄덕끄덕.  

 

음식도 훌륭합니다. 진짓상의 김치와 반찬 구성만 빼고는 다 맛있었고, 서양 테크닉과 서양 재료의 조잡한 변용 없이 한식 재료들만 쓴 것이 뚝심 있어 보였으며, 세련된 맛에 조리 솜씨execution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별 세 개, 당연합니다. 끄덕끄덕.

 

그런데요,

다 먹고 나서 뭔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일행 셋이서 왜 그럴까, 머리 맞대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너무 정제해 한식의 푸근한hearty 맛, 재료의 생생한 맛과 향, 맛깔난 양념 맛이 다 사라져서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인의 일상 한식을 떠올릴 때 저는 가장 먼저 고추장·고춧가루를 쓴 빨간 음식과 간장, 된장, 마늘이 생각 나는데, 라연의 음식에서는 간장을 빼고는 이것들이 전부 배제돼 있습니다. 좋든 싫든 '빨간 음식'과 '강렬한 맛'은 현대 한식의 큰 특징인데요. 마치 '우리 라연의 주방 팀은 한식의 '거친' 특성들이 부끄러우니 이런 것들은 다 배제하고 일식에 가깝게 정제해서 내겠어요.' 느낌이 들었달까요. 삼치간장구이에서 이 느낌이 특히 강하게 들었었는데, 라연의 삼치구이는 한식이 아니라 일식이라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한식의 특성을 많이 지운 미슐랑 쓰리 스타 한식을 받고 나니 한국인으로서 어쩐지 섭섭합니다. 

 

전에 BBC에서 아시아 음식 기행기를 내 보낸 적이 있어 제가 이 블로그에서 다뤘었는데 기억하십니까? BBC 측에서 '인상적인 한식'으로 빨간 음식들을 얼마나 많이 꼽았는지 보십시오.

BBC에서 조만간 소개할 헤어리 바이커스의 한식

 

영국인 진행자 둘이 여러 아시아 나라들을 둘러보고 나서 다른 식문화가 가지지 못 한 한식의 특징으로 '과감하고 화끈한 맛'을 꼽습니다. 이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입니다. 그런데 라연의 한식은 어찌된 일인지 영국 전통음식을 재해석해 선보이는 헤스톤 블루멘쏠Heston Blumenthal의 <디너Dinner> 음식들보다 맛이 심심합니다. 우리가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불평하는 그 영국음식보다도 밋밋하고 심심한 게 라연의 음식들이란 말이죠. 음식에서 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의아했는데, 그 많은 코스 음식 중 향이 기억 나는 음식은 마지막의 딸기 후식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코스들은 마치 재료를 끓는 물에 한참 담가 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을 전부 빼낸 뒤 양념을 최소한으로 입힌 듯했습니다. 향은 차치하고 재료 맛조차 나지 않아 대화도 일절 중지한 채 집중해서 맛을 느끼려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간장 맛만 기억에 남습니다. 라연은 '파인 다이닝'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날 함께 했던 일행 모두 라연의 음식은 '뺄셈을 너무 열심히 한 음식'이라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디너 바이 헤스톤 블루멘쏠

 

2월이라 아직은 식물성 재료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때라서 그랬는지 같은 재료의 중복도 많이 보였습니다. 식감을 달리 해서 내기는 했지만 밤은 아홉 코스 중 무려 일곱 코스에 등장했고, 식감과 맛이 독특해 한 알만 씹어도 그 잔상이 오래 갈 수 있는 은행은 두 코스에서 먹었으며, 배추 종류는 수시로 나오는데다 대접으로 내니 양도 많아 한숨 쉬며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식당이 소중합니다. 이토록 우아한 한식 밥상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누리터에서 방문기를 보니 참 많은 이들이 이 곳에서 특별한 날들을 기념하고 있어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꽃다발 준비해 청혼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화이팅!) 라연이 한식의 특장점을 과감히 살려 좋은 음식들을 계속 내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