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JESUS & 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12강.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으라 (아가 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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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2021. 3. 27.

 

♣ -.12강.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으라 (아가 2:14-17).-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모하듯 하는 그 마음이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되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게 하옵소서. 작은 여우가 어떤 짓을 하는지, 어떻게 포도원을 허무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옛말에 호랑이 가죽은 탐이 나는데 막상 호랑이는 무서워서 잡기 싫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마치 돈은 좋은데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기는 싫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가고 싶은데 죽고 싶지는 않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인생에 있어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것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들과 목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목사님이 그럽니다.

자기는 바울과 같은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과 같은 능력을 행하여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부흥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으로 인하여 당한 핍박과 고난은 생각하지 않고 각종 능력들을 행한 것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행할 때는 폼 나고 멋이 있는데 매 맞고 욕먹고 고난과 핍박을 받은 것은 싫은 것입니다.

 

바울 같은 목회를 하려면 바울이 당한 것을 그대로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좋은 것만 차지하고 나쁜 것을 버릴 수는 없어요.

바울을 본받으려면 바울의 모든 것을 몽땅 받아야지 선별해서 받을 순 없는 것입니다.

영광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엄청 고생을 했어요.

바울은 밥 먹듯이 매 맞고 욕먹고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았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겠어요.

 

우리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술람미를 부러워합니다.

우리도 술람미처럼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사랑만 받은 것이 아니고 엄청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하였어요.

우리는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엄청난 미움을 받고 고난당한 것은 간과하고 있어요.

술람미의 사랑 속에는 고난과 영광이 함께 담겨져 있어요.

 

감탄고토(甘呑苦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내가 차지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 주고자 합니다.

남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 남을 사랑하고 싶어하지는 않아요.

 

무엇을 해도 자기중심으로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한 것을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 뭐냐?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신을 찾는 것도 자기를 위하여서이고,

사랑을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하여서이고,

봉사와 충성을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하여서입니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 믿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왜 힘든가 하면 자기 뜻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척척 들어주면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심보인지 우리 소원과 정 반대로 우리를 끌고 가잖아요.

 

성도의 인생은 마치 40년 광야 길과 같아요.

꼭 힘든 길만 골라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입에서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런 코스를 정하였어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왜 광야 길로 인도 했을까요?

하나님이 애굽 왕 바로를 혼내고 애굽에 재앙을 내릴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을 고생시키지 않고 가나안까지 무사히 인도하실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무슨 원한이 많아서 40년 동안 올라갔다 내려갔다 똥개 훈련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개고생을 시키고 있는가요.

 

끌려가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너무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런 개고생을 시킵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가학(加虐)자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달라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것을 차압 하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사랑으로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그 광야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이에요.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 내어 놓고 ‘얘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사랑이 이런 건가요?

우리의 사랑과는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의 역설적인 사랑 법을 알지 못하면 실족을 해요.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자리에서만 알게 되어요.

탕자 비유에서처럼 집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는데 집 떠나 개고생을 하고 나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아요.

 

자식들이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다 자기는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기 닮은 아이를 키워보아야 비로서 야!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나를 키웠지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자란 진노의 자식들이에요.

다만 그 속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담겨져 있을 뿐이에요.

아브라함의 언약이 담겨져 있어도 애굽에서 출생하고 애굽의 사고로 가득찬 자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아니야!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할 수 밖에 없는 장소로 이동시킨 것입니다.

그게 광야에서 그 노정대로 인도하심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으로 밀어 넣고 인간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다 토악질하게 만듭니다.

광야로 빼내 놓고 이스라엘 속에 있는 죄라는 죄는 다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런 놈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당을 용서해 준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이런 짐승같은 자들을 내 백성이라고 보듬고 있는 하나님의 내 마음을 좀 알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죄를 깨닫는 것에 비례해서 농도가 달라져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면 많이 감사하고 모르면 불평불만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작업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자기백성들에게만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법이에요.

이걸 아셔야 해요.

고난을 통해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 담겨져 있어요.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고난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평안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에 가고 싶어 해요.

 

저도 그래요.

편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아프고 힘든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변에서 자꾸만 골치 아픈 일들이 일어나요.

 

TV 드라마를 보세요.

드라마의 대 부분의 주제가 사랑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사랑이 단 하나도 편하게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사랑이 이루어지는데 엄청난 반대가 있고 문제가 발생해요.

고생 고생하면서 이루어져요.

 

저는 드라마를 우리 신앙과 연관을 시켜서 보아요.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단 한 사람도 편하게 산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데에도 엄청난 아픔과 핍박이 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 편안하지 않아요.

갖가지 어려움들이 닥쳤어요.

 

사랑은 반드시 방해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샘하는 자들이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방해 했어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니까 원수들이 일어나서 술람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성도들도 예수를 믿으면 핍박하는 자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술람미를 핍박한 오빠들과 같은 거짓 목사들이나 예루살렘 여자들과 같은 거짓 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이를 아시고 미리 말씀해 주셨어요.

 

요 15: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 생각에는 예수 믿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여야 하잖아요.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되었다고 해야 하잖아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폼 나게 자랑 할 것이 아닙니까.

 

야 저 사람 예수 믿고 팔자가 피었데!

그런 소리 듣고 싶잖아요.

우리가 바라는 예수는 이런 예수에요.

 

실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간증되는 예수가 이런 예수에요.

사업에 실패해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거기서 하나님께 은혜 받고 내려와서 다시 사업에 성공하여서 십일조를 천만 원씩 하는 장로가 되었다는 식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나 때문에 망한다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 때문에 고생 무지 무지하게 하게 생겼다 그러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에서 간증되는 것하고 예수님은 정 반대로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과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고 계세요.

 

예수 믿으면 미움 받고 고생을 한다고 하는데 누가 예수를 믿겠어요.

저도 이런 예수는 믿기 싫어요.

절 더러 예수 믿으라고 했다면 안 믿어요.

이런 예수를 뭣 하러 믿겠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고 있기 때문에 죽지 못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예수 믿어서 덕을 보려고 하지 누가 미움 받고 고난당하는데도 예수를 믿겠어요.

우린 이런 예수를 믿기 싫어요.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주는 예수를 믿고 싶어요.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전부 다 도망을 치지요.

저부터도 도망치겠어요.

난 도망치지 않고 의리를 지킬 거야! 라고 할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만약에 누가 도망을 간 제자들을 향하여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저런 나쁜 인간들이 있나!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이 뭔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신앙을 감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교인들이 있어요.

 

예수님의 기적행함을 보고서 스스로 예수 믿겠다고 따라다니는 군중들이 있고!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하여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 온 사람은 교인이고,

예수님이 불러서 교회에 온 사람은 성도에요.

 

교인인지 성도인지 마귀가 잘 알아요.

마귀도 교인과 성도를 달리 대우해요.

교인은 가만히 내버려두지만 성도는 시비를 걸어요.

 

교인과 성도의 차이는 신앙생활의 주체가 누구이냐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교인은 신앙생활의 주체가 자기에요.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해야 한다고 해요.

 

예수를 믿어도 자기가 믿어야 하고!

봉사와 충성을 하여도 자기가 하여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자기가 하여야 해요.

 

성도는 신앙생활의 주체가 하나님(예수님)이에요.

성도는 모든 신앙생활을 하나님(예수님)이 하게 하신다고 믿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증거해요.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고!

교회에 온 것도 하나님이 오게 해 주셔서 왔다고 하고!

봉사와 충성을 하여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서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이 지키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자기 자랑을 하지만,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자랑 해요.

 

육으로 난 자는 교인이고,

하늘로서 오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성도에요.

마귀는 그 속에 예수의 영이 있는 사람과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요.

 

예수이 영이 있는 사람은 성도이고,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은 교인이에요.

 

마귀는 교인들은 핍박하지 않아요.

가만히 두어요.

세상 사람들도 교인은 좋아해요.

말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소통이 되고 거부감이 없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성도는 핍박해요.

세상 사람들도 성도는 싫어해요.

세상 사람들과 성도는 일단 소통이 안 되어요.

가치관이 하늘과 땅처럼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육에 속한 교인과 영에 속한 성도는 소통이 안 되어요.

육에 속한 교인들이 영에 속한 성도들 간에게 커다란 담이 막혀 있어서 소통이 안 되어요.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교인들은 못 받았어요.

자기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교인이고!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셨다고 믿는 사람은 성도에요.

마귀는 예수님이 사랑을 하는 성도와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교인을 귀신같이 알아요.

 

이걸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들과 비교해 볼게요.

술람미는 솔로몬이 사랑을 했어요.

하지만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이 솔로몬을 사랑했어요.

 

솔로몬을 예수님이라고 해 보세요,

술람미와 같은 여자는 예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준 12제자이고 성도에요.

반면에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다니는 군중들이고 교인들이에요.

그러니 술람미는 핍박이 많은데 예루살렘 여자들은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술람미가 솔로몬을 짝사랑하고 있었으면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하지 않았어요.

저 혼자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니 난리가 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럽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미움 받는다고 하잖아요.

 

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세상이 미워합니까?

이는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이에요.

세상 쪽에서 보면 예수님이 미우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도 미운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께 속한 것은 다 미워해요.

이게 세상의 본질이에요.

이로보건데 세상과 예수님은 원수관계임이 드러납니다.

세상과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관계에요.

 

예수님은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에요.

빛과 어둠은 상극이에요.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에요.

쉬운 말로 원수지간이에요.

 

예수님과 세상은 하나 될 수 없어요.

예수님에게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도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성도와 교인이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둘이 사이가 좋아 질수가 없어요.

 

이는 술람미에게는 솔로몬의 사랑이 담겨져 있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는 솔로몬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솔로몬의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로 원수냐 아니냐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천국으로 간 강도와 지옥으로 간 강도가 나누어진 것과 같아요.

똑 같은 강도인데 예수님이 사랑한 강도는 천국으로 가고 예수님이 사랑하지 않은 강도는 지옥으로 갔어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인간이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라는 것은 천국가고 지옥 가는데 전혀 참고할 사항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기 꼬라지로 실망하지 마세요.

 

우린 모두가 강도들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강도에요.

그런데 어떤 강도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고 어떤 강도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없어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강도가 할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사랑을 담아 주면 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예수님께서 사랑을 담아 주셨어요.

그래서 일평생 강도짓만 하고도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세계로 나누어져요.

 

민족적인 의미에서 보면,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비언약의 후손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언약적인 의미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인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새 언약인 은혜 아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세상에 속한 자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로 나아온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면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의를 자랑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는 인간의 의로서 마귀적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신앙을 악하다고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신앙을 악하다고 한 것은 율법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율법신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고 믿었어요.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신앙을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신앙의 상징인 성전을 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다고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지었어요.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웠어요.

새 언약은 반드시 옛 언약을 폐하면서 주어져요.

옛 언약을 폐하지 않으면 새 언약이 될 수가 없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하지만 복음은 용서하고 살리는 기능을 해요.

율법은 인간의 행함을 요구하지만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해요.

율법은 법이지만 복음은 은혜에요.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드러내고 있어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옛 언약에서 빼냈어요.

구약의 예루살렘 성전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 아래 있는 교회이고,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은 은혜라는 새 언약 아래 있는 교회에요.

 

예수님이 12제자들을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빼냈어요.

그러니 율법이라는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이라는 동네 사람들은 전부 까만 옷을 입고 있는데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흰옷을 입혀 준 것입니다.

전부 까만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불평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흰 옷을 입혀주고 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뭔데 흰 옷 입고 있어!

자기들이 졸지에 다름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너희는 뭔데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어!

그러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혀주니 형제들이 시기가 나서 죽인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채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채색 옷은 무지개 옷으로서 언약의 옷이에요.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다는 약속의 옷이에요.

영적으로 구원의 옷입니다.

마치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사랑을 받은 것과 같아요.

 

그러니 사랑받지 못한 자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핍박하는 자들이 일어나요.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걸 지금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면 반드시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핍박을 해요.

지금 그대로 드러나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전하니 성화주의자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이 반발하잖아요.

 

이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왜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느냐!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니까 교인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헌금도 하지 않고!

교회도 나오지 않고!

충성 봉사도 하지 않고!

주일성수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복음을 핑계대고 이런 짓을 하는 교인들이 있나 보아요.

저는 한 번도 이런 것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 적이 없어요.

다만 이런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였어요.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는 것이라고 했어요.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아요.

아니면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면 교인들이 안할까봐서 지레 겁을 먹고 그러는 것 같아요.

암튼 새 언약을 증거하면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반발을 합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새 언약을 증거하여야 해요.

 

지금 예수님이 12제자들을 가지고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를 드러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첫 번째 세상이 주는 의미에요.

 

그러면 두 번째 세상이 주는 의미는 소속이에요.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있어요.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께 속한 자이고 뱀의 후손은 마귀에게 속한 자에요.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몰고 왔어요.

그럼 세상나라는 자연히 마귀의 나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 세상이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왜 예수님을 미워합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어요.

마귀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하늘에서 큰 전쟁이 있었어요.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이에요.

그런데 그 전쟁에서 예수님이 이겼어요.

 

마귀가 하늘에 있을 자리가 없어서 땅으로 쫓겨났어요.

분(忿)을 품고 땅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땅에 보니 예수님 편에 붙어 있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얻어맞은 것은 성도들에게 앙갚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러 주는 것입니다.

애들아! 이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단다!

그러니 너희들이 내 것인 줄 알고 핍박을 할 것이다.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아! 내가 예수님 편이라서 그러는구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두 세계로 만들어 놓았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 구도(構圖)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께 속한 자이고, 뱀의 후손은 마귀에게 속한 자에요.

우리 눈에는 모든 인간이 한 통속인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상극인 두 부류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으로 구분하지 않고 조상으로 구분해요.

민족이나 혈통이나 색깔로 구분한 것이 아니고 누구 소속이냐!

네 조상이 누구냐! 로 구분을 합니다.

 

이런 구도는 인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든 구도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면 육적으로 보면 뱀의 후손이 이겨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요.

 

구약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다윗 왕이 있어요.

이 두 사람은 예수님과 마귀가 대리전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지요.

그러면 다윗은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치면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 탄원 시가 시편이에요.

 

다윗은 시편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일컬어 다양하게 표현했어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고!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고!

여호와는 나의 피할 바위라고 했어요.

이는 모두가 적으로부터 은신할 도피처에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술람미가 사울에게 핍박을 받는 다윗과 같아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사울처럼 술람미을 핍박하고 있어요.

그러니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바위 틈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숨어 있다고 합니다.

 

아 2:14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솔로몬은 술람미를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숨어 있는 산비둘기라고 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집은 마치 피난처와 같아요.

술람미는 은밀하게 숨어 있는 것입니다.

 

왜 숨어 있습니까?

사방에 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위틈 낭떠러지에 숨어 있는 비둘기처럼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숨은 바위틈 낭떠러지에 지은 집은 솔로몬의 품과 같아요.

솔로몬의 사랑 즉 솔로몬의 품이 곧 술람미가 안식을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솔로몬의 사랑이에요.

 

솔로몬의 사랑만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게 하는 힘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며느리가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를 남편의 사랑으로 이겨내는 것과 같아요.

미운 시누이들이 핍박을 남편의 사랑으로 이겨내는 것과 같아요.

시집살이의 피난처는 남편의 사랑이고 품이에요.

 

바위 틈 낭떠러지에 지은 집은 누구도 접근 할 수가 없어요.

이는 솔로몬이 술람미를 바위틈 낭떠러지에 지은 집처럼 은신처가 되어 준다는 말입니다.

술람미에게는 솔로몬이 이런 집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아무리 술람미를 핍박한다 하여도 술람미를 죽일 순 없어요.

시기와 질투는 받을 수 있어도 목숨은 해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만인들 앞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라고 공표(公表)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공표는 솔로몬의 보호 아래 있음을 드러나기도 하지만 반면에 적으로부터 공격의 타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심 할 수 있는 것은 왕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왕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고난을 당하여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는 미움당하는 고난을 통하여서 누가 왕의 원수인가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왕에게 속한 자들을 내어 놓음으로 인하여 왕을 미워하는 자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한 것입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귀의 자녀가 누구인지 드러내게 하는 일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마귀의 세력을 잡고자 던진 미끼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지요.

이리를 잡으려는 미끼로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아주 고약하지요.

제자들을 내어 보냄으로 통하여서 누가 이리(마귀) 인지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도를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만유보다 크시므로 그 누구도 아버지께서 허락할 때까지는 성도를 죽일 수가 없어요.

성도가 죽고 사는 문제는 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피난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석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성도가 평안히 거할 낭떠러지 바위틈 은신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암탉이 새끼를 나래 아래 보호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시려고 오셨어요.

예수 안은 사망의 권세가 넘볼 수가 없어요.

 

술람미에게 솔로몬 품이 그러합니다.

술람미야 숨어 있지만 말고 이젠 얼굴을 내 밀라고 합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내 품에서 빼앗을 수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바위틈에서 얼굴을 내밀고 노래를 하라고 합니다.

구원을 즐거움을 누리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성도들의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는 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누구인고 하니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에요.

이를 육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라고 합니다.

 

아 2:15-17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솔로몬은 술람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을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라고 합니다.

일차적으로 포도원은 술람미의 마음을 말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의 사랑에 취하여 있을 술람미의 마음에 근심걱정거리로 어둡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마음속에는 솔로몬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 사랑을 예루살렘 여자들이 시기해요.

알다시피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핍박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못된 오빠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았어요.

 

핍박하는 자들은 술람미를 솔로몬의 품으로부터 떼어내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 즐거움들을 누리지 못하게 할 순 있어요.

외부적인 핍박으로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과 비교해 봅시다.

 

마귀는 우리의 구원은 빼앗아 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구원의 즐거움은 빼앗을 수는 있어요.

육신의 고통이나 마음에 참소로 빼앗고자 합니다.

마치 사단이 욥을 고난으로 힘들게 할 수는 있어도 욥의 생명은 건들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마귀는 마음에 참소를 해요.

율법으로 우리 행함을 참소해요.

‘너 그러고도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있느냐’ 라고 참소해요.

마음이 마귀에게 참소당하면 기쁨이 사라져요.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요.

 

이런 참소를 누가 하느냐 하면 거짓 종들이 해요.

육에 속한 자들이 율법으로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을 여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겔 13:4절.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거짓 선지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해요.

새 언약 시대에 다른 복음은 옛 언약을 전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에요.

 

마귀는 율법으로 참소해요.

우리의 육신을 율법으로 참소해요.

너 말씀대로 살았느냐고 닦달을 해요.

율법은 항상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해요.

 

우리의 육신은 율법의 참소를 이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육신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육에 속하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말씀을 육으로 해석해요.

 

성경은 육으로 보면 인간이 지켜야 할 것으로 해석이 되어져요.

그래서 항상 거짓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너희들 왜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사느냐고 추궁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다른 복음은 은혜로 부르신 것을 인간의 행함으로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는 거예요.

은혜로 준 구원에 인간의 행위를 섞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다는 것을 안 믿는 것입니다.

 

골 2:14-16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 하셨어요.

그러니 이젠 율법의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어요.

율법 속에는 성전도 있고!

안식일도 있고!

제사도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신앙을 도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나 12제자나 바울을 괴롭힌 자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었어요.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나 12제자나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까?

이는 율법신앙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행함도 의가 되지 않아요.

새 언약은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여야 하는 일이었어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발각되면 배도자로 낙인찍혀서 가산을 적몰당하고 죽임 당하기까지 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는 이단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전부 지하 카타콤으로 숨어들어서 믿음을 지키고 살았던 것입니다.

숨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고 인권이 있어서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지 않아요.

복음 전한다고 감옥에 가두지 않아요.

그러나 영적인 상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요.

지금은 인간의 의는 의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의라고 하면 온갖 비난과 수모와 모함과 후욕을 들어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은 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부정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거부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행함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교권주의(敎權主義)자들이 발끈해요.

 

교권주의자들은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해요.

교권주의자들은 교회를 마치 구약의 성전과 같이 생각해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을 의로 가르치는 율법신앙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목사는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해요.

그러면서 주장하는 내용이 성화에요.

 

성화주의가 율법주의에요.

말만 다르지 그 내용은 동일해요.

율법이라는 말 대신 성화라고 할 뿐이에요.

 

교회를 강조하고!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십일조를 강조하고!

목사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 보수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반드시 이런 것들을 붙잡아선 안 된다는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교권주의자들이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를 허무는 이단이라고 온갖 비난을 퍼부어요.

 

이 사람들은 십자가 도를 전하면 교회가 무너지는 줄을 알아요.

성도들이 교회에 안 오는 줄 알아요.

성도들이 아무 것도 안하는 줄 알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 당신같이 가르치면 누가 교회 오겠느냐고 말해요.

 

누가 주일날 교회에 오고!

누가 헌금하고!

누가 교회에 봉사하고!

누가 목사의 말을 듣겠느냐! 라고 해요.

 

이 사람들은 성도 각 사람들 속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말씀대로 가르쳤다가 진짜 교인들이 아무 것도 안하면 교회 문 닫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염려가 되고 불안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신앙을 자기가 관리하여야 안심이 되어요.

결국 본인이 예수를 안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뭔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못 믿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안에 성령이 없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과 달과 절기를 폐하였다고 하니 화를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새 언약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전하면 교회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직장인데 무너지면 실업자가 되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목사가 설 자리가 없어지잖아요.

목사라는 권세를 행사하자면 교회라는 조직이 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목사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자칭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해요.

자신들이 무슨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계시를 받는 줄 알아요.

자신이 마치 하나님과 교인들을 연결해 주는 중보자인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았어요.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은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는 차원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이 모든 성도들에게 다 임했어요.

성령이 계시해 주어요.

 

요일 2: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이 성도들 안에 오셨어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 안에 거하게 해 주세요.

그러니 새 언약 아래서는 목사가 계시를 독점화 하거나 소유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성령께서 말씀을 증거케 하고 깨닫게 하는 일을 하세요.

목사는 이 사실을 증거하면 되어요.

물론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는 말씀을 깨닫고 증거하는 은사를 주셨어요.

그러나 그 은사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새 언약을 증거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종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내 소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사는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니까 고정된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나는 목사이니 당신은 내 말을 들으라고 하면 안 되어요.

성도들에게도 목사의 설교를 판단하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알아서 성도를 간섭하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학교 나와서 목사 안수 받는다고 하나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면허를 받은 것이 아니에요.

교단에서 안수하는 목사는 교단의 멤버이지 하나님이 세운 종이 아니에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지 교단의 안수를 받은 것으로 자랑하면 안 되어요.

 

구약에 보면 궁중 선지자들과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이 있어요.

엘리사 시절에 보면 선지 생도들이 있다고 하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신학교에요.

 

이 사람들이 나중에 궁중 선지자가 되어요.

왕에게 빌붙어서 먹고사는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왕의 눈치나 살피고 좋은 말만 하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 때문에 나라가 망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타락하고 교단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라는 직책으로 먹고사는 자들이니 시류에 편승하여 교인들 등쳐먹어요.

구약 성경의 선지서에 보면 선지자들이 욕을 끌어 붇는 자들이 바로 이런 궁중 선지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놈들은 입에 뭔가 채워주면 평강을 외치고 안 채워주면 저주를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 백성들이 그 저주가 무서워서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꼭 지금 교인들이 목사들의 저주가 무서워서 갖다 바치는 것과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진리를 모르면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럴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세워서 궁중 선지자들 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가서 왕을 책망하고 궁중 선지자들이 거짓선지자들이라는 것을 폭로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중 선지자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을 죽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참 선지자로 보낸 것입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파송한 것도 이와 같아요.

예수님이 12제자들을 어디로 파송합니까?“양”을 “이리” 가운데로 파송하지요.

예수님 눈에는 자칭 제사장이고 자칭 선생 노릇하면서 가르치는 자들이 “이리” 들이었어요.

 

이리란 삯꾼이에요.

교인들을 통하여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자들이에요.

이 시대 육에 속한 목사들을 말해요.

 

바울이 그랬어요.

 

행 20:28-36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바울은 내가 떠나고 나면 반드시 이리처럼 양의 피를 빨아 먹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추종하게 하고 그들의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한다고 합니다.

이 시대 말로 돈을 빼앗는다고 합니다.

목사직을 이용해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지금도 이런 맥(脈)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면 꼭 토를 달아요.

그렇지만 그래도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믿음도 있어야 하지만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의 행함을 율법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은 인간들이 노력해서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산 나무는 싹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의 다른 표현이에요.

행함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방귀를 뀌면 냄새가 나듯이 예수 믿으면 어떤 행동(행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뭔가 풍겨요.

안 하던 짓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산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 같이 믿음이 있으면 어떤 일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감사가 나오든지!

섬김이 나오든지!

봉사와 충성이 나오든지!

열심과 정성이 나오든지!

 

만약에 믿음을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건 죽은 귀신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집구석에서 놀면서 나 믿는다 그런 건 없어요.

이러면 꼭 덤비는 자들이 있어요.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꼭 뭔가를 하여야 합니까?

그러니 야고보가 그러잖아요.

넌 귀신이라고!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행함이 안 나온다고 하잖아요.

 

죽은 믿음이란? 헐벗은 교인이 교회에 왔는데 못 본척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 속에 믿음(주님)이 없으니 형제 사랑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믿음에 대하여서는 아브라함을 말하고 라합을 말하는 것도 이 사람들은 믿음이 덮치니 이상한 일들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것이나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하고 숨긴 것과 같은 이상한 일을 믿음이 일으킨 사건이에요.

그걸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 안에서 일을 해요.

 

연보도 하게 하고!

교회 청소도 하게 하고!

성도를 섬기게도 하고!

전도나 구제도 하게 하고!

 

집안에 어려운 일이 닥쳤는데도 감사가 나오게 하게 하고! 사람이 이상해요.

좌우지간 안하던 일들을 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그 분이 오셔서 뭔가를 움직이게 만들어요.

그러면 아! 저 분 속에 그 분이 일하시고 계시구나 아는 것입니다.

 

목사는 믿음을 주는 자가 아니에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세요.

초대교회 당시에도 지금처럼 교회 안에 너도 나도 믿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하는 교인들이 있었어요.

진짜와 가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서 항상 있어 왔어요.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함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믿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증거하면 되어요.

그러면 믿음을 가진 성도는 목사가 하라 하지 말라 말하지 않아도 그 속에 믿음이 알아서 해요.

 

야고보서는 우리의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하기 싫거든 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니 넌 가짜란 말입니다.

하기 좋아하는 것을 보니 넌 진짜구나 그러는 거예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교인들에게 행하라고 할 이유가 없어요.

강요된 신앙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 안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살아서 알아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믿음 없는 사람은 스스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도 행함을 말하지 말아야 해요.

왜냐하면! 믿음을 받은 사람은 강요하지 않아도 그 안에 믿음이 살아서 역사를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안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리 같은 목사들은 스스로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으면 안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도 행함을 강요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면 언짢아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는 창세전 언약을 전하면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교단에서 안수 받은 직업적인 교권주의 목사들이 길길이 날 뛰어요.

그 이유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교인들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을 원치 않아요.

항상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주종(主從) 관계를 형성해 두고자 해요.

자신은 항상 상좌에 앉아서 선생노릇하고 대접을 받는 으뜸 노릇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인들이 아는 척 하면 신학적 지식을 동원하여서 어디 감히 목사에게 가르치려고 하느냐 라는 식으로 교인들을 겁박해요.

자칭 주의 종! 주의 종!

그러면서 말이에요.

 

속지 마세요.

신학이라는 학문에서 영생이 나오지 않아요.

영생은 예수님의 피에서 나와요.

이걸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신학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 피를 말해요.

 

암튼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사기꾼이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그 속에 성령이 계신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아니~ 못해요.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알아서 세우세요.

신학교에 안 다녀도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할 수가 있어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 그 누구라도 증거 할 수가 있어요.

 

예수를 증거하는데 무슨 제약이 필요 합니까.

예수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잖아요.

예수는 학문적으로 연구하여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믿을 분이에요.

그러니 성령을 받으면 누구라도 예수를 증거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학문으로 생기지 않아요.

믿음은 신학교에서 줄 수가 없어요.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는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아요.

 

믿음은 성령이 오면 자동으로 주어져요.

신학교 안 다녀도 주어져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신학을 몰라도 예수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요.

 

흔히들 교권주의 자들은 12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웠다고 합니다.

이를 마치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처럼 말해요.

이걸 신학 교육의 당위성을 두고자 해요.

 

이들의 주장대로 3년 동안 배웠다고 합시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니 어떻게 했나요.

다 도망갔지요.

3년 동안 배운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이는 예수는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고 하는 일들을 수없이 경험하고 봐 왔지만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 때는 하나님이라고 믿었지만 막상 문제가 생기니 마음으로 안 믿어졌어요.

그러니 다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나자 돌변해 버립니다.

이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기 시작했어요.

죽음도 불사하고 말이에요.

결국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성령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나와서 목사 된다고 해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라는 것을 내세워서 아는 척 하는 자들을 경계하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는 가짜들이에요.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목사라는 타이틀을 전가의 보도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놈들이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들이에요.

오늘은 목사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여야 하는 이유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가 목사들 중에 많기 때문이에요.

 

성령 받은 목사라고 한다면 목사에게 배우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아요.

진짜 성령 받은 목사라면 목사라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성령이 성도를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관리하고자 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목사를 특별한 존재로 말하는 자들은 전부 가짜들이에요.

목사에게 의미를 둔다는 것은 목사라는 직으로 뭔가 노리는 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는 말이에요.

 

이건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을 하니 잘 새겨 두세요.

목사를 분별하는 시금석(試金石)과 같으니 잘 새겨들으세요.

 

목사는 증거자(證據者)에요.

증거자란 본 것을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보여준 것을 증거하니 자기 실력은 전혀 필요치 않아요.

 

증거자란 목격자(目擊者)에요.

목격자는 듣고 본대로 증거하면 되어요.

목격한 것을 증거하는 것은 남녀노소나 많이 배우나 못 배우나 차등이 없어요.

 

증거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 준 것을 증거해요.

증거 속에 자기 것이 담겨져 있지 않아요.

증거자는 자기가 뭔가 특별한 존재인 냥 하지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보여주어서 본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뭔가 영험한 것이 있는 척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는 오바다처럼 뽕나무 배양하다가도 받을 수가 있고 엘리사처럼 소로 밭을 갈다가도 받을 수 있어요.

말씀을 깨닫는 계시는 어떤 형식으로 오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깨닫는 것은 자기에게 무슨 영험한 능력이라도 되는 것으로 말하는 자들은 전부가 교인들 마음을 빼앗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들이에요.

 

기도 많이 했다고 속지 말고!

공부 많이 했다고 속지 말고!

신학교수라고 속지 말고!

박사라고 속지 말고!

목사라고 속지 마세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올바른 성경 해석은 성령만이 할 수가 있어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지만 성경을 해석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설교를 선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을 “케리그마” 라고 하는데, 이는 “선포” 한다는 뜻이에요.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선포에요.

선포!

 

다른 말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라고 선포(증거)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또한 인간의 행함으로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유지됩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깨끗케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위하여 인간이 할 일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우리가 할 것이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는 거예요.

이런 것은 배우지 않아도 성령이 임하면 깨달아져요.

배워서 안다면 신학교가 필요하지만 성령이 깨닫게 해 주셔서 안다고 한다면 굳이 신학교 나온 것을 들먹일 필요가 없지요.

신학교 무용론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성경해석의 시금석이 될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목사들이 교인들 마음을 압살롬처럼 훔치기 때문이에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 짓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하셨어요.

여기서 많다는 것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뜻이에요.

진짜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중매쟁이에요.

예수님에게 중매를 하는 자에요.

자기가 데리고 살면 안 되어요.

자기 말을 듣는 교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압살롬처럼 교인들 마음을 훔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선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라고 합니다.

 

이러면 꼭 묻는 인간들이 있어요.

정 목사 당신은 그러면 안 그러느냐 라고!

제가 그렇고 안 그렇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걸려들면 교인들 피를 빨아먹은 작은 여우지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자신을 포함하여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바울도 자신이 한 말씀에 저촉 받고 있어요.

 

제가 설교를 하는 것이 말씀대로 살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전 설교내용처럼 완벽하게 살아가는 그런 인간도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 라고 증거 할 따름이에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에 선포할 뿐이에요.

저는 ‘정답은 이것입니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정답대로 살지 못해요.

그래서 긍휼을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도 마귀가 밀 까불듯이 까불고 있어요.

여러분이 저를 잘 관찰하세요.

제 안에도 여우 기질이 있어요.

언제 여러분들 피를 빨아 먹을 줄 몰라요.

그러니 저도 믿지 마세요.

이 세상에 믿을 인간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

여러분이 믿을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에요.

 

인간은 변해요.

그러니 저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변하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던가!

아니면 저를 데려가시겠지요.

제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지요.

목사는 성경해석의 권위자가 아니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도 목사! 목사! 그러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는 말입니다.

어떤 미친 사람은 스스로를 중진급 목자라고 해요.

그래서 교인이 어디 감히 목사를 가르치려고 그러느냐고 교만을 떨어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이런 자를 일컬어 포도원을 허는 여우라고 해요.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엿보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자기 종으로 삼고자 해요.

이런 사람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양의 피를 빨아 먹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이런 여우에게 붙잡히면 사냥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한 것입니다.

 

엡 4:13-15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믿음에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지요.

새 언약을 알아야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알아야 해요.

 

누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으로 교인들을 후리겠어요.

거짓 종들이지요.

연약한 자들을 자기 밥벌이로 이용하고자 믿음이 어린 자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어린 교인들에게 주의 종이라는 것으로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이런 여우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간의 행함으로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천한 율법이라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했듯이 이 시대는 육에 속한 목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라면 존경하여야 해요.

하지만 성화하여야 하고 목사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는 거짓 종들은 무시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는 성경해석의 절대자가 아니에요.

성경은 성령이 깨닫게 해주면 다 알아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는 성경을 해석하게 해주는 것은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설교는 지적 재산권이 없어요.

모두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셔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돈 내고 설교 들으라고 하면 사기꾼이라고 보세요.

아니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을 가지고 왜 돈을 받습니까?

돈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것이라는 말이에요.

그럼 성령이 깨닫게 해 준 설교가 아니지요.

 

성령을 받은 목사라고 한다면 설교를 돈 내고 들으라고 할 순 없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잖아요.

근데 왜 돈을 받습니까?

 

이 시대는 돈 없는 사람은 설교도 듣지 못해요.

돈 없는 사람은 천국도 못 가게 생겼어요.

무슨 이런 개 같은 구원이 다 있나요.

그러니 돈 받고 설교 장사하는 것은 가짜이고 사기꾼이란 말입니다.

 

자기 지식이면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므로 내게 배우라는 식의 가르침이 허용이 되어요.

그러나 성경해석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내 지식처럼 가르침이 허용되지 않아요.

고정화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제가 설교를 하고 나서도 다시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아니 언제 이렇게 설교를 했지!

야! 이건 어떻게 이렇게 보았지!

그래서 전 제 설교를 보면서도 은혜를 참 많이 받아요.

이게 모두가 은사로 토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설교가 내 지식으로 소유화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은사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므로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은사가 허락이 될 땐 증거가 되고 허락이 안 되면 증거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신이 한 설교에 자신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안다고 내일도 아는 게 아니에요.

원리적으로 그래요.

이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하지 못해요.

그러니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많이 선생 되지 말라는 말이 괜히 심심해서 한 말이 아니에요.

심판이 더 중하다고 하잖아요.

 

바울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에요.

행여 잘못 증거하고 버림 당할까봐서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사명을 잘못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계했어요.

 

하지만 어느 시대이고 땅에서 선생 노릇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런 자들은 가짜이기 때문에 자기는 다 아는 것처럼 내게 배우라고 해요.

이런 자들의 손에서 예수님이 죽임 당하셨어요.

지금도 이런 자들로부터 복음 증거하는 종들이 핍박을 당하고 있어요.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참은 거짓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왔어요.

이는 모두가 이 세상이 악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악(惡)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종들을 보내서 증거케 하였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죽임을 당함으로서 이 세상은 멸망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속한 종들은 늘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았듯이 말이에요.

 

술람미는 핍박을 받을 때마다 솔로몬과 자신은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아 2:16-17절.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보세요.

자신과 솔로몬은 하나라고 하잖아요.

자신은 솔로몬 것이고 솔로몬은 자기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런 관계를 성경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와도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 됨을 사랑의 관계라고 해요.

 

사랑이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함께 있어도 하나이고 떨어져 있어도 하나에요.

그러니 자기 안에 어둠이 그림자처럼 드리우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해 지기 전에 빨리 와서 하나가 되자고 합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베데르 산에 노루처럼 날랜 걸음으로 빨리 오라고 합니다.

빨리 와서 자기를 데리고 가라고 탄원합니다.

나도 당신 것이니 양떼만 먹이지 말고 자신을 빨리 데리러 오라고 합니다.

내 마음을 흔드는 여우들이 많으니 어서 오라고 합니다.

 

‘베데르’는 ‘베리트’ 라는 말로서 ‘분리하다’ ‘갈라내다’ 라는 뜻으로서 언약이라는 말로 사용하였어요.

베데르 산에서 온다는 것은 언약의 산에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산은 곧 하늘의 시온 산을 말합니다.

직역하면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그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때입니다.

 

아파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더 그립잖아요.

자기야! 보고 시퍼,

자기야! 언제와,

자기야! 빨리와, 그러잖아요.

 

결국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아픔을 통하여서 님을 더 사모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아픔을 통하여서 사랑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도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이 보고 싶어요.

예수님 언제 오세요.

빨리 오세요.

보고 싶어요.

 

술람미는 아픔을 통하여서 솔로몬에 대한 사랑을 더 영글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어요.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주님이 내 손을 잡고 계시지!

내 혼자가 아니고 주님이 함께 동행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세요.

 

제가 힘들고 지칠 때 즐겨 부른 복음송이 있어요.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 라는 노래에요.

가사가 참 좋아서 잘 불러요.

 

지금도 속이 상하고 힘든 일이 닥치면 이 노래를 참 잘 불러요.

오늘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쳐야겠네요.

한번 불러 보세요.

 

♪~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예수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힘들고 치칠 때마다 주님께서 이 손을 꼭 잡고 간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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