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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46강. 그리스도의 사람 (롬 8: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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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2021. 5. 29.

 

[46강. 그리스도의 사람 (롬 8:9-11)]

-.정낙원 목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굴혈이란? 강도들이 사는 집이란 말입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성전입니다.

 

성전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은 안 계시고 강도들만 우굴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하나님을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자기 소원을 성취하고자 신을 이용하여 왔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집이란? 사람이 거하는 곳입니다.

집은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그 집이 결정이 됩니다.

천사가 살면 천사의 집이고!

마귀가 살면 마귀의 집이고!

그리스도가 거하면 그리스도의 집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자적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누가 있느냐”를 가지고 판단을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너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너는 어디에 소속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에게 소속이 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를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도 있다는 말입니다.

두 부류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했으면 모두가 자기 백성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천국에 간 나사로나 지옥에 간 부자도 모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릅니다.

부자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나사로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과 같습니다.

하나는 혈통으로 낳은 자식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이삭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결국 한 아버지 아래 두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은 온 인류의 두 민족을 대표하는 예표적인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하여서 온 인류는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의 후손”으로 나누어질 것을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민족을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질 것을 예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에서 두 민족을 갈라내는 일을 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민족을 갈라내는 일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갈라내는 일을 하시는 것을 “만유의 주 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주(主)가 되십니다.

장차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열어서 예수를 주(主)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만유의 주”라고 하십니다.

 

만유의 주(主)가 되시면서도 굳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구분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는 인간의 창조 목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언약 백성과 비 언약 백성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을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예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은 자연히 남에 백성이 되고 비 그리스도인이 되겠지요.

여기서 남이란? 예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마귀를 말합니다.

성경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하실 때 두 부류의 인간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창조를 했습니다.

 

창조란? 이미 각자 정해진 상태로 만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변화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상태로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로 이미 정해져서 세상에 나왔어요.

 

예수 잘 믿으면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주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백성으로 창조가 된 자는 예수를 믿게 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고,

지옥 백성으로 창조가 된 자는 예수를 못 믿게 해서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세요.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엄마 뱃속에서부터 야곱은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지옥 가기로 결정이 되어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천국에 가도록 간섭을 하시고, 에서는 지옥에 가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그래서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보다 못하게 취급을 해 버리는 일을 하고,

야곱은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사는 일을 하게 됩니다.

 

구약에서의 장자권이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을 축복권이며 신약에서 구원권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에서는 구원엔 관심이 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사는 데에만 관심이 두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먹고 사는 것 보다 구원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각자 그렇게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에서의 이러한 행동을 망령된 일이라고 합니다.

즉 저주 받아 지옥에 갈 일이란 말입니다.

에서는 지옥으로 가야할 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옥에 갈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에 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감읍할 사랑을 받고 있음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신앙이란? 이러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받아들이고!

왜? 못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믿어지기 때문이고!

못 받아들이는 것은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믿어지는 믿음을 받았고, 한 쪽은 믿어지는 믿음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인간을 구분해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창조를 했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사람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입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여기서 인간의 존재 목적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존재하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맺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太初)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위해서 천지(天地)와 만물을 만들었습니다.

언약의 중심엔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악인은 악인대로 사용하시고 선인은 선인대로 사용을 하십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 받을 자로 존재하고 있고, 불신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 받을 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에겐 구원의 주님이시고,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이래나 저래나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이를 “만유의 주(主)”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는 일에 두 부류의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왜? 지옥에 가야 합니까?

또는 나는 왜? 천국에 갑니까? 물으면 안 되어요.

 

그럼 예수님이 그건 내 마음이야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순종하는 자는 천국백성이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불평하는 자는 지옥 백성이에요.

지옥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을 모르고 나는 왜? 지옥가야 하느냐고 불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를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겐 긍휼을 담고, 불신자에겐 진노를 담습니다.

사람은 창조가 될 때 어떤 이는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어떤 이는 진노를 담는 그릇으로 이미 각 자의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그 그릇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을 하고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듯이 만드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각자의 그릇에 합당한 것을 담습니다.

구원 받을 자기 백성들에게는 긍휼을 담고,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진노를 담습니다.

 

새삼스럽게 진노를 담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진노 아래서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니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출생을 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진노의 자식 속에서 어떤 자들에게 긍휼을 담습니다.

긍휼이 담겨진 자는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말은 바로 합시다.

 

긍휼을 담아서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고 긍휼의 그릇이기 때문에 긍휼을 담는 것입니다.

또한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긍휼을 담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을 담지 않으면 본래의 그대로 진노를 담고 있어요.

새삼스럽게 진노를 담는 것이 아니고 애시당초 진노를 가득 담고 태어났어요.

이게 믿어지고 인정이 되어야 신앙생활이 가벼워져요.

 

구원이란? 빼내심을 입는 거에요.

어디서 빼내심을 입는 건가요?

진노 아래서 빼냄을 입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이 진노에서 빼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럼 이 세상의 바탕이 진노 아래 놓여 있겠지요.

모두가 진노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예수님이 오셔서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실 것이 아닙니까?

진노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서 진노와 다른 영역으로 옮겨 놓을 것이 아니에요.

 

진노와 다른 영역이 어딘가요?

그건 긍휼의 영역이지요.

아까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있다고 했잖아요.

 

진노와 긍휼을 장소로 이해해 보세요.

그럼 진노의 장소는 지옥이 되고, 긍휼의 장소는 천국이 됩니다.

구원이란?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서 옮겨지는 것이에요.

 

그럼 지옥이 어디이고 천국이 어디인가요?

이걸 천지(天地)창조로 봅시다.

천(天)은 하늘이고, 지(地)는 땅이에요.

하늘은 천국이고, 땅은 지옥이에요.

 

구원이란?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이에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가는 겁니다.

누가 옮겨 주는가 하면 예수님이 옮겨 주세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간다고 하는 거에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시작하면서 천지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운을 떼는 겁니다.

 

천지란? 두 영역이에요.

즉 두 장소에요.

천지라는 두 영역을 창조 했다는 것은 용도가 있어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들으세요.

 

천지 중에서 천(天)을 “샤마임” 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를 “남성 명사” 로 썼어요.

하늘을 남성 명사로 사용한 것은 곧 하늘은 “남자” 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천지 중에서 지(地)는 “에레츠” 라고 해요.

그런데 이를 “여성 명사”로 사용했어요.

이는 땅은 “여자”를 상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남자와 여자를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안에 뭘 담는다고 하지요.

그리스도의 영이 담겨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빈 그릇에다가 그리스도의 영을 담으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남자이고, 그리스도의 영을 담는 그릇인 우리는 여자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하늘이고, 우리는 땅이에요.

하늘인 남자가 땅인 여자에게 생명을 주어요.

그래서 땅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바뀌어요.

이게 구원이에요.

 

다시 말합니다.

“하늘은 남자”이고, “땅은 여자”에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지요.

이는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창조에 속한 일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 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어요.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을까요?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실 일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자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모두 여성 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성경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생산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교회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을 모형하고 있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남자는 생명을 공급하는 자를 말하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생명을 공급을 받는 자를 말하고 있어요.

 

조금 전에 하늘을 남자라고 했지요.

그러니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늘에 있어요.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생명인고 하니 하늘에 생명이에요.

예수님이 왜? 하늘에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왔을까요?

이는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생명을 주어서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성도는 땅 사람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이 “아노덴”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로부터 난다” 라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다시 태어난다” 는 말이에요.

태어난다는 말은 누가 낳아 준다는 말입니다.

누가 낳아 주는가요?

예수님이 낳아 주는 거에요.

 

예수님이 바로 하늘이고 남자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누구에게 줍니까?자기 신부에게 주어요.

 

또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들으세요.

 

그러니까 땅인 여자가 하늘인 남자로부터 즉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 땅 사람인 여자가 아니고 하늘에 사람인 남자가 되어요.

이걸 해산의 수고로 구원을 이룬다고 해요.

이걸 잘 이해 하셔야 해요.

 

디모데전서 2장을 보고 갑시다.

 

딤전 2:11-15=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하지요.

그리고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건 교회에서 여자들은 입을 닫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여기서 여자란? 진리가 없는 자를 말해요.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를 말해요.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잘난 척 나대지 말고 예수로부터 생명을 받으란 말입니다.

누굴 가르치려고도 하지 말라는 거에요.

 

먼저 예수의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으로 낳아지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낳아지면 이젠 예수가 그 안에 거하게 되어요.

그럼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는 남자가 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서 여자가 해산의 수고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보여 주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을 찾아 가지요.

그 때 제자들이 어떻게 있었나요.

문을 걸어 잠그고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잖아요.

이게 여자의 모습이에요.

 

그런 곳에 예수님이 찾아가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 뭔가요?

성령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그 때 나가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제자들은 여자에요.

성령이 임하여야 여자에서 남자가 되어요.

이제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안에 예수님이 거해요.

 

그러니까 성령이 임한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거하니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된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러니까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자는 일절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대지 말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누구를 가르칠 군번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남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우라는 거에요.

 

마치 가나 혼인잔치의 항아리 속에 물이 아구까지 가득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채워지지도 않는 것을 퍼다 주면 맹물이에요.

아구까지 가득 채워져야 포도주가 된단 말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요.

 

그렇지 않고 말씀이 채워지지도 않는 것으로 아는 척 잘난 척 하고 나대면 남에게 해만 끼쳐요.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안에서 진리로 낳아지는 해산의 수고를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되고 난 후에 말을 해도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천국 백성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를 말해요.

예수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자를 말해요.

 

이걸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세요.

여자는 받는 자이고 남자는 주는 자에요.

이걸 성도가 교회 안에서 헌신하는 것으로 보면 여자 신앙은 받기만 하는 자에요.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남에게 섬김 받고자만 해요.

 

그런데 은혜를 받아 보세요.

그럼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섬김 받던 사람이 섬기는 자로 변한단 말입니다.

이게 여자가 남자가 된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여자 신앙에서 남자 신앙을 바뀌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산을 교회에 내어 놓지요.

누구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유무상통을 하면서 성도들을 섬기지요.

이러한 일은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불가능하던 일이 가능으로 바뀐 겁니다.

성령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꿔주신 겁니다.

이런 나라가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섬기는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남자들만 모여 있어요.

이건 생물학적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생명으로 땅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을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다 아들이에요.

반대로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는 다 여자인 겁니다.

이 세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성도는 남자이고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여자에요.

신자는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으므로 예수의 생명을 줄 수가 있는 남자에요.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만이 사는 곳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없는 여자는 전부 지옥으로 가요.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으면 남자이고 하늘에 사람이고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여자이고 땅 사람이에요.

 

흙에서 난 자는 다 땅 사람이에요.

땅에 속한 자를 뱀에 후손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땅에 속한 자를 지옥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뱀은 흙에 기운으로 살아요.

땅에 생명으로 사니까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생명이 있어야 땅을 떠날 수가 있는데 뱀에 후손들은 하늘에 생명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종신토록 흙에 기운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때 천지 즉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고 했지요.

하늘과 땅은 하나의 공간적인 개념이에요.

장소에요.

 

장소를 만들었으면 채워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는 이야기를 갈라내는 일과 채우는 것 두 구분으로 나누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셨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 공간에 채우는 일을 하셨어요.

이걸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고 합니다.

천지 속에 만물을 대 채워야 다 이루심이 되어요.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어요.

 

쉬운 말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집을 짓는 것과 같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집 안에 살림살이들을 채우는 것과 같고!

일곱 째 날에는 집들이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의 구원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 들였어요.

그게 끝이 아니고 이제부터 은혜에 속한 사람으로 만두 속을 채우듯이 채워 가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에요.

 

어떤 이들은 예수 믿으면 땡!

그리고는 자기 맘대로 살아요.

아니에요.

이런 구원은 없어요.

 

예수님이 죄 아래서 빼내 온 것은 의를 채우고자 함이지 빈 그릇으로 그대로 두고자 함이 아니에요.

구원 이후가 훨씬 복잡해요.

전쟁이에요.

 

창조이야기는 곧 우리의 구원 이야기에요.

우리도 장소가 이동이 되는 구원을 받고 천지 속에 만물을 다 이루듯이 우리 안에 예수의 것으로 채워지는 일을 당해요.

이게 엿새동인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엿새는 역사를 말하고 일곱째 날은 묵시를 말해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요.

엿새 동안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싸이클로 돌아가지요.

이건 역사를 상징해요.

 

역사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순환하고 있어요.

이게 엿새 동안 일어나요.

즉 창조가 완성 되는 날까지 지속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창조가 다 완성이 되는 일곱째 날에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싸이클이 없어요.

날마다 아침이에요.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없어요.

 

저녁이 없다는 말은 어둠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둠이 없는 곳을 천국이라고 해요.

그러니 일곱째 날은 역사 바깥에 있는 천국의 날인 것입니다.

천국은 모든 수고를 마치고 안식하는 세계에요.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이에요.

엿새 동안은 세상에서 살다가 일곱째 날로 모이는 거에요.

교회를 일컬어 묵시적 공동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애굽 바깥에 있는 광야라고 하는 겁니다.

스데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온 것을 교회로 모였다고 했어요.

그러니 애굽은 엿새에 속한 역사라고 한다면 광야는 일곱째 날에 속한 묵시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오니까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오는 겁니다.

 

광야에서는 일하는 것이 없어요.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어요.

만나는 땅에 양식이 아니에요.

하늘에 양식이에요.

 

왜? 하늘에 양식을 줍니까?

이는 너희는 하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늘 백성이라는 사실을 매일 일깨워 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징벌을 당해요.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도 동일해요.

교회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소식을 듣고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해요.

그러니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요.

 

조금 전에 창조가 갈라내고 채우는 두 구분으로 일어났다고 했지요.

우리의 구원도 이렇게 두 구분으로 일어나요.

구원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구원 안에 두 가지 속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천지를 만드는 일과 만물을 채우는 것처럼 먼저 죄 아래서 빼내심을 입는 구원이 있고!

그 다음에 죄에서 빼내심을 입은 의로운 자로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구원을 영역이 이동이 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우리가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이사를 온 것이에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으면 가구도 새로운 집에 맞는 것으로 다 교체를 하잖아요.

우리 안에서 이 교체 작업이 일어나요.

아담의 것은 버려지고 예수님에 것으로 채워지는 일을 당한단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단 말입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살라고 예수 안으로 이사를 시켜 준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이사를 오고 난 후에 예수로 살라고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어요.

그럼 우리는 성령의 은사로 우리 안을 예수의 것으로 채우고 살아야지요.

 

이걸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했어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일곱째 날로 산다고 해요.

다른 말로 천국으로 산단 말이에요.

이걸 엿새 동안 해요.



우리가 몸으로서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하게 된단 말입니다.

누가 하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세요.

예수님이 우리 몸에다가 예수님에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예수님이 하고 싶은 일을 우리 몸을 가지고 하신단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는 극심한 반발을 하게 됩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이에요.

그래서 예수로 산다는 것은 고난인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의 모형이에요.

 

자 보세요.

구약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어디로 빼내심을 입는가요?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빼내심을 입지요.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해요.

그 속에 아브라함의 후손과 이방인이 섞여 살고 있어요.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아브라함 후손들을 빼내오라고 합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애굽 속에 있는 언약의 후손들을 빼내옵니다.

 

어떻게 빼내 오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빼내 와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빼내 오는 것이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을 예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죄 아래서 빼내 올 때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출애굽한 백성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해요.

어떻게 사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이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사를 시키지요.

그런데 가나안 땅이 비어 있는 땅이 아니고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이들과 싸우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에 거하고 있는 원주민하고 전쟁을 하였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땅이 누가 되는가 하면 우리가 되어요.

우리의 심령이 가나안 땅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전쟁을 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의 것은 버리게 하시고 새 사람의 것을 채우게 하세요.

 

이걸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몸이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 되어요.

이게 엿새 동안 천지 창조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남자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는 거에요.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자기 씨를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니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 속에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실 일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이것을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로 보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로 갈라내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 세상은 천국백성과 지옥 백성이 섞여 있어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가 마귀의 자녀인줄 몰라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들을 갈라내시는 겁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심판이라고도 합니다.

심판이란 갈라낸다는 말이에요.

구원이란 말도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서 갈라냄을 당하는 것을 말해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나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요.

 

무엇으로 구분합니까?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여기서 영(靈)을 다른 말로 생명이라고 해요.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예수에 속한 사람이고,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예수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결국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의 그릇과 같아요.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지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두 사람의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이스라엘과 이방인!

신자와 불신자!

 

이들은 모두가 두 민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에 속할 것인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결정해서 보내세요.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되어서 각각의 그릇들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그릇에 합당하게 내용물을 채우세요.

 

신앙생활이란 참으로 단순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행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받은 그대로 행한다는 말은 자신을 포장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포장한다는 것은 감춘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앙에 적용하면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 있는 척 해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신앙엔 위선을 떨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어지는 것으로 행하면 되기 때문이에요.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살고!

믿음이 없으면 믿음 없는 것으로 살면 되어요.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의 눈치를 살펴요.

왜?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가요?

이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유 불리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어도 믿음이 있는 척 하여야지 교회 안에서도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마귀가 주는 마음이에요.

 

우리는 마귀 아래 세상에서 태어났어요.

세상은 힘의 원리로 다스려져요.

힘의 원리로 다스려지는 세상에서 살려면 힘이 있어야 해요.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여도 힘으로 삼고자 하고 그 힘으로 이것이 내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를 따지게 되어 있어요.

 

우린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왔어요.

교회 안에서도 세상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도 믿음이 있는 척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남들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세상 원리로 살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이야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자신을 감춘다고 하지만 교회 안에 성도는 달라요.

교회는 힘이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무리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엔 높고 낮음이 없어요.

그리고 잘남과 못남도 없어요.

다 동일해요.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믿음 있는 척 위장을 한다는 것은 교회를 힘에 논리로 다스려지는 권력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이건 신앙이 뭔지 모르고 있다는 소치에요.

어리석음이에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자기 백성들을 찾고자 예수님을 보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겐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이 선물을 받은 성도는 자기 믿음을 포장하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아요.

 

성경을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성경적 지식이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즉 목사라고 해서 믿음이 크고 할머니라고 해서 믿음이 작지 않아요.

 

믿음은 양적인 것이 아니에요.

오직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만 있어요.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 만 있어요.

믿어지면 쉼을 얻고 안 믿어지면 쉼을 얻지 못해요.

믿는 것만큼 누려요.

 

믿음을 다른 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 해 봅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목사라고 해서 많이 하고 할머니라고 해서 적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대한 학문적 지식은 목사가 깊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학문적 깊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비례되지도 않아요.

 

신앙을 학문적 발전과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목사가 할머니 보다는 당연하게 많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지 않아요.

목사라고 해서 고급한 믿음을 받았고 배우지 못한 할머니라서 저급한 믿음을 받지 않았어요.

 

믿음에는 고급과 저급이 없어요.

동일해요.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못 믿는 것이에요.

억지로 믿고자 할 필요가 없어요.

 

배우지 못한 할머니라도 예수가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아무리 많이 배운 목사라도 안 믿어지면 못 믿는 거에요.

이건 인력으로 할 수가 없어요.

그냥 각자 처한 위치에서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면 되어요.

 

그러므로 자기를 포장할 필요도 없고 위선을 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그대로 살면 되니까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고 알면 아는 대로 감사하면서 살면 되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의 가치로 신앙도 생각하고 판단해요.

우리는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합니다.

세상적 가치로 신앙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큰 일을 한 사람은 영웅이라고 하여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의 이름을 남깁니다.

반면에 한 일이 없는 사람은 그냥 범부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을 키울 때 모두가 위인전기에 나오는 사람처럼 키우고자 합니다.

자식들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큰 인물이 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그대로 우리의 신앙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치관 속에도 녹아져 있어요.

그래서 교회도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을 합니다.

 

목사도 담임목사 부 목사로 나누고 부목사 중에서도 수석 부 목사와 그냥 부 목사로 서열을 정하고 장로도 수석 장로와 일반 장로로 구분하여 차서를 정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세상적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상적 가치가 있는 한 신앙생활이 여유롭지가 못해요.

세상적 가치는 힘에 논리로 서로 간에 우열을 정하고 서열화 하여서 서로 차별하고 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하면 끊임없이 쫓기게 되어요.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쉼을 얻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 해결을 해 주셨어요.

우린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됩니다.

그럼 쉼을 얻을 수 있어요.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성도의 쉼이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두 가지 쉼이 있어요.

 

첫째로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쉼이에요.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의 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죄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즉 우리 행실로 인하여 구원에서 짤려나가는 심판을 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행위로 인하여 지옥에 가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행실을 율법으로 심판 받아야 할 것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그러니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의 손에서 짤려 나가는 일은 없어요.

우리가 도망을 가도 예수님이 끝까지 찾아내세요.

 

베드로를 보세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가도 예수님이 기어이 찾아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문제로부터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기 행실로 인하여 뭔가 찜찜하다는 것은 아직도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마귀의 참소를 이겨 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 맨날 자기 꼬라지에 따라서 믿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어떨 땐 산을 옮길 만한 것 같다가도 어느 때는 축 쳐져 있는 거에요.

이건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척 하는 거에요.

믿는 척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복음으로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가치로부터 벗어나는 쉼이에요.

 

우리 육신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세상 가치로부터 판단을 받게 되어요.

몸뚱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좋은 환경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따라서 희비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세요.

세상에 가치로 살지 못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세상 가치가 죽임 당하면 세상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어요.

 

찬송가 가사처럼 초막이나 들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살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세상 가치로부터 죽였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가치로 감옥에 있으니 찬송이 타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산다고 해요.

우리 몸은 역사에 속하여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몸에 묵시적 사건을 일으켜요.

다른 말로 은혜 받는다고 합니다.

 

묵시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역사적 가치를 초월하게 되어요.

은혜를 받으면 묵시적 안목이 생기고 묵시적 안목이 생기면 현실을 초월하는 힘이 생겨요.

세상 가치를 넘어서게 되어요.

그럼 육신의 조건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잘 살든!

못 살든!

누가 나를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게 되어요.

그러므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요.

세상 가치가 죽고 하늘나라 가치가 생기니까 자기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성도를 섬기고 날마다 모여서 찬송하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감사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은혜가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묵시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바울과 실라가 지금 그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 자기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찬송과 기도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바울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성도는 이러한 삶을 살도록 간섭을 당해요.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세요.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두 가지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쉼을 누리고 살아야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두 가지 쉼을 누리게 하세요.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역사에 속한 사람을 묵시 안으로 옮겨 주신 것이에요.

옛 사람이 예수님의 의를 입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옛 사람은 법 아래서 종으로 살았어요.

쉼을 얻지 못했어요.

 

새 사람은 은혜 아래 있어요.

은혜 아래서는 아들이에요.

아들은 종이 아니므로 일을 한 것으로 판단 받지 않아요.

그러니 일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안식을 누려요.

 

십자가를 넘어 온 성도는 묵시적 가치로 살아요.

묵시 안에서는 일체의 경쟁이나 판단이나 차별이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거하는 성도는 일체의 경쟁이나 쫓김이 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감사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것이지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에요.

 

봉사를 하든 충성을 하든 헌금을 하든 그것이 감사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어야지 억지여서는 안 되어요.

억지로 하면 쉼을 얻지 못해요.

신앙생활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이에요.

지금 그 천국이 우리 안에 주어졌어요.

과연 나는 누리고 있는지 확증해 보세요.

그 누림 안에 있는 성도는 평범함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어요.

 

사사기 12장을 봅시다.

 

삿 12:7-15=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육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8 그의 뒤에는 베들레헴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9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 보내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칠년이라 10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 그의 뒤에는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 그의 뒤에는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14 그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어린 나귀 칠십필을 탔었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팔년이라 15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사사기를 강해하면서 가장 많이 은혜를 받은 대목입니다.

사사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같아요.

영적 의미는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사사 시대는 약 400년 동안 있었는데 그 기간 중 대략 16명의 사사들이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사사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고 어떤 사사는 아무런 업적이 언급되어 있지 않는 사사도 있어요.

그냥 달랑 이름 하나만 있어요.

그러니까 사사마다 기간도 다양하고 업적도 천차만별이에요.

 

기간으로 따지면 길게는 80년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40여년을 어떤 이는 10여 년을 어떤 이는 짧게는 2년여를 한 사람도 있어요.

또한 어떤 사사는 성경 몇 장을 할애하는 많은 기록을 남겼고 어떤 사사는 달랑 한 줄 이름만 남긴 사사도 있어요.

 

기록을 많이 남겼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시달림이 적었다는 말입니다.

기록 할 것이 없으니 달랑 한 줄에 이름만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줄 이름만 남긴 사사들을 귀히 여기지 않아요.

우습게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이들이야 말로 복을 받은 자들이에요.

 

묻습니다.

기록이 많은 사람과 기록이 없는 사람 중에서 누가 평안 한 삶을 살았을까요?

기록이 적은 사람이에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건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태평성대 하였다는 말이에요.

 

그럼 기록이 많은 사사와 기록이 없는 사사 중에서 누가 복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나요?

파란 만장한 사사인가요?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간 사사인가요?

 

달랑 이름 한 줄 적힌 사사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큰 종이라고 하고 일을 적게 했다고 해서 적은 종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분량에 맞게 은사를 주셨어요.

각자 그 받은 은사대로 살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오지요.

거기에 보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어요.

주인이 종들의 역량에 맡게 각자 다르게 달란트를 맡겨 주었어요.

 

그럼 종들은 각자 주인이 맡겨준 것만 남기면 되어요.

그럼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동일하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함을 입어요.

이게 천국이에요.

천국엔 우리가 일한 댓가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포도원 일꾼 비유를 보세요.

아침 일찍 들어가서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점심 때 들어가서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고!

저녁 때 들어가서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어요.

주인이 그렇게 주었어요.

이게 천국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라고 해서 큰 상을 받고 일반 성도라고 해서 작은 상을 받지 않아요.

다 동일하게 받아요.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부르심을 입었어요.

지체마다 기능이 달라요.

그러나 다 한 몸에 영광을 받아요.

몸은 지체를 기능별로 우열을 매기지 않아요.

다 소중한 가치로 여겨요.

 

달란트를 남긴 종들이 그래요.

다 한 주인의 집에 일을 하는 자들이에요.

주인은 다섯을 맡긴 종과 둘을 맡긴 종을 차별하지 않았어요.

둘 다 충성된 종이라고 했어요.

 

주인이 각자의 분량에 맞도록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준 것만 충실히 하면 되어요.

다른 사람과 비교 할 필요가 없어요.

이게 현재 천국에서 사는 성도들이에요.

 

천국은 우리의 행함에 결과를 가지고 크다 작다 판단하지 않아요.

각자 맡겨진 일을 하면 동일하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되어요.

동일한 영광을 받는단 말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럼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각각의 직분들에 귀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높고 낮음도 없어요.

 

이걸 복음 아는 것으로 적용해 보세요.

복음 많이 안다고 큰 자이고 적게 안다고 작은 자인가요?

아니에요.

 

그렇다고 안다 모른다를 가지고 따질 이유가 없지요.

자랑할 일이 아니고 감사하여야 할 일이에요.

많이 아는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아는 자는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리어 복음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잘난 자로 서 있으면 안 되어요.

 

도리어 모르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많이 아니까 모르는 사람들을 섬겨야지요.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섬겼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고 적게 맡긴 자에게는 적게 찾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었으니 많이 찾겠다는 거에요.

주인은 종들이 일을 시킬 때는 다 그만한 능력을 주어서 시켜요.

 

하나님도 성도를 종처럼 다루어요.

그래서 제가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록이 많으냐 적으냐로 판단치 말고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사로 쓰임 받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목사냐 아니냐를 따지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것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큰 일을 맡기면 큰 일을 하여야 하고 적은 일을 맡기면 적은 일만 하면 되어요.

물론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큰 일과 작은 일이 있을 순 없어요.

편의상 크다 작다 라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어떤 드라마에 배우를 캐스팅 했다고 봅시다.

하나님이 찍는 드라마는 모두가 다 동일한 개런티를 받아요.

그럼 주연이나 아니면 조연이냐 또는 엑스트라냐 로 따질 이유가 없지요.

모두가 그 드라마에 출연한 것으로 감사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구원이 그러해요.

우리의 구원은 차별이 없어요.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고 어린아이라고 해서 적은 상급을 주지 않아요.

모두가 동일해요.

 

요한계시록 21장 나오는 하늘 예루살렘 성을 보세요.

그 성에는 열두 문이 있는데 그 문마다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리고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런데 그 기초석을 근거로 네모가 반듯한 성을 건축합니다.

그 성을 건축하는 벽돌들이 전부 보석들이에요.

보석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에요.

 

모두가 규격이 일정하게 반듯 반듯한 보석들이에요.

이는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와 성도의 차별이 없어요.

 

그렇게 지어진 성 안에 어린 양이 신랑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 온 성이 그 빛으로 인하여 영광이 찬란하게 비취는 겁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영광 안에 거하고 있어요.

누구 영광이 더 크고 누구 영광이 적은 것이 없어요.

다 동일해요.

 

그렇다면 이 땅에서 큰 목사 작은 목사 큰 교회 작은 교회라는 의미가 없어요.

교회가 크다고 해서 자랑 할 것도 못 되고 교회가 작다고 해서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큰 교회 다닌다고 잘난 것도 아니고 작은 교회 다닌다고 못난 것도 아니에요.

큰 교회 다니면 믿음이 크고 작은 교회 다니면 믿음이 작은 것도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는 크고 작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우린 욕심을 가지고 있어요.

신앙을 마치 경쟁하듯이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성경 많이 안다고 잘난 척 할 것도 없고!

반대로 성경을 모른다고 해서 기죽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 많이 안다고 큰 구원이 주어지고 성경 모른다고 해서 적은 구원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면 신앙생활에 조금의 유익은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도의 구원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다 깨닫게 해 주세요.

어차피 성경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지만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닫게 해 주시는 것만큼만 알면 되어요.

하나님이 각 사람의 분량만큼만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만큼만 알려 준 것이에요.

그러니 아는 것에 감사하고 살면 되어요.

이건 게을러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이 많은 것을 마치 신앙이 좋은 냥 하지 말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잖아요.

그럼 성령이 깨닫게 해 주어야지만 성경을 알 수가 있어지잖아요.

내가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알아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잖아요.

그럼 각자 아는 것만큼 감사하며 살면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욕심 부리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라고 하는 겁니다.

 

육으로는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해요.

그러니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성경을 알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억지로 알려고 할 필요가 없지요.

모른다고 기죽을 일도 아니에요.

 

육이 영이 되는 방법은 없어요.

영으로 나아져야 해요.

나아지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육에서 영이 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방법이 없어요.

비유적으로 말할게요.

 

어떤 부부가 아기를 임신을 했습니다.

곧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데 그 아이를 위해서 부모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어요.

하나에서 열까지 다 준비해요.

모든 식구가 태어날 아이를 위하여 이것도 준비하고 저것도 준비하고 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아이는 아이의 원함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원함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의 원함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아이의 인생도 부모의 원함에 강요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를 낳아 주시는 분이 알아서 다 준비하세요.

우린 그냥 하나님께서 준비 해 놓으신 것을 얻는 것뿐이에요.

내가 준비하고 내가 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을 공짜로 누린단 말입니다.

공짜에요.

공짜!

 

구원은 누리는 것이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준비 해 주신 것을 누리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모든 수고와 슬픔을 마치고 쉬는 곳이에요.

안식의 세계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안식하는 것이에요.

날마다 예수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며 사는 것이에요.

이렇게 감사하면서 모이는 모임을 교회라고 해요.

이러한 교회의 모임을 주의 날에 일곱째 날로서 모이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날마다 모인 것이 이 일곱째 날로서의 모임이에요.

주의 날로 모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생겨난 언약 공동체로서의 모임이에요.

 

이렇게 모이는 모임 속에는 인간의 자랑거리는 하나도 없어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자랑만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자꾸만 방법론을 가르쳐요.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요.

이런 방법 저런 방법론을 제시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이게 육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에게 가능성을 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 쪽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종교에요.

 

종교와 신앙은 근본이 달라요.

종교는 모든 행함의 주체가 나에요.

나로부터 출발해요.

 

종교에서는 예수 믿는 것도 내가 믿는 것이고!

구원을 얻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고!

의로워지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신앙은 모든 것이 다 주께서 하세요.

나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행함의 출처가 주님이에요.

주님이 내 안에서 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것도 주께서 하시고!

우리의 구원도 주님이 해 주시고!

천국도 주님이 인도 해 주세요.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지요.

 

누구 안에서 행하신 뜻이라고 하나요?

예수 안에서 이지요.

이는 예수 안에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러한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우린 죄 아래서 기뻐하지 못했고 감사하지 못했어요.

죄 아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어요.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율법 아래서는 신음하고 살았어요.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압제 하에서 종노릇하면서 살았듯이 우리도 율법 아래서는 종노릇하고 살았어요.

나오느니 한숨이었고 원망이고 불평이고 아픔이었어요.

 

그런데 모세로부터 출애굽을 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나니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와서 춤추고 찬양하지요.

누가 시켰습니까?

아니에요.

너무 기쁘니까 저절로 둥실 둥실 춤이 춰지고 찬송이 나왔어요.

 

예수 안에 거하면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오시면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져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져요.

믿어지니까 믿는 겁니다.

 

믿어지니까 율법 아래서 끙끙거리고 신음하던 것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이제는 율법에서 해방이 된 자유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하고 살게 하세요.

살아야지 살아야지 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진다니까요.

이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주 안에서 우리가 기쁘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이건 우리더러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보고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 안에 있으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에요.

 

어째서 주 안에 있으면 이렇게 되나요?

이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기쁨 자체이고 그리스도는 감사 자체에요.

그러니 주 안에서 항상 기쁘고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 천국이에요.

천국에 가면 항상 기쁘고 범사가 감사가 되어요.

그 천국이 지금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왔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천국이 온 것이에요.

천국이 침노해 들어 온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지요.

이건 우리더러 천국을 침노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에요.

천국이 우리 안으로 침노해 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잖아요.

그런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어요.

그리고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어요.

 

하나님이 죽었던 예수를 부활케 하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지요. 

이제 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자기 백성들 속으로 보내세요.

마치 예수가 육신을 입고 자기 백성들 속으로 오신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 속으로 오신 겁니다.

이걸 천국이 침노해 왔다고 하는 거에요.

 

자 보세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왜? 죽었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지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몸도 함께 죽은 것이 되어요.

비록 우리가 몸으로 살고 있어도 이 몸은 영적으로 말하면 죽은 거에요.

죽은 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왔어요.

이제 산 자가 되었어요.

 

어떻게 산 자가 되었나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산 자가 되었어요.

이걸 주 안에서 산다고 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사는 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지요.

이건 우리가 비록 죄인의 몸으로 살지만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서 더 이상 죄인으로 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대하신다는 말이에요.

 

그럼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어떻게 살까요?

주 안에서 산 자로 살겠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겉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몸이지만 우리 속 사람은 성령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도가 부활 하게 되는 것은 다 그리스도의 영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의 영은 부활의 영이에요.

이 부활의 영이 예수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어요.

예수를 죽음에서 살린 부활의 영이 우리 안에 오셨으니 그 영이 우리도 부활케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비록 몸이 죽는다 할지라도 슬퍼할 일이 아닌 겁니다.

 

예수 믿다가 죽어도 사니까 걱정 하지 마세요.

죽음이 우리를 가두지 못해요.

우리 안에는 부활의 칩이 내장 되어 있어요.

 

컴퓨터에 보면 피닉스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어요.

복구 프르그램이에요.

피닉스란 말은 불사조란 말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새를 말해요.

 

컴퓨터가 죽으면 피닉스 프로그램이 다시 복구 시켜주어요.

그러니 컴퓨터를 아는 사람은 컴퓨터가 다운이 된다고 해서 염려하지 않아요.

다시 살리면 되니까요.

 

우리 안에 피닉스보다 더 강한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요.

이 영이 죽었던 예수도 살렸어요.

우리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말은 우리도 부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담대하게 사세요.

 

제발 세상 것으로 인하여 징징거리지 마세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있다고 자랑도 하지 말고!

다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잠시 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십니다.

오고 계시잖아요.

들리지 않나요!

보이지 않나요!

 

만물이 주께서 오시고 있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소리치고 있잖아요!

제발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신다는 것을 좀 보시고 들으세요.

그리하여 세상을 이기고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비록 몸으로는 죄 가운데 살고 있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주어지는 그 의로 담대하며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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