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47강.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 고난 (창 26: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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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6. 1.

 

[47강.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 고난 (창 26:12-35)]

-.정낙원 목사

 

좋은 신앙이란?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사귐을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오래 사귈수록 깊이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간섭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아픔이에요.

우리가 어렸을 때 경험을 추억해 보면 남자 아이들은 자기가 어떤 여자 아이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아이가 고무줄놀이 하는데 가서 훼방을 놓고 급기야는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을 치곤하잖아요.



그것은 “나 너 좋아하거든” 사랑의 표시에요.

사랑을 역설로 표현하는 겁니다.

찝쩍거림을 당하는 당사자는 괴롭습니다.

사랑한다고 그러면 찝적 대지 말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스토킹 하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싫어요.

우리는 사랑하면 그만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두는가요?

아니면 간섭하는가요?

간섭하지요.



상대방이 나를 간섭하는 것을 싫어해요.

그런데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간섭해요.

이게 사랑의 속성이에요.



사랑이란? 관심이에요.

자꾸만 관심이 간단 말이에요.

우리는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을 소유하고자 해요.

상대가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기분이 좋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정의는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면 사랑 한다고 생각하고 안 따라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의 사랑은 아픈 거에요.

사랑하는 사람도 아프고 사랑 받는 사람도 아파요.

왜냐하면, 둘 다 자기 입장으로 사랑하는 이기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정 반대에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직 죄인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에게 무슨 이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쁜 구석도 없는데 왜 사랑했나요?

이는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죄인을 위하여 그 아들을 희생하기로 되어 있어요.

그 아들의 죽음으로 죄인이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희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희생으로 구원을 해 놓고 이제부터 값을 찾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너~ 내가 너를 위하여 내 아들을 죽인 것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걸 알 때까지 물어요.

그냥 “입으로 예 압니다” 라고 하는게 아니에요.

너 정말 알어!

“그럼 니 목숨 내어 놓아” 그러고 있어요.

여기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맘대로 살고 싶거든요.



죄인은 자기 밖에 몰라요.

이기주의에요.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다고 합니다.

이는 고집이 세다는 말입니다.

두 고집이 만나서 사랑하기 때문에 맨 날 토닥거리는 겁니다.

이걸 사랑 싸움이라고 합니다.



신안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고집이 있고, 우리 고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쪽으로 끌어당겨서 “너는 내 뜻대로 살아” 라고 합니다.

근데 우리는 예 하고 따라가는 게 아니고 반발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내 소원 들어 주세요”

그러고 있어요.

사랑한다면서요.

그러니 내 소원 들어 주세요.

꼭 요즘 여자들이 당신이 날 사랑 한다면서 “그럼 루이비통 가방 사줘” 그러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해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몸뚱이 편하게 잘 살고 싶어 해요.

하나님 뜻은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 허구로 드러나는 겁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고난 가운데 두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가운데 우리를 두었을까요?

예수 믿자 마자 곧 바로 천국으로 데려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살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지요.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과 살 수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에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갔어요.

알아가면서 자기가 얼마나 악한 자인지도 알게 되었어요.



이스라엘은 광야에 나와서 애굽식으로 살고자 했어요.

하나님을 자기 삶에 이용하려고 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건 죄라고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온 자들을 다 죽여가면서 애굽식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가나안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안 자들이 들어가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해 주어서 사는 자라는 것을 수많은 부대낌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요단강은 홍해처럼 갈라놓고 건너라고 하지 않고 범람한 강에 뛰어드니까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홍해는 “갈라주면 믿을 게요” 였고,

요단강은 “믿고 들어가니 갈라지더라” 는 겁니다.



홍해를 건넌 자들은 애굽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고,

요단강을 건넌 자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였어요.



성도가 교회 생활 하는 것은 광야 생활과 같아요.

교회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을 자기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을 하여야 해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하나 둘씩 깨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어가는 재미로 사는 게 인간인데,

자기 욕심이 하나 둘 깨어지니까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눈물을 뿌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뿌려도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아요.

눈물 골자기에 집어넣고는,

“내가 너를 어찌 잊겠느냐”

“너는 내 새끼” 라고 합니다.



이건 부모가 아이를 두들겨 패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아이 생각에는 사랑하면 패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처럼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물골짜기를 지나게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mbc에서 방영하는 군인 프로그램인 “진짜 사나이” 처럼 가스실을 지나고, 각개 전투 훈련과, 유격훈련을 받고 여러 가지 훈련을 이수하고 난 후에 자대 배치를 받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의 아들들도 눈물 골자기를 통행하면서 하나님 아들답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손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아들답게 만들어 가세요.

그리하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이 다 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시편 139편을 봅시다.



시 139:1-16=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절을 보면 여호와가 우리를 감찰한다는 말이 나오지요.

감찰이란? 모든 걸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우리의 언행심사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아신데요.

무섭다 무서워!



그리곤 어디로도 도망 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찾아내고, 바다 깊숙이 숨어 있어도 찾아낸다고 합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오장육부가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지를 다 아신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스캔당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을 속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우리 자식들 한데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너희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니까 속일 생각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우리도 아이들을 손바닥 보듯이 다 감찰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야 오죽 잘하시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갈 곳이 없습니다.

도망갈 데가 없어요.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그러자 태풍을 보내서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었다가 사흘 만에 니느웨 앞 마당에 토해내게 하여서 기어코 일을 시키고야 맙니다.

하나님의 고집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쓸 것 같으면 요나가 물속으로 뛰어들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이 나를 30년 써 먹어야겠다고 계획하셨다면 내가 15년 살다가 못살겠다고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린다고 해도 죽지도 못하고 살려내서 기어코 사용하시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몇 회까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동안에는 죽을 고비가 숱하게 있어도 절대로 죽지 못합니다.

죽어도 살려 냅니다.



엑스트라는 빗나간 화살에 맞아도 죽는데,

주인공은 포탄이 몸을 뚫고 가도 살아나요.

주인공은 불사조에요.



우리는 불사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시켜 놓고,

“내가 이 놈은 이렇게 사용하겠다” 고 계획을 세워서 사용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레미야 1장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압권입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일방적입니다.

예레미야는 가만있다가 당하고 만 겁니다.

예레미야가 제 생각은요? 하니까 하나님은 니 생각은 필요 없다고 합니다.

강제이고 폭력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에겐 폭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맘대로 이니까요.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세요.

우리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태에서 나기 전에 구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기도 전에 어떤 역할을 하게 할 것을 미리 세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계획에 따라서 출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태어날 때부터 선지자 노릇을 합니까?

아닙니다.

장성한 다음에 선지자 노릇을 하지요?

그러면 장성한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잘 살고 있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찾아가서 인생을 차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시키는 말만 해” 그러는 겁니다.



7절과 9절을 보세요.



7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이 만날 대상도 정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건 마치 드라마에서 배우가 시나리오대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가가 시키는 대로 만날 사람을 만나고 할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는 자기가 할 말이 없어요.

배우는 작가가 이미 대사와 해야 하는 행동들을 다 정해놓았기 때문에 각본대로 말하고 정해진 행동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간섭 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애써 부정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고 합니다.



민혜경이라는 가수는 지금도 그 노래를 부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네 인생은 네 것이 아니고 네 인생은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 입니다.

우리 인생은 처음에 계획한대로 움직여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여기서 우리는 충돌 합니다.

왜 내 인생에 개입을 하여서 헝클어지게 하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내 인생에 개입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오냐 니 맘대로 해라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갈굼을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눈물 골자기를 통행하는 것이고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의 말씀들이 우리의 삶에 확 꽂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게 가벼워집니다.



아 내 인생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구나,

이것이 믿어질 때 담대함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삭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해에 이삭이 백배의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백배의 축복을 얻은 것은 이삭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블레셋에 거하게 하신 것은 두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첫째는, 이삭을 통해서 이방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이방 민족 속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이삭으로 하여금 흉년과 기근 속에서도 백배의 축복을 받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간섭해 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흉년이 자기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백배의 축복도 자기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2-14절을 보세요.



창 26:12-14=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창대하게 하셨고 왕성하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을 거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삭이 백배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이삭의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흉년 속에서도 이삭이 거부가 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28-29절을 보세요.



창 26:28-29=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하지요.

그리고는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이방인들이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도구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말합니다.

이삭아! 네가 백배나 복을 받는 것은 너의 잘남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에게 내가 복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삭은 흉년 속에서 백 배의 축복을 받는 사건을 통하여서 그동안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아 가는가 하면 사건을 통해서 알아갑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건을 통해서 추상적인 하나님을 실상으로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이 만난 그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자기 백성들 속에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 속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강조 하는 것은 제가 예수를 백 번 만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해요.

자기가 만난 예수가 있어야 해요.

설교는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에요.



바울을 보세요.

가는 곳마다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하잖아요.

다메섹 사건을 간증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만난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할 때는 예수님은 성경 속에만 계셨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은혜가 임하고 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사건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하여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제 설교를 통해서 제가 만난 하나님을 여러분도 만나냐 합니다.

마치 제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여러분도 제가 만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이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설교만 듣고 가는 겁니다.



설교는 듣는 게 아니에요.

설교 속에 예수를 만나는 겁니다.

성경 속에 예수가 나의 예수로 경험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여러분이 만난 예수를 간증하는 겁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를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자연스러운 거에요.



예수님이 12 제자에게 만나 주셨고,

12 제자들이 자기들이 만난 예수를 증거하니까

그 증거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또 나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 하였어요.

그게 2000년 기독교 역사에요.



우리도 우리 앞선 믿음에 선배들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어요.

저는 제가 만난 예수를 여러분에게 증거 하였어요.

그럼 여러분들은 제가 증거한 그 예수를 여러분들이 만나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세요.



나 이런 예수를 만났다고,,

그럼 여러분의 증거를 듣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예수를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이삭이 만났고,

이삭이 만난 하나님을 야곱이 만났고,

야곱이 만난 하나님을 요셉이 만났고,

요셉이 만난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만났어요.



이스라엘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 주시고 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이웃에게 증거하세요.

이게 복의 전달자에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축복 할 수가 있어요.

야곱이 바로 앞에 서서 “내 인생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면서 바로를 축복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입장에서 바로를 축복하는 겁니다.

이는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바로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축복이에요.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면서 축복하는 것은 자신은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이 오랜 세월을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잘나서 바로를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그동안 자기를 숱한 어려움에서 건져내 주시고 지금까지 지켜 주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바로의 눈에는 야곱은 형편없어요.

야곱도 자신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험악하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험악하다는 말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야곱은 내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 온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부족국가에요.

부족국가는 사람의 수가 곧 힘이에요.

그런데 야곱의 식솔들은 애굽으로 이주 할 때 70명이었어요.

70명으로 힘이 지배하는 가나안 7 족속들 틈에서 살아온 것은 기적이에요.

언제든지 힘 있는 부족에게 흡수당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흡수당하지 않고 지켜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바로 왕에게 당신이 보기에도 형편이 없지만 이렇게 형편 없는 나를 지켜 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바로 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가 경험한 그 하나님을 바로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삭은 군대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아브라함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 318명이 전부였겠지요.



이삭은 그랄에서 자기 힘으로는 살 수가 없어요.

풍전등화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흉년 속에서도 백배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랄 왕이 이삭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본 겁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당신이 우리보다 더 강한 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이삭은 군대가 많아서 강한 자가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강한 자로 보인 것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흉년 속에서 백배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보고 당신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으니까 당신이 우리 보다 강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비멜렉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취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났어요.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리브가를 손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흉년 속에 백배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어요.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들을 막아버리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는 겁니다.

가축들이 그 물을 먹고 살이 토실토실 찌는 겁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삭의 복이 블레셋 사람들과 반목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으니까 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과 같아요.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백배의 축복이에요.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이 백배의 축복이에요.

복음이 백배의 축복이에요.

율법 아래 있던 자가 은혜를 입으면 백배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지니까 자기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율법 아래 있다가 복음을 깨달으면 언약을 모르는 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주변으로부터 시기를 받게 되어요.



복음 속에는 반드시 고난이 옵션으로 따라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면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호사다마 라고 은혜를 받으면 꼭 욕 먹는 일들이 생겨요.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복 속에 고난을 옵션으로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에 속한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세상 복을 위하여 나왔다가 고난이 닥치면 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봅시다.



마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네 가지 밭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는 결실하는 밭과 결실치 못하는 두 가지 밭이에요.

결실치 못하는 이유는 육신이 힘들거나 세상 것을 좇아가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 믿다가 중간에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겁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나 일락 때문입니다.

결실치 못하는 자들은 모두가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결실하는 밭은 어떤가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나 깨닫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되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은 성령으로만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말씀을 듣게 하고 깨닫게 해 주는 자들만이 결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환란이나 핍박이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육신의 일락으로 넘어지지 않고 이겨내요.

주께서 그 안에서 이기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삭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참 복을 받은 자는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고난에 던져 보면 드러나요.

진짜는 세상을 버리고 복음을 붙잡지만, 가짜는 세상을 붙잡고 복음을 버려요.



떡으로 사는 자는 떡을 붙잡고 복음을 버리고,

말씀으로 사는 자는 복음을 붙잡고 떡을 버려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마귀가 와서 떡을 준다고 하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지요.

기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시지요.

또한 천하만국의 부귀와 영광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 하라고 하니까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 영광이나 육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속에는 이 세상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고난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삭처럼 천국의 구원이라는 백배의 축복을 받으면 세상 것을 빼앗기는 고난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삭은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난 후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팝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이 판 우물을 막아 버리고 방해를 합니다.

이삭이 또 우물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또 빼앗곤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디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던 브엘세바까지 갑니다.

이삭은 아버지 이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흙으로 메운 것을 다시 팝니다.

우물 물은 이삭의 가족과 가축들이 먹는 생수에요.



우물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상징해요.

이러면 아브라함이 판 우물과 이삭이 판 우물의 성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판 우물은 구약교회를 상징하고 이삭이 판 우물은 신약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흙으로 메워서 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였듯이 구약 교회는 마귀의 방해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구약 교회는 율법 교회에요.

율법 아래서는 생명의 물이 없어요.

생수는 이삭이 판 우물에게서 나와요.



이삭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는 약속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 교회를 신약의 은혜 교회로 회복하여서 완성을 하셨어요.

예수님은 구약의 죽은 교회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흙으로 덮어 놓은 것을 이삭이 다시 파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백배의 축복을 받고 우물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방해를 합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고 신약 교회를 세우셨는데 마귀가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들을 핍박하고 타락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2000년 동안 흘러오면서 교회는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핍박과 타락 속에서도 그루터기들을 남겨 두어서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메운 것을 이삭이 다시 파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된 교회를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낳은 자들을 통해서 다시 회복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교회는 늘 풍전등화와 같았어요.



마귀는 항상 성도를 핍박하였고 교회를 타락케 하였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또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마치 사사기 이야기처럼 타락하면 징계하고 다시 회복을 시키셨듯이 타락한 교회를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걸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파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일곱 우물을 팠던 브엘세바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합니다.

무슨 일인고 하니 아비멜렉을 잔치에 초대 하여서 음식을 먹이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언약의 후손의 잔치에 초대하여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언약 안으로 초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이삭의 잔치에 초대 받고 음식을 함께 먹은 후에 이삭과 맹세의 계약을 맺고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삭이 아비멜렉은 자신의 잔치에 초대하여서 음식을 먹인 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초대하여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영생의 떡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겁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새 언약의 맹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루어가는 것을 보세요.



때로는 아내를 빼앗기는 위기를 맞게도 하시고,

때로는 흉년 속에서도 백배의 축복도 주시고,

때로는 자기를 괴롭혔던 자가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맹세하게도 하십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목자가 양을 때로는 푸른 초장으로 시냇물가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인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좋고 나쁨은 조석처럼 왔다 갔다 해요.

이 모두가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삭이 그래요

다른 사람은 흉년이 들어 기근을 당하는데 이삭은 복을 받고 잘 사고 있습니다.

그것도 타지에서 온 객이 말이에요.



원주민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방인이 잔치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원주민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원주민들이 이삭이 우물을 파면 빼앗고 파면 빼앗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몰고 와요.

구원과 동시에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어요.

마귀가 죽이겠다고 쫓아와요.



바울을 보세요.

율법 아래 있을 땐 호형호제하고 지냈어요.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찜 당하고 나니까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을 누가 괴롭히던가요?

옛날 친구들이에요.

자기 동족들이에요.



바울은 동족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는 구원이라는 백배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과 고난은 같이 와요.

그 모습이 오늘 나옵니다.



이삭이 백배 복을 받으니까 원주민들이 시기심이 발동하여 여기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쫒겨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팝니다.

그 우물들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입니다.



예전에 그 사람들이 그 우물들을 다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삭이 다시 파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한쪽은 우물을 덮고, 한쪽은 우물을 파는 전쟁이 일어납니까?



신약 적으로 말하면 이삭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럼 이삭이 판 우물은 예수님이 세운 교회와 같습니다.

우물은 가축들에게 생수를 먹이는 것입입니다.



우물은 교회와 같아요.

교회는 생수를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축과 같은 자기백성들에게 생수를 먹이기 위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마귀는 교회마다 핍박하여 문을 닫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사를 보세요.

초대교회를 핍박하니까 지하로 숨어 버립니다.

그러자 마귀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아서 지하에 숨어 있던 교회를 올라오게 하여서 타락케 합니다.

이게 로마 카톨릭으로 나타났습니다.



로마 카톨릭 시대를 왜 암흑시대라고 합니까?

이는 교회가 타락하여 복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종교 개혁을 일으켜서 새 싹을 나게 하십니다.

종교 개혁으로 살아난 교회가 또 다시 타락을 합니다.



이 시대 종교 개혁으로 세워진 개신교가 로마 카톨릭보다 더 타락을 하였어요.

하늘 종교가 아니라 땅에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마치 예수님 초림 당시 구약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었듯이 이 시대 교회는 비즈니스 장소가 되고 말았어요.

동호회 모임이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종말에도 두 증인들을 일으켜서 타락한 교회로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게 하십니다.



교회는 사사기와 같이 타락과 회복을 반복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우물을 파면 원수들이 메우고 그럼 또 다시 우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삭은 우물을 파고 빼앗기면서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물을 빼앗기면 또 파고 빼앗기면 또 파고하면서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아브라함의 팠던 우물을 원수들이 막았던 것을 이삭이 다시 파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지경이 넓혀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삭을 핍박하지 않았다면 다른 우물들을 파지 않았을 것입니다.

핍박하니까 피해서 다른 우물을 파게 된 것입니다.

이삭을 핍박하게 하신 것은 도망가면서 우물을 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신약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로 살펴보세요.

오순 성령강림이 일어난 후에 예루살렘에 큰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려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예루살렘에 환란이 없었으면 온 세상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에 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온 세상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회당에서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좆아내셨습니다.

회당은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구약 교회를 상징하는 회당들이 사단의 권세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제자들은 제일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잘 보면 쫓겨난 성도들은 먼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갑니다.



바울도 제일 먼저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유대인 회당은 율법 아래 있던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옛 언약 안에서 망했던 교회를 새 언약이 들어가서 전부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우물을 이방인들이 덮은 것을 이삭이 다시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에게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면서 하나를 당부합니다.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고,

저 동네에서 핍박당하면 다시 다른 동네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 동네서 핍박을 당하면 다른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핍박을 통해서 다른 동네에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발생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하는 성도들을 핍박을 당하게 하신 것은 다른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게 원수들을 일으켜서 떠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강제적으로 떠나게 하여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하나님이 그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십니다.

그리곤 성전으로 보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입구에 서서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핍박을 받습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나 안 할래’ 그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 꼬셔서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잘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환영을 받지 못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박수를 쳐 주는 게 아니고 이단이라고 핍박합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핍박을 당하면서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복음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이건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의 특징입니다.

정답을 아는 사람은 오답을 쓰는 걸 보면 참지 못해요.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흔히들 뺨 맞아 가면서 장기 판에 훈수를 둔다고 합니다.

이는 눈 앞에 빤히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안하겠다고 하자 예레미야 눈 앞에 거짓을 보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거짓 종들이 백성들을 불 구덩이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야 그게 아니라고 소리를 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핍박을 당할 줄 알면서도 그 속에 불이 붙으니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아무리 복음을 가지고 나대지 말라고 해도 여러분의 눈앞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잘난 척하고 있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올바로 알려주면 고맙다고 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욕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백배의 복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주변에 핍박하는 사람들도 막아 주시어야 합니다.

그러나 막아주지 않고 원수들을 일으켜서 이삭이 하는 일들을 방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쫓겨 가면서 아버지가 파놓았던 그 우물들을 다시 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역설적으로 다루어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백배나 받았을 것 같으면 수호천사라도 보내주시어서 곁에 사람들이 꼼짝을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정반대로 오히려 우리 곁에 원수들을 일어나게 만들어서 우리를 대적하게 만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싫어하는 고난을 복음과 함께 주실까요?

이는 고난이 복음의 맛을 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신앙의 맛이 없습니다.

과일의 당도가 좋으려면 비바람과 태풍을 맞아야만 합니다.

무조건 햇볕만 쬐면 안 됩니다.

비바람도 맞고 햇볕도 맞고 그래야 맛이 좋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과일처럼 순경과 역경을 통해서 훈련하여 가십니다.

백배 축복도 주고 고난도 주고 그리하십니다.

맛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고 알아 갈 때에 그것이 신앙의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킵니다.

옥 터가 움직이고 착고가 풀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 실력으로 쌓이게 됩니다.

바울은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하다가 어떤 핍박이 와도 타협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험이 실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홀로 두신 적이 없습니다.

늘 함께 하셨습니다.

이걸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경험으로 믿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담대해집니다.



저도 복음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참 힘들었는데 이젠 견딜만 합니다.

여러 차례 경험을 하면서 맷집이 생긴 겁니다.

경험되는 것이 축적이 되니까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하나님은 있으나 자신이 실제로 경험된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죽었습니다.



이제 이삭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 아브라함을 경험케 하신 방법대로 이삭도 경험케 하십니다.

경험을 하고 난 후에 이삭은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만 지켜주는 하나님만이 아니고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삭처럼 간섭하여 가십니다.

간섭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나와서는 안 되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나와야 합니다.



내가 경험되어진 그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되고 담대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스데반을 응원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아! 힘내,

나도 너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

그러니 죽는게 아니고 다시 살아나기 위한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만나고 죽었습니다.

스데반만 그러느냐?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이름이 “면류관”이란 뜻입니다.



면류관은 이긴 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누가 이긴 자들 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스데반인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감옥 속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지하 감옥입니다.

당시에는 감옥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경범죄 같은 죄수는 집안에 가두고,

중범죄를 지은 죄수는 바깥 격리 된 곳에 가두고,

정치범이나 아주 악질 범들은 동굴과 같은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악질 범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복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한 것을 가지고 악질 범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죽음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 속에서 기도와 찬송을 합니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지하 감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일어난 상황이 그대로 재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를 예수님의 죽음 속에 던져 놓고 예수님이 겪었던 그것을 그대로 체험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살려 냈듯이 바울과 실리가 감옥 속에 들어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에 간수들이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서 복음을 듣고 살아납니다.

이렇게 생겨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 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자주 장사 루디아와 간수 집안하고 지하 감옥에서 풀려난 자들이 모여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부활의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인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경험이 기쁨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경험을 해가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을 삶 속에서 많이 경험하여야 실력이 쌓입니다.

실력이 능력이 되고 능력이 신앙이 될 때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책 속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주시었습니다.

그래서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때리면 맞고,

빼앗으면 빼앗기고,

이삭의 우물들이 계속하여서 뺏기고 또 뺏기듯이..

신앙은 내가 남을 넘어뜨려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돌을 던져도 맞으면서 씩 웃을 수 있는 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때린다고 해서 나도 같이 때린다면 그 신앙은 지는 것입니다.



이삭이 축복과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갔듯이 우리도 알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십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그렇게 간섭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아픔은 곧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아픈 일이 닥치더라도 낙망치 말고 성경 속에 하나님을 나의 삶 속에서 경험케 하시려고 하는 일이라고 믿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앙이 더 야물어 지시고, 더 영글어 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침 바 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기까지 강권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과부와 고아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동행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믿어지고 깨달아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앞으로도 더 깊은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더 큰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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