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정죄함이 없는 세계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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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6. 11.

 

 

[51강. 정죄함이 없는 세계 (요 8:1-11)]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우린 예수님이 몰고 온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그 어떤 것도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죄치 않겠다는 말은 인간에게선 의(義)가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내가 너희 죄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탓해서 무엇 하겠느냐! 라는 뜻이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일종의 인간에 대한 “포기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죄치 않는다는 말씀 앞에 야!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선 쓰레기 같은 존재이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상종을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치 않는다는 말 속에는 그 여인을 고소하는 자들의 의로움까지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간음한 여자나 이를 고소하는 너희들이나 다 동일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옳고 그르다 판단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선 쓰잘데기 없는 것이란 얘깁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들은 인간들의 행위로 잘 낫니 못 낫니 판단하고 참소하고 있어요.

이는 인간이 선악의 법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로 선(善)이다! 악(惡)이다!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정죄치 않는다고 하심으로서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인데 거기서 뭘 선이다 악이다 나눌 이유가 있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사람이 강아지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강아지의 행동에 의(義)가 있어서가 아니잖아요.

그냥 강아지를 사랑해서 키우는 거잖아요.

그러니 강아지의 그 어떤 행동도 정죄치 않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강아지 대하듯 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상대해서 무엇 하겠느냐!

너희들 눈엔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가 엄청 큰 죄인인 줄로 보이지만 예수님 눈엔 간음을 한 자나 안 한 자나 다 똑 같다는 말입니다.

그건 너희들 세계에서나 죄다 아니다 라고 하지만 예수님 세계에선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겁니다.

인간의 행위로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치 않는 그런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진 겁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세계는 인간의 행위로 정죄당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 그런 세계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정죄치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이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만 상대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일컬어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맺은 언약이에요.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없는 존재입니다.

오로지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만 판단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고, 예수 밖에 있으면 무조건 정죄당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누구 안에서 사느냐의 주체 싸움이에요.



내 주인이 누구냐?

아담이냐!

예수님이냐!

아담 안은 전부 죽은 자이고 예수님 안은 전부 산 자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보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난 이제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다.

너희들의 세계는 인간의 행위로 정죄 받는 세계이지만 내 세계는 인간의 행위로 정죄당하지 않는 세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치 않는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범죄치 말라” 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는 범죄치 말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보면 여인에게 다시는 이런 간음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언뜻 들으면 이번은 용서해 주는데 다음 번에 또 이런 죄를 지으면 그 땐 정죄하겠다는 말로도 이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내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그랬느냐!

넌 내 말을 흘러들었느냐! 라는 식으로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는 뉘앙스로 해석이 될 여유가 충분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충분히 오해 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목사님들이 이 말씀을 율법화하여서 교인들의 삶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어요.

 

봐라! 예수님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닦달하고 있어요.

그러면 교인들은 어이쿠! 잘못 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라고 반성을 합니다.

그러나 그 때 뿐이지 또 다시 죄를 짓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 되다가보면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아예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영(靈)으로 말씀 하시는데 인간은 육(肉)으로 듣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인간들 생각으로 해석하고 답을 적어 내는 겁니다.

 

고작 적어낸 답안지라고 하여도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했으니 다시는 죄 안 짓도록 노력해야겠구나! 다짐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겁니다.

실제로 교회마다 년 말 년 시가 되면 교인들이 지나온 한 해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갖가지 퍼포먼스를 하잖아요.

저도 과거에 율법주의로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 밖에 있을 땐 이렇게 살았어요.

 

그럼 예수님이 다시는 범죄치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살펴봅시다.

 

소 귀에 경(經) 읽기란 말이 있지요.

이는 소에게 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잖아요.

소 귀에 경 읽는 것은 죄인에게 죄 짓지 말라는 말과 같아요.

 

소가 경을 읽을 수가 없듯이 죄인이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죄인은 죄를 짓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씀은 소 귀에 경을 읽고 계신 것과 같아요.

전혀 불가능한 말씀을 주문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뻔히 알면서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럼 우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도가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일컬어 죄의 종이라고 해요.

죄 아래서 낫다고 합니다.

죄 아래서 낫다 혹은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에요.

죄가 주인이므로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이에요.

 

만약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이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해서 구원을 시키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해서 구원치 않고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하는 것은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화론 자들은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죄를 이길 수가 없다고 해요.

성경은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격해요.

만약에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예수님이 정죄치 않는 나라를 몰고 올 필요도 없어요.

 

정죄치 않는다는 말은 용서해 준다는 말인데!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용서받고 자시고 할 일이 없지요.

우리가 잘 지키면 되니까요.

 

예수님이 정죄치 않는 나라를 몰고 오셨다는 것은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몰고 오신 겁니다.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정죄치 않는 세계 속으로 불러들인 겁니다. 

정죄치 않는 세계는 정죄당할 상태가 되어야 정죄치 않음이 성립이 되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지어야 죄 용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내가 용서해 줄께! 라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합니다.

죄를 안 지으면 죄 용서가 필요가 없어요.



용서란? 반드시 범죄함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은 죄 아래 놓여 있어야지만 죄인 구원이 성립이 되어요.

의인이면 죄인 구원이 성립이 안 되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만 죄인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복음이 됩니다.

본인이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인간들이 죄인임을 모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혼자 헛짓하고 만 꼴이 되고 말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심이 복음으로 남기 위해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실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율법이 해요.

율법이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율법은 여전히 살아서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도록 인도하세요.

이 율법이 예수 밖에서는 어떻게 일하고 예수 안에선 어떻게 일하는지는 잠시 후에 상세하게 살펴봅시다.

 

성도는 정답을 알면서도 정답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서면 상함 심령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뻔히 알고서도 그 뜻대로 살아 내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곤고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자기 속에 두 법이 있어서 서로 싸운다고 하지요.

한 쪽에선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해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법이 더 강력하다는 겁니다.

 

육신의 법이 성령이 법보다 더 강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늘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애통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아! 네 육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 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시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 해주시는 것을 일컬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 하신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정죄당하지 않는 겁니다.

 

분명히 죄는 있는데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준 겁니다.

이처럼 죄가 분명히 있음에도 예수님 때문에 정죄당하지 않는 세계가 “예수 안 세계”에요.

우리가 지금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이 세계로 불러 들였어요.

네 죄를 내가 대신 담당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계신 겁니다.

물론 지금은 모르지만 잠시 후에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신이 죄를 대신한 것이란 것이 믿어질 것입니다.

 

그럼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접근해 봅시다.

예수님은 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한계성을 알면서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과연 죄 짓지 말라는 말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깨닫게 하시기 위함일까요?

또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모든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예수님을 주(主)라 시인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러니 신앙이란 나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공로만 남고 우린 그 예수님의 공로로 혜택을 입고 사는 자가 되는 겁니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 라고 하는 것은 아들만 높임 받는 세계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천국에 간 자들은 모두가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이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주셔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을 이렇게 비유를 합니다.

여러분! “거미”하고, “영덕대게”하고 비슷하지요.

다리가 여러 개 달렸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미하고 영덕대게는 걷는게 달라요.

“거미는 앞으로” 가는데!

“영덕대게는 옆으로” 가요.

영덕 대게를 앞에 세우고 열중 쉬엇! 차렸! 하면서 옆으로 가지 말고 앞으로 가!

 

그러면 영덕대게가 가만히 눈치를 보다가 옆으로 슬금슬금 걸어가요.

그 놈을 다시 붙잡아 놓고 앞으로 가란 말이야! 앞으로!

다신 옆으로 가지 말고 앞으로 가! 고함을 치면 가만히 멀뚱거리며 보다가 속으로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라고 하면서 다시 옆으로 갑니다.

 

영덕대게는 앞으로 갈 수가 없어요.

옆으로 기어가는게 본성이에요.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마치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지금 우리가 그래요.

우린 죄인이에요.

그런 죄인에게 예수님이 다시는 죄 짓지 마! 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우린 그 말에 주눅이 들어 잠시 숨고르기 하다가 다시 죄를 짓고 살아요.

그럼 예수님이 다시 죄 짓지 말란 말이야! 라고 소리칩니다.

그럼 우린 또 다시 숨죽이고 있다가 또 다시 죄를 지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우리가 영덕대게에게 아무리 앞으로 가라고 해도 갈 수가 없듯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해도 돌아서고 나면 또 다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요.

 

이런 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것은 죄를 짓지 않게 하고자 함이 아니고 죄 아래서 나올 수 없는 너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함인 겁니다.

 

넌 죄 지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말라는 겁니다.

새 언약 하에선 이 사실을 잊는 것이 죄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잊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다시는 범죄치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시선(視線)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고정시키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어요.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다 함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너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더 드러내고자 함임을 알 수가 있어지지요.

죄를 드러나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룬 정죄함이 없는 세계의 놀라운 축복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 뿌리심에 고마움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충성을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열심을 끄집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그 감사함이 때로는 헌신으로 봉사로 나타날 뿐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율법이 없어진 줄 알아요.

복음을 말하면서도 율법 폐기론자들이 있어요.

율법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는 줄 알아요.

이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밖에서 율법을 볼 때는 지켜서 의(義)를 만들고자 해요.

이걸 흔히 인간의 행함이라고 합니다.

이건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이 특성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아라는 주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주체가 무엇을 하여도 자기가 하는 것으로 끌어 당겨요.

그러니 죄인의 삶에 바탕엔 항상 자기 의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했다” 라는 사고가 깔려 있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본 율법 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산 것을 의로 여겼어요.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애시당초 율법 안에 의를 담아 놓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율법은 의를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 속에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외에 다른 의란 바로 예수님에 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럼 율법이 어떻게? 왜? 주어졌는지부터 살펴봅시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지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율법과 상관없이 의인이 되었어요.

 

아브라함 시대에 율법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없었지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430년 후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잖아요.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 3:17-18=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아브라함에게 먼저 언약이 주어지고 난 후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다고 하지요.

먼저 주신 언약이 뭔가요?

내가 너를 복에 조상 만들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건을 보고서 네가 앞으로 이렇게 하면 복에 조상 만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했어요.

 

이게 미리 정하신 약속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 그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지켜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가세요.

아브라함은 멀뚱히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에게 한 약속을 지켜내는지 구경만 하면 되어요.

 

이게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생산 할 수가 없는 아들을 낳는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불가능 속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아브라함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인 겁니다.

이 이삭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이삭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예표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암튼 위의 갈라디아서 말씀에서 율법이 앞에 주어진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고 하지요.

 

이는 율법을 어긴다고 하여도 약속은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여도 구원이 취소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율법을 지키든지 안지키든지와 상관없이 유지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에 근원으로 삼은 것은 율법과 상관없이 은혜로 주어진 거예요.

 

이렇게 되면 율법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은혜 언약을 어떻게 할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율법대로 안 산다고 하여도 은혜로 주신 약속은 변하지 않아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그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광의적인 의미에서 아브라함 후손은 율법과 상관없이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에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후손이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은 율법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 백성인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백성이 되고 안 지키면 탈락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에요.

그러니 성도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든 안지키든 상관없이 구원은 확정적인 겁니다.

너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 될거야!

그 따위로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겠느냐! 라는 것은 종교인들이 만든 거짓말이에요.

 

구원의 문제에선 인간의 행함을 떠난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그 따위로 믿어서” 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되어요.

은혜로 구원이 되었으면 그 따위로 믿어도 구원을 불변이에요.

이건 우리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거나 죄를 조장하는 말이 아니에요.

혹여 이런 자들이 있을 것을 아시고 성경은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가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구원은 확정 되었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림이 없어요.

이 흔들림이 없어야 성도에요.

만약에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구원이 흔들린다면 그는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 백성인 자에게 율법을 주셨어요.

이게 중요해요.

율법은 하나님 백성 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왜? 하나님 백성에게만 율법이 주어질까요?

이게 비밀이에요.

 

다시 말합니다.

율법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에게만 주어져요.

그러니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넌 아브라함 후손이다! 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미 구원 받은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으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율법으로 무슨 일을 합니까?

그건 죄를 고발하기 위함이에요.

죄를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이지요.

그럼 자기 백성들은 죄를 어떻게 압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뭘로 압니까?

율법으로 알지요.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어서 넌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너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백성에게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만들고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너를 위해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선 반드시 율법이 필요해요.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발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이런 죄인이 주님의 십자가에 대속하심 때문에 사는군요! 라게 한단 말입니다.



율법은 죄를 고발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럼 율법을 확 뒤집어서 헤쳐 보면 그 속에 죄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줄 알겠지요.

왜냐하면! 율법이 죄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잖아요.

 

십계명을 가지고 말해 봅시다.

인간은 율법을 받기 전에 자기 안에 다른 신이 있는 줄 몰랐어요.

살인이고, 도적질이고, 간음이고, 미움이고, 시기고, 질투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고 보니 지금 자기가 섬기는 신이 참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자기 안에 갖가지 더러운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 보인 겁니다. 

율법을 탁 깨보니 그 속에 갖가지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들어 있더란 말입니다.

 

그럼 죄를 안 지었으면 이런 것들이 없었다는 말이 되지요.

죄가 이런 것들을 몰고 온 겁니다.

죄 라는 상자 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죄 속에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하나님 계명이 뭡니까? 라고 물으니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래 만든 인간은 이런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잖아요.

 

죄가 자기를 사랑하게 하고 이웃과 나를 다른 몸으로 갈라놓은 겁니다.

너와 나가 다르니까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서로 욕심도 다르니까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 세계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들 때 하나를 만드셨어요.

한 몸으로 만드셨단 말입니다.

 

말라기를 봅시다.

 

말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영이 유여할지라도 오직 하나만 만들었다고 하지요.

유여(有餘)란 말은 여럿을 만들 수가 있지만 하나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담이 만약 죄를 안 짖고 자식들을 낳았으면 자식들 간에 분쟁이나 반목이나 갈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없었겠지요.

한 몸인데 왜? 죽이겠어요.

죽인다는 것은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인 겁니다.

 

인간은 죄가 없을 땐 자아가 없었어요.

죄가 자아를 만들었어요.

죄가 인간을 한 몸에서 각각의 개체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죄가 없을 땐 한 몸으로 살았는데 죄가 들어오고 보니 다른 몸이 되고 만 겁니다.

형제가 한 몸이 아니라 다른 몸으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다른 몸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다툼은 필연적인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것도 다른 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가 다른 몸으로 사는 겁니다.

말라기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한 몸만 만들었는데 죄가 들어오고 나서 한 몸이 아니라 사람마다 자아가 생겨서 수많은 몸으로 핵분열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느냐 하면 이렇게 죄로 인하여 핵분열이 일어난 각각의 몸들을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다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물론 택한 백성만 그럽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초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한 몸으로 만든 것을 죄가 들어와서 깨트린 것을 예수님을 보내서 다시 한 몸으로 만든 겁니다.

비로서 애초 계획대로 예수 안에서 경건한 자손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계명대로 위로는 하나님 사랑이 되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내 몸처럼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시 율법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인간이 범죄로 각 사람마다 자아가 생기고 나니 십계명이 말하는 살인이 나오고, 이웃을 해하는 것이 나오고,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들이 나오는 겁니다.

만약 죄를 범치 않고 한 몸이었으면 이런 것들이 없어요.

모두가 한 몸이 되어서 사랑을 했을 겁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 후손은 한 아브라함에게서 나왔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후손들은 숫자와 상관없이 한 몸이지요.

원리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한 몸으로 살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살지요.

 

십계명의 말씀대로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 증거하고 사는 겁니다.

왜? 한 조상 아래 있으면서도 싸우고 사느냐 하면 그게 바로 죄 때문이라는 겁니다.

한 조상 아래서 난 자들이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한 몸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이런 악당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죄가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율법이 죄를 고발해 내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미 너희는 죄인이다 라는 것이 전제로 깔려져 있는 겁니다.

율법을 지킴과 상관없이 죄인들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본래적 의미를 안다고 하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 그럼에도 이처럼 복을 받고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하지요.

언약 때문에 죄 가운데서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율법을 들여다보면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해를 한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고자 한 겁니다.

율법대로 살아서 착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건 율법을 주신 본래 의도에서 벗어난 거지요.

 

율법에는 의가 안 나와요.

율법은 죄를 고발하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으로 유대인들처럼 의를 만들고자 해요.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율법은 도리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악이라고 고발하고 있어요.

어디 감히 죄인의 행함으로 의를 만들고자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죄인이 뭘 해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죄에요.

죄인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로워 질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인간들이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한 것은 율법은 반드시 인간의 행함을 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아까 율법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주었다고 했지요.

죄가 살인으로 거짓말로 도적질로 간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마치 감기 걸리면 재채기로 콧물로 기침으로 열로 나타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죄는 반드시 인간의 몸을 통하여서 가현(假現)적으로 죄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죄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반발하는 형식으로 강하게 역사를 해요.

왜냐하면! 죄성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인간 속에 죄를 끄집어내고자 하면 죄는 감추고자 해요.

어떤 식으로 감추겠어요.

죄를 안 짓는 모습으로 감추겠지요.

 

예를 들어서 너 도적놈이지!

그러면 아니요! 난 착한 사람인데요! 라는 식으로 위장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간음을 끄집어내고자 하면 죄는 간음 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말하는 죄로부터 지적당하지 않고자 하는 겁니다.

죄가 율법이 지적하는 죄를 안 짓는 모습으로 억제 한다는 말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죄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세요.

하나님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죄는 안 드러나려고 해요.

너희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

그러면 죄는 아니야 우린 율법을 지킬테야! 라고 한단 말입니다.

 

율법이 너희는 도적놈이야!

그러면 아니야 우린 도적질 안하는 착한 사람이야!

율법이 너희는 간음한 자들이야!

그러면 아니야 우린 간음 안했어!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떳떳해 지고자 하는 거예요.

율법대로 살아서 나 죄인 아니잖아요! 라고 맞서고자 해요.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고소하는 것도 자기들은 율법이 금하는 간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롭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유대인에게 줄 때는 너희는 간음한 자라고 주셨어요.

그런데 유대인은 우린 간음 안 했는데요.

이러면 예수님이 죄에서 건지지 못해요.

본인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서야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잖아요.

 

율법 앞에서 우리가 간음했습니다! 라고 해야 예수님이 몰고 온 결코 정죄함이 없는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정죄함이 없는 세계는 죄인이라야 들어갈 수가 있어요.

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못 들어가요.

 

정죄함이 없는 세계는 간음 한 자가 들어가지 간음 안한 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간음 안한 자가 들어가면 정죄함이 없는 축복을 몰라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자가 천국에 가면 고마움을 몰라요.

죄인이라야 정죄치 않는다는 것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봅시다.

아까 죄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죄는 율법으로 죄를 감추는 모습으로 일하겠지요.

어떻게 죄를 감출까요?

율법대로 살아서 감추려고 하겠지요.

 

율법으로 점점 의로워 지려고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율법으로 간음을 끄집어내고자 하는데 죄는 율법으로 간음 안하도록 할 것 아닙니까?

간음 안함을 의로 붙잡고자 할 것 아닙니까?

간음 안하고 도적질 안함으로 나는 의로운 자라고 할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율법으로 의를 만들고 있잖아요.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도리어 의로운 자로 포장하고 있으니 이 포장지를 확 뜯어 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게 함으로서 그들 속에 죄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율법대로 산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율법에 반(反)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서 자신들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발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율법이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 되고 만 겁니다.

아! 우린 죄인 아닌 줄 알았는데 예수를 죽이고 보니 우리가 죄인이 맞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 너 살인자 맞잖아! 라고 본체를 드러내게 한 것입니다.

 

우리 속에 죄가 없는 줄 알았는데 예수를 죽이고 보니 우리도 죄인임을 알게 된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하심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은 율법으로 그들의 죄를 고발해서 살인자로 만들어서 예수님이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은 예수님의 용서하심 속에서 사는 것이 되지요.

간음한 여자처럼 정죄치 않는 세계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 되지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니 백성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함으로서 그들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고발했는가요? 

이는 아브라함 언약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백성은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했지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 아닙니까?

죄인이 용서 받고 천국에 가야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정죄함이 없는 나라가 현재 천국이에요.

예수님의 세계는 율법으로 정죄하지 못하는 세계에요.

예수 안에서 인간의 행함으로 가지고 죄다 아니다 정죄당하지 않아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심판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잘못했다고 천국에서 좇아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 안에 들어온 성도에겐 율법이 무슨 일을 하느냐 살펴봅시다.

예수 밖에서 율법은 인간의 행함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어요.

그럼 이제 예수 안에서 율법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아야지요.

 

아까 율법은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 안에 들어온 성도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잖아요.

그런데 왜? 율법이 필요 하느냐!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겠지요.

이젠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들어 왔는데 무슨 율법이 필요하냐! 라고 말할 수가 있잖아요.

 

맞아요.

죄가 없는 세계엔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니까요.

천국엔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거긴 죄가 없는 세계니까요.

천국에서 사는 몸은 예수님과 같이 죄와 상관이 없는 부활의 몸으로 살아요.

천국엔 죄와 상관없는 부활된 몸으로 사니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선 부활의 몸으로 사는게 아니라 죄의 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육신은 아담의 몸 그대로 살고 있어요.

아담의 몸으로 산다는 것은 죄가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몸은 죄 아래 팔린 몸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아담의 속성 그대로 나와요.

 

아까 죄는 자아를 몰고 왔다고 했지요.

그러니 아담의 몸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자아중심으로 살고자해요.

자기 몸 편한 대로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럼 알다시피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받았잖아요.

자기를 위해서 구원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원했잖아요.

다른 말로 자기 몸을 위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구원이 되었잖아요.

 

그럼 여기서 필연적으로 내 몸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아담의 속성과 예수그리스도의 몸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새 사람이 충돌을 일으키겠지요.

이 충돌 속에서 나타난 것이 로마서 7장의 바울의 고백이에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 말이에요.

 

지금 로마서 7장의 바울의 고백은 성령을 받고 난 후의 고백이에요.

즉 예수 안에 있으면서 토해내는 고백이란 말입니다.

그럼 바울은 이런 고백을 무엇을 근거로 토해 내고 있나요.

율법이지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율법의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는 인간 세상에선 율법은 없어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죄를 고발해줘야 하기 때문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어떤 죄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지 않고 자기 몸으로 살고자 하는 겁니다.

흔히들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해요.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산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율법이 너 왜? 예수의 몸으로 니 마음대로 사는데! 라고 책망을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아담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율법은 여전히 아담의 몸으로 토해지는 죄를 고발해 줘야 하는 겁니다.

이는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에요.

 

쉽게 말할게요.

우리가 예수 믿어도 몸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해요.

몸의 특성이 그래요.

그럼 성령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너 왜? 주님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어 놓고 너를 위해 사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왜? 니 몸뚱이를 주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살지 않고 니 좋아하는 대로 사느냐! 라고 지적한단 말입니다.

널 그렇게 살라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줄 아느냐! 라고 책망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 책망을 받고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아!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었지! 라고 돌이키게 되는 겁니다.

물론 돌이켜도 또 다시 영덕대게처럼 또 본성대로 살아요.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아요.

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어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심이 더욱 더 감사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사는구나! 를 알고 감사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던지는 날까지 율법은 없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육신을 벗고 천국에 가면 율법은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거긴 아담의 몸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 새로운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몸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은 율법은 항상 살아서 우리 죄를 고발을 해야 해요.

주님의 은혜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고발하는 겁니다.

고발을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전부가 새로운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서신서들은 성도에게 준 것이지 불신자들에게 준 것이 아니에요.

성도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그럼 성도는 말씀이 요구하는 것과 지금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해요.

하나님의 요구는 이러한데 난 지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구나! 를 알아야 해요.

 

예를 들어서 주일날 교회도 안가고 빈둥거리고 논다고 하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율법이 되어서 너 왜? 교회 안가고 있어! 라고 고발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은 나를 이런 모습으로 구원을 하셨는데 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음에 회개하여야 하는 겁니다.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이 들어가 있어요.

이 말씀대로 살아낸 분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모든 성경 말씀대로 살면 예수님 삶이 나와요.

 

이렇게 살아야 정상이에요.

그런데 안 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아담의 몸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이런 삶은 장차 천국에 가면 살아져요.

천국에 가면 한 몸으로 살아요.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게 되어요.

천국에선 모두가 예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내 몸처럼 사랑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지요.

성령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으로 만드셨지요.

그런데 한 몸으로 살아지지가 않지요.

왜? 안 살아집니까?

이는 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 라고 말을 하면서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원수가 되어서 으르렁거리는 것입니다.

그럴때 말씀이 율법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우고 너 왜? 그러는데 라고 지적을 합니다.

 

그럼 성도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그럼에도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고 그 순간만큼은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돌아서고 나면 또다시 그 자리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율법은 전혀 다른 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예수 밖에선 율법이 모든 인간을 죽이지만 예수 안에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더 깊게 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은혜를 받고도 내 마음대로 살았구나! 라고 책망 받고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은 항상 성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우고 말씀을 가지고 책망을 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사도요한이 제자들에게 설교를 한 내용입니다.

사도요한의 제자 중에 이레니우스 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도요한이 한 설교라고 했어요.

이 설교를 들어보면 구원받은 성도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알다시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이고 성령을 받고 성경을 쓴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사도요한의 설교는 예수님의 설교라고 보아도 되어요.

 

하루는 사도요한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합니다.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였어요.

그런데 사도요한이 만나면 항상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한 겁니다.

왜? 다른 말을 안 하고 맨 날 똑 같은 설교를 하느냐! 라고 투덜거렸어요.

요즘 말로 설교 준비를 안 해서 매일 똑 같은 말만 한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러자 사도요한이 신앙은 지식을 쌓는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여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 해요.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다른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에요.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란 겁니다.

한 몸이기 때문에 희노애락을 함께 하라는 겁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를 보세요.

다 이런 말이에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서로 인자하게 돌아보고,,,,,,,

 

야고보서를 보세요,

우리가 너무도 많이 들었던 믿음과 행함 이야기 말이에요.

야고보가 이 믿음과 행함 이야기를 무엇은 근거로 말하고 있는지 간과해서는 안 되어요.

길더라도 봅시다.

 

자 보세요.

 

약 2:1-4=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먼저 내 형제들아! 라고 하지요.

이건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니지요.

그러면서 너희가 믿음을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안에선 세상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조건으로 차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세상 조건으로 성도를 차별한다면 그 사람은 옳은 믿음이 아니란 거예요.

그러면서 율법을 가지고 말합니다.

 

약 2:8-13=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성경이 뭐라고 하더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지 않더냐! 라는 겁니다.

온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성령을 마시고 한 예수 안에 있는 형제라고 한다면서 세상 조건으로 형제를 차별한다고 한다면 그게 어찌 한 성령을 마시고 예수 안에 한 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 에요.

그러면서 믿음과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어떤 형제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말로만 생각하는 척 하면 무엇 하느냐 에요.

믿음이란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 형제가 나와 한 몸이라고 여겨진다면 그냥 모른 척 할 수가 있느냐 에요.

그 형제 속에 예수님이 보이면 어떻게 외면이 되느냐 에요.

 

야고보와 같은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도 하셨어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양들이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대한 것을 예수님에게 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양들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한 몸으로 보았기 때문에 돌아보았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형제는 그 당시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말해요.

당시 복음 증거자들이 모습이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유리하고 했어요.

양들은 그들을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본 겁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그들을 보살핀 거예요. 

그러나 염소들을 그들이 한 몸으로 안 보인 겁니다.

염소들은 조건을 보고 따진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진정으로 믿음 안에 있다고 한다면!

다른 말로 예수 안에 있다고 한다면 가난한 형제를 보고 한 몸처럼 대하지 않겠느냐 에요.

 

약 2:14-20=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지금 야고보서는 우리더러 행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없는 것을 노력해서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에겐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이런 형제 사랑이 있는지 보라는 거예요.

만약에 없다면 그건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어요.

 

믿음과 행함은 분리 할 수가 없어요.

결국 이런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율법이 되어서 우리 신앙의 허상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린 이 말씀 앞에 서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여지없이 고발당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율법처럼 너 왜? 예수님의 몸으로 너 좋은 쪽으로 살고 있느냐 라고 고발하는 겁니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점점 썩어가고 산 나무에 물을 주면 시절을 좇아서 생명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아요.

믿음에 화합을 이루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알아가기 때문에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풍성해져 갑니다.

 

인간들이 잘나고 못남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선 무가치하다는 것을 아니 무덤덤해지는 겁니다.

하지만 믿음이 지식으로 쌓이게 되면 말씀을 법으로 만들어서 스스로 자기가 만든 법에 가두어져 옴짝달싹 못하고 메말라 가요.

 

지식은 반드시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케 하고 정죄케 해요.

지식으로 말씀을 듣느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수록 심령이 강퍅해져가요.

법관이 되어가요.

 

하지만 성도는 법에서 해방 되었어요.

법에서 해방 되었다는 것은 법으로 판단 받지도 않고 법으로 가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법으로 판단 받지도 않고 법으로 가둘 수 없는 세계를 정죄함이 없는 세계라고 해요.

예수님이 이런 세계를 우리에게 몰고 오셨어요.

 

그러니 성도는 남을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옳다 그르다 법적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비록 자기 신앙과 다르다고 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 되어요.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판단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남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데 자기만 문제처럼 보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만 옳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다 틀린 사람이 되고 말아요.

이런 것은 그 사람 안에 선악의 법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같이 넌 옳고! 넌 틀렸어! 라고 심판을 해 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는 심판의 기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에요.

 

선악과가 규정하는 심판을 행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과 속에 가두어져 버려요.

이렇게 되면 선악과가 주는 정보로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겁니다.

선악과가 주는 정보는 자아 중심의 정보에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했어요.

그럼 하나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정상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면 선악과가 주는 세계관에 가두어져 버려요.

선악과가 주는 세계관은 자아 중심의 세계에요.

이러면 선악과를 먹은 그 사람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립니다.

자기 입장에서 판단을 하면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모두가 심판권을 행사하는 신(神)이 되어 버린 겁니다.

각자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겁니다.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세상에선 선과 악이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달라요.

내겐 선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겐 악이 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각자의 유익을 기준으로 삼아서 선이다 악이다 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 편을 들어주면 선이고 반대하면 악이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이 곧 자기 중심에서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심판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좋다고 하는데 자기 입장에서 좋지 않으면 악이라고 심판해 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았다고 하는데도 자기하고 다르다고 아니라고 정죄해요.

 

바울의 충고를 봅시다.

 

롬 14:1-6=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은 누가 자기가 고기 먹는 것 때문에 실족한다면 자기는 평생 고기 안 먹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도에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연약한 형제가 넘어질 것이라면 앞에 두지 말라는 겁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만 행여 믿음이 약한 형제가 나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고 실족하면 안 되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양심은 우리 것이 아니고 형제의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면 되지 라는 것은 말은 맞는데 교회 안에선 금해야 하는 겁니다.

 

위 말씀에서 믿음이 다 같지 않다고 하지요.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채소를 먹고 어떤 사람은 고기 먹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지금식으로 어떤 사람은 술을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안 먹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일을 지킬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못 지킬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못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의 행함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앉고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하시니 두고 보란 말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잘라 내는 것이 아니고 기다리고 참아주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하도록 두지 않고 자기가 나서서 심판하느냐 에요.

 

자기가 나서서 심판한다는 것은 자기가 정한 기준에 못 미덥기 때문에 하는 거잖아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온전하고 다가 아니란 것을 왜? 모르느냐 에요.

하나님이 다스려가는 것은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 기준으로 세리와 창기는 지옥에 간다고 확정을 했지만 하나님은 바리새인을 지옥에 보내고 세리와 창기를 천국으로 데리고 갔어요.

지금 우리 판단이 바리새인의 판단이 될 수도 있어요.

나는 옳다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다 좋아내고 잘라 냈는데 그들이 먼저 천국에 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제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세계관에 가두지 마세요.

 

신앙이란 내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정죄함이 없는 세계관 말이에요.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면 내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바라보게 되요.

 

하나님을 내게 가두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래야 나와 다름도 용인 할 수가 있어져요.

내가 심판권을 행사하지 않게 된단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우리의 신앙을 사람의 성장에 비유했어요.

자란다는 의미에서 성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알아간다는 의미에서 자람을 말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그런 말을 했어요.

흔히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을 말해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내가 어린아이일 때는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어린아이 같은 행사를 하는데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아이 때 일을 다 버린다고 해요.

 

어린아이는 실수가 많아요.

모든게 미숙해요.

판단도 생각도 미숙해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지면 판단이 성급해져요.

남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것이 없어요.

그냥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내 뱉어요.

뱉어 놓고 수습을 못해요.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조급해요.

무조건 자기하고 맞지 않으면 배척해요.

자기하고 다르면 틀렸다고 해요.

이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어린아이로만 마물러 있지 않아요.

점점 더 풍성해져가요.

신앙이 장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많이 알아가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어린아이들의 신앙은 가난하지만 어른의 신앙은 풍성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게 길게 보는 안목에 생겨요.

지금 비록 나와 다르지만 주께서 간섭하시면 그 눈을 열고 귀를 열어서 보게 하고 듣게 하실 것이란 마음으로 대하게 되어요.

그럼에도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제한적으로 보고 있어요.

 

마치 초보 운전하는 사람들처럼 앞에 차만 보았지 지나가는 사람이나 그 좋은 산천경계 아름다운 풍광들을 다 놓치고 있어요.

그러니 운전을 하고 나면 온 몸이 쑤시고 결리고 아픈 겁니다.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은 운전하면서도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운전해요.

그러면서도 무사고로 해요.

그러나 초보 운전은 자기 딴에 열심히 잘한다고 하지만 맨 날 사고 투성이에요.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사고 안내고 여유롭게 양보하면서 편안하게 해요.

 

제발 완장차고 다니면서 보안사 감찰반원들 같이 다른 사람 신앙을 점검하고자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 몫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께 맡겨 두고 내가 받은 은혜를 사랑으로 감사로 토해내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 안에 가두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생각으로 판단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생각보다 훨씬 높고 깊고 넓게 일하세요.

 

쬐끔 은혜 받은 것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행사하지 마세요.

이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들이 칼을 잡고 휘두르듯이 무서워요.

가까이 가면 찬바람이 쌩쌩 불어요.

나 아니면 안 돼! 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구원을 즐기세요.

왜? 그런 너그러움들을 다 빼앗겨 버렸나요.

나와 다른 놈들 잡으러 다닌다고 다 잃어버렸어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세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세요.

높은 산에서 도시를 보면 내가 저기서 아등바등 살았나 싶고 별것 아닌 것에 목숨 걸고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보면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우는 것도 다 부질 없어 보여요.

 

전에 우주항공선을 타고 우주로 여행을 갔다 온 이소연씨가 그러지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구는 경계가 없다고!

우린 전부 말뚝을 박아 놓고 여긴 내 구역 저긴 니 구역하고 아등바등 살지만 막상 세상 밖에서 바라보니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예수 안에서 보니 먹는 것도 아무 것도 인고 안 먹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더란 말입니다.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것도 예수 안에서 보면 다 부질 없는 것들이에요.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복음을 알든 모르든 우리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신앙도 그래야 해요.

좀 하나님 세계에서 바라보세요.

그러면 너그러움이 생깁니다.

 

우리는 사람을 앉게도 일어서게도 할 수가 없어요.

구원을 받게도 할 수가 없고 받지 못하게도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주께서 하시고자 하면 우리가 아무리 막아도 안 되고, 주께서 버리시면 우리가 아무리 붙잡아도 안 되어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맞다 틀렸다 할 이유도 없어요.

그냥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살면 되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주께 맡기시고 주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면서 사세요.

 

얕은 물가에선 소라 전복이 없어요.

깊은데 가야 성게도 있고, 전복도 있고 ,해삼도 있고, 물고기도 있어요.

찰싹거리는 물가에서 파도 놀음만 하지 말고 깊은데로 가서 하나님이 만든 은혜를 만끽하세요.

야! 이런 세계도 있구나! 생각하고 안목들은 넓혀 가셔야 해요.

 

우린 너무 심령이 메말라 있어요.

정죄함이 없는 세계가 주는 넉넉함이 없어요.

 

전 가을철이 되면 꼭 가는 곳이 있어요.

차를 타고 가지산 정상에 갑니다.

그 정상에서 단풍이 든 얼음골 산을 내려다보면 하나님의 장엄한 숨결을 느껴요.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게 형형색색의 단풍들을 들게 하셨는지 그 모습을 보노라면 황홀해져요.

야! ~

와! ~

감탄 밖에 안 나와요.

 

다른 말이 필요가 없어요.

그 형형색색으로 수놓은 단풍을 보노라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요.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참 아름다워라 찬송을 불러 보세요.

천국이 따로 없어요.

 

만약에 그 색깔이 전부 하나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싱겁겠어요.

그런데 우린 우리 주변에 다 같은 색깔들로 채우고자 해요.

다 나와 똑 같은 사람들로만 채워 놓았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겁니다.

 

전 과거에 복음을 처음 알고 난 후 수많은 사람들은 비판했어요.

다 가짜로 보이는 겁니다.

그 땐 내가 아는 복음만이 최고인줄 알았거든요.

모든 것을 내 기준에 맞추어서 그 기준에 미달되면 사정없이 난도질 했어요.

그 당시 내 모습은 스스로는 엄청 좋은 것 같은데 너무 가난했어요.

남을 비판한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하였어요.

 

그러다가 복음의 깊이로 점점 빨려 들다가보니 지금까지 헛싸움만 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하다고 느꼈어요.

남을 비판한다고 정작 내 안엔 텅 비어 있는 겁니다.

속에 알알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채워져 있어야 하는데 강포와 악독과 시기와 분냄만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러니 가난 할 수 밖에 없지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처럼 스스로는 엄청 부요하고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헐벗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바라보니 너무너무 가난한 겁니다.

왜? 가난해 졌을까 원인을 찾아보니 말씀을 먹지 않고 분석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밥을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하는데 남 비판한다고 분석만 했으니 가난 할 수밖에 없지요.

밥을 먹다가 보면 돌이 나오면 버리고 티가 나오면 뱉고 다시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전 밥 먹다가 돌 하나 있다고 밥 그릇째 버리고 살았던 겁니다.

 

누구 설교를 들어도 돌을 찾아내고 티를 찾아낸다고 법석만 떨었지 먹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 말은 요란한데 막상 까서 먹으려고 하면 빈 껍질인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나중에 보면 나 혼자 뿐이에요.

아무도 내 곁에 없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심한 책망을 하는 겁니다.

네가 왜? 홍해 바다는 가르고 다니느냐고 하는 겁니다.

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 라고 물으니!

넌 왜? 내가 할 일을 네가 하고 있느냐! 라고 말하는 겁니다.

깜작 놀랐어요.

니가 왜? 심판하고 다니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넌 그냥 내가 붙여주는 그대로 일하면 되는데!

너는 왜? 네가 양이다 염소다 판단하여 내어 좇느냐 하는 겁니다.

전 그 책망을 듣고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하나님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것을 뒤 늦게 안 겁니다.

양이다 염소다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란 겁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붙여 줬는데 난 내 기준에 안 맞는다고 다 내어 좇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염소를 좇는다고 하다가 양까지 다 좋아 낸 겁니다.

 

우린 복음을 말하면서도 나무에 깃들일 새가 없어요.

다 좇아내고 있잖아요.

이 사람도 틀렸고 저 사람 틀렸다고 다 내어 좇고 있어요.

 

우리 스스로가 다리오 왕처럼 자기가 정한 법 안에 가두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어요.

살려주고 싶어도 자기가 정한 법 때문에 살려주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보낸 자들을 풀무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어요.

 

정작 싸워야 할 자기 자신과는 싸우지 않고 남과 싸우고 있는 겁니다.

왜? 남을 그토록 간섭하고자 하는지 몰라요.

자기 수하에 두고자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성(城)을 구축하고자 하는 겁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세요.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밭에 가리지가 있더라도 뽑지 말라고 하잖아요.

가리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봐서 우리 보고 뽑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린 기어코 가라지라고 뽑아내었는데 정작 가라지는 뽑지 못하고 곡식만 다치게 만들고 말아요.

나중에 보면 곡식은 다 내 보내고 가라지만 덜렁 남아 있어요.

그러니 맨 날 싸우고 하는 겁니다.

 

분쟁하는 나라마다 스스로 설수가 없어요.

집안이 시끄러우면 다 떠나요.

서로 물고 뜯으니 함께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 기준으로 가두지 마세요.

제발 홍해를 내가 가르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어떻게 홍해 바다를 가르셔서 건너게 하는지 구경을 하자구요.

누가 오거들랑 아! 하나님이 저 사람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두고 보자니까요.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에서 좇아내지 말고 받으세요!

비록 그 사람이 이단이라 할지라도 받으세요.

이단을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단까지 참고 기다려 줄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혹시 압니까?

내일엔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설지 어떻게 압니까.

우린 아무도 몰라요.

우린 다 이단으로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러니 받아야지요.

 

제가 만약에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 아래 있다가 죽었다면 지옥에 갔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 제게 넘쳐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에 복음을 알았어요.

그러니 그 땐 비록 달랐지만 참아 주심이 지금 저를 있게 하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참아 주란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피 흘리셔서 구원한 형제를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냅니까?

정녕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의 잘잘못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제한적인 것입니까?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는 이 사실을 간과치 말고, 나를 나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심과 같이, 나와 다른 형제도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한 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나와 다르지만 주께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면 한 몸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 하지 마시고 참아주고 기다려 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 받은 자로서의 삶을 큰 나무처럼 새들이 깃들고 쉴 수 있도록 만들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셔도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변함없는 일향 미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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