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JESUS & 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41강. 성도가 부를 노래 (계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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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2021. 6. 15.

 

 

[41강. 성도가 부를 노래 (계 15:1-4) ]

-.정낙원 목사

 

오늘은 찬송에 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토해내면 찬송이 됩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노래만이 아니고 감사를 표현하는 온 몸의 몸짓인 것입니다.

입술로 토해지면 노래가 되고 몸으로 토해지면 감사가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해 가시는지를 알고자 함입니다.

성경을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동행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간섭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는 저주처럼 다가오고,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에게 복처럼 다가옵니다.

속된 말로 우리는 땅에서 잘 되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을 복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흔히들 구약의 족장들의 물질적 부를 복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언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은 신약에서는 천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말씀에 이끌려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게 하시고서는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은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되어도 그건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늘에 것입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을 의지하고 사는 자를 어리석은 부자로 비유 하셨습니다.

부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세상적 가치로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고 세상 것을 의지하고 산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그럼 지혜로운 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사는 자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비천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그는 영적인 복을 받은 부자입니다.



어쩜 이 시대 교인들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에서 증거 되는 복이 대부분 세상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영적인 복을 이야기 하면 싫어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을 당하더라도 전해야 합니다.

그게 진리를 받은 성도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신 적이 없나요?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 했는가?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나를 구원한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구원할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셨단 말이지요.

왜 그랬을까?

답은 하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십니다.

그 약속이 뭔가요?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어떤 건가요?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성경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새롭게 보여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니까 모두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예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은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계획된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사도 바울 자신의 구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구원이 창세전에 계획된 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찬송하리로다!” 라고 탄성을 지으면서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눈을 열어서 언약의 후손들이 죄 아래 던져졌다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건짐을 받는 것은 모두가 창세전에 계획하신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왜 죄 아래 가두었다가 그리스도의 피로 건져냄을 받게 하셨는가요?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참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수많은 양자들을 생산해 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미가엘과 용이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에서 용이 패한 후에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납니다.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자 화가 잔뜩 나서 아이를 낳은 여자의 후손들과 전쟁을 합니다.



이 전쟁이 13장에서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과의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짐승이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14장에 보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하늘에 있는 시온 산에서 일찍 죽임을 당하고 살아난 어린 양과 더불어서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어린 양과 똑 같은 모습으로 죽였다가 살려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이들을 15장에서 소개를 하는데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말은 이겼다고 하는데 실상은 짐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누구든지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살고자 예수를 믿지 말고 이 땅을 떠나고자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고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땅의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은 하늘에 목숨을 얻게 하여서 천국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반대로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의 말을 따르고 짐승을 경배하고 산 자들은 지옥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한 자는 죽음에 던지고, 죽고자 한 자들은 다 살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을 일컬어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어린 양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천국에서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라고 할까요?

이는 둘 다 죽음을 지나 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홍해를 건너 온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린 양의 노래는 짐승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모세의 노래를 부른 이스라엘은 애굽의 바로로부터 벗어난 자들이고,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짐승으로부터 벗어난 자들입니다.

모세의 노래를 부른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왔습니다.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죽음을 지나온 자들입니다.



그럼 천국에서 부르는 노래는 죽음을 지나온 자들이 부르는 노래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의 끝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세의 노래이고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아니고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구원은 우리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이 좋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구원 해 주신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안식의 나라라고 합니다.

안식은 일을 한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일을 했습니까?

어린 양이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명을 받잡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죄사함이라는 구속을 받은 자들을 성령이 오셔서 예수의 생명을 주어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여서 구원을 하십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구속을 하셨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구원을 하십니다.

엄밀히 말해서 구속과 구원을 다릅니다.



구속은 죄를 없이 하는 일이고,

구원은 죄사함 받은 자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를 이해하면 쉬울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은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근거로 아담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영생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영생은 생명과 속에 있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과를 먹었으면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생명과를 먹었으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주기 위하여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 할 죄인이 없으니까 오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지은바가 되었습니다.

아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아담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뱀이 등장하고 아담이 범죄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죄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자가 되어서 죄인이 된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내어 쫓았습니다.

내어 보내면서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메시야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아담에게 죄를 짓게 한 뱀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된 아담은 생명과를 멀리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 소망은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 영웅호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담의 소망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명과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은 아담이 독자적인 힘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일차적 목표는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차적 목표는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기 위해서는 먼저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과가 있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약속한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때가 차매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씨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몸에 하나님의 씨를 심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의 몸을 입은 것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죄를 대속하려면 죄가 없는 분이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남자를 모르는 처녀에게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서 낳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서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는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에덴동산의 문을 상징하는 성소와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사망 권세가 깨트려지는 장면입니다.

바위처럼 단단하던 사망 권세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왜 죽은 자라고 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합니까?

이는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부활을 하기 때문에 잔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무덤은 죄인을 가두는 곳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무덤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자 무덤이 더 이상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무덤은 죄인만 가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으로 구약의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치룬 것입니다.

그러자 사망이 구약의 언약에 후손들을 토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이들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주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두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죄 문제를 해결 받는 구속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육체로 담당해 주셨습니다.

구속을 받은 자는 이제 에덴동산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생하는 자는 아직 아닙니다.

영생은 생명과를 먹어야지만 합니다.

구속을 받은 자는 생명과 앞으로 인도가 된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어야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이 됩니다.



어떻게 생명과를 먹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이게 성령 강림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낳아진다는 뜻입니다.

누가 낳습니까?

예수님이 낳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생명과를 먹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은 우리의 죄를 없이해 주는 대속으로서 구속의 사역이고,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구원의 사역인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속과 구원은 동시적인 것으로서 굳이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기 때문에 나누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언약을 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옛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는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은 죄인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는 자기가 죄를 지어야 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적하는 죄는 죄인에게서 난 자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딱히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의 부모로부터 출생을 하였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마치 제가 정(鄭)씨라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정(鄭)씨가 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일을 하십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을 뭐라고 하나요?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인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먼저 율법 아래 가두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일을 합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죽음 아래 가두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꺼내 줄 때까지 무덤에 가두어져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꺼냅니까?

자기 목숨을 대신 주고 꺼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 무덤 속에 있던 구약의 이스라엘이 다 나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업을 이을 아들이지만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잠시 종으로 두신 것입니다.

이건 율법 아래 두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십니다.



속량은 죄에서 건져지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 말하면 율법아래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율법에서 빠져 나온 자들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주어서 아들에 명분을 얻게 해 주십니다.

아들에 명분을 얻게 해 주신다는 말은 아들의 지위로 나아오게 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올 때까지 종처럼 살게 하였어요.

그 이유는 아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종으로 살게 하신 겁니다.



이건 마치 탕자비유에서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집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귀중함을 모르는 자는 데리고 살아 봐야 맨 날 투덜거려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하자 그러라고 흔쾌히 허락합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고 난 후에 아들은 아버지 집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집의 귀함을 알 때 아들은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아버지에게 난 아들의 자격이 없는 자이니까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전에 집에 있을 때보다 더 귀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대우뿐만 아니라 인장 반지를 끼워주고서는 아버지 집안을 몽땅 맡겨버립니다.

이는 비로서 아들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이제부터 아들로서 종처럼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려고 지옥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갓 지어진 아담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죽음 또한 모릅니다.



아버지 집인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소중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그렇게 당부하고 알려 주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따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시고서도 막지 않고 그대로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아담이 선악과를 못 따 먹게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두신 것은 죽음을 통해서 영생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보아야 에덴동산의 귀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지옥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천국은 지옥에서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에서 살아갈 자기 백성들을 먼저 지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에요.

이 세상에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살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천국을 주세요.



우리의 신앙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뚱이는 편하면 게을러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몸뚱이가 불편한 일들을 자꾸만 벌리시는 것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노정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다고 하면서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젓과 꿀이 흐르는 은혜의 땅인 가나안을 주기 위함이에요.



가나안의 삶이 축복임을 알게 하려고 지옥 같은 광야 길을 사십년 동안 걷게 하신 것입니다.

이 광야 길이 지금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에요.

우린 이 땅에서 아픔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천국을 일컬어 눈물 없고 고통 없고 다시는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역설적으로 천국에 가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통당하면서 아파서 곡을 하고 애통해 하면서 급기야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눈물 흘린 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지옥을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을 주시려고 지옥에 보냈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눈물 흘려야 해요.

그리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천국으로 인도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에서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 뭐라고 했나요?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 보아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죽음 아래 가두신 것입니다.



죽음 아래 있던 자를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로 빼내 주시고,

이렇게 빼내심을 입은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13장에서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 살아서 천국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인 줄 알았는데,

죽음을 지나와서 보니까 거기가 천국인 겁니다.

그래서 새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찬송을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왜 찬송을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까?

이는 구원 받은 자가 최종적으로 토해내는 감사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의 강은 건너온 자들만이 부를 수가 있습니다.

죽음을 지나오지 않는 자는 절대로 찬송을 부를 수가 없어요.

찬송은 신앙의 최종 열매에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언제 노래가 나오는지를 보시면 찬송의 의미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노래는 기쁠 때 나옵니다.

기쁨이 우리 안에서 주체 할 수가 없을 때 그것이 노래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 돈 좋아 하지요.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로또 복권 1등에 당첨이 되어서 100억을 받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럼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그냥 외마디 와우~! 입니다.

와우~! 가 바로 기쁨의 노래입니다.



세상에서 기쁨으로 부르는 노래와 구원 받은 성도의 찬송은 다릅니다.

노래는 그냥 내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찬송은 감사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걸 잘 이해하세요.

나를 구원 해 주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 찬송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노래나 어린 양의 노래는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부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났는가요?

어린 양의 이름으로 입니다.

어린 양이 우리의 이마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았기 때문에 짐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저주인줄 알았는데 천국에 가니까 저주가 아니고 축복인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짐승은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은 죽이지 않아요.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오로지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만 죽여요.

왜냐하면 자기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을 죽임으로서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앙갚음을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서 보았잖아요.

용이 하늘로부터 쫓겨나자 분노가 가득해서 이 땅에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죽이려고 바다 모래 가에 서서 강물을 강같이 토해서 떠내려가게 하잖아요.

우리는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마귀를 찾아내는 미끼로 성도를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숨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를 어둠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하나님이 마귀가 좋아하는 미끼를 던져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보면 참지 못하고 기어코 죽이고 마는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을 그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만 보면 돌아 버려요.

뚜껑이 열려요.

그래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분노하면서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역설적으로 말하면 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니에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성도는 반드시 마귀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마귀는 귀신같이 예수쟁이를 알아보아요.



마귀는 저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인지 예수를 믿는 성도인지 알아요.

교인과 성도는 달라요.

교인은 비즈니스 하러 다니는 자이고 성도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교인으로 교회에 다니는 자들은 그냥 두어요.

예수를 믿는 성도들만 골라서 핍박해요.



이 시대 교회는 사교모임장이 되었어요.

동호회 모임이 되었어요.

교회들이 비즈니스 장소가 되었어요.

그러니 교회가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극단적으로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고난이 없는 사람들은 가짜일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은 반드시 고난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본능적으로 어린 양을 싫어해요.

왜냐하면 어린 양은 빛이고 마귀는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마귀는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성도들을 보면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곁에 두고서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복음을 전해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하늘에 복음을 전하면 땅에 속한 자들이 싫어해요.

예수를 믿으면 고난을 받는다고 하면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자들이 듣기 싫어해요.



사람들의 종교성은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우상성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냥 구하기 미안하니까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성 신앙은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일상생활 깊숙이 녹아져 있어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려면 뭔가 들고 가서 하잖아요.

이걸 뇌물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뇌물 속에는 신과 거래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우상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뇌물 사상이 우리의 신앙 속에 그대로 담아져 있습니다.

이게 기복주의에요.



기복주의가 바로 열심히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자기가 충성한 것의 비례로 복이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게 뇌물 신앙이고 우상숭배 신앙이거든요.

복을 얻고자 하는 신앙은 모두가 우상숭배에요.



우리가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사의 행위입니다.

복을 받고자 함으로 하면 우상숭배이고 감사함으로 하면 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신과 거래하는 우상숭배자들을 땅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교인과 성도가 있습니다.

교인은 심판하고 성도는 구원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이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적이란? “세메이온” 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본질적 의미는 영적인 것을 알려주는 싸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를 말씀 하시면서 천기를 분별하라고 하신 것은 천기를 통해서 내일의 날씨를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바로 이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요한이 마지막 심판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모습을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홍해 바다를 건너는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바로와 애굽의 군대에게는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한 바다를 두 가지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모습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이고,

두 번째 모습은 그냥 평화로운 유리 바다입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애굽의 바로와 그 군대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바로와 그 군대들은 홍해에서 모두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바다인데 바로와 애굽의 군대에게는 심판의 바다였고,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바다였던 것입니다.



어째서 동일한 바다인데도 하나는 심판을 받고, 하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까?

이는 심판을 이기는 사람과 함께 건넜느냐 아니면 홀로 건넜느냐의 차이입니다.

바로와 그 군대는 자기들 힘으로 건너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 건넜습니다.



고린도전시 10장을 봅시다.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사도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그들 독자적으로 건넌 것이 아니고 모세에게 속하여 건넜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품에 안겨서 건넜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이름은 “물에서 건진 자” 즉 “죽음에서 살아 난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구원자”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죽음에서 살아난 모세라는 구원자에 안겨서 건넌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홍해는 영적 의미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살아난 모세와 연합하여 죽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바다를 스스로 건너 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와 애굽의 군대도 독자적으로 건널 수가 없고, 이스라엘도 독자적으로 건널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살아 난 구원자를 통해서만 건너 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구원자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자가 있었고, 바로와 애굽의 군대들에게는 구원자가 없었습니다.



이건 신자와 불신자로 이야기 해 봅시다.

신자도 죽고, 불신자도 죽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자이고, 바로와 애굽의 군대는 불신자입니다.

둘 다 죽음의 바다를 건넙니다.

그런데 신자인 이스라엘은 모세라는 구원자 품에 안겨서 죽음의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바로와 그 군대들은 구원자 없이 건너고자 하다가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천국은 죽음을 건너서 가는 곳입니다.

신자들은 죽음의 강을 예수라는 죽음을 건너 온 구원자를 통해서 건너갑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예수라는 구원자가 없이 건너가다가 죽습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온 산 자가 되어서 천국에서 영생하게 되고,

불신자들은 죽음의 강에서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서 불 못에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유리 바다가에서 부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라고 합니까?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찬송할 일을 하게 하였고, 어린 양이 성도들에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할 수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역하면 모세에게 부르는 노래이고, 어린 양에게 부르는 노래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이야기는 모세와 어린 양이 성도들에게 노래를 부를 구실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모세가 부르는 노래이고 어린 양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에요.

구원해 주심에 대한 반응이고 보답입니다.

마치 선물을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어린 양이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고 감사할 거리를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어린 양 안에서 살아난 자들만이 부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죽은 자는 찬송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시 115:17절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시편은 전부가 찬송이에요.

어떤 찬송인가요?

기이한 일을 행하여 구원해 주심에 대한 찬송입니다.



시편을 어떻게 마감하는지를 봅시다.

시편의 맨 마지막 장을 봅시다.



시편 150편입니다.



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어디에서 찬양합니까?

그 성소이지요.

하나님이 거하는 성소가 어디인가요?

장소적인 의미로는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은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누가 찬양합니까?

호흡이 있는 자가 찬양하지요.

누가 호흡이 있는 자인가요?

주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게 또 중요한데,,,



시편 104편을 봅시다.



시 104:29-30=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주께서 낯을 숨기셨다고 하지요.

누구에게 낯을 숨기셨나요?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낯을 숨기신 것입니다.



낯을 숨기고 어떻게 했나요?

호흡을 거두시지요.

범죄한 아담의 호흡을 거두자 아담은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호흡은 아담에게 불어 넣은 생기에요.

생기를 “니스마트 하임”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알아보는 기운”이에요.

하나님이 죄인인 아담에게 하나님을 알아보는 기운을 거두어 가시니까 아담은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생물학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해요.

즉 생명과 단절된 것입니다.

생명과 단절이 되어 있으니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찬양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받은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였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이 된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요.

이런 상태를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다 살려냅니다.



이를 30절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숨을 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건 단순하게 우리가 숨을 쉰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보니까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한 겁니다.

그래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신앙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의 찬송 내용이 어떤 건가요?



3-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송하지요.

주만 거룩하다고 찬송하지요.



전능이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취해 내신다는 뜻입니다.

약속의 신실함을 말해요.

아브람이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조급함으로 사래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자 창세기 17장에 “나는 전능한 여호와로라” 고 나타나서 아브람을 책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개명시키고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죽이고 아브라함으로 새롭게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죽은 여자인 사라의 몸에서 산 자의 생명을 낳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전능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이 전능이에요.

어떻게 죽음에서 살려 내십니까?흠 없는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려 냈습니다.

왜 흠 없는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려내십니까?이는 어린 양의 의를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어린 양의 의가 있어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상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기업의 산에 심고 그의 처소를 삼기 위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교제키 위함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난 죄인들을 어린 양의 죽음으로 죄를 속량하시고 옛 사람을 홍해에 묻고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를 해 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업의 산을 상징하는 가나안이라는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비로서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되어서 교제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구약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시켜서 하나님과 교제케 하였듯이 신약에서는 어린 양이 성도들을 세상에서 출애굽을 시켜 하늘나라로 인도하여서 하나님과 영원한 동거를 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영광과 그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거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찬송을 받지 않아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 있는 자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어린 양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어린 양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시편 150편에서는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여호와를 찬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를 찬양합니까?

이는 여호와가 구원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어린 양이고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이 땅에서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구원의 바다인 유리바다가에서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시편은 구원 받은 자들의 신앙고백이에요.

시편은 산전수전을 겪어온 성도들만이 이해 할 수가 있어요.

찬송은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니에요.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불러지는 것입니다.



찬송은 마치 눈물로 씨를 뿌린 자들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이 땅에서 설움 받고 고난당하고 핍박 받고 죽임 당한 자들만이 부를 수가 있어요.

찬송은 성가대에서 기교를 부르며 하는 노래가 아니에요.

심연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흐느낌이에요.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가 엄마가 찾아와서 다시 만나서 엉엉 우는 것과 같아요.

그 울음은 원망의 울음이 아니에요.

안도의 눈물이에요.

마치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가 소경으로 살면서 산전수전을 겪고 맨 마지막에 동생을 만나서 밤새도록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면서 부르던 창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한을 다 토해내는 기쁨의 울음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가서를 통해서 성도들의 신앙은 이 땅에서 한을 쌓아 가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건 원수를 갚는 그런 한이 아니에요.

사랑을 지키며 쌓아온 한을 말해요.

나쁜 한이 아니라 좋은 한이에요.



아가서가 뭔가요?

맑은 노래에요.

영혼의 노래라는 뜻이에요.



이 노래는 신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술람미만이 부를 수가 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로 하여금 부르게 해 주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의 삶을 보세요.



신랑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온 삶이에요.

조롱과 멸시와 핍박과 아픔을 겪으면서 지나온 길이에요.

눈물로 통행해 온 삶이에요.

그 아픈 삶은 술람미가 살아온 것이지만 아픔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살도록 힘을 준 것은 바로 솔로몬의 사랑입니다.



술람미에게는 솔로몬의 사랑이 삶에 의미였어요.

솔로몬이 없는 술람미는 존재하지 못해요.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을 향한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누가 부르는가요?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부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버림 당한 자들이에요.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았어요.



짐승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난이고 죽음과 같아요.

예수 믿음 하나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어요.

이들은 이 땅에 일락을 쫓아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천국에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신 그 어린 양에게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어쩌자고, 나 같은 무지랭이를 구원해 주셨나이까!

어쩌자고, 이 죄인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나이까!

내가 뭐라고!,,,

어떻게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고 복음이 들려집니까!

세상에,,,

그래서 감사가 나오고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이 감동이 있나요?

없다면 회개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의 경륜이 오래 되고 복음적 지식이 해박하다고 하여도 이 감동이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당신은 죽은 자에요.

그러니 찬송이 없는 것입니다.

이건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에요.

복음은 머리에 담아 두는 것이 아니에요.

쇼윈도에 진열해 놓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백독을 해도 감사하는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읽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이에요.

양식이에요.

양식은 반드시 배부름을 줍니다.

복음으로 배부름을 받은 성도는 감사하고 살아요.

찬송하며 살아요.



그러나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자는 감사도 찬송도 못해요.

이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심령에 죽었는데 어찌 감사가 나오고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이들은 그냥 구경 오는 자들이에요.

복음으로 인하여 배부름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이 안다는 그 복음은 그림의 떡인 겁니다.

그림의 떡은 배부름을 주지 못해요.



복음으로 기뻐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기뻐한다면 이는 예수 신랑 말고 다른 서방과 바람피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보세요.

결실치 못하는 이유를 뭐라고 하던가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육체의 쾌락이라고 하지요.



한마디로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을 의지하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땅에 것을 유업으로 주지 않았어요.

하늘에 것을 주었어요.



창세전 언약이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당연히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어야 해요.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들은 하나같이 이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빈부에 처하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자족하면 감사하고 살았어요.

성령이 그들 안에서 하늘에 것을 쫓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적은 부요함이에요.

등 따습고 배부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어요.

교인들이 물질적 가치로 살고 있어요.

이게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맨 마지막의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계 3:14-18=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세상의 부요에 취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단은 냉혹합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 적으로는 잘 사는데 영적으로는 죽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되어서 자랑하려면 믿음을 자랑하여야 하는데 돈을 자랑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련합니까?

교회가 자랑하려면 복음을 자랑하여야 하는데 교회 크기를 자랑하고 있으니 얼마나 수치스럽습니까?

이 시대는 교회마다 바울이 배설물이라고 버린 것들을 모아 놓고서는 자랑하고 있어요.

이 어찌 불쌍치 않습니까?



신앙생활이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는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전하고 구제하며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자기 치장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원인이 되어서 발생 된 것이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됩니다.



사랑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받지 않아요.

예수님의 것만 받아요.

예수님이 그 안에서 토해 낸 것만 받으세요.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하였어요.



요한은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서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서 맺는 열매라고 했어요.

겉으로 나타난 것은 가지가 열매를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열매는 뿌리가 맺게 한 겁니다.

이건 열매를 맺은 가지는 알아요.



그러므로 가지는 자기가 열매를 맺었다고 하지 않고 뿌리가 열매를 맺게 해 주었다고 하면서 뿌리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뿌리의 것입니다 라고 해요.

이걸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예수님으로 이해 해 보세요.

성도는 예수님이 보내주는 진액(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걸 아는 성도는 자기가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아요.

자랑하지 않고 감사해요.

죽도록 충성을 해도 자랑치 않고 감사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행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나 믿음 잘 지키고 신앙생활 잘 했지요’ 라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어린 양에게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걸 계시록 4장에서는 24장로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면류관을 벗어서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어린 양에게 던지는 것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린 죽은 자에요.

사라처럼 경수가 끊어져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님의 것을 낳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충성도 봉사도 헌신도 구제도 연보도 모두가 예수님이 하신 것이에요.

사랑도 온유도 겸손도 자비도 양선도 오래 참음도 인내도 절제도 형제 사랑도 모두가 성령(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 것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맺게 해주었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곧 그리스도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것이라곤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우리 믿음이 아니에요.

복음을 깨닫는 것도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교회를 다니는 것도 우리 능력이 아니에요.



모두가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일을 하게 하신 것을 아는 성도는 죽도록 충성을 해도 자기를 자랑치 않고 죽도록 충성케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걸 알고 범사에 감사로 살아가는 것이 찬송이에요.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그 어떤 일을 하여도 나 이것 했어요! 라고 들레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랬잖아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힘으로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죽는 것조차도 그것은 아버지께서 하게 하신 것임을 알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린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나아갈 궁극의 자리에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15장까지는 신약 전체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12장을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자 하나님이 그 아이를 하늘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언약에 따라서 구약의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승리자가 되어서 하늘로 승천하시자 마귀(용)가 땅으로 쫓겨남을 당합니다.

땅으로 쫓겨난 용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기를 하늘에서 쫓아낸 아이를 낳은 여자의 그 남은 자손들을 핍박합니다.



이것이 13장에서 두 짐승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이 누구를 핍박합니까?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죽이기 시작을 합니다.

반대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666 짐승표를 주어서 이 땅에서 잘 살게 해 줍니다.



14장에서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서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하늘의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더불어 안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말이 이기고 벗어난 것이지 실상은 짐승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왜 짐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습니까?

이는 짐승을 경배치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죄목으로 풀무불 속에 던져짐을 당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풀무불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킨 결과가 죽음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풀무불 속에 흰 옷을 입은 분이 계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죽음 너머에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14장에서 하늘의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이 바로 짐승을 상징하는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죽음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이 죽임당하고 하늘로 가니까 거기에 어린 양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어서 오너라’ ‘수고했다’고 반갑게 맞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인 15장 이야기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천국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5장은 창세전 언약의 완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12장에서 15장까지 오면서 하는 이야기가 뭔가요?

성도를 죽인 짐승은 망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신이 나지 않나요?

흥분되지 않습니까?

설레이지요.

맞아요.

설레고 흥분되고 신이 나야 해요.



그래서 제가 늘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희망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망을 주어요.

하나님이 밧모 섬에서 오늘 내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천상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이 땅에 너와 같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써서 알려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 편지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킨 자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귀에 요한계시록이 우리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해요.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어요.

이제 그 끝에 다다랐어요.

이제 곧 끝이 날 것입니다.

이상 기후와 지진과 기근과 홍수와 화산 폭발과 쓰나미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만물이 이 세상이 끝날 때가 다 되었다고 징조로 말하고 있잖아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가기 위하여 말이에요.



주께서 인생의 무거운 외투를 하나 둘씩 벗게 하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빛에 나그네가 외투를 하나 둘씩 벗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의 삶에 무게들을 하나 둘씩 벗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버리게 하시고,

삶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게 하시고

부모 형제 자식 걱정도 벗게 하시고,

저들도 주께서 다 간섭하시겠지 하고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 무겁게 사시지 말고 가볍게 사세요.

다 짊어지고 갈 순 없잖아요.

우리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고 벗지 못하니까 주께서 내려놓게 하시고 벗게 하시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



그 은혜가 우리 눈을 밝혀서 주 앞에 서는 그 날을 소망하면서 하루 하루를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유리바닷가에 서서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 앞에 서는 그 날이 하루 하루 다가오는 것을 설렘으로 기다리고 맞이하게 하여 주옵소서. 술람미가 향기를 날리면서 오는 신랑 되신 왕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의 오심을 보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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