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JESUS & 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2강. 광야에 찾아오신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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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6. 26.

 

 

[52강. 광야에 찾아오신 하나님 (창 28:10-22)]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다루어 가는데 있어서는 메뉴얼이 있습니다.

매뉴얼이란? 언약입니다.

언약은 창세전에 세우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만유의 주가 되는 언약입니다.



주란? 왕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만유의 왕이 되게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만물이 이를 근거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가 주와 되는 일로 진행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을 다스려가는 매뉴얼이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언약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섭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연히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하늘에서 큰 바람이 바다에 내려 부니까 바다에서 큰 짐승이 나옵니다.

이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제국이라고 합니다.

그럼 역사 속에 일어나고 진 제국들의 흥망성쇠는 하늘에서 부는 바람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6장에서는 4가지 말들로 나타납니다.

말들이 뛰니까 세상에서 각양의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누구의 지시에 의하여 움직이느냐 하면 어린 양입니다.



이러면 이 역사를 어린 양이 운행하고 있음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창조의 목적에 따라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장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도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간섭 하에 살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의 인생을 설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시간에 따라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을 봅시다.



시 139:1-16=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6절을 보면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을 해 놓았다고 하지요.

이를 근거로 1절부터 읽으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다 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책인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서 움직여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란? 이를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자기 주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란? 창조주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내 인생을 이해하면 왜 가 나옵니다.

내가 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입니다 라는 인본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이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성도의 구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주인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인 것입니다.

자랑 할 수가 없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사람마다 주인이 포도원으로 불러들이는 시간이 다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품꾼들이 주인으로부터 부르심을 입는 것을 구원이고 믿음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일찍 믿고 어떤 사람은 늦게 믿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품꾼이 포도원에 자기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듯이 예수도 내 맘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이끌어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음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 주인입니다.

주인이 놀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시간에 따라서 불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러합니다.



우린 모두가 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예수가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셔서입니다.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들려지고, 하는 것들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셨고 복음이 들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은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어가시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야곱을 남이라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라고 여기십시오.

내가 곧 야곱입니다.

야곱을 ‘나’ 라고 여기고 오늘 본문을 보시면 훨씬 은혜가 될 것입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엄마 뱃속에서 장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고 태어난 자입니다.

약속은 장자가 된다고 받았는데 실제는 차자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의 DNA 속에는 장자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틈만 나면 장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건 본성입니다.

그래서 에서로부터 팥죽을 주고서 장자의 명분을 사 버립니다.

에서 속에는 장자의 DNA가 없기 때문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떡엔 관심이 없고 장자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암튼 야곱은 자신이 뜻하는 장자의 명분도 형으로부터 얻었고 장자의 축복도 아버지로부터 받아냈습니다.

아비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야곱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일을 당합니다.



이건 야곱이 예상한 그림이 아닙니다.

야곱이 그린 그림은 아비의 집을 물려받아서 거부로 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비로부터 장자의 복을 받고서 돌아온 것은 아비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비의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야곱 속에는 우리의 자화상이 그대로 투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야곱이 아비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럼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것 속에는 우리도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쫓겨남을 당하는 일들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옛 집으로부터 떠남을 입게 됩니다.

집이란? 내가 속하여 있던 곳을 말합니다.

이걸 아비 집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우리 집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아담이라는 집에서 예수라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이게 야곱이 집을 떠남과 같습니다.

이걸 언약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율법이라는 동네였습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동네에 살다가 예수님에 의하여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아비 집을 떠나온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아비 집으로부터 떠남으로 시작이 됩니다.

구원은 분리 되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서는 빛이 흑암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믿음이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구원을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로 보면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본토 친척 아비는 마귀였습니다.

하나님은 마귀 아래 있던 자기 백성들을 빼내서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건 우리 스스로 떠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이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는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간섭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 집에서 강제로 빼냄을 입었듯이,

야곱도 아비 집에서 강제로 빼냄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도 빼냄을 입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어떻게 빼내셨는지를 봅시다.



창세기 12장입니다.



창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부모가 섬기던 하나님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가 찾아 오셔서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순순히 동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낯선 것에 마주치면 우선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 防禦機制)가 발동하여서 경계하고 “이건 뭐지” 하고 놀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로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아브람이 말씀을 쫓아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건 아브람이 자진해서 순종해서 갔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반대입니다.

말씀이 아브람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등을 떠밀어서 떠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건 야곱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자발적으로 집을 떠나온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죽인다고 하니까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아비 집에서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야곱이 아비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브람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교회에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끌어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독자적으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믿어집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제가 여러분에게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 날 믿으면 천국 간다, 라고 하면 여러분이 예, 하고 믿겠습니까?

대번에 정신병자라고 하면서 육두문자가 날아 올 것입니다.

예, 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목수 였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

이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정서로는 돌 맞아 죽을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친 형제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겠어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놀라움이 별로 없어요.

당연한 것으로 여겨요.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이에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창세전 언약이라는 복음을 말하여서 복음을 모르는 교인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진짜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고 있는지 또한 진짜로 복음을 아는지 재고해 보아야 해요.

진짜 예수를 만나면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동족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고 핍박받는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넌 왜 예수를 별 스럽게 믿느냐!”

“너는 왜 다른 예수를 말하느냐!”

“너는 왜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해요.



이게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들이에요.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모두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어요.

이게 바로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집에서 빼내신 후에 이제부터 참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야곱은 광야에 나와서 그동안 조상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찾아가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을 찾아 오셨나요?

이는 하나님이 야곱의 진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바로 너의 근본이고 너를 존재케 하는 아버지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동안 이 세상의 아버지만 알았어요.

진짜 자신을 존재케 하는 아버지를 몰았어요.

광야에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존재케 하는 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에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 주세요.

광야는 그동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곳이에요.

이건 마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광야로 빼내시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는 부모로부터 들은 하나님을 알았어요.

자기들이 경험한 하나님이 없었어요.

구전(口傳)으로만 들은 하나님이에요.



광야에 나오자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너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너희가 지금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속에 애굽에서 알고 있던 하나님을 죽이고 새로운 하나님을 새겨 넣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광야에서 하는 일이에요.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이에요.

실제 구원은 광야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구원을 이루어 가는가요?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개과천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을 빼내고 참 하나님을 새겨 넣는 일을 당하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걸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자라간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 적으로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은 아브람이 제일 먼저 겪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빼내고 난 후에 조상의 집에서 알아진 가짜 하나님을 빼내고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일을 하셨어요.

아브람은 가나안에 와서 지금까지 자기가 알던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아브람에게 새로운 하나님을 새겨 넣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가나안은 광야와 같아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아버지 집에는 하나님을 구전으로만 들었어요.

광야에 나와서 비로소 참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빼내서 하나님을 배워가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등 따습고 배부를 때 아는 하나님 하고,

실패하고 배고프고 넘어진 가운데서 알아진 하나님은 달라요.

평안 할 때 아는 하나님하고,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달라요.

등 따습고 배부를 때 아는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우리 행복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패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근본을 알아가는 곳이 광야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을 광야로 빼내서 독대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광야란?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병일 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아픔 일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에게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평탄한 삶을 살지 않고 고난의 삶을 산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이 땅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우리 안에 있는 가이사의 화상을 제거당하고 하나님의 화상을 새겨 넣는 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나를 위하여 새겨 놓은 가짜 하나님을 몰아내고 우리를 언약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참 하나님을 새겨 넣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나를 위한 우상들이 있어요.

우상은 다른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신이에요.



우리는 자기 육신을 위한 신들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에요.

이걸 다른 신이라고 하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광야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늘 물어야 합니다.

나를 다스리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고,

나를 왜 구원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몸에 언약을 새기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아들이 성취하십니다.



성령은 아들이 이루신 언약을 우리 몸에 새겨 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언약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은 부대낌을 통해서 깊어지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많은 사건을 겪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시고 부대낌을 통해서 사귐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언제 신앙이 좋아지느냐?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많이 알아가는 일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산전수전을 많이 겪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역전의 용사를 만들어 가세요.

고난 속에 던져 넣고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의뢰케 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이게 광야 길이에요.



온실의 화초는 꽃은 아름다울지 모르나 향기가 없어요.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온실의 화초처럼 키우지 않아요.

들의 야생화처럼 키워 가세요.

비바람에 시달리게 하고 꺾일듯 꺾일듯 하면서도 꺾이지 않게 간섭해가십니다.

이렇게 산 사람들이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이야기 입니다.



흔히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 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 사람들이 이렇게 믿음을 잘 지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반대로 믿음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길을 걷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가 주어(主語)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들을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더 낳은 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믿음이, 에녹을 다른 세계로 옮겨주었고,

믿음이, 노아의 방주를 짓게 하였고,

믿음이, 아브람을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이끌어 내셨고,

믿음이,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게 하였고,

믿음이, 사라로 하여금 이삭을 낳게 하였고,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하였고,

믿음이, 이삭에게 야곱을 축복케 하였고,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와 차자를 어긋맞게 축복하게 하였고,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왕자의 지위를 버리게 하였고,

믿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하게 하였고,

믿음이, 라합으로 하여급 정탐꾼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하였고,

믿음이, 사사들을 일하게 하였고,

믿음이, 고난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믿음이 지금도 우리를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이렇게 예수를 믿고 복음을 듣는 것도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성도들을 간섭해 오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냥 한 줄로 요약해서 써 놓았지만 그 내용을 풀어볼 것 같으면 엄청난 사건이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의 한 많은 일생이 한 줄 평 속에 응축되어 있어요.



한 사람도 평안한 삶을 살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같이 버려지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에 담겨진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창세전 언약을 하나님 백성들의 몸에 새기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늘에 신령한 복을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언약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버려지는 삶들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들을 하늘로 끌고 가십니다.

야곱도 집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장자 권을 받으면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이 땅에서 거부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알다시피 이삭은 그 땅에서 백배나 축복을 받았어요.

야곱은 그걸 노린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백배나 많은 유업을 자신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하면 장자가 될까 에만 고민을 했어요.

장자가 되어야 아버지 유산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속에 있는 욕망이라는 우상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자마자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장자는 땅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사닥다리 위로 야곱을 찾아오신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복을 가지고 오신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아비 집에서 쫓겨나가게 하시고 광야에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어떻게 야곱을 만나 주셨는지 보십시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창 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殿)이요 이는 하늘의 문(門)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10절을 보면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한 돌”을 취하여 잠이 듭니다.

한 곳에 이르렀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어떤 장소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장소에 가니까 한 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돌을 베게 하여서 잠을 잔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닥다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집에서 쫓겨나서 두려움으로 광야로 나왔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곳의 한 돌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돌을 베게 하여서 자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꿈을 꿉니다.



야곱이 잠이 깨고서 무슨 일을 하나요?자기가 베게 하고 잤던 그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 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머문 광야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베게 하였던 그 돌이 하늘의 문인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자기가 베게 한 그 돌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고 자기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합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지요.

이 땅에 하나님의 집이 어디인가요?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니까 하늘의 문이 되는 돌이 하나 있는 겁니다.

그 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시온의 반석이라고 하지요.



지금 하나님은 야곱을 예수 앞으로 끌고 가신 것입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그 돌로 찾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을 데리고 그 돌 앞에 끌고 와서 그 돌을 잡고 잠들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돌을 베게로 잠들어 있는 그 자리에 사닥다리가 하나 세워지고 있습니다.



흔히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설명하는데 그런 내용은 없어요.

땅에서 우뚝 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갈보리 언덕 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뚝 서있는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돌 위에 세워진 사닥다리를 통하여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닥다리 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야곱은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비유가 적절치 않지만 야곱의 마음을 조금 더 리얼하게 실감하라는 뜻으로 하는 것이니 양해하고 들으세요.


야곱의 두려움은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조폭 두목을 직접 만나서 오금이 저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아무리 악랄한 조폭 두목이라고 하여도 두렵지가 않아요.

그건 나와 별개이니까요?

그런데 막상 만나면 이건 실제이므로 온 몸이 떨리고 식은 땀이 나게 됩니다.



야곱이 지금 그런 느낌인 겁니다.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들어온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들을 때는 그냥 하나님인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직접 만나고 보니까 그 위압감에 눌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하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죄인이 왕 앞에 끌러온 것과 같은 겁니다.



암튼 야곱은 돌을 베게 하여서 잠을 자고 난 후에 거룩한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이건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엄위에 압도당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너무도 놀라운 겁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나타난 고백입니다.



이사야 6장을 봅시다.



사 6:1-5=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고 나자 놀랍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외함에 쌓여 두려워하는 개념입니다.

야곱이 지금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알면 기쁨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어요.

왜냐하면 복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두려워요.

내 인생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면 두려워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언약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내 인생이 보통 인생이 아니구나를 알게 되면 이거 함부로 막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 복음 안다 땡!

그런 게 아니에요.

복음 알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 아니에요.

그냥 책으로 알아진 허상일 뿐이에요.



복음을 학습으로 배워서 지식으로 알면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성령 안에서 만나고 복음이 내 심장에 확 박히게 되면 가시처럼 아파요.

이제 복음이 우리를 복음이 담고 있는 삶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돌 베게 위에 선 사닥다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늘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서 가로 막힌 담을 헐어 버린 것입니다.

야곱은 돌 위에 선 사닥다리가 하늘의 문입니다.



사닥다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인자가 들리면 너희를 하늘로 이끈다고 하신 겁니다.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잘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도 야곱의 사닥다리 사건을 가지고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는 사건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요 1:49-51=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인자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시지요.

이것은 인자를 통하여서 하늘 가는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걸 야곱은 하늘의 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야곱은 집에서 나와서 자기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이 찾아가서 만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 힘으로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가 주셨듯이 하나님이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일을 해 가십니다.

자기 백성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구원을 해 내십니다.

야곱의 벧엘 광야 사건은 성도의 구원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돌을 베게 하여서 잠을 자니까 하늘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여기서 돌을 베고 잠자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봅시다.



잠자는 것 속에는 깊은 영적인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돌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예수님과 잠을 잔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할 때 그 “안다” 라는 개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합니다.

“야다” 는 남여가 하룻밤 한 몸으로 잠을 자서 알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잠을 잔다는 말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 경험으로 알아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가 입으로 아무리 당신이 최고야 라고 하면서 죽고 못 살 것 같이 연애를 해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에요.

언제 무너지고 깨어질지 몰라요.



반대로 아무리 서먹서먹하여도 하룻밤 잠자리를 하고 나면 모든 걸 다 아는 처지가 되어요.

서로를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최초로 아담과 하와의 결혼 모습으로 이야기 해 주었던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잠자는 것은 서로를 실제로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광야에서 그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잠자리를 하고 나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뀝니다.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이제부터 야곱이 섬기는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자기의 하나님입니다.

조상들이 경험한 그 하나님을 야곱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신앙은 하나님과 스킨십을 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스킨십을 한 사람은 신앙생활이 달라져요.

관념에서 실제로 바뀌어요.

추상에서 실상으로 바뀌어요.

지식에서 삶으로 바뀌어요.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수십 년 믿어도 신앙의 열정이 없고 설렘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죽은 믿음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냉랭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열심을 내라고 합니다.

열심이란? 문자적으로는 마음의 뜨거움을 말합니다.

뜨거움이란?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성도는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은 그가 아는 복음이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죽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로 알아진 복음은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은 은사에 속한 것이에요.

은사는 하나님의 생명에 활동이에요.

그래서 은사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보세요.

각자 받은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라고 하잖아요.

교회를 섬기게 하려고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성도는 반드시 교회를 섬기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내 신앙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열심이 있으면 산 것이고,

열심이 없으면 죽은 겁니다.

산 자는 움직이고,

죽은 자는 움직이지 않아요.



움직이는 사람은 산 사람으로서 예수라는 신랑과 사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것은 타자에요.

타자는 남이에요.

예수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니까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앙이 살아 움직여야 예수님과 하룻 밤을 잔 사람입니다.



아가서를 보세요.

술람미가 솔로몬과 하룻밤을 자고 난 후에 상사병이 걸리잖아요.

모든 일을 신랑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바뀌잖아요.



구약의 야곱은 하나님과 잠을 잤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잠을 자요.

구약에서는 신랑이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날마다 잠을 자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잔다!

이게 얼마나 황홀한 사건인가요?

좀 느끼세요!

씹고 뜯고 맛보세요!.



성경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문자로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면 안돼요.

남의 말 하듯이 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서 진짜 사랑을 하게 하세요.

마치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주셨듯이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예수라는 신랑 앞으로 이끌고 가세요.

이렇게 이끌림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나게 하는 것은 성도와 예수님의 만남의 샘플이에요.

아담과 하와는 우리와 예수님의 만남을 미리 보여주었어요.

하와가 아담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었어요.

이처럼 성도들도 예수님 앞으로 이끌어 주세요.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성도의 구원을 예표하고 있어요.

하와가 아담 안에서 나와서 다시 돌아가듯이 우리도 예수 안에서 나와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의 후손들입니다.

그 언약의 근본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언약을 위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한 돌을 취하였다고 하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한 돌” 앞으로 이끌고 가신 것입니다.

“그 돌”은 바로 22절에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야곱이 베개 하고 잔 그 돌, 즉 하나님의 전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한 “그 돌”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은 예수님과 잔 것입니다.

이건 신랑과 신부의 만남과 같은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주선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이 야곱을 예수님에게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서 결혼케 하였듯이 하나님이 야곱을 예수라는 신랑에게 인도하여 혼인케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암튼 야곱은 그동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 만났습니다.

이젠 자기가 만난 하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증거하여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알려야 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그럼 야곱은 어디로 가든지 자기와 동행하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성령이 오면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벧엘 광야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야곱을 만나 주신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과 같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과 함께하는 것을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앞서서 예표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신약의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지고 신약의 성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이에요.

모든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인들입니다.

증인이란?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한 것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 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인격으로 만났다고 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말씀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계신 그 하나님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사도 요한을 만나 주셨는가 하면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만난 증인입니다.

이제 자기가 만난 그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럼 그 증거를 받는 사람들이 나타날 터인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최초의 증인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만난 증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영접하면 복을 받고 영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증인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이건 마치 벧엘 광야로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온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동안 동행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쳤습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야곱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주신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2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벧엘에서 만난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알아가는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20년 동안 알았던 하나님은 자기 탐욕을 위하여 만든 우상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야곱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거듭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알아진 하나님은 야곱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언약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신약에서 12 제자들이 동일한 과정을 겪게 됩니다.

12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야곱처럼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툽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자기들 소원을 들어주는 분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좋은 자리 차지 하겠다고 타투지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오고 난 후에 바뀝니다.

예수를 위하여 죽음 속으로 뛰어 듭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거듭났듯이,

제자들도 성령 강림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땅에 가치로 살고자 하던 사람이 언약의 도구로 살아가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 때 비로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세상 속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두셨어요.



증인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증거 한다고 하였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갈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경험하는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은 내가 원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겁니다.

마치 야곱이 광야로 나갔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신앙생활은 산전수전을 겪어가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증인 노릇을 하려면 예수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오랫동안 사귄 친구처럼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집어넣는 일들을 자꾸만 벌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는 표정만 보아도 상태를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통해서 서로 부대끼면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평생 동안 아버지가 알려 준 하나님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은 없고 남이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서만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평생 남의 하나님만 말하다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다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쫓겨나서야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을 간섭하셨듯이 야곱도 간섭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쫓겨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요즘 말로 대박을 맞은 겁니다.

육체적으로는 아픔이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는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과 사고를 당하면 아파요.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갈수록 하늘에 대한 소망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자의 복입니다.



남의 하나님은 아무 소용없어요.

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야 성경의 약속들이 나의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예수의 승천이 나의 승천이 되고,

예수의 천국이 나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광야에 나와 돌 베게를 베고 잠을 자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늘 위에 있는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막연하던 하늘이 실제로 야곱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천국이 우리 가운데로 침노해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가니까 하늘나라가 자기에게 침노해 들어 온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를 보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나라를 광야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이 세상만 있는 줄 알았는데 광야에 나가니까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이 전부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광야에 나와 보니까 시내산 위에 동네가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산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름하여 천국인 것입니다.



산 위는 떡에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고 말씀에 가치로 사는 곳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빼내서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말씀에 가치로 산다는 것을 40년 동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떡에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그리고 말씀에 가치로 사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출애굽 한 1 세대들은 다 죽고 광야에서 난 2 세대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광야에서 난 자들은 만나만 먹었어요.

애굽에 음식을 몰라요.

이게 곧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삶에 가치가 바뀌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교회에 다녀도 세상의 가치로 살았어요.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고 난 후로는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몸이 불편하면 악악댔는데,

이제는 그려러니 하잖아요.

이제는 조금 어려운 일이 닥쳐도 옛날처럼 방방 뛰지 않잖아요.

이건 그만큼 세상에 대하여 무디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세상의 가치관들이 깎여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로 불러내서 야곱의 가치관을 바꿔치기 하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 일이 녹록치 않아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도 계속적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려고 합니다.

20년 동안 자기가 바라던 갑부가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중에 빈털터리로 만들어서 벧엘로 올라가게 하십니다.

야곱은 얍복강 이후에 20년 동안 모은 모든 것들을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이 외동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여러 사건을 당한 후에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고 벧엘이라고 하면서 모든 가족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이 때 모든 귀중품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의 일생을 겪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삶이 한 순간에 바꾸지 않아요.

우리 몸은 떡을 먹어야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도 떡을 원해요.

그러니 이 몸으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다 담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처럼 사닥다리 위에 세계를 보았어도 세상의 떡을 쫒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떡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이게 육신의 한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버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쫒아 갈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너는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자다”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다”

“네가 살아야 하는 곳은 여기가 아니고 하늘이야” 라고 자꾸만 속삭이는 겁니다.

계속해서 속삭이면 전에 좋던 것들이 싫어져요.

그래서 “에이~ 나 안 할래!” 하고서 조금씩 버리게 되고 세상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계속해서 그렇게 간섭하는 것입니다.



뭘 좀 해 볼려고 하면 헝클어지게 하고,

하려고 하면 동네 사람을 통해서 깽판 치게 만들고,

그게 세겜에서 정착하고 살려고 하니까 디나가 강간당하고 자식들이 전쟁을 벌리다가 쫓겨 가는 신세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넌 세겜에 살면 안 되고 벧엘에서 살아야 해 라고 하면서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처음 만나 주셨던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세겜에서 딸이 강간당하지 않고 자식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벧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겜이 살기가 훨씬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 스스로는 돌아 올 수가 없으니까 강제로 도망쳐 나오는 방식으로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좋은 말 할 때 말을 안 들어요.

편할 때는 신앙생활 잘 안해요.

꼭 어떤 어려움이 닥쳐야 기도도 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골치 아픈 사건들을 자꾸만 발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나중에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어요.

탕자처럼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밖에서 쫄딱 망한 것이 복인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처음 사랑은 무엇입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처음 사랑을 주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렸어요.

왜냐하면 살기 바쁘다 보니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하나님을 찾도록 하십니다.

처음 은혜 받은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야곱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럴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어서 세상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에게 끌고 와서 거기서 소망을 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장자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의 장자는 야곱처럼 이 땅에서 버려지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어떤 분들은 그래요.

예수를 믿는데 왜 인생이 이렇게 꼬입니까?

그러면서 원망을 합니다.

이게 영적으로 보면 축복인데 말이죠.

그렇다고 제가 “그게 복입니다” “감축 드립니다” 라고는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합니다.



군인은 전투를 하면서 군사력이 키워지는 것입니다.

방안에서 아무리 이론적으로 배워도 소용없어요.

전투력은 실제 경험으로만 키워져요.

그래서 군대에서는 매일 같이 실제처럼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그리스도의 군사는 그리스도의 실력으로 키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실력이란?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을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사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어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실력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군사는 전쟁을 통해서 실력이 향상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광야에 몰아내고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등 따시고 편안한 쪽으로 살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로 그 길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광야로 몰아내서 간섭해 가시는 것입니다.

“너는 여기서 정착 하는 자가 아니고 나그네야”

“너의 분깃은 이 땅에는 없고 하늘에 있어” 라고 하세요.

이런 간섭을 당할 때에 우리는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하지 않아요.

왜 날 달달 볶습니까!

따져요.

우리 속에 죄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세요.

야곱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의 간섭을 받은 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야곱을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고백하게 하는 야곱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이루려고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욕망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나중에 보면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고백해요.

이 말은 하나님께 무진장 얻어터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 가장 좋은 줄 아세요?

어려울 때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등 따습고 배부를 때입니다.



초대 기독교가 언제 타락이 되느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입니다.

기독교가 등 따시고 배부르게 되니까 극심한 타락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부르면 신앙이 게을러지고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외식으로 흐르게 되어요.

교회는 세상의 떡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교회가 말해주어야 해요.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어요.

하늘에 가치로 세워졌어요.

그러니 교회에 오는 자들에게 하늘에 소식만 전해주고 하늘에 것을 주어야만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버가모 교회가 나옵니다.

버가모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면 로마 국교 시대를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이기는 자들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만나는 예수님 자신을 뜻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예수님이 감추어져 버렸어요.

복음이 사라져 버렸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다는 것은 세상과 짝하였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떡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떡에 가치를 쫓아가면 예수님은 감추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걸 감추인 만나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 이기는 자가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일컬어 사단의 위가 있다고 합니다.

사단의 위란? 사단의 보좌란 말입니다.

사단은 세상 신이에요.

사단은 떡으로 인간들을 지배해요.

떡을 생명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은 사단에게 굴복 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떡에 가치로 세워지면 교회도 사단의 가치를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버가모 교회의 타락을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떡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발람은 떡을 얻고자 하나님을 팔아먹은 자에요.

이게 종말에는 음녀로 나타납니다.

음녀는 떡으로 교인들을 미혹해요.



이러한 곳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떡을 쫓아가고 있는데 그 중에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말씀에 가치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미미하지만 말이에요.

이들을 일컬어 충성된 증인 ‘안디바’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안디바는 숨겨진 인물이에요.

이는 이름 없이 믿음을 지켜낸 무명의 성도들을 말해요.

하나님은 이들에게 감추어진 만나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온 교회가 다 세상 가치를 쫓아간다고 하여도 안디바와 같은 성도들에게는 하늘에 복음을 주어서 세상의 가치를 이겨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이름 없는 자들이 믿음을 지켰어요.

잘난 자들은 믿음을 지킨 적이 없어요.

복음은 똑똑하고 잘난 자들에 의하여 전해져 오지 않았어요.

항상 미미한 자들을 통하여 증거되어 왔어요.

이러한 성도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신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돈이 들어오면서 예수님은 감추인 만나가 되어버렸어요.

그런 교회 속에서 안디바 같은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숨겨진 성도들에게 만나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안디바 처럼 발람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정질을 지키고 있어요.

이들이 진짜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떡에 가치로 사는 자들이 아니에요.

말씀에 가치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자마자 세상의 떡이 있는 집에서 쫓겨나게 하신 것입니다.

광야로 빼내서 하나님의 장자들은 떡에 가치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서 사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은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장면입니다.

우리들도 다 나름대로 신앙의 전환점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사건들이 구약의 야곱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에요.

야곱 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 속에는 우리 성도들의 인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생을 성도들도 똑 같이 걸어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 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예수님의 인생과 똑 같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자기 민족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형제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모습이 바로 야곱이 자기 집에서 쫓겨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버림당하는 일들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것이나,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나 그 의미는 같아요.

우리 역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과정을 겪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에서 빼 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어요.

우리가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한 것은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산 것과 같아요.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이삭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이 때는 조상의 하나님이었지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시 율법 아래서 알게 된 하나님은 문자 속에 가두어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냥 성경에서 들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이 오셔야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지고 난 후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법을 새겨 넣어서 하나님을 친히 알게 해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법은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법이라고 합니다.

이를 새 언약의 법이라고 합니다.



광야는 성경 속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는 곳입니다.

마치 야곱이 광야에 나와서 이삭에게 구전으로 전해 들었던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였듯이 신약의 성도들 역시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지면 문자 속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구약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살았던 광야를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는 조상으로부터 구전으로 전해들은 하나님은 광야에 나오자 시내 산에 친히 강림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주셨습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집에서 광야에 나오자 사닥다리 위로 강림하신 것과 같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전으로 전해들은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 알아진 하나님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한 것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나 조상들의 구전으로 하나님을 알았던 백성들은 우리가 율법 아래서 문자로 하나님을 알았던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율법 아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나,

야곱이 집에서 광야로 쫓겨난 것이나,

우리가 율법에서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는 것이나 영적으로는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애굽을 세상이라고 하면 광야는 묵시의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출애굽은 떡의 가치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광야는 떡의 가치가 빼냄을 입고 그 자리에 말씀에 가치로 채움을 입는 곳이에요.



우리의 신앙은 생명의 자람과 같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 47장의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이 발목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차올라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온 몸이 잠기는 것으로 나아가듯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고 더 길어져가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오랜 세월을 통해서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집에서 쫓겨나면서 그 속에 하나님을 채워가는 일을 한 것입니다.



중국의 동부 지역에 가면 희귀종인 ‘모소 대나무’가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씨앗을 뿌리고 난 후 3-4cm 정도의 싹을 낸 후 4년 동안 외적인 성장은 보이지 않고 3-4cm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보통의 대나무들은 햇수를 거듭하면서 외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소 대나무는 4년 동안 외적 자람이 없고 정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소 대나무는 4년 동안 외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뿌리를 든든히 박고서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4년 동안 뿌리를 더 깊고 더 넓게 뻗어서 길게는 그 뿌리가 수백 평방미터나 뻗어나가면서 가뭄에도 메마르지 않고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리고 나면 5년째부터 자라기 시작을 하는데 하루에 30cm씩 자라서 6주 만에 15m나 되는 큰 나무로 성장하여서 울창한 대나무 숲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을 이렇게 다스려 가십니다.

야곱은 집에서 쫓겨나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붙잡혀가는 세월들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아픔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자라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광야 같은 삶을 통해서 믿음에 사람으로 세워져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하늘에 있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그 증인의 선두 주자를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자기를 버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죽인 예수를 살리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뒤로 우리를 가게 하셨습니다.



우린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의 모습이 모소 대나무와 같이 풍채도 없고 드러남이 없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모두들 하늘나라 성전의 기둥들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는 이 길이 광야 길처럼 외롭고 고단하고 힘이 들지라도 뿌리는 수백평방미터로 뻗어나가서 그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큰 나무로 자라서 새들이 깃드는 큰 숲을 이루어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지금은 미미한 겨자씨 같지만 장차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새들이 깃들고 쉼을 얻을 수 있는 나무처럼 복음의 숲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음미해 보세요.

그동안 엄마 곁에서 마마보이처럼 자란 야곱이 집에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힘이 들었겠어요.

광야에 홀로 덩그러니 밤이슬 맞아 가면서 돌을 베게 하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이제부터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어서 어디로 가든지 함께 동행하여 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혼자 인줄 알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저에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낙원아~!

많이 힘들지!

아프지!

외롭지!

하지만 힘들어 하지마!



외로워 하지마!

아파 하지마!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낙원아!

너는 내 것이야!

내가 너를 창조 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가 너를 조성해 가고 있어!



어느 가수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사막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사랑만 있으면 꽃 길이라 생각하고 걷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가는 길이 광야이고 사막 길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길이 시온의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캄캄하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세요.

여호와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세요.

여호와는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게도 하세요.

여호와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세요.

이 모든 것들은 성도를 단련하는 도구들이에요.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건강이 좋지 않고 아프십니까!

집안에 어려운 일들이 닥쳤습니까!

이 땅에 것은 영원한 것은 없어요.

모두가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이 세상은 고생의 바다에요.

바다에는 늘 파도가 일듯이 우리의 인생도 늘 아픔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얻은 구원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지금 당하는 아픔들을 통해서 믿음을 견고케 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모소 대나무가 뿌리를 내려가듯이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견고하게 서면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으로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하였어요.

그러니 그 날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아픔들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 될 수밖에 없는 팔자를 타고 났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 장자는 집에서 편안히 사는 게 아니라 광야에 나가서 사닥다리 위에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야곱일진데 날마다 우리의 눈을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우리가 소망하고 지향하는 것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삶이 아프고 힘이 들지라도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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