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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4강. 야곱의 두 아내와 두 언약 (창 29: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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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7. 4.

 

 

[54강. 야곱의 두 아내와 두 언약 (창 29:10-35)]

-.정낙원 목사

 

성경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까를 가르치는 삶의 지침서가 아닙니다.

또한 갖가지 기적들도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설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과 얽힌 여러 가지 사건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계시사적인 일들인 것입니다.

육적인 사건을 통하여서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가지고 내가 너희를 이렇게 구원하였다는 것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 너희들이 좀 알아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끝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그 은혜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가 그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어떤 건가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잖아요.

왜 구원 했느냐?

하나님이 찬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이나 창조나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걸 창세전 언약에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간섭해 오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속에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팁을 담아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끝에 구원 받은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비록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야곱을 살펴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야곱을 타인으로 보지 말고 나로 보세요.

우리가 야곱입니다.

야곱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야곱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도 보아야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

예정이니 작정이니 하는 말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조상이 될지라” 라는 말은 “내가 너를 복의 조상을 만들어 줄게”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동행하고 지켜줄게”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방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지극히 사랑했어요.

그게 야곱을 인생을 일일이 간섭하여서 야곱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 마음대로 살도록 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우리 입장에서 이해를 해요.

그러나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달라요.

이건 마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같아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사랑은 달라요.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간섭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자식은 부모에게 바라는 사랑은 간섭하지 말고 자기가 하는 데로 가만히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맘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맘대로 살면 우리는 천국으로 가지 않고 지옥으로 가요.

왜냐하면, 지옥으로 가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서 편한데, 천국으로 가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서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길을 선택하라고 하면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간섭하여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걸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은 야곱이 원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은 것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리브가가 주도하고 준비하여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장자와 이 세상의 장자는 달라요.

이 세상의 장자는 세상 것을 움켜잡고 강한 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장자는 그 반대로 이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땅의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나자 야곱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삶이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줄로 생각하였어요.

그런데 돌아온 것은 집에서 쫓겨남을 받고 만 것입니다.

야곱이 착각을 한 것입니다.

이 착각이 야곱의 일생을 거쳐서 깨어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험악한 세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늙어서 이 사실을 깨닫고 바로 왕을 축복하였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참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였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모양은 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야곱은 자기 아내를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자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에게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얻지 말고 네 조상의 땅에 가서 아내를 얻으라” 고 합니다.

하나님이 조상의 땅인 하란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으로 하여금 신부를 찾으러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신부 찾으러 보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부 찾으러 오셨어요.

자기 신부들을 찾아서 천국에 데리고 가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하란에서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 속에는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발걸음을 무사히 조상의 땅에 인도하여 라헬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라헬의 마음도 열어서 야곱을 영접하게 하였어요.

하나님께서 야곱과 라헬을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고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나는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 쫓아가서 이 사실을 고합니다.

이에 라반이 야곱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리브가와 라반은 오누이에요.

그러니까 야곱과 라헬은 외사촌 형제지간인 것입니다.

한 조상의 자식들이에요.

여기에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과 우리는 한 조상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듯이 예수님과 우리도 한 몸이에요.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하와를 빼냈듯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빼냈어요.

그리곤 둘이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은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야곱에게는 조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이 한 달 동안 라반의 집에 우거합니다.

어느 날 라반이 야곱에게 아무리 한 골육이지만 공짜로는 지낼 수가 없으니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야곱이 라헬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그럼 7년 동안 종살이를 하라고 합니다.

7년 종살이 대가로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은 라헬을 자기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온 것이 됩니다.

라헬을 위하여 7년 종살이를 했으니까요.

야곱이 7년 종살이 한 값이 라헬의 몸값이에요.

이것은 성도의 구원과 같아요.



알다시피 야곱은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7년 종살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피 값을 주고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한 것과 같습니다.



라반의 집에는 두 딸이 있습니다.

큰 딸은 레아이고, 둘째 딸은 라헬 입니다.

야곱의 눈에는 둘째 딸인 라헬이 맘에 들었어요.

그리하여 야곱은 둘째 딸 라헬을 연애하는 마음으로 7년을 종살이 하였습니다.



7년 종살이 마치고 라반이 혼인을 시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까 자기와 함께 잠자리를 한 여자가 라헬이 아니고 레아인 겁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따집니다.



삼촌!

나는 둘째 딸 라헬을 위하여 7년 종살이 했는데, 왜 첫째인 레아를 주느냐고 항의합니다.

이에 라반이 이 동네 풍습이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언니가 먼저 가고 난 후에 동생이 나중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일 후에 라헬을 줄 터이니 다시 7년을 종살이 하라고 합니다.



야곱은 졸지에 두 아내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두 번의 7년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얻고자 7년을 종살이를 한 것이고,

나중은 얻고 난 후에 7년을 종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두 아내를 위하여 두 7년을 종살이 한 것입니다.



이건 막장 드라마가 아닙니다.

야곱이 7년 동안 사모하며 고대한 여인이 라헬이었어요.

숨소리만 들어도 알고 냄새만 맡아도 알아요.

그럼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구원의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을 가지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레아를 처음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 땅의 풍습 때문입니다.

라반이 그러잖아요.

이 동네 풍습은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을 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걸 언약으로 말하면 새 언약은 옛 언약 이후에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습인 창세전 언약이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주석들을 보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죄로 인과응보 적으로 라반에게 당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곱은 이삭을 속인 것이 아니에요.

이삭은 야곱인줄 알았어요.

그럼에도 야곱을 축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야곱이 입고 온 옷이 장자의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으러 나올 때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할 때 이삭은 이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어찌하여 네가 에서라고 하느냐고 했어요.

이건 이 놈이 야곱인줄 안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야곱인줄 알면서도 야곱이 입고 온 장자의 옷의 향취를 맡고 축복을 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보냈어요.

이것은 리브가는 장자의 축복은 장자의 옷을 입은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장자의 복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옷(의)을 입혀서 하나님에게 나아가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바로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일컬어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님의 옷을 입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준 가죽옷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죽옷이 바로 장자의 옷이에요.



그래서 리브가가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아버지에게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삭은 이를 알았기 때문에 야곱이 입고 온 옷의 향취를 맡고서 야곱을 축복한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장자를 축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은 야곱이 입고 온 장자의 옷의 향취를 맡고서 축복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에서가 와서 축복을 해 달라고 하자 이삭이 심히 경련을 일으키면서 떨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두 아들을 눈여겨보았어요.

아무리 봐도 에서가 야곱보다 나은 겁니다.

야곱에게 집안을 맡기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이삭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출중한 에서에게 가문을 맡기고자 하였어요.

그래서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와서 축복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이삭이 눈이 어두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웠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일에 무지하다는 뜻입니다.

이삭의 인간적인 생각이 바로 눈이 어두운 것이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가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삭이 에서를 불러서 장자의 축복을 하겠다고 하자 리브가가 얼른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의 복을 받도록 일을 벌인 것입니다.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잉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이삭의 가문에 장자가 되게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보낸 것입니다.



이삭이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자기 생각대로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던 것이 인간의 생각이고 악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 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게 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의 생각을 기각시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야곱이 두 아내를 얻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모두가 다 언약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동네의 풍습에 의하여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네의 풍습이란? 하늘나라 방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옛 언약부터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죄 아래서 건져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와 생명과로 나타났습니다.



두 과실은 두 언약을 상징합니다.

선악과는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고 죽이는 언약입니다.

생명과는 죄와 사망에서 건지는 언약이고 살리는 언약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두 아내로 나타난 것입니다.



먼저 난 레아는 두 언약 중에서 옛 언약인 율법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은 종을 낳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내인 라헬은 두 언약 중에서 새 언약인 은혜를 의미합니다.

새 언약은 아들을 낳는 언약인 것입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얻는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야곱을 조상의 땅으로 보내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오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에서 나온 예수님의 신부들이 있어요.



어린 양의 신부들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낳아진 자들이에요.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이 조상의 집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으로 인하여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만 찾으세요.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깨어보니 쌍둥이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성경으로 주어질 때에는 구약과 신약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라반이 레아를 먼저 주고 7일 후에 라헬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아내를 한 명 얻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라반은 그 동네의 풍습이라고 하면서 두 명을 준 것입니다.

야곱의 두 아내는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로 볼 수가 있어요.



레아는 구약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라헬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실제 신부는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교회가 생기기 이전에 구약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종살이 하였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레아와 같아요.

신약의 교회는 라헬과 같아요.

그래서 신약의 교회에 새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옛 언약인 율법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이 형제이듯이 옛 언약과 새 언약도 형제에요.

율법과 은혜가 형제에요.

어떤 형제인가 하면 서로의 존재가 왜 필요한가를 드러내 주는 형제에요.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모두 죄 아래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두 심판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둔 것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은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란 뜻입니다.

죄가 없으면 율법이 주어질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넌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는 중요치 않아요.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왜 죄인에게 율법이 주어졌는가요?

이는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자기가 죄인인줄을 몰랐어요.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의 죄관은 애굽식 죄관이에요.

애굽식 죄관은 인간의 행실로 판단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죄관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정이 됩니다.

이게 십계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애굽식 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죄를 규정하는 십계명은 그 자체가 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발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바탕에 어린 양의 희생이 깔려있음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것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이 지킨다는 뜻으로 쪼갠 제물 사이로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희생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시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한 셋트에요.

서로를 드러내는 한 셋트인 것입니다.

은혜를 드러내고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옛 언약이고 은혜는 새 언약입니다.

율법은 종이고 은혜는 아들이에요.

죄 아래서는 종이고 은혜 아래서는 아들입니다.



구원이 뭐냐?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에서 아들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은 야곱과 에서처럼 쌍둥이에요.

쌍둥이지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에서는 떡에 가치로 살고 야곱은 장자권의 가치로 살고 있어요.

서로 다름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빛과 어둠, 법과 은혜, 죽음과 생명, 천국과 지옥이라는 아주 상반된 정(正)과 반(反)을 한 셋트로 묶어서 예수님의 구속사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야곱이 상반된 두 아내 얻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를 가지고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이란성 쌍둥이와 같이 한 셋트에요.



레아는 법이고 라헬은 은혜에요.

레아는 육이고 라헬은 영이에요.

레아는 구약이고 라헬은 신약이에요.

레아는 종을 낳고 라헬은 아들을 낳아요.



이처럼 야곱의 두 아내는 두 언약을 상징해요.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집니다.

먼저 죽이는 언약인 율법을 주어요.

그리고 나중에 살리는 언약인 은혜를 주어요.

율법은 선악과이고 은혜는 생명과 입니다.

율법은 종을 만드는 언약이고 은혜는 아들을 만드는 언약입니다.



구원이란? 죽음에서 건져냄을 입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에서는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잘 보세요.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합니다.

근데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중에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2절의 모습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아요.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뒤죽박죽 난지도 쓰레기장과 같은 모습으로 땅을 창조하였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요?

그건 아니겠지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창조된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죽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빛이 있어요.

어둠이 빛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왜 창조의 시작을 이러한 구도를 만들었을까요?

이는 이 세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자기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에서 건져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창조가 된 세상이 흑암이 빛을 가두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흑암은 죄와 사망 권세를 상징하고 그 속에 가두어져 있는 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흑암 속에서 빛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분리하고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낮과 밤은 세상의 낮과 밤이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낮고 밤은 해와 달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해와 달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어요.



창 1:14-19=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넷째 날에 해와 달을 만들고 해는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라고 하였어요.

그러니까 첫째 날에 만드신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고 한 것은 이 세상이 말하는 낮과 밤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의 낮과 밤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을 만든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들의 구원 이야기를 갈라내는 창조이야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였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의역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섞여 있어요.

이게 창세기 1장 2절의 흑암 속에 빛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흑암 속에 빛이 가두어져 있는 모습이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이러한 곳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3절에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가라사대”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사대” 라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라는 뜻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받고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이라는 흑암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가라사대” 는 예수님을 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1장을 보세요.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어요.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두 분이란 뜻이지요.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14절을 보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런데 그 속에 아버지의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란?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자라고 합니다.

그 성자가 바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그가 만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만물을 만든 이야기가 창세기 1장 이야기입니다.

근데 창세기 1장에서 만물을 만든 이야기를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이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만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을 보세요.



요일 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했던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러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에요.

죄라는 어둠 속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으로 있어요.

이에 예수님이 죄와 사망이라는 어둠 속에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해석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태초에 계셨던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창세전 언약을 이 세상에서 구현하는 일을 책으로 기록하여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자기 백성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야곱이 두 아내를 얻는 이야기도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래서 야곱이 그 땅에서 아내를 얻지 않고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집에서 쫓겨나서 조상의 땅에 가서 아내를 얻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장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야곱의 아내가 살고 있는 하란이에요.

야곱은 하란에서 아내를 얻고자 종살이하면서 값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데리고 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자기 몸값을 주고 아내를 사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피 값을 주고서 자기 백성들을 샀습니다.

이렇게 값 주고 산 성도들을 자기 신부로 삼습니다.

그리곤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죽음이 먼저이고 생명이 나중에 주어지지요.

죽이는 언약이 먼저이고, 살리는 언약이 나중에 주어지지요.

이게 하나님 나라 풍습이에요.

이 풍습에 근거하여서 라반이 종을 낳는 레아를 야곱의 아내로 먼저 준 것입니다.



그 나라의 풍습이란? 그 나라의 법도를 말해요.

하늘나라 법도가 창세전 언약입니다.

라반은 지금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곤 라헬을 나중에 줍니다.

라반을 움직이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라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어요.

라헬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라반이 레아를 먼저 주고 라헬은 나중에 줍니다.

이러면 야곱의 사랑에는 레아는 가짜이고 라헬이 진짜인 것입니다.



이걸 종과 아들로 말하면 레아는 종이고 라헬은 아들인 것입니다.

레아는 죽음의 법에 속한 자이고 라헬은 생명의 법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유업이 없는 종을 낳고 라헬을 유업을 이을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가족사 이야기가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레아가 낳은 형제들을 살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얻는 과정 속에는 옛 언약 신앙과 새 언약 신앙이 담겨져 있어요.

이게 엄청 중요합니다.



잘 보세요.

야곱은 라헬을 얻고자 7년 종살이 하였지요.

근데 정작 얻은 것은 레아였어요.

7년 종살이의 결과가 레아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7일 후에 라헬을 줍니다.

그리곤 다시 7년 종살이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되면 레아는 7년 종살이의 결과로 얻은 아내가 되고,

라헬은 미리 얻고 난 후에 7년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레아는 일을 하고 난 후에 삯을 받은 것이고,

라헬은 삯을 먼저 받고 난 후에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레아는 약속 어음과 같고, 라헬은 현찰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서 하는 신앙생활과 은혜 아래서 하는 신앙생활의 차이와 같아요.

구약은 구원의 약속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신약은 이미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 신앙입니다.

율법 신앙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에요.

예수님 앞에 어떤 율법사가 나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지요.

묻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율법사에요.

이 말은 율법은 영생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물음을 보면 율법을 지킴 속에서는 영생이 있나요?

없나요?

없지요.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율법사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뭐냐?

영생을 주시는 분 앞으로 찾아가는 일을 해요.

율법은 영생에 목말라 해요.

그래서 영생을 찾아가게 하는 일을 합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어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면 안 되어요.

구원을 주시는 분을 찾아가는 것이에요.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말씀지켜서 온전해지자고 하는 것은 사기에요.

온전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온전하신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온전해져요.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다른 용도에요.

예수를 바라보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발가벗김바 되어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말씀이 하는 역할이에요.



영생은 어떻게 얻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지요.

영생은 우리가 따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이 뭔고 하니,

“아~! 우리 힘으로 영생을 따 내는 것이 아니고,

“영생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저 주는 것이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예수 믿는 거예요.

누가 예수를 믿느냐?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가 믿어요.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건 율법으로 알아요.

말씀으로 알아요.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잡이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건 하나님 말씀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 하는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의 몸을 가지고 있어요.

죄의 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낼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몸의 한계를 알게 되어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은 내게 있지만 그 원함을 내 몸이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주 예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랬잖아요.

자기 안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법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자 하는 두 법이 있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불순종의 법이 더 강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고 외칩니다.

이 때 성령이 주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결국 말씀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말씀이고,

신약은 예수그리스도에요.

구약은 영생을 주실 분을 찾아 가게 하는 것이고,

신약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야곱의 두 아내 이야기로 하면,

레아는 죽도록 일을 하고 난 후에 얻고,

라헬은 얻고 난 후에 죽도록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자기에게 주어진 할당량만 하면 되어요.

그러나 신약의 은혜는 죽도록 충성을 해야 해요.



구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지만,

신약은 기쁨으로 감사하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면 구약을 사는 종이고,

신앙생활이 기쁨이고 감사이면 신약을 사는 신부입니다.



이건 스스로 알 수가 있어요.

교회 생활이 기쁘지 않다고 한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구약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못 만났으니까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생활이에요.

신약의 신앙생활은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에요.

구약은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야 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신약은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어요.

그래서 신약의 교회 생활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신앙생활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두 종류의 신앙생활이 있어요.

어떤 이들은 종처럼 신앙생활을 해요.

어떤 이들은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해요.



신앙의 수순이 있어요.

먼저 율법 신앙이 주어져요.

율법 신앙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이 찾아오세요.

때가 되면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서 빼내 주세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는 원래 유업을 이을 아들이에요.

원래 아들이었는데 그 나라의 풍습에 따라서 먼저 종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이 종에서 아들로 나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노릇 한 것이 구약의 율법 신앙이에요.



우린 모두가 죄와 사망 가운데서 출생을 하였어요.

이게 율법 신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여야 합니다.

때가 되면 율법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이게 약속이에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실 때 먼저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된다고 하였어요.

사백 년 동안 종살이 한다고 하였어요.

때가 차면 애굽에서 빼내서 돌아오게 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은 생겨나지 않았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을 맺을 때 우리는 없었어요.

그냥 약속 안에 존재하였어요.

아브라함 후손도 마찬가지에요.



언약이 먼저이고 후손이 나중입니다.

우리도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나중인 것입니다.

암튼 우리는 언약에 의하여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언약은 정한 때가 있어요.

그 때가 되면 율법 아래서 빼내 주실 것입니다.

누가 빼내 주느냐 하면 그 아들이 와서 빼내 주세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그 아들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와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줌으로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하나님은 언약대로 정한 때가 되어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 주셨습니다.

그리곤 너희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것을 확증시켜주기 위해서 아들에 영을 보내 주셨어요.

아들에 영을 받고 보니까 우리는 원래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잠시 동안 종으로 살게 하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걸 알면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하지 않겠지요.

맞아요.

그래서 다시는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아래 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이 바로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고자 하는 율법 신앙이에요.

왜 잠시 동안 율법 아래서 종살이를 하게 하셨는가 하면 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알게 하려고 율법 아래 두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 집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잠깐 집을 나가도록 허락 하신 것과 같아요.



우리는 율법 아래서 자유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었어요.

종으로 살면서 아들에 존귀함을 알게 되었어요.

은혜의 소중함과 아들의 귀함을 알게 하시려고 율법 아래 두었고 종살이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신앙생활이 있어요.



종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고 아들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구원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것과, 구원 받은 자로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달라요.

천국가기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것과, 이미 천국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신자는 종이에요.

율법 아래서도 종이고,

은혜 아래서도 종이에요.

다만 어떤 종살이를 하느냐가 달라요.

율법 아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종살이를 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감사와 기쁨으로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레아와 라헬이 자식 낳는 문제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야곱은 라헬은 사랑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고 사랑 받지 못한 여자에게는 자식을 많이 주었어요.

이게 또 비밀입니다.



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레아에게는 총이 없음으로 자식을 많이 주었고 라헬은 자식을 주시지 않았어요.

총이 없다는 것은 미움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는 신랑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랑의 사랑을 받은 라헬의 태는 닫으시고, 신랑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의 태를 여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신랑의 사랑 받은 자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고, 신랑의 사랑 받지 못한 자에게는 자식을 많이 줄까요?

이게 구원의 비밀인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어요.

그럼 당연히 라헬이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레아가 자식을 많이 낳았어요.

이건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아요.

우리 상식은 사랑을 받은 여자가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대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언약의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레아와 라헬은 두 언약을 예표한다고 하였습니다.

레아는 옛 언약인 율법을 상징하고, 라헬은 새 언약인 은혜를 상징합니다.

레아는 두 언약 중에 옛 언약인 율법을 상징해요.



율법은 종이에요.

종에게는 유업이 없어요.

레아는 옛 언약인 율법을 상징하므로 레아가 낳은 자식은 종으로서 유업을 받지 못해요.

그럼 레아의 소생은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업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자식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자식이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낳은 자식이냐가 중요해요.

라헬은 두 언약 중에서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새 언약으로 낳아진 자가 아들이에요.



그런데 라헬은 자식이 귀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구원 받은 자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가짜는 많은데 진짜는 적다는 뜻입니다.

레아와 라헬을 교회 이야기로 이해하여 보세요.



율법 교회가 있고, 은혜 교회가 있어요.

육에 속한 교회가 있고, 영에 속한 교회가 있어요.

하늘에 가치로 세워지는 교회가 있고, 땅에 가치로 세워지는 교회가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세워진 교회가 있고, 인간의 의로 세워진 교회가 있어요.

레아와 같은 율법 교회는 승승장구하고 라헬과 같은 은혜에 속한 교회는 잘되지 않아요.

종을 낳는 교회는 승승장구 하는데 아들을 낳는 교회는 적어요.

그만큼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귀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는 땅에 속한 육적 교회를 상징하고,

라헬은 하늘에 속한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근데 레아 교회는 교인이 많고 라헬 교회는 성도가 적은 겁니다.

육적 교회는 부흥을 하는데 영적 교회는 부흥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육적 교회가 진짜처럼 보이고 영적 교회가 가짜처럼 보입니다.



레아와 같은 교회는 크고 성도가 많고, 라헬과 같은 교회는 적고 성도가 적어요.

물량주의 힘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힘이 없고 적다는 것은 무시당하고 고난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을 라헬처럼 자식이 적고 힘없는 모습으로 두신 것입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사람과 짐승이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 받은 성도를 사람이라고 하고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짐승으로 표현을 합니다.

사람은 새끼를 하나씩 낳지만 짐승은 많이 낳아요.



레아가 율법 교회이고 라헬이 은혜 교회인 것은 그들의 이름과 모습으로도 드러납니다.



16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레아의 뜻은“ 몹시 지치다” “ 슬프다” 는 뜻이에요

이것은 율법 아래서의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신앙생활이 지치고 힘이 들어요.



레아의 이름의 뜻이 율법 아래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다고 하지요.

이는 영안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어둠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옵니다.

이 때를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치 않다고 합니다.

이는 영안이 어둡다는 뜻입니다.

이 때의 신앙에 모습이 엘리의 두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보다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 우선이었어요.

이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기고 맙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또한 엘리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어둠 아래 있는 율법 교회의 모습입니다.

레아의 교회가 바로 이러한 안력이 어두운 교회인 것입니다.

안력이 어두운 레아와 같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교인들을 낳아요.



레아 교회 교인들은 종으로서 유업이 없어요.

라헬의 뜻은 “암양”이라는 뜻이에요.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고 하지요.

라헬이라는 이름의 뜻과 그 모습을 합성해 보면 토실토실하고 예쁘고 아리따운 성도를 낳는 교회란 뜻이 됩니다.



이건 새 언약에 속한 교회를 상징해요.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은 적어요.

구원 받은 자들이 적어요.



이것이 구약에서는 십일조로 나타납니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니에요.

십일조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심판을 상징하고 있어요.

이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죽음에서 살아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다 바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자들에게 초태생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십일조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것을 아는 자들이 십일조인 겁니다.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드렸어요.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해 옵니다,

이 때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이 전쟁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찾아온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살아난 것을 믿는 자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찾아온 전리품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전쟁한 것은 예수님이 전쟁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전쟁을 하였나요?

마귀와의 전쟁을 했습니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죄와 사망에 가두어졌던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십니다.

이들이 전리품이고 십일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찾아온 전리품인 성도들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것인 초태생이고 십일조에요.



신약의 성도들은 가슴 속에 항상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담고 있어야 해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늘 감사하고 살아야 해요.

이게 십일조 신앙이에요.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지요.

7년 동안 희생합니다.

이것은 아내를 위하여 값을 치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문화에는 신랑이 여자의 부모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어요.

신랑이 값을 치루고 여자를 사오는 것입니다.

남편의 값을 치루고 사왔기 때문에 여자의 인생은 없어요.

남편의 인생에 귀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을 오면 친정 아버지의 성(姓)은 버리고 남편의 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자는 남편의 것으로서 남편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아이를 낳고 남편의 집안을 일으켜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신분적으로는 예수님의 신부가 맞아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남편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主)라고 합니다.

왜 주라고 부르나요?

이는 신랑이 값을 주고 사왔기 때문입니다.

주(主)란? 주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이 우리의 주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값을 주고 구원을 받았어요.

우리는 나를 위하여 예수라는 신랑이 죽었다는 것을 간증하여야 해요.

내가 사는 것은 예수라는 신랑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 전도에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사는 자가 있고, 신랑의 죽음으로 사는 자가 있어요.

신랑의 죽음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에요.

예수님은 값을 치루고 사온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은 성도 안에서 이 사실이 늘 깨달아지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늘 자기 안에 예수님의 피뿌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을 하며 사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많지 않아요.

그래서 어느 시대마다 항상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인은 아무나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아무나 되지 못해요.

성도는 예수님이 낳아주어야지만 해요.

예수로부터 나아짐을 입은 자들은 자기 꼬라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늘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내 형편과 상관없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는 자가 성도에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들이 이해가 안 되어요.

그러니까 나타난 행위를 가지고 늘 정죄하고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어요.

야곱에게 있어 레아는 가짜 부인이고 진짜 부인은 라헬이에요.

엄밀히 따지면 라헬이 정실부인이고 레아는 첩이에요.

정실부인이 낳은 아들이라야 호적에 올라가요.

정실부인이 낳은 자식에게 가문을 맡겨요.

그래서 야곱은 나중에 라헬이 낳은 자식인 요셉에게 가문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레아와 같은 가짜 부인이 먼저 나타나고 진짜부인은 나중에 나타나요.

정실부인은 역사 속에서는 후처로 드러나요.

레아가 역사 속에서는 첫째 부인으로 드러나요.



이걸 교회 이야기로 해 봅시다.

야곱의 두 아내는 두 교회를 상징합니다.

레아는 육에 속한 교회이고 라헬은 영에 속한 교회에요.

레아는 인간의 혈통으로 세워진 구약교회이고, 라헬은 성령으로 세워진 신약교회에요.



육에 속한 교회는 가짜이고 영에 속한 교회가 진짜에요.

육에 속한 가짜 교회가 먼저 나타나고 영에 속한 진짜 교회는 나중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이 낳은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올립니다.

요셉은 라헬이 맥추 때에 합환채를 먹고 낳은 자식이에요.

요셉은 야곱의 자식이 아니에요.

합환채가 낳은 자식이에요.



합환채가 신약으로 오면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이 오순절 날에 오시지요.

오순절 날이 바로 맥추 때에요.

그러니까 맥추 때에 들에서 따온 합환채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합환채나 성령이나 동일한 것은 합환채를 먹고 난 자식이 언약의 가문을 유업으로 이어가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합환채로 낳아진 요셉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 야곱도 얍복강에서 죽었어요.

그리고 새 사람 이스라엘로 태어났어요.

그럼 얍복강에서 새로 태어난 새 사람 야곱인 이스라엘은 성령으로 난 자와 같아요.



얍복강은 “흐르는 강”이란 뜻이에요.

이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온 사방으로 흐르던 강을 상징합니다.

에덴에서 발원하여 흐르던 강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 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성도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고 하였어요.

이는 장차 오실 성령이라고 하였어요.

그러니까 얍복강에서 죽임 당하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태어난 야곱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상징하는 합환채를 먹고 태어난 요셉은 얍복강에서 옛 사람 야곱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난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올려놓은 것이 이해가 되지요.



요셉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난 인생을 대신 산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나중에 요셉이 애굽에 총리로 있으면서 낳은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적을 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총리로 살았던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대신 산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집안에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이 싸우지요.

이는 교회 안에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싸우는 것과 같아요.

말이 싸움이지 실상은 영적 신자가 육적 신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해요.

이게 요셉과 그 형제들의 다툼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레아의 후손이 라헬의 후손인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잖아요.

이건 죽인 것과 같아요.

요셉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해요.



애굽에 총리가 된 요셉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과 같아요.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고 살려내듯이 요셉도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드러내기 위하여 레아의 후손들을 많이 두신 것입니다.



레아의 소생은 왜 필요하냐?

그것은 요셉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드러나기 위하여 복음 없는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교회는 라헬의 자식처럼 적고 복음 전하지 않는 교회는 레아의 자식들처럼 많아요.



야곱은 정실부인인 라헬이 낳은 후손을 사랑해요.

그래서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레아가 낳은 자식들에게는 채색옷을 입혀주지 않았어요.



채색옷은 언약의 옷이에요.

채색 옷은 입은 자가 언약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약전(족보)에 레아가 낳은 자식을 올리지 않고 라헬이 낳은 자식을 올린 것입니다.

서열로 따지자면 레아가 낳은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야곱은 르우벤을 올리지 않고 라헬이 낳은 요셉을 자기 가문의 장자로 올린 것입니다.



레아의 자식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거긴 언약이 없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율법 교회는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낳아진 교회만 사랑하세요.

새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이 라헬이 낳은 요셉이에요.



하나님은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라헬처럼 정실부인 교회를 사랑하세요.

그런데 그 모습이 연약하고 힘이 없어요.

힘은 레아와 같은 육적 교회들이 있어요.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가짜 교회들은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신약은 교회의 역사에요

신약의 교회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나타나는데,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하나님이 이 역사를 어떻게 다스려가는지를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에베소교회로 말해주고 있어요.

에베소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세워진 초대교회를 상징해요.

그 다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로 나타나요.

이는 장차 역사 속에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 이후에 나타나는 교회들은 장차 일어날 교회들이므로 묵시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나타난 교회를 볼 때에 에베소 교회만 자세히 나와 있고 나머지 교회들은 성경 속에서 잘 나타나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한 것을 보세요.

성경 속에 나타난 교회를 순서대로 보세요.

로마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마게도냐 교회가 있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에베소교회만 나타나고 있어요.

왜 요한계시록에는 성경이 없는 교회들을 기록하여 놓았을까요?

이는 성경을 쓸 당시에는 에베소교회는 역사 속에 있는 교회였고 나머지 교회들은 장차 일어날 묵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일어날 교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에 없는 교회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지고 그 시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마다 예수님이 나타난 모습들이 다 다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맞게 일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를 상징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이 세운 교회 시대를 상징해요.

그 다음에 나타난 교회가 속사도 시대 교회인데 이 때를 일컬어 순교시대라고 합니다.

이를 서머나 교회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지나고 나면 버가모 교회가 나타나는데,

버가모 교회는 로마 국교 시대를 상징해요.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이것이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식으로 제정 되었어요.

버가모 교회는 로마국교시대를 나타내고 있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정치에 이용당하면서 극심한 타락이 일어나요.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로 나타납니다.

이 때를 교회사는 중세 암흑시대 라고 합니다.



왜 기독교가 국교가 된 시대를 암흑시대라고 합니까?

이는 기독교가 세상과 야합을 하면서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짝하면 반드시 진리를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하면 우리 안에 세상 가치가 자리 잡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부요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세상의 부와 사치에 빠지고 말았어요.

교회가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교회를 사데 교회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데 지역은 산꼭대기에 있는 도시로서 절대로 망할 수 없는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철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특공대 군사 몇 명에 의해서 무너졌어요.



로마 국교가 이러했어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1300년이나 흘렀어요.

거대한 나무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철옹성과 같던 1300년 동안 유지되어온 로마 교회가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같은 작은 자들에 의해서 무너졌어요.

마치 철옹성과 같던 사데가 특공대 몇 명에 의해서 함락을 당하였듯이 말이에요.



사데 교회에 말하기를 몇 사람이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그 몇 사람이 바로 중세 암흑시대를 끝장낸 종교 개혁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중세 암흑시대를 끝장내는데 지극히 작은 자들을 통하여서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사데 교회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사자들을 꽉 붙잡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로마 국교 시대가 깨어지고 나온 교회가 바로 개신교입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개신교는 급속하게 부흥을 합니다.

세상도 급속하게 발달을 합니다.



문명의 발달과 동시에 교회도 말 할 수 없이 팽창을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맘몬이즘(기복신앙과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교회가 세상의 떡에 취하면 하늘에 말씀은 사라져버립니다.



이게 라오디게아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를 상징해요.

이 시대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중세 암흑시대를 끝장낸 것이 사데 교회로 나타났는데,

역사 속에 나타난 사데는 두 번 멸망당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고레스 왕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고레스에게 멸망당한 후 다시 재건을 합니다.

200년 동안 처음의 모습처럼 재건이 되어요.

그런데 200년 후에 안티오쿠스에 의하여 200년 전에 멸망당한 것과 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멸망을 당합니다.

두 번 다 소수의 특공대에게 멸망을 당했어요.



이것은 기독교가 두 번 멸망당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타락하였다가 중교개혁자들이 손에 의하여 무너졌어요.

로마 카토릭이 무너지고 난 후 500년이 흘렀어요.

500년이 흐르면서 개신교도 부흥을 하였지만 로마 카토릭도 부흥을 합니다.

마치 사데가 멸망당했다가 다시 재건하여서 부흥한 것처럼 말이에요.



지금은 카토릭이 전 세계 교회를 장악하고 있어요.

중세암흑 시대 때 무너진 카토릭에서 나온 개신교가 장족의 부흥을 하였지만 카토릭 못지않게 타락을 하였어요.

맘몬이즘에 빠져서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무너져서 교회가 세상 가치로 세워지고 있어요.

이게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요에 취하였어요.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 것에 취하니까 천국도 부럽지가 않은 것입니다.

마치 레아가 자식을 많이 생산하여 부요한 것처럼 이 시대 교회들이 세상의 부요와 영화에 취하여서 하늘에 가치를 다 버렸어요.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데가 소수의 특공대에 두 번 망하였듯이 이 시대 교회도 다시 망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두 증인들을 일으켜서 세상에 취하여 있는 교회들을 깨트리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사데 라는 이름의 뜻은 바로 “남은 자” 라는 뜻이에요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가지고 사용하세요.

남은 자들은 지극히 미미해요.

레아의 소생은 많고 라헬의 소생은 적은 것처럼 육적 교회는 부흥하는데 영적 교회는 미미해요.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이 언약으로 낳은 자들은 적어요.

엘리야 시대처럼 온 세상이 다 바알을 쫓는데 남겨진 칠천 명이 있듯이 지금도 남겨진 그루터기 신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다시 한 번 종교 개혁자들처럼 썩어 빠진 교회들을 깨울 것입니다.



잘난 자는 레아의 소생들이었어요.

라헬의 소생은 힘이 없었어요.

요셉은 형제들에게 얻어맞고 놀림 당했어요.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살려내요.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레아의 소생은 바글바글 했어요.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바로 레아의 소생과 같아요.

야곱의 두 아내를 통하여 우리의 소속을 보아야합니다.

나는 레아의 소속인지 라헬의 소속인지 자기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라헬의 소생은 라헬과 같이 고난이 많아요.

하나님은 라헬의 소생들은 고난당하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 무시당하는 모습으로 두셨어요.

그러나 그들 속에는 천국이 있어요.

하늘에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세상의 부귀영화는 허상이에요.

진짜는 천국에 있어요.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다 허상이고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야곱이 집에서 나왔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찾아 와서 이 땅은 허상이고 진짜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요.

그럼에도 야곱은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땅에 것을 쫓아갑니다.

이에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야곱의 힘을 상징하는 환도뼈를 부러뜨리고 너는 땅에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임을 알려주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에게 유효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작은 자로 두었어요.

적은 무리로 두셨어요.

그런데 그 속에 천국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린 라헬이 낳은 요셉이에요.

그러므로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세요.

천국 복음을 가진 자로써 당당하게 사세요.

주님이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레아와 라헬을 통하여서 두 언약을 깨닫게 하여주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 주심도 감사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으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비록 세상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아프더라도 잠시잠깐 후에 오실 주님을 소망 삼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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