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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5강. 육의 아들과 영의 아들 (창 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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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7. 7.

 

 

 

55강. 육의 아들과 영의 아들 (창 30:1-24)

-.정낙원 목사

 

성경은 창세전에 계획하신 시나리오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풀어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혈통적 이스라엘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교회로 나타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보여주기 위한 예표적 민족이에요.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신약에서 일어날 것을 겨냥해서 일어난 예표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사건을 가지고 신약적 의미로 해석하여야 해요.

바울이 다메섹 이후에 이러한 해석을 했습니다.

지금도 성령이 그렇게 해석을 해 주세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 이야기로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럴 때 모든 성경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이에요.

알다시피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듯이 우리도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무얼 할까 로 접근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말을 의역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 하셨다 라는 말과도 같아요.

천지창조 속에 우리의 구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독자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간섭에 의하여 살았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하나님이 시작하고 하나님이 끔을 맺게 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는 성도의 구원의 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나서 출애굽 한 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광야 길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을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언약 백성들의 정체성을 알려 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광야 길 40년의 여정 속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성도는 자기 생존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건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기 생존을 포기하고 언약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에요.

우린 내 생존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하여서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게 간섭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길이에요.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과 전쟁한 역사에요.

불순종하다가 맨 날 얻어터진 역사에요.

결국 출애굽 한 1 세대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어요.

하나님이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한 1 세대들을 죽이는 일을 하셨어요.



출애굽 한 1 세대들은 우리 옛 사람을 상징해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 옛 사람과 전쟁을 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어떤 일을 하면서도 늘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때론 성령의 뜻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리 많지가 않아요.



우린 육신의 연약으로 우리의 마음에 원함과는 달리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를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토로한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토로할 이유가 없어요.

안 되니까 “아 미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신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불신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신자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상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불신자에게는 상한 마음이 없어요.

신자가 불신자들 보다 더 나은 자가 아니에요.

나은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이런 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감사는 깨달음에서 나와요.

깨달음은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늘 자신의 악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은 잘난 자가 아니에요.

우리와 동일해요.

그러니 야곱을 본 받자!

그러면 안 됩니다.



성경이 야곱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은 우리더러 본 받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야곱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야곱의 두 아내는 예수님의 구속사로 볼 것 같으면 두 언약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두 언약이라 함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집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 땅에 언약을 펼쳐가는 모습입니다.



이걸 야곱이 두 아내를 얻는 것 속에 담아 놓았어요.

언약의 순서가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집니다.

이것을 야곱이 언니와 먼저 결혼을 하고 동생과 나중에 결혼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분명히 라헬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그 동네 풍습이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을 가는 법이 없기 때문에 라반이 그 동네의 풍습 때문에 언니인 레아를 먼저 주고 난 후에 그 다음에 동생인 라헬을 준 것입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게 두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종살이 하였는데 실제적으로는 레아를 얻고 말았습니다.

이러면 야곱은 레아를 얻기 위하여 7년을 종살이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순서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레아와 혼인하고 난 후 7일 후에 라헬과 다시 얻게 됩니다.

그리곤 다시 7년을 종살이 하게 됩니다.

이러면 레아는 얻고자 7년 종살이를 한 것이 되고,

라헬은 얻고 나서 7년 종살이를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셨을까요?

이는 야곱을 통하여서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두 아내는 두 언약을 이야기 합니다.

레아는 옛 언약을 말하고,

라헬은 새 언약을 말합니다.



레아와 라헬을 두 언약과 신앙으로 적용하면,

옛 언약은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고,

새 언약은 신랑과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와 사는 거예요.



구약은 종 살이 하는 것이고 신약은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레아가 낳은 자식은 옛 언약인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종을 상징하고,

라헬이 낳은 자식은 새 언약인 은혜 아래서 낳아진 아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종을 아들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재림하셨어요.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과 동일해요.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가면 보혜사를 보낼 터인데,

그 보혜사가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신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살고 있어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정죄당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정죄당하고 살았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음에 늘 한탄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어요.



조금만 잘못해도 이러다 벌 받는 것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형제에요.

레아와 라헬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도 레아가 있고 라헬이 있습니다.

레아는 율법 아래서 난 자이고, 라헬은 은혜 아래서 난 자에요.



우리의 신앙은 먼저 율법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은혜 아래로 옮겨집니다.

레아는 율법 신앙이고 라헬은 은혜 신앙이에요.

우리의 신앙은 먼저 레아와 같은 율법 교회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 라헬과 같은 은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순서가 있어요.

옛 것이 먼저이고 새 것이 나중에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그 다음에 주어집니다.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나중에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은혜와 법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드러내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은혜의 반대인 법 아래 우리를 가두신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은혜를 몰라요

율법과 은혜를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떨어질 수가 없어요.



레아와 라헬도 이와 같아요.

라헬을 드러내기 위하여 레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준비해놓으셨어요.

천국이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반대는 땅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천지는 짝인 것입니다.



천(天)은 하늘나라이고, 지(地)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나라 백성들은 이 세상 나라에 두셨습니다.

이 세상 나라에서 구원을 받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하늘나라가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자 하늘나라에 대한 의식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천국은 지옥에서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천국을 알게 하기 위하여 지옥에 던져놓은 것입니다.

지옥을 많이 경험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절실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걸 고난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워서 이 땅에서 고난을 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미워서 천국생활 안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는 천국생활을 하면 우리들은 아마도 천국에 가서 데모 할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은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곳이에요.

그러나 천국은 우리 맘대로 사는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에요.

우리가 받을 찬양이 없어요.



우리는 내가 찬양 받는 천국을 원해요.

내가 주인공인 그런 세상을 원해요.

그런 세상을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천국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천국, 그러면 내가 행복 한 곳,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수개 소리로 조금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여기서 천국 생활을 한 사람은 천국에 가면 데모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역설적으로 주어져요.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면 우리는 죄가 터져 나와요.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 그러면, 아 하나님이 내 인생이 잘 풀리게 해 주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 반대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고난으로 다가와요.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걸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받았고, 레아는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 받은 라헬의 자식은 많고, 사랑 받지 못한 레아의 자식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자연히 남편과 잠자리를 많이 하게 되니까 지식이 많을 것이라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정반대에요.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라헬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 레아가 자식을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자식은 상급과 같아요.



육적으로 보면 자식이 많다는 것은 복을 받은 증거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레아와 라헬은 자식 낳기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말이 경쟁이지 레아의 일방적인 독주입니다.



레아는 하룻밤만 자고나면 자식을 순풍순풍 쑥쑥 낳는데,

라헬은 아무리 잠자리를 해도 감감 무소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야곱을 달달 볶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세요.



창 30:1-2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하니까 레아를 투기하지요.

그리고는 야곱에게 신경질을 냅니다.

왜 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야곱이 내가 하나님이냐 라고 반박합니다.



내가 자식을 주기 싫어서 안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내 능력 밖에 일이라고 합니다.

자식을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레아와 라헬이 자식을 낳은 것은 성도의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레아는 언니로서 옛 언약인 율법을 상징하고,

라헬은 동생으로서 새 언약인 은혜를 상징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육이라고 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를 영이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종이라고 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를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레아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율법 아래서 낳아진 육적 교인이 되는 것이고,

라헬에게서 낳은 자손은 은혜 아래서 낳아진 영적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 계산법으로 하면 육적 교인은 많고, 영적 교인은 적다는 뜻입니다.

이게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 숫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레아는 인간의 가능성으로 자식을 낳은 것이고, 라헬은 인간의 불가능성으로 낳았습니다.

이게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니 잘 이해하고서 보세요.



라헬이 야곱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하니까 자식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야곱은 라헬과 수많은 잠자리를 하였어도 자식을 줄 수가 없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라헬이 야곱의 씨를 받지 못하도록 라헬의 태를 닫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왜 라헬이 야곱의 씨를 받지 못하도록 태를 닿아 놓았을까요?



이는 라헬은 언약의 후손을 낳아야 하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후손은 인간의 방법으로 낳아지면 안 되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야곱이 다른 여인들에게 자식을 낳아 주듯이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다른 여인들에게 많은 자식들을 낳아 주었어요.



이건 육으로 낳은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라헬과 그 외에 다른 여인들은 영과 육처럼 달라요.

라헬은 영이고 그 외 여인들은 육이에요.

육에 속한 여인들에게 자식을 낳게 해 주었다는 것은 곧 야곱이 육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영에 속한 라헬에게 자식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수없이 라헬에게 자식을 주고자 하였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씨가 라헬에게 수태되지 못하도록 라헬의 태를 닫아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라헬에게 있어 자식을 낳아줄 남편은 야곱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른 신랑이 있다는 말입니다.

라헬은 영의 자식만 낳아야 해요.

그럼 라헬에게 영의 자식을 낳아줄 남편은 어디에 있나요?이게 합환채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창 30:14-16=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리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맥추 때에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가지고 와서 자기의 어미인 레아에게 줍니다.

이 모습을 라헬이 보았어요.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아가 거절합니다.

이에 라헬이 오늘은 자기가 야곱과 잠자리를 할 차례인데 언니가 나에게 합환채를 주면 야곱을 언니에게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레아가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고 야곱을 차지합니다.

그리곤 자식을 또 낳습니다.

야곱은 레아하고만 자면 자식을 낳았어요.



그러나 라헬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야곱과 합환채를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합환채가 라헬에게 있어서는 남편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레아는 합환채를 주고 야곱을 얻었고,

라헬은 야곱을 주고 합환채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당당하게 야곱에게 당신이 오늘 밤은 라헬하고 자야 하는데 내가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고서 당신을 샀으니까 나에게 들어오라고 한 것입니다.



암튼 라헬은 야곱을 내어주고 합환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난 후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 동안 수없이 자식을 낳고자 하였으니 실패를 하였어요.

그런데 합환채를 먹고 난 후에 요셉을 낳은 것입니다.



이러면 합환채가 요셉을 낳게 해준 것이 됩니다.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은 사건은 신약에서 일어날 영적 사건을 계시하고 있어요.

이것은 신약적으로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적인 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계시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레아는 야곱과 잠만 자면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아무리 잠을 자도 안 됩니다.

레아에게는 야곱은 자식을 낳아주는 남편일지라도,

라헬에게는 야곱은 자식을 낳아주는 남편이 아닌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한다면 자식을 낳게 해 주어야 하는데,

야곱은 육을 상징하는 레아와 몸종들에게는 자식을 낳아주었지만,

영을 상징하는 라헬에게는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니까,

라헬에게는 명분만 남편이지 자식을 줄 수 있는 실제 남편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합환채를 먹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라헬에게 있어서 자식을 낳아주는 진짜 남편은 합환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자식을 주지 않았고 합환채가 자식을 낳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대목은 합환채를 먹기 전에 라헬과 야곱의 관계와, 합환채를 먹고 난 후의 라헬과 야곱의 관계입니다.

야곱은 라헬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합환채를 먹기 전에는 자식을 낳아 줄 수가 없었고,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난 후에는 자식을 낳아주게 됩니다.

결국 합환채에게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합환채는 자식을 낳게 해 주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라헬을 성도라고 한다면 야곱은 예수님이 됩니다.

이러면 합환채를 먹기 전에 라헬과, 합환채를 먹고 난 후의 라헬은 다릅니다.

야곱 역시 그러합니다.



라헬이 성도라고 했으니까

성도도 합환채를 먹기 전에 성도와 합환채를 먹고 난 후의 성도가 다릅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했으니까

예수님도 성도가 합환채를 먹기 전에 예수님과 합환채를 먹고 난 후의 예수님은 다릅니다.

지금부터 중요하니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두 예수가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가 있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가 있습니다.

성도도 육체로 오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걸 12 제자들을 가지고 이야기 해 봅시다.

12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녔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 하였지만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제자들을 거듭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동거동락 하였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죽음에 두려워서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합환채를 먹기 전에 라헬과 야곱 같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분명히 12 제자들의 남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거듭남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오고 나니까 달라집니다.



성도도 달라지고 예수님도 달라집니다.

성령이 오시자 예수님이 제자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12 제자들이 거듭납니다.

이건 마치 합환채를 먹고 난 후의 라헬과 야곱과 같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니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두려워서 숨었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나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베드로가 “너 예수 믿지!” 그러니까 “아닌데요! 나는 예수를 모르는데요” 라고 하면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성령에 의하여 제자들의 삶 자체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합환채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편의상 합환채를 새로운 남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합환채를 먹기 전의 야곱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합환채를 먹고 난 후의 야곱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라헬에게 있어 야곱과 합환채는 남편이에요.



야곱은 옛 남편이고, 합환채는 새 남편인 것입니다.

야곱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이고, 합환채는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말해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세요.



그럼 이제부터 레아와 라헬을 이 땅의 두 교회 이야기로 상고해봅시다.



레아 교회가 있고, 라헬 교회가 있어요.

레아는 언니로서 구약 교회를 상징하고, 라헬은 동생으로 신약 교회를 상징합니다.

레아는 율법 교회를 말하고, 라헬은 은혜 교회를 말해요.



레아와 라헬은 경쟁적으로 자식을 낳고자 합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는 목적이 달라요.

이게 자식들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자식들 이름마다 한이 맺혀 있어요.



자기들의 한을 자식의 이름에 담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식들 이름 속에 담긴 의미들을 살펴보고 갑시다.



레아가 첫 아들을 낳고 르우벤이라고 합니다.

르우벤이란? "하나님께서 내 괴로움을 들어주셨다" 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무슨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는가요?이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를 낳고 시므온이라고 짓습니다.

시므온은 "내가 하나님께 사랑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남편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함을 아들의 이름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를 낳고는 레위라고 짓습니다.

레위는 "이제부터 남편은 나와 잠자리를 많이 해 줄 것" 라는 의미입니다.

이건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내용이에요.



그리고 넷째를 낳고는 유다라고 짓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어서 고맙다" 라는 뜻입니다.

남편과 잠자리를 많이 해서 좋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잠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자식을 낳으면서 자기 한을 자식들 이름 속에 담아 놓습니다.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세요.

섬뜩하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 이라고 하면서, "단" 이라 하고,

"내가 형과 경쟁에서 이겼다" 고, "납달리" 라 하고,

"야! 내가 동생을 이겼구나" 라고, "갓" 이라 하고,

"야! 또 이겼다" 는 의미에서, "아셀" 이라 하고,

"하나님이 내 빚을 갚아 주셨다" 라고 하면서, "잇사갈" 이라 하고,

"이제부터 남편이 나에게 잘해 줄 것" 이라는 뜻으로, "스불론" 이라 합니다.



자식들의 이름을 보세요.

전부 한 풀이식 이름이에요.

모두가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한이에요.

자식을 낳아서 남편의 사랑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식을 많이 낳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자식 낳는 것으로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신앙과 같아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지요.



이게 율법신앙이에요.

율법 신앙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남편의 사랑을 자기 열심으로 얻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 아래서는 자기 업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나 이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 증거로 자기 업적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은 우리의 열심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우리가 열심을 낸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고 내가 많은 것을 소유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가 없어요.



자식 많은 것이 남편의 사랑 받은 증거라고 한다면 레아가 당연히 많지요.

그러나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고 라헬을 사랑했어요.

그러니 자식 많이 낳은 것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로 내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교회가 크다고 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가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복 받은 증거로 내어 놓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흔히들 교회가 부흥하면 그것을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로 내어 놓잖아요.

세상에서 성공하면 복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이게 레아의 사고에요.



이 시대 교회마다 서로 교회 부흥을 위하여 경쟁하는 것은 레아와 같아요.

레아 교회는 사람의 숫자를 자랑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수에 치우치지 않아요.

사람의 숫자는 사람들에게나 가치가 있지 하나님에게는 아니에요.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을 원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뽑힌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구원하세요.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사랑하세요.

그러므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자기 조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따 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요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언약으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언약이 심겨지면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새 언약에 담겨져 있어요.

옛 언약엔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요.

그래서 옛 언약을 상징하는 레아는 야곱이 사랑하지 않고, 새 언약을 상징하는 라헬을 사랑한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것은 라헬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라헬이 새 언약을 상징하는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 법 앞에서는 우리는 늘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일을 인과율로 판단을 합니다.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해석을 해요.

욥과 그 친구들처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내 쪽에서 원인을 찾고자 해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도 나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두 그릇을 만드셨어요.



어떤 그릇은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고,

어떤 그릇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걸 에서와 야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어요.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렇게 결정 하였어요.

그리고 결정한 그것을 그들에게 적용을 하셨어요.



왜 그런가요?

에서는 장자로 옛 언약을 상징하고 있고,

야곱은 차자로서 새 언약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뭐가 잘나서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새 언약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자기 조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하면 안 되어요.



라헬도 마찬가지에요.

라헬은 레아보다 자식을 많이 낳지 못하였지만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야곱은 라헬이 자식을 낳기 전에 사랑했어요.

일방적으로 사랑했어요.

그러므로 라헬은 자식 낳은 것으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합환채를 먹고 낳은 자식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 이란 뜻이에요.

이것은 이 한 아들이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뜻이에요.

라헬의 말대로 요셉이 모든 형제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고 만 것입니다.



레아의 후손들이 요셉에게 굴복을 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라헬의 뜻대로 요셉이 열 아들 안 부러운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우리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인 것이에요.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셨어요.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복음을 깨닫는 것에는 왕도가 없어요.

우리가 복음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들이 열려지고,

시대를 볼 수 있는 눈들이 떠지고,

영적인 감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 쪽에서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모두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의 산물이에요.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깨닫고 어떤 사람은 못 깨달아요.

그것은 IQ 차이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듣게 해 주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들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를 받은 사람은 들려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차별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영생을 얻은 자들이고,

저희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에요.

너희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영생을 얻었다고 성경을 가지고 알려주고 있고,

저희에게는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지적 동의를 끄집어내려고 쓰여 진 것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쉼을 주지만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경쟁과 수고를 주어요.



레아와 라헬의 자식 낳는 일은 두 백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라헬과 레아를 가지고 이 시대에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낳을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가 아무리 많은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에게는 유업이 없어요.



그것은 육으로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나라는 영의 나라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낳아진 자들이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합환채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이 야곱의 약전에 등재된 것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가문을 이어갈 장자인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신약의 두 교회를 보여주는 예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능적이라는 말은 뭔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어요.

선택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전 세계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어요.

이들을 어떻게 찾아내어서 구원을 하는지를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어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어요.

겉으로는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옛 언약이 있고 새 언약이 있어요.

육에 속한 언약이 있고, 영에 속한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은 육에 속한 언약으로서 율법을 말하고,

새 언약은 영에 속한 언약으로서 은혜를 말합니다.

언약의 순서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나아가요.



그래서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은혜가 나중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가 먼저 주어지고, 영에 속한 자가 나중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레아와 라헬로 나타났어요.



라반이 그러지요.

이 나라 풍습이 언니부터 먼저 시집을 가고 동생이 나중에 간다고,,,

야곱은 동생을 사랑했어요.

그럼에도 라반은 야곱에게 언니인 레아를 먼저주고 라헬을 나중에 준 것입니다.

그 나라 법도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 법도란 창세전 언약과 같아요.

창세전 언약은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나중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을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었고,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인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두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이고, 나중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구원을 하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여호수아와 같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영역이 두 가지인 셈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지는 것과, 의와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지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죽이는 것이고,

의와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에게 생명과를 먹이는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이기 위해서 먼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죽이는 것을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와 사망에 가두어진 아담을 죽인 것은 새로운 아담으로 살리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죽으시고 부활 후에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인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오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세요.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시면 두 영역이 있음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먼저 종에 가두어지는 것이 있지요.

아들인데 어렸을 동안에는 잠시 동안 종으로 두셨다고 하잖아요.

이를 율법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보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케 하십니다.

이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행하여야 할 율법의 요구를 대신 담당하셨어요.



율법의 요구가 뭔가요?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내고 죽이는 일을 해요.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예수님을 대신 죽인 것입니다.

이걸 속량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잘 보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하지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지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어요.



그와 우리를 대입해 보세요.

그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매를 맞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려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이걸 속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로 속량 받은 자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주십니다.

아들에 영이 와서 아들의 명분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걸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을 하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두 가지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 가는데 모세와 여호수아 두 지도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하나에요.

그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종이란? 복속된 자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을 두 분이에요.

그러나 하나에요.



모세와 여호수아는 둘이에요.

그러나 하나에요.



모세는 애굽에서 난 자들을 출애굽 하는 구원을 하였고,

여호수아는 광야에서 난 자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구원을 하였어요.



출애굽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고,

가나안 입성은 의와 생명으로 들어가는 구원인 것입니다.

출애굽은 율법에서 건짐 받는 것이고,

가나안은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물 세례와 성령 세례 두 세례로 말해주고 있어요.

물 세례는 옛 사람을 죽이는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새 사람으로 살리는 세례에요.



우리도 두 사람이 있어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어요.

옛 사람은 육으로 난 자이고, 새 사람은 영으로 난 자에요.



이걸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의 후손은 우리 옛 사람과 같고,

라헬의 후손은 우리 새 사람과 같아요.

라헬의 후손인 요셉이 레아의 후손들을 살리지요.



라헬의 후손인 요셉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을 말해요.

레아의 자식이 라헬의 자식 안에서 구원을 받듯이,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 안에서 구원을 받아요.

우리 옛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 난 새 사람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에 구속을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는다고 하지요.

왜 덧입는다고 하나요?



이는 하늘로부터 난 사람이 땅에서 난 사람을 감싸서 구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감싸서 구원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장자의 옷을 입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장자인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인적으로 받는 것이에요.

영혼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몸도 받아요.

그래서 바울이 너희 몸과 혼과 영이 온전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몸은 분리하면 안 되어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므로 창기와 같이 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건 우리 몸을 천사로 만들라는 말이 아니고 죄와 싸우라는 말이에요.



옛날에는 죄에 떠밀려 다녔는데 이제는 성령이 그 안에 와 계시니까 감각 없는 자처럼 자신을 죄에 방임하지 말고 방탕하며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억제 하라는 말이에요.



물론 우리 몸은 죄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과 함께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러함에도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세요.

하늘에 속한 자들이 땅에 던져져 있어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하늘에 속한 자가 와서 구원을 해 내세요.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희생으로 구원을 해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금 야곱의 두 아들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은 우리의 구원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레아의 후손인데, 라헬의 후손인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합환채로 낳아진 요셉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래서 레아의 후손이 라헬의 후손인 요셉을 죽이는 일을 하고,

죽었던 요셉이 살아나서 자기를 버린 형제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레아의 후손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에 판 것은 죽인 것과 같아요.

이 모습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 초림 사건으로 나타났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요.

육적 유대인은 레아의 후손과 같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님은 라헬의 후손과 같아요.

육적 유대인들이 성령으로 난 예수를 죽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여서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 이야기로만 국한 시키지 말고 우리 이야기까지 끌고 와야 해요.

지금도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영에 속한 자가 있어요.

육에 속한 자들은 레아의 후손과 같고, 영에 속한 자는 라헬의 후손과 같아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레아의 후손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라헬의 후손이에요.

이 둘은 항상 충돌해요.



그런데 영으로 난 자들과 육으로 난 자들에게 핍박을 당해요.

쉬운 말로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복음을 아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해요.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충돌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반복적으로 계속하여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육으로 난 자식들이 영으로 난 자식들을 죽임으로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이러한 죄인을 영으로 난 자들의 피 흘림으로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 하시고 제자들을 찾아옵니다.

이 때를 안식 후 첫 날이라고 합니다.

안식 후 첫 날이란 여덟째 날을 말해요.

이는 역사 바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역사 바깥의 사람이 되신 거에요.

역사 바깥에 계신 분이 역사에 속한 자들을 찾아오신 겁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적용을 시키는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는 죄사함을 주는 일들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누구에게 보냈나요?

자기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였나요?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일을 그대로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어서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보냄을 입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하고 똑 같은 말을 하다가 이단으로 죽어야 해요.

그 말이 바로 옛 언약에 속한 교회 안에서 새 언약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전하는 거에요.



그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핍박을 해요.

왜냐하면, 자기들하고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 의로 가득한데,,

그건 의가 아니라고 하면 화를 내면서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에게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니까 흰 옷을 주면서 너희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바른 소리 하다가 죽임 당하여야 하는 자들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바른 소리란? 십자가 복음 전하는 거에요.

예수의 피 외는 의가 없다는 새 언약을 전하는 거에요.

여기에 인간의 행함도 의가 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반발을 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 간의 다툼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약에서 레아의 후손이 합환채를 먹고 난 라헬의 후손을 죽이는 것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그림이에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셨어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예요.



하나님은 이들은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육으로 나게 하셨어요.

이걸 율법 아래 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이세요.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하려면 육으로 난 자들이 영으로 나는 한 번의 거듭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거듭날까요?

이는 영으로 오신 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하는 방법으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이 영으로 오신 겁니다.



이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갑니다.

찾아 가서 자기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으로 끌어당김 당한 자들이 영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몽땅 끌어안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육에 속한 아들들을 예수에게 귀속을 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라는 한 아들만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4장에서 구원 받은 144000명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44000명은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신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전부 예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예수라는 아들 하나 밖에 없어요.

예수 안에는 수많은 아들이 있어요.

이를 창세전 언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무리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수많은 개체이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에요.



하나님은 수많은 개체 들을 이 땅에 쏟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내서 찾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과정이 왜 필요 하느냐 하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낳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아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아들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서 마지막 날에 다 살려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어요.



이를 사도 바울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하였구요.

성경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을 예수님이 찾아내는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를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라헬은 레아처럼 육신으로 자식을 낳으면 안 되어요.



왜 그러느냐?

라헬은 영에 속한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을 속한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영에 속한 성도는 절대로 육적인 방법으로 생산이 되지 않아요.



성령의 방식으로 낳아져야 해요.

그래서 영에 속한 교회를 상징하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은 육이에요.

비록 요셉이 합환채를 먹고서 낳아진 자이지만 육이에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은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일이에요.



이 땅에서는 영으로 난 자는 없어요.

이 땅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영으로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이 없어요.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그림자예요.

장차 영으로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이 오세요.

그 아들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 속에서 영에 속한 자로 만들어 내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 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구약의 모든 백성들이 육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구약 이스라엘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영으로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걸 몰랐어요.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건 아니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탄생 사건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로 가지요.

가서 뭐라고 하는가요?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났느냐고 묻지요.

이 말은 헤롯 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거에요.

넌 가짜라는 겁니다.



진짜 유대인의 왕은 영으로 나신 분이라야 하는데 너는 육으로 난 자이기 때문에 가짜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예수님이 참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이면서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을 가짜로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걸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아들이에요.

예수라는 아들 하나 이 땅에 남기고 싶어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고 그 아들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물 자체가 예수를 위하여 존재해요.



만물을 의인화 하면 모든 인간이에요.

모든 인간은 예수를 위하여 존재해요.

죄란? 예수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우린 모두가 그렇게 살았어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살았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자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내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입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 앞에 고백 할 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나의 왕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가 꼬실 때에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어요.

이는 네가 왕이라고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왕이 되었어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게 왕이에요.



그러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왕인데 인간들이 왕 노릇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추방시킨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스스로 왕으로 살고 있어요.

죄 아래 팔린 모든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왕으로 태어나요.

우린 모두가 왕으로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가 와서 내가 왕이라고 합니다.



이게 믿어지는 사람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에요.

어떻게 믿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는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는 것을 믿어지게 하세요.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구원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거에요.



이 시간 우리가 교회에 온 것도 우리가 온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인도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교회 온 것을 자랑하지 말고 “주여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설교가 들려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IQ가 좋아서 들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들려지게 해 주셔서 들려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영적인 일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성령이 깨닫게 해 주어야 해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면 모든 성경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로 보여요.

레아와 라헬의 자식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을 언약으로 보세요.

그러면 절대로 어렵지 않아요.



레아와 라헬의 자식 이야기는 자식 많이 낳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육으로 난 자들은 스스로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영으로 난 자에 의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낳은 자식이 육으로 낳아진 자식들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약전에 영으로 낳은 요셉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에 속한 자들을 영의 자식으로 낳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육으로 낳아진 자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육으로 난 자가 있고 영으로 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육으로 세워진 교회가 있고 영으로 세워진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교회들은 레아와 같이 승승장구해요.

육적 교회는 프로그램을 가동하면 성공해요.



그러나 영적 교회는 아무리 프로그램을 가동해도 되지 않아요.

뭔가 부흥의 비밀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육적교회라고 보시면 맞아요.

요즈음 은혜 받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건 비성경적이에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복을 따내는 비결이 기도 열심히 하거ㅗ 충성 봉사해서 따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댓가로 얻어내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 하지 않아요.

영적인 것은 우리 쪽에서 열심히 두드리고 열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어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아요.



복 주실 자에게 복을 주세요.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받았어요.

그게 복이에요.

내 원인에 의하여 얻어진 것은 복이 아니에요.

댓가이고 삯이에요.



영에 속한 것은 주시면 받고 안주면 못 받는 거예요.

레아와 라헬처럼 자식 낳는 경쟁을 하면 지쳐요.

형은 자식을 많이 낳는데 라헬은 못 낳으니 몸종 빌하 까지 주면서 낳으려고 했어요.

빌하가 낳은 자식까지 자기가 낳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라헬이 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나는 신랑 사랑 받고 있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이길 수가 있어요.

“언니는 신랑 사랑 못 받고 있는데 나는 받고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이겨 낼 수가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면서 나는 적게 가지고 저 사람들은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늘 신앙생활이 짜증나고 화가 나요.

물질적 가치관을 가지고 생각하면 우리는 늘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복음이 알아지고 깨달아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해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꾸만 이웃과 비교하게 되어요.

그것도 우리 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잘난 사람하고 비교해요.

그리곤 실망하는 겁니다.



제가 만약 라헬 같은 사고를 가졌다면 “하나님 저쪽 교회는 부흥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부흥이 안 됩니까?” 라고 맨 날 짜증이 날게 아니에요.

그럼 복음 전해도 기쁘지 않고 힘이 들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세상에 어떻게 언약이 믿어지고 복음이 깨달아지는데!”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 이겨내요.

.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할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어쩌자고 복음이 깨달아지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럴 때에 현실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복음이 진짜 복음이라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하여도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주변에서 이단 삼단이라고 해도 격동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복음 아는 것을 놀음판에 장땡이로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놀음판은 끝 발 싸움이에요.

누구 패가 더 높으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어요.

제일 높은 끝 발이 장땡이입니다.

내가 단풍 잎사귀 두 장을 가지고 있으면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스스로 확인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자들은 흔들리지 않아요.

복음이 진짜임이 믿어진다면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중요 한 것은 내 증거가 아니라 성령의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이라는 객관적 진리를 주관화 시켜 주실 때 능력이 되어요.

이건 성령이 오면 나타나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확실한 보증이 되어 주세요.

그래서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한 사람은 자꾸 흔들려요.

흔들리니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풍조에 밀려다니는 것입니다.



믿음은 남에게 인정받아서 확증 받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가 있어요.

그래서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이 자식 낳는 사건을 통하여 말해 주잖아요.



누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는 사람이냐?

바로 영으로 낳은 자식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잖아요.

영으로 낳아줄 사람이 신약에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안에서 영의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에 속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성령 받은 백성들은 예수님이 낳아주신 영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자기 안에 와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을 남에게 추인을 받고자 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기 안에 성령의 확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증거 있음이 곧 말씀이 믿어지고 언약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믿어지고 아무나 들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하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감추어졌어요.

그러니 복음이 들려지면 감사하세요.



복음이 없는 레아 교회가 세 쌍둥이를 낳든 열 쌍둥이를 낳든 신경 쓰지 마세요.

낳아봐야 모두 육이니까요.

부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영의 자식만 인정해요.

상징적으로 보면 육의 자식은 많고 영의 자식은 적어요.

이 땅에는 육의 자식들은 숫자로 영의 자식들을 공격해요

.

바울이 그러지요.

우겨쌈을 당해도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잖아요.



바울은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바울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주세요.



주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확증해주시면 끝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이 세상 것이 없다고 하여서 낙망할 것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어요.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럼 세상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의 확증이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게 하여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이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천국에 소망이 있으니 그 소망으로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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