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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25강. 속죄 받은 자의 삶 (레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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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2021. 7. 24.

 

 

25강. 속죄 받은 자의 삶 (레 17:1-16)

-.정낙원 목사

 

삶은 이론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을 이론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동화 속에 이야기입니다.

 

신앙도 생명의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여야 합니다.

희노애락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과 신앙생활은 다릅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하고,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신앙생활은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나무라고 한다면 신앙생활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이는 곳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뉘라서 이 길을 갈 수가 있을까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난 자들은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사도와 교사와 목사를 은사로 주셨습니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게 하여서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장성한 자로 자라가게 하시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이론이고 사는 것은 실제입니다.

 

사람이란?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에게는 사람의 구실이 있습니다.

사람 구실을 할 때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의 규범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 백성이니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성경(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너희는 본래 죄인이었는데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를 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사함 받은 자들은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를 삶이라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교리와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지식을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신앙적 지식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죄 아래서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입니다.

 

신앙이 지식이 되면 설교를 들을 때 채점자가 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서 맞느냐 틀리느냐 채점하기에 바쁩니다.

이것은 예수를 앞에 두고서 분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들을 말쟁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가 먹어야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먹은 자는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지만,

예수를 앞에 두고서 분석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스스로 속인다고 합니다.

마귀는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케 하여서 신앙을 관념화 시킵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 지식을 아는 것이 신앙인 줄 알고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인냥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 특히 할례당에서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말로는 경건을 말하나 실제로 경건의 삶은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므로 이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지식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배우는 것도 레위기 속에 담겨 있는 거룩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가 나에게 하시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거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합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건져냄을 당하였으니 이젠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더러운 것으로부터 어떻게 정결케 하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케 해 주신 것을 어떻게 지키고 이루어 가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교리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뒤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은 이렇게 살아간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애굽에서 건져내는 구원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애굽에서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합니다.

 

레위기의 구조도 그러합니다.

 

레위기 1장에서부터 16장까지는 죄인이 어떻게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17장에서부터 마지막 27장까지는 거룩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골 3:1-1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느냐?

그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땅에 것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늘에 백성이 되었으니 하늘에 것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전쟁인 것은 땅의 것들을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육신의 소욕이 나를 이기면 우리 몸은 땅엣 것을 쫓아가게 되고,

성령의 소욕이 나를 이기면 우리 몸은 하늘에 것을 좇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우리 몸을 지배 하지 못하도록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싸움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합니다.

 

우린 땅에 것으로 살았습니다.

땅에 것으로 사는 것은 너무도 익숙합니다.

이것은 가르치고 시키지 않아도 너무도 잘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것은 낯설고 서툽니다.

불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렵고 아픈 것입니다.

 

아프다고 해서 다시 옛 것으로 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이 돌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광야 40년 신앙의 길입니다.

광야 40년은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나는 죽노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레위기 17장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17장에서는 두 가지 규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짐승을 잡을 때의 규례이고,

둘째, 짐승의 피에 관한 규례입니다.

 

먼저 짐승을 잡을 때의 규례입니다.

 

레 17:3-4절.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을 때에는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바깥에서 잡든지 4. 그것을 회막 어귀로 가져 와서 주의 성막 앞에서 주께 제물로 드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 짐승을 잡은 사람은 실제로 피를 흘린 것이므로 죄를 면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끊어져야 한다”(표준새번역)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짐승을 잡을 때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너희들이 식용으로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거든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에 먹으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너희가 먼저 먹으면 살인자로 간주하여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아닌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입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의 피는 제단 아래 뿌리고 기름은 태워서 하나님께 그 향기를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고기는 서로 나누어서 먹습니다.

 

이건 제사를 지낼 때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에 먹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먹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께 드림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드리라는 것은 이 고기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는 이 음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밥상을 차리면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고 먹으면 자식들이 따라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이러한 밥상머리 교육을 시키는 것은 이 음식이 아버지의 피와 땀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식사 기도를 하는 것도 이러한 뜻입니다.

이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감사는 깨달음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는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나와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은 것도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성막을 주시고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자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고 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한마디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희들 힘으로 떡을 만들어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이 사실을 배워가는 곳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입니다.

이걸 아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먹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리고 난 후에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채소로 된 곡식으로 만든 음식에 대하여는 너희들이 먹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채소 먹을 때는 감사치 않아도 되고 고기 먹을 때만 감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곡식으로 만든 빵을 먹어도 감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 짐승의 고기는 하나님께 먼저 드린 후에 먹으라고 할까요?

 

왜 고기는 하나님께 먼저 드리기 전에 먹으면 구원에서 짤려 나가는 것처럼 경고를 하실까요?

구원과 연관 시켜서 말씀을 하실까요?

여기에 큰 비밀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주신 양식은 채소입니다.

고기는 노아 홍수 후에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홍수 심판에서 살아난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고기는 심판에서 살아난 자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인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합니다.

 

홍수 후에 고기를 양식으로 주는 배경을 봅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흠향하시고 받으십니다.

그리고 난 후에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창 8:20-21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용서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은 자신들이 살고 있음이 흠 없는 짐승의 희생으로 인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고기를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창 9: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이면서 이 고기는 너희의 죄 때문에 희생당한 정결한 제물이라는 것을 몸에 새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고기를 양식으로 주신 목적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정결한 짐승은 의인화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한 제물을 흠향하신 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흠 없는 제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받으신 것과 같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흠 없는 예수그리스도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바탕에는 흠 없는 제물의 죽음이 있음을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의 희생으로 출애굽을 합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성막을 짓습니다.

성막을 지은 후에 광야 40년 길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살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중심에 두고 12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3 지파씩 나누어서 진을 치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을 중심에 두신 것은 이스라엘은 성막을 지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너희가 성막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이스라엘이 성막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민 실상은 성막이 이스라엘을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에덴에서 생명수가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에덴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에덴이 광야에서는 성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계신 것입니다.

 

성막에서 생명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나오는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떠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일을 성막 중심으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백성들은 구름기둥이 떠올라서 움직이면 그 인도를 따라서 장막을 걷어서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구름기둥이 멈추어 서면 그곳에 장막을 치고 살아갑니다.

 

장막을 칠 곳을 구름기둥이 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사화복을 주관 하신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세상에서 천국까지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백성들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광야 40년 동안 성막이 42번을 옮겨가면서 가나안까지 인도를 하였습니다.

 

42번을 옮겨서 진을 쳤다는 것은 42번 이사를 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사를 한번 하는 것을 한 대라고 한다면 42대만에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천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출애굽을 한 후 42대가 되면 실제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자들을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 때문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1대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데 성막이 42번 이동을 하였다는 것은 장차 언약의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메시야가 42대만에 오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럼 성막이 언약의 후손들은 광야 길을 42번 옮겨가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은 성막의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42대만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약을 여는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시작을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를 42대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예수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42대 손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42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가나안으로 인도한 성막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부터 42대 만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건 신약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의 초립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기간을 42달이라고 합니다.

42달은 신약의 전 기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42달을 1260일이라고도 하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라고도 합니다.

 

42달과 1260일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동일한 기간입니다.

동일한 기간을 해와 달과 사시로 말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의 아들들인 성도들에게는 해의 시간표를 적용해서 1260일이라고 하고,

천국의 그림자로 존재하는 세상 속의 교회의 시간표는 달의 시간표를 적용해서 42달로 말하고,

이 세상의 종말의 때와 기한을 말하는 시간표는 사시의 때의 시간표를 적용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이 42번 옮겨질 때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은 성막이 세워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성막이 세워지는 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그 장소가 때로는 좋은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막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백성들은 좋아 하였고 험한 곳에 세우지면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광야 길은 백성들을 훈련하는 길입니다.

훈련은 아프고 힘든 고난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태어난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서도 자기 몸이 조금만 불편하면 불평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쾌락을 쫓고자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 중심으로 살고자 한 것이 광야에 나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먹고 마시고 뛰노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고 마시고 뛰노는 자들을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삼천 명을 도륙을 하십니다.

 

이 때 모세의 두 돌 판을 깨트리고 계약 파기를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죽은 목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불러서 성막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드려지는 각종 제사 제도를 알려주십니다.

 

성막 중심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떠나는 것은 곧 우상숭배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을 광야에서 잡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고 뛰놀면서 애굽식 잔치를 벌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아직까지 성막이 주어지지 않은 때입니다.

성막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집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뛰 놀던 곳을 광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하던 광야에서 짐승을 잡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광야에서 잡으면 우상숭배로 간주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먹고 마시면서 뛰어 놀던 것이 하나님 앞에 악한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제사의 용도로 사용하는 짐승이든지 사람의 식용을 위한 짐승이든지 광야에서는 잡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짐승을 잡으면 음란한 자로 간주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 사건을 수염소에게 제사 한 음란한 것이라고 합니다.

 

7절.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음란히 섬긴 수염소는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에게 제사하는 것을 육체의 쾌락을 탐하는 용어인 음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바로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고 부패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 온 것은 그들에게 육체의 쾌락을 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케 하려고 빼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제사나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방식으로 드려지는 제사만 받으십니다.

그것을 성막의 제사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삶 자체가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삶은 분리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래서 먹기 위해서 잡는 짐승도 제사에 드려지는 방식으로 잡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식용으로 먹기 위해서 잡은 짐승일지라도 피와 기름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먹은 고기는 제사의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고기를 먹으면서 희생 제사를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고기도 제사의 제물처럼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고기를 먹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고백으로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화목제 고기인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백성들에게는 자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주면서 이 고기가 뉘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방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되면 방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움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죄사함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방종이란?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구원 해 주셨는지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르고 살면 불효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면 불경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백성들에게 너희가 살고 있는 것은 너희 죄를 대신해서 흠 없는 짐승이 죽임 당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것은 흠없는 제물의 피 흘림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피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짐승이든지 그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피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첫째, 그 어떤 피라도 눈에 보이지 않도록 흙으로 덮으라고 합니다.

둘째, 그 어떤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레위 17:13-14절.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피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 생명은 바로 우리를 위하야 대신 죽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위해 대신 죽은 희생자를 기억하고 그 속죄의 피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귀히 여기는 것은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셨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케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피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피를 흙으로 덮는 것은 죽음을 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 피가 만약에 네 생명이라고 한다면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 있겠느냐?

너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처럼 너를 위하여 희생한 짐승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를 흙으로 덮지 않는 것은 죽음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겔 24:7-8절. “죄 없는 사람을 죽인 피가 그 성읍 한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다. 피가 흙으로 덮이지도 못하였다. 그 피가 흙 위에 쏟아지지 않고 맨 바위 위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8. 그 피가 흙에 덮이지 않게 맨 바위에 쏟아 놓은 것은 바로 나다. 내가 분노를 일으켜 호되게 보복하려고 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멸망시킨 이유를 그들이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의 피를 경홀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읍에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의 피가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시신을 수습하지도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시신을 그대로 둔 것은 생명을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의 피가 하나님에게 신원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분노 하여서 죽음 사람의 원을 풀어주기 위해서 보복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죄 없이 죽임 당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아벨로부터 바랴가의 아들 사가랴의 피가 이 성중에서 신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놓이지 않다 다 무너지리라고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종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광의적으로 보면 신약에 죽임 당한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를 종말에는 두 증인들로 나타납니다.

 

계 11:3-10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두 증인들에게 권세를 줍니다.

이에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을 합니다.

1260일은 신약의 전 기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부어집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땅(육)에 속한 자들이 반발을 합니다.

이것을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들이 두 증인들을 죽인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였습니다.

육적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죽였습니다.

육적 유대인이란? 혈통적 유대인만 아니라 인간의 의를 고집하는 율법신앙을 고수하는 자들도 육적 유대인인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행함을 의라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의로운 것이라고 증거하는 종들을 핍박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죽임 당한 교회를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전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두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 일어납니다.

그런데 두 증인들의 시체가 길에 그대로 방치가 되어 있습니다.

시체를 그대로 방치 한다는 것은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역적의 시신들을 방치해 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전하는 두 증인들이 인간의 의를 전하는 자들로부터 역적 취급을 당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죄 없는 자들을 죽이고 성읍에 방치해 둔 것처럼,

지금도 복음 전하는 종들이 버려짐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를 흙으로 덮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피를 보이는 곳에 방치하는 것은 그 피를 흘린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건 이방인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짐승의 피를 그대로 방치하고 고기만 가지고 갑니다.

고기는 먹을 줄 말면서 정작 배부름을 주는 짐승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삶에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방인과 같이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짐승이든지 그 피는 반드시 흙으로 덮어주고 또한 그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피를 보이게 방치 한다거나 피를 먹으면 이방인으로 간주하여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쳐지게 하신다고 합니다.

 

피를 덮는 것은 그 피를 흘린 짐승의 생명을 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피를 다루는 것을 보아서 피의 가치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서도 드러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의미를 안다고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홀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르면 피를 경홀히 여김이 됩니다.

 

우리가 주께서 부활 하신 날을 주일로 지키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을 찬송키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로부터 사함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 시켜 주었습니다.

이를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자유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으로부터 판단 받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일컬어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죄인으로서 사망을 면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율법에서 자유케 된 사람은 죄와 사망이 가둘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는 동네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는 은혜라는 동네에서 살아갑니다.

 

은혜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은혜로 적용당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하늘에 가치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성도는 하늘에 가치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성령의 소욕이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인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물질적 가치라고 합니다.

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바울은 물질적 가치로 사는 것을 땅의 일이라고 하고 땅의 일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역으로 이해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물질적 가치를 죽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성도는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에 담겨져 있는 두 가지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도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짐승은 반드시 하나님께 먼저 화목제로 드리고 난 후에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식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모든 피는 흙으로 덮으라는 것과 그 어떤 피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그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맛을 누려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람은 감사를 알고,

짐승은 감사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를 모르는 자를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속죄일을 지나왔습니까?

그럼 속죄 받은 자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범사에 감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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