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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1강.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 (히 1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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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2021. 7. 28.

 

 

61강.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 (히 12:18-29)

-.정낙원 목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고자 한 일이었습니다.

하늘에까지 닿고자 한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즉 죄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이 굳게 잠가 놓은 에덴동산의 문을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열고자 하는 교만과 같아요.

죄인의 교만이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까지 닿고자 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벨탑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신앙을 상징하고 있어요.

이런 사상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이런 인본주의 사상이 인류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어요.

 

이 사상이 예수님의 초림 때에는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나 자신들의 의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게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이는 사건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본주의 사상에 의하여 타살 당하였어요.

 

이러한 사상이 이 시대 교회 안에 교인들의 신앙에까지 그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열심이 믿음을 밀어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도 아무 스스럼없이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함의 여부로 믿음이 있다 없다 를 판단하고 있어요.

 

성경은 이런 사상을 악이라고 고발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히브리서도 이런 사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경고하는 말이 나오지요.

 

25절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치 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거역치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고 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히브리서를 쓰게 된 배경도 율법으로 의로워지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율법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배반이니”

“경고니”

“소멸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가요?

아들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흘러 듣는 자들을 심판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지요.

이는 고집이 세다는 말입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는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식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가 바벨탑을 쌓게 하였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고가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일을 단행하십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들고 나오지 못하게 막으세요.

너희들 예수의 피 말고 너희들 자랑 거리들을 들고 나오면 죽인다고 합니다.

이런 사고는 하나님 앞에 진멸 대상이라고 경고하고 있어요.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요.

구원은 인간의 열심과 상관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스스로 나올 수가 없으니 빠져 있는 겁니다.

스스로 나올 수 있었으면 빠져 있지 않지요.

그냥 나오면 되어요.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졌다고 하잖아요.

이는 독자적으로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나올 수가 있었으면 가두어져 있을 이유도 빠져 있을 이유도 없어요.

그냥 툭툭 털고 나오면 되니까요.

 

스스로 못 나오니까 구원이 필요한 겁니다.

구원은 독자적으로 나올 수 없는 자에게만 필요해요.

그러므로 죄에 빠져 있는 우리는 그냥 가만히 빠져 있으면 되어요.

그러면 밖에서 건져 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을 찾는 비유가 있지요.

잃은 양은 스스로 집으로 돌아갈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잃은 양이에요.

 

그냥 잃어버려진 대로 살고 있으면 목자가 찾아 가요.

목자가 찾아 줄 때까지 그냥 잃어버려진 대로 살고 있으면 되어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것을 모르고 있으니 잃은 양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구원을 위해선 인간 쪽에서 할 일이 전혀 없어요.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건 죄인이 아니에요.

죄인은 미안해 할 자격도 없어요.

그냥 뻔뻔스럽게 미안한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이 놈에 죄인의 자존심이 가만 두지를 않아요.

자꾸만 미안하지 않으려고 뭔가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단 말입니다.

자기 힘을 보태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 꼴랑 자존심이 구원을 받고도 가만있지를 못해요.

그냥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면 되는데 그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뭔가 꼼지락 거린단 말입니다.

열심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꼼지락 거려서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것에 흠을 가하게 한단 말이에요.

쥐뿔만큼 헌금하고 봉사하고선 나 예뻐 그런다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을 바탕으로 나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역설적으로 자기 백성들의 악함을 드러내고 불순종을 드러내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바벨탑을 허문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앞으로 너희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나에게 나오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벨탑 사고는 지금도 교회 안에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열심과 정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이라고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충성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신다는 말이 진리처럼 설교가 되어지고 있어요.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인간의 열심 때문에 망했어요.

항상 열심이 특심한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해 왔어요.

예수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특심한 자들이 죽였어요.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충성한다는 이름으로 말이에요.

 

인간들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스스로 왕이 되었어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다 하고자 합니다.

 

구원도 자기 힘으로 이루고자 하고!

천국도 자기 능력으로 가고자 하고!

축복도 자기 열심으로 따내고자 하고!

예수도 자기 열심으로 믿고자 해요.

 

무엇을 해도 자기가 하겠다고 나 대요.

주여! 나는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안 나오고!

주여!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목사들도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하라고 가르치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아요.

 

교회 안에서 적극적 사고가 설교가 되어진다는 것은 사단의 회(會)가 되었다는 증거에요.

사단은 항상 인간에게 적극성을 강조했어요.

열심히 하면 된다고 가르쳤어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사단의 미혹을 받은 목사들이 하나님도 충성하는 자에게 복(福)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열심으로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믿음을 열심과 충성과 봉사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라지고 인간들이 행한 일들이 좋은 신앙처럼 자랑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면 저급한 신앙으로 떨떠름하게 바라보아요.

 

분명히 성경엔 구원 받은 성도의 이마엔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했어요.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머릿속엔 온통 어린양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입만 열면 어린 양이 툭툭 터져 나와요.

즉 예수님만 자랑이 되어진단 말이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이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시온 산에 서 있는 성도에요.

 

천국백성들에겐 이런 사고가 있어야 해요.

머릿속에 어린양의 담겨져 있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천국엔 자기 공로가 있으면 못가요.

천국엔 오직 예수님의 공로가 있는 자가 가는 곳이에요.

 

천국엔 철저히 예수님의 공로만 인정해요.

예수님 이외의 공로는 모두가 진멸 대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공로 이외는 소지하지 못하도록 간섭하는 겁니다.

인간의 공로를 깨부수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자꾸만 낮추고 허물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넌 벌레야!

넌 쓰레기야!

넌 티끌이야!

넌 짜면 똥 밖에 안 나오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발 좀 풀썩 거리고 나대지 말라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너희들이 나대서 내게 도움이 된 적이 어디 있었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잘되고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선택을 입은 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 자녀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실 때 찾아온 마귀같이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초라하면 되느냐!

그러면 하나님은 망신시키는 일이니 영웅호걸이 되라고 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富)와 명예(名譽)를 얻는 삶에 올인 한 것입니다.

 

이건 이 시대 교인들의 사고와 일치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가난하면 죄라고 하잖아요.

교회마다 기복주의, 성공주의, 번영의 신학이 진리처럼 가르쳐지고 있잖아요.

그러니 교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혈안이 되어 설쳐 대는 것입니다.

 

야곱도 이런 사고로 삼촌을 속이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부(巨富)가 되었어요.

급기야 자기 뜻대로 성공을 했습니다.

이제 나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어요.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은 게 인간이에요.

사람은 성공하면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요.

그것도 자기를 무시하고 핍박한 자에게 말이에요.

복수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야곱도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쫓겨 나온 고향으로 이젠 거부(巨富)가 되어서 떵떵 거리면서 보란 듯이 귀향(歸鄕)을 합니다.

 

봐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이렇게 복(福)을 받고 잘 살게 된다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부(巨富)가 되어서 보무도 당당하게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런 사고가 하나님께 진멸당할 마귀의 사고인줄을 꿈에도 몰랐어요.

죄가 알려준 사고란 것을 몰랐어요.

 

하나님은 야곱의 이런 사고가 죄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얍복강에서 기다립니다.

인간의 힘으로 복(福)을 따내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적인 가치관이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아야 할 것이란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징벌 당할 것임을 알려 주고자 함입니다.

야곱의 이런 사고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징벌당하고 소멸 당하여야 할 사고에요.

 

우리 인간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도 자기 식으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청천병력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멸(燒滅)하는 불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에게 복(福)을 주시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건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달라요.

우린 교회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배워왔어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가르침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바울이에요.

그렇다면 바울은 한국교회에선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히브리서를 통해서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단이든지 한국교회가 이단이든지 둘 중 하나는 이단입니다.

서로가 말하는 하나님이 상반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려요.

 

신앙은 냉정한 겁니다.

인정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것이 아니에요.

진리의 문제는 부부간에나 부모 자식 간에도 일체의 양보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아요.

오로지 진리냐! 비 진리냐! 만 있어요.

 

신앙은 경계인을 허용하지 않아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가 없어요.

참 하나님이냐! 다른 하나님이냐! 만 있어요.

 

신앙은 하나님이 제시한 답을 갖고 있느냐의 정답의 문제이지 열심과 충성의 문제가 아니에요.

장로교냐! 감리교냐! 침례교냐! 교단의 교리 문제도 아니에요.

오로지 예수의 피 만이냐! 아니냐! 의 문제에요.

정답은 정상참작이 없어요.

 

베드로는 이 세상은 장차 불타기 위해서 보존이 되어 있다고 했어요.

히브리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애당초 이 세상을 멸망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건 인간 입장에선 납득이 가지 않아요.

아니! 멸망시킬 것을 뭣 하려고 만듭니까?

 

이 세상 속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죽이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아니! 만들지나 말지!

죽일 것을 왜? 만듭니까?

허물 것을 왜? 쌓습니까?

 

사실이 그렇잖아요.

인간들 입장에선 보면 불합리해요.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는 말이에요.

 

자식들을 키워보면 알잖아요.

자식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부모에게 이러려면 왜? 낳았느냐고 덤비잖아요.

누가 낳아 달라고 했느냐고 바락 바락 덤비잖아요.

간섭하면 왜? 날 낳아 가지고 달달 볶느냐고 항변하잖아요.

 

어째서 인간들은 이런 항변을 할까요?

이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밖에 몰라요.

 

내가 있고 부모도 있고!

내가 있고 자식도 있고!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어요.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어요.

 

자기가 신(神)이에요.

자기 이외 다른 신을 인정치 않아요.

자기가 왕(王)이에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중심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왜? 날 죽이는데!

하나님이면 다냐!

우린 이렇게 따져요.

 

이런 말을 하는 배경엔 나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내 존재가 바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가 몰고 온 사고입니다.

죄인은 항상 내 중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있어요.

 

죄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부정하게 합니다.

나 라는 존재를 독자적으로 보게 만들어요.

하나님과 나를 분리하여서 해석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에요.

이처럼 인간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내 마음대로 내 버려두라고 해요.

하나님도 내 삶에 개입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면 문을 걸어 잠그고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고 담을 쌓잖아요.

부모들이 공부하지 않으면 거지가 된다고 닦달을 하면 제발 내가 공부하지 않아서 거지가 되어도 좋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내가 거지가 되어 밥을 빌어먹든 말든!

동대문 시장에서 지게꾼으로 살든지 말든지 내 인생에 개입하지 말라고 덤비잖아요.

그럼 부모는 이놈에 새끼가 어디서 저 마음대로 살고자 하느냐고 초달을 합니다.

 

부모라면 이런 놈을 어떻게 가만 두겠어요.

두들겨 패야지요.

이런 놈을 가만히 두는 것은 부모가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은 동일해요.

왜? 그런가 하면 부모나 하나님은 창조주 입장에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자식은 부모의 피조물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피조물을 있게 한 주인으로서 관리감독을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율배반적으로 자기 자식은 자기 뜻대로 관리하고자 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께 관리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 제발 좀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세요! 라고 합니다.

날 좀 내 버려두세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 테니 좀 가만히 계시라고 악악댑니다.

그게 기도로 토해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모두가 우리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들이에요.

내 소원 들어달라는 것이 기도잖아요.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곧 왜? 안 해주느냐고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따지는 거예요.

말이 기도지 땡깡부리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모두가 아이들이 장난감 안 사준다고 앙앙대고 우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밥을 굶어 가면서 잠도 안자고 금식기도다! 아니면 철야기도를 하잖아요.

밤잠을 설쳐가면서 이래도 내 소원 안 들어 줄 겁니까? 라고 시위하잖아요.

목사들은 이걸 좋은 믿음이라고 부추기고 더 열심히 매달리고 기도하라고 하잖아요.

 

무식하면 용감해요.

무식한 놈이 하나님을 믿으면 이건 감당이 안 되어요.

이 시대 제일 무식한 자들이 목사들이에요.

그러니 난 하나님의 종이랍시고 세상에서 대접받고자 하지요.

 

이러면서도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도리어 댕댕거려요.

내가 뭘 어쨌길래 그러느냐고 게거품을 물고 덤벼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제자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라고 하지요.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있어야 할 줄을 먼저 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우리가 먹고 살 것을 미리 다 아신데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까 라는 것은 구할 것이 없겠지요.

아버지가 다 아시니까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걸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머리로는 그렇게 살아야지 해요.

그런데 한 사람도 그렇게 살아 내지를 못해요.

저 역시도 못 살아요.

 

자기 현실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을 못 믿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감사보다 불평이 나오는 겁니다.

눈만 뜨면 오늘보다 더 나아진 내일을 기대해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살 것을 구하고 고민해요.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매일매일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맨 날 다른 것을 달라고 징징 거리고 있어요.

내일엔 해가 뜨는 것은 알지만 내일에 만나가 내리는 것은 믿지 못해요.

 

그러니 하루치만 거두라고 해도 이틀 치씩 거두어서 보관하다가 다 썩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썩어서 버리더라도 내 손에 붙잡고 있어야 안심을 해요.

이게 인간이에요.

 

자기 목구멍 이길 장사는 아무도 없어요.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이 없다고 하듯이 힘들면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을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죄인의 한계에요.

죄인은 아무리 알려 주어도 안 되어요.

정답을 알려 주어도 정답대로 살 수가 없으니 죄인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낼 수가 있다면 예수님이 대신 죽을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한마디 하면 척 알아서 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천국에 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안 되어요.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안 된다니까요.

답을 훤히 아는데도 안 되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중풍병자라서 말을 들어 먹지 않아요.

 

이걸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가지 끌고 따라와!

그러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질질 끌려서 온 겁니다.

그 누구도 자발적으로 여기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저 역시 하나님께서 개 목줄 끌듯이 끌고 오지 않았다면 목사 되지 않았어요.

미쳤습니까?

동네북처럼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목사가 되게!

설령 목사가 되어서도 이런 목회는 안 해요.

번듯하게 큰 교회 꿰차고 호의호식하는 그런 목사가 되고 싶지!

이런 욕먹는 목사는 하기 싫어요.

 

그러니 전 일평생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팔자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항상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지 실상은 원망과 한숨이 토해져요.

 

상함 심령이 “오호라 주여!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내 안에서 여울처럼 가슴을 휘감고 돌고 돌아 후벼 파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나오는 겁니다.

 

내 속에 죄인의 본성은 나도 어쩌지 못해요.

그냥 원망과 불평이 불쑥 불쑥 튀어 나와요.

그러니 하나님이 죽이지 않고 베기겠습니까?

짐승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죄인이니까 죽여야지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소멸하는 하나님이세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안 들어주는 하나님이세요.

우리 뜻대로 구원해 가시지 않고 일방적으로 해 가세요.

 

오늘 본문에 보면 몇 가지 눈여겨 볼 말씀이 있어요.

 

먼저 하늘에 계신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진동치 못할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멸하는 불이 나옵니다.

 

먼저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부터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장자들의 총회를 시온산이라고도 하고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구약의 시내산과 같다고 합니다.

시내 산의 정경이 어땠습니까?

거룩치 못한 놈들은 얼씬치 못하는 무서운 곳입니다.

한마디로 죄인은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곳이에요.

 

시내산 산꼭대기에 불이 붙고 구름이 빽빽하고 깜깜하고 천둥번개가 치고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거기다가 어느 놈이고 올라오면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짐승도 얼씬거리면 죽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오금을 저렸어요.

 

얼마나 무서웠든지 모세도 두렵고 떨린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단호하고 두려웠는지 천둥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어제 밤에 천둥과 번개가 얼마나 심하게 치든지 소름이 돋더군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건 맛보기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그 땐 지축(地軸)이 흔들릴 정도로 무서웠지만!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은 땅이 흔들릴 정도가 아니라 하늘까지 흔들린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늘과 땅을 동시에 흔들어 버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놈은 아작을 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알아서 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의 피를 우습게 여기는 자는 전부 진멸대상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려서 다 무너져 내리듯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 이외는 모두가 무너져 내리고 불타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외엔 모두가 저주 받고 멸망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은 흔들려요.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모두가 흔들려요.

우린 이 세상에 속하였어요.

우린 땅이에요.

 

그러므로 나도 흔들리고 내 신앙도 흔들려요.

내게서 유출되는 것은 다 진동하여서 무너지고 떠나가요.

불에 타요.

 

그러니 흔들리는 인간의 행위를 붙잡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은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인간의 행함은 육신의 조건에 따라서 변하고 기분 따라서 흔들려요.

 

성경은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했어요.

부평초(浮萍草)처럼 이생의 자랑과 재리의 유혹과 육신의 쾌락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흔들려요.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진동되고 온전치 못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받지 않아요.

하나님이 받지 않으니 붙잡지 말라는 겁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듯이 다 떠내려 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를 믿을 것인가!

내 행함을 믿을 것인가!

두 싸움이에요.

 

믿음이란? 행함의 반대말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안 믿는다는 말이고!

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나를 안 믿는다는 것은 난 틀렸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자 합니까?

다 자기가 옳다고 하지!

항상 내 신앙은 맞다고 생각하잖아요.

 

다른 사람과 신앙적인 면에 충돌을 하면 모두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잖아요.

난 정통이고 넌 이단이라고 하잖아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깨닫는 것으로 판단해요.

저 역시도 내가 전하는 복음은 맞고 다른 사람이 전하는 것은 틀렸다고 해요.

 

그만큼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해요.

그러니 열 사람을 만나면 열 사람 다 신앙이 달라요.

믿음이 달라요.

 

그래서 다 짤라 내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결국 자기 혼자 남아 있어요.

나 자신도 흔들려서 어느 때 보면 저만치 가 있어요.

 

바울이 그러지요.

우리가 어린아이 때에는 어린아이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일을 버렸다고 하지요.

이는 우리가 깨닫는 것은 부분적이란 말입니다.

내가 지금 옳다고 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이므로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게 절대 진리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물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절대 진리에요.

그러나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데에는 어린 아이로서의 절대 진리일 수 있어요.

예수님처럼 온전한 자로서의 절대 진리는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도 지금 아는 것이 부분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전 지금 이렇게 깨닫습니다! 라고 하여야지!

난 맞고 너희는 다 틀렸다고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지식의 교만이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나요.

이는 예수님은 진동치 않는 나라에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온전한 지혜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고 하지요.

이는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천국엔 해와 달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변함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변하지 않는 천국에서 오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진리에요.

 

예수님이 진리이고!

예수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진리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믿는 믿음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내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은 자들이 모인 곳을 일컬어 하늘에 장자들이 모이는 총회라고 합니다.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진동치 못할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남기고 모두 진동시켜 무너뜨립니다.

예수님 이외는 모두 불 태워 버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외는 모두가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가만 두지 않고 다 불태워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겐 너희들은 흔들리지 않는 천국에 약속을 받은 자들이 아니냐!

너희는 진동치 못할 나라인 하늘에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할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거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뿌림 받은 자들이 모인 곳으로서 흔들림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진동치 않는다고 합니다.

 

천국엔 장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장자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신앙의 싸움은 장자권의 싸움이라고 하여서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놓고 벌린 사건을 살펴본 겁니다.

그냥 장자권이 아니라 하늘에 장자권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임을 살펴보았어요.

 

에서와 야곱을 통해서 저주 받은 자와 축복 받은 자가 어떻게 다른지!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을 사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야곱은 축복 받은 자의 모습이고,

에서는 저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두 사람은 예표(豫表)의 사람이에요.

 

그럼 야곱과 에서의 모습 속에서 천국 갈 자와 지옥에 갈 자의 삶이 담겨져 있겠지요.

이 세상엔 야곱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과 에서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요.

결국 세상엔 큰 틀로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는 겁니다.

야곱처럼 하늘로 가기 위하여 장자권을 쫓아서 산 사람과 에서처럼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늘은 생각하지 않고 산 사람이 있는 겁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야곱은 하늘을 위하여 땅에 것을 버렸고!

에서는 땅을 위하여 하늘에 것을 버렸어요.

팥죽은 땅에서 필요한 것이고!

장자권은 하늘에 필요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위하여 팥죽을 버렸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에서는 팥죽을 얻기 위해 장자권을 버렸다는 것은 땅에 가치관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하늘에 장자권은 아무런 소용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겁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신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삶을 통하여서 보여준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입니다.

하늘은 천국(天國)이고 땅은 지옥(地獄)입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은 천국을 위하여 살았고 에서는 지옥을 위해서 산 것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모습이 그가 가야할 곳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선 천국에 보낼 사람은 야곱처럼 다루어 가실 것이고!

지옥에 보낼 사람은 에서처럼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삶을 추적하면 극과 극으로 달라요.

 

야곱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떠나는 삶을 살았고!

에서는 이 세상을 정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성공한 삶을 살았어요.

 

우린 모두가 에서 같은 삶을 원해요.

머리로는 야곱같이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에서의 길을 걷고 있어요.

자식을 키워도 에서가 되라고 하지 야곱이 되라고 하지 않아요.

 

모든 부모는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가르치지 실패하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자식들에게 교회 안와도 좋으니 좋은 대학만 들어가라고 하잖아요.

학원에 안가면 기겁을 하면서도 교회에 안 오면 기겁하지 않잖아요.

 

이게 모두가 우리의 신앙이 관념이라는 반증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위해서는 죽기 살기로 살지만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 살기로 하지 않잖아요.

그게 자식들에게 그대로 반영이 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보면 에서는 영웅호걸이에요.

반면에 야곱은 실패한 자에요.

그러니 우리는 늘 불평인 겁니다.

에서처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계로 야곱을 다스리는 겁니다.

야곱은 곧 구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니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께 얻어터지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처럼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입술에선 늘 원망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야곱은 장자권을 얻고자 팥죽을 포기할 수가 있었으며 에서는 왜? 장자권을 소홀이 여겼을까요?

여기에 믿음이 개입을 한 겁니다.

믿음이 야곱을 끌고 다닌 겁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이 장자권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팥죽을 주고서 장자권을 얻었어요.

반면에 에서는 믿음이 없어서 장자권을 우습게 여기고 팥죽에 장자권을 팔았어요.

성경은 에서같이 먹고 살기 위해서 장자권을 버리는 것을 망령된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경홀히 여긴 에서는 저주를 받았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건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 전에 야곱은 천국에 가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지옥에 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 판단이 되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일방적인 선택으로 되어져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일은 즉흥적으로 일하지 않고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미리 정해 놓은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합니다.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비교하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적용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러면 인간 쪽에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이걸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하나님의 처사에 반발하는 것은 불신앙이구요.

 

그러니 야곱과 에서는 자신들의 잘잘못으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간 것이 아니에요.

이미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 것을 이 땅에서 보여준 것뿐입니다.

마치 영화배우가 영화에 캐스팅 되어서 자기 배역을 연기한 것과 같아요.

 

여기에 순응하는 자는 천국 가는 성도이고 반발하는 자가 지옥 가는 불신자에요.

성도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반면에, 지옥 가는 사람은 내가 왜? 이래야 합니까? 라고 항변을 합니다.

그래서 천국백성은 순종의 자식이라고 하고, 지옥백성은 불순종의 자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불손종합니까?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니 왜? 라고 반발하는 겁니다.

이는 자기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에요.

 

우리 생각엔 하나님께서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로 정해 놓았다고 하면 인간들이 기뻐할 줄 알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기회를 달라고 해요.

인간의 자율성을 왜? 무시하느냐고 항의 하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죄로 인하여 온 자기 주권 찾기에서 나타나는 반항심이에요.

 

자기가 왜? 창조가 되었는지 모르는 것이 죄에요.

그러니 지옥 가는 사람은 일평생 하나님께 악악대다가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내가 왜? 지옥가야 하는데! 라고 앙앙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엔 장자들이 모인 곳이라고 하지요.

천국엔 장자만 가요.

차자는 못가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장자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장자를 만들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갑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어 날 때는 에서가 천국 가는 장자로 태어나고 야곱은 지옥 가는 차자로 태어났어요.

 

이러면 에서가 천국에 가고 야곱은 지옥에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엔 장자가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순리대로라면 에서는 천국에 가야하고 야곱은 지옥에 가야만 해요.

이게 법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약속을 했어요.

장자로 태어난 에서는 지옥으로 가고 차자로 태어난 야곱이 천국에 가기로 약속 했어요.

이는 인간의 순리로 천국 가는 것을 막아 버리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순리로 천국 가는 길을 허용하면 인간의 방식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있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면 천국은 하나님의 장자가 모인 곳이 아니고 인간의 혈통적인 장자들이 모인 곳이 되고 말아요.

그럼 천국에서 인간 자랑이 난무하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장자를 천국으로 보내되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장자만 천국에 가도록 하셨어요.

이 일을 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위해서 오셨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장자가 만들어져요.

 

이일을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어떻게 하늘에 장자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여 주셨어요.

 

창세기 27장을 봅시다.

 

창 27:11-29=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14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15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17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장자를 축복하려고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이러면 장자의 축복과 별미는 어떤 연관 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별미를 근거로 축복을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비록 장자이지만 별미가 없으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삭은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서 장자의 축복을 받으라고 기별을 한 겁니다.

 

이 이야기를 리브가가 들었어요.

알다시피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를 잉태 하였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요.

장자가 차자가 되고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삭을 몰랐지만 리브가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삭이 장자인 에서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하고자 합니다.

이건 리브가가 받은 약속이 아니에요.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하여 야곱을 장자 만들기로 작정을 합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알아요.

이삭의 식성을 누구보다도 리브가가 잘 알아요.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받은 것은 그냥 받은 것이 아니고 리브가가 주도면밀하게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주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되면 리브가는 신약적인 의미에서 성령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별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별미는 예수님이세요.

 

히브리서 기자가 그러지요.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고 오직 한 몸을 기뻐하신다고!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옵소서!

여기 두루마리에 적힌 한 몸으로 자신이 왔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별미는 예수님이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수라는 별미를 들고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라는 별미를 들고 장자권의 축복을 받도록 하세요.

리브가는 성령의 모형이고 야곱은 우리 성도의 모형인 겁니다.

 

암튼 리브가는 장자의 축복을 받는 비밀을 안 겁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히고 야곱의 매끈매끈한 곳을 염소 털로 가려 줍니다.

리브기는 야곱을 에서로 둔갑 시켜서 들여보냈어요.

 

야곱이 리브가의 이런 행동이 불안해서 엄마 나는 매끈 매끈 한 사람인데 이러다가 아버지에게 들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으면 어쩌느냐고 불안해합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그 저주는 자기가 받을 테니 염려하지 말고 자기가 해 준대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아버지는 너를 축복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리브가는 장자권의 축복의 통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중요한 것은 리브가는 야곱에게 아버지에게 나아갈 때에 야곱으로 나아가지 말고 에서로 나아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도 아버지에게 나아갈 때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아간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장자에게만 축복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차자를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장자를 축복했어요.

그래서 야곱이 입고 간 에서의 옷에 향취를 맡고 축복을 한 겁니다.

 

에서의 옷이란? 장자의 옷이에요.

이삭은 야곱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야! 너 음성은 야곱인데!

손을 보니 에서로구나! 라고 했던 겁니다.

이는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온 몸을 장자인 에서의 것으로 가렸어요.

 

이삭은 야곱이 에서의 것으로 가렸기 때문에 축복한 겁니다.

야곱이 입고 온 옷이 장자인 에서의 옷이기 때문에 축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은 순리대로 장자를 축복한 셈입니다.

야곱이 장자가 된 바탕엔 아버지가 특별히 좋아하는 별미와 장자의 옷이 있었어요.

 

이걸 하나님께서 성도를 축복한 사건으로 이해해 보세요.

우린 야곱처럼 빤질빤질 거리는 저주 받을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성령께서 하나님의 장자인 예수님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피를 들고 나아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 갈 때도 우리 이름으로 나아가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예수님을 보시고 하늘에 장자들이 모이는 총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줄 알아요.

하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예수님을 보시고 축복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축복한 것이지 우리를 축복한 것이 아니에요.

이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을 하셨어요.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구원하신 겁니다.

예수님을 구원하고 보니 그 속에 고기 알처럼 자기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널 때 모세에게 속하여서 건넌 것과 같아요.

모세에게 속하였다는 말은 모세 속에 집어 놓고 건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만 구원했는데 그 속에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었던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 속에 구약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듯이!

 

예수님 속에 신약의 성도가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 하고만 상대를 하시는 겁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해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처럼 사기꾼이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고 기독교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피를 뒤집어쓰지 않은 놈들은 다 불태운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꼬라지 때문에 희비 할 것이 없어요.

어차피 하나님은 우리 꼬라지를 보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만 상대해요.

장자하고만 상대해요.

하나님의 장자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하늘에 장자들이 모이는 총회엔 예수의 피를 뿌림 받은 자들만 모이는 것입니다.

장자권은 오늘 본문을 보니 천국에 가는 티켓이었던 겁니다.

천국에 누가 모인다고 했나요?

장자들이 모인다고 했잖아요.

 

누가 장자라고요?

예수의 피를 뿌림 받은 자들이 장자라고 했어요.

성도는 다 장자에요.

 

그래서 예수를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의 피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를 거역한 자는 모두가 불태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게 뭡니까?

율법이 아니고 예수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으니 율법 신앙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인간의 행함으로 나오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피를 의지하지 않는 자는 다 불태워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예수의 피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마귀는 있었어요.

마귀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별미가 예수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인간들에게 예수라는 별미를 들고 가지 말고 인간이 만든 별미를 가지고 가라고 미혹을 해요.

에서처럼 자기가 별미를 만들어서 나아가라고 해요.

인간이 만든 별미란 자기 행함이에요.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별미는 예수라는 것을 알려 주어요.

신앙의 싸움은 행함이냐 믿음이냐 에요.

누구의 것을 들고 나아가느냐의 싸움이에요.

 

예수의 피로 나아가는 자는 멸망치 않고 인간의 행함으로 나아오는 자는 다 망해요.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에서 이 사실을 알려 주셨어요.

 

마태복음 7장입니다.

 

마 7:21-27=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결론은 심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새 언약의 말씀이에요.

새 언약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면서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재해석을 해 주고 계신 겁니다.

 

옛 언약에선 살인하지 않았으면 살인자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나는 너희 속에 미움만 있어도 살인자로 보겠다고 하십니다.

옛 언약에선 여자와 실제로 간음하지 않으면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보지만, 나는 너희 속에 음욕만 있어도 간음한 자로 보겠다고 하십니다.

 

미움이니 음욕은 본능적인 겁니다.

그렇다면 너흰 살인자이고 간음자란 말입니다.

살인을 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이미 너희는 살인자이고!

간음을 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이미 너희는 간음한 자라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리신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죄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옛 언약은 껍데기를 가지고 판단했지만 나는 속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보고 판단하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병원에서 M. R. I 로 너희들 속을 들여다보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겉으로 난 죄 안 지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란 말입니다.

너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계신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간을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 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이 뭘 지키고 한 것으로 나아오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 짓는 비유로 말씀하신 겁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집을 짓는데 두 부류가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모래와 반석을 집 터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집이냐를 보지 않고 어디에 지었느냐를 보시겠답니다.

터를 보고 심판 하겠다는 겁니다.

터란? 근본입니다.

바탕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홍수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져 내리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터를 의인화 하여서 살펴보면 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는 누구입니까? 로 해석을 하면 터가 누구인지 대번에 드러납니다.

 

바울은 터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그들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럼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은 누구를 믿었습니까?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가 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홍수에 집이 무너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이길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반석 위에 집은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반대로 모래 위는 인간의 행함을 말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은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지금 열심히 특심하다고 하여도 언제 변할지 몰라요.

지금은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하지만 금새 주를 부인하고 저주 할 수가 있어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의지조차도 자기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죄인은 마귀가 밀 까부리듯이 갖고 놀아요.

 

그러므로 인간의 열심과 행함을 의지하는 신앙은 다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겁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 밖에 없어요.

믿음도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어야 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만이 산상보훈 식으로 말하면 홍수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만이 진동치 못할 나라란 말입니다.

예수의 피를 믿는 자만이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는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합니까?

진동할 나라가 있고 진동치 못할 나라가 있다고 했지요.

진동할 나라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진동치 못할 나라는 반석 위에 지은 집입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거긴 하나님의 장자들이 모이는 총회라고 합니다.

그 총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뿌림을 받았어요.

 

그렇다면 터가 무엇인지 드러났지요.

터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믿음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석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하고, 모래는 인간의 행함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예수님의 피를 우습게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화가 날 때가 상대방이 나의 말을 무시할 때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남을 무시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거절당하면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화를 낼 때가 언제입니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입니다.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 말이 말 같지 않느냐고 화를 내잖아요.

 

가정에선 옳고 그르냐 보다 가장(家長)의 말이 자식들에게 서느냐 마느냐가 중요해요.

말이 무너지면 다 무너져요.

한 가정에서 가장의 말이 서지 않으면 그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 되에요.

그런 가정은 망하는 겁니다.

 

죄는 항상 불순종으로 나타나요.

 

아담에게 있어서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죄인이 된 것은 선악과를 따 먹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들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을 순종과 동일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거역하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듣고자 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신앙 있음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고 신앙 없음을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처럼 말씀의 끈에 매여져 있어요.

 

만물(萬物)이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지요.

이는 만물을 붙잡고 있는 것이 말씀이란 말입니다.

만물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겁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창세기 1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명령하잖아요.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들아 땅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니 비추고 있는 겁니다.

육축과 새와 고기들과 식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니 살고 있는 겁니다.

바다에게 육지의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니 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도 하나님께서 명령하니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순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말은 안 들어요.

만물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기가 왕이 되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소멸하는 불로 나타나신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소멸 당할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도 다 소멸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함은 하나님 앞에 무가치 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의(義)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쓰레기에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고백이 뭡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의(義)라고 여겨온 율법 지킴이 배설물이라고 했잖아요.

그토록 입만 열면 자랑하던 말씀대로 살았던 것이 쓰레기였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을 불로 태워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면 소멸 당하게 되어요.

 

말씀을 벗어나면 끈 떨어진 연처럼 죽음이에요.

포도나무 비유에서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농부가 그 가지를 불태운다고 하지요.

유다서에선 마치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진 것처럼 말씀에서 떨어진 자를 일컬어 캄캄한 가운데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어요.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지옥을 게헨나 라고 합니다.

이는 쓰레기를 태우는 골짜기란 말이에요.

우상숭배자들을 묻어 버리는 힌놈의 골짜기를 지옥으로 상징하고 있어요.

 

장차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태웁니다.

이는 이 세상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떨어진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처음 시작을 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워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니고서는 죄를 정결함을 받을 길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아들의 피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들에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26-32=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보세요.

여기서도 소멸하는 불이 나오지요.

누구를 소멸한다고 합니까?

아들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자라고 하지요.

 

구약에 보면 아들을 섬긴 자는 불 속에서도 살아났고 아들을 섬기지 않은 자는 불에 타 죽었어요.

 

느브갓네살이 금 신상에 절을 하라고 하지요.

이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거부하잖아요.

그러자 이 셋을 풀무불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서 살아났어요.

반면에 이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넣던 사람은 불에 타 죽었어요.

어째서 불에 집어넣는 사람은 타 죽고 정작 불속에 집어넣은바 된 세 사람을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났습니까?

이는 세 친구는 불에 소멸 당하지 않는 분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이 소멸치 않는 분이 감싸고 있었어요.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神)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神)이 바로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신(神)이에요.

예수님이세요.

불 속에 들어가니 예수님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로 금 신상에 절을 한 놈은 풀무불 입구에서 타 죽었어요.

이는 금 신상에 절하는 신앙은 불에 타 죽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앙은 다 불에 타요.

홍수에 엄몰이 되어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홍수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고!

소멸하는 불 속에서도 살아남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피가 마치 불에 타지 않는 방화복처럼 성도를 감싸고 있는 겁니다.

불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시다.

그럼 예수의 피가 죽음이 접근하지 못하게 감싸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 장자가 죽는 재앙 속에서 살아나게 한 유월절 어린 양의 피처럼 예수님의 피가 성도를 감싸고 있는 겁니다.

불에 타지 않는 신앙은 오직 예수님 피 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그러잖아요.

예수님의 피를 바른 자들은 불 타지 않는 나라에서 산다고 하잖아요.

하늘에 장자들이 있는 곳은 마치 시내산 꼭대기와 같아요.

 

불이 산 위와 산 아래를 경계하고 있어요.

시내산 꼭대기는 산 아래서 보면 불길 속에 휩싸여 있는 듯 보이지만, 산 위에서 보면 도리어 산 아래가 화염에 휩싸여서 타고 있어요.

 

시내산 꼭대기에 있던 모세는 불길을 뚫고 넘나드는데,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은 산 근처에 얼씬도 못해요.얼씬 했다간 다 타 죽어요.

왜? 시내산 위에는 불에 타지 않고 시내산 아랜 불에 탑니까?

이는 시내산 위엔 말씀이 있는 곳이고 산 아래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말씀에 칭칭 감겨서 불길을 뚫고 다닌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말씀에 칭칭 감긴 사람은 소멸하는 불길을 뚫고 다녀요.

죽음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죽음 너머에 있는 자들이에요.

이건 마치 풀무불 속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아요.

풀무불 속에서 이 쪽을 보면 이 쪽이 불 바다이고, 풀무불 바깥에서 세 친구가 들어가 있는 풀무불 속을 보면 거기가 불 바다에요.

그런데 풀무불 속에 있다고 생각한 세 친구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는데, 불 바깥에 있다고 하는 자는 몽땅 타 죽었어요.

 

이게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는 세상 쪽에서 보면 죽음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너머 동네에서 보면 이 세상이 죽음이에요.

십자가 너머는 불이 타지 않는 동네에요.

 

바울이 이 동네에서 살았어요.

물론 우리도 이 동네에서 살고 있구요.

성도는 세상 쪽에서 보면 망하고 실패한 인생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너머 동네에서 보면 성공한 인생이에요.

십자가 이 쪽에서 보면 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십자가 저쪽에서 보면 흥한 것으로 보여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에선 성공했어요.

 

예수 믿는 성도는 세상에서 보면 죽은 자처럼 보여요.

실패한 자들처럼 볼품이 없어요.

세상 적으로 매력이 없어요.

흠모 할 만한 것이 없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이 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욕먹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가짜들은 온갖 영광을 다 누리고 산다고 하잖아요.

 

어느 시대고 진짜로 예수 믿는 사람은 만물의 찌끼 같고 사람들의 구경거리처럼 보여요.

그러니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하는 겁니다.

마치 미친 여자를 동네 꼬마들이 쫓아다니면서 놀리고 때리고 돌을 던지고 하듯이 온갖 조롱을 다 당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피 속에만 의(義)가 있다고 하면 미친 여자 취급을 당해요.

인간의 행함에도 의(義)가 있다고 말해야 좋아라 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의 피를 버리는 겁니다.

예수의 피 대신에 인간의 행함이라는 자랑거리들을 붙잡는 겁니다.

 

마귀는 인간의 행함으로 신앙을 지켜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늘 자신을 갈고 닦으라고 해요.

너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분발을 촉구해요.

인간의 종교성으로 예수의 피를 가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경고하는 겁니다.

두고 봐라!

내가 인간의 종교성으로 신앙을 붙잡고 있는 자들은 다 불태워 버릴 것이다!

예수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자는 원수로 여겨서 다 불 태워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예수의 피입니까?

자기 행함입니까?

진정으로 예수의 피로서 사단의 참소를 이기고 삽니까?

그 어떤 참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까?

 

자기 꼬라지로 흔들린다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피를 믿지 않고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 안은 내가 없어요.

나를 감싸고 있는 예수만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진동치 않아요.

 

부디 진동치 못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동치 않는 나라에 우리를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으니 그 어떤 마귀의 참소로부터 흔들리지 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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