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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0강. 얍복강을 건너온 자들의 삶 (창 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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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7. 29.

 

 

60강. 얍복강을 건너온 자들의 삶 (창 33:1-20)

-.정낙원 목사

 

 

 

오늘은 얍복강을 건너온 자들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시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것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야곱이 달라졌다기보다는 하나님이 달리 간섭을 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얍복강 이전의 야곱은 높은 자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얍복강 이후 야곱은 낮은 자로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장자는 이런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다메섹 이전의 사울과 다메섹 이후의 바울의 삶과 같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람과 예수를 만나고 난 후의 사람의 삶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위에 것을 바라보고 살라고 합니다.

이제는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나라 사람이니 하늘나라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도 두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공생애 이전과 공생애 이후의 삶은 다릅니다.

공생애 이전에는 목수로서 살았고,

공생애 이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이를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는 야곱의 얍복강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물 세례와 성령 세례 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 세례는 땅의 사람인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고,

성령 세례는 하늘의 사람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물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부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길을 두 세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다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난 것을 우리 성도들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구약 마당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구원하는 사건 속에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적인 사건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속에 우리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사건 속에 내가 그 현장에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얍복강을 건너온 야곱의 모습입니다.

얍복강을 건너기 전의 야곱과 건넌 후의 야곱을 다른 사람입니다.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야곱이었지만, 얍복강을 건넌 후에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약탈자라는 뜻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자기 안에 우상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인생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을 바꾸어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뀐 인생으로 살도록 간섭을 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 주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야곱의 아버지가 되어서 간섭을 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얍복강을 건너고 난후부터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철저하게 부셔져 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야곱 속에 탐심이 뽑혀져 나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얍복강을 건너 온 야곱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를 살펴봅시다.

야곱은 엄마뱃속에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당하였습니다.

이 말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야곱의 운명은 결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운명대로 간섭을 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우리도 창세전에 이미 결정이 되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언약을 품고서 말이에요.

이걸 예정이라고 합니다.



예정이란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하나님께서 “난 이런 식으로 일을 할거야!” 라는 자기 선포입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난 야곱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에 일방적으로 야곱은 장자로 삼고, 에서는 차자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그 반대로 태어났습니다.

에서가 장자로 태어나고, 야곱이 차자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장자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가 먼저 나가려고 하자 발꿈치를 붙잡고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토록 장자의 욕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태어나서도 장자에 대한 욕심은 가득했어요.

그래서 호시탐탐 형의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급기야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형으로부터는 장자권은 샀지만 아버지로부터 추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에서의 옷을 입고 나아가서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는데 성공을 합니다.

이건 야곱의 본성이에요.



사람마다 다 타고난 본성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야곱 속에 장자의 본성을 심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본능적으로 장자가 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팥죽으로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에서에게 심겨진 본성은 차자의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장자권을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경홀히 여겼다는 것은 장자를 우습게 여기고 장자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의 이런 행동을 망령된 것이라고 하였어요.



야곱과 에서의 이러한 모습 속에는 그들의 삶에 가치가 담겨져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가치를 위하여 살았고,

에서는 떡을 위한 가치로 살았습니다.



구약의 장자권은 신약의 구원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구원을 위한 삶을 살았고,

에서는 구원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천국을 소망하고 살았고,

에서는 이 땅을 위하여 산 것입니다.



왜 구원을 장자권으로 말하는가요?

이는 야곱이 장자가 되는 과정이 바로 성도가 구원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모습 속에 성도가 구원 받는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는 데에는 어머니 리브가가 다 했어요.

야곱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이삭은 나이가 많아서 장자에게 집안을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불러서 장자권 위임식을 하겠다고 통고를 합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어머니 리브가가 들었어요.

알다시피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잉태하였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야곱은 장자이고 에서는 차자라는 것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라면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벌린 것입니다.

그것이 별미 사건이에요.



리브가는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아버지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에게 당부하기를 절대로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에서 라고 하라고 합니다.

너는 지금 형 에서의 옷을 입고 나아가기 때문에 야곱이 아니고 에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나아갈 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면서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이 귀를 쫑긋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소리는 야곱인데 에서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야곱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면서 야곱이 입고 온 옷의 냄새를 맡아 보는 것입니다.

에서의 옷인 겁니다.

그래서 장자의 축복을 합니다.



이삭은 야곱이라는 것을 다 알았어요.

그럼에도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은 야곱이 입고 온 옷이 장자의 옷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장자의 옷을 보고 축복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은 장자의 옷을 입은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같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구원을 하십니다.

그 옷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옷을 입혀 주셨어요.



이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 뿌린 옷이라고 합니다.

옷이란 의에요.

어린 양이 죽음으로서 주어진 의를 말합니다.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장자를 구원 하세요.

그 장자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누구든지 장자의 옷을 입고 있으면 구원을 받아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 주었어요.

하나님은 죄인을 축복하지 않아요.

죄인은 복을 받을 자가 아니고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우린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입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입혀 주셨어요.

마치 리브가가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 주었듯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혀 주었어요.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벗어준 옷을 입혀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의미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 죄가 사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자를 구원 하세요.

그 장자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 한 분만 구원하시면 돼요,

예수님이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생소 하지요?



육체로 오신 예수님도 구원을 받아야 해요.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의 구원과 달라요.

예수님의 구원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십자가를 앞두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기도한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낳아진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수많은 죄인이 태어났듯이,

예수님 안에서 수많은 의인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아버지의 아들들을 낳는 영광된 일이므로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로 돌아간다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요 17:4-5=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예수님 한 분을 구원했어요.

예수 안에 누가 있느냐? 자기 백성들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개별적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몸에 속한 자로 구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신부라고 해요.

신랑과 신부는 한 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신부들에게 자기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 양의 피 뿌림의 옷인 것입니다.

피는 신랑이신 어린 양의 흘렸는데, 그 혜택을 신부들이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어린 양과 신부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들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시온산에 144000명이 서 있습니다.

144000명은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을 상징해요.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는 전부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도장이 찍혀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구원을 한 신부들에게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

“이건 내 꺼” 라고 하면서 어린 양의 도장을 꽝꽝 찍어 놓은 것입니다.

그 누구도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이 새겨진 것을 인 쳤다고 합니다.

왜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찍혀져 있는가요?

이는 예수님은 이 땅에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구원하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택정한 사람만 구원을 하세요.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은 자를 예수님이 찾아가서 구원을 해 내시는 것입니다.

이를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 롭게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미리 아신 자를 예수님이 찾아가서 부르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님이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세요.

그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끝까지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의 이마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함께 찍혀 있는 것입니다.



누가 도장을 찍었나요?

예수님께서 찍었어요.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어린 양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우리의 구원을 아버지와 어린 양이 끝까지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찍힌 자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아요.



그 어떤 것으로도 취소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그 구원은 어린 양이 끝까지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위로 주어졌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잘려나가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 이마에 도장을 찍었을까요?

머리는 사상과 이념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에요.

이마에 어린 양의 도장이 찍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머리 속에는 어린 양의 것으로 가득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늘에 속한 자를 성도라 하고 땅에 속한 자를 짐승이라고 해요.

하늘에 속한 자는 어린 양이 도장을 찍어 놓았고,

땅에 속한 자는 마귀가 도장을 찍어 놓았어요.

땅에 속한 자의 이마에는 뱀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러므로 땅에 속한 자들은 뱀처럼 흙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가 떡이에요.

에서가 장자권을 버리고 산 팥죽이에요.



흙이란? 이 세상을 말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인 것입니다.

에서가 바로 땅에 속한 자에요.

그래서 에서는 장자권을 떡과 맞바꿔 버리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는 서로의 먹거리가 달라요.

하늘에 속한 자의 먹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땅에 속한 자들이 먹거리는 떡이에요.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구하고,

땅에 속한 자들은 땅에서 나는 것을 구하고 살아요.

진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은 하늘을 지향하고 살아가요.



사도바울이 말하잖아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는 자동적으로 위를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집이 위에 있으니까 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출장을 왔어요.

일이 다 끝이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퇴근해야 해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이 세상에 출장 와서 아버지 뜻을 다 행하고 원래 있던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죽음으로 이 세상을 퇴근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처럼 퇴근해야 합니다.



천국을 보세요,

일찍 죽임을 당한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하잖아요.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다 죽임을 당했어요.

죽음으로 퇴근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존귀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퇴근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어요.

그러니 일을 벌리려고 하지 말고 마무리 하도록 하세요.

세상에 미련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위에 것을 찾게 하세요.



성령은 큐피트의 화살과 같아요.

큐피트의 화살을 맞으면 화살을 쏜 사람에게 대하여 사랑의 감정이 생기잖아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잖아요.

본능적으로 막 쫒아가요.

오매물방하며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성령이라는 큐피트의 화살을 쏘았어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살을 맞은 사람은 하늘로 향하고자 하는 지향성이 나타나고,

화살을 맞지 않은 사람은 안 나타나요.

화살을 맞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에서처럼 떡을 찾아요.



사랑은 강요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본능 속으로 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라는 화살을 맞은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을 해 보세요.

온통 머리 속에는 그 사람뿐이잖아요.

그 사람이 삶에 의미에요.

그 사람에 의하여 희노애락을 해요.



그 사람이 나를 조정해요.

나 보다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조정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으로도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천상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사랑해 보세요.

미치도록 보고 싶고 미치도록 그리워지잖아요.

늘 함께 있고 싶잖아요.

그게 사랑이에요.



아가서를 보세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그리워하지요.

미치도록 그리워하지요.

술람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솔로몬 뿐이에요.

왜냐하면 술람미는 솔로몬이 쏜 사랑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쏜 화살은 고래 등에 박힌 작살처럼 솔로몬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술람미와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더러 사랑을 만들어 내라는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내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지 않아요.

먼저 주시고 달라고 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큐피트의 화살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화살을 맞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장자의 복이 그런 겁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사모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경홀히 여긴 것은 장자의 복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이 각자 그 속에 심어 놓은 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하늘나라 장자로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보세요.



아주 역설적입니다.

야곱이 생각했던 장자가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복을 받고 난 후에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건 야곱이 그리는 그림이 아니에요.



야곱이 그린 그림은 장자가 되면 아버지 집에서 오손도선 잘 사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돌아온 것은 정반대입니다.

야곱이 집에서 쫓겨난 후에 야곱의 동선을 쭉 살펴보세요.

그럼 하나님께서 하늘의 장자를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유숙을 합니다.

그러자 그날 밤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찾아 오셔서 하는 말씀이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동행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란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외삼촌을 만나고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2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얻게 됩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오게 된 것은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에서가 이방여자와 결혼을 하니까 이게 근심거리였어요.

알다시피 이삭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이에요.

언약 가문의 장자라고 한다면 언약의 후손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방 여자인 헷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어요.

이게 이삭과 리브가에게 고민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어요.

그러자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으로 보내서 어머니의 친족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하란으로 보낸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그림은 집에서 쫓겨나서 하란으로 도망가는 모습이지만 실상은 쫓겨 가는 것이 아니고 아내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쫓겨나자 언약의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만약에 에서가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으면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 에서는 왜 부모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서 부모의 원성을 사게 하였을까요?

이는 에서의 본질이 언약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비 언약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비 언약에 속한 여자를 사랑하고 아내를 맞이한 것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서는 이방 여인을 좋아 한 것은 에서가 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를 들사람이라고 하면서 사냥꾼이라고 하는 것도 에서의 기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의 간섭에서 떠나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의 자식을 뜻합니다.



반면에 야곱은 부모를 떠나지 않았어요.

마마보이처럼 살았어요.

이는 부모의 간섭 하에서 살아가는 순종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말을 듣고 하란으로 가서 아내를 얻고자 종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두 아내와 12 아들들을 얻게 됩니다.

이게 이스라엘 민족이 됩니다.



야곱은 아내를 얻는 것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얻었어요.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인 라헬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외삼촌에게 라헬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그냥 줄 수는 없으니까 결혼 지참금으로 7년 종살이를 하라고 합니다.

이에 야곱이 응하여 계약을 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7년 종살이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라헬과 결혼을 하는 날입니다.

잔치를 마치고 잠자리를 합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까 라헬이 아니고 언니인 레아인 것입니다.

야곱이 놀라서 라반에게 따집니다.

나는 라헬과 결혼을 원했지 레아가 아니라고 항의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야곱에게 이 동네의 풍습은 동생이 언니 먼저 시집을 가는 법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에게 일주일 후에 라헬도 줄 테니까 다시 7년을 종살이 하라고 합니다.

이에 야곱이 동의하고 7일 후에 라헬도 아내를 얻고 난 후에 7년을 다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야곱이 두 아내를 얻는 과정을 보면 두 가지 언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언약이 있습니다.



먼저는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고,

나중은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입니다.

이를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인 하갈과 사라를 두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은 종을 낳았고,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를 레아와 라헬에게 적용하면 레아는 하갈을 상징하고, 사라는 라헬을 상징합니다.

레아가 낳은 아들은 육신의 자녀를 상징하고,

라헬이 낳은 아들은 약속으로 낳은 자녀를 상징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으로서 죄 아래 가두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죄에서 해방시켜주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언약은 새 언약이에요.

그런데 창세전이라는 하늘나라 풍습에는 새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은혜가 나중에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나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반이 그 동네의 풍습을 들어서 언니인 레아를 야곱에게 먼저 주고 동생인 라헬을 나중에 주는 것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언니인 레아는 옛 언약을 상징하고,

동생인 라헬은 새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렇게 진행이 되어져요.



야곱의 두 아내를 우리의 두 사람으로 이해해 보세요.

우리도 옛 사람이 먼저이고, 새 사람이 나중인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난 옛 사람은 종이고,

은혜 안에서 난 새 사람은 아들이에요.

첫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은 죽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새 사람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언약인 율법아래 있을 때에는 종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 온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이 됩니다.

새 사람이지만 여전히 죄와 싸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죄 아래서 살지만 정죄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야곱이 라헬을 얻고 난 후에 7년 종살이를 하는 것과 같아요.



야곱의 두 번 종살이를 보면 처음 7년 종살이 한 것은 아내를 얻고자 하였어요.

그러나 두 번째 7년 종살이는 아내를 얻고 난 후에 합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이스라엘의 차이입니다.

구약은 구원 해 주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신약은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살아갑니다.



아내를 얻기 위한 종살이와,

아내를 얻고 난 후 종살이와 어느 것이 좋을까요?

그야 당연히 아내를 얻고 난 후입니다.

구약은 아내를 얻기 위한 7년 종살이와 같고,

신약은 아내를 얻고 난 후 7년 종살이 하는 것과 같아요.

아내를 얻고 난 후에 하는 종살이는 기쁨이지만,

아내를 얻고자 하는 종살이는 수고와 슬픔이에요.



이걸 우리의 신앙생활에 비유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아내를 얻고자 수고와 슬픔으로 구약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내를 얻고 난 후에 기쁨과 감사로 하는 신약식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신앙생활이 법이고 억지이면 구약 사람이고,

신앙생활이 기쁨이고 감사이면 신약 사람인 것입니다.



스스로의 신앙생활을 확인해 보세요.

나는 지금 아내를 얻고자 하는 교회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이미 얻고 난 후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신앙생활이 힘이 드는가요?

그럼 구원 받지 못한 종으로서 구약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기쁜가요?

그럼 구원을 받은 아들로서 신약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야곱은 라헬을 얻고 7년 종살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요셉이 태어납니다.

야곱은 요셉이 태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빈 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계약을 합니다.

이번에는 재산을 얻기 위한 계약입니다.

그래서 6년 동안 양치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요셉이 태어나게 된 것은 다른 자식들과 다릅니다.

다른 자식들은 혈과 육으로 낳았어요.

인간적 방법으로 생산했어요.

하룻밤만 자며 순풍 순풍 낳았어요.



그러나 요셉은 합환채를 먹고 낳았어요.

라헬이 육적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들을 낳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합환채를 먹고 난 후에 요셉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요셉은 합환채로 낳아진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합환채는 신약적으로 성령을 상징합니다.

합환채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먹으면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환채를 일컬어 임신 촉진제라고 합니다.

르우벤이 맥추 때에 들에서 합환채를 가지고 옵니다.



맥추 때가 바로 신약의 오순절이에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지요.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환채를 먹고 낳아진 요셉을 일컬어 성령으로 낳아진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듯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늘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삶을 살게 되어요.

이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소망 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고 난 후 자기 양떼를 챙기기 시작을 합니다.

이것이 점박이 양 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6년 동안 점박이 양을 낳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상천외합니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를 벗긴 물을 먹어서 낳습니다.

세 가지 나무는 삼위 하나님을 상징해요.



버드나무는, 사철 푸르른 나무로 영생하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살구나무는, 겨울을 쫓아내고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신풍나무는, 일명 신의 기운이 도는 나무라고 하는데 이는 성령님을 상징해요.

영적인 의미로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야곱의 점박이 양떼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나중에 라반이 쫓아와서 추궁을 할 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점박이 양들을 주었다고 합니다.

야곱은 점박이 양들을 데리고 귀향을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늘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생겨요.

우리가 가야할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 사람으로 살지 않고 하늘나라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점박이 양들을 낳고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 라헬이 자기 아버지 드라빔을 훔쳐갑니다.

이게 엄청난 사건이에요.

드라빔은 점치는 기구에요.

이건 일종의 가정의 수호신인 것입니다.

이것은 집안의 가장(家長)만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가 죽을 때 이걸 맏아들에게 물려줍니다.

그 당시 드라빔을 가진 사람은 그 집안의 모든 소유권을 가진 자로 인정을 하였어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드라빔을 가진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라헬이 가지고 온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이 떠난 후에 드라빔이 없어진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자식들을 데리고 추격을 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라반은 야곱의 외삼촌이면서 장인입니다.

가족이에요.

그런데 야곱을 이용해서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라헬은 이걸 잘 알고 있어요.

야곱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야곱을 이용해서 축적한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야곱에게 주고자 라헬은 아버지 드라빔을 훔쳐 온 것입니다.



드라빔은 소유한 사람이 그 집안의 모든 소유권을 가진다고 하였잖아요.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가지고 있으면 라반의 모든 것이 라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야곱에게 팔린 몸이에요.

야곱이 7년 종살이 하고서 라헬을 사온 것입니다.

그러니 라헬은 야곱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라헬이 소유한 모든 것은 야곱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는 남자의 소유였어요.

그러니까 라헬이 소유한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남편인 야곱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자기 친정집 식구들을 몽땅 야곱에게 귀속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종살이 한 것은 단순한 종살이가 아니고 어머니의 가족들을 몽땅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게 라반의 드라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잘 보세요.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 가문의 후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해요.

벧엘 광야에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잖아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자 육적 아버지 집으로부터 쫓겨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벧엘 광야에 찾아 오셔서 내가 너의 아비가 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면 야곱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어미의 고향인 하란으로 간 겁니다.

거기 가서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을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데리고 오고자 한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어요.

야곱이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게시하고 있어요.

구속사적인 그림으로 보면 야곱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이중계시가 있어요.



첫째는, 야곱이 하는 일 속에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계시하고 있어요.

이것은 하란에서 20년 종살이 하면서 어머니의 집안 식구들을 몽땅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다루어 가는 모습을 담고 있어요.

야곱의 일생은 우리 성도들의 일생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어미 복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듯이 우리도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권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였듯이,

우리도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야곱 인생의 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야곱이 생각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일을 당합니다.

이것이 이름이 바뀌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육신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형 에서를 만나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자기 혼자 살 궁리를 했어요.

처 자식은 다 죽어도 자기만 살면 된다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에서에게 처 자식을 뇌물로 상납하는 일을 하였어요.

하나님은 이런 얍삽한 야곱을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20년 동안 모은 것을 얍복강 너머로 보냅니다.

그리고 야곱을 딱 막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환도뼈를 부러뜨립니다.



이는 야곱의 힘을 빼앗아가 버리신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사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형 에서를 이기기 위해서 기도했어요.

자기가 주가 되어서 섬김 받고자 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병신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종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무릎을 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게 하나님 나라의 장자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은 바로 우리 안에 왕으로 살고자 하는 나를 죽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낮추세요.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안에 야곱처럼 탐욕이 가득한 옛 사람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낮은 자가 되어서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을 건넌 야곱의 사고를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에서 섬김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라는 것을 배워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내 주여 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주가 되고 싶어서 형의 장자권 빼앗았어요.

20년 동안 절치부심(切齒腐心) 높은 자리에 앉아서 호령하는 주가 되고자 살아 왔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에서 으뜸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세요.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는 섬기는 자로 사셨습니다.

그럼 예수로 낳아진 자들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철저히 섬기는 자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인데도 자기 백성들을 섬겼어요.

이게 하나님의 장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앉혀놓고 발을 씻기면서 그러잖아요?

내가 너희를 섬긴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옛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거듭 났어요.

거듭난 사람 속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성령이 예수님의 삶을 살도록 간섭하세요.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로 살게 하세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들을 주신 것입니다.



흔히 맏이는 부모님 앞잡이라고 합니다.

왜 맏이는 부모님의 앞잡이라고 합니까?

이는 동생들을 돌보라는 의미에서 부모님 앞잡이라고 합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맨 마지막 부분이 이 영화가 하고픈 말이 나옵니다.

황정민이가 1.4 후퇴 때에 아버지하고 이별하면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나는 못 가니까 내 대신 네가 네 동생을 챙기라고 합니다.

네가 이 집에 가장이다!

이 집은 네가 책임지라고 합니다.



황정민이는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평생을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삽니다.

자기 삶은 없고 온통 자기 가족들을 위하여 헌신하며 살았어요.

맨 마지막에 황정민이가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참 말로 힘이 들었습니다.



난 그 고백을 보면서 코끝이 찡 하더라고요.

울었어요.

저도 하나님 앞에 가서 그렇게 울 것 같아요.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어 준다고 하시잖아요.

이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장자로 살면서 울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백성들을 이 땅에 장자로 보냈어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하셨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장자로 사는 것은 힘이 들어요.

눈물 흘려야 해요.



십자가를 건너온 야곱들에게는 다른 인생이 펼쳐져 있어요.

얍복강 이전에는 모으는 인생을 살았지만 얍복강 이후는 전부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되어요.

종의 자리로 가서 섬기게 되어요.

얍복강 이전에 야곱은 힘을 모아서 으뜸 노릇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지팡이하나 의지하고 살라고 합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을 상징해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야곱은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을 합니다.

장자와 차자의 손을 어긋 맡겨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장자가 차자가 되고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어디서 배웠나요?

얍복강에서 배웠어요.

그래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축복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땅에서 섬기는 삶이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안 거에요.

야곱의 삶이 그대로 요셉에게 전이가 됩니다.

야곱의 가문이 요셉이 맡게 됩니다.



요셉의 일생도 야곱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래서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등재해 놓은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을 산 것입니다.



37장부터는 야곱의 약전은 이렇다고 하면서 야곱의 인생은 사라지고 요셉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낳아진 두 아들들을 야곱이 이건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야곱이 총리가 된 거에요.

그래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인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도 야곱과 요셉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살았던 야곱과 요셉은 예수님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았지만,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에게 전이가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십자가의 길이 열려 있어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신 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의 운명이 예수님처럼 자신도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예수님은 연합이 되었어요.

쌍둥이에요.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자는 십자가의 길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봅시다.



고후 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우리 안에 보배를 담았다고 하지요.

그 보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옴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부터 누구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느냐?

예수님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예수님을 연합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우리를 조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분에 의하여 이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 하면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로 이끌고 가세요.

그러면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하는가요?



8-9절을 보세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예수를 품으면 사람들이 환영해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미움을 당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악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하고 다른 것은 싫어해요.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우리도 넘겨짐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우리 안에 예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영적으로는 기뿐 일이지만 육적으로는 엄청난 아픔이에요.

우리가 꼬라지가 이래도 예수를 품고 사는 자들이에요.

마귀는 척 알아 봐요.

마귀가 예수를 죽였듯이 예수를 품고 사는 자들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나요?

우리 안에 보배 되신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끄집어 내기위하여 마귀로 하여금 우리 육체를 깨뜨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호두 속에 알맹이를 꺼내기 위하여 망치로 깨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 아시지오.

300 용사들이 횃불을 항아리에 감추지요.

빛이 나오려면 항아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깨뜨려져야지요.



예수가 빛이에요.

우리 안에 예수 라는 빛이 있어요.

우리가 항아리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를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를 깨뜨리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의 길이에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품은 성도는 이 길을 필연적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 하세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말이에요.

아파도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깨트려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신앙이 언제 가장 좋은지 아세요.

어려울 때입니다.

고난당할 때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구조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오고 난 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하였어요.

늘 쫓기는 삶을 살았어요.

세겜에 정착 하려고 하다가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을 당합니다.

그 일로 자식들이 세겜 사람들과 전쟁을 하여서 야반도주하기에 이릅니다.

결국에는 빈털터리로 벧엘로 올라가는 일을 당합니다.



20년 전에 장자의 축복을 받고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서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자기 인생은 하나님 손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20년 동안 이걸 깨닫게 하시려고 야곱을 달달 볶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고 처음에는 잘 되는 것처럼 풀려 가요.

잘 풀려 가면 우린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몸뚱이를 이길 장사는 없어요.

신앙의 타락은 반드시 부요 속에서 일어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에는 주었다가 나중에는 거두어가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이 그랬어요.



한국 교회를 보세요.

교회가 부흥을 하고 나니까 전부 타락하잖아요.

하늘에 소망을 다 잃어 버렸잖아요.

땅 강아지가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은 돈이고 출세이고 성공이에요.

전부 이 땅에 속한 것들이에요.



교회의 소속은 하늘인데 땅에 것을 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땅에 복을 준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어요.

창세전 언약에 하늘에 신령한 복을 준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웠어요.

그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이란? 영적 복이란 뜻입니다.



죄사함이 복이고,

구원이 복이고,

영생이 복이고,

믿음이 복이에요.



성령은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의 관심사를 하늘의 것으로 인도하세요.

하늘의 가치를 갖도록 만드세요.



구원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먼저 제하고 나중에 채워요.

옛 것은 제하고 새 것은 채우는 일을 하세요.

우리는 흙에서 났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는 전부 땅의 것이 있어요.



그런데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예수님이 너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하시면서 땅의 것은 제하시고 하늘의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땅에 사고는 내가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은 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자가 되고 싶었어요.

장자가 되어서 섬김 받고 싶어 했어요.

이건 차자로 태어난 자들이 갖게 되는 공통된 사고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가 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이 사고가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장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장자는 섬기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얍복강 이후의 삶은 자기를 비우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에게 나아가 일곱 번이나 엎드리며 주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건 야곱이 지진해서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빼앗아 가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도들을 다루어 가는 모습이에요.

우리는 하늘나라 장자들이에요.

그런데 이 땅의 장자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입술로는 하늘나라를 말하지만 실상은 이 땅의 가치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힘을 의지하고 살고 있어요.



남보다 더 갖고 싶어하고,

남보다 더 높아지고,

싶고 남에게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을 얻고자 한단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이게 주겠다고 한 것이 뭔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세상에 영웅호걸이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건 야곱이 얍복강 이전에 꿈꾸던 모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하늘의 장자 정신으로 살지 못하니까 강제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차압해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돈을 의지하면 돈을 빼앗아가고,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을 빼앗아가고,

명예를 의지하면 명예를 빼앗아가고,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면 육신을 쳐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차압해서 목소리를 낮추게 하십니다.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 둘씩 빼앗길 때마다 우리는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코 야곱과 같이 낮추어 버리십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 방식으로 살면 못 이겨요.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늘의 방식으로만 이길 수가 있어요.

세상 방식은 손을 움켜잡는 것이지만 하늘 방식은 손을 펴는 것입니다.

세상은 군림하는 것이지만 하늘은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쉼은 세상 것을 버릴 때 주어져요.

말석에 앉을 때 주어져요.

일체의 경쟁을 버리면 쉼이 주어져요.

이게 십자가에요.



십자가 정신은 세상에 정과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비우면 이상하게 평안해져요.



채우면 쫓기는데 비우면 쉼을 얻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20년 동안 움켜잡고 채우면서 쫓기면서 살아온 야곱을 얍복강에서 비우고 쉼을 얻는 인생으로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 후에 지팡이 하나 의지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지팡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힘이었어요.

그래서 야곱은 모든 일에 지팡이를 앞세우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얍복강을 건너온 사람들이에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세상에 속한 것들을 차압을 해 가시고 하늘에 것을 채우는 식으로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그 길이 하늘나라 장자들이 걸어가는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예수님이 걸으셨어요.

12제자들이 걸었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걸었어요.



요한계시록을 보세요.

천상에 간 성도들을 뭐라고 하는가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목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처럼 버림 당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버려지는 삶을 살았어요.

그들이 자진해서 산 것이 아니고 믿음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믿음으로 이러 저러한 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그들이 믿어서 그렇게 살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그들을 앞에서 견인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 신약에서는 “어린 양”이고 “성령”이에요.

동일한 의미에요.



그러니까 이들이 천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어린 양이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면류관을 하나님에게 던지고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에서 높여주는 것이 아니고 낮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상좌에 앉혀주는 것이 아니고 말석에 앉게 하세요.

이건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안에 탐욕이라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이 순순하게 따라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육신을 가진 어느 인간이 나 죽었소 하고 살겠어요.

비빌 언덕만 있으면 고개를 쳐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삶이지만 순순하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어요.

고집을 피웠어요.

그러다가 얻어터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가라고 하였어요.

벧엘이 어떤 곳인가요?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온 곳이잖아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였어요.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또한 하늘의 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네 가족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곧 바로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 세겜이라는 곳에 들립니다.



그냥 잠깐 들린 것이 아니고 그곳에 아주 정착하려고 땅을 샀어요.

그런데 야곱은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급기야 강제로 쫓겨 가게 됩니다.



이건 하나님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안 가니까 하나님이 세겜 사람들을 들어서 쫓아내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세겜에서 아픈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세겜에 정착했을 것입니다.

벧엘로 가야할 인간이 세겜에 정착을 하고 있으니 강제로 뽑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방법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를 믿게 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린 천국보다는 이 세상을 좋아해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코 박고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귀찮은 일들을 벌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강간당한 사건과 같은 일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빼앗기는 사건들을 일으키십니다.



사업이 망하게 되는 것으로,

사기 당하는 것으로,

실직 당하는 것으로,

건강을 잃은 것으로,

좌우지간 세상 사는 것이 싫게 만들어 버리세요.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의 신앙이 언제 좋은 줄 아세요.

망했을 때에요.

의지 할 것이 사라지면 그 때 하나님을 찾아요.

탕자처럼 손에 아무 것도 없어야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게 되어요.

우리의 속성이 그래요.



탕자에겐 사기 당하고 실패한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만약에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성공을 했다고 한다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망하고 나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비로소 아버지 집이 그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세상의 실패가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을 하고자 하지 실패하고자 하지 않아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땅의 원리로 사는 것을 배워왔어요.

땅의 원리는 움켜잡는 원리에요.



이렇게 움켜잡는 원리로 사는 자들에게 하늘의 원리가 덮쳐왔어요.

하늘의 원리는 주는 원리에요.

여기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전쟁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는 평안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 것으로 평안을 찾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 것에는 평안이 없고 도리어 두려움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얼마 전에 신문기사에 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700억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간증하는 것이 신문에 실렸어요.

그 사람은 복권에 딱 당첨되니까 제일 먼저 가족들이 원수가 되더라고 합니다.

서로 돈을 차지하고자 싸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원수가 되고 자녀가 원수가 되고 가족이 원수가 되더라는 거예요.



누가 원수냐?

집안 식구가 원수라니까요.

돈이 가장을 풍비박산 나게 했어요.

돈이 없을 때 평화를 누렸는데 돈을 소유하자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돈이 웬수에요.



전도서 5장을 봅시다.



전 5:10-13=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은도 사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고,

풍부도 사람을 만족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하지요.

은과 풍부는 우리가 눈만 뜨면 오매불망 쫓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만족함을 주지 못해요.



12절을 보세요.



노동자는 잠을 자는데 부자는 잠을 못 잔다고 하지요.



어째서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자는데, 부자는 잠을 못 자는가요?

악의 근원을 품고 있는데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돈은 편리한 것은 줄 수 있어도 마음에 평안은 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아담이 살아가는 땅을 저주하셨어요.

그러므로 이 땅의 것으로는 안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편리한 것하고 평안하고는 달라요.



땅의 원리는 받는 원리이고,

하늘의 원리는 주는 원리에요.

그러므로 땅의 원리로 사는 자는 채워도 채워도 만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리는 비우는 원리이므로 하늘의 원리로 살아가는 자들은 없음에도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움켜잡는 땅의 원리로 사는 야곱을 죽이고, 손을 펴는 하늘의 원리로 살아가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섬김 받고자 하는 자를 섬기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 에서를 주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서 형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낮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하는 것이고 세상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것을 버리게 함으로서 안식케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가 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면 온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죄가 스스로를 왕의 자리에 앉히고 만 것입니다.

죄가 나를 위하여 살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죄 아래서 난 인간들은 모두가 왕입니다.

나 이외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지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서로 섬기고 살면 천국으로 사는데,

서로 섬김 받고자 하니까 지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장자는 섬기는 자인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장자는 섬김 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들을 찾아 가서 죄 아래서 난 아담의 형상을 찍어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아담의 형상을 죽이는 것이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구원을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모두가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일생은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교회는 야곱이 모인 곳입니다.

서로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 주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교회는 십자가에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내는 곳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깨어져야 합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야곱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과 이스라엘로 살고자 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으로 살면 지옥으로 살아야 하고,

이스라엘로 살면 천국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나” 라는 신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이 놈은 문방구 앞에 두더지와 같습니다.

죽은 듯 싶다가도 또 머리를 내밉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내는 얍복강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 장자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모두가 섬김 받고자 하는 세상에 섬기는 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신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은 이리에게 먹힘 당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모두가 이리처럼 섬김 받고자 하는 세상에 섬기는 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가서 하나님의 장자는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 장자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섬기는 자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이게 우리 스스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늘나라 장자로 살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얍복강을 지나온 성도들은 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면서 이기게 하십니다.

이기면 지고 지면 이깁니다.

이게 하늘나라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긴 자가 되었듯이 성도들도 죽임 당함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도살당할 양처럼 두셨다고 합니다.



양은 이리를 이기는 자가 아니고 지는 자입니다.

먹힘 당하는 자입니다.

이리에게 먹힘 당함으로서 이리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이김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먹힘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양이신 예수를 잡아먹은 이리들입니다.

그런데 먹힘 당한 예수님이 우리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먹은 줄 알았는데 도리어 예수가 우리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차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리로 살지 말고 양으로 살라고 간섭을 하십니다.

야곱으로 살지 말고 이스라엘로 살라고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미미하지만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섬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서툴지만 말이에요.



이 훈련을 광야 40년 동안 받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광야는 애굽의 장자가 죽고 하늘나라 장자로 거듭나는 곳입니다.

광야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날마다 죽임 당하여야 합니다.

말씀 앞에 깨어져야 해요.

이기는 자로 살고자 하는 나를 죽이고 지는 자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으로 살 수가 있어집니다.

이기고자 하면 원수들이 모이지만, 지고자 하면 동무들이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기고자 하다가 지옥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은 지면서 천국으로 사셨습니다.



우린 예수쟁이들입니다.

예수쟁이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입니다.

섬김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입니다.

이게 하늘나라 장자입니다.



지고서 이기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게 얍복강을 건너 온 우리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하늘나라 장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간섭당하며 살아야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떠한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낙심치 말고 잘 이겨내게 하옵소서.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것들이 하늘의 장자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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