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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7강. 그 아비에 그 자식 (요 8: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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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7. 31.

 

 

57강. 그 아비에 그 자식 (요 8:37-47)

-.정낙원 목사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행사 머리를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 이루어지려면 서로 간에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이 서로 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소통이 되려면 같은 가치관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서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르면 동상이몽이 됩니다.

그럼 소통이 되지 않아요.



과거 제가 복음을 모르고 율법 아래 있을 땐 율법 아래 있는 분들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 때는 성화를 말하고, 은사를 말하고, 기복을 말하곤 하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성경을 보는 눈들이 서로 같으니 소통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그 분들과 대화가 안 되어요.

과거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사사건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전혀 다른 눈으로 해석을 하니 소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이전엔 바리새인들과 율법으로 소통이 되었는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아요.

성경은 이를 두고 영과 육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과 육은 물과 기름처럼 달라요.

영은 하늘이고 육은 땅이에요.

하늘과 땅은 존재양식이 전혀 달라요.

하늘에서 하는 일은 땅에서는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 도를 이해하려면 하늘에서 오신 성령을 받아야 해요.

성경도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해석하는 것과,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해석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육으로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이건 같은 집안 식구라도 어쩔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을 보니 이런 일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형제입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충돌을 합니다.

이는 서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간에 해석이 다른 이유는 서로의 본질과 영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유대인(우리)은 땅에서 났습니다.

하늘과 땅은 존재양식이 달라요.

하늘과 땅이라 함은 본질 자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본질이 다르니까 보고 듣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간은 동일한 것을 보아도 해석하는 것이 다를 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창조주 입장에서 말하는데!

인간은 피조물 입장에서 이해를 해요.

예수님은 영으로 말하는데 인간은 육으로 들어요.

그러니 하나 될 수가 없고 서로 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은 사용하는 문자와 언어는 같을지 몰라도 그 의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부가 하늘 이야기에요.

비록 땅에 말로 하여도 하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는 동문서답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건 지금도 동일해요.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는 대화가 안 되어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에요.

 

오늘 본문 내용도 그래요.

예수님은 영으로 말하는데 유대인들은 육으로 들어요.

예수님은 하늘이야기를 하는데 유대인들은 세상이야기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은 이러한 충돌 이유를 아주 직설적으로 조상 문제로 걸고 들어갑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까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도발적인 말씀이에요.

마치 선전포고 하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마귀새끼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우리더러 너희들이 우상 숭배하고 있다고 하면 수용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는 가짜이고 마귀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받아들일 수가 있겠어요?

아마도 길길이 날뛰며 죽이고자 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런 사태를 만들어 버렸어요.

너희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고, 마귀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근본이 달라요.

 

이건 양보하거나 타협일 성질이 아니에요.

전혀 같이 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아요.

예수님 혼자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가 마귀 자녀라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는 마귀 새끼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건 독선이에요.

 

예수님의 이런 독선을 이해 할 수가 있어야 성도에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예수님 이외 모든 인간은 다 틀렸다는 말입니다.

너희 인간들은 전부 가짜라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수용한다면 난 저주 받아도 당연하다는 것이 나와야 해요.

이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정의해 봅시다.

예수님의 논리는 너희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놈들이라면 날 사랑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자녀는 반드시 예수님을 사랑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너희가 마귀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 자녀이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에 발끈하여 우리가 어째서 마귀의 자녀냐?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인데!

네가 미쳤구나!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를 마귀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럽니다.

그래 나도 너희들이 아브라함 후손인줄 안다.

하지만 너희가 비록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일 줄은 몰라도 영적으로는 아니란 겁니다.

너희들의 혈통을 가지고 시비 거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존재 자체를 시비 거는 거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선택을 입은 자입니다.

선택을 입었다는 것은 혈통적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이 누구냐?

하나님께 선택을 입은 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선택을 입으면 아브라함 후손인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알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난 자는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족보나 혈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인간의 족보나 혈통은 이미 타락된 족보이고 혈통이에요.

죄인의 족보이고 죄인의 혈통이란 말입니다.

 

이런 죄인을 지배하는 것은 마귀에요.

유대인은 이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혈통을 들고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혈통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걸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엔 그 어떤 족보나 혈통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가문을 들고 나오거나 인간의 자랑거리를 들고 나오는 자는 다 마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의 가문으로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잖아요.

아브라함은 이걸 알았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가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이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좇아 간 것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나를 사랑했는데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도 아브라함과 같은 행사머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듯이 너희도 내 말을 들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안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 어렵지요.

이러니 누가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겠어요.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그래요.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뭐 논리적으로 맞아야 듣든가 말든가 하지요.

 

아니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언제 적 사람인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약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자기를 사랑했다고 합니까?

시대가 달라도 한 참 다른데 말이에요.

유대인들이 들을 땐 이건 정신병자와 같은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자기를 사랑했다는 말도 그렇고 또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귀 새끼라고 몰아붙일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누구를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마귀새끼라고 하느냔 말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일방적인 말이에요.

뭐 말 같은 말을 하여야 대꾸하고 자시고 하지요.

정신병자 같은 말을 하는데 그걸 어찌 장단을 맞추어 준단 말입니까?

 

솔직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 성경이 옳다고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입장에선 성경 이야기는 황당무계하고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은 전부 신화로 돌리거나 아예 빼 버리고 있는 겁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나!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었다는 말이나!

거친 풍랑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잠잠해 졌다거나!

무화과나무가 순식간에 예수님 말 한마디에 말라 죽었다거나!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거나!

예수가 죽었다 부활하여 승천하였다는 것이나!

장차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는 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말들입니다.

 

아무리 이해하고 싶고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성경 이야기를 하면 상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잖아요.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만 성경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본주의에요.

 

이 세상은 이성으로 살아가는 곳이에요.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해도 상식적으로 모두가 알아먹도록 이성적으로 말하여야 정상이라고 해요.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으로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래요.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으로 알아먹지 못하는 말만 하고 있어요.

좀 상식적인 말을 해야지 인정을 해 주지요.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을 쏟아 붓고, 남의 말은 다 틀렸다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어도 예수님 스스로가 인정을 받고자 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인간들과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충돌을 함으로서 예수님은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배후에 있는 마귀를 들추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날 몰라보는 것은 너희 뒤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줄 몰라요.

예수님은 인간들이 모르는 그것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그래요.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는 부모와 자식은 닮았다는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유전자가 같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자연히 닮게 되어 있습니다.

닮기 싫어도 닮게 되어 있어요.

 

자식이 부모를 안 닮으면 이상한 거지요.

물론 돌연변이도 있습니다만 순리적으로 보면 닮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낳았어요.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행사 머리를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같은 행사머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성령이 예수님 같은 행사머리를 하도록 역사를 해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불뚝 불뚝 예수님의 행사머리가 튀어나와요.

여러분의 자식이 여러분과 닮지 않았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이 자식이 내 자식이 맞는지 확인 할 것 아닙니까?

 

지난번 신문 기사를 보니 중국에서 유전자 검사가 열풍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식인줄 알고 키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에 자식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전자 검사를 하면 20%가 남에 자식이라고 해요.

 

그만큼 여자들이 외도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몸뚱이는 같이 있지만 마음은 다른 남자에게 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유대인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속엔 마귀가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입술로는 분명히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를 안 믿고 자기를 믿고 있어요.

믿음이란? 새 언약을 믿는 것인데 내어 놓고 자랑하는 것은 옛 언약 신앙이에요.

그러니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잖아요.

우리 행위로 맺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 속엔 인간이 뭘 하여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마치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구원이 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위하여서는 할 일이 없어요.

또 구원을 자기가 지킬 이유도 없구요.

왜냐하면!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으로 구원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지금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성도는 자기 조건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아요.

구원을 무엇을 하여야 얻는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해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뭘 하지 않으면 불안해해요.

게으름을 피우다가 잘리는 것이 아닌가?

죄 지으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맨 날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자기 주변정리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보아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는 안 보고 자기 꼬라지만 살펴요.

좀 착하게 살았다 싶으면 안심이 되고, 속된 말로 죄라도 지으면 안절부절 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편할 날이 없지요.

감사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온통 이래서는 안 되지! 저래서는 안 되지 하면서 좌불안석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데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고 편안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이들의 믿음을 분해 해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지 않고 난 이렇게 살았다든가 아니면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들만 들어 있어요.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에요.

그러니 남의 자식과 같이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왜? 유전자 검사를 하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자신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닮은 데가 있으면 유전자 검사 할 필요가 없어요.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아들에 영(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아들을 닮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겁니다.

진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본 안목으로 보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 진짜 신자와 가짜 신자를 구별하는 것은 간단해요.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진짜이고,

우리가 뭔가 해야 한다고 하면 가짜에요.

일명 신자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 못살든 그 신분엔 변함이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신자이고 못 살아도 신자에요.

왜냐하면! 신자 됨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 로 되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 못 살든 두려움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요.

성령을 일컬어 아들에 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법적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에요.

사랑 안엔 심판이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행위로 맺어진 것이 아니에요.

우리 행위로 맺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로 끊어지지 않아요.

아들이 공부 못해도 아버지가 좇아내지 않아요.

말을 안 들으면 매질은 당할지언정 아들의 신분에서 잘려 나가진 않는단 말입니다.

 

아들에 영이 임한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요.

두렵지도 않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두려워 한다는 것은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자기 행위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선 이런 모습을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사람은 새 언약 안에서 살고,

자기가 만든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옛 언약 안에서 자기가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요.

 

새 언약에서의 믿음과 옛 언약에서의 믿음은 달라요.

새 언약에서의 믿음은 예수님에 것을 내어놓지만,

옛 언약 안에서의 믿음은 자기 행함을 내어 놓아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들이 행한 일을 내어 놓는 것은 옛 언약 안에 있다는 증거에요.

자신이 옛 언약 안에 있으니 옛 언약이 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새 언약 안에 있으면 새 언약의 믿음이 나오고,

옛 언약 안에 있으면 옛 언약의 행함이 나와요.

이를 열매와 나무라고 하는 겁니다.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열매를 맺는 것이고,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라는 나무의 열매는 율법 지킴이에요.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행함이에요.

새 언약이라는 나무의 열매는 믿음이에요.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셨다는 믿음이에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아비와 같아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니 애비가 마귀냐!

아니면 아브라함이냐! 라고 말하는 겁니다.

 

애비가 마귀면 옛 언약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애비가 아브라함이면 새 언약으로 신앙생활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귀가 아비면 마귀의 행사머리를 하고,

하나님(아브라함)이 아비이면 하나님(아브라함) 행사머리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마귀와 아브라함을 비교하고 있으니, 아브라함 행사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하지요.

여기서 사랑이란? 믿음과 같은 뜻이에요.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 할 수 밖에 없어요.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반대로 마귀는 예수님을 미워해요.

미워한다는 것은 안 믿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는 다 마귀의 자녀예요.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는 예수님을 미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성도는 예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불신자는 예수를 미워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성도는 예수가 그냥 좋고,

불신자는 예수가 그냥 미워요.

 

예수가 그냥 좋아야 신자에요.

억지로 좋아해야지 하면 아니에요.

예수님은 자연히 좋아져야지 억지로 좋아하는 척 하면 안 됩니다.

좋아하는 것하고 좋아하는 척 하는 것은 달라요.

 

우리도 그런 일이 있잖아요.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좋은 사람이 있잖아요.

싫고 좋은 본능에서 나와요.


내가 누구를 밉다고 하면 누가 당신은 왜? 그 사람을 미워하느냐! 라고 물으면,

몰라 이유 없이 그냥 미워! 라고 하지요.

그냥 싫어요.

왠지 그 인간만 보면 밥맛이 떨어지고 재수가 없어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냥 좋지요.

왜? 좋으냐고 물으면 그냥 좋대요.

본능적으로 좋아요.

그 사람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성도의 마음속에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냥 좋은 겁니다.

마치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것 같이 좋아요.

그러니 예수님을 거부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를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아주 자연스러워요.

믿는 척 연기 할 필요도 없어요.

믿어지니 어떤 가식이나 위선을 떨 필요가 없지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예수가 싫어요.

이유 없이 그냥 싫어요.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아무리 믿고자 노력해도 안 되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거나 교회 가자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마도 예수쟁이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에 의해서 그래요.

 

저의 천척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오래전에 폐암으로 죽었어요.

죽기 전에 복음이라도 전할 요량으로 임종 소식을 듣고 갔어요.

평상시에도 제가 목사라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어요.

그 분은 자기는 착하게 살아서 천당에 간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이 착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어야 간다고 하면 화를 내곤 했어요.

 

그런 사이였는데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말을 듣고 쫓아갔습니다.

행여라도 죽기 전이라도 복음을 전하면 우편 강도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으로 갔어요.

가서 보니 호흡이 곤란하여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더라고요. 

그 분의 손을 잡고 예수 믿으셔야지요! 라고 했어요.

그런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제 손을 홱 뿌리치더니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제 말이 듣기 싫다는 겁니다.

 

하도 이상하여서 다시 손을 잡으니 역시 동일하게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 했어요.

전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이 분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하시는구나! 생각했어요.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여러분!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고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니에요.

주권은 하나님 손에 달렸어요.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 하고 믿는 척 하는 것은 달라요.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는 것이지만 믿는 척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겁니다.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 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사랑이 되어요.

미움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미움이 들어요.

 

이처럼 사랑이나 미움은 나도 모르게 주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론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신자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불신자는 마귀의 지시를 받아요.

 

인간은 조정 당하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에게 조정 당하든지 마귀에게 조정당하든지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께 조정 당한 은혜에요.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지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마귀에게 조정 당하면 예수님이 미워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보니 마귀 자식이라는 겁니다.

마귀 자식이기 때문에 날 미워한다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틀렸다고 하니 기분이 나쁜 겁니다.

너희들처럼 율법대로 산 놈들은 다 지옥에 가고 저기 하나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세리와 창기들이 천국에 간다고 하니 화가 나지요.

 

어디 비교 할 것을 비교 하여야지!

감히 거룩한 사람들을 창기들과 비교하느냔 말입니다.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책망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이러한 것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칭찬하는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 세미나를 들어보면 성도들의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칭찬하라고 하면서 적극적인 사고를 가르치라고 강의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교회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대 교회의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책망하지 않아요.

괜히 성도를 기분 나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 책망을 하면 교인들이 떠나갈까봐 책망하는 것을 극도로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책망도 하나님이 예례미야 입에 말씀을 넣어 주는 것처럼 선지자의 영을 받아야 해요.


목사가 성도를 칭찬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칭찬 받을 사람에게 칭찬을 하여야 옳은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오히려 조롱하고 죽이는 것이 됩니다.

 

이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로 살펴봅시다.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 한가요?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보실까요? 

애석하게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아요.

죄인으로 본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죄인이에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을 구석이란 하나도 없어요.

죄인 주제에 칭찬 받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지요.

물론 이런 평가를 인간들은 수용하지 않아요.

 

마귀가 이런 사실을 감추어 버렸으니까요.

인간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인간도 자기가 썩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선악적 기준으로 착하다고 하면 자기가 굉장히 괜찮은 인간이라고 믿고 살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썩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착함이 없다고 합니다.

인간에게선 선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해요.

인간들이 선이라고 내어 놓는 그것도 하나님은 악이라고 하니 인간들이 신경질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건 하지 않건 개의치 않고 일방적으로 통고합니다.

인간들이 수용을 하든 수용치 않든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야~ 죄인!

그런단 말입니다.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다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인간을 보니 인간을 기쁘게 봐 줄 수가 없더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던 겁니다.

이러면 누가 진짜 목사이고 누가 가찌 목사인지 판단법이 나오지요.

 

목사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안목으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진단해 주어야 해요.

아마도 엄청 욕을 먹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다 도망 갈 겁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러지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쫓는 스승을 많이 둔다고 하지요.

이는 자기를 칭찬해 주는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뜻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그런 목사를 찾아다녀요.



다른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잖아요. 

복음! 복음 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하면 싫어하잖아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늘 허구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말로는 예수님처럼 멸시천대 받는다고 하지만 한 마디 라도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다시는 안 보려고 하잖아요.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의 아픔이 여기에 있어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좋은 말을 들려준다면 누가 고민 하겠습니까?

모두가 인간을 부정하는 말을 하여야 하니 고민이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나쁜 말이란? 욕이 아니고 바른 신앙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인간의 그 어떤 행함 속에서도 의가 나오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온다고 말해주어야 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면 그렇게 싫어해요.

아주 짜증을 내요.

그렇게 예수님의 피가 싫은가 보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교회는 진리의 터이고 기둥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곧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라고 있어요.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진리에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새 언약이 진리에요.

그러므로 목사는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뭐냐?

예수님 피 이야기 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곳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세상에 없어요.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세상에서 들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 이야기는 오직 교회에서만 들을 수가 있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듣고자 오는 곳이에요. 

이렇게 되면 누가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듣고자 하느냐가 남겠지요.

예수님의 피 이야기가 좋은 말이면 들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죄인과 한 셋트가 되어서 증거가 되어져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 이야기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듣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누가 죄인이냐를 드러내게 하시려고 도발적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죄인이다”

“너희는 죄의 종이다” 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 한 겁니다.

우리가 왜? 죄인이냐!

우린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죄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종이었으면 나에게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애비에 그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일갈하시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펄쩍 뜁니다.

아니! 이 놈이 미쳤나!

어디 하나님의 선민을 마귀라고 하느냐!

참람 죄로 예수님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겁니다.

 

예수님과 유대인 간에 벌어졌던 설전이 그 당시로 끝난 것이 아니에요.

지금도 교회 안에서 지속되고 있어요.

지금도 예수님과 같이 너희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유대인들처럼 예수님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늘 재현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십자가 피를 전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고발하야야 합니다.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자라고 해 주어야 해요.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은 내가 곧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은 인정을 해요.

그러나 당신이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라고 하면 화를 내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십자가 이야기를 관념으로 알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관념으로 아는 십자가는 아픔이 없어요.

애통함이 없어요.

예수님과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희노애락이 없는 겁니다.

 

그냥 추상적이고 지식적으로 십자가를 말하면 사람들이 화내지 않아요.

십자가는 이런 것입니다 라고 지식으로 가르치면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그 십자가가 내 사건으로 다가오면 반발을 해요.

십자가를 인정하면 내가 부정당하고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난 착한 사람이고 싶은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이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신은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면 발끈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행함에 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 신경질을 내는 겁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말은 당신은 저주 받아야 합니다! 라는 말과 같아요.

누가 이런 말을 듣고 가만있겠어요.

그 안에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즉시로 반발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지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마귀를 섬긴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마귀라고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으로부터 거짓 하나님을 섬긴다고 책망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너희 하나님이 가짜라고 말하고 있지 않아요.

자기 백성들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교인들 보고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막귀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속에서도 야곱처럼 긍휼을 입은 자가 있고 에서처럼 유기된 자도 있어요.

누가 야곱의 계열이고!

누가 에서의 계열인지 참 하나님을 말해주면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 주관적인 신을 하나님이라고 섬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보고서 자신들을 구원한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과 같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의 그릇된 신관을 십계명을 통해서도 잘 조명해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신관을 정정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얼마든지 왜곡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이나, 바다에서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라고 섬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섬깁니다.

다만 이방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성경과 다른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자기의 수호신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신을 일컬어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은 곧 마귀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도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자기들을 지켜주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하나님이에요.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귀가 주는 정보로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는 정보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상선벌악 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상선벌악의 하나님이란? 선한 자에겐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겐 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무엇으로 판단을 합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은 인간의 행함으로 선과 악을 판단해요.

 

그러니 유대인들의 신앙의 기준은 율법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상선벌악 하시는 하나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은 착한 자라고 여겨서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율법이 없는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어요.

세상 모든 민족들 속에서 오직 이스라엘만이 율법을 받았으므로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그렇게 율법적 행위로 복을 주고 저주를 한다고 생각하는 그 하나님이 바로 마귀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마귀새끼라고 책망 받는 것이 아니에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위에 의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 의가 된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일컬어 거짓의 아비라고 하지요.

거짓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류의 거짓말을 말하지 않아요.

남을 속이고 사기 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귀는 인간에게서도 선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유대인과 예수님의 싸움은 예수를 믿을래! 안 믿을래! 의 싸움이에요.

다른 말로 예수 믿을래! 하나님 말씀대로 살래! 의 싸움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 지키면 천국에 가고 율법을 안 지키면 지옥에 간다고 하고,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닐 믿으면 천국에 가고 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겁니다.

 

아까 말했지요.

예수 믿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 있다고 하였지요.

이러면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해요.

각오만 다지면 문자적으로 지킬 수가 있어요.

물론 완벽하게는 못 지키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처럼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고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그래도 지킬 만 해요.

율법 지킴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지 않아도 가능해요.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이 그랬지요.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잖아요.

이에 청년이 대답하기를 자기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키고 살았다고 합니다.

청년이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은 태어나자 말자 율법을 배워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의지하고 나왔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먼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것으로 나아오잖아요.

그러면서 율법대로 산 것을 자랑스럽게 내어 놓잖아요.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 같이 아버지에게 대 드는 것과 같아요.

맏 아들이 아버지 앞에 고개를 들고 덤비는 것은 아버지의 명대로 살았다는 자기 의 때문이에요.

난 잘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못난 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맏 아들은 어떻게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한 탕자를 용서해 줄 수가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가문에 먹칠을 한 저런 놈은 당장 호적에서 파 내야 한다는 겁니다.

 

맏아들이 무슨 근거로 그럽니까?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말아먹은 행위를 근거로 하잖아요.

자기는 아버지 명을 지켰기 때문에 의로운 자이고 탕자는 아버지 재산을 말아 먹었기 때문에 불의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마귀라니까요.

 

마귀는 항상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선과 악으로 나누어요.

인간의 행위로 선악을 나눈다는 것은 인간이 선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과 상충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썩었다고 해요.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썩은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힐난하였던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저런 죄인들과 어울릴 수가 있느냐 에요.

 

알다시피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에요.

은혜는 차별이 없어요.

은혜를 다른 말로 긍휼이 여기는 거예요.

불쌍히 여긴단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엔 차별이 없어요.

모두가 못 났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처럼 불쌍히 여김을 받기 싫다는 겁니다.

자존심 상한다는 겁니다.

왜요?

 

자기들이 너무도 잘났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너무도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마귀에게 속은 겁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마귀에게 속은 거에요.

마귀에게 속은 자들의 특징이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자기에게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자신의 착함이 의가 된다고 생각을 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주시는 의가 필요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의를 거부한 것은 자기들에게도 의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 우리가 왜? 너를 믿어야 하느냐! 라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우린 너 아니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가 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어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러지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라고 하지요.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정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다는 것을 부끄러워했어요.

얼마나 못 났으면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느냐 라고 경멸했어요.

자신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면 되는데!

왜? 바보같이 남에 힘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느냐 라는 면박을 주었어요.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등신 취급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구원의 능력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이젠 도리어 복음을 자랑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예수 안 믿는 거예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예수를 가려버렸어요.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해도 안 믿어요.

제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해서 자책하지 말라고 해도 안 되어요.

인간의 행함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여도 안 믿어요.

 

정확히 말해서 안 믿어지는 겁니다.

안 믿어지니 못 믿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행위로 인하여 울고 웃고 하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그 속에 율법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래요.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아요.

성령이 그 안에서 예수님이 대신 이루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은 법이 편하지 은혜는 낯설어요.

반대로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법이 싫어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율법대로 살라고 하면 화를 내요.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은혜로 살라고 하면 화를 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든지 율법을 전하든지 하는 것은 거기에 속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마치 뷔폐 식당에 복음과 율법을 진열해 놓으면 복음이 좋은 사람은 접시에 복음을 가득히 담아서 먹을 것이고, 율법이 좋은 사람은 율법을 가득히 담아서 먹을 것입니다.

식성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어요.

 

이를 성경은 아들과 종으로 표현합니다.

아들은 일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아요.

그러나 종은 일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종은 일을 해야 편안함을 느껴요.

그러니 속된 말로 종은 종노릇을 해야 마음이 편하고 아들은 아들로 살아야 편해요.

 

십자가가 좋은 사람은 십자가를 말하고,

율법이 좋은 사람은 율법을 말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토해내고,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복음을 전해서 호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가 없어요.

복음은 사람을 설득해서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믿음으로 반응을 하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거부해요.



복음이 싫은 사람에게 자꾸만 복음을 말하면 물어 버립니다.

복음을 한 두 번 전해 보고 안 들으면 그냥 두세요. 

설령 누가 거짓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싸울 일이 아닙니다.

거짓 예수가 좋으니 거짓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복음이 있고, 다른 영이 있다고 하지요.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이란? 예수도 믿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에 혹하고 넘어갔어요.

이상하게 좋아 하더란 말입니다.

 

갈 1:6-10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좋아하는 것은 그 속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기뻐합니까?

자기를 칭찬해 주면 기뻐하잖아요.

자기 공로를 인정해 주고 자기 가치를 알아주면 기분이 좋잖아요.

자기가 한 일을 남에게 인정받을 때 기쁘지요.

 

그런데 바울은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바울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복과 저주가 임한다는 율법 신앙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여 저주를 받으라고 경고하였어요.

 

율법 신앙이 뭔가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되면 복과 저주는 인간들이 행위에 따라 왔다 갔다 하게 되어요.

 

이 시대 인본주의 목사들이 그러지요.

복 받을 짓을 하여야 복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복 받을 짓이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잖아요.

그러니 교인들이 복 받으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난리를 치는 것 아닙니까?

 

목사들은 자기들이 정한 규칙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라고 가르쳐 놓았어요.

마치 구약 시대 조상들의 유전과 같이 지금은 교회가 정한 규칙대로 살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게 만들어 놓았잖아요.

 

만약에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복이 아니라 댓가이지요.

복 받을 짓을 하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의 법칙 즉 룰이 되는 겁니다.

이런 논리라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복 받을 짓을 하면 반드시 복을 주어야만 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종속이 되어요.

인간들이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주어야 하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주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 지키면 복을 주고 어기면 벌을 주는 하나님은 곧 마귀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거짓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마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우린 스스로가 나는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난 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신을 섬길 수가 있어요.

육신이 다른 하나님은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성경을 상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가벗겨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해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도 우린 늘 넘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 믿음을 확인해 보세요.

바울이 그러지요.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성경 한 귀절에 너희라는 말을 이만큼 많이 사용한 귀절도 없을 겁니다.

온통 너희! 너희! 너희! 라고 하지요.

남을 보지 말고 네가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늘 확인하라는 겁니다.

두려워 벌벌 떨라는 말이 아니고 육신은 늘 이탈 할 수가 있으니 점검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도 늘 가짜 신앙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 앞에서 겸손하여야 합니다.

타인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냉정하십시오. 

부디 스스로 믿음 안에 서 있는가 늘 확증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사도 흠모할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인고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늘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여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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