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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8강. 누가 귀신들린 자이냐 (요 8: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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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8. 2.

 

 

58강. 누가 귀신들린 자이냐 (요 8:48-59)

-.정낙원 목사

 

 

 

우리는 귀신 들렸다고 하면 어떤 괴이한 증상을 나타낸다고들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귀신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주 그럴 듯하게 나타난단 말입니다.

귀신은 아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에요. 

오늘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논쟁을 통해서 광명의 천사와 같은 귀신을 들추어내는 작업을 해 봅시다.

귀신이 어떤 식으로 달콤하게 말하는지 알아봅시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논쟁을 보면 이 시대 우리들이 논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저와 같이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는 사람들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과 논쟁하는 것과 같아요.

서로가 조금의 양보나 타협 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건 마치 빛과 어둠이 하나 될 수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옛 언약은 행함이고, 새 언약은 믿음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행함이란?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아니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고자 하는 행함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롭게 된다고 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믿음과 성화는 이질(異質)이에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서로 다른 상반된 주장을 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답답하다고 해요.

결국엔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하고, 마귀라고 정죄한단 말입니다.



진리 문제에 있어선 양보나 타협이 불가능해요.

이건 부부사이도 부모 자식사이도 안 되어요.

이는 하늘과 땅 빛과 어둠처럼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싸웠을까요?

그 싸움의 현장을 들어가 봅시다.

지난 시간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을 살펴보았지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후손은 하나님께 선택을 입은 구원받은 선민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이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을 엄청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웃기지 말라 너희 조상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마귀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씩 웃으면서 예수님을 가소롭게 여깁니다.

야! 예수야!

네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우리가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증거가 여기 있잖아!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자랑합니다.

봐라! 이 율법은 오직 우리만 가지고 있잖아!

이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거야!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만 준 거란 말이야!

 

그러자 예수님은 그래 모세가 준 율법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그러냐!

모세는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다.

모세의 말을 믿었다면 마땅히 내 말을 들어야 할 것 아니냐!

모세의 율법이 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밥통들아!

 

너희들이 율법을 들고도 나를 몰라본다는 것은 다 너희 애비가 마귀라서 그런 거야!

그래서 너희들이 니 애비처럼 마귀 행사머리를 그대로 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이 하는 짓거리는 모세나 아브라함의 행사가 아니고 마귀 행사야!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아니 우리가 하는 행사머리가 뭐 어때서!

뭘 보고 우리 행사가 아브라함의 행사가 아니라고 하느냐?

이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날 보고 기뻐했거든!

 

유대인들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니 나이가 오십도 안 된 놈이 어떻게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할 수가 있느냐?

말 같지 않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버려!

그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거든!

내가 아브라함을 구원 했거든!

이러면 유대인 입장에선 돌아 버립니다.

달리 할 말이 없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머리로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네가 귀신들려서 미쳤구나!

네가 귀신들려 미쳤으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망발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지지 않고 내가 귀신들린 것이 아니고 너희가 귀신들려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게 지난 시간과 오늘 본문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참 재미있지요.

이걸 우째 해석하여야 합니까?

예수님 편을 들자니 이해가 안 되고,

유대인 편을 들자니 마귀새끼가 되고!

유대인과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귀라고 하고 있으니 둘 중 하나는 귀신이 맞아요.

 

예수님이 이단이든지!

유대인이 이단이든지!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이단입니다.

 

이런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꼭 이 시대 목사들과 같아요.

십자가만 외치는 목사들은 성화를 외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고!

성화 주의자들은 십자가만 외치는 목사들을 이단이라고 하잖아요.

 

엊그저께 어떤 분이 절 찾아왔어요.

제 블로그에 글을 보고 아니 울산에도 이런 복음을 아는 목사도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 분이 울산에도 이런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있느냐 라는 말 속에는 자기는 이미 복음을 아는 자로서 한 수 가르쳐 주고자 왔다는 냄새가 짙게 깔려 있어요.

말의 품새가 저에겐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얼마나 복음을 아는지 서로가 알고 있는 복음으로 주고받았어요.

그 분이 하시는 말이 제 설교를 보면 한 가지 부족한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 그래요.

그래 그게 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 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은 터만 닦아 놓았지 집을 짓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라고 하니 목사님은 십자가에 머물고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너머로 넘어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너머 가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 뜻을 이루고 사셨듯이, 이젠 예수 믿는 사람은 역으로 예수님처럼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시키는데 필요한 것이고,

구원 받았으면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사상을 이00이라는 사람과 대구에 이00 집단이 가지고 있어요.

물론 성화주의자들도 그래요.

 

그래서 제가 혹시 이00씨 주장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라고 하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아느냐 라고 해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나는 이00이나 이00가 주장하는 사상을 이단으로 본다고 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00씨나 이00 집단은 십자가는 구원의 한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구원 받을 때만 십자가가 필요하지 그 후엔 성령으로 예수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겁니다.

더 완전하고 더 성장하고 더 완전해 져야 한다는 겁니다.

일종의 고급스러운 성화주의자들이에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성불(成佛)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하면 그건 초보들이나 하는 거라고 해요.

십자가를 넘어 왔으면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내가 예수를 넘어서서 내가 곧 신이 되라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가 육신으로 왔듯이 우리 또한 말씀을 육신으로 살아 내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 몸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성화주의자들이 하는 말처럼 온전히 말씀을 지켜 거룩하게 살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아주 고상한 것 같지요.

 

이런 사람들에겐 예수님은 본받을 분이지 믿어야 할 구주(救主)가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믿을 분이지 본받을 선생이 아니에요.

예수를 본받자고 하는 것은 자신도 예수와 같은 급(종류)이란 말이에요.

같은 급수(종류)끼리는 본받을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온 것은 죄 없는 분이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에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에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려면 죄와 상관없는 몸이라야 가능해요.

동일한 죄인의 몸으로서는 죄인을 대속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난 아담의 몸이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몸이므로 아담의 몸이 아니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몸은 죄를 이길 수가 있지만 우리 몸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성도는 예수님이 이겨 주신 이김으로 사는 것이지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는 예수님의 의를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지, 자기가 의를 만들어서 나아가는 자가 아니에요.

이걸 예수님은 왕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예복으로 비유했어요.

예복은 주인이 준비해 놓은 것을 입어야지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가면 안 되어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주 예수 또는 구주라고 하는 겁니다.

주란? 왕이란 말이에요.

곧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주란? 구원하실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급수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우린 피조물이에요.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고, 우린 죄인이에요.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우린 그 생명을 공급받아 얻어먹고 사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예수 만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시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세요.

 

그래서 전 당신과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관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했어요.

당신은 성령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완전해지고자 하지만, 난 성령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붙잡는다고 했어요.

 

성령은 우리를 개과천선 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우리에게 관심을 쏟게 하지 않고 주 예수에게 관심을 갖게 하신단 말입니다.

 

약 두어 시간 이야기 했는데 접점이 없어요.

그래서 더 이상 이야기 해 보아야 유익되지 않으니 그만 하자고 하여 헤어졌어요.

당신은 스스로가 나를 십자가에 걸터앉아서 터만 닦고 있는 하수로 보니 내가 당신을 이단이라 해도 하수가 고수에게 하는 말이니 꼬깝게 듣지 말라고 했어요.

 

당신은 날 보면 답답하다고 할 것이고,

나 또한 당신을 보면 답답한 건 마찬가지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답답하니 답답한 그대로 살자고 했습니다.

만약에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당신의 사상을 받아들이든지,

당신이 내 사상을 받아들이든지 하나님이 하게 할 것이니 자기 길이나 가자고 했어요.

 

마치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과 같지요.

예수님은 날 믿으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율법으로 의로워 진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은 너희는 말씀대로 못산다고 하는데 유대인은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 논쟁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 지속이 됩니다.

사람만 바뀔 뿐이지!

논쟁의 핵심 자체는 늘 같아요.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유대인들 편에 서 있는 사람 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말을 하면 이단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와 뜻을 달리하면 이단이고,

성경 해석을 달리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이라고 해요.

 

우리 생각엔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서로가 이단이라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합니다.

저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맨 날 싸우고 지랄을 한다고 그래요.

 

세상 사람들이 눈에는 하나님이면 다 같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싸울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과 유대인의 싸움을 로마인들이 볼 때의 시각과 같아요.

빌라도도 예수를 재판하면서도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죽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성경을 열면 다른 하나님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 가 있다고 해요.

다 같은 예수가 아니고 달라요.

 

예수님과 유대인은 다른 하나님 때문에 싸웠다면, 지금은 다른 예수 때문에 싸워요.

이런 싸움은 바울도 했어요.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영이 있고, 다른 복음이 있다고 했어요.

이런 놈들은 이단이니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어요.

 

성경에 나와 있는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영이 있고, 다른 복음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도 교회 안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냥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픈 거예요.

 

한 집안 식구 안에서도 다를 수 있어요.

예수 하나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날수가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려고 왔다고 했어요.

분쟁케 하시려고 오셨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이란? 참으로 인간들 입장에선 잔인합니다.

부모 자식도 용납 할 수가 없고, 부부간에도 용납 할 수가 없어요.

부모 자식이나 부부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같이 해석하지 않으면 영적으론 원수인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러고 있잖아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율법 신앙으로 통일 되어 있었어요.

모두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것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형님 동생 하면서 사이좋게 지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12제자들을 선택하면서부터 유대 사회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유대민족주의자들 입장에선 온 민족을 하나로 단결하여도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날까 말까 하는 판에 예수가 나타나서 유대인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얼마나 밉겠어요.

민족을 분열시키고 있으니 말이에요.

 

마치 이 시대 교권주의자들이 십자가 피만을 전하는 자들을 이단시 하는 것과 같아요.

기독교가 하나가 되어서 온 민족을 복음화 하고 지역마다 성시화 하여야 하는데 십자가를 가지고 한국교회가 이단이라고 하니 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선 얼마나 믿겠어요.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 씨를 뿌려 놓았기 때문이에요.

 

구약의 예레미야와 신약의 요한일서의 증거를 봅시다.

 

렘 31: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교회 안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려 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배치해 놓은 겁니다.

가인과 아벨을 배치하고,

이스마엘과 이삭을 배치하고,

야곱과 에서를 배치하고,

요셉과 다른 형제를 배치하고,

다윗과 사울을 배치하고,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배치하고,

예수님과 유대인이 배치 된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이 있어요.

성경이 민족과 민족이 싸운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것의 상징이에요.

육적 전쟁은 영적 전쟁의 예표에요.

 

예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 간에 전쟁을 하게 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터트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두 쪽으로 갈라내고자 하신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이 악에 속하였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어요.,

세상 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야! 마귀 나와!

인간들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나오란 말이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뒤에 숨어 있는 마귀를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인간들에게 너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마귀라고 알려 주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민족 안에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찾아내고 있는 겁니다.

누가 사람의 씨고, 누가 짐승의 씨인가?

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누가 뱀의 후손인가? 찾아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찾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심판주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심판이 일어나서 두 쪽으로 쫙 갈라져요.

집에 들어가면 집이 갈라지고, 교회에 들어가면 교회가 갈라져요.

 

이 세상은 마치 창세기 1장 2절과 같아요.

빛과 어둠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요.

혼돈이에요.

누가 암까마귀고 누가 수까마귀인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서 빛과 어둠이 갈라져요.

이는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로 갈라내는 겁니다.

빛에 속한 자는 예수를 영접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예수를 배척하고 죽여요.

 

그러니 지금도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람의 씨이고,

유대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짐승의 씨에요.

예수님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고,

유대인과 같이 성경을 해석을 하면 마귀에게 속한 자에요.

 

이러면 답이 쉽게 나오지요.

누가 이단인지 알 수가 있겠지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누가 귀신들린 자인지 알 수 있겠지요.

 

그럼 예수님과 유대인의 싸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시비 거는 겁니다.

왜? 시비를 거느냐 하면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 마음대로 하나님 백성이냐! 라고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 후손 아니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근거를 아브라함 혈통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란 겁니다.

예수님도 육적으로는 분명히 유대인이 아브라함 후손임을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혈통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그러지요.

 

마 3:7-9=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속으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분명히 겉으론 아브라함 후손이 맞아요.

그러나 속은 아니란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선민사상에 빠져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 새끼라고 하잖아요.

세례요한은 지금 하나님께서 여기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 후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깨트리고 있는 겁니다.

혈통적인 선민사상을 저주하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당시 대표적인 교단이었어요.

마치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합동 측과 통합 측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모든 교단들도 다 같은 아류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모든 유대인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들의 선민사상을 세례요한은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저주를 퍼 붓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혈통으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알다시피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광야에 외치는 소리” 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자기를 세상에 보내서 세례를 베풀게 하라고 하신 이가 말씀하시기를 자기 뒤에 어떤 분이 오시는데 그 분에게 세례를 베풀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거든 그가 바로 자기 백성을 구원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 라는 것을 알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젠 예수님이 오셨으니 아브라함 혈통이라는 것은 소용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구원의 방법이 열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대 속죄일에 온 민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아사셀(마귀)에게 바쳐지기 위하여 무인 광야로 가는 아사셀(속죄) 양과 같아요.

 

또한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은 유월절 어린 양을 지칭하는 말이에요.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것은 인간의 조건이나 혈통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함은 이 예수님의 피로서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은 지금 전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조건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고 믿은 반면에 세례요한은 인간의 조건에선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 하는데,

세례요한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도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고 합니다.

이걸 요한복음에선 율법지킴이냐!

예수 믿음이냐! 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너희가 율법대로 살면 죽지만, 예수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네가 뭔데!

네 말을 들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느냐! 예요.

아니! 너보다 더 유명한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네가 뭔데!

네 말을 들으면 안 죽는다고 하느냐! 에요.

 

이 놈 또라이 아니야!

네가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

아브라함보다 더 능력 있는 자냐!

이 놈이 가만히 보니 귀신이 들려서 못할 소리가 없는 미친놈이구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래 내가 아브라함 보다 더 크다!

아브라함도 나 때문에 구원 받았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어서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말에 유대인들이 분개하면서 아니 이 놈이 뚫린 입이라고 어디서 말을 함부로 하느냐!

아직 오십도 안 된 새파란 놈이 어디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망발을 하느냐 라고 이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돌맹이를 찾으러 간 사이 예수님은 도망쳐 나온 겁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은 히브리서 42강 하나님의 맹세를 참고 하세요.)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말이 맞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고 있으니 난 당연히 예수님 편을 든다고 할 것입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을 보면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논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 편에 자기를 세워 놓습니다.

예수님과 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에 생각은 예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고요.

난 아니라고요.

글쎄요?

아니면 참 좋겠는데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 않으니 문제인 겁니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가! 살펴보아야지요.

예수님이 하는 성경 해석과 유대인들이 하는 성경 해석을 상고해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 말을 들으라는 것은 예수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인간 쪽에서 의로워 지겠다는 겁니다.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아요.

 

교인들이 성화론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 신앙을 행사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의 본성은 뭐든지 자기가 행사하기를 바래요.

내가 뭘 해야 한 것으로 여겨요.

 

기도도 내가 해야 한 것으로 여기고,

전도도 내가 해야 한 것으로 여겨요.

말씀도 내가 지켜야 지킨 것으로 여겨요.

누가 대신 하는 것은 자기 것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천당 간다고 믿습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여도 구원 받는다고 믿겠느냐?

또 내 대신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고,

내 대신 예수님이 전도하고 있고,

내 대신 예수님이 말씀을 지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구원 받는데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 여기에 주저 없이 아멘이 나와야 해요.

사람들에게 믿음 없음이 들통 날까봐서 오기로 하지 말고 진짜 마음속으로부터 전혀 두렵거나 거리낌 없어야 해요.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믿음이 없으면 없다고 해야지,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겁니다.

무엇하려고 신앙을 속입니까?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요?

하기야 지금은 교회가 장사꾼들 모임이 되었으니 없는 믿음도 믿음이 있는 척이라도 하여야지 교회의 중직도 되어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으니 속일 만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지 않아요.

 

그러니 차라리 예수가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하세요.

교회 다닐 필요가 없어요.

절간에 다니든지 교회를 다니든지 하여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는 식의 종교 놀음으로 다닌다고 한다면 말리지 않아요.

하지만 구원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 신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믿지요! 라고 하여도 이게 입술로 뱉어내는 고백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이성은 본질적으로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는 것이 쉽지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아서 불가능해요.

믿음은 우리가 만들 수가 없어요.

아무리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힘든 것이 뭔가 하면 예수 믿기에요.

믿어지는 사람은 그렇게 간단한데 안 믿어지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안 믿어져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금식하며 철야기도 해도 안 믿어져요.

 

이건 마치 미운 사람 사랑하라는 것과 같아요.

미운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사랑하는 척 흉내는 낼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랑은 안 되어요.

 

그러니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으로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아는 것하고, 십자가로 사는 것은 달라요.

많은 사람들이 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을 자랑해요.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삶은 생명의 흐름이에요.

 

바울이 그러지요.

그리스도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이는 자아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 자아는 여전히 살아서 세상에 대하여 살아 움직여요.

분명히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는데 실제론 그렇지가 않거든요.

물론 간헐적으로 순간 순간으로는 가능해요.

하지만 완벽하게 여일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이 틀렸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말씀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어요.

너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그런데 육신으로는 이게 불가능해요.

육신은 자아가 부인이 안 되어요.

자아가 부인이 안 되기 때문에 말씀과 늘 괴리가 생기게 되는 것을 깨닫고 늘 상한 심령일 수밖에 없어요.

 

이건 청승 떨라는 말이 아니에요.

자신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난 척 할 수가 없어요.

주눅 들어 살란 말이 아니고 자기를 내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유구무언이 되어요.

 

탕자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찬 밥 더운 밥 타박하겠어요.

못해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갈수록 환경을 탓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니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사람이 가장 힘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바울의 탄식처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좇아가고 싶은데 몸은 육신의 법을 따라가고 있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고백하였듯이 육신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우면 육신이 이겨요.

그러니 성도는 괴로운 겁니다.

성도라서 죄를 안 짓고 싶은데!

죄를 이겨서 봐라! 성도의 능력이 이런 것이라고 폼도 잡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단 말입니다.

죄를 이기고 싶은데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는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고 싶은데 보는 순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마음으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여야지 라고 하면서도 실제론 정 반대로 살아요.

마음으로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라고 하면서도 우린 늘 돈을 쫓아다니고 있어요.

마음으로는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나 자기 자신까지 다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고 싶은데 나타나는 것은 정 반대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디 가서 난 예수 믿는데요! 라는 말을 드러내 놓고 자랑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자기 꼬라지를 보면 양심이 찔리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육신은 이래선 안 되겠다고 하지만 늘 연약이라는 핑계로 무너져요.

그래서 전 죄인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정답대로 살 수가 없는 자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령의 법이 육신을 이기도록 하지 않았을까요?

성령이 육신보다 약해서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나 잘남을 남기고자 하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를 남기고자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무지하게 중요한 말인데!

잘 새겨서 들으세요.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우리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우리 몸은 성전이에요.

성전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려면 반드시 의로운 희생제물의 피가 있어야 해요.

죄인과 거룩한 하나님이 만나면 죄인은 죽어요.

그래서 의로운 제물의 피가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의로운 제물은 인간 쪽에서 내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것이어야 해요.

여호와 이레의 숫양같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란 바로 예수님이에요.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두루마리에 기록된 한 몸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성도의 몸에는 항상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해요.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듯이 성도의 심령에 예수의 피가 발라져 있어야 해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용서 받은 흔적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잘난 사람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고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한단 말입니다.

죄인이 잘나서 죄인의 영광이 드러나선 안 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영광은 범죄한 아담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그 몸은 아담의 몸이에요.

 

어떤 이들은 성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간헐적으로는 그럴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완전을 말하지 간헐적인 불완전을 말하지 않아요.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원해요.

퍼펙트하게 단 하나의 흠도 없는 것을 원해요.

 

그런데 죄인의 몸으로서는 모든 말씀들을 다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죄성은 막을 재간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느냐 마느냐는 성령이 왜? 오셨는지를 알면 알 수가 있어요.

성령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면 금세 알게 됩니다.

성령의 오심 자체를 이해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한다는 것은 정답이 아니에요.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오셨지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 주셨지요.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15=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보세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하지요.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들은 것을 말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고 하잖아요.

 

성령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종속 되어 일하세요.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어 졌기 때문이에요.

이는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독자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종속되어서 일하신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을 증거키 위함이에요

다른 말로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에요.

성령이 오셔서 왜? 예수님의 십자가로서만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인지 증거한단 말입니다.

성령은 항상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인지를 증거하세요.

 

성령은 성도를 개과천선 시켜서 천사를 만들고자 오시지 않았어요.

우리 몸에 예수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신앙생활을 자꾸만 보다 나은 자아 꾸미기에 힘쓰게 되어요.

 

이는 마치 낡은 집에 페인트를 칠해서 겉만 뻔지르르 하게 가꾸는 것과 같아요.

건물 자체는 낡아서 무너져 가는데 페인트칠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짓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속에는 해골이 가득한데 겉만 잔디를 입혀서 속을 가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을 개과천선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요.

도리어 썩은 것을 드러나게 하세요.

넌 썩은 놈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네 안엔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각종 더러운 것이 가득차 있다고 해요.

 

이건 자기 마음대로 막 살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령의 오심 목적과 일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세운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어요.

다른 말로 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키 위함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면 자기가 죄인임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운운하면서 발전된 자아를 가꾸고자 하는 것은 반칙입니다.

도리어 성령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더 드러나게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죄사함이 주어지고 구원의 능력임을 높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운운 하면서 자기의 괜찮음을 챙기고자 하는 것은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괜찮은 사람이 되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의 피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라고 미혹해요.

자기 몸에 자기 영광으로 가득 채우라고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아담의 영광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요?

이는 육신이 죄를 이기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육신이 죄를 이길 수가 없으면 하나님의 법대로 저주를 받아야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주 받을 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들고 옵니다.

죄 가운데서 은혜가 넘치도록 말입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몸에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가 터져 나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이기지 못한 죄를 예수님의 피로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 사는 나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령이 이를 증거해 주세요.

 

넌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고!

이걸 잊지 말라고 순간 순간 간섭을 해요.

성령의 간섭으로 깨닫게 된 성도는 예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이럴 때 우리 몸에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으면 내 영광이 드러나지만 난 저주 받을 짓을 했는데 저주보다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받아 주셨기 때문이에요.

성령은 일평생 성도의 몸에서 이 사건을 반복하여서 적용을 시킵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몸이 죄를 이기게 하지 않고 지도록 하면서 말이에요.

잘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못난 사람으로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입에서 나는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토해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넌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아느냐 라고 물어요.

이 역설을 알아야 해요.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허물보다 예수님의 피로 얻은 용서가 더 크고 소중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에 감사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사실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주여! 오늘도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다고 고백케 하세요. 

이를 일컬어 “입술의 열매”라고 하고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이를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한다고 하였답니다.

 

구약의 호세아와 신약의 히브리서를 봅시다.

 

호 14: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양은 기뻐야 나와요.

죄사함의 은총이 너무 너무 고맙고 기뻐야 찬양이 터져 나와요.

찬양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이에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숫 송아지 제물보다 귀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는 제사를 받지 아니하고 긍휼을 원한다고 했지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들고 나아가는 것보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한마디로 난 예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구약 마당에 이 사실을 알고 산 사람이 있었어요.

다윗이에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 이 사실을 알았어요.

자신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쓴 시가 시편 51편이에요.

 

길지만 한번 살펴봅시다.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먼저 다윗은 죄과를 도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를 긍휼이 여겨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죄악 중에 출생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란 말이에요.

 

그러니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즉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은 죄악 중에 출생한 원초적인 문제라는 것을 토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다고 하는 거예요.

아주 뻔뻔하지요.

 

그런데 이 시편은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난 뒤 하는 고백이에요.

그것도 자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단 선지자가 찾아 와서 죄를 폭로하니 하는 고백이에요.

아마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지 않았으면 시치미 뚝 떼고 살았을 겁니다.

살면서 누가 범죄하면 네 이놈 왜? 이런 죄를 지었느냐고 정죄하고 심판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의 죄를 고발하고 입을 막아 버린 겁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죄를 고발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입을 막고 계신 겁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지로부터 책망을 듣고 보니 주님의 자비로서만 죄가 용서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말로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지만 사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께서 꺾으신 뼈” 가 기쁜 소리이고 즐거움이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죄 때문에 애꿎게 희생당한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뻔뻔하지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대목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꺾으신 뼈” 라는 말이에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꺾으신 뼈” 란 말이에요.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야를 하나님이 다윗의 죄 때문에 죽였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 뻔뻔스럽게 주께서 꺾은 뼈를 보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말입니까.

우리야를 자기가 죽여 놓고선 그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해 달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성신을 거두어 가지 말라고 합니다.

성신을 거두어 가게 되면 이 놀라운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지요.

 

아니 어떻게 자기가 죽인 충신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서 낯짝이 두껍게도 하는 말이 자기 죄 때문에 우리야가 죽었다는 이 사실을 늘 기억할 수 있도록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성신이 거두어지면 이 우리야의 대신 죽음 때문에 자신이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기쁨을 소실할까봐서 염려하고 있잖아요.

 

아주 놀랍고 대단한 뻔뻔스러움이지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런 일을 범죄한 자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위해서 의로운 자를 피 흘리게 하셨다는 것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겁니다.

즉 우리 죄를 누가 대신 짊어져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는 말입니다.

 

자 이걸 신약식으로 해석해 봅시다.

주께서 꺾으신 뼈란 우리야의 죽음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선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랬어요.

우리는 예수님 보내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했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그 일이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예수 믿음으로 구원하는 일을 고수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가치가 손상되지 않도록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케 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의 고백처럼 주께서 꺾으신 뼈처럼 우리야가 다윗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듯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성도에게 보내주셨어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자기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 사실이 깨달아지면 기쁨이 충만하겠지요.

그럼 성령 받은 성도는 이런 사실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게 될 것 아닙니까.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위에 내용을 7절과 6절을 바꾸어서 읽어보세요.

그러면 예수의 피로 구속 받은 것을 찬미케 하고자 함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래서 은혜의 풍성함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자랑하고자 한다고 하잖아요.

 

이게 성도들의 고백이어야 해요.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하게 되어요.

아주 배짱이 생긴단 말입니다.

 

자! 여기서 귀한 원리 하나만 살펴봅시다.

성령이 임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이 깨달아지겠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자기를 위한 죽으심이란 것을 알겠지요.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고,

자신이 죽인 그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자기 죄를 용서해 주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그래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은 자기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세상에 자기가 예수를 죽여 놓고 그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해 달라고 하고 있으니 양심이 바른 사람 같으면 이걸 용납 하겠습니까?

못할 겁니다.

 

그래요.

그래서 양심이 바른 사람은 예수를 못 믿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 마땅한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양심이 바른 사람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정죄치 않고 용서해주는 그런 예수를 이해 할 수가 없어요.

탕자 비유에서 탕자를 용서하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소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맏아들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아니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놈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말이 안 되어요.

 

이 시대로 말하면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과 같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지 않고 산 성화주의자들 입장에선 탕자같이 하나님 명을 어기고 사는 자들을 용서해준다는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당연히 이단이지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의 피로서 용서 받고 산다고 말하는 자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에요.

 

그래요.

복음은 뻔뻔스러움이에요.

이런 뻔뻔스러움은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나타나요.

 

자식이 부모 앞에서 사는 길은 뻔뻔함입니다.

시험을 빵점 받고도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하는 자가 자식이에요.

마치 똥 싼 놈이 성낸다는 말과 같이 잘못하고도 큰소리치는 놈이 자식이란 말입니다.

자식에게서만 이런 담대함과 뻔뻔스러움이 나온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 주셨어요.

성도는 아들의 영을 받았어요.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앞에 뻔뻔스러울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건 아들에 영을 받은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하신다고 고백한 겁니다.

우린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로 우리 마음에 예루살렘 성을 쌓아야 해요.

 

시편 51편을 깊이 깊이 묵상하세요.

마치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과 같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주시는 용서와 기쁨과 감사가 눈물로 나오도록 말이에요.

이 말씀이 살아 꿈틀 거리면 엄청난 희열과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물밀듯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범죄보다 더 크고 넓어서 우리의 모든 죄과를 다 덮고도 남을 만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 사실에 감격하는 자유자로 사는 자들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자유함이 성도가 살아가는 힘이랍니다.

 

성도는 이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자유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는 정죄함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사단의 그 어떤 참소함에도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잠재우세요.

 

마귀에게 그러세요.

그래 난 죄인이다!

그래 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다!

나에게선 의가 없다!

 

하지만 날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는 그 약속을 하나님께 받았다!

난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이다!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이전에 죄 지으면 율법에 고소당하던 그 때의 내가 아니고!

이젠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는 예수 안에서 나 라고 하세요.

 

그러므로 마귀야! 넌 날 참소할 수가 없다! 라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이를 누가 감히 참소한단 말인가! 라고 뻔뻔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뻔뻔함입니다.

이 뻔뻔한 믿음이 마귀를 이겨요.

 

로마서 8장입니다.

 

롬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담대함을 버리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치 않았던 것은 죄인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정죄치 않는다는 것은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정죄치 않는다는 것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잘난 사람은 용서하고 자시고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치 않는 것은 죄인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가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각오를 다지고 의지를 불태우면 일시적으로는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적인 죄에 국한되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근원적인 죄는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저도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진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싶어요.

나보나 남을 낫게 여기고 싶단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살고 싶어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고 살고 싶어요.

하지만 마음뿐이지 실제론 그렇지가 않아요.

내 안에서 또 다른 한 놈이 내가 바라는 것과 정 반대로 나를 끌고 간단 말입니다.

이상한 놈이 내가 좌하면 우하고 내가 우하면 좌 한단 말이에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하고 있어요.

이게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즐기고 있어요.

여러분 죄인이 죄 짓는 것만큼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우리 몸은 죄 짓는 일에 단련이 되어 있어요.

본능처럼 툭 튀어나와요.

하루라도 죄를 안 지으면 온 몸이 근질근질해요.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 마음에 안 들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축복하고 싶습니까?

저주하고 싶습니까?

저주가 나와요.

 

우린 자기 몸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저주가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요.

아무리 말씀이 서로 사랑하고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 해 준 것 같이 용서하고 살라고 하여도 그렇게 안 된단 말입니다.

무조건 용서가 안 되어요.

 

왜? 그런가요.

다윗의 고백처럼 우린 죄악 중에 출생을 하였기 때문이에요.

죄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이에요.

죄가 우리 몸의 주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항상 상한 심령일 수밖에 없어요.

상한 심령이 되자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 일어나요.

자기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가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뿌려 주시는 겁니다.

마치 애굽에 장자가 죽어나가 질 때 이스라엘 집 문에다 피를 뿌렸듯이 우리 심령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 주신 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하지 말란다고 해서 마치 죄 짓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란 말은 아닙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하고,

죄를 즐기는 것하고는 달라요.

 

성도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집요하고 무서운지 알기 위해서 싸우라는 겁니다.

우린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해요.

그래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예수 안에선 무조건 용서 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해요.

 

성도는 이런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는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살고 있어요.

성령의 오심도 이 예수의 피를 증거키 위하여 오셨어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신 겁니다.

범죄한 사람들을 만나거든 정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를 내 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여야 하는 사명을 잊지 마세요.

 

베드로처럼 주를 부인하고 저주 하였음에도 용서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여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자책하고 넘어져 있으면 마귀만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증거케 하시려고 우리를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오늘도 살게 하셨답니다.

 

그러니 나 잘났어! 하지 말고 이런 죄인이 에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고 자랑하세요.

성도란?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사는 자에요.

 

부디 여러분의 입술에서 입만 열면 예수님의 피가 자랑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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