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68강. 유다와 다말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창 38:1-30)

댓글 0

♣.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9. 4.

 

 

68강. 유다와 다말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창 38:1-30)

-.정낙원 목사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누구를 계시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신약 성경은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교회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니까 우리 자신이라 여기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려내는 도화지입니다.

 

누가 그림을 그리느냐?

예수님이 그리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창세전에 하셨던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은 불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통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윤리 도덕적 입장에서 보면 막장 드라마처럼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다말의 간통 사건 속에도 복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럼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도 예수그리스도 이야기가 되겠지요.

겉으로 보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통사건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열린 문서이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닫힌 문서에요.

자기 백성들은 모든 성경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로 이해를 하지만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그냥 문자적인 이야기로 밖에 해석이 되지 않아요.

자기 백성들은 영에 속하였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육에 속하였어요.

 

영은 하늘이고, 육은 땅이에요.

영에 속한 사람은 하늘 이야기로 풀어가고, 땅에 속한 사람은 땅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하늘과 땅처럼 다르게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 이야기도 영에 속한 사람은 하늘 이야기로 해석을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인간들의 윤리 도덕 차원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하기에 앞서 지난 시간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고 갑시다.

 

37장에서는 뭐라고 했나요?

야곱의 약전에 요셉이 투입이 됐지요.

약전이란? 이력서와 같아요.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과 요셉은 같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과 다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채색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채색옷을 입은 요셉에게 꿈을 줍니다.

그 꿈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주란? 가문으로 따지면 장자이고,

국가로 따지면 임금이에요.

요셉이 야곱 가문의 장자이고 온 세상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꿈은 내가 꾸고 싶어서 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의 계시인 것입니다.

요셉의 꿈속에는 요셉의 운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을 꾼 요셉을 형제들에게 버림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선재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은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부터 종말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 마지막 때에 보내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3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옛적에 선지자로 말씀 하신 하나님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 하신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상은 종말이 되었어요.

그래서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하는 다니엘서에서는 이 세상에 일어날 제국을 네 짐승으로 이야기 하는데 넷째 짐승의 나라에 하늘에서 뜨인 돌이 나타나서 세상 나라를 끝장을 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넷째 나라가 바로 로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로마 시대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 임금은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마지막 때라고 하고 세상의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 속에 끼워져 있어요.

예수님의 오심은 영이 역사를 침노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전 기간은 영적으로는 마지막 날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보면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역사는 한 경점에 불과해요.

점에 불과해요.

마치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하루살이 인생은 한 경점과 같은 것과 같습니다.

 

하루살이의 하루라는 일생은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일생도 아닌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날입니다.

하지만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평생이에요.

 

누구에게나 평생은 길게 느껴져요.

하루살이는 하루 동안 평생 해야 하는 일을 다 합니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사셨습니다.

30년은 사생애를 사셨고 3년은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자기 백성들의 일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일생을 3년 동안 다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을 구약 이스라엘은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예수님의 3년의 삶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언약의 민족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가는 삶을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어요.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가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 속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보면 믿음의 선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누구는 이렇게 살았고 누구는 저렇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이들을 하늘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중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증인들의 첫 주자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고 합니다.

직역하면 “믿음의 시초이고 완성이신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이들 보다 역사 속에는 나중에 오셨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가지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살아야 하는 모습들을 선취적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 앞에 “믿음으로” 라는 주어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미리 살게 한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예수님의 삶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신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요?

자기를 버려서 자기백성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구조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요셉을 통해서 요셉을 버렸던 형제들이 살아납니다.

이렇게 될 때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통하여 살아가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버려지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성경의 순서적으로 전개가 된다고 하면 오늘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이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면 느닷없이 유다와 다말 사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37장은, 야곱의 약전에 요셉이 들어 있고 요셉에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곤 세겜 땅 도단에서 형제들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여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38장은, 유다와 다말의 간통 사건이 나옵니다.

39장은, 또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가 됩니다.

 

37장과 39장은 전부가 요셉의 이야기인데,

중간인 38장에 유다와 다말 사건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37장이 요셉 이야기이고,

39장도 요셉 이야기일 것 같으면,

38장도 당연히 요셉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유다와 다말 이야기도 요셉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을 가지고 요셉이 해야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중간에 유다와 다말 사건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다하고 다말 사건을 별도의 사건으로 보지 말고 요셉 이야기로 이어서 보세요.

그럼 유다와 다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가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늘나라 장자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 장자입니다.

그런데 그 장자가 죽어서 다른 장자들을 낳게 됩니다.

 

예수님은 실제 장자이고,

성도들은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장자들이에요.

실제 장자가 있고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장자가 있어요.

이걸 양자 라고 합니다.

 

양자는 참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로 인정해 주는데 조건이 있어요.

그것은 참 아들의 죽음으로 생겨난 자들이라야 합니다.

 

참 아들이 왜 죽었나요?

양자 될 자들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양자들은 참 아들의 죽음으로 생겨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 속에는 참 아들의 희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양자에게는 은혜가 담겨 있어요.

은혜가 양자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럼 양자는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은혜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안은 언약의 집안입니다.

그럼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실제 장자가 있고 양자가 있겠지요.

장자는 형제들을 위하여 죽는 자이고,

양자는 장자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아났는가요?

요셉이 죽고 형제들이 살아났습니다.

이러면 요셉이 참 장자이고 형제들은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 집안에도 두 장자가 있어요.

참 장자와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장자가 있어요.

야곱의 집안에 참 장자는 요셉이고 장자의 명분은 유다가 가지고 있어요.

 

역대상 5장을 봅시다.

 

대상 5:1-2절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이유로 장자권을 잃어버립니다.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은 아비의 지위를 훔쳤다는 것입니다.

 

이건 타락한 천사가 하는 짓이에요.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을 보면 타락한 천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지위를 찬탈하려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버렸습니다.

 

르우벤이 지금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넌 장자의 자격이 없어” 라고 장자권을 박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차서인 레위와 시므온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이놈들도 강간 사건에 연루가 됩니다.

동생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자 할례를 핑계 삼아서 세겜 사람들을 도륙하는 사건을 저지릅니다.

이게 언약 가문의 장자로서 결격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차서가 누구인가 하면 유다입니다.

유다가 장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기 전에 자식들을 축복 할 때 유다에게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유다가 야곱 가문의 장자라는 것입니다.

호적에 기록 할 때는 유다가 야곱의 장자에요.

 

그런데 역대상에서는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고 합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아버지가 인정하는 장자는 요셉이라는 뜻입니다.

육적으로는 유다가 장자이고,

언약적으로는 요셉이 장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게 두 장자가 있는 것입니다.

육적 장자와 영적 장자가 있는 것입니다.

육적 장자는 유다이고, 영적 장자는 요셉입니다.

 

유다는 먼저 났고, 요셉은 나중에 났어요.

유다가 형이고, 요셉이 동생이에요.

그런데 형(형제들)이 동생을 죽입니다.

 

영적 장자가 육적 장자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육적 장자들이 죽인 영적 장자를 통해서 육적 장자들을 살아나는 일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적 장자들인 형제들을 영적 장자인 요셉 속에 귀속을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 육적 장자들인 형제들은 영적 장자인 요셉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그대로 예수님과 유대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육적 장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적 장자로 보냈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 올 때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아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해 버립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먼저 난 자식들 앞에서 나중에 난 요셉을 채색옷을 입혀서 장자로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적 장자인 유대인들이 영적 장자인 예수님을 죽여 버렸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영적 장자인 예수님을 살려내서 육적 장자들인 유대인들을 용서하고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실제적 장자는 예수님이 되고 유대인은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 나라의 장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애굽의 장자가 다 죽어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어린 양을 죽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가 죽어야 할 자리에 어린 양이 대신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을 하나님의 장자로 삼아 버립니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를 하나님의 장자로 삼았다는 것은 어린 양이 곧 하나님의 참 장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임 당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참 장자가 죽은 자리에서 새로운 장자가 생겨난 것입니다.

새로 생겨난 장자가 바로 양자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과 성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것은 예수님을 모든 아들들 중에서 맏아들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서 맏아들이에요.

장자에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 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다고 하지요.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맏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고 합니까?

그 아들입니다.

그래야 그 아들이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장자를 통해서 다른 장자를 낳게 한다는 뜻입니다.

장자를 통해서 낳아진 다른 장자를 양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 장자이신 예수님을 죽이시고 장자의 명분을 얻은 양자들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양자들은 참 장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생겨난 장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들은 자기들을 양자로 만들어준 참 장자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럼 유다를 통해서 어떻게 장자가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봅시다.

 

실제 장자의 명분을 가진 요셉은 37장에서 애굽으로 팔려가서 없습니다.

그리고 족보상으로 장자인 유다가 등장합니다.

실제(언약적, 영적) 장자인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 가고 없으니까 육적으로 유다가 야곱의 가문에 장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장자는 아버지 집을 이어가는 자입니다.

야곱은 헤브론에서 살았습니다.

그럼 유다는 당연히 아버지 집에 우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아비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아비 집이 언약의 땅이라고 한다면 가나안 땅은 이방 나라와 같은 것입니다.

유다는 이방 나라에서 아내를 얻고 자식도 낳았습니다.

 

유다가 왜 가나안 땅으로 내려갔나요?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이 좋으니까 내려간 것입니다.

 

유다의 이름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자” 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고 한다면 자기 동족 중에서 아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헤브론을 떠나서 이방나라로 내려가 이방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자식을 낳고 살고 있는 것은 타락인 것입니다.

 

유다가 이방 여인을 통해서 세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악한 자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은 여호와 앞에서 악한 자이므로 죽였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엘이고,

둘째 아들은 오난이고,

셋째 아들은 셀라입니다.

 

본문 6-11절을 봅시다.

 

6-11절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취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유다가 장자인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죽이십니다.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모르지만 하여간 첫째 아들 엘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유대인들이 관습법인 계대 결혼법에 의하여 둘째 아들 오난을 형수인 다말에게 들여보내서 아들을 낳아서 형의 가문을 이어가게 합니다.

 

신 25:5-6절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계대 결혼법이란? 형이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 대신에 형수를 취해가지고서 자식을 생산해서 형의 기업을 잇게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를 취하고는 형에게 아들을 주기 싫어서 땅에 설정 해 버립니다.

이것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이 오난을 즉사 시켜 버립니다.

오난이 땅에 설정을 하였다는 것은 생명을 죽인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은 생명을 살리는 자이지 죽이는 자가 아닙니다.

생명을 죽이는 자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설정한 오난을 악한 자로 취급하여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모두가 유다가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자기의 잘못을 다말에게 전가를 시킵니다.

계대 결혼법에 의하면 막내 아들인 셀라도 다말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두 아들이 다말로 인하여 죽어 버리자 막내아들 셀라도 죽을까봐서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 보냅니다.

 

막내 아들까지 죽으면 유다의 가문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유다는 가문을 잇기 위하여 자구책을 강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말을 집에서 내어 쫓아 버린 것입니다.

 

다말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모두가 유다의 아들들이 잘못하여서 죽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며느리에게 책임을 지우고 집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이건 마치 형제들이 요셉을 버린 것과 같아요.

다말의 모습 속에 형제들에게 버림당한 요셉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과론 적으로 말하면 다말에 의하여 유다의 가문이 이어져 갑니다.

이건 마치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 의하여 기근에서 살아나서 가문을 이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말이 유다의 집에서 쫓겨난 후에 유다의 부인인 가나안 여자도 죽어버립니다.

유다의 부인이 죽자 유다의 친구인 아둘람 사람 히라가 유다를 위로하고 딤나로 가자고 합니다. 때 마침 양털을 깎는 축제가 일어나는 기간이고 해서 유다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올라간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지역에는 양털을 깎을 때는 축제를 하였습니다.

양털을 제철에 깎아주어야 양도 건강하고 새끼도 잘 배니까 연중행사로 하였습니다.

기간 내에 양털을 깎아야 하므로 서로 서로 품앗이를 해 주었습니다.

돌아가면서 오늘은 이 집을 해주고 내일은 저 집을 해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온 동네 사람들이 축제를 하였습니다.

 

양털 깎고 나면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해도 양들이 건강하게 새끼도 낳고 좋은 털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신은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 신입니다.

바알은 남편이고 아세라는 아내입니다.

바알은 풍요를 주는 신이고, 아세라는 다산을 주는 신이에요.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신전에서는 사제들과 부부관계를 맺는 의식이 성행하였던 것입니다.

 

여 사제는 아세라를 대신하고 남 사제는 바알을 대신하여서 제사를 지내려고 온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행음이지 가나안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룩한 종교 의식입니다.

그래서 양털을 깎는 시기에는 신전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유다가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다말이 들은 것입니다.

시아버지가 딤나에 양털 깎는 축제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다말은 양털 깎는 축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가 이방 신과 교합하는 것을 막고자 자신이 여 사제로 변신을 합니다.

 

다말은 비록 가나안 여자이지만 언약의 가문에 시집을 갔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족보에 따라가므로 다말은 야곱의 집안사람인 것입니다.

그것도 장자인 유다 집안의 며느리인 것입니다.

며느리는 집안의 대를 이어주는 막중한 사명을 가졌습니다.

 

가문의 대는 언약의 후손이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이방 신전에 가서 여 사제들과 행음을 하고자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말이 죽음을 무릅쓰고 유다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말은 유다의 가문을 잇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유다가 가나안 신전으로 올라갑니다.

이 때 다말이 과부의 의복을 벗고 창기의 의복을 입고 면복을 하고서 유다에게 다가갑니다.

 

유다가 다말에게 하룻밤 자자고 하니까

다말이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은 당장 염소 새끼를 줄 수가 없으니까

그 대신 약조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고서 하룻밤을 잡니다.

하룻밤 자고 난 후에 다말이 나중에 염소 새끼를 가지고 오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겠다고 하고는 서로 헤어집니다.

 

유다가 돌아가서 자기 친구 아둘람에게 염소 새끼를 보내서 약조물을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 아둘람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딤나 길 곁 에나임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창기를 찾습니다.

그러자 그 동내 사람들이 이 동네는 창기가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창기랑 하룻밤 잠을 잣는데,,,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런 일 없다고 합니다.

이에 아둘람 사람이 유다에게 가서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염소 새끼를 도로 돌려줍니다.

유다는 하는 수 없다고 하면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그냥 다말이 차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석 달쯤 지난 후에 유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소문을 들은 유다가 회를 내면서 당장 잡아 오라고 합니다.

친정에 가서 근신하고 있으라고 보냈더니,

어디서 간통을 해서 어느 놈의 아이를 가졌느냐고 노발대발합니다.

 

이에 다말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여 주면서 이 물건의 임자가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유다가 깜짝 놀랍니다.

 

이에 유다가 그럽니다.

네가 나 보다 옳은 자라고 합니다.

내가 틀렸고 네가 맞다고 합니다.

 

유다가 막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음에도 다말에게 주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유다의 가문을 잇고자 다말을 창기로 만들어서 유다의 씨를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 가문을 잇고자 창기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건 말이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이면 아브라함과 다윗이 예수님의 후손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꺼꾸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고 다윗 왕권도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에 다말이 올라가 있습니다.

이러면 다말이 예수님의 인생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다말 속에 예수님의 희생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유다는 우리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유다처럼 이방 신전을 기웃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쾌락을 위하여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언약의 후손인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간음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됩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8-21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바울이 눈물 흘리면서 호소합니다.

제발 땅에 것을 쫓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땅에 것을 기웃 거리느냐?

너희들이 땅에 것을 기웃 거리는 것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 좀 차리라고 합니다.

 

유다가 이방 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자식을 낳자 하나님이 다 죽여 버리잖아요.

가문을 멸문지화 시키고자 하잖아요.

그런데 그 기울어져 가는 가문을 이어 가기 위하여 다말이 희생을 합니다.

 

유다 가문은 다말의 희생으로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가문이 이어져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이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희생당하였나요?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셨나요?

자신의 희생으로 구원을 하셨습니다.

다말이 예수님의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다말을 통해서 혜택을 입은 유다는 우리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흠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희생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 되었어요.

아담이 범죄하자 흠없는 제물이 죽어서 아담을 살게 하였습니다.

이게 전 역사 속에서 확대 되어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바로 우리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인 것입니다.

 

다말과 유다 이야기가 다음 장에서는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애굽으로 팔려가고 난 후 야곱 가문을 이어갈 장자가 타락하자 다말의 희생으로 야곱의 가문이 이어져 가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말의 희생으로 야곱의 육적 가문이 이어져 가는 것을 통해서 야곱의 영적 가문의 근본인 언약은 영적인 장자인 요셉의 희생으로 이어져 가게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 중에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을 가지고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 이야기나,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나,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 이야기나 다 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니 유다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방 신전의 사제들과 음행하고자 기웃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짝 할 때마다 예수를 두 번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좀 심각하게 느끼세요.

정신 똑 바로 차리고 말이에요.

좀 부끄러운 줄 아세요.

 

예수를 한 두 해 믿었나요?

어떻게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마귀를 닮아 갑니까?

신앙이 퇴보 하느냔 말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상하게 초신자가 믿음이 훨씬 좋아요.

오래 믿을수록 이무기가 되어 가요.

꾀만 늘어서 눈치만 살살 살피고 게을러져요.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님 초림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고 있는 겁니다.

이 가면을 확 벗겨야 해요.

스스로를 이러한 말씀 앞에 세워 보세요.

내 꼬라지를 좀 보시란 말입니다.

점잖은 척 부처님 얼굴로 위선 떨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꼬라지를 보면 확 뱉어내고 싶어요.

왜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토해낸다고 하셨는지를 알게 되어요.

 

여러분들이 세상과 짝할 때마다 예수님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고 계세요.

아버지여 저 놈을 위해서 내가 죽었습니다.

내 피를 보고 용서해 주세요! 라고 대언하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언 때문에 우리가 하늘나라 장자의 명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세요.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구원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자기 백성 구원 하는 이야기는 창세전 언약 이야기입니다.

 

창세전 언약 안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인 것 같은데 그 속에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이 있고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종으로 살고,

새 언약 아래서는 아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의 순서가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나중입니다.

옛 언약이 먼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먼저 태어납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유다가 이방 여인을 맞이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유다의 두 아내를 두 언약으로 보세요.

 

유다가 두 여자로부터 자식을 낳았잖아요.

먼저 낳은 자식은 이방 여자가 낳았어요.

나중 자식은 다말이 낳았습니다.

 

이방 여자는 율법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낳아진 자들은 다 죽어요.

그래서 이방 여자에게서 낳은 자식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가 이방 여자와 낳은 자식을 악하다고 하면서 죽였지요.

이것은 율법 아래서 낳아진 자는 언약의 가문을 이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상징하는 이방 여자가 죽자 다말을 유다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말이 유다로부터 자식을 낳습니다.

이들이 바로 새 언약 아래서 낳아진 자들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는 은혜 아래서 낳아진 자들이 이어가야 합니다.

새 언약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 바로 은혜 아래서 낳아진 자들입니다.

 

새 언약은 흠 없는 분의 희생으로 주어집니다.

흠 없는 분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자가 유다 집안에서 다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다말이 낳은 아들이 유다 가문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의 신앙도 두 언약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먼저 율법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은혜 아래로 옮겨집니다.

언약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두 언약으로 다루어 가십니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들이예요.

그런데 정한 때까지 잠시 종의 위치에 둔다고 합니다.

 

종이란 율법 아래 두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교회에 오면 마치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듯이 강제로 예배와 기도와 봉사와 같은 교회 생활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를 어린 아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는 자율이 없어요.

강제에요.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신앙의 틀을 잡아가야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틀이란? 그릇과 같아요.

그릇이 만들어지면 내용을 담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은 은혜에요.

 

역설적이게도 은혜는 법 아래서 알게 되어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담고자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하려고 율법 아래 가두어 둔 것입니다.

 

자유를 알려면 구속을 당해 보아야 합니다.

천국을 알려면 지옥을 경험해 보아야 해요.

생명을 알려면 죽음을 먼저 맛 보아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임에도 일정한 기간 동안 종노릇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 전개되는 순서에요.

 

창세전 언약을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죄와 사망 가운데서 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 후손들을 이방 나라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이방 나라에서 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율법이 죄와 사망이에 가두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 아래 가두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가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교회에 오면 율법 신앙을 먼저 배우는 것입니다.

처음엔 율법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어요.

보람을 느껴요.

 

그러다가 서서히 지쳐가는 것입니다.

열심도 한 때이지 여일하지 않습니다.

남의 시선 의식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귀찮아집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의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싶기도 해요.

이 때는 교회 가는 것도 싫어요.

이게 영적 우울증이에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을 합니다.

귀가 활짝 열리기 시작을 합니다.

주님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들려지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맛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다메섹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썼어요.

바울의 서신서는 모두가 바울의 간증들이에요.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교리와 삶으로 풀어 놓은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이었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어요.

 

다메섹 이전에는 바울은 율법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집니다.

법의 사람에서 은혜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건 모든 성도들이 겪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도 율법 아래서 시작하였습니다.

종노릇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민족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들의 신앙은 율법 신앙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짐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벗겨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구약 이스라엘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고 이들을 데리고 거룩한 성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거룩한 성이란? 천국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 가두어진 구약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꺼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죄와 사망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에게 가서 이들의 죄값을 내가 다 청산을 했으니까 내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마귀는 죄인만 사망으로 가둡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값을 다 치렀으니 이제 더 이상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들을 다 내어 놓은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종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걸 전리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사로잡힌 자들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십일조에요.

하나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죄인을 사망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사망이 죄인을 가두고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지옥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자기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마귀에게 내 백성 내어 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 알겠습니다! 여기 있으니 데리고 가십시요!” 라고 내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모두가 다 무덤에서 나와서 천국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꺼내온 자들을 데리고 아버지에게 간 것입니다.

이들을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미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하나님이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속량합니까?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영을 받은 자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장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가 된 것은 예수님의 버려짐 때문입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에요.

다말의 버려짐으로서 장자권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가문 속에는 다말의 버려짐의 흔적들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말이 낳은 두 아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27-30절까지 봅시다.

 

27-30절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다말이 유다로부터 씨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잉태한 것입니다.

해산 할 때가 되어서 보니 손이 하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산파가 이는 첫째 놈이라고 여기고 홍색실을 그 손에 매어서 표시를 해 둡니다.

 

그런데 둘째 놈이 내가 먼저 나갈게 하고 자기가 먼저 새치기를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장자와 차자가 뒤 바꿔진 것입니다.

새치기를 하고 나온 놈의 이름을 베레스 라고 하고,

홍색실을 매고 나온 놈을 세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 가문의 장자권을 베레스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 유다 가문은 진짜 장자인 세라는 감추어지고, 가짜 장자인 베레스가 법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유다 가문은 가짜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짜가 장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가짜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짜 장자에요.

진짜 장자는 홍색실을 맨 자입니다.

홍색실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럼 진짜 장자인 홍색실을 맨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장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법통을 이어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나온 자들이 하나님의 장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장자입니다.

 

베레스와 세라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도 쌍둥이입니다.

옛 사람이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장자는 새 사람입니다.

그런데 옛 사람이 장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 놈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꿔치게 당하게 됩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다이고 다말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새 사람은 예수님처럼 버려짐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영적 장자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 속에 유다와 다말 이야기를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 장자를 낳는 틀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라는 틀 속에 집어넣고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없는 구원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쪽에서 십자가가 저주이고 죽음입니다.

그런데 세상 너머에서 보면 십자가 안이 천국인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세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죄로 풀무불 속에 들어갑니다.

불 바깥에서 보면 불 속이 지옥이고 저주입니다.

 

그런데 불 속에 들어가서 보니까 거기가 천국인 것입니다.

불 바깥이 지옥인 것입니다.

이것은 불 속에 들어간 사람에게만 보여요.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을 받을 자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보고 우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모두가 버림당한 사람들의 열전입니다.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버림당하는 삶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그 선두 주자가 예수님이고 마지막 주자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앞 뒤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품에 폭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 고난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 나라 장자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 살펴보고 마칩시다.  


어떤 곤충 학자가 나비가 나방에서 나오는 것을 관찰을 하였어요.

애 벌래가 부화를 하고 고치를 뚫고 나오는데 조그만 구멍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게 나오는지 안쓰러운 것입니다.

곤충 학자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한 가지 실수 했구나!

구멍을 크게 해서 해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곤충학자가 가위를 가지고서 구멍을 크게 내어 주었어요.

나비들이 고맙다고 쑥쑥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치에서 나왔으면 하늘로 훌훌 날아가야 되는데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전부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관찰을 하니까

나비 어깨에 큰 영양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고치에서 좁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이 놈을 떨어뜨려야 하는데 구멍을 넓게 뚫어주니까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올 땐 좋았는데 나오고 나니까 어깨에 짊어진 영양덩어리 때문에 날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비에게 있어 좁은 구멍은 고난이지만 그것이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고치 안에 있는 나비는 우리 옛 사람과 같습니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일컬어 옛 사람을 장사 지내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을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서 날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죽이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우리에게는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즐겁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 덩어리들을 떨어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고난인 이유는,

첫째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떡의 기치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과 다른 의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광의적으로는 온 세상을 말하지만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의를 가진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인간의 가치를 의롭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봅시다.

 

마 5: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지요.

핍박을 받을 자인가요?

핍박을 받은 자인가요?

 

이미 받은 자이지요.

앞으로 받을 것이 아니고 이미 받았어요.

미래 시제가 아니고 과거 시제로 쓰고 있습니다.

 

왜 과거 시제로 쓰고 있나요?

이는 창세전 언약 속에 이미 우리의 고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속에 우리도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너희를 핍박하면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서 있던 선지자들도 그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표입니다.

아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그 속에 예수를 품지 않은 자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아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것이구나!”

“내 속에 예수가 있으니 고난을 당하는구나”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입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 받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복음으로 인하여 누가 욕을 하거든 웃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땐 아 내가 예수라는 보화를 품고 있구나 생각하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디 남은 인생은 복음으로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유다입니다. 유다처럼 간음하는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셨음을 고백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범사 속에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비록 주를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일지라도 좌고우면 타협치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당할 때 이미 얻은 구원이기에 당하는 아픔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아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