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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65강. 목자의 죽음과 양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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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9. 8.

 

 

65강. 목자의 죽음과 양의 구원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우리는 성도와 예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자기 양을 안다는 하지요.

이는 목자와 양은 서로가 서로를 본능적으로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전에 만났던 경험이 있는 구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 알아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들은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애초부터 예수님의 양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야곱과 에서처럼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일에 두 민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두 민족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게 창조에요.

성경이 구원을 창조로 말하는 것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양이 염소가 되고 염소가 양이 되는 법은 없어요.

영생주기로 작정 된 예수님의 양은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쪽에서 양이 되는 길은 없어요.

염소가 노력한다고 해서 양이 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염소로 양은 양으로 각자 창조가 되었듯이 야곱과 에서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양을 찾기 위함입니다.

자기 양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세요.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목자가 양을 찾아가요.

왜냐하면 원래 목자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목자가 양을 찾아내는 일이지 양이 목자를 찾아 나서는 일이 아닙니다.

양은 자기가 잃어버려진 것도 모르고 사는데 목자가 찾아내요.

 

이건 마치 잃어버린 자식을 부모가 찾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나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지요.

이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란 말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양이 목자의 생명으로 산다면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사는 자란 말이 됩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가시고기란 책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면 죽어가는 자식을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의 장기를 이식하여서 자기는 죽고 아들을 살려냅니다. 

장기를 이식받은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살고 있는 거구요.

 

이걸 목자와 양에게 적용하면 양은 목자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정리하면 목자가 양을 찾는데 어떻게 찾느냐 하면 자기 목숨을 버려서 찾아요.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합시다.

 

양과 목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하는 것은 혈연(血緣)관계란 말입니다.

혈연관계란? 외부 조건에 의하여서 나누어질 수 없는 특수한 관계에요.

그러니 목자와 양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갈라놓지 못하고 떨어질 수가 없어요.

 

구원이란? 한마디로 자기 핏줄 찾기입니다.

흔히들 핏줄은 서로 당긴다고 하지요.

예전이 이산가족 찾을 때 보았지요.

핏줄은 뭔가 끌리는 것이 있어요.

그냥 이유 없이 끌어 당겨요.

그게 핏줄이에요.

 

그래서 목자와 양은 서로 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경험적인 앎을 말해요.

마치 부부가 한 몸이 되어서 서로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에는 서로가 아는 것이 있어요.

이건 둘이 하나가 된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목자와 양은 처음 만나지만 오래전에 만난 경험이 있는 것처럼 친숙해요.

설명을 할 순 없지만 그냥 양은 목자의 음성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은 강요될 문제가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같은 핏줄은 서로 알아보게 되어 있으니까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같은 핏줄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어요.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양들은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목자가 죽으셨구나!

믿어져요.

그래서 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자가 양을 찾는다는 겁니다.

 

양이 목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양을 찾아 와요.

내가 찾아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공로가 전혀 없어요.

오로지 목자의 공로만 오롯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이 졸졸 따라 와요.

그런데 목자가 자기 양들을 찾아내는 것도 다 때가 있어요.

때와 기한을 정해 놓고 찾아낸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으로 말하면 각 사람마다 부를 때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성도마다 정한 때가 있어요.

사람마다 구원 받고 은혜 받을 때가 달라요.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세요.

 

마치 드라마 연출자가 극에 전개 상황에 따라 탤런트를 캐스팅해서 출연 시기를 정하는 것과 같아요.

어떤 탤런트는 일찍 출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늦게 출연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성도가 예수님의 구원 드라마에 들어가고 나오는 때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연출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처럼 복중에서부터 예수를 알아본 자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성년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도 있으며!

어떤 이는 사도 바울같이 율법 아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만날 수도 있어요.

 

이를 예수님이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들어가 일하고,

어떤 사람은 점심 때 들어가 일하고,

어떤 사람은 저녁 때 들어가 일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놀고 있었는데 주인이 불렀어요.

포도원을 천국이라고 하면 놀고 있었다는 말은 천국과 상관없었던 자란 말이에요.

원래 이방인은 천국과 상관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구원의 길을 열어 준 겁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초점은 품꾼에게 있지 않고 주인에게 있어요.

놀고 있던 자들을 포도원으로 불러준 주인의 은혜성을 말해주고자 하는 비유에요.

그래서 주인이 일에 능률을 따지지 않고 일찍 온 자나 나중에 온 자나 동일한 셈을 하는 겁니다.

 

이는 삯을 준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푼 겁니다.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품삯을 동일하게 주었다는 것은 노동의 댓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삯으로 여기는 자는 주인이 포도원에 부른 이유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삯이란? 일한 댓가에요.

품꾼 입장에서 보면 일을 하였으니 당연히 받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기 있어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놀고 있던 자를 주인이 불러 주었다는 겁니다.

 

주인이 일을 시키기 위해서 불러준 것이 아니고 놀고 있기 때문에 불러서 일당이라도 주어서 집에 처자식에게 밥술이라도 먹이라고 은혜를 베푼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놓치고 난 일했으니 당연히 일당을 주세요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주인이 불러준 은혜를 모독하는 겁니다.

 

일꾼은 자기가 놀고 있던 자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어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는데 주인이 불러주었다는 것을 잊게 되면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어요.

죄가 뭐냐?

은혜를 잊는 것이에요.

은혜를 잊으면 자기 의를 내 세워요.

 

죄인이 이런 자에요.

오죽했으면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겠어요.

이는 인간들은 은혜를 베풀면 고마움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인간사를 둘러보면 꼭 은혜를 받은 인간들이 배신을 하고 등 뒤에서 총질을 해요.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일찍 온 자들이 늦게 온 자들과 똑 같이 대우해 준다고 화를 내지요.

일찍 온 자들은 노동의 댓가로 보고 주인에게 따지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게 바로 죄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고자 일부러 주인이 늦게 온 자들로부터 셈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일찍 온 자들 앞에서 가장 늦게 온 자들에게 약속한 일당을 먼저 주니까 일찍 온 자들이 오해하기를 자기들은 늦게 온 자들보다 훨씬 일을 많이 했으니 더 많은 댓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동일하게 대우하자 주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이는 주인의 은혜를 욕으로 갚고 있는 겁니다.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원망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런 놈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잘나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아닌데도 마치 자기들이 잘나서 된 것처럼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예수님이 죄인들과 상종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주인의 은혜를 모독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일찍 온 자들은 유대인을 말해요.

늦게 온 자는 세리와 죄인이기도 하지만 이방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이나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조롱했어요.

 

이건 일찍 들어온 포도원 품꾼들처럼 주인에게 셈이 틀렸다고 따지는 것과 같아요.

결국 주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어요.

알량하게 일을 조금 더 했다는 자기 의 때문에 말이에요.

 

이런 자는 천국에 들어가선 안 되어요.

천국은 자기 의가 있는 자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당해요.

천국은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에요.

그래야 세세토록 예수님에게 감사하게 되어요.

 

이러한 사고는 성도의 신앙생활 전반에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자랑하지 않고 감사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부르심 속에는 인간의 조건은 아무소용도 없어요.

 

1년을 믿었느냐!

10년을 믿었느냐!

50년을 믿었느냐!

목사냐!

집사냐! 라는 직분조차도 의미가 없어요.

 

1년이든 50년이든 예수가 믿어지게 해 준 것을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목사냐!

집사냐! 따지지 말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제자들이 그 일이 어떤 겁니까? 라고 물으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일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앞에선 예수 믿는 것이 일이에요.

 

그런데 예수는 인간이 믿을 수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 내가 1년을 믿었다거나 50년을 믿었다거나 라는 신앙 년수를 자랑할 것이 아니지요.

또는 나는 목사다 나는 평신도다 라는 것도 자랑할 것이 못되지요.

굳이 자랑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셨다는 것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난 몇 년을 예수 믿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고 예수 믿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게 자신은 놀고 있던 자였는데 주인이 포도원에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제발 예수 믿는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세요.

 

성도는 자신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요.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으로 되어진 것을 알아요.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의 은혜 성을 말해주면서도 각 사람마다 부름 받은 시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때가 되매 이 세상에 오셨듯이 성도들도 각자의 때를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 한국 땅에 태어나 예수를 믿는 것도 다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에 의해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셨기 때문이에요.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셔서 믿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이 노력하거나 애를 쓸 문제가 없어지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불러서 포도원에 들어가듯이 하나님이 예수 믿게 해 주셔서 구원을 받았기 떄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지요.

그리곤 문을 잠가버립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천사들을 보고 보초를 세워서 인간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 에덴동산의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들어 갈 수가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이 이와 같아요.

 

구원이란? 죄로 쫓겨났던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에덴동산에 살아갈 양들을 찾아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찾아내세요.

양이 애쓰지 않아도 목자가 알아서 다 찾아내요.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 양이 애쓰거나 노력 할 필요가 없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하여서 구원이 이미 예정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럼 교회 다닐(예수믿음) 필요가 뭐 있느냐!

교회(예수 안 믿어도) 안 다녀도 구원 할 자는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빈정거립니다.

반대로 내가 만약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라면 평생 교회 다녀도 헛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 다닐 필요가 없이 세상에서 즐기며 살아야지! 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아니 목자가 양을 찾아 주었다는데,

이게 어찌 빈정거리고 따질 문제입니까?

감사하고 살아야지 어떻게 그럼 난 뭐냐! 라고 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셨어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제가 틈만 나면 강조하는게 뭡니까?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피조물의 존재에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에요.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만물이 주를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이에요.

이것처럼 창조(구원)에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말씀도 없어요.

 

창조란? 구원이에요.

누구를 위한 구원인가 하면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에요.

그러니 나 구원 받았다고 설레발을 떨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 나를 따르는 길을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길이라고 했지요.

이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난 예수님을 위한 소모품이다!

예수님이 사용하다가 언제든지 폐기 시킬 수가 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각종 TV 방송국에서 그해 드라마를 빛낸 연기자들을 시상하는 연말 시상식이 있지요.

대부분 시청률이 높게 나온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이 상(賞)을 탑니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을 보면 이런 좋은 작품에 출연케 해 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번 KBS 시상식을 보니 “아이리스” 라는 드라마에 출연한 탤런트들이 상을 받았어요.

거기 보면 김태희가 여자 부분 우수연기상을 받았어요.

이는 그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아서 대박이 났기 때문에 받게 된 겁니다.

그러니 김태희는 좋은 드라마에 캐스팅 된 것이 상을 타게 된 복인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에 캐스팅이 된 탤런트들이에요.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세례요한도, 거지 나사로도, 스데반 집사도, 바울도, 지금 우리도 되었어요.

 

우리도 김태희 같이 상을 받아요.

거지 역이든, 돌에 맞아 죽는 역이든 드라마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 하나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이걸 알면 감사가 되고 모르면 불평이 생겨요.

감사와 불평은 선악과처럼 샴쌍둥이에요.

감사하면 불평이 사라지고 불평하면 감사가 사라져요.

 

저 같은 입장에서 보면 교인이 맞니 적니 불평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일에 세워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에요.

이런 영광이 어디에 있겠어요.

 

성도는 이런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반차에 속한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해요.

복음을 안다는 것 이상 더 큰 대박이 없어요.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사람의 일은 우리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래 가요.

그러니 살다보면 오늘 건강하다가 내일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멀쩡히 길을 가다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번창하던 사업이 갑자가 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예수님의 주인공인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기 때문에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에요.

그러니 범사가 감사 되는 겁니다.

 

이게 안 되면 난 행복해야 돼!

난 건강하게 잘 살아야 돼!

눈만 뜨면 어떻게 살까 근심 걱정 하게 되어요.

 

이런 근심 걱정을 한다는 것은 신앙이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왜? 예수 믿게 해 주었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매사에 불평이고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구원 얻은 신앙이란? 기쁨이고 소망이에요.

구원 속엔 실패가 없어요.

그래서 감사한 겁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를 해체시키는 일이에요.

난 죽은 자다!

난 내 인생이 없다!

오직 주를 위한 인생만 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만 자랑되어지면 난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라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어요.

온통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결국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죄가 폭로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주일날 오전예배 시간 때만 생각하면 끝이에요.

교회 문 열고 나가는 순간 예수는 없어요.

예수님을 전부 교회에다 가두어 두고 돌아가요.

행여라도 예수님이 집에라도 따라 올까봐서 교회에다 가두고 자물쇠로 채워 놓잖아요.

 

밖에 나가면 돈 쫓아다닌다고 예수님 생각 할 틈이 없고!

집에 들어오면 TV드라마 본다고 예수님 생각할 겨를이 없고!

세상 돌아가는 일엔 줄줄 꿰는데 복음에 대하여는 무관심이에요.

 

그러다가 주일이 닥치면 일주일 동안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는 성경을 쌓인 먼지 털어내고 들고선 교회에 옵니다.

설교를 듣는 둥 마는 둥 그져 건성 건성으로 믿음 있는 척 지식으로 아는 예수 이야기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요.

 

그러니 신앙이 물과 기름처럼 예수님과 겉 도는 것입니다.

이런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렇게 사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다니까요.

 

신앙생활을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하여 하고 있잖아요.

성경에 보면 이런 구원은 없어요.

그러니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엉터리인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제가 늘 싸우는게 그거에요.

제발 관심사를 예수에게 좀 두고 살아라!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사느냐! 라고 싸우잖아요.

 

물론 소귀에 경(經) 읽기에요.

하지만 싸워야해요.

그래야 자신들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악당인줄 알지요.

저는 여러분들의 죄를 고발하는 악역을 맡았어요.

 

다시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한다고 하니 폼 나게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가는게 아니에요.

폼생 폼사가 아니에요.

그냥 하루 하루 주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아픔들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달리 고난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복음 속엔 그리스도의 고난이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핍박받고 욕먹는 일들이 생겨요.

그러면 아!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욕을 먹기 위한 선택된 소모품이지!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해요.

 

물론 쉽지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구약엔 선지자들이 이런 삶을 살았고 신약에선 12사도들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속된 말로 거지 발가락의 때만치도 못한 존재감 없이 의미 없이 살았어요.

 

세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의 기록은 인간 역사엔 없어요.

세상 역사에는 영웅호걸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예수 때문에 핍박받다가 죽은 스데반의 기록은 없어요.

세상에선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반대로 세상 역사는 다 사라지고 스데반처럼 예수 때문에 돌 맞아 죽은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원전 수주한 것은 대서특필하지만,

목사들이 복음 전한다는 것은 기사거리가 안 되어요.

세상에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었다는 복음은 의미가 없어요.

이런 사고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서울에 있는 사랑의 교회가 3천억 들여서 성전 짓는다는 것은 교계에서 이슈거리가 되어도 목사가 복음 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존재감이 없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에요.

 

사람이 제일 서러운 것이 존재감이 상실 되는 겁니다.

남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있어도 없는 것처럼 취급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출세하려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공하고 출세하고자 하는 것도 모두가 세상의 시선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려는 겁니다.

 

3천억 들여서 성전 짓는 자들도 다 그런 부류들이고 재산 팔아 헌금하는 교인들도 동일해요.

성전도 아닌 것을 성전이라고 짓는 것은 인간들에겐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큰 건물 지어놓고 성전이라고 하면서 나 이 조직에 속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거기서 위안 받고 싶은 겁니다.

 

이 시대는 목사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것을 실패라고 해요.

그래서 너도 나도 성공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에서 실패하면 저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고가 결국엔 실패하지 말고 고난 받지 말라고 가르치게 되는 겁니다.

고난당하면 놀래고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산상보훈을 보면 분명히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했는데 지금은 복음 전하다가 핍박당하면 재수 없다고 여깁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스러워요.

복음을 알아도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이 시대 교인들의 정서로 보면 십자가 복음 전하면 이단이에요.

 

그런데 막상 이단이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요.

당연한 말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나빠요.

그만큼 우리는 그 조직에서 따돌림 당하는 것을 싫어해요.

 

복음을 아는 우리라고 해서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도 동일해요.

다 육신을 편하게 하고 싶어한단 말입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우리 육신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고자 한다는 악당임을 안다는 거에요.

 

육은 세상을 이기지 못해요.

육신의 소욕을 못 이겨요.

그래서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은 육신을 못 이기니 예수 믿으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가 너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주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늘 너는 안 된다고 자기 부인을 하도록 역사를 해요.

하지만 우리 육신도 한 고집 하거든요.

 

그래서 성도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늘 싸우는 겁니다.

우리 생각엔 성령의 소욕이 육신의 소욕을 이길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에요

하나님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고 내 생각대로 산다구요.

 

여러분은 하루 24시간 중에 얼마나 주님의 뜻대로 사나요?

아마 1분도 안 될 겁니다.

아니지요.

아예 주님 생각이 나지 않지요.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신자라고 자랑합니다.

맞아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 맞다고 자랑하세요.

자랑하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고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참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우리대로 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일하세요.

우리는 열심히 죄짓고 살고 예수님은 열심히 죄를 용서해 주세요.

딱히 무슨 죄다가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니 죄 짓고 사는 거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여전히 용서하신다는 겁니다.

 

이 약속이 우리 심장에 잘 박힌 못처럼 박혀 있어요.

이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해요.

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아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범죄 중에서도 감사 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육은 절대로 하나님 뜻에 순종이 안 되어요.

순종이 안 되는 것은 육신이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하고 죄를 짓고 사는 것하고 달라요.

죄를 못 이긴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을 말해주는 겁니다.

넌 이런 종자 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하지만 죄와 싸워야 해요.

싸워서 못 이긴다는 것을 알아야 예수님의 대속하심이 엄청난 은혜임을 알게 되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생활은 실패 속에서 은혜를 깨닫게 되어 있어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복음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성도는 이걸 아는 사람이에요.

자기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아요.

이러할 때 하나님이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왜? 내 대신 지셔야만 했는지를 알아야 해요.

왜? 내 독자적으로는 구원이 될 수가 없고 예수 안에서 되는지 깨달아야 해요.

왜? 예수 안에서만 의롭게 되는 줄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잡게 되어요.

 

독자적인 구원은 없어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에요.

예수 안에서 구원 한다는 것은 인간의 외모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잘잘못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는 인간의 잘남과 못남에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선 다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는 인간이 잘 낫든 못 낫든 따지지 않는 겁니다.

 

이건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 발라지면 그 집안에 도덕군자가 있든 깡패가 있든 상관치 않고 구원이 된 것과 같아요.

노아 시대 홍수 속에선 도덕군자나 깡패나 소용없어요.

홍수가 도덕군자는 피해가고 깡패만 삼키지 않았어요.

도덕군자도 방주 밖에 있으면 죽었고, 깡패도 방주 밖에 있으면 죽어요.

 

반대로 도적군자든 깡패든 누구든지 방주 안에 들어간 자는 다 살아나요.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정한 짐승들도 있었지요.

짐승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인간적으로 정결하다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정결과 부정을 보시고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방주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세요.

율법대로 산 바리새인도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고 세리와 창기도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아요.

심판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따지지 않고 예수 안이냐 밖이냐 로 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도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고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산 세리나 창기라 할지라도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어요.

 

욥 35장 5-8절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6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보세요.

네가 죄를 범한들 그게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그게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느냐!

반대로 네가 의로운들 그 의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의 선과 악을 보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나고 못나고를 보지 않아요.

예수 안 믿으면 잘나도 죄인이고 못나도 죄인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잘나고 못나고를 하나님 앞에서 따지지 말란 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세계에 선과 악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이 정의하는 선과 악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인간 중심으로 선과 악을 규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선과 악을 규정해요.

성도라면 이런 하나님의 안목으로 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이걸 에덴동산에서 이미 보여 주셨어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않아서입니다.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생이 없는 자는 사람취급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세요.

그 안에 영생이 없는 자는 수(數)에 칠 가치도 없는 송장들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선 영생이 없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신약에 오면 영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지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선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하는 자이므로 에덴동산에서 살아요.

예수 안 믿으면 다 죽은 자에요.

반대로 예수 믿으면 다 영생하는 자이고요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면 망해도 망한 자가 아니고 죽어도 죽은 자가 아니에요.

반대로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성공해도 망한 자이고 살아도 죽은 자에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니 안심하고 사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 중심으로 죄와 의와 심판이 따로 생긴다고 하셨어요.

성령이 오시면 인간이 알고 있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립니다.

성령이 오신 이후엔 인간이 알고 있던 죄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죄가 되어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율법적인 죄관을 가지고 있어요.

 

율법적 죄관은 욥기가 말하는 죄관이에요.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판단하는 죄관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면 예수를 믿느냐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좌다 아니다로 판단해 버립니다.

율법적으로 도적질 하면 죄인데도 그 도적이 예수를 알고 믿으면 죄가 안 되어요.

 

이걸 성령을 받지 않은 인간들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니 율법적인 죄관으로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한 겁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이렇게 율법으로 판단하는 것을 죄라고 했어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면 선으로 말하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말하면 악이라고 말해주어야 해요.

그러니 하나님의 선악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지금 욥기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따로 있기 때문에 땅에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운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땅에서 죄악이 관영한들 또 선이 가득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 라고 합니다.

모두가 죄라는 독에 가두어져 있는데 새삼스럽게 죄다 아니다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선과 악에 영향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바퀴벌레의 선과 악을 의미두지 않듯이 하나님도 죄인의 선악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구원이란?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옮겨진 것이에요.

은혜라는 동네에는 모든 것이 은혜에요.

다 용서가 되는 겁니다.

 

욥에게 변론하는 자들은 전부가 율법이라는 틀 속에서 변론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주둥이 닫으라고 하는 겁니다.

땅에서 착하게 살았다고 하나님께 인정해 달라고 까불지 말고,

반대로 땅에서 악하게 살았다고 하여서 기죽을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다 심판의 대상이에요.

 

노아 시대는 방주로 나타났어요.

방주 안은 구원이고,

방주 밖은 저주에요.

방주 안에 있는 것들은 선으로 간주되어 다 살아났고,

방주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악하다고 하여 심판을 했어요.

 

이 방주가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고 심판하시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길을 막아 놓은 것은 죄인의 구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면 악한 강도라도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막아 놓으면 공자라도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이걸 오늘본문에서는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귀를 받은 자만 들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귀를 받은 자를 찾아내시고자 성령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뭘까요?

이는 성령이 왜? 보내지셨는지를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을 보면 보혜사가 오셔서 할 일을 말해주셨어요.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4장에선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15장에선 그가 예수님을 증거하신다고 합니다.

16장에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듣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란? 율법 외에 다른 의(義)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이 없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극도로 싫어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인간의 행함을 부정하였기 때문이에요.

왜? 인간을 무시하느냐?

인간의 가치도 좀 인정해 달라는 말이에요.

 

복음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요.

성령을 받으면 인간은 가치 없다고 말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양들은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고 종국엔 이단이라고 축출 당하게 됩니다.

목사나 교인이 교단이나 교회로부터 버림당한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두려운 겁니다.

 

지난 시간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장선에서 말한다고 했지요.

9장에 보면 나면서 된 소경이 예수님에 의하여 눈을 뜨고 유대인으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가 핍박을 받으면 두려워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선 성도의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와 같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1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특수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에요.

하나라는 말은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걸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이 끊어질 수 없듯이 목자와 양의 관계고 끊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얼마나 질기냐 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가 없어요.

바울은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장 35-39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잘 음미해 보세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라고 하지요.

이는 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어요.

천사들이나, 권세자이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로도 끊어지지가 않아요.

 

이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에요.

천사란 영물인데 여기선 마귀를 말해요.

마귀도 성도의 구원을 끊지 못해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협이나 칼이란 외부적으로 오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 전하다가 불이익을 당한다고 하여도 낙심치 말라는 겁니다.

온 세상이 이단이라고 하여도 구원은 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근이나 적신이나 하는 것들은 살아가면서 당하는 아픔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을 밥 먹듯이 당하였어요.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붙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이 닥치더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설령 사고 나서 죽는다 하여도 부활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처럼 죽어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에요.

성도의 구원이 얼마나 안전한가 하면 죽음까지라도 갈라놓지 못해요.

그러니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성도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 10장 29절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 손을 챙겨 잡고 시장에 다니듯이 그렇게 다닌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요.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붙잡고 있으면 수시로 놓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너무도 화려하고 우리 눈길을 사로잡고 발걸음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가지 못하듯이 한다구요.

이 때 엄마가 아이 손을 꽉 잡고 낚아채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그 믿음을 우리 힘으로는 지켜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믿음을 우리에게 관리하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관리 하시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예수를 주로 믿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관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관리해 주셨듯이 앞으로도 관리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취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취소 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간 것도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을 관리해 주시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베드로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했으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한 것 때문에 돌아가지 않아요.

그렇게 욕을 하고 저주 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볼 면목이 있겠어요.

 

인간이란? 자존심이 죽기보다 강해요.

그래서 인간들만이 자살을 하는 겁니다.

왜? 자살 합니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왜?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하고, 재벌 총수가 자살을 하고, 연예인들이 자살을 합니까?

이는 모두가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으로서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인간이 아니다! 라고 항변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줄 아세요.

그 근본 바탕엔 자존심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누구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수치스럽게 여겼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날 믿으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널 믿느냐! 라고 비웃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날 믿어야 의로워진다고 하자!

바리새인들은 무슨 말을 하느냐!

우린 율법대로 살기 때문에 의롭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겠다고 하는 의는 저기 저 세리나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했던 겁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어요.

그래서 스데반을 죽였어요.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180% 달라졌어요.

어제까지 이단이라고 하던 말을 자기가 하고 있는 겁니다.

친구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된다고 하자!

바리새인 친구들이 너 미쳤구나!

예수 믿어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쪽팔리지도 않느냐! 라고 힐난했어요.

 

그러자 바울이 그래 난 예수 믿어서 의로워지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믿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관리하시는지 아시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인간의 각오는 믿을게 못되어요.

자기 육신의 유익에 따라서 조석으로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해요.

인간의 본성은 늘 살기 위해서 보이는 힘을 따라 움직여요.

 

예수님이 만약 힘이 있었다면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려서 잡으러 온 놈들을 즉사시켰으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순순히 잡혔어요.

잡혀서 침 뱉음 당하고 조롱당하면서 귀싸대기를 맞았다구요.

그러니 제자들 입장에선 저렇게 힘없는 예수를 따르다간 자기도 죽게 생겼으니 극구 부인하고 저주한 겁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금방이라도 예수와 함께 죽을 것 같다가도 금새 예수를 배반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안 믿는 겁니다.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믿음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인간의 열심과 충성은 자존심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인간들 특유의 오기를 발동해서 일시적으로는 착한 인간으로 살 수 있어요.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그랬어요.

얼마든지 외형적으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영화배우들처럼 얼마든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연기 할 수가 있다니까요.

이걸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했어요.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가능해요.

물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쩌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인드 콘트롤로 흉내는 낸다구요.

화가 나도 참을 수 있어요.

비록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겉으로는 온유한척 나타나지 않게 할 수가 있어요.

실제로 성화론을 주장하는 설교를 들으면 미우면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삭히라고 해요.

 

성화론은 믿음이 아니고 도(道)를 닦는 겁니다.

정신 수양하는 거예요.

자기를 수양하는 것은 종교놀음이지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에요.

그건 자기 이미지 관리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관리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관리해 주세요.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은 자신이 관리하라고 합니다.

관리 할 수 있다고 해요.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관리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도(道) 닦는 겁니다.

이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는 죄를 깨닫고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선 하나님도 죽일 수 있는 인간임을 아는 거예요.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믿지 않아요.

이런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 안에서는 늘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상한 심령과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교차하여 나타나는 겁니다.

 

죄 앞에서 자학하고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서 죄사함 받았다는 것에 감사와 기쁨이 살아가는 동력이 되어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기에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핍박 속에서도 넉넉히 이기는 겁니다.

이런 것을 없애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런 가운데서도 천국의 소망으로 이겨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의 구원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부모와 자식 관계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위적으로 만든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관계입니다.

흔히들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여 천륜(天倫)이라는 말을 합니다.

천륜이라 함은 하나님이 붙잡아 매여 놓은 인간의 조건으로 끊어질 수 없는 관계란 말입니다.

 

그럼 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끊어 질수가 없는 관계인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인데 이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한목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선한목자의 자격을 말합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양은 목자의 죽음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목자의 죽음과 양의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니 양은 반드시 목자의 죽음을 안고 있어요.

 

목자의 죽음을 안고 살지 않으면 그건 양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만 하는가요?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지요.

 

이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그 의미가 잘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이란? 오늘 본문에선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을 말합니다.

 

자기 백성들은 지금 죄에 갇혀 있어요.

자신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양입니다.

자기는 죄로 인하여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러니 목자가 자기를 대신하여서 목숨을 버린다는 음성을 듣는 겁니다.

아! 우리 목자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 대신 죽어 주셨구나를 알아요.

이처럼 양들은 목자의 죽음은 자기를 위한 대신 죽음이라는 것을 알아요.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양들을 위하여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양을 위한 목자의 길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터널을 지나온 사람이라야 가능해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는 목자가 아니에요.

그 어떤 인간도 이 과정을 거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설령 죽는다 하여도 다시 부활하지를 못해요.

 

자신을 죽음에 넘겨 줄 수 있으려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이 범접할 수 없는 생명은 죄가 없는 생명이라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이 죄 없는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넘겨주는 겁니다.

양들을 위해서 육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대신 죽어준 것은 목숨과 목숨을 맞바꾼 겁니다.

양의 목숨과 목자의 목숨을 맞바꾸었어요.

목자가 안 죽으면 양이 죽어야 하고,

목자가 죽으면 양은 죄에서 건짐을 당하게 됩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관계로 묶여져 있기 때문에 끊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목자와 양은 하나라고 했으니 목자가 죽을 때 양도 같이 죽었어요.

양은 이미 죽음을 넘어왔어요.

그러니 죽음이 두려워지지가 않는 것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자신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옳은 믿음을 소유한 성도라고 볼 수가 없어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기 전엔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자 도리어 죽이라고 덤빕니다.

부활의 영이 그 속에서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객기가 아니에요.

 

바울은 이런 상태를 나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어요.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죽어주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양은 목자가 이 세상으로부터 당하셨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엔 목자 되신 예수님의 죽음이 있어요.

목자의 죽음을 잊으면 안 되어요.

우리의 생명이 목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율법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양들을 빼내시려고 율법의 요구로 죽었어요.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어요.

목자의 죽음으로 양들은 율법에서 빼내심을 얻었어요.

 

그러니 이젠 율법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대는 지났어요.

이젠 목자의 죽음을 앞세우고 사는 시대에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은 목자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목자의 양이 아니에요.

목자의 양은 목자의 죽음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합니다.

목자의 죽음이 훼손당하지 않게 하려고 행위주의자들과 싸우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그러지요.

율법도 지켜야 하고 예수도 믿어야 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너희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째서 율법지킴이라는 천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느냐 라고 저주를 퍼부었어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율법에서 빼내 주었는데 왜? 다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느냐! 라고 노발대발한 겁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예수 안이 거룩한 것인데 어떤 놈이 성화하여 거룩해지라고 하느냐!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느냐! 에요.

누가 주일성수해야 한다고 하고,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고,

십일조나 일천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하느냐!

이런 것을 가르치는 자나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목자의 죽음으로 생겨난 양은 절대로 이런 말을 따르지 않아요.

인간이 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는 강도에요.

양은 이런 강도의 말을 듣지 않아요.

도리어 도망을 쳐요.

 

제가 아는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지난 연말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예배당 안이 꽉 찼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헌금봉투를 내면서 성경구절을 적어 놓은 것을 뽑아서 가라고 하더랍니다.

마치 뽑기 하듯이 말이에요.

 

좋은 성경구절들을 적어서 함 속에 집어넣고 복채를 내고 뽑아가라고 한 겁니다.

결국 돈 내고 성경구절을 뽑는 겁니다.

그날 뽑은 성경 구절이 하나님이 2010년도에 주신 말씀이래요.

권사님은 화가 나서 도중에 오셨다고 하더군요.

 

이런 짓을 하는 목사나 그 장단에 춤을 추는 교인들은 유유상종으로 신앙이 다 똑같아요.

그러니 강도 같고 무당 같은 목사가 벌려 놓은 굿판에서 춤을 추는 겁니다.

목자의 죽음을 아는 양은 권사님처럼 도망을 쳐야 해요.

도망을 쳐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집단이 이단으로 드러나게 되어요.

빛으로 서 있어야 그들이 어둠이라는 것이 고발되어지지요.

 

아직도 이런 구약적 신앙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진리처럼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영적 상황은 시대를 초월하여 늘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악이라고 하였듯이 지금도 예수님께 속한 양들도 율법을 가르치면 악이라고 말해주어야 해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돌리려고 해요.

그게 율법신앙이에요.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성화를 외치는 자들은 목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를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뭔가 하고자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목자의 죽음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어지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종에 멍에를 매지 않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에요.

우리가 뭘 할 것은 없어요.

다 목자가 이루어주셨어요.

 

그러니 목자의 죽음을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 목자가 죽어야 하는가?

이는 자기 양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양들의 죄를 목자에게 대신 담당케 하신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겠다고 할 때 막아서면서 자기가 죽지 않도록 막아 주겠다고 하니 칭찬하지 않고 마귀라고 책망하였던 것도 예수님이 죽어야 베드로가 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어야 한다구요.

그래야 베드로가 죄에서 벗어나요.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자신들의 죄가 사해 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이 사실을 증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양의 목숨과 목자의 목숨을 바꾼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꿉니까?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죄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목자의 희생을 통해서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정을 보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여 죄는 피흘림으로만 사해 진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피가 아니고 죄가 없는 분의 피가 죄를 사할 수 있어요.

 

율법정신은 한마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에는 생명으로” 담당하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행한 대로 갚으라는 말입니다.

 

레 24장 17-22절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19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22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법이란? 당한 것만큼 갚아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그 입힌 손해만큼 갚아주라는 말입니다.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인이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남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말입니다.

내 입에 떡 하나 더 넣으려면 남에 입에 들어갈 떡을 하나 빼앗아야 해요.

이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현실이에요.

 

이번 연말에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연말보너스와 성과급을 합해서 평균 1500만원씩 받았다고 직원들은 좋아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매일 경제 신문을 보니 이게 납품 업체들의 납품 단가를 깎아서 충당한 돈이라고 합니다.

 

신문의 보도대로라면 올해 최고로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였대요.

차를 많아 생산했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번 돈으로 보너스를 주든지 성과급을 주든지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날 강도 같은 새끼들이 자기 주머니 돈은 안 풀고 납품업체 주머니 것을 강탈해서 주고 있어요.

 

어떤 식으로 강탈을 하는지 아세요.

납품업체 일 년 이익금을 가지고 강탈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올해 10억 이익을 냈으면 너무 많으니 5억만 나도록 단가를 낮추라고 한답니다.

 

아니 납품업체는 직원들이 없나요.

그들에게도 작으나마 보너스도 좀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잡놈들이 다 빼앗아 갔으니 납품업체 직원들에게는 줄 것이 사라졌어요.

이렇게 되면 결국 납품업체 직원들에게 돌아갈 돈을 강탈해 간 것입니다.

경영진들이 아주 나쁜 강도새끼들이에요.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공정거래 위원회에서 현대자동차를 최우수상생협력사로 선정했다는 겁니다.

원청과 하청이 아주 좋은 상생(相生)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요.

이렇게 되면 불공정거래가 형성 되어도 2년 동안 간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약자인 납품업체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강탈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에요.

그리고 이런 것이 죄라고 지적하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은 이에는 이를, 눈에는 눈을, 생명에는 생명으로 되갚아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하나님이 그대로 시행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율법적 요구를 적용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라 할지라도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눈으로 죄를 범했으면 눈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이로 범죄 했으면 이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남에 것 도적질 했으면 너도 도적맞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라면 형제에게 욕을 해도 살인죄라고 했으니 우린 다 죽어야 합니다.

이건 한마디로 죄인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우리 대신 죽으셨어요.

예수님이 자기 양들을 대신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려고 죽어 주신 겁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양들은 모두가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양의 목숨 대신 예수님의 목숨을 받은 겁니다.

 

우린 여기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 양들이 죽어야 합니까?

양이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겁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양들에게 알려 주세요.

양들에게 목자의 죽음을 기억케 하세요.

그러니 양은 목자의 죽음을 등한히 여길 수가 없지요.

양은 목자의 죽음을 소홀히 여길 수가 없어요.

죄란? 목자의 죽음에 의미를 모르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왜? 죄인이냐고 화를 냅니다.

자기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왜? 죄 없다고 생각을 하느냐! 라고 물으니!

우리는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니란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지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신다는 것을 인정 할 수가 없어요.

자신들은 너무도 율법을 잘 지키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을 위해서는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으려면 저 개 같은 이방인이나 세리나 창기들을 위해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예수가 죽을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과 상관없는 죽음이에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자들에겐 예수는 여전히 남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곧 예수님이 찾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양입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가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또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대인 밖에도 예수님이 구원할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도 목자의 죽음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이방인이 중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 예수님의 양은 알아들어요.

그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에요.

 

지금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하면 듣는 사람이 있어요.

십자가를 증거하면 예수님의 양들은 어이구 예수님 맞습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군요!

예수님 고맙습니다! 라고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알아듣는 자들이 있어요.

물론 많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자는 반드시 들을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은 다 예수님의 말을 듣게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증거를 받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남에 구원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한 번도 본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기적이에요.

 

우린 이런 기적을 받았어요.

그러니 감사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다 그릇행하는 양입니다. 그런데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생명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생명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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