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66강. 세상에서 양들의 운명 (요 10: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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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9. 15.

 

 

66강. 세상에서 양들의 운명 (요 10:22-33)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의 답답함을 엿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믿을 수가 없었어요.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못합니까?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좀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학인 율법신앙으로 보아선 예수는 이단이지 메시야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유대인들의 귀에는 헛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지만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고 이단이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해요.

그래야 백성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안 단속을 위해서라도 예수가 이단이라는 것을 알려야 해요.

 

그만큼 유대인에겐 절박해요.

이 시대로 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남의 교회에 자기 교인들은 다 빼앗기게 생겼어요.

그러니 옆에 복음 전하는 교회가 있으면 이단이라고 해야 하는 것과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교인 단속하는 것은 동일해요.

교인들이 다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겁니다.

네가 진짜 메시야라면 메시야다운 행동을 해서 한번 입증해 보라는 겁니다.

뜸 들이지 말고 뭔가 화끈하게 내가 메시야다 라고 온 백성들이 알아보도록 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서 뛰어 내려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 이 놈들 속을 모르는가요.

훤히 꿰뚫고 있잖아요.

그러니 그들의 장단에 맞추어서 놀아 주지 않는 겁니다.

점점 모르는 말만 하는 겁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알아먹지 못하면 미친 소리라고 해요.

그래서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돌을 들고 쳐서 죽이려고 덤벼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보면 이런 장면이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되었어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 할 때도 마귀가 광야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서 세 가지 시험을 하면서 네가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해 보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릴 때도 참소하는 자들이 네가 만약 하나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 내려와서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했잖아요.

 

우리 같으면 죽을 때 죽더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귀 싸대기 한 번 후려갈기고!

그래 이 놈들아! 내가 메시야다!

봤지!

이제 믿겠느냐!

까불지 말고 앞으로 잘해! 라고 하면서 한번 폼 나게 증명해 주고 다시 십자가에 올라가서 나 이제 죽는다!

그러고 난 후에 죽어도 죽었을 겁니다.

그랬으면 모두가 야! 예수가 진짜 하나님 아들이 맞긴 맞네! 라고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기적적인 일들을 한다고 해서 없는 믿음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은 기적을 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주면 믿겠다고 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함이지 믿고자 함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는 성경에 볼 때는 그 현장에 나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본문에서처럼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논쟁 속에도 내가 서 있다고 봐야 된단 말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편에 서지 말고 유대인들 편에 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해요.

나 역시 유대인과 같은 생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궁금해서 물어보아야 할 것을 유대인들이 대신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고맙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으면 우리도 똑같이 물었을 겁니다.

물론 똑 같은 행동을 하였을 거구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수없이 갈등하잖아요?

과연 내가 믿는 예수가 진짜인가?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이 복음이 진짜가 맞는가?

지금 내 믿음이 진짜가 맞는가?

이거 혹시 이단이 아닌가?

 

꿈에라도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 진짜 맞다!

그래 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거든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긴가 민가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않으면 이런 갈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선한 의미에서 자기 믿음을 의심해 보세요.

무턱대고 남이 좋다고 하니 덩달아서 좋아 하면 안 되어요.

내가 확실히 이것이 하나님 뜻이다! 라고 해야 누가 옆에서 이단이니 삼단이니 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신앙생활은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남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나와 예수님과 일대 일의 관계이기 때문에 더 더욱 눈치 볼 이유가 없어요.

 

정낙원 목사가 하는 말이 진짜 복음이 맞는가 의심해 보셔야 해요.

저 자신도 늘 나를 돌아보아요.

이거 내가 진짜 복음 전하는 것 맞나!

묻고 또 물어요.

그래서 성경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율법 아래 있을 땐 그래도 내가 뭔가 하는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는데!

기도하고 전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흥미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알고 난 후엔 내가 할 것이란 하나도 없고 모두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하니 밋밋한 겁니다.

난 뭘 하지!

인간의 본성은 자기가 해야 했다고 믿어요.

인간이 내어 놓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자기 경험이에요.

그래서 믿으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라고 믿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의식구조는 자기가 뭔가 해야 만이 한 것처럼 느껴요.

기도도 내가 하여야 한 것 같고,

전도도 내가 해야 전도 한 것 같아요.

결국 내가 경험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과 의식구조로 보아서는 율법 신앙이 딱 맞아 떨어지고 좋아요.

왜냐하면! 율법 신앙은 모든게 내가 행하고 내 몸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하기 때문에 손으로 붙잡듯 확 잡히고 실감이 나잖아요.

그러니 확신이 생기지요.

물론 자기가 한 것을 믿는 믿음이지만 말이에요.

 

사람의 정신구조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지킨 것 같지 예수님이 대신 지켜주셨습니다! 라고 하면 안 믿어져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데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믿음을 받아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를 위한 것이란 것이 믿어져요.

 

믿음을 안 받으면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성도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라고 하여도 덤덤해요.

이젠 우리는 죄로 인하여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다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여도 찜찜하고 영 개운치가 않는 겁니다.

입술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도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희비하게 되어요.

말씀대로 살았으면 안심이 드는데 행여 말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면 찜찜하잖아요.

 

율법 아래선 예수님과 나는 남남이에요.

예수님이 한 것은 예수님 것이고, 내가 한 것은 내 것이에요.

그래서 율법 아래선 믿는 것이 없고 행하는 것만 있는 겁니다.

율법 아래선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안 믿어져요.

차라리 내가 죄 값으로 한 대 얻어맞고 네 죄가 사해졌다!

그러면 훨씬 실감이 나요.

그래서 율법신앙은 항상 내가 뭔가를 하여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뭘 믿을까! 이지 뭘 할까요? 가 아니에요.

중요한 말이니 귀에 담아 놓으세요.

뭘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면 아! 저 목사는 율법 아래 있구나 생각하세요. 

 

전 과거 율법에 특심했어요.

제 몸을 학대하다 시피 했어요.

그래서 믿음없이 인간의 열심으로 행하는 신앙생활에 허구를 너무도 잘 알아요.

전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연기(演技) 신앙을 했어요.

비록 믿음이 좋은 척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서 연기하는 신앙생활이지만 모든 것을 내 몸으로 하기 때문에 박진감이 있고 활력이 넘쳐요.

 

율법에 특심한 사람들은 다 알겁니다.

남들 안하는 충성과 열심을 내 보세요.

흐뭇하잖아요.

행여 밤이슬 맞아 가면서 산 기도라도 하고 철야기도를 해 보세요.

얼마나 뿌듯한데요.

한마디로 보람을 느끼잖아요.

 

거기다가 환상이라도 보고 방언이나 혹 다른 은사들을 두루두루 섭렵해보세요.

마약이 따로 없어요.

붕 뜬다니까요.

이러면 목사님들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누가 뭐라고 하면 당신은 은사를 안 받았기 때문에 그 맛을 몰라서 그런다고 웃어 넘겨요.

속은 교만으로 가득차서 니들이 은사를 알어!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잖아요.

온통 내 행함을 신앙의 내용으로 붙잡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런데 사람이란 신앙일지라도 늘 반복 되는 일상을 살다보면 무료함이 닥쳐요.

속된 말로 은사를 받으면 처음엔 사이다가 튀듯이 황홀하다가도 나중엔 덤덤하고 짐이 되어요.

방언이니 환상이니 꿈이니 하는 것도 일상처럼 오래 하다가 보면 재미가 반감이 되어요.

뭔가 다른 것을 찾게 된다고요.

처음엔 이거다 싶지만 오래 하면 재미가 사라져요.

 

처음엔 기쁨으로 내 열심으로 했지만 나중에는 남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요.

열심 내던 사람이 갑자기 열심이 사라져 보세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교인들인지라 대번에 수군거리잖아요.

시험이 들었다느니!

열심이 떨어 졌다느니!

내 그럴 줄 알았다느니! 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외식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외식이 되면 남의 눈치를 보게 되어요.

 

그러면 자연히 신앙이 연기가 되고 짐이 되어 버려요.

종교성으로 흐르고 억지로 하게 되어요.

종교성은 의무이고 책임이고 외식이에요.

율법신앙이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정의한 겁니다.

이처럼 율법 신앙은 빵빵한 풍선이 바람 빠지듯이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해져요.

 

그런 게 있잖아요.

처음에 그렇게 좋은 노래도 늘 부르면 얼마 안가서 질려 버리는 것과 같아요.

명절 때 TV에서 재탕 삼탕으로 나오는 영화와 같이 본 것을 또 보라고 해 보세요.

짜증이 나지요.

사람이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해서 하면 식상해요.

 

옷도 늘 입던 옷을 입으면 질리듯이 인간이란? 늘 반복되는 것은 싫어해요.

일상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면 무료해져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탈을 행하는 겁니다.

일탈을 하면서 불안과 긴장감이 주는 짜릿한 쾌감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고 도적질한 물이 달다고 하지요.

 

잠 9:17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이는 죄 짓는 맛이 좋다는 말이에요.

떡은 항상 똑 같은 맛이고, 물도 항상 똑같은 물맛이에요.

그럼에도 맛을 달리 느끼는 것은 자기감정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분위기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맛이 달라요.

그러니 남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고 남에 것을 도적질해서 마신 물이 달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금지된 것을 넘어가면 일탈(죄)이 주는 긴장감과 스릴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인간은 금지하는 것을 할 때 재미를 느껴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몰래 죄 짓는 거예요.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것은 우리 죄인의 본성에 딱 들어맞아서 그래요.

사람들은 법으로 금지하고 죄 짓지 말라고 하면 안에서 더 하고 싶어지는 욕망이 생겨요.

이는 규제하는 법이 내 안에 반항하고자 하는 죄성을 깨우고 욕망을 부채질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어서 화단에 들어가지 마세요!

꽃을 만지지 마세요! 라는 팻말을 보면 더 들어가고 싶고 만지고 싶어지잖아요.

하라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지지요.

이게 죄성이에요.

 

놀지 말고 공부해라!

그러면 놀고 싶고!

비디오 보지 말라!

그러면 더 보고 싶고!

일찍 들어와라!

그러면 늦게 들어가고 싶고!

교회 일찍 오세요 그러면 5분 늦게 오고 하는게 모두가 법을 어기고 싶어하는 죄성 때문이에요.

 

어린 아이들도 오라고 하면 도망가고 가라고 하면 착 달라붙어서 안가잖아요.

업고 가면 걷겠다고 하고 걸어가라고 하면 업어달라고 하지요.

이처럼 인간은 하라고 하면 안 하다가도 강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에라~ 모르겠다!

니 마음대로 해라! 라고 하면 그 때는 또 자기가 알아서 하고자 해요.

이 모두가 죄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의 심리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 잘 나타납니다..

내용이 모두가 반항적이고 기존에 틀을 부수는 형식으로 짜여 있지요.

이는 모두가 인간의 심리가 평범한 것은 싫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영화는 조폭영화가 흥행을 하고 드라마는 불륜드라마가 시청률이 높게 나와요.

상식을 파괴하여 뭔가 때려 부수고 삼각관계로 얽히고 설켜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복수하는 것이나 불륜물이에요.

이런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겁니다.

 

쉬운 예로 사람들이 왜? 바람을 피웁니까?

왜? 내 남편이나 아내를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지 않고 남에 사람을 보면 왜? 가슴이 뜁니까?

이는 자기가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신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내 마누라나 내 남편이 훨씬 나은데도 남의 남편과 남의 아내를 기웃거리는 것은 남의 것을 탐내고자 하는 죄성 때문이에요.

 

내 눈엔 남의 손에 있는 떡이 커 보이고 남이 소유한 것이 맛나 보여요.

왜? 내 남편이나 내 아내 앞에선 아무렇게나 있으면서 남 앞에선 가꿉니까?

이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기 때문이에요.

남에겐 항상 신비로 남아서 유혹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는 죄성 때문이에요.

 

아무리 좋은 사람도 늘 대해 보세요.

좋은 줄 몰라요.

하지만 남의 집 사람은 늘 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신비한 것이 있다고 느껴져요.

물론 뚜껑을 열어보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도 내겐 비밀처럼 봉함이 되어 있으니 뭔가 신선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새롭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으로 남에게 기웃거리는 겁니다.

 

이걸 관음증이라고 합니다.

관음증이란? 금지한 것을 보고 듣고자 소망케 하는 본능이에요.

관음의 맛은 비밀스럽고 봉함으로 있을 때 스릴이 있지 막상 공개되어지면 맛이 떨어져요.

보일 듯 말 듯 해야 짜릿하지 훌러덩 벗어 보세요.

식상해요.

 

몇 일 전에 아마존 원주민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어요.

먼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것은 직설적인 표현이 더 사실감이 가기 때문이니 이해하세요.

거기에 보니 남자고 여자고 모두가 나체로 생활해요.

이런 장면이 나오면 본능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호기심으로 보게 되어요.

저는 남자이다 보니 여자들을 호기심으로 보았어요.

 

여자들의 축 늘어진 젓을 보고 야! 그거 매력 있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건 유방이 아니고 그냥 젓이고 살점이에요.

그것보고 성적 매력을 느낄 남자는 없어요.

만약 거기다 헝겊 쪼가리라도 살짝 가려보세요.

그럼 호기심이 생겨요.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에요.

남자들의 깻망아지처럼 축 늘어진 벌레 같은 하체를 보고 흥분할 여자가 없어요.

그걸 모자이크 처리를 하니 관음증이 생겨서 호기심에 보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의 감정은 관음증 환자처럼 오픈 된 것은 흥미를 못 느끼고 감추인 것엔 흥미를 느끼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볼 때 선남선녀라고 하는 연예인들이 이혼을 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 좋은 사람하고 왜 이혼하느냐 라고 하지요.

이혼을 하는 것은 결혼을 하고 막상 살아보니 환상이 깨어지기 때문이에요.

살아보니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매력이 있고 신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막상 결혼해서 살아 보세요.

얼마 안가서 허물이 보이고 사소한 충돌이 생기면서 점점 싫증이 나요.

 

밥 먹고 트림하고 아무데서나 방귀를 껴대고 입에서 썩은 냄새가 풀풀 나 보세요.

그것 좋아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이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낯선 사람은 이런 걸 모르잖아요.

그러니 신선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외간 남자나 외간 여자나 생소한 것을 만나면 관음증이 유발되는 겁니다.

마치 몰래 먹는 떡처럼 맛을 느끼고 도적질 한 물처럼 달게 느껴져요.

그래서 사람들이 일탈을 꿈꾸고 행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은 이를 순리를 역리로 바꾼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선 일탈(역리현상)을 막고자 교육이나 종교성으로 이를 억제케 하는 겁니다.

이성이 발달한 사람은 본능을 절제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본능대로 살아요.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억누르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이성으로 본능을 절제하지만 그 본능도 조건이 맞으면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감정이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6개월에서 1년 정도 간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도파민”과 “페닐메탈아민”과 “엔돌핀”과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가 되는데 이게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합니다.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사랑을 하면 상대방이 하는 모든 것들이 그냥 좋아 보인답니다.

이 때는 허물도 매력으로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는 6개월 동안은 눈에 비늘이 씌어서 판단 능력을 상실한다는 겁니다.

흔히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해요.

이 때는 말리면 화를 내고 반발을 하게 된답니다.

억지로 말리게 되면 반항하고자 하는 본성이 작동을 하기도 하지만 눈과 귀에 꺼풀이 씌었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안 듣는답니다.

만약 강제로 계속 말리게 되면 도망을 가든지 자살을 하든지 어떤 짓이든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자 살자 한다는 거예요.

이럴 땐 말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그냥 내 버려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이 서서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럼 상대의 하물이 하나 둘 눈에 보이고 그러면 짜릿함이 밋밋함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나중에 제 정신이 돌아오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된다고 해요.

그러면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세월이 약이래요.

 

이처럼 인간은 육신의 조건에 따라서 늘 변해요.

지금 좋다고 하는 것도 나중엔 그져 그렇고 그러다가 귀찮아지고 싫어진다는 겁니다.

오늘 이거다 싶으면 내일은 아니에요.

10살 때 좋던 것이 30살이 되어서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10살 때 가지고 놀던 딱지를 30살이 되어서 갖고 노는 사람은 없어요.

마찬가지로 30살 때 좋아 보이던 가치관도 50살이 되면 허접하게 보여요.

육신은 늘 새로운 것을 꿈꾸기 때문에 온전한 것도 완전한 것 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율법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몸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몸에 컨디션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게 변한단 말입니다.

알다시피 율법 신앙은 인간의 몸으로 행하는 신앙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율법 신앙은 변덕이 심하고 항상 육신의 상황에 따라서 변해요.

어떨 땐 가슴에 사이다가 튀듯이 황홀하고 좋아 죽을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흥이 사라져요.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예전에 좋던 장난감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율법 아래서 행하던 신앙생활은 점점 외식으로 흐르게 되고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처음 은사를 맛보았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늘 반복되는 일상으로 행하여지면서 점점 맛이 상실되어 가요.

흔히들 말하는 방언을 처음 받았을 땐 그렇게 황홀했어요.

밤낮없이 시간만 나면 따따따따 했잖아요.

 

그게 얼마나 갑디까?

1년 아니면 2년 길면 3년 가요.

그러다가 이제 막 방언 받아서 설치는 사람을 보면 선배가 되어서 득도한 도사처럼 정중하게 충고를 하면서 그래 조금 지나봐라!

그 때 알게 될 거다!

그러잖아요.

뭐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는 병든 사람처럼 이게 과연 신앙생활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요.

이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딱히 믿어지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안 믿어지는 것도 아니거든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해져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곤고한 겁니다.

뭔가 빠진 것 같아요.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 앞에선 억지 춘향이처럼 웃지만 속으론 울어요.

 

제가 그랬단 말입니다.

율법에 열심을 모르는 사람은 이런 괴로움이 없어요.

전 그래서 율법신앙이 너무 괴로워서 자살을 하고자 했어요.

진리를 모르면서 진리를 아는 척하는 그 괴로움이 너무도 커서 하나님 앞에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던지 아니면 죽이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라고 땡깡을 부렸다니까요.

물론 쇼에 그쳤지만!

 

그러다가 복음을 만났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덮쳐 온 겁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이고 믿음이다!

내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다!

내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해준 행함이란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를 덮치니 그 동안 법으로 지고 있던 위선의 짐들이 다 내려지는 거예요.

율법 아래서 뭔가 불안하고 막혀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어요.

 

그 동안 내가 나를 지켜 왔는데 이게 사라진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 믿어지니 비로서 외식하던 종교생활에서 자유케 되는 겁니다.

율법신앙으로부터 해방이 된 겁니다.

 

믿음이 오니 바울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이 믿어지더라고요.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피가 주는 죄사함과 은총은 율법 안에 있는 자기의 죽음과 함께 주어져요.

율법에 대해서 죽으면 자기행함이 포기가 되어요.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의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은혜가 덮쳐 오면 새 언약이 믿어지고 새 언약이 믿어지면 자기를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자신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자기에게 기대하지 않게 되어요.

 

이처럼 은혜를 받으면 내가 나를 관리하고 지키는 것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요.

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이처럼 십자가가 믿어지면 자기로부터 자유 해져요.

 

어떻게 살까?

이래서 되겠나!

이정도 밖에 안 되나!

이러면 어쩌지! 라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실존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받게 되면 복음이 주는 가벼움으로 홀가분해져요.

 

다윗은 자기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죄를 감추기에 급급했어요.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그걸 감추려고 백방으로 애쓰잖아요.

얼마나 죄가 짓눌렀으면 전쟁터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서 완전범죄를 꾀했겠어요.

급기야는 우리야를 밧세바와 합방을 시켜서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잡아떼려고 했어요.

 

그런데 충신 우리야가 어떻게 백성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장수가 한가로이 마누라와 여흥을 즐길 수 있느냐 하면서 거절하니 자기 죄가 들통 나게 생겼어요.

그러자 다윗이 화가 나서 우리야를 화살받이를 시켜 죽어버리잖아요.

이게 왕으로서 할 짓입니까?

 

죄인은 죄 앞에선 왕의 본분도 잊고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다 하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가 죄인 아님을 위장하기 위해서 꾸민 죄 짓기 놀음이에요.

결국 다윗은 죄를 감추고자 하다가 더 죄를 짓게 되고 만 겁니다.

죄에 죄를 더 가중하는 범죄를 저질렀어요.

누가 알까봐서 얼마나 불안 불안했으면 그랬겠어요.

인간의 본성은 죄를 감추고 싶어하지 툭 털어 놓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 난 후 자기 실존을 깨달았어요.

자기는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이라는 것을 안 겁니다.

자신이 달리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란 것을 알았어요.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죄를 짓게 되는 인간이란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이제 더 이상 자기를 더 감추고 관리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겁니다.

하나님이 손금 보듯이 우리 속을 훤히 알고 있는데 감출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이제는 도리어 하나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우슬초로 날 씻겨 달라고 합니다.

 

우슬초로 씻겨 달라는 것은 희생의 재물에 피로 용서해 달라는 말입니다.

우슬초란 출애굽 할 때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뿌릴 때 사용한 풀을 말해요.

이는 대속에 피로서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입니까!

 

다윗이 이걸 안 겁니다.

그러니 주께서 꺾은 뼈로 즐거워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꺾은 뼈란? 우리야의 죽음을 말합니다.

다윗은 우리야는 자기 때문에 죽었으니 그 우리야의 죽음을 헛되이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우리야의 죽음을 보시고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참 뻔뻔하지요. 

이게 믿음이고 신앙이에요.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받고 긍휼을 입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걸 몹쓸 죄를 짓고 난 후에 알았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앞세우고 나온 우리야의 죽음은 신약식으로 보면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이미 구약 마당에서 새 언약으로 산 겁니다.

다윗은 항상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았어요.

항상 자기는 우리야를 죽인 죄인이고 그 우리야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것으로 살았어요.

그러니 자기가 자기 죄를 책임질 인생이 없었던 겁니다.

 

사람들이 낙망하거나 실망하는 것은 자기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할 수 있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탄식하잖아요.

죄인이 죄 지은 것으로 탄식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 사실을 감추고자 하지 마세요.

 

“죄를 억제하는 것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달라요.”

 

전 지금 죄를 지으라고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린 죄를 지어도 죄인이고, 죄를 안 지어도 죄인이에요.

그러니 나타난 죄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란 말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를 보아야지 남에 눈에 티를 보고 손가락질 하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 안엔 죄가 능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어요.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요.

우리가 남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는 그 죄가 언제 내 안에서 튀어 나올지 모른다구요.

 

우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에요.

하나님 앞에 죄란 도리어 죄 안 짓겠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죄 안 짓는게 아니에요.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겁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겁니다.

죄를 안 짓는다면 하나님은 공연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보냈는데 난 죄인 아닙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이 할 일이 없어지잖아요.

 

실제로 율법대로 산 바리새인들 앞에선 예수님이 할 일이 없었어요.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데서야 어찌 예수의 피가 효력을 발생하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죄인에게만 효력이 발생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죄인 아니라고 하니 구원해 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한 겁니다.

부정한다는 것은 무가치하게 한단 말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보세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하는 자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잖아요.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달라요.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면 법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되어요.

 

그러나 우리는 말씀대로 사나 못 사나 죄인이에요.

성경은 인간은 이미 죄 아래서 출생되어진 죄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나 안 지키나 죄인입니다 라고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부정하는 자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이 원수로 여겨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왜? 죽었는지 알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니 성령은 항상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옵션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알려주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넌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여지없이 고발당해요.

넌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요.

넌 애초부터 잘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깔아뭉갠단 말입니다.

그리곤 이런 너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알려 주세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너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고 알려 주신단 말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느냐! 라는 것으로 인하여 실망을 하지 않아요.

아! 난 원래 이런 인간이구나!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로 살고 있구나!

그래서 그 누가 자기 죄를 인하여 참소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게 믿어질 때 비로서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되어요.

이걸 신앙이라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맞아 떨어질 때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 믿음이란? 자기 생각의 긍정입니다.

내 생각과 같아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맞아 떨어지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다고 장단을 맞추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자기들 장단에 안 맞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유대인들의 생각과 달라서 그래요.

그러니 못 믿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들이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 됨의 증거를 좀 보여 달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한마디로 자신들을 좀 설득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믿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따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증거를 내 보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기준이 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는 기적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증거에 미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수긍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증거를 보여 보라고 주문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이 알고 있는 메시야관이 있어요.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다윗과 같이 정치적으로 강한 왕이에요.

이방나라를 압제할 능력을 가진 왕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세워진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 나라를 메시야가 오면 세워준다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겐 천국이니 부활이니 하는 것은 먼 훗날 일어날 이야기에요.

먼 훗날 이야기란 관념이고 추상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과 천국을 말하니 유대인들은 관념으로 들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해서 일찍 죽었는데 율법대로 계대(繼代) 결혼법에 의하여 그 동생이 형수를 차지하고 그도 죽어서 그 다음 동생이 또 형수를 차지하고 그러기를 일곱 형제가 형수와 관계를 맺었다면 부활 시에 그 형수는 누구 아내가 되겠느냐? 라고 예수님을 시험한 겁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부활을 말하니까 다 안다고 하면서 그건 어디까지나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라고 하였잖아요.

이런 사고가 곧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고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이나 천국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고 실제임을 알리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린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천국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겁니다.

유대인에게 소망은 오직 강한 메시야에요.

다윗같이 강한 왕이 와서 로마를 몰아내 주길 바랬어요.

 

처음엔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베풀자 유대인도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알았어요.

야!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가 로마를 뒤집어엎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자 이제 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대적으로 환호했던 겁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과 어울리고 한단 말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죄인과 어울리는 것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것 하지 말고 정치적인 행동을 해 보라는 겁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좀 화끈하게 민중 봉기를 일으키든지 해 달라는 겁니다.

 

지금도 그러잖아요.

진보주의자들은 교회는 사회정의를 부르짖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자고 하잖아요.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나라!

빈부귀천이 없고 모두가 평등한 나라!

강자와 약자가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자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정의사회를 만들자고 데모에 앞장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겁니다.

유대인들 사상과 동일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라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어요.

자기들이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이 세상을 불 태워버린다고 했어요.

그러니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했다구요.

 

지금 아이티 라는 나라에서 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었어요.

몇 년 전엔 동남아시아에서 쓰나미로 수십만이 죽었지요.

지구 곳곳에 천재지변으로 난리에요.

한 쪽에선 추워서 죽고 한 쪽에선 더워서 죽어요.

이게 지금 우리가 몸을 담고 사는 지구의 현실이에요.

땅 속에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구요.

지금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곳에 천국을 세운다구요.

이건 이 세상은 망할 곳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는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겁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소경이었듯이 이 시대 진보주의자들이 소경이에요.

땅을 지향하는 자는 모두가 소경이고 유대인이에요.

그러니 다른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되어야 만족을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자기가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갖기 전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어떤 기적으로도 만족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하여 말해 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를 못 믿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몰라본다는 겁니다.

나는 로마를 물리치러 온 것이 아니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미친 소리 그만 하라고 돌을 들고 치려고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지요.

양들은 이런 목자의 죽음을 안다고 했지요.

양들은 목자의 죽음으로 자신들이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안다고 했잖아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양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아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려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게 없다고 했어요.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말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건설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인간의 삶에 질을 개선해 주고 빈부귀천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들은 이 땅에 복을 추구하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려요.

이런 메시야는 일찍이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요구한 겁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의 표적은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요구한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팔자 고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무병장수하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근심걱정하지 않게 해 달라는 거예요.

이건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메시야에요.

예수님은 양들을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냥 땅에서 살게 해 달라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양과 아닌 자들이 구분이 납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데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근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늘로서 났고 하나는 땅에서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육에 속하였고 하나는 하늘에 속하였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땅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여 해석하면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그 어떤 하늘에 기적을 보여 주어도 안 믿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양들은 땅에 기적이 없어도 말씀만 들으면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성도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을 받을 자들에겐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기적을 맛본다고 해서 믿어지는 분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기적 가운데 살았어요.

그러나 매일 원망하고 불평했어요.

자기들 입맛에 안 맞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애굽 음식이 맛이 있으니 애굽 음식을 달라고 했어요.

애굽 음식을 안주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데모를 하였어요.

에굽에 음식을 달라는 것은 이 세상 것 달라는 말이에요.

이 시대 버전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게 해 달라는 말이에요.

 

지금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자들이 그 후손들이에요.

그 아비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던 겁니다.

마귀는 땅에 것으로 사람을 붙잡아매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뱀을 저주 했지요.

그때 어떤 저주를 했나요?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했지요.

 

흙이란? 육을 말해요.

이 세상을 말해요.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은 땅에 기운으로 살고 땅을 떠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만 뜨면 땅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은 전부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마귀 적이라고 했어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간음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한 겁니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지금 이 시대도 여전히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로 예수 앞에 나온 자들이 있어요.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보여 보라고 합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 아들이어든” 이라고 유혹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야 하느냐 하면 세상 사람보다 더 잘 살고 더 성공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난하고 약하면 하나님을 망신시키는 것이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은 잘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육에 속한 자들은 복음을 말하면 빈정거려요.

 

너 복음 전한다며!

그러면 교회가 부흥하여야 할 것 아니냐!

복음 전하는 교회가 어찌 그 모양이냐!

그렇게 교회가 부흥되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 하겠느냐!

누가 교회에 오겠느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조롱을 해요.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를 교회 부흥으로 내세우고 있어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교회가 부흥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면 부자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보라고 하듯이 네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자라는 것을 보여 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믿어 주겠다고 합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증거를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고,

성도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 믿음하여도 가난하면 거짓이고,

진리를 전한다 하여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으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서 묻는 것이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만나면 하는 인사가 교회 부흥 많이 되었느냐에요.

이는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로 인정해 주고,

숫자가 적으면 하나님이 함께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교회 부흥시켰으면 능력 있는 목사이고 못했으면 능력 없는 목사란 겁니다.

그러니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은 유대인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아요.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그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을 그런 것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겁니다.

의심하고 트집을 잡고자 하는 사람 앞에선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는 불신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말씀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기적을 쫓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기적들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해요. 

사고 많은 세상에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이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루하루 은혜로 살면서도 그게 기적인 줄 몰라요.

우리는 산다는 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아요.

 

그래서 날마다 눈만 뜨면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내 세울 자랑거리들을 달라는 겁니다.

이들이 바라는 기적이란? 자기 소원 성취하는 거예요.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갔다거나!

사업이 번창하여 돈을 많아 벌었다거나!

회사에 승진하였다거나!

자기가 바라는 증거들이 나타나야 안심을 하겠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기도하면서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하여야 안심이 되고,

멀쩡한 하늘에 환상을 보아야 안심이 되고,

하다못해 자면서 신에 음성이라도 듣고 꿈이라도 꾸어야 안심을 해요.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라고 믿어요.

 

이러한 자들에게 아무리 말씀을 믿으라고 해도 자기가 경험한 것이 없으면 안 믿습니다.

이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워요.

십자가가 자랑스럽지가 않아요.

십자가 피를 말하면 그딴거 말하지 말고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을 내어 놓으라고 해요.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을 내 놓으래요.

 

2천 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지만 지금은 교인들이 복음 전하는 성도들에게 그래요.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과거 조00 목사가 불교 대학원에서 간증을 할 때 한 말을 인용하여 보겠습니다.

좀 길지만 얼마나 세상적이고 마귀적인가 찬찬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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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략=

 

“선교사의 안내를 받고서 서울로 올라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1958년에 신학을 졸업하고 서울 불광동에 대저 마을이라는 아주 가난한 곳에 천막을 남대문 시장에서 24인용으로 하나 사고 걸머지고 나왔습니다.

그 당시엔 너무나 못사는 사람들이 경상도 전라도에서 올라와서 서울에서도 못사니까 불광동 산꼭대기로 전부 판자촌을 짓고 살 때였는데 그곳에서 제가 천막을 치고 전통적인 기독교식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라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예수 믿고 회개하라 그런데 아무도 안 오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에 급하고 가난할수록 알코올중독자도 많고 깡패도 많고 도둑놈도 많고 제가 아무리 전도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를 준 사건이 생겼습니다.

 

판잣집에 사는 한 가정이 있는데 함경북도 북청에서 피난을 온 부부입니다.

부부간에 아들만 아홉이 있는데 이분은 10년 동안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만 먹어요.

아홉 명의 애들이 구두를 닦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그래서 돈을 가져오면 그 돈을 빼앗아서 술만 마셔요.

그 부인은 이초희 씨라고 해서 완전히 심장병, 위장병에 고통 속에 아주 꼬챙이처럼 말랐습니다. 그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까 부인이 누구세요? 그래요.

그래서 제가 "저 산동네 있는 전도산데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꼬라 보더니만 굉장히 노기가 충천하면서 "천국 안 가! 당신네 종교인들 전부 다 거짓말쟁이야."

나 거짓말 한 적 없는데요,

"만일 죽어서 그렇게 아름다운 천당을 준다며 는 살아있는 여기에 왜 천국의 조그마한 부분도 못 주나, 우리 집에 천당이란 비싼 거 아니다.

애들 덮을 수 있는 이불 한 장에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쌀을 주고 학교 다닐 수 있도록 해주고 우리 남편이 알콜 중독인데 치료해 주면 그게 천국이다 그런 것도 못해 주는 하나님이 죽고 난 다음에 아름다운 천국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거짓말이 어딨냐?"

당신네 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위로해주고 돈 받아먹는 사기꾼이다. 그래요.

 

이분은 이북에서 교육도 많이 받는 분입니다.

굉장히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전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부인의 말에 전도를 당했어요.

정말 맞다.

죽어서 아름다운 천당이 있다면 살아 있는 이 현실에 우리를 구출해주고 그 천당을 조금씩 못 주면 어떡하겠는가?

그래서 저는 반사작용으로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가요.

그러니까 깔깔깔 웃으면서 하는 말이 지옥?

여보시오! 여기가 바로 지옥이요.

 

두 평도 안 되는 곳에 열 한 식구가 살고 있으니, 개, 돼지보다도 못하잖아요.

10년 동안 우리는 쌀밥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밀가루만 먹었지, 신발이 있습니까, 옷이 있습니까, 아프면 병원에 가봅니까?

이게 산지옥인데 아무리 당신네 종교인들이 지옥을 말하더라도 이보다 더 뜨거운 지옥이 없어요.

나는 서른 세끼 목멘 것으로 끊을 수 있지만 아홉 자식이 불쌍해서 자살을 못하고 사는 거요.

 

그래 당신네 종교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이요?

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천막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부인의 말이 제 귀에 우렁차게 울렸습니다.

천국이 있으면 죽은 뒤에 천국이 아니라 지금 천국을 달라!

 

그때 아버님께서 늘 가르쳐 주던 불교의 가르침도 동시에 올려왔습니다.

심시불, 부처가 내세 정토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다. 부처님이 계신 곳이 천당이고 낙원이고 극락이 되야지 죽고 지금은 생지옥이 되어 있으면서 나중에 죽고 난 다음에 가겠다 그러면 거짓말 아니겠는가?

그럼 그 여자 말대로 현재 그 천국이 와야 한다. 사실 그 여자가 지옥에 살고 있다.

 

그럼 내가 그 여자에게 무슨 말씀을 증거할 것인가?

우리 기독교에서는 여러분, 소망을 주는 것을 굉장히 중점을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라고 그러는데 왜 소망을 주냐면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하나님의 천지를 지으시고 에덴 낙원을 지으시고 그 속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 속에 두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가져온 3대 재앙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재앙은 죄를 지어서 영원히 죽고 마귀의 종이 되고 그래서 말미암아 모든 부정과 부패, 더러움이 생기고,

둘째는 환경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고,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셋째는 늙고 병들고 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3대 재앙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3대 재앙 속에 살면서 죄짓고 마귀의 종이 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죽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이 3대 재앙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윤리나 도덕이나 종교를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가 그런 것입니다.

교리나 율법이나 계명은 뒤에 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구속을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짐과 저주와 질병과 죽음을 짊어지고 죽음으로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저는 그 원리가 우리 아버님이 저 어릴 때 원효대사에 대해 얘기 한 것과 너무나 일치하더라구요.

원효대사님이 불교에 너무 계율이 많은데 그 계율을 다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원효대사의 외침이 그거 아닙니까?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대중 불교로써 모든 서민들이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저주와 죽음, 질고를 대신했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3중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전인구원이다.

 

구원이란 것이 영혼의 구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영과 육과 현실을 구원하는 전인구원의 메시지가 우리 기독교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다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율을 가르치는 교파가 있습니다.

자꾸 계명과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끝없이 가르치는 교회도 있지만 그러나 단순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며 믿음으로 치료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저도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이 닿은 것은 이 소망 때문에 인연이 닿았다.

완전히 절망 상황에서 성경을 읽고 거대한 소망의 불기둥을 발견하고 이 소망이 신념을 일으켰는데 제가 바로 목회를 시작하면서 그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아! 이 여자가 필요한 것은 소망이지, 내가 말하는 계율적인 것을 지켜서 천당이나 지옥을 가지고선 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갔어요.

왜 또 왔어 당신, 날 아무리 사기 쳐봤자 난 아무것도 줄 것이 없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니오, 팔자 안 고치시겠습니까? 제가 그랬어요.

 

"내가 무슨 팔자를 고쳐?"

"내가 당신 팔자를 고친 사람을 알고 있는데요.

그분께 가면 당신 남편의 알콜 중독도 떨어지고 당신에게 먹을 것도 주고, 애들 교육도 시켜주고 집도 위생적으로 좋은 집에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이 있는데요?"

"그분이 누구요?"

"그분이 어디 있어요?"

"내가 만나게 해줄 테니까 따라 오세요"

아 그러니까 이분이 순순히 샌달을 신고 따라 나오더라고요.

전에는 어마어마한 적개심을 가지던 그분이 내가 계율과 율법을 통한 종교를 전할 때는 어마어마한 저항을 하더니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따라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논길을 통해서 오는데 다 떨어진 천막에 가마니를 깔아놓았는데 "어디가 당신 교회요?" "그래요.

여기가 내 교회요"

그러니까 천막을 다 들러보더니 그냥 배를 잡고 깔깔깔 웃는 거예요.

"당신 팔자나 내 팔자나 똑같으면서 무슨 잔소리야?" 그러더라구요(웃음)

"맞습니다.

당신 팔자나 내 팔자나 다 형편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질병에 치료받고 건강을 얻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 우리 한번 믿어봅시다."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화를 안내더라구요, 떠나지 않고!

그 천막교회 가마니에 나오더라구요,

매일같이! 그래서 함께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기도를 한 결과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그 부인이 첫째, 소망을 가지니까 기뻐하고 웃기 시작하고 찬송을 하게 되고 심장병과 위장병 같은 심리현상으로 생긴 병이 낫고 우리가 석 달 동안 기도했는데 그 남편이 알콜을 끊고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면서 함경북도 북청에서 온 분이기 때문에 도민회에서 직장을 주어서 비로소 월급을 타서 쌀을 가져오기 시작하고 애들 학교를 보내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엉겁결에 땅만 내주면 집을 지어줬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조그만한 땅을 마련해서 제가 보증을 서 가지고 재료를 얻어 가지고서 집을 지어줬습니다.

그러니 그 여자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건강해졌다는 말입니다.

3중 축복, 전인구원이라는 굉장한 소망의 메시지에 제가 스스로 감동을 느꼈습니다.” =중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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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00 목사의 주장은 지금 당장 지옥 같은 생활로 죽겠는데,

죽어서 천당 간다는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에요.

한마디로 하나님은 예수 믿으면 육신적으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지금 이 땅에서 잘 살게 해 주지 않으면 가짜 예수란 말입니다.

자기가 아는 하나님은 복주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 하나님이에요.

 

조00 목사에게 복음은 고통 받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 양반의 잘못은 영을 육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영적인 복을 육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게 육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말하면 육으로 해석해요.

그러니 성경해석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고 상식이 되는 것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거룩을 해석한다고 하면 인간적 거룩을 말해요.

결국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라고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영으로 거룩을 해석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거룩이라고 말해요.

도리어 인간에겐 거룩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거룩한 분이라고 증거해요.

인간에게 눈을 떼고 예수님에게 고정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거룩이라고 설교하게 되는 겁니다.

 

암튼 조00 목사는 육에 복을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육적으로 병든 자는 병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복음이고,

가난한 자에겐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어야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만사가 형통하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금 천국을 만들어 주는 종교라고 중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효대사 말이나 예수의 말이 같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이란?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현재의 고통에서 해결해 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는 마치 광야에 사십 일을 주리시던 예수님에게 마귀가 찾아와서 하던 말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 사십 일을 굶주린 사람에겐 떡이 복음이지 무슨 하나님 말씀이냐!

사람이 살아야지 예수도 믿고 복음도 믿는 것이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에요.

그러니 항상 현실 문제를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00 목사의 하나님이란?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시다바리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신이 아니에요.

완전히 주객이 전도가 된 것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우상숭배자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챙기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적 신을 찾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내셔서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상을 말할 때 항상 “너희를 위하여”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는 바로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는 것이 우상숭배란 말입니다.  

조00 목사와 같은 사상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꿈에도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을 참소하는 유대인들이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에게 현실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메시야답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다워야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냐!

현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메시야라고 하면 누가 믿겠느냐! 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세상에선 복음 복음 해도 먹고 사는 문제 해결해 주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인간들에겐 먹고 사는 것이 복음보다 중해요.

오죽하면 먹다가 죽은 귀신은 땟깔도 좋다고 하겠어요.

이는 죽을 땐 죽더라도 잘 먹고 죽으라는 말입니다.

 

어느 시대고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을 자에겐 미련하였어요.

 

고전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미련한 것을 증거하니 바보 소리 듣는 겁니다.

조롱당하는 겁니다.

어느 시대고 복음은 조롱당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반드시 조롱당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조롱당하였으면 예수님의 양도 조롱당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예수님의 양은 같은 팔자에요.

 

유대인들이 현세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듯이 거짓 종들도 복음을 현세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놓았어요.

그래서 거짓 종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실패하여 가난하고 병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외면당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는데 복음은 하늘에 일을 관심 갖게 하잖아요.

인간들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사는데 복음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 전부라고 하니 안 맞지요.

 

유대인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당장 로마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급해요.

그 외는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현실적인 문제는 생각지 않고 이상한 말만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겐 관심 없어요.

예수님의 말은 유대인들에겐 동문서답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급기야는 귀신들려서 미친 소리를 한다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죽겠다고 하는 것은 현실도피 밖에 안 보여요.

죽어도 로마와 싸우다가 죽어야지!

싸우기도 전에 죽는다는 것은 메시야로사 할 말이 아니지요.

그것도 저런 죄인들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건 패배주의자가 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니 죽을 놈이 무슨 메시야라고 하느냐?

자기 목숨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놈이 무슨 남을 구원한다고 떠드느냐!

유대인을 망신시키지 말라고 하면서 미친 놈 취급해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미를 몰라요.

이건 예수님의 양들만 알아요.

 

그래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아요.

양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들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양들은 목자의 죽음을 등한시 여길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시대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자는 항상 복음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죄 문제로 접근을 하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현실 문제로 접근을 합니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복음이 핍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복음이 핍박받는 이유는 인간의 소원을 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도리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를 낮추어 버리고,

섬김 받고자 하는 자를 섬기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뭔가 좀 움켜잡으려고 찾아 나왔는데 예수는 버리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혹을 떼러 왔다가 도리어 혹을 붙이는 셈이 되니 예수가 미운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고 오히려 욕심을 빼앗아 버려요.

세상에서의 성공과 꿈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 꿈마저 버리도록 해요.

 

복음에는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인간들이 추구하는 소원이 죄라고 지적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귀신들려 미친 자라고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너 메시야 아니지!

너 이단이지!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겁니다.

 

양은 예수님과 같은 팔자라고 했잖아요.

그럼 양들도 세상에선 예수님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되겠지요.

그래서 목자의 죽음을 증거하는 성도는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미친 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즉 미움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과 같은 사고로 살아가면 세상으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미움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미리 알려 주신 겁니다.

 

요 15장 19-20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고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걸림돌이에요.

우리 본성과 반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건 우리를 고발하는 말씀이에요.

성도라고 해서 육신의 소욕이 사라지지 않아요.

눈만 뜨면 육신의 소욕을 지향해요.

 

예수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몸뚱이라는 늘 떡을 달라고 해요.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 달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하고 먹고 사는 것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흔히들 하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은 욕심도 없고 모든 걸 다 양보하고 산다고 생각해요.

다 천사 같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건 착각이에요.

 

믿음이 육신의 본능을 없애지 못해요.

믿음은 육신의 소욕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래서 성도는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신이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니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갈고 닦아서 올바른 인간이 되겠다고 하지 않아요.

 

이건 아무렇게나 산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실존을 분명하게 안다는 겁니다.

자기 주제를 아니 자기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겁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 안에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잘 산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고 못산다고 기죽지도 않아요.

 

세상 종교는 사람들은 천사로 만들고자 해요.

하지만 기독교는 죄인을 천사로 만드는 종교가 아니에요.

도리어 죄인을 더 죄인 되게 만들어요.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부정한단 말입니다.

넌 저주 받은 죄인이라고 해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간을 부정하고 죄를 말하는 기독교가 싫은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육적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이에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동일하게 죄를 고발하면 싫어하는 겁니다.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삐딱하느냐!

뭐가 그렇게 못 마땅하느냐!

왜? 한국교회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느냐!

왜? 피해의식이 그렇게 많으냐! 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겁니다.

제발 죄니 예수의 피 같은 음산한 말을 하지 말고 좀 밝고 소망적인 말을 하라고 해요.

 

아니 지옥에 갈 죄인에게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말 이상 더 밝고 소망적인 말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럼에도 구원의 복음을 싫어한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소경이란 말입니다.

영적 소경이니 목자의 죽음을 기분 나쁘게 듣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십자가 피가 복음으로 들리고 그렇지 않으면 듣기 싫어요.

 

여기에서 믿는 자와 믿는 척하는 자가 갈라지게 됩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시험에 드는 이유는 자기 생각과 반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살고자 하는데 자꾸만 망하는 길로 가게 되니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거 내가 혹시 잘못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세상에서 망하는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게 되어요.

 

이러한 불안한 마음들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세상적인 것으로 염려와 불안과 근심 걱정은 다 마귀가 주는 겁니다.

복음은 죽어도 산다는 겁니다.

부활 안에 있는 성도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이는 지금 목숨은 가짜란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목숨을 바꿔치기 하려고 내어주었어요.

 

지금 목숨은 마치 씨와 같아요.

사과 씨가 죽으면 화려한 나무로 다시 살아나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버린다는 목숨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알갱이에요.

알갱이가 죽는 것은 다른 모습으로 싹을 틔우기 위함입니다.

진짜는 씨가 죽고 나서 틔워내는 생명이에요.

 

성도는 이런 생명을 받았어요.

그러니 예수님과 같이 죽어도 다시 살아나요.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줄줄이 살아나기 때문에 첫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로 부활했으니 이제 예수님에게 붙은 자들은 줄줄이 다 살아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양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 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28-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양들은 하나님이 붙잡고 계세요.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다가 때가 되어서 바꿔치기 하려고 껍데기 목숨은 넘겨주는 겁니다.

양들의 죽음도 예수님과 동일해요.

때가 되면 헌 목숨 버리고 새 목숨 주시려고 넘겨주는 겁니다.

 

마귀는 목숨 빼앗았다고 좋아하지만 그건 하나님이 마련한 영생으로 가는 길의 한 수순이에요.

양들을 천당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히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육신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고자 한다고!

그래서 성도에겐 죽음이란 기쁨이지 슬픈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세상 속에서의 양들에 운명을 가늠해 볼 수가 있어요.

세상은 양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알려 주셨어요.

 

마 10:16-18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죽으러 보내고 계세요.

양을 이리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죽으라는 겁니다.

가서 회당에서 매 맞고 채찍질당하라고 합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공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채찍질 당한다는 겁니다.

 

공회란 지금식으로 교단을 말하고 회당은 교회를 말해요.

교단으로부터 제명당하고 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한단 말입니다.

결국 지금의 교단과 교회는 하나님의 원수이고 가짜라는 것을 고발하는 차원으로 보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조기 축구팀을 만들지 않았어요.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노닥거리고 놀라고 하지 않았어요.

기성 교회로 가라고 해요,

가서 십자가 전하다가 이단소리 들으라고 해요.

예수님의 십자기 도를 전하는 자를 이단이라고 하는 그 교회는 가짜임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이게 뭐와 같으냐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유대교로 보내진 양이에요.

유대인은 이리에요.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죽임 당함으로서 유대교가 이리 집단인 것으로 드러냈어요.

유대교와 로마가 한편이 되어서 예수를 죽인 것은 곧 이 세상이 악에 집단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셨듯이 제자들도 죽으러 보내졌어요.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런 용도로 파송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증거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아는 것으로 안주하고자 하잖아요.

핍박 받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괜히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을 했다가 욕먹기 싫으니 아예 안하는 겁니다.

자식들 복음도 모른다고 조소하면서 복음 아는 것으로 판단만 하고 있잖아요.

 

주변에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는 핑계로 숫제 교회를 안 다니잖아요.

복음을 안다면 가짜 목사들이 말에 속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가서 저 목사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해야지요.

가서 예수님이 어떻게 당하셨는가 체휼해 보세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끼로 모여서 노닥거리고 있잖아요.

이건 복음을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니에요.

나에게 이런 피 같은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죽어야 할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피 전하다가 욕 좀 먹으세요.

이단 소리도 좀 들으시구요.

그래야 예수님의 아픔을 알아요.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부터 당한 아픔이 어떤 것인 줄 알게 되어요.

 

십자가 피는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땅콩 까먹으면서 TV 보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에 악을 고발하다가 죽어야 하는 피뿌림이에요.

세상이 복음 받은 성도를 욕 해 주어야지 자기들의 잘못을 알지요.

 

결국 하나님은 자기 양들이 핍박당한 것을 빌미로 이 세상을 심판할 근거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들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가서 물어 뜯겨 죽으라고 보낸단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요.

 

그러니 죽더라도 안심하라는 겁니다.

너희들 속엔 부활의 생명이 칩처럼 내장 되어 있으니 죽더라고 다시 부활프로그램이 가동하여 살려 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어요.

 

마 10:28-31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죽는다는게 농담이 아니고 실제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죽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해서 죽는 것이니 안심하라는 겁니다.

죽을 자리를 하나님이 마련하세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여야 목숨이 떨어져요.

 

이는 세상에서 제대 할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죽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반가워해야지요.

천국 가는 것이니 기뻐 할 일이란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고로 살았어요.

 

고후 4: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가 죽고 사는 모든 것이 곧 예수님의 생명에 활동이에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있어요.

성도는 철저하게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살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세상 속에서의 운명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가련한 길을 누가 걷고자 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예수님의 말에 공감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예수를 믿을 수도 없어요.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과 같은 사고로 살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는 복음을 증거하면 금방 잘 드러나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에게 욕을 먹을 것이란 것을 뻔히 알고서도 그 말을 하고 있어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인간적으로 다시는 이런 말은 안한다고 하다가도 거짓 종들이 말을 들으면 속에서 천불이 나요.

그래서 확 쏘아 붙이는 겁니다.

그리곤 욕을 먹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을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려 줬어요.

 

렘 20장 7-18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예레미야 20장은 성도가 복음 때문에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번민을 당하게 되는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내용이에요.

예레미야는 그 시대 이단자에요.

그 시대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한 톨도 없었어요.

아주 부정적인 사람이었어요.

 

왜? 망한다고 하겠어요.

엉터리니까 망한다고 하는 겁니다.

가짜이니까 무너뜨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부정적인 안경을 씌워서 보냈어요.

그러니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 사실을 몰라요.

다른 목사들 눈에는 안 보여요.

그러니 다른 목사들이 뭐가 잘못인데!

예레미야야 너 왜 그러냐!

왜? 매사에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느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느냐고 욕을 했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예레미야가 전한 복음이 뭔 줄 아세요.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거예요.

성전 앞에 가서 여긴 성전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건 가짜다!

이건 망한다! 라고 했다니까요.

복음이 원래 인간에 죄를 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이에요.

 

백성들 눈에 예레미야가 얼마나 부정적인 사람으로 보였겠어요.

그 누구도 성전을 폄훼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 혼자만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것처럼 그 당시 신앙(교회)을 비판했거든요.

암튼 부정적인 말을 하다가 보니 친구들도 다 떠나고 급기야는 이단소리를 듣게 된 겁니다.

 

예레미야가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 당시 거짓 신앙을 고발케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부정적으로 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 입에다가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담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렘 1:9-10=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망한다는 말을 입에 넣어 주셨어요.

그러니 망한다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겁니다.

입만 열면 망한다는 말만 하게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눈엔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예레미야 1장을 보세요.

북방에서 끓는 가마가 이스라엘로 기우는 것을 보았잖아요.

 

렘 1:13-14=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펄펄 끓는 가마솥이 이스라엘을 행하여 기울어져 있어요.

이제 곧 쏟아져요.

그러니 팔딱 팔딱 뛰는 겁니다.

 

북방에서 끓는 가마는 바벨론을 말해요.

이제 곧 침공한다는 말입니다.

끓는 물처럼 무자비하게 홍수처럼 엄몰하여서 이스라엘을 초토화 시키려고 해요.

그러니 망한다고 소리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말을 누가 믿겠어요.

그런데 예레미야 눈에는 잠시 후면 망하는 모습이 보여요.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말이에요.   

이 사실이 보여지니 예레미야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겁니다.

 

지금 제 눈엔 이 시대 교회가 유대교와 같이 보여요.

예수를 안 믿어요.

믿어도 조00 목사처럼 믿어요.

다른 예수에요.

다 뱀처럼 흙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라요.

흙에 기운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천국 간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어요.

구원 받았다고 한다구요.

 

제 눈엔 아무리 봐도 아닌 겁니다.

대 부분의 교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요.

다른 예수를 믿고 있어요.

피 흘린 예수가 아니고 떡 주는 예수예요.

당연히 가짜 예수이지요.

예수가 가짜이니 신앙도 가짜인 겁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들이 눈멀고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마치 아이티의 지진으로 재난을 당한 난민촌 아이들 같이 손에 떡 하나 움켜잡고 좋아라 하고 있어요.

자기 꼬라지를 못 보아요.

사실이 이렇다! 라고 말하면 도리어 너 왜? 그러느냐고 욕을 해요.

너만 예수 믿냐!

우리도 예수 믿는다고 해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하나님이 제 눈엔 가짜라고 보여주시는데요.

가짜라고 말하라고 부정적인 말을 입에 넣어 주셨는데요.

저도 미칠 지경이에요.

차라리 안 보이면 속이 타지나 않지요.

 

부모형제들에게 신앙이 아니라고 말해 보세요.

그게 얼마나 못할 짓인지 아세요.

눈에 안 보이면 이런 설교 할 이유도 없어요.

그냥 너도 좋고 나도 좋게 두루뭉술하게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그러면서 살고 싶어요.

서로 목사 인정해 주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면 욕 들어 먹지 않고 살아요.

 

그런데 무슨 놈에 팔자가 빌어먹어가면서 맨 날 틀렸다! 아니다! 라는 말을 해야 하니!

그토록 듣기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내가 나를 봐도 참 딱해요.

거울 앞에 선 나를 보고 너 왜? 그러는데 그러고 싶다고요.

왜? 하필 나에게 예레미야가 썼던 그 안경을 씌워주셨느냐고 따지고 싶어요.

따진다고 눈에 보이는게 안 보일 리는 없으니,

그래도 또 이 말을 하면 욕을 먹을 텐데 라고 하면서도 또 너희들 가짜라고 질러대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이단이라고 이런 설교로 소리치는 겁니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요.

혼자가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어요,

아무도 안 들어주었어요.

그냥 벽에다 대고 소리쳤어요.

듣든지 안 듣든지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니에요.

우린 다만 보여준 것을 말할 뿐이에요.

알아듣는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알아듣게 하세요.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럼 너는 그렇게 사느냐! 라고 힐난해요.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복음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누구도 복음적으로 완벽하게 살 순 없어요.

12제자들도 복음대로 살아내지 못했어요.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그 기록한 대로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고 그 기록된 성경으로 자기 자신이 고발당하였어요.

이렇게 살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원한다고 기록했어요.

너희가 얼마나 다른 인간인지를 알라는 겁니다.

결국 자기 쓴 성경에 의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당하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을 가지고 인간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지 복음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사람보고 실족하면 안 됩니다.

구원의 능력은 복음에 있지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아요.

사람은 그냥 도구에요.

그 사람 아니더라도 증거 할 수가 있어요.

 

복음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에요.

복음이 인간을 붙잡아 사용하는 것이지 목사가 복음을 소유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 역시도 지금이라도 성령의 영감이 없으면 복음 전하지 못해요.

성령이 예레미야처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 전한다고 해서 사람을 추종하지 말란 말이에요.

복음 전하는 사람도 죄인이에요.

죄인이면 당연히 죄인행사머리가 나와요.

 

저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복음 전하면 안 되어요.

참 나쁜 인간이거든요.

너무너무 결함이 많아요.

진짜라니까요.

 

저도 제가 한 설교대로 살지 못해요.

결국 제 설교가 저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전 제가 말한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 속에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겁니다.

어차피 제 안에 있는 것들이 여러분들 속에도 동일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이건 누구라도 말씀 앞에서면 자기가 진짜 위선자이고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깨달아져요.

전 처음에 바울이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말이 고상한 신앙의 립 써비스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니 진정한 자기 고백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 역시도 그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예레미야도 동일해요.

그러니 예레미야 자신도 그런 말 하는 것이 싫은 겁니다.

자기가 잘나서 하는 말이 아니니 얼마나 위선적이고 괴롭겠어요.

친구들이 떠난다는 것은 친구들이 예레미야를 잘 알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미친놈 저 혼자 잘난 척 한다고 비아냥거리면서 왕따를 시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는 이런 말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마음을 강권하니 안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니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일이 더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은 너희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도 자기 목숨은 하나님 말씀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한탄하며 차라리 부모가 자기를 잉태하였을 때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팔자타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왜? 태어나 가지고 이 개고생을 하느냐고 하나님께 원망했겠어요.

 

성도의 운명이 이와 같아요.

이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미움을 받을 것을 뻔히 알고서도 그 복음을 증거 해야만 하는 것이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해야만 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하면 반드시 핍박과 위협을 당하게 되지만 그래도 누구든지 아버지 손에서 성도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양들은 이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계 6장 9-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거기 보니 흰옷 입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데모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이 세상을 빨리 심판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근데 기다리라는 이유가 아주 엽기적이에요.

 

아직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다가 예수처럼 죽임을 당하여야 할 양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처럼 죽어야 할 양들의 숫자가 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숫자가 찰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가 죽으면 천사들이 여기 하나 당선이요!

또 죽으면 둘 당선이요!

또 죽으면 셋 당선이요! 해요.

 

이건 마치 국회의원 선거 때 각 정당에 후보자들 사진에다 당선이 확정되면 무궁화 꽃을 꼽듯이 하나 하나 우슬초로 예수의 피를 바르고 계세요.

결국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양들의 운명이란? 복음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핑계 삼아 세상에서 일락을 꿈꾸는 자는 하나님의 양이 아니고 복음을 이용하는 사기꾼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놈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했어요.

 

빌 3장 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하는 놈들은 다 십자가의 원수에요.

제 말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말이에요.

제 말은 안 믿더라도 바울의 말은 믿으세요.

 

바울의 말을 빌리면 조00 목사는 십자가의 원수인 겁니다.

이런 사상을 견지하는 한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는 이단인 겁니다.

모르지요.

그도 바울처럼 다메섹 사건이 일어나서 회개하면 구원 받겠지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랍시다.

 

암튼 바울이 말한 시각으로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를 모니터링 해보세요.

몇 사람이나 복음 전하고 있나?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구요.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 포카스는 육신에게 맞추어져 있어요.

이 땅이에요.

거의가 조00 목사 아류에요.

 

그렇기 때문에 땅에서 성공이 곧 하나님께 축복받은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교인들을 세상 가치로 신앙을 판단해요.

또한 이런 자에게 가르침 받는 교인들도 자연히 세상 가치로 예수를 찾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실망하고 넘어지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살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반대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게 되고 급기야는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처음엔 다 예수 믿는 것 같다가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다 떠나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육신적인 사고로 예수를 믿으니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속한 자는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다.

육적인 문제로 떠나는 사람은 애초부터 예수님의 양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육신의 문제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어요.

 

마 11장 2-6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요한도 오해를 했어요.

세례요한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럼 세례요한의 실족은 곧 율법 신앙의 한계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오면 사회정의를 구현해 줄 것이라고 믿었어요.

메시야가 오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헤롯왕의 죄를 고발하다가 감옥에 갇혔잖아요.

세례요한은 자기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예수가 메시야라고 한다면 반드시 자기를 옥에서 건져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고는 이 시대 개혁주의자들과 진보주의 정의구현 사제단과 같은 사고에요.

세례요한도 헤롯왕의 불의를 지적하다가 옥에 갇힌 겁니다.

이 시대 말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고자 했어요.

그런 메시야를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옥에 갇혀서 예수의 소문을 들으니 자신을 건져 낼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닌가? 자기가 잘못 알았는가? 라는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오실 그 메시야가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네가 오해했다고 하는 겁니다.

세례 요한에게 가서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라고 했어요.

내가 죄에서 눌린 자를 해방시키러 왔지 정의사회 구현하라고 데모하다가 감옥에 갇힌 놈들을 풀어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알려 주라고 했어요.

 

세례요한이 알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성경을 가지고 사회정의를 외치고 땅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조00 목사와 같은 자들이 바라는 세상적인 메시야 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세례요한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왜?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의도대로 일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율법신앙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세례요한의 오해는 선악적 관점에서 죄를 접근한 겁니다.

그러니 헤롯이 자기 제수씨를 데리고 사는 것이 죄라고 보인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헤롯이 만약 그런 일을 안했으면 죄인이 아닌가요.

아니지요.

헤롯 자체가 죄인이잖아요.

그러니 헤롯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틀린 죄관이에요.

세례요한이 이런 죄관을 행사한 것이 바로 율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하잖아요.

그러니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않은 자들은 난 죄인 아니야 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게 아니란 겁니다.

인간에게서 의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인간에겐 의가 나올 수가 없으니 율법식으로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한 세례요한이 목이 잘리도록 내 버려둔 겁니다.

 

이건 율법은 이렇게 목이 잘려야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신앙은 폐기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해요.

성령이 율법적 시고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그것을 죄라고 고발을 한단 말입니다.

 

율법신앙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사상이잖아요.

그러니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요.

복과 저주도 자기 쪽에서 받아 내기도 하고 막기도 한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축복을 받자고 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었으니 이제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어야 된다는 논리에요.

 

그러니 율법신앙은 복을 따내는 수단으로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복을 주지 않고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신앙은 이처럼 항상 내 현실에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메시야가 맞고 해결해 주지 않으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우상숭배에요.

그렇다면 복을 따내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의미에서 율법의 상징인 세례요한의 목을 자른 것입니다.

 

율법신앙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다는 의미로서 세례요한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례요한이 지옥에 같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율법으로 목이 잘리는 것이 세례요한이 맡은 배역이에요.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율법신앙의 허상을 고발하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례요한 같은 사고로 예수를 믿으면 실족하게 된다고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00 목사와 같은 사상으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고난이 닥치면 기겁을 하고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던 대로 안 되니 넘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육적인 것을 바라고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나온 자들은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 11장 7-15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가 교회에 왜? 나왔느냐 묻는 겁니다.

부자 되기 위해서 나왔느냐?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들으려고 나왔느냐?

그도 아니면 십자가 복음 듣기 위해서 나왔느냐?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안에 선지자가 없어요.

전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이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해요.

이런 상태를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고 하는 겁니다.

거짓 종들이 예수님 자리에 앉아서 영혼들을 사냥하고 있는 거예요.

 

선지자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나아오는 것을 죄라고 사정없이 지적해 주는 자에요.

그러니 자연히 선지자는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선지자는 무엇을 하는 자이냐 하면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예수의 삶에 동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난을 당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요한 까지라고 한 겁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요한까지니 라고 하여 세례요한의 시대를 일컬어 율법시대라고 하지요.

세례요한은 구약의 율법 아래선 마지막 선지자에요.

세례요한을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지요.

이는 율법 신앙으로는 이만한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이런 큰 율법신앙도 못 들어가요.

거긴 어린아이라도 예수 믿는 자가 들어가요.

그래서 새 언약 안에선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의 피로 가는 곳이지 인간의 행함으로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는 겁니다.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어요.

이제부터는 천국이 침노를 당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침노를 당하느냐 하면 예수의 사상으로 동참하는 모습으로 침노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기 양들을 삼키는 방식으로 침노를 당해요.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로 살게 되어 있어요.

양들의 운명 속에 예수님의 버림당함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 동네에서 핍박 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다고 하듯이 예수님의 양들도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어요.

이는 세상에 분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유리하는 나그네고 길손들이에요.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를 일컬어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어요.

 

이게 세상 속에 버려진 양들의 운명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이 아닌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려져서 하늘로 가셨듯이 양들 또한 버려짐으로 하늘로 가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그날이 세상에서 제대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조만 간에 제대 통지서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을 사모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세상에 복이 복이 아니라 하늘에 복이 진정한 복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이것이 지식으로 남지 말게 하시고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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