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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73강. 요셉의 양식을 먹을 자들 (창 4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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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021. 9. 21.

 

 

73강. 요셉의 양식을 먹을 자들 (창 42:1-38)

-.정낙원 목사

 

 

 

오늘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만나는 장면을 살펴볼까 합니다.

요셉은 17살 때 꿈 이야기를 하다가 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서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 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후 7년 흉년이 끝나고 7년 기근이 닥치고 온 세상에 곡식이 떨어진 시기에 만나게 되었으니 대략 20여년이 훌쩍 지난 후의 때입니다.

 

만약에 가나안에 기근이 들지 않았으면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과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양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식들을 보내서 사오라고 합니다.

이에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펼치는 일은 모두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사건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사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쳐가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 자체가 그 아들에 의하여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아들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들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구속사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신약에 일어날 일을 미리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셉이 그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리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살리는 이야기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는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꿈을 해석하는 자가 만유의 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함으로서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왕은 모든 권세를 요셉에게 위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애굽은 온 세상을 상징하므로 애굽의 총리는 곧 만유의 주와 같은 것입니다.

요셉이 만유의 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꿈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란? 계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만유의 주(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맡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모든 권세를 요셉에게 위임하였듯이 하나님도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예수그리스도에게 위임을 하셨습니다.

 

주(主)란? 백성들을 위하여 희생하신 분을 말합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희생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의 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만유의 주가 될 수 있는 것도 그들에게 양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백성들로부터 죽임 당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버린 형제들을 용서하고 기근으로부터 자기의 양식을 주어서 살려냄으로서 주(主)로서 해야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백성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하시고 살려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잘 보시면 주가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가 걸어가는 코스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런 과정을 겪으면 주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주는 이러한 과정을 걸어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나온 과정을 보세요.

먼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구원자로 오셨는데 정작 자기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살려내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십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먼저 만유의 주가 되는 꿈을 받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의 꿈을 통해서 만유의 주가 되어서 형제들을 살려냅니다.

 

주가 하는 일은 자기 백성들을 용서하고 살려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먼저 형제들로부터 버림 당하는 일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로부터 버림당하는 것은 그들을 죄 아래 가두고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죄는 반역하는 일이고,

구원은 반역한 자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버렸는데 요셉은 그들에게 자기 양식을 주어서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용서하고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나,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고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일이나 동일한 의미입니다.

 

바로가 자기의 꿈을 해석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요셉의 이름을 바꿔줍니다.

이름을 바꾸어 준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는 사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셉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브낫 바네아” 라고 합니다.

“사브낫 바네아” 라는 이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을 구원하는 자이고,

둘째는,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기도 하고,

생명을 주는 분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는 온 세상이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은 기근을 당한 자들에게 자기 양식을 나누어 줍니다.

요셉의 양식을 먹는 자는 살고 요셉의 양식을 먹지 않은 자는 죽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는 자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사브낫 바네아” 로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건져내는 것만 있지 않고 건져낸 후에 자라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고,

건져낸 후에 새로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일까지 간섭하고 계십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 사역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보면 갈라내고 채우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갈라내는 일을 하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두 구원을 아셔야 합니다.

빼내심을 입는 구원과, 채움을 입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루신 구원과, 부활 후 성령으로 오셔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태어남과 자라감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란? 태어남이 있고 자라감이 있습니다.

구원도 생명의 활동이므로 동일한 과정을 밟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자신의 죽음으로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빼내서 의와 생명이라는 은혜 아래로 옮겨 주시는 구원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과거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 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의와 거룩과 생명을 채워가는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 40년과 같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를 현재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구원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구원을 죄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구원 받은 후의 삶을 간과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막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삶이 없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입니다.

 

믿음과 삶은 분리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삶은 하나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움직임이 있듯이 살아 있는 믿음도 삶이 있게 마련입니다.

삶이 없는 믿음을 일컬어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나무라고 한다면 행함은 열매입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라고 한다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피로 은혜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옮겨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옮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 놓은 자들에게 성령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7족속이 살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육체의 소욕들입니다.

 

성령이 이 놈들을 하나 둘씩 죽여 가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성령이 아담의 속성을 뽑아내고 예수그리스도의 속성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고 합니다.

천지는 우리 몸이고 만물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입니다.

이를 신의 성품이라 하고 또는 성령의 열매라고도 합니다.

하늘에 신령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자식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우리가 낳고 우리가 키워가는 것입니다.

낳는 것도 우리가 하고, 키우는 것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낳았기 때문에 키우는 것입니다.

낳지 않았으면 키우지 않습니다.

그러니 낳음과 키움은 하나인 것입니다.

 

나 구원 받았다.

땡.

그런 구원은 없어요.

그건 마귀의 종들이 성경을 철학으로 공교한 논리를 만들어서 가르치는 이단 사상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이 복음을 훼손하였듯이 지금도 영지주의자들이 복음을 그럴듯한 논리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성도의 삶을 간과케 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이 이론에 훅하고 넘어갑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난 후에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아라 라고 합니까?

자식을 방치 합니까?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싸움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했으니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전쟁을 벌이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대한 아낙 자손인 가나안 7족속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옛 사람의 속성들로 가득합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냄과 악한 생각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들이 가득합니다.

옛 사람의 속성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듯이 육체의 소욕들을 하나 둘씩 점령해 가시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씩 뽑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땅에 지체를 죽인다고 합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사기 전쟁입니다.

 

사사기 3장을 봅시다.

 

삿 3:1-6절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않고 조금 남겨두십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남겨둔 놈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들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혹하는 것들이 우리의 육신이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남겨 둔 것이 이겼다는 것은 우리는 그들을 못 이겨낸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육신의 소욕을 못 이깁니다.

못 이기니까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말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못산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공로가 오롯이 남기를 바라십니다.

 

신앙이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없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죄인된 것을 더 많이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은혜를 받을수록 할 말이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유구무언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면서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음식 얻어먹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마치 식당에 가면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떡을 먹을 때 손으로 뜯어서 먹습니다.

손으로 뜯어 먹기 위해서 먼저 손을 씻는데 떡가루로 씻는 것입니다.

떡을 조금 떼어서 씻고서는 상 아래로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가 먹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부스러기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개의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죄인의 자리로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아가는 개처럼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내가 이렇게 악한 죄인이구나,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죄인이 거할 자리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이 죄입니다.

 

성도는 두 가지 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첫째는, 세상에 속하였으니 세상이 말하는 죄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을 합니다.

이걸 윤리와 도덕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참소당하지 않으려면 세상이 정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죄입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죄는 예수 안 믿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봅시다.

 

눅 18:9-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의 악함을 고발하는 비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행실로 세리와 창기들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 와서도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아니 함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의로 나온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기 의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 의롭다 하느냐 하면 자기 행위의 반듯함이 있을 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행위들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 할 때 내어 놓는 행위들과 같은 것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열심과 인간적인 반듯함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데 바리새인은 자기의 깨끗함을 의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로도 충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기의 행위를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행실이 더러운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행실이 더러워서 도무지 하나님 앞에 얼굴을 쳐 들 수가 없다고 하는 세리는 옳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기 행실이 너무도 반듯하여서 하나님 앞에서도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자랑을 한 바리새인은 틀렸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잘못이 무엇인가요?

그들이 자랑하는 것들이 잘못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이 살았던 삶 자체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을 의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잘못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난 자 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이러한 모습이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행실 속에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한 의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아나 과부를 돌아보고 세상이 말하는 죄를 짓지 않고 교회에서 종교적인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적으로 나쁜 짓을 하면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관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제가 종종 죄인을 바퀴벌레 비유로 드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인간들 앞에서 바퀴벌레와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바퀴벌레의 행위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바퀴벌레 자체가 인간들에게는 백해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바로 바퀴벌레와 같은 죄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바퀴벌레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 주제에 반듯한 삶을 살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반듯하게 살았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의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 잘난 죄인의 의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나쁜 적은 자기 행위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를 믿는 종교인입니다.

 

종교가 예수를 죽입니다.

종교적 행함이 믿음으로 난 의의 적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행실을 바탕으로 선과 악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선한 행실을 의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선한행실이 많은 사람을 성자라고 추켜세워서 위인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불교에서는 고승들로 나타나고 천주교에서는 성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유명한 목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유명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업적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명한 인간은 없습니다.

목사에게도 유명한 업적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그리스도만이 유명한 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유명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유명하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목사라는 말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건 인간들이 세상적인 선악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자가 되고자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세요.

그럼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로만 판단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선한 자라고 하고,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악한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에 준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의를 가진 자는 선한 자이고,

누구든지 예수의 의가 없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의를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양식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주는 양식을 먹는 자는 선한 자이고,

누구든지 예수가 주는 양식을 먹지 않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요셉이 주는 양식을 먹는 자는 선한 자이고,

요셉의 양식을 안 먹는 자는 악한 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이 양식을 사러온 형들을 보고서 무엇을 추억을 합니까?

꿈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꿈이 뭔가요?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형제들이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양식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가 하는 일이 자기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어서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미리 꿈을 줍니다.

그리곤 형제들에게 버림 당하고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합니다.

이건 요셉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예정된 수순이라고 합니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 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한 사람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기근을 불러서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어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을 불렀다고 합니다.

기근을 불러들이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들이 의지하는 모든 양식을 끊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왜 기근을 불러들였느냐?

전부 죽을 자리로 몰아넣고자 하심입니다.

죽을 자리로 몰아놓고 한 사람을 통하여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벌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가지고 하시는 일입니다.

 

이걸 예수님 이야기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죄 아래 가둔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두어놓고 예수님 한 사람을 보내어서 살려내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기근이 들게 합니다.

그리고는 인간들이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버립니다.

그게 7년 기근입니다.

 

기근이 들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양식이 있습니다.

요셉에게만 양식이 있습니다.

양식을 먹으려면 누굴 찾아가야 하나요?

요셉을 찾아가야 합니다.

 

요셉의 양식을 먹은 자는 살아납니다.

이러면 모든 사람은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한 생명을 먹었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요셉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한 생명만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이를 구약 마당에서는 요셉의 양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서 양식을 준비케 하신 후에 온 세상에 기근을 보내서 양식을 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 요셉이 어떻게 양식을 준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케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감옥에서 석방이 됩니다.

 

바로는 옥에서 나온 요셉을 총리로 삼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양식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근이 닥치자 준비한 양식으로 사람들에게 살리는 일을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온 세상의 구주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오셔서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양식이란? 산 자들이 먹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양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이 양식을 찾는지 안 찾는지를 보면 살았다 죽었다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산 자는 날마다 생명을 공급 받아야만 합니다.

산 사람의 생명은 양식에 있습니다.

양식을 먹는 자가 산 자입니다.

산 자는 날마다 요셉에게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로부터 살아난 성도는 날마다 예수라는 양식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찾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구원 받을 때 한번 믿고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산 자는 날마다 양식을 먹음으로서 살아가듯이 예수로 구원을 받은 자들도 날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이를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죄는 날마다 우리 몸을 근거로 해서 발호를 합니다.

밤낮 없이 발호합니다.

 

죄 있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사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긍휼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가 긍휼의 자리입니다.

 

생명과 양식은 동등한 비중입니다.

산 자는 양식 없이는 못 삽니다.

그러므로 산 자는 날마다 양식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산 자는 양식을 구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없습니다.

즉 예수로 살아난 성도는 예수 믿기를 게을리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 듣기를 중단 할 수가 없는 것은 그 말씀이 곧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떡이고 생명입니다.

말씀이 예수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밥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좋은 믿음을 가진 성도는 말씀 듣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은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 듣는 일을 등한시 한다는 것은 마귀로부터 미혹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근을 당하면 산 자는 즉시로 양식을 찾아 나시게 됩니다.

양식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게 됩니다.

생명이 양식을 찾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듯이 산 자는 양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야곱이 알고 자식들에게 알려줍니다.

 

창 42:1-2절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식들은 관망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자기 자식들을 보내서 양식을 사오라고 한 것입니다.

 

자식들은 구경만 했습니다.

관망만 한다는 말은 양식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양식의 소중함을 모르니까 관망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경한다는 것은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기근 속에서도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양식을 구할 수가 없어요.

산 자가 주어야지만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나서는 것입니다.

 

이러면 야곱은 산 자이고 그 자식들은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한 몸이에요.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등재한 것입니다.

 

야곱은 비록 요셉과 떨어져 있지만 영적으로는 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닥치자 그 자식들을 요셉에게 보내서 양식을 구해 오라고 한 것입니다.

왜 자식들을 요셉에게 보내는가 하면 그들은 한 부모 아래서 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는 같은 양식을 먹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1-12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다 하나에서 난 한 형제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럼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누구인가요?

자기 백성들입니다.

 

이걸 요셉과 그 형제들에게 적용하면,

양식을 주는 자와 양식을 얻어먹는 자는 한 형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 자식들을 요셉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가서 요셉의 양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자식들이 요셉에게 갑니다.

그러자 요셉은 대뜸 알아먹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요셉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은 우리를 척 알아보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를 알아보는 자가 형제들을 살리는 구원자입니다.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형제들을 자신의 운명에 동참 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그 형제들을 사흘간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알아보고 3일간 감옥에 가둡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 형제들을 요셉의 운명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들어간 감옥이 요셉이 갇혔던 감옥입니다.

요셉도 애매히 감옥에 갇혔어요.

요셉의 형제들도 애매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습니다.

 

형제는 공동운명체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자기가 죽었던 그 코스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삼일 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살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3일 동안 계셨다가 살아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이나 그 형제들이 감옥에 갇힌 것이나 예수님이 무덤에 갇힌 것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나중에 국가적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러니까 영적 의미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구약 이스라엘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동참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고 그 말씀이 응하기까지 했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응하기 까지란 언약이 이루어지기까지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사건입니다.

그 언약은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함을 입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요셉은 그 형제들과 이루는 것입니다.

떡을 주는 자와 떡을 먹는 자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야곱의 아들들만 가두었습니다.

왜 야곱의 아들들만 가두었느냐 하면 그들이 바로 요셉과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서 총리를 만든 것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형제들을 살리려면 그 형제들도 요셉과 똑 같은 공동 운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을 감옥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고 난 후에 양식을 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양식은 산 자들이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자들이 산 자인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자들에게 오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만이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임을 알고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먼저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을 몽땅 데리고 죽은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예수 안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표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그 안에서 나온 자들도 몽땅 죽은 것이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이 믿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예수 안에 갇혀진 운명입니다.

예수님과 공동운명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와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의 싸움입니다.

 

마귀는 독자적으로 살라고 하고 성령은 예수 안에서 살라고 합니다.

마귀는 자기 의로 살라고 하고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입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믿음으로 입니다.

믿음이 곧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 믿음은 내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행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나를 바라보게 하고,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허물과 흠이 많아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한 몸으로 연합이 된 자는 예수님이 생명을 늘 공급해 주십니다.

그것이 용서이고 긍휼입니다.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예수님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은혜와 용서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값없이 공짜로 주어집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요셉의 형제들은 양식을 값 주고 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들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공짜로 양식을 줍니다.

돈을 다 돌려 주었습니다.

이는 형제들을 요셉의 은혜 안으로 끌어 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양식을 값을 주고 사고자 하는 방식은 율법적 사고입니다.

율법은 내 공로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돈으로 양식을 사고자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셉의 양식을 먹으려면 이러한 사고부터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어서 돈 주고 양식을 사고자 하는 사고를 죽인 것입니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이 자기 값을 치루고 산 양식들을 형제들에게는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값을 지불하면 영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 어떤 율법사가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라는 말은 방법론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방법만 알면 인간들 힘으로 영생을 따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사고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각종 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종교는 모두가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선행을 신앙의 근본 바탕으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하게 산 사람을 성인으로 칭하고 그들은 천국에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제들이 그러한 사고로 요셉을 찾아 온 것입니다.

마치 율법사가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이 자기가 가지고 온 돈을 그대로 주고서 양식은 공짜로 줍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양식을 공짜로 준 것은 은혜 안에 두고자 함입니다.

 

애굽에서는 내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까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의 공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양식이 바로 하늘에서 내린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요셉의 양식은 은혜의 양식입니다.

이것은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근 속에서의 양식은 값으로 매길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은혜덩어리입니다.

은혜는 값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양식은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를 먹거리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공짜로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고,

신약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고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도 없었습니다.

구원에 대하여서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셨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아무런 값없이 예수를 믿었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공부해서 알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를 열어서 들려지게 해 주시니까 들리는 것이고,

눈을 열어서 보여주게 해 주시니까 보이는 것이고,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알기에 은혜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말씀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지금은 말씀의 기근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말씀을 생명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떡이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말씀 듣는 것을 우선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떡이 없으면 죽는 줄 알면서도 말씀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들이 추상적이고 관념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구원을 값 주고 산 것이 아니라서 그럽니다.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서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은혜의 귀함을 모릅니다.

법 아래서 난 자들은 법으로 사는 것이 편하지 은혜로 사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법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고,

은혜는 공짜로 사는 것입니다.

 

법은 내 돈으로 양식을 사 먹는 것이고,

은혜는 공짜로 양식을 얻어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돈으로 양식을 사 먹는 것이 익숙하지 공짜로 얻어먹는 것은 불편해 합니다.

공짜로 얻어먹게 되면 왠지 빚을 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빚지고 사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고 불편해 합니다.

빚을 갚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양식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값없이 먹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값을 주고 사는 양식이 있습니다.

 

어느 때는 공짜로 먹으라고 하고,

어떤 때는 값을 주고 사라고 합니다.

 

공짜로 먹는 양식은 무엇이고,

값을 주고 사는 양식은 무엇인가요?

 

양식을 의역하면 생명이 됩니다.

생명을 의역하면 의가 됩니다.

그럼 양식도 의역하면 의가 되는 것입니다.

 

양식은 의입니다.

값없이 와서 마시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값 주고 사라는 이야기는 돈 내고 사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들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종말 교회의 모습이 자기 것으로 자긍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문 밖으로 내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입혀준 가죽 옷을 벗어 버리고 자기들이 만든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자기들 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목불인견입니다.

하나님이 차마 못 보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합니다.

네 꼬라지가 어떤지 좀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흰 옷을 사서 입고서 발가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합니다.

흰 옷을 사라는 말은 값 주고 사라는 말입니다.

이 값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값 주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를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처음 너희에게 값없이 준 그 의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값 주고 사라는 말은 값없이 준 그 의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이를 문을 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들어가서 먹고 마신다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양식으로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마귀는 먹고 배부르지 못할 인간의 의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버리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로 된 치마를 가지고 가죽 옷을 벗게 합니다.

인간들이 여기에 왜 잘 미혹 당하는가 하면 인간의 의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 안에는 자기 자랑거리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자기 자랑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공짜로 받은 구원조차도 자기 공로로 챙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자기 행위로 바꾸어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비결신앙입니다.

 

구원 받는 비결,

은혜 받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

은사 받는 비결,

 

구원이니, 은혜니, 축복이니, 은사는 모두가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따 내는 것으로 둔갑시켜 놓았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를 문 밖으로 쫓아내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조성모가 부른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쉴 곳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문 밖으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책망하고 징계한다고 합니다.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란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것을 붙잡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처럼 돈을 주고 양식을 사려고 하지 말고,

값없이 공짜로 주는 요셉의 양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그늘 아래서 살라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요셉이 양식을 어떻게 준비하였는가요?요셉은 7년 풍년 동안 자기 돈을 주고 곡물을 사들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온 세상이 풍년인데 곡물을 돈 주고 사들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 집 농사가 풍년이에요.

집에 곡식이 차고 넘쳐요.

그런데 값을 주고 남의 곡식을 사들입니다.

이건 어리석음이에요.

내 집의 곡간에 양식이 차고 넘치는데 돈을 주고 남의 곡식을 살 사람은 없습니다.

 

곡식을 값을 주고 살 때는 내게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반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곡식이 차고 넘칠 때는 값을 주고 사들이고는,

정작 곡식이 없을 때는 공짜로 나누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까요?

이는 백성들의 생명을 은혜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풍년 때에는 값을 주고 곡물을 사들이고는 흉년 때에는 양식을 값없이 나누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곡물과 양식은 다릅니다.

곡물은 풍년 시절에 먹는 밥이지만,

양식은 기근 속에서 살게 하는 생명인 것입니다.

 

밥은 값을 주고 사 먹지만 생명은 값을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으로부터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름이 뭐라고 했나요?

사브낫 바네아 라고 하였지요.

그 이름의 뜻이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지켜 주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에게만 양식이 있다는 것은 요셉이 생명을 주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온 백성들에게 생명을 공짜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요셉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으로부터 양식을 공급 받는 사람들은 요셉을 생명의 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천국을 아들이 나라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로 낳아진 자들이 살아가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천국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자들로 가득합니다.


이게 이 시대는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 값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 온 자들에게는 공짜로 생명의 떡을 주십니다.

교회의 양식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예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모두가 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값을 주고 양식을 사려고 온 형제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비의 모든 식구들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합니다.

이것은 값 주고 사는 땅에서 값없이 살아가는 은혜의 땅으로 초대 한 것입니다.

법의 나라에서 은혜의 나라로 초청한 것입니다.

 

요셉이 준비한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나라로 초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요셉의 양식이 있는 곳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만유의 주가 배설한 잔치 자리입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공짜로 왕이 차려 놓은 은혜의 음식들을 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왕의 은혜를 찬송하여야 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 소리에 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차려진 천국의 음식들을 마음껏 잡수시고 은혜의 사람으로 강건하게 세워져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내려온 예수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먹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떡을 먹은 자로서 그 떡이 없이는 살 수가 없음을 깨닫고 날마다 먹고 또 먹게 하여 주옵소서. 기근 속에서도 주께서 준비한 양식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서 먹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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