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Only Jesus.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67강. 약속대로 오신 신(神)의 아들 (요 10: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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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9. 22.

 

 

67강. 약속대로 오신 신(神)의 아들 (요 10:30-39)

-.정낙원 목사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 이해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지식이 다르고 앎에 깊이가 달라요.

자연히 서로의 판단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면 의견에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까?

상대방이 나를 볼 때도 그래요.

아니 당신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이걸 만약에 정답을 찾는 일이라면 둘 중에 누구 것이 정답입니까?

수리탐구같이 객관적으로 답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서로가 느끼고 깨닫는 주관적인 것이면 답이 없어요.

그냥 자기가 아는 것으로 가야지요.

 

이런 것이 신앙의 문제로 부딪치면 합일점이 없어요.

신앙적인 일로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감당이 안 됩니다.

서로 자기 신앙이 맞다고 하는데 누가 판단해 주는 판관(判官)이 되겠어요.

하나님 이외는 판단하실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미주알 고주알 판단해 주지 않으니 문제인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목사님은 십자가! 십자가 그러는데 그게 목사님 주관적인 신앙일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해요.

맞아요.

제 주관적이에요.

 

제가 깨달은 것이니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이건 버선 뒤집어보이듯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부부간에도 보여줄 수가 없어요.

동일한 믿음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주관적이에요.

하지만 믿음의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온 믿음을 받은 성도는 동일한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합니다.

핏줄이 당기듯이 한 성령을 마신 성도는 통하는 것이 있어요.

 

주관적인 믿음을 객관화 시켜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통해서 각자의 주관적인 믿음이 하나로 모아지게 됩니다. 

왜? 십자가냐?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만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깨트려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하시는데,

그 언약의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도 과거에 수많은 신앙들을 거쳐 왔어요.

흔히 말하는 이단이라는 곳에도 빠져 보았고,

종말론에 심취하여 재림을 부르짖을 때도 있었고,

예수님의 신부로 단장하여야 한다고 해서 성화주의도 외쳐보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지독한 율법주의로도 살아보았고,

흔히들 성령 운동한다고 갖가지 은사 신앙도 체험해 보았어요.

그러니 어떤 신앙이든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대충은 다 알아요.

 

저는 성격이 이것이다 싶으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올인을 해요.

그래서 깊이 빠져 들어요.

빠져서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판단해요.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쉼을 얻지 못했어요.

처음엔 가슴에 불꽃이 튀듯이 이거다 싶지만 몇 년 열심히 해보면 금방 공허함을 느껴요.

 

솔직히 위에 열거한 갖가지 신앙은 모두가 한 가지를 바탕에 깔고 있어요.

모두가 인간의 열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여기서 얻는 기쁨은 자기 열심으로 얻어내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내 열심과 비례하여 기쁨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마치 자원봉사자들이 봉사를 하고 나면 보람을 느끼는 것과 같아요.

자원 봉사 속에는 자기 피와 땀이 서려 있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는 것은 종교 생활이지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러니 저는 그동안 종교생활을 하였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거예요.

내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기 때문에 내 열심과 상관없이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물론 흉내는 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흉내 내는 것도 오래가지 않아요.

종교생활이란 그래요.

 

늘 반복되는 일상을 하면 식상해지고 외식으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항상 내가 열심히 하면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다가도 열심히 사라지면 금새 곤고해져요.

그러니 곤고함을 없애기 위하여 금욕이니 금식이니 산 기도니 1년 365일 철야기도니 하는 식의 종교적인 자학(自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이런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종교생활은 내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시절을 좇아 변해요.

조석(朝夕)으로 변하고 늘 여일(如一)하지 않아요.

신앙의 기복이 너울처럼 심해요.

 

신앙이란? 내게서 일어난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믿는 겁니다.

저는 과거에 언약을 몰랐어요.

옛 언약이 뭔지 새 언약이 뭔지를 몰랐어요.

물론 성경을 수십 독을 했으니 본 것은 있지요.

그러나 그 의미를 몰랐어요.

 

그냥 열심히 믿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한 동안은 어쭙잖게 수도사처럼 절제된 생활도 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육체의 소욕을 날마다 죽이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세상에 은혜를 받고 나니 언약이 보여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안 거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을 안 겁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예레미야 33장을 봅시다.

 

렘 33: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일을 행하는 분도 여호와이고!

그 일을 지으신 분도 여호와이고!

그 지은 일을 성취하는 분도 여호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여호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세요.

히브리서 1강부터 27강까지 강해가 이 사실을 중점적으로 말해 놓았으니 참고하세요.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고 하지요.

이는 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 몸에 컨디션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어요.

 

믿음이 오면 이 약속이 믿어지기 때문에 기복이 사라지는 겁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한마디로 십자가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이 새 언약이 믿어지니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곤고함 들이 다 사라져 버렸어요.

마치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던 아이처럼 불안한 마음이 엄마를 다시 찾고 나서 얻어지는 그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 흐르는 겁니다.

 

십자가 속에 담긴 새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엄청 울었어요.

밤이 맞도록 소리 내어 기도하면서 펑펑 울었어요.

너무도 기뻐서!

너무도 행복해서 몇 날 며칠을 울었어요.

그 황홀함과 그 행복을 잊지 못해요.

 

새 언약이라는 약속을 받고 난 후 방황하던 신앙을 끝냈어요.

내 열심에 따라서 춤추던 너울성 파도와 같은 신앙생활을 마감했어요.

마치 미친 여자 널뛰듯이 자기 행함에 따라 울고 웃고 하던 종교 놀음에서 해방되었어요.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는 신앙에서 해방되었어요.

 

십자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예수를 믿고자 엄청 노력했어요.

교회 충성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달달 외우면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끝내 믿지 못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믿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인데 내가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믿음이 십자가와 함께 넝쿨채 굴러 온 겁니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바울만 다메섹 사건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다메섹 사건이 제게도 일어난 겁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 거리고 천둥이 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밀물처럼 밀려와서 예수님이 믿어지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그게 다메섹이에요.

어떤 설교를 듣다가 일어날 수도 있고 책을 읽다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저희 블로그에 글을 보다가 이런 사건이 일어난 분들이 많아요.

많은 분들이 전화를 하세요.

비로서 복음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그 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과거 제가 복음을 깨달았던 것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이제 점점 더 깊은 언약의 맛을 알아가겠지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의 깊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복음이 주는 희열이 폭죽이 터지듯이 황홀하고 기쁨의 생수가 넘쳐흐를 겁니다.

 

주께서 시작하셨으니 반드시 주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요.

다메섹 사건이 일어나면 모든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가 되어져요.

그래서 제가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겁니다.

 

제가 설교를 간증 적으로 풀어내는 이유도 아마도 한국교회 안에 과거 제가 헤맸던 것과 같이 지금도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에게 미흡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께서 제게 베푸신 긍휼을 알리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겁니다.

 

간증적으로 풀어내다 보니 제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하는데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게 하는 일이라면 나의 수치보다 복음 전달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목회를 할 때 제 아내가 제일 반대 했어요.

속된 말로 듣는 사람이 있어야지 십자가를 전할 것이 아니냐! 라고 비아냥거렸어요.

교인들이 하나 둘 떠나니까 불안하잖아요.

아니 그 좋던 직장 다 그만 두고 목사가 되었으니 교회가 제대로 굴러가야지 먹고 살 것 아닙니까?

그 당시에는 아내가 복음을 몰랐으니 아내 입장에서는 교인들을 관리하는 목회가 중요하지 십자가 복음이 중요하지 않아요.

 

목사나 사모들이 교회에 목을 매는 것은 교회가 먹고 살아야 할 직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도 좋지만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교인들이 있어야 복음도 전하고 먹고 살 것이 아니냐 에요.

그런데 지금은 복음 전하지 않으려면 목사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변했어요.



암튼 그 땐 엄청 싸웠어요.

아내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한 것이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는 교회부흥을 시킬 거라고 좋다고 하는 세미나란 세미나는 다 참석하고 다녔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십자가! 십자가 그러니 이상할 만도 하지요.

이것도 몇 일 하다가 또 때려치우는 것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지요.

 

하지만 당시엔 제가 십자가 복음을 알고 아내에게 난 십자가를 버릴 수 없으니 십자가 복음 듣기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라고 했어요.

이건 양보하거나 타협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 가식적으로 했던 그 지긋 지긋한 외식신앙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복음이 주는 기쁨을 다 알지 못할 겁니다.

 

그만큼 저에겐 십자가 복음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가족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지금도 가족보다 복음이 더 소중해요.

이젠 바울처럼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살아요.

교회 목회는 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일은 그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러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오직 십자가만이 생명이라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깨달아 질 때 까지는 절대로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아요.

그래서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제일 무서운게 신앙의 차이에요.

 

한 집안에 두 신앙을 가지고 있어 보세요.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납니다.

왜? 신앙적인 충돌은 하나 될 수 없는가 하면 영(靈)과 육(肉), 하늘(天)과 땅(地), 빛(光)과 어둠(暗)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이나 빛이나 하늘에 속하였다 함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판단 할 수 없는 영역이란 말입니다.

영과 육은 상식도 통하지 않고 이성도 통하지 않아요.

마치 서로 벽이 문이라고 내미는 것처럼 도저히 굽히지 않아요.

그만큼 타협이 될 수 없는 것이에요.

 

이런 충돌이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일어났어요.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서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서로가 알고 있는 하나님 관이 달랐어요.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있어요.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섬겨온 하나님이 있어요.

이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율법으로 아는 하나님이에요.

율법으로 계시된 하나님은 착한 자에겐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겐 벌을 내리시는 상선벌악(償善罰惡) 하는 하나님이고 인간이 행한 대로 반드시 보응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 하는 분이에요.

 

그러다 보니 모든 일을 선악(善惡)의 구조로 접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율법을 지켰으면 상(賞)을 받고 안 지켰으면 벌(罰)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유대사회 전체가 그런 분위기로 다스려졌어요.

유대인은 국가 자체가 교회이니 지금 식으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로 찬단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하나님 관이에요.

이방인들은 율법을 안 받았을 뿐이지 그들 안에도 양심이 율법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선벌악(償善罰惡)하는 하나님은 이방인도 낯설지가 않은 겁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한다는 것도 낯설지가 않은 겁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악한 일을 행하고 나서 나쁜 일들이 생기면 내 그럴 줄 알았다!

그것 참 고소하다!

모든게 인과응보(因果應報) 라고 하잖아요.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인간 쪽에서 복을 받든지 재앙을 당하든지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 행함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겁니다.

복 받을 짓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에서는 항상 착하게 살라고 가르쳐요.

이런 사고가 이젠 교회 안에도 그대로 진리처럼 가르쳐 지고 있어요.

일명 거룩하게 살아서 복 받으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교인들이 복 받을 것이라고 열심과 충성을 내는 겁니다.

목사들도 그 따위로 신앙생활해서 복 받겠느냐! 라고 공갈을 치잖아요.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럼 그렇지! 하고선 그 원인을 내가 뭘 잘못 했는가? 라고 자기 행함 쪽에서 찾잖아요.

목사들은 뭘 안 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몰아가서 액땜씩 신앙생활을 부추기고 있잖아요.

 

욥기서에 보면 욥에 친구들이 욥이 당한 고난을 이런 사고로 몰고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욥 역시도 이 사고를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나 욥이 당한 고난은 욥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고자 일어난 사건이에요.

그래서 끝없이 해결도 나지 않는 논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타나서 엉뚱한 이야기로 모든 입을 막아 버립니다.

 

너! 왜? 광야에 비가 오는지 아느냐!

너! 하늘에 별을 만들 때 어디 있었느냐!

너! 바닷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너! 바닷 속 물밑에 들어가서 걸어 다녀 보았느냐!

너! 빛과 어둠을 가두는 창고를 보았느냐!

너! 빗방울의 아비를 보았느냐!

너! 산 염소가 새끼 칠 때 뭐 했느냐!

너!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주어본 적이 있느냐!

 

좌우지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과 욥이 살면서 한 번도 신경 써 보지 않았던 일들을 묻고 있는 겁니다.

욥이 하도 기가 막혀서 자기 주둥이를 막고 말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예상치 못하는 것을 말씀 하시고는 이런 것도 모르는 놈이 너에게 일어나는 일을 어찌 너에게서 원인을 찾느냐! 라고 묵사발을 내신 겁니다.

 

내가 너희들 행동에 따라 일하는 시다바리 인 줄 아느냐! 라고 혼쭐을 냅니다.

이런 것도 모르는 놈들이 하나님이 어쩌고 저쩌고 말하느냐 에요.

욥이 당하는 고난도 이런 류에 속한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왜? 나만 들들 볶아 댑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사건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자 하잖아요.

 

이게 바로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모든 것이 내 원인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 다구요.

그래서 옛날엔 비가 안 오면 왕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곤 했어요.

자기 때문에 비가 안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비는 인간의 영향에 따라 오고 안 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관해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 쪽에서 해결 책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부릴 수 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모르면 무속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모든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금식에다 철야에다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기도한다고 난리잖아요.

금식이나 철야 기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발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기도나 금식은 우리 소원 풀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소원 풀이식으로 하고 있어요.

꼭 기우제(祈雨祭) 지내는 것과 같아요.

새벽기도 안하던 사람이 새벽기도 나오면 반드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문제를 풀어 보겠다고 몸으로 정성을 쏟는 겁니다.

수능시험 앞두고 교회들이 100일 특별 기도회를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을 모르니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열심히 빌라고 하고, 정성을 쏟으라고 닦달하잖아요.

그냥 빌지 말고 빌 때마다 복채도 듬뿍 내고 발라고 하잖아요.

이런 무당목사들이 큰 교회들을 다 꿰차고 있어요.

크고 작은 교회마다 대부분 이런 무당목사들이 장악하고 있어요.

 

이 시대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조그마한 일들을 인과응보(因果應報)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욥에 친구들과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의 행함에서 찾으니 맨 날 행함을 뜯어 고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술 쳐 먹다가! 끊다가!

기도 했다가! 안 했다가!

예배 잘 나오다가! 안 나오다가!

이렇게 하다가 안 되면 저렇게 하고!

 

요즘 TV에서 인터넷 선전하는 것처럼 “쿡” 했다가 “쇼” 했다가 “쇼” 했다가 “쿡” 했다가 “쿡 앤 쇼”를 하고 있어요.

완전히 쇼를 하고 있어요.

 

꼭 마누라가 외출 하면서 이 옷 입었다 저 옷 입었다 하면서 여보 나 이뻐! 그러는 것과 같아요.

남편들은 니 마음대로 입어라!

제발 좀 가자!

시간 늦겠다!

그래요.

 

솔직히 남편들은 귀찮아서 건성으로 대답해요.

그 몸매가 그 몸매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에요.

그게 어디 변합니까?

변했다면 얼굴에 돈을 쳐 바른 것이지!

돈 약발이 떨어져 보세요!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요!

제발 좀 속지 마세요.

 

무당들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놀러가서 발이라도 삐끗하면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 한데 징계 받을 줄 알았어! 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겁니다.

이게 전형적인 세상에서 바라보는 인과응보의 하나님 관이에요.

한국교회 무당 목사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이에요.

목사들을 무당이라고 좀 과격하게 직설적으로 말해도 이해하세요.

욕은 욕다워야지 사실감이 있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이든 절간이든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모두가 신께 복을 받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의 신앙은 착하게 사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설교가 윤리 도덕 시간이 되고 말았어요.

지극히 세상 적이고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행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가 교회인지 절간인지, 세상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안가요.

 

교회에서 세상에서도 듣던 지극히 보편적인 하나님을 듣다가 보니까 이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낯설지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낯선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어요.

인간의 행함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言約)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언약이 뭔 줄 모르니 언약의 하나님을 알 턱이 없지요. 

언약의 하나님을 말하면 생소하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실제로 교인들에게 새 언약을 말하면 그게 뭡니까? 라고 물어요.

우린 그런 건 모르겠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복을 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물론 대 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인상을 찌푸리거든요.

마치 듣기 싫은 잔소리 듣듯이 해요.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모든 목사들이 말하는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예요.

결국 열심히 해서 복을 받는 말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듣다가 나중에 이해가 안 되면 목사님은 자기들 교회 목사님과 다른 말을 한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광경이 이미 2천 년 전에 유대교회에서도 있었어요.

오늘 본문이 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언약의 하나님을 말하니까 유대인들이 너 미쳤냐! 라고 돌을 들고 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에겐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버지는 아들을 앞세워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언약(言約)이거든요.

 

자 중요한 말을 하나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안 해 보았나요?

인간들이 창조되기 전에는 어떤 세상이었을까?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뭘 했을까?

 

전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창세전 즉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야기가 성경에 있어요.

사도바울이 창세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어요.

 

에베소서를 1장을 봅시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에베소서를 씁니다.

성령에 감동을 받고 보니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한 내용이 있는 겁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해요.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일컬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자 정리 해 봅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어요.

물론 이 일을 성령께서 증거를 하시니까 성령도 함께 계신 것이지요.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가 생기기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셨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의 내용이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성도를 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 안에서 택함을 받는 성도를 그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말은 흠이 있는 자란 말입니다.

흠이 있는 놈을 흠 없는 놈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런다고 하나요?

아들이 그런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들 안에서 흠 있는 놈이 흠 없는 놈으로 만들어지면 하나님은 그 놈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흠이 있나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성도들이지요.

흠이란 말은 죄란 말입니다.

이 죄가 아들의 죽음으로 사해진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죄인을 예수님이 죽어서 거룩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아주 쇼킹하지요.

이게 이해가 되어지면 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죄인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만물이라는 멍석을 깔아 놓고 일을 하십니다.

 

골로세서 1장을 봅니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자 봅시다.

창세전엔 만물이 없었지요.

에베소서에서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을 했다고 했잖아요.

무슨 약속입니까?

아들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든다는 약속이잖아요.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는 겁니다.

만물 속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 있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천사도 있고 마귀도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마귀도 있어요.

이 모두를 누가 만들었나 하면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나 하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겁니다.

 

중요하니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이 왜? 만물을 창조했나요.

예수님을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만물을 가지고 뭔가 할 일이 있어서 창조한 겁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는 마귀도 필요하고, 천사도 필요하고, 신자도 필요하고, 불신자도 필요하고, 천국도 필요하고, 지옥도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만들었어요.

 

그럼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왜? 창조했나요.

예수님을 위해서지요.

그럼 난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위해서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를 믿잖아요.

이건 주객(主客)이 전도가 된 겁니다.

이걸 죄라고 해요.

 

죄란? 예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모두 죄에요.

이게 장차 이루어질 심판의 근거에요.

장차 심판 할 때 너 얼마나 성화했어! 묻지 않아요.

너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착하게 살았어! 묻지 않아요.

오직 하나 너 예수 믿어! 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합니까?

자기백성들을 자기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거잖아요.

그럼 자기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려면 세상에선 비 거룩하고 흠이 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하겠지요.

다른 말로 죄인의 모습으로 있어야 예수님이 죄를 없애주고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선악과도 뱀(마귀)도 모두가 예수님의 하실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지요.

뱀은 인간을 죄를 짓게 하여야 하고,

인간은 그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러면 꼭 무식한 놈들은 그럼 하나님이 죄를 방관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한 것이지 않느냐? 라고 따집니다.

일 못하는 놈이 연장 나무란다고!

언약이 뭔 줄 모르고 믿어지지 않으니 따지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 이해시키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성질이 아니에요.

언약이 믿어지면 다 이해가 되어요.

그냥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못 믿는 겁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인간 구원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죄는 예수님이 주(主)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내가 왜? 죄인이지!

예수님이 주(主)가 되는데 필요해서 그래요.

주(主)란 주인이고 심판하는 분이란 말이에요.

심판 하려면 갈라 낼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두 종류를 만든 겁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들어갈 놈들도 만든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갈라내고 채우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가 뭔가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이야기잖아요.

구속사란? 구원이야기란 말입니다.

 

구원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창세전에 계획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한다고 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 하나 하나를 독자적으로 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보쌈 하듯이 하나로 한단 말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요.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나 개인이 구원을 받아요.

그러나 나 개인 자격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이면서 집단이 되는 겁니다.

 

이런 집단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선 교회라고 합니다.

나 하나도 완벽한 교회이고 여럿이 모여도 완벽한 교회에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왔지요.

쉬운 말로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만 구원 한 겁니다.

아브라함 속엔 마치 명태가 알을 품고 있듯이 이스라엘이라는 알을 품고 있는 겁니다.

그 알을 탁 터뜨리니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이걸 성경에선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허리” 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허리란? 언약이라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 이제부터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했거든요.

네 후손을 하늘에 별과 같이 많게 하여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애굽은 세상의 모형이고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에요.

 

이건 마치 에베소서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한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 언약 안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 있듯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천국백성이 알처럼 배태(胚胎)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걸 때를 따라서 세상에다 알을 쏟듯이 확 쏟았어요.

우리도 그 때에 맞추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전 없어야 할 사람인데 복음 때문에 생겨난 겁니다.

 

예수님이 쏟아진 그 알들을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찾아내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쏟아진 알들의 모습이 개차반인 겁니다.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서 자기 백성들을 목욕 시켜서 아버지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이게 성경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 언약에 따라서 이 세상에 오신 거구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가 신(神)의 아들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께서 보내서 왔다! 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왜? 보냈습니까?

이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잘 나와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의 뭡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 이잖아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러 왔지요.

그럼 자기 백성 아닌 자도 있다는 말이지요.

광의적인 의미에선 모든 만물이 예수님이 창조했으니 다 예수님 것이에요.

그런데 굳이 자기백성과 아닌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심판주(審判主)가 하는 일이므로 두 민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심판을 십자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해요.

다른 말로 새 언약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해요.

새 언약을 아는 자가 자기 백성이에요.

자기백성은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 아닌 자들은 지옥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창조시에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그러잖아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천지란?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을 말해요

물론 하늘과 땅을 말하지만 이는 천국과 지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을 어디서 구원해 냅니까?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지요.

아니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지금 자기 백성은 죄에 갇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할 자기 백성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놈은 자기 백성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이게 창세전에 가졌던 아버지와의 약속이에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냈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걸 유대인들이 어찌 알아먹겠어요.

그러니 펄쩍 뛰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기가 찬 겁니다.

아니 네가 뭔데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 고 하느냐!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이라고 할 수 있느냐!

어째서 “하나님과 네가 하나” 라고 하느냐!

너 미쳤느냐!

너 죽고 싶냐!

그러면서 돌맹이를 들고 치려고 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이 돌 맞을 말을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옷 매무세를 여미고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내가 하나님이다'

'난 하나님 아들이다'

그러니 화가 날만도 하지요.

 

유대인의 정서로 제 정신 가진 인간이라면 감히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귀신 들려서 미친 놈이라고 하면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던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참람 죄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고 맙니다.

참람 죄란? 하나님을 모욕한 불경죄에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그 당시 유대인이라도 역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린 할 일이 없습니다!

성화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만 믿으면 됩니다! 라고 하면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잖아요.

 

왜?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느냐!

그래 가지고 누가 교회에 봉사하겠느냐!

그렇게 가르치면 교인들이 방종하지 않겠느냐! 라고 게거품을 물고 지랄을 떨잖아요.

 

이건 조심 스러운 이야기인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의하는 인간은 이런 자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자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죄인에겐 방종이란 말이 성립이 안 되어요.

인간의 행동에서 이건 죄다 아니다 구별하는 것이 죄에요.

성화해도 죄인이고 성화 안 해도 죄인이에요.

바퀴벌레가 화장을 해도 바퀴벌레이고 안 해도 바퀴벌레에요.

성화했다고 거룩하다고 자랑하면 예수님이 섭섭해 해요.

 

거룩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신 예수님 품에 안기면 거룩해져요.

천국엔 나 홀로 개선장군이 되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예수님 품에 안겨서 가는 곳이에요.

거룩은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거룩한 겁니다.

 

이게 단순한 것 같아도 믿음을 안 받으면 안 믿어져요.

믿음을 받으면 그냥 아멘인데!

믿음을 안 받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어요.

 

믿음이란? 예수 안에선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머리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에요.

이러면 성화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아무렇게나 살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아니~ 성령이 그들 속에 계실 것이 아닙니까?

성령은 낮잠 자고 있나요.

뭔가를 간섭 하실 것이 아니에요.

 

그럼 성령이 알아서 하실 것을 믿어야지요.

이게 안 믿어지니 그런 말을 하면 방종하지 않겠느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을 안 믿어요.

아니! 전 이런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라고 보아요.

성령을 못 받았으니 이런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성령이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인간들을 걸러내기 위해서라도 이런 말을 해야 해요.

그러면 성령이 없는 인간들은 옳거니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 것 아닙니까?

이들의 논리를 반박하자면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성령이 없으니 자기 마음대로 살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걱정하는 거잖아요.

여하튼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자는 아직까지 십자가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령은 우리 행동을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를 천사를 만들어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자기백성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오셨다구요.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부르러 오셨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마귀의 미혹으로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다 괜찮은 인간인줄 알아요.

왜? 인간들이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가 하면 인간 속엔 선악의 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해 있어요.

그래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해요.

하나님은 이런 선악의 법을 담고 있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가 선을 행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죄인이 안 오면 예수님은 개점휴업하게 생겼어요.

그래서 성령이 자기백성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라고 지적해 주는 겁니다.

무엇으로 지적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해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너 이것 완벽하게 지킬 수 있어! 없어!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물론 성령 받은 성도는 항복하는데!

그렇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인간이 있어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이 놈들은 죄인 특유에 오기가 있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고 해요.

이런 짓을 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지켰어요.

율법을 문자적으로 몇 개를 지키고 의기양양했어요.

물론 지킨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주신 진의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을 알려 주시려고 율법을 재 해석해 주셨어요.

이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들이에요.

산상보훈을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너~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너~ 여자보고 음욕 안품을 수 있어!

너~ 눈이 범죄하면 눈알 빼낼 수 있어!

너~ 목숨 버리면서 하나님 사랑할 수 있어!

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 할 수 있어!

너~ 겉 옷 달라고 하면 속옷도 벗어 줄 수가 있어! 그러는 겁니다.



이건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라이 같은 놈들은 또 이것을 지키겠다고 해요.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하나님의 명령은 전부가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말씀들이에요.

그러니 말씀 앞에 서면 인간의 죄가 툭툭 튀어나와야 해요.

야! 난 안 되네!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해야 돼요.

 

성령이 지금 성도 안에서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단 말이에요.



거룩을 인간 쪽에서 따로 만들고자 하지 마세요.

거룩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요.

예수님이 입혀 주세요.

우리에게 거룩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에 죽으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와 예수님을 연합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연합이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걸 믿을 수가 없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과 타자로 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과 별개로 보았어요.

신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로 보아요.

하늘에서 결제 도장만 찍어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했어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들이 다 알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인 이런 신을 원해요.

신이 인간사 모든 일에 개입하면 인간이 설 자리가 없어지잖아요.

 

사람은 자기가 제외되는 것을 싫어해요.

인간은 항상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자 해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중심에 서 있고 싶어해요.

이 모두가 으뜸 되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말해요.

자기도 십자가 복음을 알고 증거한다고 해요.

목사들 치고 십자가 말하지 않는 목사가 없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다른 십자가에요.

그러니 십자가 정신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요.

 

십자가를 아는 자기를 자랑해요.

난 십자가 안다는 거예요.

아니까 날 알아 달라는 겁니다. 

자기는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자기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만큼 대접받고 싶은 겁니다.



이건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를 긍정하는 겁니다.

이는 십자가 정신과 반(反)하는 모습이에요.

자기를 살리고자 십자가를 이용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고 하면 대접받고자 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나는 십자가를 아는 목사이니 대접을 해 달라는 것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이런 사람은 자기라는 자아에다가 십자가를 보충해서 더 나은 자아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자아가 십자가로 부셔져야 하는데 도리어 십자가를 안다는 것으로 자아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러니 십자가를 말하나 자기 부인이 안 일어나는 겁니다. 

이는 십자가가 그 사람에겐 살아 있는 생명이고 능력이 아니고 지식이고 관념이라서 그래요.

그러니 십자가를 말하나 십자가 정신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과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은 달라요.

 

어떤 인간들은 나 십자가 아니 내 마음대로 산다고 그래요.

아니 십자가가 나를 죽이는 것인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있나요.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아직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는 반증이잖아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산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교회도 안다니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마치 고상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무슨 큰 믿음이나 되는 줄 알고 깝쭉 대잖아요.

이런 인간들이 있을 줄 알고 바울이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짓자고 하느냐 라고 경고한 겁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요.

십자가 안에는 내 마음대로 사는게 없어요.

 

십자가가 지식이 되면 자기를 치장하는 쪽으로 가요.

옛 사람을 죽이는 쪽으로 가지 않고 살리는 쪽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으뜸 되고자 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에요.

성령은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해요.

십자가가 내게 다가오면 나를 무너뜨리면서 다가와요.

넌 죽어도 당연한 자라는 것을 깔고 온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가지고 자기를 긍정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라고 했어요.

말쟁이라고 했어요.

입으로는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자기는 정작 살아서 펄떡 펄떡 뛰고 있어요.

이런 사람이 특히 할례 당에게 많다고 합니다.

 

할례 당이란 유대교를 말하는데 의역하면 정통교회 신자라고 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정통을 자랑하는 교회 안에 십자가를 지식으로 아는 자가 많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 특징이 자기는 항상 주류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외면당하면 발끈해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은 자기 존재가 외면당하는 겁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싫어해요.

그 누구라도 자신을 부정하면 화가 나고 적개심이 생겨요.

흔히들 왜? 나를 무시하느냐 라고 하지요.

 

사람이든 집단이든 자기를 무시하면 관계를 단절합니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교회이든 조직이든 마찬가지에요.

그만큼 인간은 자기 사랑을 포기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 존재감이 상실 되면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집단을 버리고 자기를 알아주는 새로운 집단을 찾게 되는 겁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쫓을 스승을 찾아다닌다고 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이리저리 교회를 옮기는 것은 다 귀가 가려워서 그래요.

물론 복음을 쫓아가는 성도도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옮겨 가는 겁니다.

 

옮겨 가면 그 집단에서 서서히 자리를 넓히고 자아 확장을 이루어 갑니다.

마치 세포가 증식을 하듯이 자기 입지를 넓혀가게 됩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건 복음과 상관없는 인간의 본성이에요.

복음을 알아도 이 본성은 본성대로 활동을 해요.

 

흔히들 복음을 알면 본성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착각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성령이 본성을 이기게 해 준다고 해요.

물론 성령이 육체의 소욕을 죽이도록 역사를 해요.

그러나 성령의 소욕 못지않게 육체의 소욕도 만만치 않아요.

 

바울이 이 싸움을 해 보니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못 이기더라고 탄식했어요.

이는 성령이 연약해서 못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 육체를 가지고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도록 일을 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드높이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 육신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법을 이기더라고 하지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하잖아요.

그러니 성령이 바울의 뒤통수를 툭 치면서 너 왜? 그렇게 낙심하는데!

저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잖아!

네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그 몸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잖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비록 자기 몸으로는 죄를 못 이겨도 예수님이 대신 이겨주었으니 그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이걸 믿어지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할렐루야! 아멘! 그러는 겁니다.

이젠 다시는 날 보지 않고 예수님 보고 살겠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이제부터 예수 안에서 죄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자로 살겠다고 했어요.

 

우리더러 죄를 이기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이겨주셨다는 것을 믿고 살라고 했다구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아요.

내 꼬라지가 비록 개차반 같지만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믿음으로 살아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육신을 좇지 말고 영을 좇으라고 한 겁니다.

육신을 좇는다는 것은 자기 꼬라지를 보는 것이고!

영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해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성도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고 사는 겁니다.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나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국말인데도 왜? 이리 어렵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개과천선(改過遷善) 시키러 오시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러니 역설적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죄를 자꾸만 들추어내서 이런 죄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오셨어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증거하려고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살아계실 때 이 일을 하셨어요.

이렇게 저렇게 살으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이래서 죄인이다! 라고 고발하는 일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들이 쌓아온 공든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일컬어 “시온의 거치는 반석”이라고 해요.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이는 유대인을 말해요.

그리고 거친 반석이란 말은 걸림돌이란 말입니다.

즉 걸려서 넘어뜨리는 돌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은 유대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라는 말이 됩니다.

알다시피 유대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민족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넘어지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어요.

 

어떻게 넘어뜨립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쪽으로 일을 하시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반(反) 율법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하고 성전을 뒤집어엎고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고 한 겁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어요.

 

이걸 또 오해를 해서 세리와 창기들과 술 먹어도 되겠네! 그래요.

교회 안 다녀도 되겠네! 그런다고요.

하여간 인간이란 어쩔 수 없어요.

오해하는 놈은 이렇게 말해도 오해하고 저렇게 말해도 오해해요.

하지만 바로 듣는 사람은 틀리게 말해도 옳게 들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왜? 그토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못 지키게 할까요?

이는 하나님 뜻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인간적으로 판단해서 섬기는 겁니다.

 

잘못 된 것은 빨리 무너뜨려야 해요.

건물을 짓는 데에도 기초가 잘못 된 것이라면 더 높이 올라가기 전에 허물어 버려야 해요.

설령 높이 쌓았다 할지라도 무너뜨려야 해요.

그래야 더 큰 재앙을 피할 수 있어지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대인들의 신앙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너무도 완벽한 신앙생활이에요.

자기들 눈으로는 도무지 흠을 잡을 수가 없어요.

 

흠이란? 자기가 찾아 내지 못해요.

음식을 해도 자기가 맛을 가늠하지 못해요.

자기 입맛엔 항상 맛이 있다고 생각해요.

짜도 짠 줄 모르고, 싱거워도 싱거운 줄 몰라요.

그래서 지혜로운 주부는 간을 좀 봐달라고 합니다.

남에게 간을 봐 달라고 하는 것이 지혜에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다 자기 신앙이 옳다고 믿어요.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자긍심이 대단 했어요.

그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어요.

이방인들은 구경도 못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엄청난 자긍심이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공든 탑을 쌓듯이 자기 의(義)를 열심히 쌓아 왔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여러 교단이 있었어요.

서로 자기 교단의 우월성을 율법적인 의(義)를 쌓는 일로 경쟁하였어요.

장로교가 좋으냐!

감리교가 좋으냐! 라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신앙 근본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 겁니다.

장로교도 틀렸고 감리교도 틀렸다고 합니다.

몽땅 다 틀렸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기분 나쁜 말입니다.

 

틀렸다고 하는데서야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도 제 설교가 틀렸다고 하면 화가 나는데!

그 어느 인간도 자기가 틀렸다고 하면 적개심이 생겨요.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누가 틀렸다고 하면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유대인들도 스스로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싸잡아서 다 틀렸다고 합니다.

독사새끼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만 있겠어요.

길길이 날뛰지!

졸지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겐 공공의 적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때는 서로 앙숙처럼 지내던 교단들이 하나가 되어 탄핵한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율법도 인정하고 하나님 뜻을 전했으면 함께 어울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신앙을 깨트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밥을 지어서 주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쉰밥을 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쉰밥을 그릇째 갖다 버린 겁니다.

그러자 왜? 내 밥그릇을 깨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사람은 낯선 것을 싫어합니다.

낯선 것을 대하면 왠지 불편하고 불안해요.

말씀도 늘 듣던 것을 들어야지 생소한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방어를 하게 됩니다.

이거 혹시 이단 아니야!

이 사람 혹시 사이비 아니야! 라고 경계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것을 그대로 고수한 채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자 해요.

지금까지 쌓아온 탑을 보존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신앙으로 나타나면 옛 언약에다 새 언약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것도 그대로 고수하고 새로운 것을 덧입히려고 합니다.

 

이게 인간들에게 얼마나 구미(口味)가 당기는 매력인 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의 자존심도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도 얼굴이 서기 때문입니다.

내 노력도 그대로 인정받고 하나님의 은혜도 받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이게 갈라디안식 신앙이에요.

갈라디안식 신앙은 한마디로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는 겁니다.

자기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새로운 것을 입히는 겁니다.

내 것이 부정당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반발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해요.

죄인의 것을 고수하고자 하는 것이 죄에요.

죄가 뭐냐?

죄인의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예수를 믿고 나면 새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을 해요.

성경이 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역의 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린 원래 아담 안에서 태어나요.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 안으로 옮겼어요.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영역이 이동이 된 것이지 인간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담 안이라는 항아리에 있던 바퀴벌레를 예수 안이라는 항아리로 옮겨 놓은 겁니다.

바퀴벌레는 이쪽 항아리에서 저쪽 항아리로 옮겨졌지만 바퀴벌레는 그대로에요.

다만 담고 있는 항아리만 다를 뿐이에요.

 

우린 아담이라는 항아리에서 예수라는 항아리로 옮겨진 바퀴벌레들이에요.

죄인이란 말입니다.

아담이라는 항아리에서 예수라는 항아리로 옮겨지면 바퀴벌레가 뽕~하고 천사로 바뀌는 것이 아니에요.

아담 안에서도 죄인이고 예수 안에서도 죄인이에요.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아요.

 

성화주의자들이 이걸 모르니까 자꾸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른 인간은 나중에 죽고 나면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해요.

그러나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 한 한치도 변하지 않아요.

다만 변한 척 할 뿐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은혜 받아서 성질머리가 죽은 것 같지요.

아니에요.

언제 터져 나올지 몰라요.

아직까지 안 터져 나왔습니까?

조만간에 터져 나올 겁니다.

 

물론 아담이라는 항아리 안에서 사는 것과 예수라는 항아리 안에서 사는 것이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삶을 그것이 새 생명을 받은 자의 신앙이고 삶이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 생명의 삶이 따로 규정이 돼요.

이러면 새 생명의 삶이라고 정한 그 규범에 들지 않으면 죄라고 한단 말입니다.

또 그 규범대로 살면 선이라고 하게 되구요.

이런 사고 자체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선이다 악이다 규명하기 때문에 죄에요.

 

저는 흔히 말하는 새 생명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사는 것을 나무라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살라고 해요.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아요.

주께서 알아서 각자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간섭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알아서 사세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라면 성령께서 간섭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내겐 선이 없다는 것만 아세요.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의가 아니고,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지라도 의가 아니에요.

의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 속에만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 살든지 저렇게 살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사세요.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고 사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고 사세요.

 

다시 항아리 이야기 합시다.

아담이라는 항아리는 지옥으로 가는 항아리이고,

예수라는 항아리는 천국으로 가는 항아리에요.

두 항아리가 열심히 달려갑니다.

항아리 속에 담긴 바퀴벌레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달려가고 있어요.

 

항아리 속에서 바퀴벌레들이 행하는 행동으로 항아리의 목표지점을 바꿀 수가 없어요.

항아리 속엔 술 쳐 먹고 꽥꽥 거리는 인간도 있고,

조용히 잠자는 인간도 있고,

노름하는 인간도 있고,

성경을 보는 인간도 있어요.

술 처먹고 꽥꽥 거리면 차장이 와서 창고에 가두겠지요.



하지만 그 창고도 항아리 안에 있어요.  

그 어떤 일을 할지라도 항아리는 개의치 않고 자기 갈 길만 달려가고 있어요.

바퀴벌레는 항아리의 운명에 따라서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합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라는 영역에 문제인 겁니다.

 

그래도 착하게 살면 안 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착하게 사세요.

제가 착하게 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다만 착하게 사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행함으로 좋고 나쁨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함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죄에요.

그건 항아리 안에서 통용되는 법이 아니에요.

항아리 안엔 모두 똑같은 바퀴벌레들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아리 안은 오로지 은혜에요.

 

다 용서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퀴벌레인줄 알고 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퀴벌레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탓하지 않는다구요.

좋은 신앙은 항아리를 자랑하는 겁니다.

나 항아리 때문에 천당 간다 그러라구요.



이것 자랑하라고 예수라는 항아리에 태운 겁니다. 

예수라는 항아리 안에서 자기가 행한 일은 자랑할 것이 없어요.

어차피 항아리에서 옮길 때는 바퀴벌레의 행실을 보고 옮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 바퀴벌레들은 본성이 그대로 있어서 자기 쪽에서 복과 저주가 온다고 믿고 있어요.

 

영역이 이동 되었지만 우리에겐 그대로 아담아래서 배워온 본성이 있어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근성 말이에요.

이 본성이 작동하면 항아리가 감싸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놓쳐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본성을 깨트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자 해요.

우린 옛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옛 부대를 사정없이 깨트려버립니다. 

부대는 술을 담는 그릇이에요.

술은 언약을 말합니다.

그럼 옛 술은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 속에 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새 언약이라는 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 언약이라는 새 술은 아담의 몸이 감당 하지 못해요.

아담의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새 언약이라는 새 술이 아담의 몸에 들어가면 이질감이 있어서 토해내 버려요.

전혀 다른 성질이거든요.

 

알다시피 아담의 몸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법을 좋아합니다.

법이란? 주고 받는 겁니다. 

옛 언약이라는 율법은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에요.

그러니 자기 쪽에서 얼마든지 복과 저주를 불러들이기도 하고 거부할 수도 있어요.

주권을 인간이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서 신앙의 주체는 항상 자신이에요.

자아가 항상 살아 있으니 율법이 죄인의 성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복을 받아도 내가 잘해서 복을 받으니 내 공로로 남는 것이니 기분이 좋지요.

저주를 받아도 자기 잘못으로 받으니 합당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새 언약은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거든요.

너는 나가 놀아! 그러거든요.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서 속닥속닥해서 일을 다 처리해 버린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고 예수라는 항아리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의롭다고 처리해 버려요.

 

마치 유월절 피를 보고 죽음이 그 집을 넘어간 것같이 그래요.

예수라는 항아리 안에는 내 행위 때문에 추궁당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엄청 기분 나쁜 겁니다.

그럼 난 뭐냐!

 

그래서 율법 아래서 태어난 아담의 몸에다가 새 언약을 담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담의 몸과 새 언약은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 공짜로 주는 새 언약은 싫은 겁니다.

 

율법은 공짜를 싫어해요.

왜냐하면! 자기 공로가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어도 내 돈 내고 먹어야 떳떳하지 공짜로 얻어먹으면 꼭 그 사람에게 빚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개운치가 않는 겁니다.

나중에 자기가 한 턱을 내서 갚아야 홀가분해요.

율법 아래선 항상 거래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새 술인 새 언약을 담을 그릇을 새로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방법으로 만듭니다.

이걸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속사람은 자기 행함을 담고 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행함만 담고 있어요.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한 뜻을 이해하겠지요.

 

하나님이 다가오시면 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하면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한 후에 십계명을 주지요.

그 첫 마디가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거지요.

이 말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보다도 지금 너희들이 섬기는 신은 다른 신이란 말입니다.

너희들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니 이제부터 안 섬기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해요.

마치 다른 신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다른 신을 몰랐는데 이젠 알았으니 다른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오직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성화론자들은 이걸 또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지금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가지고 우리 죄를 고발하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 본능은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는 것은 안구하고 구하지 말라고 한 것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구하면서 하나님 전 죄인 맞네요.

그러세요.

전 아무리 예수님 말씀대로 구하고 싶어도 내 본성이 반대 되는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난 저주 받아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하세요.

그러면 야! 이 놈 믿음 좋네! 라고 한다구요.

 

그러니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린 우상숭배자란 말입니다.

우린 눈만 뜨면 우상을 찾아요.

탐심이 우상이잖아요.

탐심은 우리와 함께 살아요.

그래서 우리는 눈만 뜨면 자기 육신을 먼저 챙긴다고요.

자기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니 우상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인간들은 오해를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에요.

모든 성경 말씀이 다 그래요.

 

원수를 축복해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라!

자기를 부인해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범사에 감사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른 쪽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

 

이건 인간의 본성과 반대 되는 말이에요.

본능적으로 지키기 불가능한 명령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데 너희는 지금 이걸 지키지 못하는 자라는 겁니다.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았어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아브라함에게 언약 하셨던 그 하나님을 몰라요.

부모로부터 구전(口傳)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추상적인 겁니다.

 

하지만 애굽은 애굽에 신(神)이 있어요.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애굽에서 배운 하나님을 섬겼어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에 의하여 애굽에 하나님을 섬겼어요.

 

부모가 막연하게 말하는 하나님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애굽에 하나님이 훨씬 친근해요.

이런 신관이 출애굽한 후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금송아지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늘 보아 왔던 것이기 때문에 친근하고 자연스러웠어요.

그러니 그 앞에서 춤추고 뛰논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릇된 신관부터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전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바닷가엔 매년 단오 날이면 용왕제를 지내요.

그 땐 온 동네잔치에요.

온 동네 사람들이 성황당에 모여서 용왕님께 한해도 풍어를 달라고 기원하는 제(祭)를 지냈어요.

또 저희 어머니는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삼신할머니에게 빌었어요.

이런 일들은 전혀 낯설지 않아요.

그러니 굿을 하는 곳에 밤새도록 구경하고 떡도 먹고 국수도 먹곤 했어요.

 

당시엔 무당이 굿하는 것이 낯설지 않고 친숙했어요.

왜? 무당이 친숙할까요?

굿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러웠을까요?

이는 내가 그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엔 그게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애굽에서 자란 이스라엘도 저와 마찬가지에요.

애굽에 신이 친근하고 자연스러웠어요.

그래서 광야에 나와서 스스럼없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출생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신을 섬기는 겁니다.

물론 그게 다른 신인지 모르고 섬겨요.

 

이처럼 인간은 죄로 알아진 신관을 가지고 있어요.

죄의 정보로 아는 신은 자기를 긍정해주는 신이에요.

내게 복을 주고 나를 확장시켜주는 신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알고 있던 신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낯선 겁니다.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라고 반항하게 됩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역사에요.

이스라엘은 입만 열면 하나님! 하나님! 했어요.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이에요.

자기를 위한 신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것도 하나님이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났어요.

그러니 혼비백산 한 겁니다.

괜히 따라 나왔다고 데모하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이라면 안 섬기겠다는 겁니다.

차라리 에굽으로 돌아가서 애굽에 신을 섬기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미 홍해를 건너와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제부터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이 알고 있던 신관부터 바꾸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납니다.

충돌을 하여도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출애굽한 언약 민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의 행함과 상관없이 복에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러니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의 행위와 상관없이 아브라함과 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비록 언약 민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지 못해요.

죄 값은 반드시 치루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죄 아래서 태어났으니 삶 자체가 죄인 겁니다.

그럼 죄를 용납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속성상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살려 주어야 합니다.

죄도 없애고 아브라함 언약도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제사제도에요.

제사 속에는 이미 새 언약 정신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은 율법 속에 제사 제도를 주셔서 그들의 죄를 흠 없는 제물이 대신 담당해 주는 것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했던 겁니다.

이를 상번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담당해 주는 것으로 죄 문제를 처리하신 겁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엔 짐승의 피로 용서해 주었지만 신약에선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는 제물의 제사가 매일 드려졌다는 것은 그들의 신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죄는 사라지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흠 없는 제물이 죽어줌으로서 이스라엘은 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 위로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을 용서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란? 예수님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으면서도 몰랐어요.

도대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매를 맞은 양이 누구냐 궁금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빌립 집사가 나타났어요.

수레에 올라타고 가면서 이사야서를 해석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고 했어요.

이에 내시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겁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죄를 누가 대신 담당해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아요.

누가 대신 담당해 준다고 하면 자기 존재감이 상실되기 때문이에요.

그럼 난 뭐냐!

난 아무것도 아니냐! 라고 반발을 해요.

 

이게 죄인들이 양보 할 수 없는 자존심이에요.

자존심은 인간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에요.

자존심이 무너지면 자기가 설 곳이 없어져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자존심은 지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라도 호의를 베풀어도 그 사람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고도 욕을 먹어요.

전 과거에 이런 일들을 엄청 많이 겪었어요.

그러니 돕는 것도 상대방 기분 나쁘지 않게 하고 도와주어야 해요.

밥 한 끼 사 주어도 그래요.

기분 나쁘게 하면 사주고도 욕 먹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어요.,

자신들만이 율법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했어요.

그래서 율법 없는 이방인을 개로 취급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율법을 유대인에게만 주셨잖아요.

이방인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할 만도 하지요.

 

저희 옆 동네에 횟집이 있는데 그 횟집에 가면 플랜카드가 하나 붙어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시절에 울산 유세차 왔다가 그 집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 사실을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이명박 대통령이 여기 저기 다 다녔으면 그런 것 붙일 이유가 없어요.

울산에 많고 많은 식당 중에 그 집에만 다녀갔기 때문에 그런 자랑을 하는 겁니다.

이건 그 집에 영광이에요.

 

조그마한 나라에 대통령이 다녀가도 길이 길이 자랑을 하는데 하물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선택을 하였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렇게 자랑한 겁니다.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율법을 예수님이 시비를 거는 겁니다.

율법을 깨부수고 있는 겁니다.

성전을 청소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으로 드려지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하나란 말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이건 절대로 용납 할 수 없는 말이에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존재에요.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에요.

 

유대인들은 하나님 이름도 부르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를까봐서 하나님 고유의 이름인 엘로힘(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그 이름에 걸맞으면서도 행여 잘못 불러도 손상이 없을 아도나이(주) 라는 이름으로 불렀어요.

 

이건 마치 조선 시대 대감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해서 호(好)를 부른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이름을 절대시 하였는가 하면 책이나 신문도 깔고 앉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그 책이나 신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써져 있을까봐서에요.

그러면 하나님을 자기 궁둥이로 깔고 앉은 것이 된다고 금기시 했단 말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겐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들을 모욕하는 말이고 선전포고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참람하다고 하는 겁니다.

 

참람하다는 것은 미친 소리란 말입니다.

미친놈에겐 몽둥이가 약이라고 해서 합법적으로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율법에도 하나님 아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은 것은 본보기에요.

누구든지 율법을 폄훼하거나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 이같이 된다는 것을 경각심으로 보여준 겁니다.

 

만약에 말이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을 잘 섬기십시요!

하나님만이 하나님 이십니다! 라고 했으면 안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말이 곧 하나님 말이라고 합니다.

내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아들이니 날 믿으라고 합니다. 

이걸 과연 유대인들이 듣겠어요?

들으면 유대인이 아니에요.

 

이 말을 이 시대 언어로 말하면 교인들에게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마세요!

그러는 것과 같아요.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예수 믿지 말고 날 믿으세요!

그러는 것과 같아요.

그만큼 말 같지 않은 충격적인 말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믿지 말고 날 믿으라고 합니다.

날 영접해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래요.

자기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누구든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버지가 심판권을 자기에게 다 맡겼다고 합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못 믿어요.

 

유대인들이 만약 예수님의 이런 말을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지켜온 율법신앙이 다 무너져요.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겨온 것이 다 거짓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의 말이 맞다고 하여도 수용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나라의 본 자손은 천국에서 쫓겨나고 세리와 창기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지요.

이는 나라의 본 자손과 같은 사고로 예수 믿는 자는 쫓겨난다는 말이에요.

나라의 본 자손이란? 율법신앙을 가진 자들이에요. 

지금도 율법 신앙을 가진 자는 나라의 본 자손과 같아요.

왜? 율법 신앙을 가진 자는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나요?

이는 천국엔 아들에 의(義)가 있는 자만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요.

이는 천국은 아들을 위한 나라란 말입니다.

천국엔 아들만 높이는 사람만 들어갈 수가 있어요.

다른 말로 아들이 주는 의(義)를 가진 자가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믿었어요.

율법 속에 의(義)가 있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의(義)를 준다고 해도 그건 개 같은 이방인이나 세리나 창기에게 주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애초에 율법 속에 의(義)를 담아 놓지 않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義)가 된다고 믿은 겁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로워진다고 믿는 것과 같아요.

암튼 유대인들은 율법에 흠이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의(義)를 거부한 것이 되고 만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의롭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아는 세리와 창기에게 의(義)를 준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자기 의(義)가 없는 자가 들어간단 말입니다.

자기 의(義)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천국에 가서 세세토록 예수님만 찬양하는 겁니다.

 

그러니 새 언약을 의지하고 사세요. 

여기서 마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선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언약 안에서 일하신다는 말씀이 믿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 믿어짐이 그 어떤 환경에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능력으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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