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68강. 인간의 생각을 비켜 가시는 하나님 (요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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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9. 25.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68강. 인간의 생각을 비켜 가시는 하나님 (요 11:1-11)

-.정낙원 목사

 

 

 

오늘본문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뜻을 비켜 가는 식으로 일을 할까요?

이는 우리 뜻대로 하시면 죄인의 세계만 확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세계를 꺽는 일을 하세요.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동일한 것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생각(해석)을 한다는 말이잖아요.

이는 모든 인간은 개별자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개별자란? 스스로 독립된 선악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마다 바라보는 선악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겐 선이라 하여도 다른 사람에겐 악이에요.

 

이 시대 세계에 공공의 적이라고 하는 알카에다 라는 테러집단이 있어요.

엊그제도 자살 폭탄테러가 났어요.

이방세계에선 그들을 악의 축이라고 하지만 그 집단 안에선 자살테러를 한 사람은 영웅이고 순교자에요.

이처럼 사람마다 자기 이익에 따라서 가치판단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진리란 없어요.

사람마다 진리가 달라요.

판단도 달라요.

 

사람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 하고,

어떤 사람은 그져 그렇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밉다고 합니다.

이는 다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심미안(審美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이 축척이 되어 하나의 지식으로 자리 잡고 그 지식이 판단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지식은 자라가면서 달라집니다.

결국 판단 기준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 기준과 어른이 되어서 기준이 달라요.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니 자연히 무슨 일이든 이해하는 지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 에도 신학에 따라서 달라요.

교인들도 어떤 토양에서 양육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이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들은 자기가 배워온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목사마다 출신 교단마다 다 다른 겁니다.

그러니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제 글을 보고 전화를 해 오는 분이 있는데 그 바탕이 자기가 아는 것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자기 신학과 안 맞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신학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합니다.

각자의 신학이 다른데 신학으로 접근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입니다.

목사들마다 신학이 다른데 어찌 동일하게 말할 수가 있겠어요.

제가 하는 말은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하자는 거예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인간의 해석을 금지하고 있어요.

성령께서 증거하는 것이 있어요.

이는 성령이 왜? 보내지셨는지를 알면 됩니다.

 

알다시피 성령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 보내주셨어요.

왜? 보내 주셨는가 하면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입었어요.

그래서 성령은 세상에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어요.

주와 그리스도란? 한마디로 심판 주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예수님 편에 선 사람과 다른 편에 선 사람으로 갈라져요.

즉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라진단 말입니다.

 

무엇으로 갈라진다구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양쪽에 강도가 달리지요.

그런데 한 강도는 천국으로 가고 다른 한 강도는 지옥으로 갔어요.

 

이 그림이 곧 세상의 그림이에요.

세상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쪽은 천국으로 가고 다른 한 쪽은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알면 성령이 무엇을 증거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요.

이걸 간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십자가를 가지고 자기 죄 문제로 접근을 해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 죄를 인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겠지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이 사실을 기억케 하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십자가를 통하여서 죄 문제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가지고 다른 장난을 쳐요.

예를 들어서 좋은 나라 만들자고 한다거나!

좋은 가정 만들고자 하거나!

아름다운 교회 만들자고 하거나!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자고 한다거나!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거나!

 

한마디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잘 살까 라는 자기 생존에 문제로 해석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한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살까 라고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뱀의 후손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목사들이 십자가를 말해요.

그런데 거의가 땅에 이야기로 풀이해요.

결국 다른 복음인 겁니다.

 

한 성령을 마셨으면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분이므로 십자가만 증거해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피만 증거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로서만 죄사함이 주어지기 때문이에요.

 

성경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보낸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늘로부터 오는 영을 받지 않고 거짓 영 즉 땅에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으로 땅에 관한 사회정의를 외치고 좋은 나라 좋은 가정 만들기와 같은 짓거리들을 하는 겁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 속엔 좋은 나라 만들기나 좋은 가정 만드는게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준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여도 죄 문제로 구원 문제로 답을 정리해요.

 

예수님은 좋은 나라 좋은 가정 만들어주려고 오시지 않았어요.

도리어 세상에 화평을 깨러 왔어요.

예수님은 세상나라에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려고 오셨어요.

 

한 성령을 마시면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만이든 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그 피를 마신 성도는 환영해요.

그러나 한 성령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마다 다 다른 말을 해요.

깨닫는 것이 다 자기중심으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동일한 글이나 설교를 들어도 해석은 각 사람마다 다르게 하는 겁니다.

 

세상 일이야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므로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해도 서로 양보하고 이해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죽고 사는 신앙적인 진리 문제라고 한다면 이건 양보나 타협이 안 되어요.

타협해서도 안 되고요.

 

진리란?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속된 말로 예수도 맞고 부처도 맞다는 식은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도 맞고 행함도 맞다고 하면 안 되어요.

만약에 그렇게 접근을 한다면 그건 서로가 진리가 아니란 뜻입니다.

 

빛과 어둠이 하나 될 수가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 될 수가 없듯이!

부처와 예수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시대 불교와 기독교가 교류 한다는 것 자체가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타종교를 어떻게 포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쩨쩨하게 그러지 말고 마음을 좀 넓히라는 것이 아니에요.

인정에 문제도 아니고 누굴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문제도 아니에요.

 

성경을 가지고 우리 모두 하나라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비빔밥 신앙을 만들면 안 되어요.

그럼에도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자행된다는 것은 근본이 잘못 되어서 그래요.

이는 신앙을 진리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휴머니즘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사랑하자! 라는 사상이 같기 때문에 서로 통해요.

불교든 기독교든 흔히들 말하는 무당이라고 하는 귀신을 섬기는 샤머니즘이든 근본이 인간 사랑이기 때문에 대화가 되고 교류가 되는 겁니다.

 

특히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 교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 반대에요.

 

전 이걸 개구리 신학이라고 해요.

제가 만든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을 16장을 보면 교회가 귀신의 처소가 된다고 했어요.

이 시대 교회들은 온 사방에 개구리 영들이 다 모여서 온갖 잡소리를 다 내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오로지 한 목소리만 나와야 해요.

예수 피 이외는 죄사함이 없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예수 밖은 모든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해 주어야 해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거나 긍정해 주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보셨는가?

예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셨는가?

부정적으로 보셨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성령을 받은 성도도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교회를 보아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목사를 판단 할 때도 오직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냐 아니냐로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얼마나 고상한 말을 하느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인품이 좋으냐!

얼마나 자상하느냐! 라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 되어요.

그건 육에 속한 땅 사람들이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땅에 가치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땅(인간) 입장에서 신앙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이 세상(인간)을 바라보는 안목(眼目)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불태운다고 하면 성도도 이 세상은 장차 불탑니다! 라고 해야 해요.

그렇게 하라고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성도들 속에 품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어요.

 

예수님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았잖아요.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은 희망이 없다고 했어요.

 

알다시피 이 세상은 죄의 권세 아래 있어요.

그래서 복음은 세상 권세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여기에 세상에 속한 자들이 극력하게 반발을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이 하나님께 반발해서 터진 사건이에요.

그래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 반드시 땅에 속한 자들이 합세를 하여서 공격을 하는 겁니다.

자기 근거지가 땅이기 때문에 복음을 반대하는 일엔 하나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피를 전하면 교단이나 교회나 목사나 교인이나 구분 없이 공격을 하는 것도 모두가 그 뿌리가 땅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화주의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성 교회를 타락하였다고 비판을 합니다.

 

교회 타락의 기준을 십자가 피로 기준삼지 않고 인간의 상식으로 틀렸다는 겁니다.

죄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윤리 도덕문제로 접근하니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종교에서 벗어났다는 거예요.

 

교회들이 배금주의(拜金主義) 사상에 물들고 교인들도 너무 이기주의라는 겁니다.

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모습을 보여서 세상에 손가락질을 당하지 말자는 거예요.

이 시대 교회는 너무 세속화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 적이에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게 하자는 것은 결국 세상 방식의 교회로 세우자는 말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젠 어디가 교회이고 어디가 세상인지 구분이 안 되어요.

 

교회가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좀 참신하다고 하는 개혁주의자나 성화론 자들은 제대로 된 교회를 좀 만들자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 아니고 교회중심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해요.

아무리 성화를 하고 개혁을 해도 죄를 이기지 못해요.

죄사함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틀린 겁니다.

 

이렇게 판단하세요.

좋은 교회를 만들자!

이상(理想)은 좋아요.

그럼 물어야 합니다.

좋은 교회 만들면 죄사함 받습니까? 라고!

아니잖아요.

그럼 틀린 거예요.

 

교회의 교회됨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이겨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을 증거하여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고 그냥 종교생활을 하는 교인이에요.

 

진정한 성화나 개혁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이외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하여야 해요.

예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외칠 때 진정한 성화이고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 교회 제도를 뜯어 고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면 됩니다.

속된 말로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으니 그런데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헛된 일에 분요하지 말고 나를 죄에서 구원케 해 주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세요.

 

바울이 그러지요.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자기 자신 조차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지요.

바울이 받은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이에요.

 

복음은 출처가 하늘이에요.

그러므로 복음 속엔 땅 이야기가 없어요.

세상에서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까! 라는 게 없어요.

 

만약 성경을 가지고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거나!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꿈꾼다거나!

사회정의를 외친다거나 하는 것은 전부 다른 복음이에요.

그건 하늘에서 온 복음이 아니고 땅에서 난 복음이에요.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에 땅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복음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 속엔 오직 하늘에 것만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 자신도 그 복음으로 판단을 받는 겁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에서 비켜나지 못해요.

자기가 전한 그 복음으로 자기가 비판을 받아야 해요.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복음으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울을 사용하고 있어요.

바울이 성령에 사용당한다고 해서 바울이 온전하지 않아요.

바울도 여전히 죄인이에요.

그러니 자기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한 복음 앞에서 자기가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요.

그래서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변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이 복음 전하다가 버림당할까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증거한다고 했어요.

 

겁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만큼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복음을 이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 자신도 순간 순간 복음을 내 유익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아요.

이걸 알기 때문에 잘난 척! 다 아는 척! 까불지 못하는 겁니다.

 

전 제가 복음을 전해도 순간 순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복음을 전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져요.

누가 알아주면 기쁘고 안 알아주면 섭섭해요.

이게 죄인 줄 알면서도 뭔가 바라게 되어요.

 

그럴 때 마다 성령은 나의 이런 생각이 죄라고 고발을 해 주어요.

내가 쓴 설교에 내가 고발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과 함께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육신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이 놈에 육신은 항상 편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늘 불평이고 불만인 겁니다.

 

그러니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다.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고!

복음 전하는 사람은 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난 이미 구원 받았는데!

뭐 까짓것 마음대로 살면 어때!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이지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늘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해요.

완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어디를 지향하고 사느냐를 말하는 겁니다.

신앙은 어디를 지향하느냐의 방향성의 문제이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신앙은 항상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의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사는 거예요.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은 립 써비스가 아니라 실제여야 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이런 자가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실제로 안다면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요.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개인 소장용이 아니에요.

내 마음대로 살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했어요.

 

복음 안에선 난 없는 자에요.

죽었단 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살아야 자기를 위한 예수로 믿지 않게 되어요.

 

그래서 성도를 말할 때 개별자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란 말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없어요.

 

만약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복음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성도는 어떻게 살아도 결코 정죄 당하지 않아요.

행함으로 판단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살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주를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이게 원리에요.

그런데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고 죄가 터져 나옵니다.

육신이 죄의 소욕을 이기지 못한다는 한계를 깨닫게 되어요.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활동을 해요.

죄는 마치 암덩이 같아요.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죽지 않고 거머리처럼 붙어서 괴롭혀요.

육신이 죽으면 같이 죽어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 자아는 그만큼 육신의 소욕으로 몰아쳐요.

복음에 대한 반(反) 작용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죄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복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아를 위해 살고자 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요.

그럴 때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가 되어집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만의 신관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신이라면 최소한도 자기에게 이렇게 해 주어야 한다는 그런 것 말이에요.

사람마다 그런 신을 찾고 섬기고자 합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신이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면 당연히 하나님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신의 뜻엔 상관이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져 자기가 필요할 때 도와주면 되어요.

자기 마음대로 섬기고 자기 마음대로 요구해요.

자기가 필요 할 때 신을 찾으면 만나 주어야 하고 자기가 필요치 않을 땐 기다려야 해요.

괜히 귀찮게 하면 언제든지 신을 바꿔버립니다.

다른 신으로 갈아타요.

마치 교인들이 자기 마음에 맞는 교회를 옮겨 다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선 인간이 신을 결정하는 겁니다.

신을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처럼 고르면 되어요.

부처도 있고, 예수도 있고, 마호메트도 있고, 힌두도 있고, 무당도 있어요.

이게 죄인들이 알고 있는 신관이에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찾아와요.

신이 인간을 선택한단 말입니다.

취하고 버림의 모든 결정권이 신에게 있어요.

신이 찾아 주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어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주고 싶으면 주시고 주기 싫으면 안 주십니다.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마음에 뜻을 세우고 소원을 빈다고 하여도 그 일에 응답은 하나님께 달려있어요.

 

잠언 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따라서 움직이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대로 움직여주지 않는가요.

이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급하다고 해서 하나님도 급해하시지 않아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이 고장 나서 자기 딴에는 급하고 큰 일이라고 생각하여 부모님에게 발을 동동 구르며 말을 하지만 부모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같아요.

아이 쪽에선 급한 일이지만 부모 쪽에선 전혀 급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서로가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창조된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죄가 이 질서를 뒤 바꿔놓았어요.

주객이 전도가 되고 말았어요.

인간이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요.

신을 찾는 것도 자기 영광을 위해서 찾습니다.

연말 연예인들 시상식 때보면 상을 타고 나면 어김없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합니다.

이는 날 상 받게 해 주어서 당신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렇게 가르쳐 놓았을까요?

땅에 속한 거짓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놓은 겁니다.

열심히 신을 이용해서 연예 대상을 타라는 겁니다.

이런 행위가 악인 줄 꿈에도 몰라요.

목사들이 이걸 죄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걸 죄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해요.

 

이건 연예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국교회 전반에 문제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단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뭔가 잘 풀리면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생각하잖아요.

반대로 잘 안 풀리면 그건 마귀가 장난치는 것이라고 하고!

그래서 액땜씩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고상한 척 하지만 실제로 속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따 낼까를 궁리하고 있잖아요.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받아 낼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직 아쉽지가 않아서예요.

다급해 보세요.

철야하고 금식하고 난리를 쳐요.

기도하지 않다는 것은 아직까진 좀 살만 하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도 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십일을 금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밤이 맞도록 철야기도를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나와 울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께 받아 낼 것이 있어요.

그러니 달라는 겁니다.

 

아쉽지 않아 보세요.

어느 미친놈이 밤이슬 맞아가면서 산 기도하고 금식하겠어요.

아쉬우니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기도하는 겁니다.

마치 욕구불만인 아이들이 돌출 행동을 하여서 관심을 끌게 하고자 하듯이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다 쇼에요.

 

하나님도 다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는 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응답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서 열심이 특심할 때 기도를 참 많이 했어요.

몇 년 동안은 하루에 12시간씩 했어요.

그땐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였으까요.

물론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쭉날쭉 텀은 있지만 그렇게 했어요.

적게 하여도 보통 너 뎃 시간은 보통으로 했어요.

 

그 때는 기도를 하면 즉각 즉각 응답을 받았어요.

그러니 아내나 아이들이 무슨 문제가 있으면 아빠 기도해 보세요! 그래요.

아이들이 갑자기 열나고 아프면 안수만 하면 나았어요.

저도 제 머리에 안수하면 나았어요.

 

그래서 집안 식구들이 아프면 기도 해달라고 해요.

이상하게 나으니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면 이상하리만치 해결이 되어요.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되는 겁니다.

이상하다.

내 정성이 부족한가?

그래서 정성의 강도를 높였어요.

그래도 별무신통인 겁니다.

 

그러니 환장하겠더라고요.

흔히들 말하듯이 왜? 기도 빨이 안 먹히느냐 에요.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래서 한때는 엄청 시험에 들었어요.

그러다가 에이~ 이제는 내 기도 빨도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예전처럼 안 했어요

 

목마른 놈이 샘을 판다고 하지만 아쉬운 일이 생기면 율법 아래서 배운 도둑질이 기도이니 또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겁니다.

기도만 하면 무슨 문제가 생겨요.

반대 현상들이 일어나요.

어! 왜 이러지!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그래도 사소한 문제들이 반(反)작용으로 계속하여 생기는 겁니다.

 

너무 그러니 아내가 그래요.

당신 이제 기도하지 마!

그러는 겁니다.

당신이 기도만 하면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상하다.

왜? 그러지!

 

그러다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깨달았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비켜 가시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동안 제 기도에 응답 해 준 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 응석 받아 준 것과 같았어요.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10가지 재앙이 일어날 때 애굽 전역은 난리가 나는데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엔 고요한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맛보기로 알려 준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오자 하나님은 돌변해 버리잖아요.

광야에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뜻을 비켜가면서 일을 하셨어요.

이는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아야 할 땅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살아가는 땅이기 때문이에요.

거기선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으면 못 살아요.

오로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서 비를 주시고 농사를 짓게 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어야만 살 수가 있어요.

 

그러니 제가 그 동안 기도 많이 하고 응답을 받은 것은 표적 신앙이었던 겁니다.

표적을 붙잡으면 죽기 때문에 때가 되니 표적은 거두어 가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젠 표적이 없이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내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맛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믿어지면 흔들림이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살다보면 불평도 생기지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대하면 금새 언약을 붙잡게 되어요.

이젠 언약이 든든한 버팀 목인 겁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란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기도 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저희 가정에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빠 기도해 주세요! 그래요.

급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딸 아이가 번역을 하는데 저 보고 아빠 기도해 주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래 어떻게 기도하면 되는데!

자기에게 일감이 많이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이 녀석이 일거리 많이 달라고 합니다.

절 보고 기도해 달라고 하는데 거절 할 수가 없어서 합니다.

자식이 아비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하는데 안 할 수는 없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제 솔직한 심정은 이거 응답 안 되면 아빠가 능력 없다고 할 것이니 하나님이 참고 하세요.

 

그리곤 아이에게 나 기도 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잘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서 교회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아빠 됐어!

뭐가 됐는데!

번역 일이 자기에게 낙찰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빠 기도 덕이니 한턱내라고 했어요.

알았어!

 

순간 아직도 내 기도 빨이 살아 있나?

이게 인간이에요.

무엇이든지 자기 공로에 끌어당기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우상성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바램을 비켜 가시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에이~ 나 기도 해 봐야 소용없는데 그러면서 기도하면 뭔가 풀리고!

이제 기도 했으니 이젠 되겠지! 하면 틀어지게 만들고!

도무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 종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대책 없어요.

방법이 없어요.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수 밖에요.

 

이게 가나안 신앙이에요.

애굽은 물을 저축을 했다가 필요에 따라서 길어다 쓰면 되어요.

그런데 가나안은 신악지대라서 물을 가둘 수가 없어요.

자기 방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그냥 씨 뿌려 놓고 하늘만 쳐다 보고 사는 길 밖에 없어요.

 

그래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시겠지 하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그러니 가나안 땅에선 애굽식 사고로 살고자 하면 열 받아 못살고 자살해 죽어요.

 

신앙생활이 뭐냐!

하늘 쳐다 보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 약속 믿고 사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으니 그걸 믿고 편하게 살면 되어요.

내 꼬라지가 어떻든 희비하지 말고 예수님 피로 다 용서 받았다고 살면 되어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 믿음이 없으면 늘 미친 여자 널 띄듯이 늘 자기 꼬라지에 따라서 천당과 지옥으로 왔다 갔다해요.

어떤 땐 믿음이 최고인 것 같다가도 어떤 땐 비 맞은 강아지 마냥 풀이 죽어 있어요.

믿을 수 없는 자기를 믿고 사니 그럴 수 밖에 없지요.

 

그럼 믿음으로 살면 되잖아요! 라고 하겠지요.

믿어져야 믿음으로 살지요.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여도 안 믿어지는데 어쩝니까?

 

말씀대로 못 살면 찜찜해서 죽겠는데!

성화 하지 않으면 불안한데!

이러면 방법이 없어요.

그냥 편한 대로 하세요.

본인이 말씀 지켜야 편하다고 하면 말씀을 지키는 수 밖에 없지요.

열심히 지켜서 편안하세요!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에겐 엄청 쉬운데 안 믿어지는 사람에겐 잠이 쏟아질 때 눈꺼풀 무게처럼 불가능해요.

잠이 쏟아질 때 눈꺼풀 무게가 10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이겨 내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약속도 믿어지면 아주 간단 한데!

안 믿어지면 복잡해져요.

산 기도해야 하고, 금식해야 하고, 성경보아야 하고,

좌우지간 뭔가 내 쪽에서 해야 직성이 풀려요.

 

그러니 어쩝니까?

종은 종노릇해야 편하고 아들은 아들로 살아야 편합니다.

각자 자기 신분대로 살아야지요.

 

오늘 본문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 뜻을 비켜 가시면서 일을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사로라는 청년이 병이 들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 라는 두 여동생이 있어요.

부모님이 안 계시니 오빠인 나사로가 가장이 되어서 두 여동생들을 먹여 살렸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 사름 앓아가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면 일어나겠지!

모래면 낫겠지! 했는데 갈수록 위중한 겁니다.

급기야 오늘 내일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런데 나사로의 가정은 일찍이 예수님과 인연(因緣)이 닿아 있었어요.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가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것을 예수님이 고쳐 주었거든요.

이 사건이 전인지 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예수님과의 면식은 구면(舊面)이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나사로를 친구 라고 하지요.

 

암튼 나사로가 병이 들어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기별을 넣었어요.

예수님이면 능히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그러니 와서 고쳐달라는 겁니다.

 

여기서도 보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언제 찾는지 잘 알 수가 있지요.

자기가 아쉬우면 찾아요.

아쉽지 않으면 찾을 생각이 없어요.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들에게 당한 고통과 괴로움을 면하고자 예수를 찾았어요.

어찌 보면 이 시대 우리들과 같지요.

그래요.

 

은혜를 받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부 자기 이야기로 들려져요.

내가 마르다고 마리아에요.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내가 급할 때만 예수를 찾아요.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겁니다.

우리 상식으로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잖아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어렵게 할리가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인간들이 아는 신관에 의하면 그래요.

 

그래서 행여 가정에 우환이 들거나 어려운 일들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잘못하였는가?

그 원인을 찾기에 분주합니다.

무언가 하나님께 노여움을 살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가정에 우환이 닥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목사들은 한 술 더 떠서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자기들 식의 회개를 하기에 바빠요.

인간들 식 회개는 고작해서 자기 행동 뜯어고치는 겁니다.

 

아! 내가 새벽기도를 안 해서 그런가?

아니면, 지난번 주일을 빼먹어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십일조를 떼어먹어서 그런가?

그런 것도 없으면 술 먹고 나쁜 짓을 해서 그런가? 라는 식으로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고자 해요.

이러한 것은 선악의 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인과응보(因果應報) 안목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에겐 전혀 반대의 현상으로 대하고 있어요.

성경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사랑을 입었다는 말이 그리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그럼에도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는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나사로의 가정으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에요.

전혀 예상치 못하고 바라지 않던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라고 따질만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에겐 병도 물러간다고 생각하잖아요.

믿는 자는 만사형통한다고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나사로가 지금 우리 생각과 다른 상황에 빠졌어요.

그리고 예수님도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상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자녀들에게 난데없는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뜻한바가 계셔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을 발생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 일들을 통해서 무엇인가 성도에게 가르칠 것이 있어서 그래요.

 

인간의 육신은 환경에 따라서 희비가 교차해요.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육신은 좋은걸 원해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복음으로 자기 유익을 챙기는 쪽으로 이용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환경을 통하여서 우리 속에 감추어진 죄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세요.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인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엔 좋고 나쁨이 없어요.

다 좋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가 정해 놓은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선별해서 판단하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그래요.

믿음에 눈으로 보면 범사가 다 감사거리에요.

믿음으로 본다 함은 하나님께서 다 필요해서 주신 것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믿음으로 보지 않고 육신의 조건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해 내는 겁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는 말씀이 우리의 악함을 고발하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왜? 너의 입맛에 따라서 좋고 나쁨을 선별하느냐고 책망을 하는 겁니다.

 

바울은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라고 했어요.

 

롬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선(善)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된 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나 마리아나 나사로 역시 자기가 어려울 때 예수님이 즉시로 도와주어야 좋은 예수님이라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고정 관념이 예수님이 늦게 가니 왜? 이제야 왔는냐고 그대로 불만으로 토해져 나왔어요.

왜? 자기들 바람대로 오지 않았느냐 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늦게 가니 시큰둥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의 죄거든요.

 

죄인은 뭐든지 자기중심으로 움직여 주는 하나님이라야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나사로의 모든 가족들이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걸 깨트려주지 않으면 죄 아래서 알던 하나님관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오니 먼저 살펴보고 넘어 갑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지 않고 아들이 하는 일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겠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앞세워서 일하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세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은 예수님 뒤에 숨어 계신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자신의 형상으로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있어요.

예수를 통하지 않고 아는 하나님은 전부가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고 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게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 속으로 들어와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이는 그리스도는 성도를 통하여서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성도를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세상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려주어야 하는 형상으로 있는 겁니다.

 

이걸 모르니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를 닮아야 한다고 야단을 떠는 겁니다.

형상에 의미를 모르니 문자 풀이를 하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벽이 문이라고 내 미는 데는 대책이 없어요.

누구 누구 형상이란 말은 그 사람 뒤에 숨어 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니 하나님은 예수님 뒤에 숨어 계시는 것이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니 그리스도는 성도 뒤에 숨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겉보기엔 거지같아도 예수님의 형상으로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 증거하는 종들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겁니다.

목사 대접 잘하라는 말이 아니고 귀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암튼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세상을 위임했어요.

이게 기독교의 비밀이에요.

하지만 세상 종교는 이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자해요.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아들을 앞세워서 일하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세요.

애초에 만물을 아들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이 세상은 아들을 위하여 있어요.

 

아들이 세상의 주(主)와 그리스도에요.

주와 그리스도란? 한마디로 왕(王)이란 말입니다.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이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사로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왕이냐?

만유를 다스리고 죽은 자도 살리는 왕이란 겁니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친히 주관하시는 주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는 창조주란 말입니다.

이걸 알려 주려고 나사로가 선택이 된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뜻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암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기별을 합니다.

빨리 와서 오라비를 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별을 받은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일부러 안 가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촌각을 다투는데 예수님은 느긋합니다.

남의 일 대하듯이 하고 계세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관심 합니다.

진짜 사랑하기는 하나!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저렇게 모른 척 할 수가 있나!

 

우리 생각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오라고 한다면 한걸음에 달려갈 것입니다.

달려가서 그래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 라고 위로할 것이잖아요.

그래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아는 사랑법이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사랑은 세상적이고 아마츄어에요.

진짜 사랑은 감추어져 있어요.

사람이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그 사랑을 감추어요.

 

우리가 어렸을 적에 자기가 짝 사랑하는 여자 아이가 있으면 괜히 그 아이를 괴롭히잖아요.

고무줄놀이 하면 끊어버리고 치마도 들추고 그러잖아요.

이건 겉으론 괴롭히는 것 같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이에요.

 

미운 자식은 떡을 주고 예쁜 자식을 매를 주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를 그렇게 대하는 겁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식으로 사랑하지 않고 들어 주지 않는 식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이 사랑을 알아야 해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사랑 방정식을 모르면 오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 방정식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 분깃을 하나도 주지 않고 떠났어요.

육적으로 보면 너무도 야속해요.

그러나 땅에 것을 한 푼도 주지 않은 것이 하늘에 참 사랑이에요.

이 사랑 법을 알아야 해요.

왜? 그렇게 고난 가운데 던져 놓으셨는지!

 

우리도 이 주님의 사랑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아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남에 눈에 들킬 까봐서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그 사랑!

행여 드러나게 사랑하면 마귀가 알아채고 미혹 할까봐서 역설적 사랑 법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미워하는 척 하면서 사랑하는 그 사랑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시듯이 엉뚱한 행동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입장에선 급해 죽겠는데!

예수님은 나사로를 보지도 않고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틀이나 지체를 합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서는 남의 말 하듯이 천연덕스럽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합니다.

마치 죽기를 바라고 있던 사람처럼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바라고 계셨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예수님은 산 자하고는 상대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지요.

 

죄인이란? 죽은 자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죽은 자인 줄 몰라요.

지난 시간에 에스겔 선지자를 해골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살려내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는 장차 살려주는 영으로 오실 메시야가 할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해골은 다 죽어 있어요.

거기에 생명의 기운이 부는 겁니다.

그러니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났어요.

큰 군대를 이루어요..

그리곤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 되는 겁니다.

 

이건 예표에요.

장치 메시야가 오시면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메시야는 죽은 자를 살리려고 오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전문가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스스로 살았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아요.

여기서 살았다는 것은 자칭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고 있으니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사는 사람을 누가 죄인이라고 보겠어요.

도리어 하나님 말씀과 상관이 없이 사는 세리와 창기들이 죄인이지!

이게 인간이 바라보는 의관에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이 영생을 준다고 하여도 시큰둥해요.

예수 없어도 얼마든지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사고가 바로 죄 아래 있는 것이란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이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 나면서 된 소경을 가지고 너희가 이런 소경이라고 알려주신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을 알아먹지를 못했어요.

이건 성령이 오면 알게 됩니다.

 

소경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듯이 나사로도 이스라엘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죽은 자라는 겁니다.

이렇게 죽은 자를 예수님이 살려 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죽고 나자 이제 되었다 하면서 가자고 합니다.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또 압권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듣고 나사로가 자는 줄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그럼 우리가 가서 깨웁시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는 게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잔다고 했다가 죽었다고 하니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헷갈립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죽은 줄 몰라요.

마리아가 기별을 했을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죽을 병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죽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낭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하였을 땐 모른 척 나 몰라라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죽고 나서 찾아가는 심보는 도대체 무슨 심보입니까?

 

인간의 사고로는 죽은 것하고 자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죽은 것은 글자 그대로 죽은 것이고 잠자는 것은 살아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잠자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자들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감(感)을 잡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이 바라보는 것과 인간들이 바라보는 것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눈으로는 분명히 죽은 것인데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보는 죽음과 인간들 입장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의미가 달라요.

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에요.

빛과 어둠은 동일한 것을 가지고도 전혀 다르게 해석해요.

 

빛은 빛의 법으로 판단하고 어둠은 어둠의 법으로 판단해요.

그러므로 어떤 사건을 가지고도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빛은 빛으로서 판단 기준이 있고 어둠은 어둠에서의 판단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이 판단 기준이 극과 극으로 달라요.

인간이 보기엔 분명히 악(惡)한 것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엔 선(善)이에요.

반대로 인간이 보기엔 선(善)인데 하나님은 악(惡)이라고 합니다.

아주 역설적이죠.

 

이 역설은 믿음을 받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선(善)과 악(惡)도 다르거니와 모든 가치관이 달라요.

 

그러니 하나님은 복(福)을 주었는데 인간은 뭐 이런 것이 있어! 라고 갖다 버려요.

반대로 인간은 하나님께 아주 아주 귀하고 값진 것이라고 드렸는데 하나님은 차 버립니다.

이게 유대인들에게 신앙으로 고스란히 녹아져 있었어요.

그래서 빛을 어둠이라고 하고 어둠을 빛이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잘못된 구조를 제자들에게 바로 잡아 주려고 나사로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빛에 속하였고 제자들은 어둠에 속하였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바라보는 죽음에 의미와, 제자들이 바라보는 죽음에 의미가 달랐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것을 잠을 잔다고 하는 말을 알아먹지 못하는 겁니다.

또 나사로가 잔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실족하게 된다고 하셨어요.

 

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실족한다는 것은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시험에 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 속에 빛이 없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꾸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무엇입니까?

바로 어두움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까 나사로는 예수님(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했지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겁니다.

나사로를 사랑했기에 병들었을 때 즉시로 가서 고쳐주지 않고 죽고 나자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신경 좀 쓰고 들으세요.

왜?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게 한 것이 사랑인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사로처럼 다루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선 분명히 사랑을 하고 계시는데 우린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어요.

 

이 역설적 사랑을 극복 할 때 비로서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아픔들을 이겨 낼 수가 있어져요.

저도 이 역설을 알기 전 까진 하나님의 사랑을 엄청난 오해를 했어요.

이걸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날 간섭해 온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가를 알게 된 겁니다.

 

자 그럼 어째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방치 하였을까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나사로는 우리와 같이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난 겁니다.

 

죄인으로 태어났다 함은 죽는단 말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죽음으로서 그 삯을 받아 내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자에겐 죄를 묻지 않아요.

죽음으로 그 죗값을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 마음엔 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어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도 만들고 문명도 발달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살까 하고 약(藥)도 개발하고 의술(醫術)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인간이 죽는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몰라요.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여서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최고의 종교라고 일컫는 불교에선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인간의 운명으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운명(運命)이란? 생명이 돈다는 말이에요.

불교에선 이걸 윤회(輪回)라고 해요.

만물을 보아라!

죽었다가 다시 살고 하지 않느냐!

인간도 만물 속에 속하였기 때문에 만물처럼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 죽음을 너무 슬퍼할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요.

 

이생에서 내생으로 내생에서 이생으로 돌고 돈다는 겁니다.

돌되 이생에서의 업보(業報)에 따라서 내생에서의 삶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쉽게말해서 이생에서 공덕(功德)을 많이 쌓으면 내생에선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생에 살 때 내생을 준비하고 살라고 하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지요.

교회에서도 이런 말을 하잖아요.

천국에 가서 개털모자 쓰지 말고 황금맨션에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서 천국에 상급을 많이 쌓으라고 하잖아요.

어떤 목사들은 예수님이 목수라서 천국에서 성도들의 집을 짓는다고 해요.

그러니 그 집을 지을 재료를 우리가 보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고 하는 무당들을 초청해서 천국에 가보니 어떤 집은 보석처럼 화려하고 어떤 집은 짓다가 말았다는 간증들을 하고 있어요.

보석같이 화려한 집은 믿음이 좋고 헌금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한 사람들 집이고, 짓다가 만 초가집은 신앙생활을 개판으로 하는 사람들 집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헌금 많이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하늘에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서 땅에 있는 성전 지을 때 자기 땅 한 평씩 사라고 하잖아요.

다 여러분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목사의 말에 순종하라고 소리치잖아요.

목사라는 이름의 중들이 그러고 있어요.

기독교 TV에 거의가 다 이런 중들이 나와요.

 

결국 절간에서 하는 말과 똑 같아요.

초록은 동색이라 이 시대 불교와 기독교는 이란성 쌍둥이에요.

마귀라는 엄마의 한 뱃속에서 나왔어요.

현재 한국교회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 시간마다 바치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바쳐라!

그리고 또 바쳐라!

쉬지 말고 바쳐라!

죽도록 바쳐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니라!

이에 교인들은 할렐루야! 아멘! 이라고 하면서 난리 부르스를 추잖아요.

하는 꼬라지들을 보면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에요.

 

이런 사상이 예수 밖에 사상이에요.

어둠에서의 진리관이에요.

인간들은 더 영악하여서 이런 진리관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관념으로 믿어요.

그러니 적당히 눈치껏 하는 겁니다.

 

실제로 윤회를 말하는 사람들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고 해요.

즉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낫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내생도 내생이지만 이 땅에서 복 받고 행복하게 사는게 최고라고 해요.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땐 죽더라고 악착같이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고자 하는 목숨을 죽여 버립니다.

살려 주는게 아니고 죽여요.

살고자 하는 목숨을 죽여서 영원히 살게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 목숨은 죄 있는 목숨이에요.

이 목숨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육신의 몸은 죽음에 넘겨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어요.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자 보세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요.

이건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예수님을 죽게 하는 겁니다.

죽게 하는 이유는 다시 목숨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겐 두 목숨이 있어요.

땅에 목숨과 하늘에 목숨이 있어요.

 

땅에 목숨은 흙에서 났고 하늘에 목숨은 성령으로 나요.

예수님은 이 두 목숨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이 마리아의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흙에선 난 육(肉)이에요.

하지만 그 육의 생명은 아담의 씨로 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났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죄인의 몸은 가졌으나 죄는 없어요.

죄가 없으니 죄인도 아니세요.

그냥 몸이에요.

마치 빈 항아리와 같아요.

여기다 뭘 채웁니다.

뭘 채우냐 하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채우는 겁니다.

이걸 이사야서 53장에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겁니다.

세례란? 세례를 베푸는 사람과 연합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죄인과 연합을 하였어요.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육신으로서의 삶을 뛰어든 겁니다.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나자 즉시로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합니다.

그리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가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게 하십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죄인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당하는 아픔을 다 당하신 겁니다.

이걸 체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느겼어요.

그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한 겁니다.

예수님도 죽기 싫었어요.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한 약속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는 쓴 잔을 마신 겁니다.

죽음에 일평생 종노릇하는 죽기 싫어하는 이 목숨을 죽이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어요.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보세요.

예수님이 혈육에 함께 속하신 것은 혈육에 속하여 사망에 매여 일평생 종노릇하는 자기백성을 놓아주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 목숨도 같이 죽은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에 우리 죄를 다 담아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성도와 함께 죽은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내 백성의 죄를 몽땅 나에게 뒤집어 씌워라 하고 받은 거예요.

이건 마치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자기 백성 모두가 의인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붙어 있어요.

예수님이 죽으면 성도도 죽고 예수님이 살면 성도도 살아요.

이 사실을 지금 나사로를 가지고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나사로는 지금 잠시 후에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어요.

물론 예수님에게 속한 제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모습이기도 해요.

 

그러니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니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겁니다.

죽은 것이 아니고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잔다 함은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이에요.

 

성도는 부활의 영을 받았어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그러니 성령 받은 성도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에요.

부활의 영이 잠자는 자를 깨울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우린 모두가 나사로처럼 하나님에 사랑을 입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나사로를 통하여서 위로를 받아야 해요.

 

이런 위로를 하는 것은 그만큼 성도가 세상에서의 삶이 고달프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기복주의를 외치는 목사들의 말처럼 고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았으니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라고 나사로의 죽음을 가지고 시청각 교제로 삼고 있는 겁니다.

비록 나사로처럼 병들어 죽더라도 어둠에 관점에서 보지 말고 빛에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겁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죽는 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세요.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원치 않는 일들이 바로 나사로의 죽음과 같아요.

예수 잘 믿어도 병이 들거나, 가정에 우환이 들거나, 혹은 사업이 실패할 수가 있어요.

죄인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에요.

인간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에요.

없으면 움켜잡고자 가슴 졸이고, 움켜잡으면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슴 졸여요.

 

이게 모두가 어둠이 주는 겁니다.

어둠이 지배하면 육신의 불행이 실패라고 여겨져요.

세상적인 실패를 실패로 보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둠에 다니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 안에 빛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빛의 관점에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이해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에서 성도가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엄청난 축복이라고 말해 주고 있어요.

 

마 5장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수없이 듣고 읽어 왔지만 내게 막상 이러한 핍박이 닥치면 기겁을 하면서 자신에겐 이러한 일이 닥치지 않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우린 세상에서도 예수 믿는다는 프리미엄을 달라고 합니다.

 

프리미엄이란? 복이에요.

세상에서 잘되고 잘 되고 잘 되는 겁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천당에 가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고 이생에서도 팔자 늘어지게 살고 내생에서도 팔자 늘어지게 살겠다는 겁니다.

아주 도적놈 심보에요.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신앙입니까?

 

이는 모두가 성도들이 어둠의 사고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어둠의 사고를 버리지 않는 한 성도는 세상의 일로 실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어두움의 사고를 뽑아내고 빛의 사고를 심어주려고 나사로를 샘플로 죽이고 살리는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당하는 것은 곧 모든 성도가 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로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을 나사로에게 행하셨던 방법과 같이 행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패하고 망하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역설적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안에 빛이신 성령이 증거해 주세요.

우리가 당하는 아픔이 곧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영광된 아픔이라고 말이에요.

 

이를 가장 잘 깨닫고 산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고후 4장 7-18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자기가 극한 환란을 당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안에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배란? 예수의 생명이에요.

성도는 마치 조선시대 왕의 씨를 회임한 시녀(侍女) 같아요.

 

어느 날 궁녀가 왕에게 성은(聖恩)을 입어 잠자리를 했는데 그만 회임(懷妊)을 하고 말았어요.

그때부터 신분이 달라집니다.

그 속에 씨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왕손을 배태(胚胎)했어요.

천하에 창조주의 씨를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어떤 환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을 받을수록 도리어 자기 안에 성령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한다는 겁니다.

 

고후 6장 4-10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 관점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고!

자신은 비록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부요케 하고 있다고 감사하고 있어요.

 

성도는 망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환난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어둠 아래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에요.

바울은 빛의 사고로 살았기 때문에 복음 때문에 당하는 아픔을 아픔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고 자랑했어요.

 

저도 육적으로는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안에 계신 이가 나보다 강하기 때문에 넘어져도 일어서는 겁니다.

주의 영광이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없음 속에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답게 사는 겁니다.

 

육신은 불편해도 내 안에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어요.

복음이 주는 이 황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이는 모두가 내 안에 부활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의 관점에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살다보면 세상으로부터 고난은 필연적으로 당하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마치 비가 온 진창에 아빠가 발자국을 내 놓은 것을 아이가 따라가는 것과 같아요.

우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그 길을 따라 가다가 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기 전에 미리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아직까지 어두움의 사고 안에 갇혀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어두움의 사고를 깨트려 주셔야만 그 속에서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알려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옥 갈 인간들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냥 그대로 세상적인 사고로 살도록 내버려두실 것이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어두움의 사고로 살도록 버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어두움의 사고를 걷어 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나 나사로나 제자들은 모두가 어두움의 사고에서 나와야 할 대상들입니다.

모든 성도는 어두움의 사고에 틀에서 벗어나 빛의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사고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성도들에게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듯이 시험해요.

떡과 세상 권세와 명예로 미혹을 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미혹해요.

이 미혹에 빠지면 돈 없으면 망하는 줄 알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생각하여 죽고 싶어 하고 괴로워하게 되어요.

 

예수님은 이러한 마귀의 미혹에 빠진 성도들을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둠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일을 행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말씀이 믿어진다면 그대는 빛에 속한 자입니다.

그 빛이 실족치 않게 하실 것입니다.

부디 십자가라는 진리의 빛 가운데서 자유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본래 진노의 지식이었던 저희를 예수 안에서 빛에 아들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을 살되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셔서 지금 우리가 어떤 복을 받고 사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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