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71강. 예수님의 눈물 (요 11: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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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10. 9.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71강. 예수님의 눈물 (요 11:32-44)

-.정낙원 목사

 

 

 

구원이란? 건져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혹은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었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김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구원다우려면 반드시 버려짐이 있어야 합니다.

버려짐 없는 구원은 없어요.

버려짐을 죽음이라고 합시다.

그럼 구원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주어진다는 말이 되겠지요.

 

버려짐과 구원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서로의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통해서 드러나고 어둠은 빛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천국과 지옥도 이와 같아요.

지옥이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을 위하여서는 반드시 지옥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가 서로를 존재케 하는 의미가 되게 하고 있어요.

 

성경을 보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요.

이는 천국 백성은 창세전에 이미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옥 백성도 창세전에 녹명이 되었겠지요.

 

하나님이 이미 녹명해 놓고선 때가 되면 차례대로 내 보내고 죄 아래 가두었다가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자기 백성들을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불러내고!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세요.

 

빼내는데 그냥 빼내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빼내세요.

이게 창세전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로 건짐 받았다는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인(印)침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역사는 원래 없었어요.

이 세상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으로 인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언약을 그려내는 도화지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창세전이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의 세계 곧 피조 세상 밖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이 피조 세상 밖을 묵시라고 해요.

혹은 영(靈)의 세계라고도 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세운 언약을 위하여 이 세상 역사가 생겨났어요.

그렇다면 이 세상 역사 위에는 창세전이라는 묵시가 흐르고 있겠지요.

창세전 언약은 묵시를 역사 속에다 펼쳐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시니리오를 근거로 드라마를 찍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감독이 대본대로 셋트를 만들고 배우들을 등장시키잖아요.

대본이 먼저이고 드라마가 나중이에요.

대본대로 셋트를 만들어요.

대본은 창세전 언약이고 셋트는 역사입니다.

 

창세전을 묵시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이 있습니다.

땅을 역사라고 하고 하늘은 묵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묵시는 고정이 되어 있고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요. 

이 땅의 역사는 흐르는 강물과 같아요.

마치 강원도 황지의 한 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남한강을 이루고 낙동강 700리를 흐르는 것과 같이 흐르고 있어요.

 

황지의 한 샘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낙동강 하구는 역사의 끝이 되겠지요.

낙동강을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아담이 인류역사의 시작이니 낙동강 물줄기로 본다면 황지의 한 샘물이 되겠지요.

그럼 낙동강 하구는 맨 마지막 인간이 되겠지요.

 

아담이 낙동강 물줄기의 발원지와 같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낙동강 하구는 편의상 2012년이라고 합시다.

요즘 2012년이 지구의 종말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으니 편의상 2012년이 끝이라고 합시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2012년까지는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일을 하시겠지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갈라내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태백에서 낙동강 하구까지 흐르는 물줄기를 한 눈에 다 내려다보고 있어요.

낙동강 700리를 흐르는 강물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님은 다 알아요.

 

낙동강 물줄기를 역사라고 한다면 그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은 묵시에요.

그러니 묵시는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겠지요.

묵시는 역사 속에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묵시라는 하늘에 앉아 계십니다.

그 밑으로 낙동강처럼 인류 역사가 흐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로 아브라함으로 모세로 다윗으로 예수님 초림 때로 종교개혁의 시대로 흘러 흘러서 지금 2010년까지 왔어요.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라는 물줄기 위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언약이라는 긴 작대기 하나로 흘러가는 역사라는 강물에 낚시를 하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수님과 맺은 언약이라는 시나리오 속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을 에수님이 오셔서 하나 하나 세상에서 하늘로 건져 올리는 겁니다.

이걸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약이라는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역사 속에 나게 하시고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와 아닌 자들을 구분하여 갈라내는 일을 하시고 계세요.

지금도 아담 때부터 하던 그 일을 늘 반복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냥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하늘이 앉아서 세상에서 낚시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낚시가 성도를 구원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구원을 무덤에서 빼낸다 혹은 건져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건지는데 어떻게 건지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건지십니다.

낚시 미끼가 예수님 피에요.

자기백성들은 예수님의 피라는 미끼를 덥석 물어요.

오직 자기 백성만 예수의 피라는 미끼를 물어요.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사람은 예수의 피를 안 물어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에 예수님 피로 자기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 속에는 예수님의 피에 흔적들이 있는 겁니다.

이걸 인(印)침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세요.

 

구원을 선물이라고 하지요.

선물이란? 공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구원이 선물이 되려면 인간 쪽에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겠지요.

왜냐하면! 선물로 주어지니까요.

 

만약에 받는 쪽의 조건에 의한다면 그건 선물이 아니고 댓가입니다.

댓가라면 감사 할 일도 아니고 복(福)도 아니에요.

당연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구원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어요.

 

믿음도 선물이고!

영생도 선물이고!

천국도 선물이에요.

거저 주는 선물이에요.

 

그리고 선물이 선물다우려면 모두가 다 받으면 안 되겠지요.

제한적이라야 선물답지요.

도나 개나 다 구원 받으면 구원이 복일 수도 없고 귀하지도 않아요.

선물이 되려면 제한 적이어야 하고 내 힘으로 이룰 수 없어야 해요.

 

자 정리합니다.

구원 속에는 두 가지가 담겨져 있어요.

첫째는, 선물이므로 인간 쪽에 조건과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라야 합니다.

둘째는, 모두 다 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제한 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내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구원이니,

믿음이니,

은혜니,

천국이니,

영생이니,

죄사함이니,

 

거룩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따 낼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에요.

거저 준다는 말은 인간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은혜 받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믿음을 만들려고도 하지 마세요!

영생 받고자 뭘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죄사함 받고자 하지 마세요!

거룩해 지려고도 하지 마세요!

이러한 것은 노력해서 얻어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런 것은 모두가 공짜로 주어져요.

하늘에 것은 땅에서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이런 것은 인간 쪽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의 행함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자 중요합니다.

구원이 공짜로 주어졌으니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지속이 되어진다는 말이 되겠지요.

취소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니~ 하나님이 공짜로 주어놓고 우리가 잘못한다고 빼앗아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럼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되지요.

그렇다면 변덕쟁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믿겠어요.

 

하나님이 변덕을 부릴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도 언약대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언약에 의하여서 구원을 받은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그 어떤 것으로도 취소되지 않아요.

 

공짜로 줬다가 말 안 듣는다고 빼앗아 가면 그건 공짜로 준 것이 아니지요.

맞잖아요.

그러니 구원에 관련된 것들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영원히 지켜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구원이 사람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졌듯이 사람의 조건으로 취소되지도 않아요.

구원은 이미 창세전 언약으로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다고 구원이 취소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런 구원을 주신 적이 없어요.

자기 행함에 따라서 뭔가 불안하다는 것은 올바른 구원을 선물로 받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이게 믿어져야 구원받은 성도에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문제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아요.

자기 행실로 인하여 조바심 내지 않아요.

편안하게 살아요.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고 안심하고 사는 겁니다.

혹여 라도 세상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서 세상에서 지탄받을 수는 있어도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어요.

 

이는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합의 하에 썼어요.

이걸 창세 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는 우리가 고칠 수가 없어요.

우린 다만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서 사용되어지고 있을 뿐이에요.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나사로의 죽음도 이 시나리오에 따라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예요.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나사로는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고 살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려고 나사로가 선택 된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印)으로 봉한 책이 있지요.

 

계 5:1-5=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은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 언약 내용이 이 세상에 펼쳐지는 겁니다.

누구 중심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어린 양 중심으로 펼쳐져요.

 

그래서 봉인을 어린양이 떼는 겁니다.

어린 양이 봉인을 하나 하나 뗄 때마다 이 세상은 그 책의 내용들이 펼쳐져요.

일곱 인이니,

일곱 나팔이니,

일곱 대접은 모두가 이 세상에 일어날 모습들이에요.

 

인(印)을 뗀다는 것은 허락한다는 말입니다.

이 책이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요.

책의 주인공이 어린 양이에요.

이 세상은 어린 양 중심으로 써진 내용대로 움직여져요.

그러므로 책 속엔 어린 양을 근거로 구원받을 자도 있고 멸망 받을 자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어린 양에 속한 자로 살고,

어떤 사람은 어린양의 반대편에 속한 자로 살아요.

각자 지음 받은 대로 살다가 각기 제 길로 가면 되어요.



야곱은 야곱대로 살다가 가고,

에서는 에서대로 살다가 가요.

야곱은 야곱대로 살다가 가는게 하나님께 영광이고,

에서는 에서대로 살다 가는게 영광이에요.

모두가 하나님이 쓴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광인 겁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현하는지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서 만난 것도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노사연이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처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요.

 

2천 년 전에는 하나님이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바울과 루디아를 만나게 하시고!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하셨듯이!

지금은 저와 여러분이 인터넷이란 가상(묵시)공간에서 만나게 하신 겁니다.

 

모두가 어린 양의 복음 안에서 만난 겁니다.

2천 년 전에도 어린 양을 중심으로 만나서 교제케 하였듯이 지금도 어린 양을 중심으로 교제케 하세요.

어린 양이 우리 만남의 근거에요.

 

성도는 생명책에 이미 녹명 되었어요.

나중에 녹명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녹명해서 보내심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미 녹명 된 사람은 녹명시킨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세요.

 

하나님이 녹명 시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내요.

 

마 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암 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교회가 타락하여도 자기 백성들은 그 속에서 빼내심을 받아요.

한 알갱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다 찾김 받아요.

그러니 교회가 타락한다고 댕댕거릴 필요가 없어요.

 

멍멍이가 짖어도 경부선은 달린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여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한 알갱이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요.

마치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서 방주를 지어 구원케 하셨듯이 교회가 복음을 안 전하면 자기백성들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듣게 하여서 부르시고 빼내세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아무리 타락해도 자기 백성은 타락하지 않아요.

비 진리를 쫓지 않는단 말입니다.

거짓 종들의 말을 듣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녹병 된 자는 이단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진리 가운데로 불러내세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게 하세요.

성령이 십자가 복음 안으로 끌어당겨요.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보세요.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예수 앞으로 끌고 온다고 하잖아요.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하나님이 끌어당겨요.

예수님에게 척척 붙여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을 다 살려 낸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싫다고 해도 예수님이 다 살려 내세요.

가만히 있어도 예수님이 알아서 살려주세요.

 

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찌릿 찌릿해야 해요.

전 그래요.

가슴이 쿵쾅거려요.

흥분되어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수가 빨라져요.

이런 말씀을 들어도 시큰둥한 사람은 사상 검증을 좀 해 보아야 할 겁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사람은 귀를 막아서 복음을 못 듣게 만들어요.

예수를 믿고 싶어도 못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기 싫은데도 믿는 사람이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천국에 가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갔어요.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싫다고 했는데 천당에 갔어요.

예수님이 강제로 납치해서 천국 가는 열차에 태웠어요.

아마도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에 가서도 얼떨리우스로 있을 겁니다.

 

복음은 듣고 싶다고 해서 들려지는 것도 아니고 듣기 싫다고 해서 안 들려지는 것도 아니에요.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는 반드시 복음을 듣게 하고, 버림받기로 작정 된 자는 못 듣게 해요.

마치 야곱은 차자로 태어나도 구원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하고,

에서처럼 장자로 태어나서도 버림받기로 작정 되었으면 장자 권을 경홀히 여기게 만들어서 버리게 만들어요.

 

그러니 구원은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한 사람이 일어서고 넘어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어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은혜인 겁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니 은혜이지요.

 

그런데 이 은혜가 또 만만치 않아요.

우리 인생을 개입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해요.

이게 보통 골치 아픈게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님 뜻대로 해서 받는 것은 좋은데 이게 우리 인생사를 개입하면 복잡해져요.

우리 인생이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자꾸만 헝클어져요.

성도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옮기게 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 육신은 반항을 합니다.

하나님 이러시기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왜? 꼽냐! 그래요.

그러면 우린 할 말이 없어요.

 

우리 인생이 내 뜻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게 되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내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인생이 살아지기에 때문에 당혹스럽고 힘이 든 겁니다.

 

죄가 뭡니까?

하나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성향이잖아요.

그러니 우리 육신은 늘 하나님과 충돌하는 겁니다.

 

우린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못 살게 해요.

하나님이 우리보다 강하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지게 되어 있어요.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고 좌충우돌하면서 질질 끌려가요.

꼭 어린 아이가 곰 인형 큰 것을 질질 끌고 가듯이 끌려가요.

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아세요.

왜냐하면! 우리 구원을 하나님이 보장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도 변하지 않고 안정적인 겁니다.



우리 원대로 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밀어붙이니 구원이 확정적이 되는 거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고 사세요.

하나님은 어차피 예수님하고만 상대하시므로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든지를 가지고 구원을 논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의 원대로 두지 않지요.

갓난아이가 엄마 나 살기 싫어요!

안 살래요! 한다고 그래 아가야 험한 세상 살면 뭐하니 잘 죽어라 그런 부모는 없어요.

살기 싫다고 하여도 살게 해요.

아프면 병원 가서 치료 받게 하세요.

 

갓난아이는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부모는 아이가 아프면 아이의 원함과 상관없이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살려내요.

아이가 주사 맞기 싫다고 해도 주사를 맞히고 약을 먹여서 살려내요.

아이를 살게 하는 것은 부모의 원함이지 아이의 원함이 아니에요.

 

우리도 이와 같아요.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원함으로 사는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의 원함으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이 살게 하면 한강다리에서 뛰어 내려도 머리가 깨지고 다리만 부러지고 살아나요.

피 철철 흘려도 목숨은 간당 간당 붙여서 숨을 쉬게 만들어요.

그리곤 하나님을 놀래키고 까분 죄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합니다.

죽지도 못하고 고생만 진득하게 하고 결국은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면 멀쩡히 자다가도 죽어요.

살고 싶어도 죽어요.

이제 살만하면 죽는 것도 하나님이 그랬어요.

 

그 누구도 자기 의지대로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으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요.

이게 피조물의 세계에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세요.

우린 토기에요.

토기는 토기장이 마음대로 만들어요.



밥그릇으로 만들든지!

국그릇으로 만들든지!

뚝배기를 만들든지!

 

우린 그냥 만들어 준대로 쓰임 받을 뿐이에요.

성도의 구원도 이와 같아요.

우리의 원함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하세요.

 

만약에 구원이나 영생을 줄 때는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공짜로 주고선 지키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지키라고 한다면 모순이에요.

인간이 만약 구원을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노력으로 따 낼 수도 있어져요.

 

흔히 성화주의자들의 말대로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얻고 성화는 우리 노력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시켜주는 도구에 불과해요.

이용대상물일 뿐이에요.

이런 십자가는 없어요.

물론 이런 구원도 없지요.

이런 것은 모두가 인간중심에서 구원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오는 신학이에요.

 

인간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된 피조물이에요.

주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위해서 인간이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 구원 중심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에요.

이단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요.

다만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일에 인간이 구원되는 일이 필요한 것뿐이에요.

그러니 나를 위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구원을 했어요.

이 사실을 위반하면 이단이에요.

 

만약에 위에 것들을 위하여 인간 쪽에서 뭔가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면 이단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 쪽에서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살면 되어요.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으면 되어요.

어차피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게 주님께 영광이 되면 살려줄 것이고!

내가 죽는게 하나님께 영광이면 죽일 겁니다.

 

신앙이 뭐냐?

이 사실을 믿고 사는 겁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일부러 죽을 이유도 없고 일부러 살 이유도 없어요.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에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은혜가 은혜 되려면 심판이 있어야겠지요.

심판 없는 은혜란 없어요.

 

어떤 분이 그래요.

목사님 성도가 예수 믿고 잘 살면 안 됩니까?

행복하게 잘 살다가 천국에 가면 좋잖아요.

 

어이쿠! 좋지요.

저도 날마다 눈만 뜨면 쌍수 들고 바래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도 늘 그런 기대감으로 살아요.

다만 하나님이 내 소원도 몰라주고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아서 탈이에요.

 

하나님도 야속하지!

왜? 자기 백성들을 좀 행복하게 잘 살 게 해주시지 않고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인정머리가 저 보다도 없는가 봐요?

저 같으면 다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고 천국도 가게 해 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전 하나님이 아니고 죄인인 겁니다.

인간들 편을 들어주니 말이에요.

하나님은 인간들 편을 안 들어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늘 우는 겁니다.

하나님! 날 좀 행복하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병들지 않고 오래 오래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잘 살게 해주세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도하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아요.

우리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고난을 싫어해요.

하지만 우리가 싫다고 해서 피해가지 않아요.

그러니 야속하고 눈물이 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눈물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울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죽음을 문상(問喪)하기 위해 온 군중들도 울어요.

그런데 서로가 우는 이유가 달라요.

도대체 마르다와 마리아의 울음과 군중들의 눈물과 예수님의 눈물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마리아와 군중들의 울음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웁니다.

젊은 나이에 죽은 나사로가 불쌍합니다.

이들의 울음 속에는 자신들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요.

 

난 살았는데 넌 왜? 죽었느냐 라는 것이 깔려 있어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군중들의 울음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哀悼)의 눈물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라요.

너희가 나사로를 애도할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너희를 애도한다는 겁니다.

너희들 생각대로 나사로가 재수 없어 죽은 것이 아니라 재수가 좋아서 먼저 이 세상을 제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군중들은 모르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군중들을 보고 우는 겁니다.

 

전도서 기자는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했어요.

초상집에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겁니다.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의인의 죽음은 쉼이라고 했어요.

 

사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화액 전에 데려가신다고 하지요.

데리고 가서 침상에서 편하게 쉬게 한다고 하지요.

마치 군대에서 제대시킨 것과 같아요.

 

화액(禍厄)이란? 큰 불행이란 말입니다.

더 큰 불행 전에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데려 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 장례식 때 꼭 이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하면서 관 속에 누워 있는 분을 부러워해요.

하나님 전 언제 제대 시켜 줄 건가요! 라고 속으로 물어요.

 

관 속에 누워 계신 분이 저보고 그러는 것 같아요.

먼저 제대해서 미안 하네!

내 먼저 가서 기다림세!

조금만 고생 더 하고 오게 나!

그러는 것 같아요.

 

복음을 알고 나니 육신에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요.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우리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확정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왜? 웁니까?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선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가 울어주는 겁니다.

세상에선 자신은 살았고 무덤 속에 있는 자는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울어줌으로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안도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울음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우는 겁니다.

세상의 이치로 보면 살았다고 하는 자들이 죽은 나사로를 보고 우는게 맞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과연 나사로를 보고 우는 자들이 산 자이냐 입니다.

너희들이 과연 산 자가 맞느냐 에요.

너희들이 과연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 할 수 있느냐 에요.

 

예수님의 눈에는 나사로를 보고 우는 자들도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 나사로를 향하여 울어줄 처지가 아닌 겁니다.

자신들도 동일하게 죽은 자인데 어찌 죽은 자를 위하여 울겠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라고 합니다.

 

마 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인간은 죽은 자로 출생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살았다고 하나 죽었어요.

 

죄의 삯은 사망이지요.

그럼 죄인은 다 사망의 그늘 아래 있어요.

그래서 죽는 겁니다.

 

지금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자들도 죽은 자에요.

그럼에도 자신들은 산 자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산 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이라고 했어요.

살려주는 영이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의하여서 살려짐을 받은 자만이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지고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하는 겁니다.

봐라!

내가 너희를 살려주어야 산 자가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살리심을 받아야 산 자요.

 

이처럼 예수님에 의하여 살리심을 받은 자를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난 자에요.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면 모두가 헌 피조물이에요.

헌 피조물은 새 피조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무엇으로 만드느냐 하면 말씀으로 하세요.

왜? 말씀으로 하는 줄 아세요?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여기서 말하는 태초란? 창세전이에요.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해요.

 

아까 이 세계를 묵시라고 했지요.

 

묵시 속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 옆에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또 계신 겁니다.

하나님도 있고 말씀이라는 하나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이라는 하나님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말씀이라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세요.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살어! 라고 하여서 제가 지금 살고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이세요.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에게 말씀 하십니다.

명령하시고 있어요.

야!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나사로가 그 말씀의 명을 따라서 살아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살아난 성도는 반드시 말씀이라는 끈에 묶여져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말씀으로 산 자가 아니에요,

말씀으로 살아난 자느 말씀을 생명으로 여겨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을 하세요.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공급 받아요.

그러니 예수님 말씀은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 된 자를 찾아내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은 말씀이 떨어지면 척척 달라붙어요.

꿈틀 거려요.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람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사람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나사로 앞에 선 것도 말씀으로 하셔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봐라!

나사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 말을 들으면 산 자이고, 못 들으면 죽은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릅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자다가 깬 사람처럼 무덤에서 걸어 나왔어요.

이렇게 되면 나사로가 죽었다고 애곡하던 사람들이 죽은 자라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 겁니다.

이건 조금 있다가 살펴봅시다.

 

암튼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서 있는 군중들은 죽음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슬퍼합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은 끝아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걸 불교에서 흉내를 내요.

불교에서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해요.

생명은 죽지 않고 변화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선 사람이 죽는 것은 다만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해요.

이걸 윤회(輪回)라고 합니다.

윤회란 돌고 돈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죽는 것도 다른 모습으로 윤회하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치 나무가 죽으면 썩어서 흙이 됩니다.

그럼 나무가 흙으로 사는 겁니다.

흙도 살았어요.

그러니 생명을 틔우는 겁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맞지요.

그러니 윤회가 되는 거지요.

 

이걸 과학에선 질량불변(質量不變)의 법칙 또는 질량보존(質量保存)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과학에선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고 에너지라고 합니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화학반응에 의하여 변형 된다고 해요.

그러니 모든 물질은 사라지지 않지요.

무(無)에서 유(有)가 되지 않고, 유(有)에서 유(有)로 변환한다는 겁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무가 산불이 나서 탔어요.

비록 나무는 탔지만 그 나무는 불에 타서 열을 만들어 내어 다른 에너지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열이 되고 연기가 되어서 어딘가에 있어요.

그러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에너지로 존재하는 거지요.

 

제가 소리를 쳤어요.

그러면 그 소리는 우주(宇宙) 어딘가에 에너지로 있다는 겁니다.

제가 뱉은 소리도 제 안에 있던 에너지에요.

그 어떤 것이라도 존재하는 물질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얍! 하고 소리쳤어요.

그러면 그 소리는 이미 내 안에 있는 에너지에요.

제 안에 에너지가 소리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 그 소리는 우주 어디에서 다른 에너지로 존재하는 거지요.

 

여러분 우주는 원자라는 질량으로 꽉 차 있어요.

빈 공간이 아니에요.

 

쉽게 말할게요.

이쪽에서 문을 여 닫으면 저쪽 문에서 쿵하고 움직이지요.

이건 방안이 빈 공간이 아니라 원자라는 입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문을 열면 이쪽에 있던 에너지가 저쪽으로 파장을 몰고 가기 때문에 저 쪽에 있는 문이 쿵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마치 만원 지하철에 사람이 타면 저쪽 끝에 사람이 밀리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물체가 움직이면 에너지도 움직여요.

맞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지요.

삼겹살 덩어리가 분해가 되어서 흙으로 돌아갔잖아요.

그러니 육신은 다른 질료인 흙으로 존재하는 거지요.

 

불교에선 이 흙을 그냥 흙으로 보지 않고 다른 생명으로 보는 겁니다.

생명은 없어지지 않고 다른 생명으로 순환한다고 보아요.

그러니 과학이 말하는 질량불변의 법칙이나 불교의 윤회나 맞는 말이 되지요.

그 어떤 것이든지 질량은 불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다는 겁니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불교에서 전생(前生)이니 내생(來生)이니 하는 말도 다 이런 연유에서 말하는 겁니다.

 

불교에선 인간은 자연의 하나라고 해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있다는 겁니다.

다른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다음 생애에선 벌레로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원하다는 겁니다.

 

얼마나 멋진 이론입니까?

죽음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잖아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인간도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과학자도 아니고 스님도 아니라 정확하게 표현을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혹 표현이 다르더라도 대충 이런 이론이다 라고만 이해하세요.

 

그런데 성경을 펴면 이런 이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이설(異說)임이 밝혀져요.

물론 이것도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라고 인정을 해야지만 이설(異說)이 되어요.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교 교리가 정설(定說)이 되는 겁니다.

불교에선 기독교 교리가 이설이고, 기독교에선 불교 교리가 이설이에요.

 

암튼 성경을 펴면 하나님은 각각의 모습으로 창조를 했다고 증거하고 있어요.

사람이 죽어서 윤회하여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창조가 되었고, 짐승은 짐승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각각의 형상을 주셨어요.

 

창 1:21-25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 25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하잖아요.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이미 고정되었다는 겁니다.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졌어요.

 

그러니 사람은 사람이고 짐승은 짐승인 겁니다.

사람이 죽어서 짐승으로 윤회하지 않아요.

물론 짐승이 인간으로 태어난 일도 없어요.

 

죽으면 그냥 영벌과 영생으로 갈라져요.

다시 돌고 도는 패자 부활전이 없어요.

한번 죽으면 끝이에요.

 

그 다음엔 심판이 있어요.

죽고 나면 영벌로 가든지 영생으로 가든지 심판이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죽고 난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몰라요.

 

성경을 펴면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신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차별이 없고 동일합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달라요.

 

믿는 자는 둘째 사망이 없지만 믿지 않는 자는 둘째사망이 있어요.

이름하여 불 못에 들어가는 겁니다.

흔히들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사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고 난 후의 심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죽고 난 후의 심판은 어린양의 심판이에요.

즉 어린양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지금 그 어린 양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서 계세요.

심판주로 서 계신단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 한마디로 영벌과 영생으로 갈라져요.

생물학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자나 죽었다고 하는 나사로나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죽음과 죽음 아닌 것으로 갈라져요.

 

예수님이 살라고 하면 영생으로 살아나고 예수님이 죽으라고 하면 영벌로 죽어요.

 

그럼에도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인 무리들은 이걸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의 울음도 자기들처럼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까워서 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군중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때문에 우는 겁니다.

 

너희들이 진정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기뻐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군중들 눈에 자신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고 우는 겁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말이 가슴이 아픈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던 자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씀을 가르치던 것이 나사로의 죽음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마리아가 주께서 여기 게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고백을 들어보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어요.

 

이는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울 이유가 없어야 해요.

도리어 예수님의 오심에 감사하고 예수님이 하실 일에 관심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지 않아서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게 안타까운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영역에서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영역을 다른 말로 지평이라고 해요.

성경은 하늘과 땅이라는 두 지평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영과 육이에요.

영을 하늘이라고 하고 육을 땅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하늘은 묵시라고 하고 땅은 역사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땅에서 났으니 역사라는 지평에 있어요.

역사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아요.

즉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이쪽과 저쪽이라는 장소적인 한계성을 갖고 있어요.

 

지금 전 울산에 있어요.

그러면 서울에 있는 사람은 절 보지 못해요.

전 오늘이라는 시간과 울산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어요.

이는 제한 적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났으니 묵시에서 오셨어요.

묵시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어요.

묵시는 마치 정지된 세계와 같아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고정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 때도 계셨고, 2천 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세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해요.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지요.

이는 어느 시대나 예수님은 계신단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묵시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묵시란? 항상 지금 여기에요.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서울이나 울산이나 한 손바닥 안에 있어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쉽게 설명할게요.

 

묵시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아요.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한 동네에요.

땅은 평편하므로 시작과 끝이 있어요.

이걸 역사라고 해요.

 

역사는 일직선으로 쭉 늘어진 선과 같아요.

시작점과 끝나는 지점이 있어요.

그 위에 태양이 떠 있어요.

태양은 시작과 끝을 다 비추고 있어요.

 

태양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든 공간을 다 보고 있어요.

태양 입장에선 땅의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아요.

서울에서도 태양을 보면 머리위에 떠있고 울산에서도 보면 태양이 머리위에 떠 있어요.

어디를 가도 항상 머리위에 떠 있어요.

 

다르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장기판과 같아요.

장기를 두는 사람은 장기판에 놓여진 말들을 다 보고 있어요.

이쪽이나 저쪽에 놓여진 말들을 다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장기를 두는 사람 입장에선 장기판에 놓여진 말들은 다 자기 손아래 있어요.

장기판을 역사라고 한다면 장기를 두는 사람은 묵시에 속한 것이 되는 겁니다.

장기판의 말들은 우리 인간이고 장기를 두시는 분은 예수님이세요.

잘 이해하세요.

 

지금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이라는 장기판을 내려다보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장기판의 이쪽 구석에 있어요.

예수님이 계셨던 저쪽 구석과는 떨어져 있어요.

저쪽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왜? 자기 집에 안 왔느냐고 원망하는 겁니다.

자기 집에 있었으면 자기 오라비가 어떤 상태였는지 알고 고쳐 주었을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일하는 것은 자기 범주에 가두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니 왜? 지금 오셨느냐고 따지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묵시에 속한 예수님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는 겁니다.

어째서 너는 나를 역사라는 틀 속에 가두고 있느냐! 라고 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서 잘못된 신앙관을 깨트리고자 하신 겁니다.

나는 먼 훗날에 메시야가 아니고 지금 현재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부활은 역사 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먼 미래의 메시야가 아니고 지금 메시야란 말입니다.

먼 훗날에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부활의 주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부활이 지금 현재면 심판도 지금 현재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안다면 역사 밖에 묵시에 계신 분임을 알아야지요.

역사 밖에 계신다 함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를 마리아가 알았다면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지요.

 

속된 말로 오빠가 살 팔자였으면 예수님이 자기 집에 계시지 않아도 살려주었을 것이고 죽을 팔자면 자기 집에 계셨어도 죽었을 겁니다.

이게 묵시적으로 아는 예수님 관이에요.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배웠어도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왜? 우리 집에 안 왔느냐고 원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고 우시는 겁니다.

 

요 11:32-34=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자 그럼 예수님을 지금 우리 현장으로 초대해 봅시다.

한국교회로 초대해서 봅시다.

우리 삶에 현장으로 말이에요.

 

이 시대 교인들이 과연 마리아를 넘어 설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동일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관념으로 알았듯이 이 시대 교인들도 관념으로 알아요.

모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알아요.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시켜주는 것은 알아요.

재림하는 예수님은 말하는데 현재 예수님이 없어요.

 

그러니 신앙이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역사적인 예수에요.

시간적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중에 재림하는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도 나중에 죽어서 가는 천국만 알고 있어요.

현재 성령 안에서 누리는 천국이 없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도(道) 닦는 것처럼 되고 만 겁니다.

 

역사적인 예수는 지금 활동할 수가 없어요.

죽은 예수에요.

성경이라는 문자 속에 가두어져 있어요.

2천 년 전에 예수나 장차 오실 예수나 역사 속에 갇히면 능력 없기는 매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전혀 현재 내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병 하나 이기지 못하고 가난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병을 고쳐주고 가난을 면케 해 준다는 말이 아니에요.

신앙은 이런 것을 초월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천국 안에 이미 들어가 사는 성도라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희비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곳이에요.

한마디로 먹고 마시는 가치관으로부터 초월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은 먹고 마시는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아요.

육신의 가치에 매여서 살아가요.

그러니 병들어도 죽겠다!

돈 없어도 죽겠다!

조그마한 어려움만 생겨도 죽겠다고 아우성인 겁니다.

 

육신의 희비에 따라 죽네! 사네! 하는 겁니다.

죽어도 주와 함께 있고 살아도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이 안 믿어지니까 환경에 따라 울다가 웃다가 희비하는 겁니다.

 

이런 신앙을 지식이고 관념이라고 해요.

천국이니 부활이니 라는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도 그건 지식일 뿐이에요.

그러니 현실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가 부활이고 영생이라는 것을 마리아처럼 먼 훗날에 일어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런 예수는 죽은 예수에요.

 

그러니 현실에선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 방식으로 사는 겁니다.

악착같이 세상 방법으로 사는 겁니다.

믿음은 교회에서만 필요해요.

예수도 교회 안에서만 있어요.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세상에서의 망함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울고 계시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두 번 우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어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장차 멸망할 것을 보고 우신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영원하다고 믿고 있어요.

성전만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존속하는 한 여호와는 성전에 계신다고 믿는 겁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해방이 되어서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케 한 것도 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라는 겁니다.

성전 있음은 곧 여호와가 함께 하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만큼은 고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런 성전은 예수님이 건들었으니 죽을 만도 하지요.

 

이름이란? 인격이지요.

사람에게만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 라고 찬양을 합니다.

 

이 말은 곧 성전의 실체가 오셨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찬양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성전임을 몰라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실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붙잡고 있는 성전은 역사 속에 있는 성전이에요.

역사에 속한 성전은 묵시에 속한 성전이 오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으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실체이니 보이는 성전은 허물어져야 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전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시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보시고 우는 겁니다.

가짜 성전을 진짜라고 믿고 있으니 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청소를 하시고 이곳은 성전이 아니고 장사하는 집이고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알려준 겁니다.

예수님 눈에는 성전이 아니고 강도들만 가득한 겁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이 고혈(膏血)을 짜 먹으면서 희희낙락했어요.

잠시 후에 자신들에게 임할 진노를 모른채 웃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면 지상에 성전이 아닌 묵시에 속한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러면 지금 보이는 성전은 완전히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후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70만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불태워버렸어요.

이 때 유대인들이 저항하다가 죽은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어요.

제사장들은 성전을 지킬 것이라고 땅 바닥에 드러누웠어요.

그러자 로마 기병들이 마차를 이끌고 그들 위로 달려가 예루살렘에 피가 시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는 가짜 성전을 붙잡고 있는 자들의 말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육적 신자들은 성전을 붙잡고 있어요.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에 속한 모든 것들을 폐하셨다는 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곤 성령을 성도들 심령 속에 부어 주셨어요.

성령이 성도를 심령 속에 묵시적인 성전을 세워준 겁니다.

묵시적인 성전이 세워졌으니 역사에 속한 성전은 사라져야 하지요.

그래서 육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겁니다.

 

지금도 묵시적 성전이 세워진 성도는 보이는 성전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건물에 매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건 성전이 아니고 가짜이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이 시대 목사들이 그 무너진 성전을 세우고 있어요.

그리곤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어요.

 

이 시대 교회는 초림 때 예루살렘 성전과 똑 같아요.

그 때도 장사꾼들이 우글거렸듯이 지금도 먹고 살기 위해서 교인들이 모였어요.

서로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있어요.

장사를 하려면 큰 교회에 다녀야해요.

다 알음 알음으로 하잖아요.

 

장사가 잘 되어야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하지요.

목사들은 교인들의 장사를 통해서 자기 배를 채우고 있는 겁니다.

헌금을 받아 챙기잖아요.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히히거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 웃음을 울음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웃을 일이 아니고 울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거대한 쓰마니가 덮쳐오고 있는데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아요.

 

약 5:1-5=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야고보서는 이 시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씀이에요.

교회들이 돈에 취하여 있어요.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면서 자신들이 도살당할 날을 모르고 흥청망청하고 놀아요.

마치 어리석은 부자처럼 심판을 생각지 않고 연락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부요하여야 하는데 돈으로 부요하고 있어요.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판단하고 있어요.

교회나 교인들이나 땅에 가치가 지배해요.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세운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성도들 심령 속에 성전을 세웠어요.

그러므로 심령에 성전이 세워진 성도는 보이는 교회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겁니다.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생각지 않아요.

 

보이는 교회는 다 무너질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는 너희들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한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울 처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가 어떤 영역에 있는지 알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너희들이 지금 죽음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웁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하여서 알려줍니다.

누가 울어야 하는지!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섭니다.

 

요 11:39-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모든 군중들이 숨 죽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얼 하려고 하는가?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난 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얼른 앞을 가로 막습니다.

마르다 입장에선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무리수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막아서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예수님 오빠가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이 썩은 냄새가 안 납니까.

주님의 정성은 고맙지만 이건 아닙니다.

그러니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제발 비켜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르다야 네가 내 말을 믿느냐!

내가 부활이고 생명인 걸 믿느냐!

예!

그럼요!

믿지요!

믿고 말고요!

 

그러나 이건 아닙니다.

그러니 이러지 마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아니 나를 믿는다면서!

 

그럼 믿지요.

나중에 세상이 끝날 때 오라비도 부활 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보는 눈들이 얼마입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어요.

 

이에 예수님이 마르다야 네가 내 말을 믿으면 지금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시면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지금까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늘 그래 왔듯이 여기 모인 무리들에게 내가 누구이며 내가 왜? 왔는지!

아버지가 나를 왜? 이 세상에 보냈는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곤 소리칩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무덤 속에서 나사로가 성큼 성큼 나옵니다.

어휴~ 제가 흥분되고 등골에 짜릿하게 전율이 흐르네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온 몸이 베로 감싸인 채로 강시처럼 통통 튀어 나옵니다.

나오면서 왜요!

왜? 잘 쉬고 있는 사람을 부르고 난리입니까?

예수님! 왜 그러는데요!

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주변에 섰던 사람들이 기겁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눈으로 분명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만 땅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맙니다.

아이구!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아니! 예수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게 내가 뭐라고 하더냐!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지 않더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더냐!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나사로를 잠시 사용한 거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하여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불신을 고발한 겁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허상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있어 오빠는 자신들의 불신을 고발하는 자로 서 있는 겁니다.

오빠를 볼 때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을 고발당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라면 나사로는 화액 전에 제대하고 침상에서 편히 쉬고 있는데 졸지에 불려 나왔어요.

마치 군대 제대하고 쉬고 있는데 다시 영장이 나와서 두 번 군대 생활하게 된 것과 같아요.

인간적으로 보면 나사로는 인간 중에서 제일 재수 없는 사람인 겁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에게 엄청 욕을 먹었고 나사로는 웃음을 잃고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나사로의 이야기가 왜? 지금 우리에게 들려집니까?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먼 훗날에 이루어질 부활과 장차 죽어서 가는 천국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현재 내가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내가 부활 안에 영생 안에 들어와 있음을 몰라요.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성도는 부활의 칩을 내장하고 있다고 했어요.

마치 컴퓨터에 재생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 있듯이 부활의 영이 내장되어 있어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미 부활의 영역 안에 있는 겁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아요.

 

사도바울은 삼층 천에 올라가서 두 사람을 보았어요.

하나는 역사 안에 가두어져 있는 자신이고 하나는 묵시에 있는 자신을 보았어요.

묵시 안에 있는 자신은 삼층 천에서 예수님하고 놀고 있어요.

 

바울은 묵시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어떤 환경에서든지 두렵지가 않지요.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지고 묵시적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묵시적 예수를 알게 해 준 겁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예수 관을 깨트리고 묵시적인 예수님을 알려주신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뛰어 넘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이 시대 대다수의 교인들은 지나간 예수를 믿고 있어요.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역사 속에 지나간 한 인물로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보아요.

그러니 성경속의 사건들은 지나간 일들로 치부해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 십자가 해도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에요.

지금 내가 그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야 하는데 없어요.

십자가를 감상하지 내가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 세상이 커 보이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현재화시켜요.

날마다 세상에 대하여 정과 욕심을 죽여요.

넌 이미 죽은 자라고 합니다.

죽은 자로서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허상임을 알게 됩니다.

 

나사로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이미 부활의 영역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성도 안에서 나사로 사건을 일으킵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이라는 무덤에서 불러냅니다.

육신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메고 있던 끈들을 다 풀어버립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끈들을 다 풀어버립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알려 줍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이란? 힘이에요.

 

믿음으로 사세요.

그러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예수님을 문자 속에 가두지 마세요.

문자 바깥으로 끄집어내세요.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세요.

 

예수님의 일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해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 시간을 일으킵니다.

시대와 환경과 사람만 바뀔 뿐이지 그 내용은 동일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엊그제 전라도 여수에 성경공부를 하고 왔어요.

성경 공부를 마치고 나니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들은 지금 저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마치 과거 바울을 통하여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던 사람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란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맞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현재라고 했지요.

성경에 내용을 지금 현재 사건화 시킨다고 했어요.

 

12제자들이 각 지역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하였듯이 지금도 12사도와 같은 종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어요.

12제자들과 같은 그 정신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러면 12제자들을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듯이 지금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제가 여수에 계신 장로님과 권사님을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준 겁니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던 사람들을 갑자기 인터넷이란 가상공간(묵시)에서 복음으로 만나게 하시더니 실제(역사)로 만나는 사건을 일으키셨어요.

묵시적인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 겁니다.

복음이 묵시에 속한 것이므로 묵시적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문자 속에 가두어져 있던 예수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던 일이!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어요.

 

오늘도 익산에 계시는 어떤 분이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제안이 들어왔어요.

여기저기서 복음으로 인하여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서 전화를 주세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살아서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알아서 장기판에 말들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삼층 천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묵시 속에 있는 일들을 역사 속에서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는 동일해요.

성도는 모두가 묵시에 속하였어요.

그런데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묵시에 속한 사건들을 우리의 삶속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게 하십니다.

복음 안에서 부활의 사건들을 일으키고 계세요.

나사로만 부활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부활했어요.

 

세상이라는 무덤 문을 열고 나오세요.

그리고 당당하게 사세요.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 속에 가두어 두지 마시고 여러분의 삶 속으로 끄집어내십시오.

여러분도 성경 속에 가두어 있지 말고 나오십시오.

성경의 이야기가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게 하세요.

주님의 은혜가 지금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사로였습니다. 이제 부활의 세계로 불러 주셨사오니 나를 감고 있는 모든 끈들을 풀어 던지고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의롭다 하신 이가 주님이시니 그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율법으로부터도 자유자로 살게 하시고 세상으로부터도 자유자로 살게 하옵소서. 신앙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성경 속에 가두어진 예수가 아니라 성경 바깥에 나와서 우리의 삶속에서 동거동락하는 예수를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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