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52강. 어린 양의 신부에게 입혀 주신 옷 (계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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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2021. 10. 10.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52강. 어린 양의 신부에게 입혀 주신 옷 (계 19:1-10)

-.정낙원 목사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천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원수를 18장에서 음녀의 멸망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음녀가 멸망을 당하자 하늘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준비에 분주합니다.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를 입혀서 어린 양을 맞이할 수 있도록 단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땅의 상고들과 음녀의 세력들은 이 땅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양의 신부들인 하늘에 속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음녀의 세력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당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애곡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으로 전세가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면서 애곡하던 성도들은 찬송하고 춤을 추지만,

예수로 배불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노래를 부르던 자들은 애곡을 하게 됩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음녀와 땅의 상고들은 부자처럼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이 땅이 영원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멸망이 홀연히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자 거지 나사로와 같이 이 땅에서 버림당하고 산 자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날이 곧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만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 날이 가까이 왔음을 징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세(末世) 중에서도 지말(之末)이에요.

그만큼 역사의 종말이 코 앞으로 다가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만물이 이를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구석 구석 타락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타락하였고,

지구도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몸살을 하면서 망가질 대로 다 망가졌다고 신음하고 있어요.

온전한 곳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천기를 분별하듯이 시대의 징조를 보라고 말입니다.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 시대의 징조가 담겨져 있어요.

이 시대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에요.

이것이 생명 경시 풍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세의 징조에요.



하나님께서 노아의 때에도 인간 지음을 한탄하셨듯이,

지금도 인간 지음을 한탄 할 정도로 인간성이 상실이 되어 버렸어요.

짐승들처럼 자기 입에 떡을 넣고자 남의 입에 떡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징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자기 신부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들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아들의 신부 감을 이미 정해놓았습니다.

이걸 예정(豫定)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신부들을 찾아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38-44=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자기백성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땅에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어린 양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부들에게 하늘에 생명을 주어서 하늘로 데리고 가시고자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므로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립니다.



우리가 자기 아버지도 아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느냐?

정신병자 같은 소리라고 일축하고는 서로 수군거리면서 힐난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수군거리고 떠나는 것은 곧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 중에서 구원을 받을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자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누구를 예수에게 이끄시는가 하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는 신부들만 이끄십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어야지만 됩니다.

이것은 성도의 구원이 이러한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을 봅시다.



창 2:21-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갈빗대 하나를 취하십니다.

그리곤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십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아담 속에서 나온 것이 됩니다.

그리고는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십니다.

아담은 하나님 손에 이끌려서 온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이걸 혼인이라고 합니다.



혼인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하여 분리가 되어서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냈다가,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혼인 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이걸 창세전 언약으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여자가 나온 것과 같습니다.



아담의 갈빗대에서 여자가 나왔습니다.

“갈빗대”를 히브리어로 “쩨라” 라고 하는데, 이는 “옆구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여자를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이 옆구리에 피를 흘리시고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하와가 아담의 신부이듯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성도가 예수님의 신부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였듯이, 예수님과 성도들도 하나입니다.



구원이란? 자기가 있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와가 본래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담 안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나왔습니다.

성도의 원래 자리는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에서 성도를 빼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성도의 구원도 하나님이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빼냈으니 하나님이 제 자리로 찾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라도 나에게 올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혼인 속에는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의 신부는 아담 속에서 나온 여자라야 합니다.

이는 아담의 희생으로 낳아진 자라는 뜻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시고 자기 신부들을 낳으신 것입니다.



신부들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흔적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 흘리심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신부들은 어린 양의 피로서 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봅시다.



계 7:9-17=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환란의 바람을 불기 전에 천사들을 시켜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에게 표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이스라엘의 12 지파 속에서 각각 12000명씩 인을 치는데, 도합 인 맞은 숫자가 144000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지파 속에서 12000명씩 인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각 지파 중에서 선택을 입은 자들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각 지파 모두가 인을 맞은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지파 속에 인 맞을 자와 인 맞지 못할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걸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말하였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유대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육적 유대인 속에 영적 유대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 교회 속에서 12제자들을 부르신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담의 아들 속에서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었고,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었고,

이삭의 집안 속에서도 육에 속한 자가 있었고 영에 속한 자가 있었고,

야곱의 집안 속에서도 육에 속한 자가 있었고 영에 속한 자가 있었듯이,

이스라엘 속에서도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영에 속한 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에게로 이끌어 주는 자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온 세계를 축약하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셨습니다.

천하 만민 속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지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 맞은 자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자” 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원이 천하각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예표적인 것으로서 그림자이고 신약이 실상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치는 일은 육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온 세계에 흩어진 교회 안에서 영적 성도들에게 인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8절까지는 인치는 장면입니다.

이 때는 환란이 오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큰 환란 전에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인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에 온 세상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을 일으키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의 피로 인을 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진짜 출애굽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인 치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7장을 봅시다.

7장 1절에서 8절까지 인치는 일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난 후 인을 맞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9절 이후부터의 내용입니다.



9절에 “이 일 후에” 라고 하지요.

이 말은 144000명의 이마에 인을 친 후에 그 뜻입니다.

144000명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9절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들 속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가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들이 손에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서 어린 양의 피로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찬양합니다.

장로중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려 줍니다.



이들은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하게 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장막을 칩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한 집에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 집에 산다는 것은 곧 부부(夫婦)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세토록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면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이들의 목자가 되어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즉 어린 양이 이들의 남편이 되어서 영원히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 받은 것을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어린 양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흰 옷을 입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뭔가요?

음녀가 멸망당하자 천사들이 하늘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런데 그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우리는 행실 그러면 우리가 뭔가 행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이게 죄인들의 인식론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착각입니다.

잘 보세요.



흰 옷을 우리가 입었는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입혀주셨는가요?

하나님이 입혀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의 행실입니까?

하나님의 행실입니까?

흰 옷을 우리가 입었으면 우리의 행실이 맞는데,

알다시피 흰 옷은 하나님이 입혀 주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행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셨는데,

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할까요?

이는 성도들만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간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또 비밀입니다.

오늘은 이 비밀을 탐사해 가는 것이니 잘 따라 오시길 바랍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흔적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흔적이란?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날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게 한 것이 이스라엘이 한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바로 흰 옷이에요.

그래서 출애굽 한 백성들이 여호와를 찬양한 것입니다.

이건 종말에 일어날 예표적 사건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천상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 성도가 지켜야 하는 신앙은 자신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지키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내가 거룩하게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를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인 것입니다.



성경은 시작과 끝이 옷 입는 이야기에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이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

가죽옷이 죄의 수치를 가려주게 되었습니다.

이러면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지켜야 하는 것은 가죽 옷을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죽 옷을 벗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가죽 옷을 벗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흰 옷을 입혀주실까요?

이는 종말의 교회들이 옷을 벗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녀가 무슨 짓을 했나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게 된 것을 인간의 행위로 다 가려버렸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으로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리게 하였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를 발가벗음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종말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발가벗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 스스로가 할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대신 믿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확 벗겨 버리시고 가죽 옷을 입혀 주신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가죽 옷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피와 땀이 담겨져 있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자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의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건 인간들 스스로가 버릴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의 의로 살기 보다는 우리 의로 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고자 하지 않고 우리가 만든 옷을 입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는 우리가 한 일에 의미를 두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쉬울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쉬울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쉬워요.

우리에게 “너 예수 믿을래! 말씀대로 살래!” 라고 하면 우리는 말씀대로 살래! 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말씀대로 사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하지요.

우리가 그래요.

믿음보다 행함이 가까워요.



왜 종말의 교회가 뱀의 말에 미혹당합니까?

뱀의 말이 인간들의 이성에 맞기 때문입니다.

뱀의 말은 그럴싸해요.

인간의 이성에 맞아 떨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벗고 인간들이 만든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예수님의 초림 때와 똑 같습니다.

영적 상태는 동일해요.

예수님 초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대인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나요?

율법 지킴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입혀 주신 옷은 긍휼의 옷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이 되어서 돌아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긍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초림 당시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율법 지킴이라는 자랑과 자기 의로 가득했습니다.

유대교 신앙을 대표하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이 만든 옷인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의 의를 찢어버리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새로운 새 언약이라는 은혜와 용서와 긍휼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생겨난 신약의 새 언약 안에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이 입혀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의 옷을 입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안에는 사람 간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만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도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나도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차별이 없습니다.

이를 형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뱀이 교회 안에서 인본주의 사상을 심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바울이 다녀간 곳에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가만히 들어가서 바울이 전한 복음에 율법을 섞는 일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게 갈라디안 신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갈라디안 신앙은 믿음에다가 율법 지킴을 섞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구원은 예수 믿음으로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하고 의로워지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인간의 이성에 딱 맞아요.

믿음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말이 꿀처럼 달콤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가치를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말은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것과 같아요.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가지고 높은 자들이 되었어요.

상좌에 앉아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고 탄핵했어요.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 지킴은 힘이었고 권세였습니다.

너나 나나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이게 불법이고 불의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가지고 차별을 만들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율법 지킨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불의한 자가 되고 말아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은혜와 긍휼의 율법으로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정신을 훼손하였어요.

예수님은 율법을 정의하기를 사랑이라고 하였어요.

사도 바울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어요.

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가요?

이는 그들이 받은 율법이 긍휼과 용서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어떻게 주어졌으며, 왜 주어졌는지를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민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가는 은혜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체가 은혜의 민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은혜를 알게 하려고 법이 지배하는 애굽 땅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전 언약으로 생겨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애굽과 같아요.

애굽은 법이 지배하는 나라에요.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나라에요.

이걸 짐승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법으로 정죄하고 죽이는 나라에서 모두가 차별이 없는 나라로 빼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나 광야로 나오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에게는 잘난 자도 없고 못난 자도 없어요.

광야에서는 너와 나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1 세대들에게는 여전히 애굽에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죽음 아래 가두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받은 율법은 법이에요.

어기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요.



처음 돌 판은 쌍무 언약으로서 어기게 되면 법적 책임을 묻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처음 받은 돌 판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3천명이 죽임당하고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대로 3천명을 죽이자 모세가 중간에 서서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서 하나님의 법 집행을 멈추게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다시 올라오게 하여서 동일한 내용의 돌 판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 돌 판은 법이었지만, 두 번째 돌 판은 은혜입니다.

두 번째 받은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긍휼의 돌 판이에요.

은혜와 용서가 담겨져 있는 돌 판이에요.



이스라엘을 이 두 번째 돌 판을 앞세우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어있어요.

가나안에서는 두 번째 돌 판의 긍휼과 용서의 의미를 모르면 살 수가 없어요.

예수님 초림 때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이 바로 두 번째 돌 판의 율법이에요.

용서와 긍휼이 담겨져 있는 은혜의 율법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살리는 은혜와 긍휼과 용서의 율법을 가지고,

도리어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은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율법 지킴을 의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거라사 광인처럼 발가벗고 무덤가에 있는 귀신들린 자들의 모습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은혜의 율법을 법으로 사용하여서 스스로 발가벗김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정화 작업을 통해서 그들의 율법 신앙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새로운 언약을 맺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셍겨났어요.

새 언약은 은혜와 긍휼의 언약이에요.

예수 안에서는 차별이 없어요.

이렇게 차별 없이 은혜와 긍휼로 살아갈 때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되고 옳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들이 다시 구약 교회와 같아지고 만 것입니다.



이를 라오디게아 교회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음녀의 모습이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를 상징하므로 이 시대 교회가 바로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세상적인 조건으로 인간들 간에 차별이 생기기 시작 한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잘난 자 못난 자로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교회 안에 은혜와 긍휼이 사라져 버렸어요.

세속적 가치가 교회 안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법이 지배하기 시작 하였어요.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벗어 버리고 인간들이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계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가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무엇이 부자란 말이고,

무엇이 부요하다는 말이고,

무엇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부자다, 부요하다, 부족하지 않다, 라는 말은 육적인 것에 통용되는 말입니다.

영적인 것은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영적인 것은 우리 힘으로 얻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다, 부요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적인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돈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주 교만하지요.

교만으로 가득하지요.

자기 의로 가득하지요.



이 시대 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돈을 믿어요.

권력을 믿어요.

세상 힘을 믿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마다 돈 많고 힘이 있는 사람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크기를 자랑하고 교인들 숫자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오면 목사들이 버선발로 나아가서 마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이 나온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힘을 삼지 않고 세상의 힘을 삼고 있다는 증거에요.

교회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복음이에요.



교회는 하늘나라 소속이에요.

교인들에게 땅에 가치가 아니라 하늘에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땅에 가치를 심어주는 경쟁을 벌리고 있어요.

강단에서 기복주의와 이 세상에서 출세하여야 한다는 고지론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가난 한 자는 믿음 없음으로 치부가 되고 비주류로 전락하여서 발언권이 사라지고, 부자들은 믿음 좋음으로 인정받고 주류가 되어서 발언권이 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벗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가 되는 성도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히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의 의를 붙잡도록 회개케 하는 일을 벌이신다는 뜻입니다.



스가랴 12장을 봅시다.



슥 12:1-14=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5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13:1-2=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다”고 하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종말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있어요.

부정적으로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면 원수들이 교회를 에워싸게 합니다.

적그리스도 음녀의 세력들이 교회를 타락케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인본주의자들이 교회의 강단을 장악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무거운 돌처럼 지켜주시겠다고 합니다.

일시적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 거짓 세력들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거짓이 이긴 것처럼 보일 때에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어서 큰 회개 운동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어떤 회개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어서 예수그리스를 바라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서 큰 회개 운동을 일으킨 것과 같습니다.

초림 때 오순절에 일어난 회개 운동은 구약 교회의 회개입니다.

이것은 이른 비와 같아요.

늦은 비가 남아 있어요.



늦은 비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부어주세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교회가 세워졌어요.

초대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안에서 서로 차별없이 세워졌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가 급속하게 세속화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마귀는 항상 교회를 타락케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어요.

세속화 되었어요.



하나님이 구약 교회에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른 비를 부어주셨듯이,

마지막 때 또 다시 종말의 신약 교회에 늦은 비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큰 회개 운동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늦은 비 성령인 은총과 간구의 영이 부어지면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인 인본주의 세속주의 사상에서 돌이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들의 귀를 열어서 들려지게 하시고 심령을 움직여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복음을 붙잡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가랴 12장은 초림과 재림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중 계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초림은 재림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종말에도 두 증인들이 굵을 베옷을 입고 교회 안에서 엘리야의 심정으로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들이 입은 흰 세마포 옷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에 옷입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이 부어지면 교회가 세속화 하여 인간의 의를 자랑하던 인본주의 사상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자랑하는 신본주의 신앙으로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이 때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정체가 드러나서 더 이상 사기를 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교인들을 미혹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을 음녀가 멸망하니까 땅의 상고들이 자기들이 탐하던 상품들이 사라져서 애통해 하고 통곡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대목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긍휼이고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흰 옷을 입혀주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 주어야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맘대로 안 되고,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우리 맘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면 믿어지고, 안 믿어지게 하시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이란?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간섭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 준 것을 가지고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시작을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성경의 시작과 끝이 옷 입는 이야기라는 것은 성경 전체가 옷 입는 이야기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옷을 입혀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입혀주는 옷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린 옷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 하실 때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말씀하셨습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는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들어가듯이,

천국 잔치에도 하나님이 입혀 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는 장자 우리가 참예할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말합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 잔체에 참석한 자들은 모두가 왕이 준비한 옷을 입고 참석을 합니다.

왕이 준비한 옷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입혀주는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주십니다.



그것이 성막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막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에게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8장을 봅시다.



출 28:1-5=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4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5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39-43=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드고 띠를 수 놓아 만들지니라 40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41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42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성막에 수종 드는 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러 올 때 입고 와야 하는 거룩한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거룩한 옷을 입혀서 만나겠다는 뜻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옷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을 입지 않고 나아오는 것을 죄로 규정하여서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은 자는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보내신 분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거룩해 집니다.

예수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을 예수로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그 옷은 참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흰 옷을 입혀 주신다고 합니까?

이는 흰 옷을 벗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옷을 벗었을까요?

자기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흰 옷을 벗고 자기 옷을 입고 있나요?

이는 교회 안에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교회를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녀를 뭐라고 하던가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봅시다.



계 18:1-5=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큰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이 왜 무너졌나요?

음행의 포도주 때문입니다.

큰 음녀가 주는 음행의 포도주를 작은 음녀인 땅의 왕들과 땅의 상고들이 마시고 취하여 신앙을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온 교회가 미혹당한 것입니다.

이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 속에 누가 있나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음녀에게서 나오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빼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고모라에 있는 롯을 빼내 주셨듯이 빼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음행의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포도주에 뱀의 말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썩어버려요.

포도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피 뿌림의 복음이고,

물은 인간의 행함도 의롭다고 하는 마귀의 말이에요.



음행의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인본주의 사고가 팽배하여서 인간의 의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말에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신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어서 인본주의 신앙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혀 주십니다.



스가랴 12장을 다시 봅시다.



슥 12:1-9=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5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말씀은 경고인데 실제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본문 속에는 종말의 교회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가랴 12장은 마치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는 것과 같아요.

같은 의미에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음녀가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모습과 같아요.

교회의 타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로 적그리스도 세력들을 불러들인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에 사단의 세력들을 끌어 들였을까요?

이는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천하만국을 예루살렘을 치려고 불러 모은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요한계시록 18장의 음녀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건 계시록 16장에서 귀신의 영들이 모든 천하의 임금들을 아마겟돈으로 불러 모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불러 모으느냐 하면 큰 날에 전쟁을 하고자 함이에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나요?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 발가벗고 다니지 말라고 하지요.

왜 귀신의 영들이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천하의 임금을 아마겟돈으로 모으는데 성도들에게는 옷을 지켜서 발가벗고 다니지 말라고 할까요?

이는 더러운 영이 옷을 벗기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의 영이 무슨 옷을 벗기는 일을 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벗기는 일을 해요.

다른 말로 하나님을 떠나게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으로 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마겟돈 전쟁은 구약의 배경을 하고 있어요.

그럼 구약 시대 아마겟돈에서 어떤 전쟁이 일어났는지 알아야겠지요.



요한계시록 16장을 봅시다.



계 16:12-16=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江)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靈)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靈)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靈)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귀신의 영들이 천하의 임금들을 아마겟돈으로 불러 모으지요.

왜 불러 모으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전쟁을 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거짓 선지자들 초청하여서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몽땅 죽인 것과 같아요.



기손 시내가 아마겟돈이에요.

“아마겟돈” 이라는 말은 “하르 므깃도” 라고 하는데,

“하르”는 “작은 산”을 의미하는데 이는 “므깃도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므깃도 골짜기에는 늘 전쟁을 하였어요.

그래서 므깃도 골짜기를 전쟁의 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곳이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거짓 선지자 850명을 죽인 기손 시내에요.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에 물이 흐르면 기손 시내라고 하고,

가뭄이 드는 건기(乾期)에 물이 마르면 므깃도 골짜기라고 해요.

하나님이 더러운 영으로 천하 임금들을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아마겟돈으로 모으지요.

이건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은 것과 같아요.



갈멜산에서 뭘 했나요?

제사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시험하는 일을 하였지요.

이게 종말의 타락한 음녀 교회를 말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그 돌을 들고자 하는 자는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들은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종말에 하나님의 진노의 전쟁은 교회에서 일어나요

이렇게 되면 타락한 교회가 아마겟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마겟돈 전쟁의 성격을 잠시 알아봅시다.



요한계시록 9장을 봅시다.



계 9:14-15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하나님께서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만 만이나 되는 마병대가 모입니다.

이들이 누구인지를 16장에서 설명해 주는데 동방에서 오는 왕들입니다.



계 16:12-16=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江)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유브라데 강이 마르자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지요.

동방에서 오는 왕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의미를 알면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 저편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과 앗수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들입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쪽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놈들이 종말에는 교회를 타락케 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교회를 타락케 하는 세력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7장에서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가 앉은 곳을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교회가 바벨론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론적 입장에서는 동방의 왕들은 술객들을 말해요.

엘리야 시대로 말하면 바알 선지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거짓 목사들을 말해요.

그래서 큰 음녀에게 빌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땅의 음녀들을 땅의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거짓 선지자들을 동원해서 교회를 타락케 하였어요.

어떻게 타락케 하는가 하면,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하여서 타락케 하였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초에 에덴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최초의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어요.

에덴동산은 교회를 상징해요.



뱀이 어떻게 여자에게 접근을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가지게 하지요.

뱀은 하나님의 말씀에 여자가 자기 생각을 갖게 하여서 선악과를 따 먹게 하였습니다.

이건 영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뱀의 말을 섞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걸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이면 홍수가 일어납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여 홍수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육적인 홍수는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여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지만,

영적인 홍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은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의 섞임과 같습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하셨지요.

이 때 집을 어떻게 심판합니까?

홍수로 하지요.



홍수란? 두 물이 합하는 것입니다.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는 겁니다.

궁창 윗물은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고,

궁창 아랫물은 뱀의 말을 상징해요.

이 둘이 합하면 신앙의 집들이 무너지는 홍수가 일어나요.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고,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아요.

모래는 인간을 의미하고,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해요.



집을 의(義)로 이해하여 보세요.

자기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의는 어떤 것이고, 무너지지 않는 의는 어떤 것인가요?

율법의 의는 무너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는 무너지지 않지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인간들이 종교성으로 세운 교회와 신앙을 말하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지은 교회와 그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 초림 때 마귀가 어떤 의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나요?

율법의 의이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들고 나왔잖아요.

예수님은 이렇게 율법 지킴이라는 의를 들고 나온 자들을 뭐라고 하던가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신앙의 싸움은 의 싸움이에요.

인간의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의를 다른 말로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란? 섞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룩을 생명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거룩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려고 삶 속에 기준을 두셨습니다.

두 가지 직조로 된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고,

밭에 두 가지 종자의 씨도 뿌리지 말라고 하셨고,

이방인과도 혼인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인간의 의가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종말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전쟁입니다.

마귀는 섞으려고 하고, 하나님은 섞지 못하게 하십니다.

누가 섞게 하느냐?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고 하지요.

그러자 그 길로 동방의 왕들이 옵니다.

강이 마르니까 동방의 왕들이 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동방의 왕들은 적그리스도 세력이에요.

교회 안에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들어 와서 사단의 회를 만들어 버렸어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강이란? 이쪽과 저쪽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강을 두고서 서로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고 합니다.

강이 마르자 강 저쪽에 있던 동방의 군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민족이 하나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음녀에요.



아마겟돈 전쟁을 엘리야의 갈멜산 전쟁으로 보여주었어요.

이 전쟁은 신앙의 전쟁이에요.

누가 섬기는 신이 참 하나님인지를 드러내는 전쟁이에요.

이 전쟁은 종말의 영적 전쟁을 예표 하는 전쟁이기도 해요.



두 증인들이 엘리야의 심정을 사역을 하지요.

이는 종말의 교회의 영적 상태가 엘리야 시대와 같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그러지요.

바알이 하나님이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냐!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내기를 하자고 하지요.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하는 말 속에는 그 당시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요.

이건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바알이 어떤 신인가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이에요.

이 땅에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 땅에 복을 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을 절간의 중들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목사들이 바알 선지자에요.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이 땅에 복을 주는 신으로 가르쳐요.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바로 개구리 영이 하는 말이에요.

이들은 귀신의 영에 사로잡혀 있어요.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림으로서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그러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너희를 거짓 것으로 가르친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다 죽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동안 비가 없어서 가뭄으로 타 죽어가던 초목들이 생명을 얻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백성 들 속에 있는 거짓 신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자 가물어 메마른 심령에 은혜의 단비가 부어진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엘리야의 비 오는 사건을 기억하고서 다시 스가랴를 봅시다.

그럼 스가랴 12장의 이야기가 이해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천하의 군대를 모으지요.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가 망하지 않게 보호해 준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어요.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타락하여 징계는 당할지라도 절대로 망하지 않아요.

마치 엘리야 시대에 다 바알을 쫓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7천명을 남겨두셨어요.

암튼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우겨쌉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우겨싼 놈들을 미치게 만들어요.

스스로 싸우게 만들어 버려요.

이러할 때 하나님이 교회 안에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스가랴를 다시 보세요.



슥 12:10-13:2=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원수들로부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때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에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주시지요.

이는 성령으로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키겠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야지만 가능해요.



1절에 뭐라고 했나요?



슥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어떤 여호와라고 하는가요?

하늘을 펴시고 땅에 터를 세우시고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여호와라고 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주니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납니까?



10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본다고 하지요.

그 찌른 자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동안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고 살았단 말입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이 임하고 나니까 예수그리스도 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동안 자기 의에 취하여 있던 것에서 예수그리스도 의 안으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모습이 뭔가요?

그 찌른바 예수를 바라보게 된다고 하지요.

이는 십자가로 돌아가는 복음 운동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들이 입는 옷은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가죽 옷이에요.

교회 안에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많지 않아요.

어느 시대이고 지극히 미미했어요.

이는 구원의 수가 적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회를 보세요.



계 3:4-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면 종교개혁 시대를 말해요.

이 때 누가 큰 음녀인 로마 카토릭을 무너뜨리는가요?작은 무리들인 종교 개혁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이들을 일컬어 몇 명이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 옷을 입고 있다고 하셨어요.



이는 인본주의 인간의 의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던 중세 암흑시대 교회에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종들을 말해요.

이들이 믿음을 지키고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종말에도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어서 예수그리스로의 십자가 복음을 붙잡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는 각 족속이 각각 회개를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이 부어지면 성도들의 눈이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게 됩니다.

그 동안 음녀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도 두 증인들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타락된 교회로 나아갑니다.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한다는 것은 회개 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마음을 닫아 듣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니까 듣게 되고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의 교회가 엘리야의 때처럼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 신앙을 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도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와서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일을 했어요.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가 바로 바알 종교로 변질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매매하는 장소가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므로 헐어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또 다시 교회가 구약 교회처럼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교회가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와 같아졌어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 바알 신전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종말에 두 증인들이 엘리야와 세례 요한처럼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의아해 하는 것은 왜 교회가 종말이 되면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느냐? 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교회는 모두가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을 하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법으로 변질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사단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변질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구원을 받자 말자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죄악된 세상에 그대로 두실까요?

죄 아래서 난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에요.

우리는 흔히 성령이 성도 안에 계시면 죄를 안 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게 우리의 착각인 것입니다.



성령이 죄인의 몸에 오셨다는 것은 죄를 안 짓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를 남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도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끝까지 성도의 구원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를 긍휼의 자리에 머물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걸 호세아의 고멜을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1장을 봅시다.



호 1:1-2=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어떤 말씀인가 하면 음란한 여자인 고멜에게 장가를 들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인인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을 말합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고멜은 음란한 여자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창기 인줄 알고 장가를 들었습니다.

왜 거룩한 자를 상징하는 호세아가 창기인 고멜에게 장가를 들었나요?

이는 긍휼 때문입니다.



“호세아” 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기인 이스라엘이 거룩한 하나님과 결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비울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호세아는 긍휼의 사람입니다.



그 긍휼을 베풀 대상이 바로 창기인 고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가 창기인 고멜에게 장가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기에게 긍휼을 주려고 장가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고멜이 결혼을 하고서도 창기 노릇을 그만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란함이 고멜의 본성이고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멜을 음란한 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란한”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제누님” 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성이 음탕한 기질을 가진 여자” 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매춘부(賣春婦)라는 뜻입니다.

이건 죄인을 말해요.



그래서 고멜이 아이를 낳는데 모두가 저주의 자식들을 낳는 것입니다.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이스르엘” 이라고 짓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로루하마” 라고 짓습니다.

“로루하마” 라는 말은, “은총을 입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로암미”라고 합니다.

“로암미”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고멜이 비록 호세아의 사랑을 입는다 할지라도 그 죄성을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식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신앙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끝까지 긍휼로 대합니다.



“이스르엘”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흩으신다” 라는 부정적인 의미와,

“하나님께서 심으신다” 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 버려진 것 같은 자들 속에서 하나님이 한 두목을 일으켜서 이스르엘의 날을 크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 두목은 메시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종말이 되면 한 두목이 나타나서 부정적인 이스르엘을 긍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심으셔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드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교회가 회개할 것을 말합니다.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어떻게 본 남편에게 돌아가게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2장을 봅시다.



호 2:6-23=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13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고멜이 틈만 나면 외간 남자를 만나니까 하나님이 가시와 담을 막아 버립니다.

그리고 고멜의 수중에 있던 돈을 회수해 가십니다.

고멜이 돈이 떨어지니까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망하게 하고서 남편을 찾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이를 일컬어서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을 삼는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을 삼을 때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주시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남편이 되어 준다고 하나요?



19-20절을 보세요.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를 든다”고 하지요.

“내가 네게 장가들어서 영원히 산다”고 하지요.



고멜이 시집을 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고멜에게 장가를 드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의 주체가 여호와가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장가든다고 합니까?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든다고 하지요.

이는 긍휼이 여겨서 구원을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장가들어” 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라스”라고 하는데 이는 “재혼(再婚)”을 의미해요.

이는 단순한 재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을 덮어주고 새롭게 시작을 한다는 뜻이에요.

그 동안의 행음을 다 덮어주어서 불결한 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고 정결한 처녀로 인정하여서 새로운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우리의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지요.



과거 시제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현재 시제로 “현재 구원을 이루라”고 하고,

미래 시제로 “장차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나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가 항상 우리 몸에 적용이 되어야 하겠지요.

긍휼히 여겨서 장가를 든다고 하였으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항상 있어야 하겠지요.

처음은 긍휼이 여기고 나중은 법으로 대하는 그런 구원은 없어요.

처음 긍휼이 여겨서 구원을 했으면 끝까지 긍휼히 여겨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해요.



그래서 여호와를 상징하는 호세아가 행음하는 고멜에게 다시 장가를 드는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장가를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고멜이 음란한 창기였을 때 긍휼히 여겨서 장가를 들었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고멜이 음행을 해요.

음행을 하면 이혼서를 써주고 내어 쫓아야 하는데 호세아는 그러지 않아요.

도리어 음행할 때마다 값을 주고 사온단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호세아의 본성이 긍휼이고 구원을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시와 담을 막아 놓고서 동일한 긍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호세아의 긍휼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면서 여인에게 하는 말이 내가 바로 긍휼의 여호와이기 때문에 너를 용서하고 장가를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가를 들 고 난 후에 고멜에게 그러는 겁니다.

“너 이제 내가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인줄 알겠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긍휼하심을 알리고자 음행하는 여인을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종말에도 타락한 교회에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어서 기어코 구원을 해 내고야 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여호와를 열 번이나 거역을 하여도 끝까지 긍휼로 인도하신 것과 같아요.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우리의 구원과 똑 같아요.

먼저 아버지가 신랑을 신부가 될 여자가 사는 집에 보내서 신부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고서 삽니다.

이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약혼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약혼과 동시에 사실혼으로 간주해요.

왜냐하면, 값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값을 주고 산 신부에게 자신의 물건을 빙폐물로 주고서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 그 때까지 정절을 지키고 잘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떠납니다.



신랑은 보통 2-3년 후에 신부를 찾으러 와요.

이 기간 동안 신부는 친정집에서 신랑 있는 여자로서 품행을 방정하게 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신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건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피 값을 주고 우리를 샀어요.

이건 약혼과 같아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보증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은사들로 단장을 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세상과 짝하지 말고 믿음에 정절을 지키면서 다시 오실 신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값 주고 사 놓고서는 데려가지 않고 나중에 다시 와서 데려가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곧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지금 약혼한 여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정절을 지키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말입니다.

신부가 사는 동네에는 건달들이 많이 있어요.

이 놈들이 호시탐탐 신부를 희롱하려고 해요.

이 때 마음이 연약한 신부들이 그들의 꾐에 넘어가 요즘 말로 나이트클럽에도 가면서 일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도에게 적용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을 한단 말이에요.

신자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죄를 짓고 사는 것과 같아요.

우린 각오를 하고 세상과 짝하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죽이면서 믿음을 지키고 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고 육신이 연약하여 곧 잘 넘어지게 되어요.



마귀가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있는 성도들만 골라서 미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40일을 주리신 예수님을 마귀가 찾아와서 떡과 세상의 부귀영화로 시험하던 것과 같이 거짓선지자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러한 시험에 늘 넘어져요.

이건 마치 고멜이 호세아에게 시집을 가고 난 후에도 행음을 일삼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바로 고멜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신랑이 오는 겁니다.

이 때의 모습을 열 처녀 비유에서 보면 다 졸며 잘새 라고 합니다.

신부가 졸며 자도 신랑은 정한 때에 옵니다.

그리고 신혼 방을 갖게 되어요.



이 때 신랑이 여자의 순결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침을 할 때 여자의 처녀성을 확인하고자 하얀 시트를 깔고서 관계를 하면 피를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신랑은 피 묻은 시트를 가지고 동네 어른들에게 가서 “이 여자는 정결합니다” 라고 공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에 여자가 신랑이 오기 전에 고멜처럼 바람을 피우게 되면 처녀성을 잃었기 때문에 잠자리를 해도 피가 흘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신랑은 얼른 자기 옆구리에 칼로 상처를 내서 흰 시트에 자기 피를 묻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허물을 자기 피를 흘려서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는 여자를 값을 주고 샀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지불한 값을 위해서 끝까지 여자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긍휼이에요.



로마서 5장을 봅시다.



롬 5:6-1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의 구원이 언제 주어졌는가요?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지요.

이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어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건 마치 호세아가 고멜이 음란한 여자인줄 알고 장가를 든 것과 같아요.



호세아가 왜 음란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나요?

긍휼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긍휼 그 자체에요.

그 긍휼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음란한 고멜인 것입니다.



정결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으면 긍휼이 빛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의 긍휼을 보이려고 음란한 고멜에게 장가를 든 것입니다.

호세아가 예수님이고 우리가 고멜이에요.



예수님은 우리가 음란할 때 구원을 해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고멜과 같이 우리의 죄성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잘라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구원을 했는데,

어떻게 조금 잘못한다고 해서 잘라내느냐 이겁니다.

결코 그럴 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자기 피로 대속하였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간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세요.



우리의 꼬라지가 이래도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자들이에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자기 피를 뿌려서 우리를 정결케 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하는 말이 이 말이에요.



9-10절을 보세요.



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화목이 되었는데,

“그럼 화목 된 자로서 더욱 더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신랑이 모자란 여자를 값을 주고 신부로 샀는데 신부가 잘못하였다고 해서 어떻게 쫓아 낼 수는 있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취소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긍휼로 구원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긍휼 자체에요.

그래서 우리가 비록 신부답게 살지 못한다고 하여도 구원을 취소시키지 못하고 끝까지 지켜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린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고멜처럼 죄를 지으면서 살아요.

그럼 예수님은 자기 옆구리에서 흘린 피를 근거로 해서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이고 구원은 항상 긍휼히 여김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를 입혀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입혀준다고 합니까?

우리가 벗고 있기 때문이에요.

벗고 있으니까 입혀 주는 것입니다.



무얼 벗고 있었나요?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벗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라는 신랑이 오기 전에 우리의 발가벗은 몸을 빛나고 흰 세마포를 입혀주는 것입니다.



빛나고 흰 세마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이에요.

하나님이 발가벗고 있는 우리의 허물을 예수의 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으로 하면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이걸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행실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이에요.

이걸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행실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행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긍휼을 받고서 우리를 구원한 여호와가 긍휼의 여호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24장로들이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던지면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구원이 어린 양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와 혼인을 하려면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은 우리가 만들 수가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신부들에게 옷을 입혀 주세요.



시편 85편을 봅시다.



시 85:7-12=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3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5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6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7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8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1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11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12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시편 85편은 고라 자손의 시에요.

고라가 누구인가요?

모세를 대적하다가 지진으로 죽은 족속이에요.

그런데 그 후손이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악을 사하시고 허물을 덮어 달라고 하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는 여호와가 아니냐” 입니다.

“당신은 긍휼의 여호와니까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지요.

그러면서 아주 역설적인 말을 합니다.



10-11절을 보세요.



1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11,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긍휼과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을 맞춘다고 합니다.

이건 역설이에요.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날 수가 없어요.

진리는 죄인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긍휼은 죄인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다른 말로 법이에요.

법대로 하면 고라의 자손은 저주를 받아야 해요.

반면에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을 살려 주려면 법이 죽어야 해요.

진리대로 시행하자면 긍휼이 사라지게 되고,

긍휼을 베풀려면 진리가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와 화평도 마찬가지에요.

의란 법과 같아요.

죄인에게 공의로 대하면 화평은 얻어질 수가 없어요.

죄인에게 화평을 주려면 공의가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입을 맞춘다고 합니다.



성질이 다른 이 둘이 어떻게 하나로 만날 수가 있나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심판과 구원이라는 역설적인 일을 이루셨어요.



십자가는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담고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요.

한 사람은 심판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살아난 것입니다.

의로운 분이 죽었는데 죄인이 살아났어요.

이게 십자가에요.



이사야 53장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요.

그는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륽 그에게 담당 시키셨어요.

이게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진리는 땅에서 솟아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의가 하늘로부터 주어졌는데,

땅에 있는 자들이 하늘로 들리는 혜택을 입었다는 말이에요.



하늘로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땅에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죄를 예수님에게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종말에 타락한 교회에 하나님이 늦은비 성령인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어서 고멜처럼 음행하던 자들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어린 양의 신부에게 입혀주는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인 것입니다.



옷은 우리가 입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입혀주세요.

그래서 은혜이고 긍휼인 것입니다.

이에 천사들이 이렇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린 양의 혼인날이 가까이 옵니다.

그러니 옷 벗지 말고 잘 입고 마음을 믿음으로 단단히 붙잡아 매세요.

마치 노아가 방주를 안과 밖으로 역청으로 발라서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듯이, 우리도 우리 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도배를 하여서 뱀의 토한 인본주의 세속주의 강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곧 신랑이 올 테니까요.



신랑이 오는 때가 영적으로 겨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세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근신하면서 믿음을 잘 지켜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늘 넘어지고 실수하는 고멜인 우리들을 끝까지 긍휼로 감싸 안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눈에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보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고멜처럼 잘못 하더라도 긍휼을 거두지 마시고 항상 그 긍휼로 지켜주옵소서. 우린 아버지의 긍휼이 없으면 죽습니다. 늘 받기만 하지만 그래도 또 받아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신랑이 오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긍휼로 안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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