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72강. 한 사람의 죽음과 온 민족의 구원 (요 11: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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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10. 14.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72강. 한 사람의 죽음과 온 민족의 구원 (요 11:45-57)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선 ‘빛’도 창조 하시고 ‘어둠’도 창조 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이란 극과 극으로서 같이 하나 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구도로 세상을 창조를 하셨을까요?

 

이는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앉히기 위함입니다.

만물의 존재함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게 예수님 중심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고!여러분도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신자도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불신자)도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흔히 우상숭배자라고 하는 절간의 스님도 예수님을 위하여 있고!

무당도 예수님을 위하여 있고!

이단들도 예수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만물 가운데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위하여서 존재합니다.

다 예수님이 주가 되는 일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주란? 주인이란 말인데 곧 심판주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심판하는 권세를 자기에게 주셨다고!

심판이란? 다스린다는 의미인데 그 말 속엔 갈라낸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보면 갈라내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천지란? 빛과 어둠처럼 다른 세계입니다.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것은 곧 천지를 갈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천지를 의인화 하여서 말하면 천은 천국백성을 말하고 지는 지옥백성을 말합니다.

 

야곱과 에서를 비유하면, 야곱은 천에 속한 자이고! 에서는 지에 속한 자입니다.

한날한시에 한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만 둘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다릅니다.

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 한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는 것도 하나님이 예수 믿도록 창조하여서 믿는 겁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 믿도록 창조를 하여서 못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교회 다니다가 무당이 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중노릇하다가 목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중이 되고 목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이 다 배치를 해 놓았어요.

 

목사가 되어서도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있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있어요.

마치 구약에 ‘참 선지자’가 있는가 하면 ‘거짓 선지자’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배치를 해 주셨어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배치한대로 살다가 각자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합니다.

추방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어요.

그리곤 에덴동산은 감추어 버렸어요.

아담이 사는 세상엔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이고, ‘뱀의 후손’은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구약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다고 했어요.

 

렘 31: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란 말입니다.

이를 하나님이 뿌려 놓았습니다..

어디에다가 뿌려 놓았나요?

이스라엘 속에 뿌렸어요.

즉 교회 안에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겁니다.

 

이는 서로 상극인 종자가 한 지붕 안에 있다는 겁니다.

한 집안에 원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증명이라고 하듯이 인류의 처음 전쟁은 형제간에 전쟁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싸움이고!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고!

다른 형제와 요셉의 싸움이고!

레아와 라헬의 싸움이고!

브닌나와 한나의 싸움이고!

사울과 다윗의 싸움이고!

유대인과 예수님의 싸움이고!

지금은 진짜 예수와 다른 예수의 싸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항상 거짓이 크고 화려하고 ‘힘’이 많다는 겁니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것은 육적으로는 항상 가짜가 장자로서 앞선자라는 겁니다.

가짜가 먼저 나오고 진짜는 나중에 나온다는 겁니다.

 

이런 구도가 지금도 그대로 배치가 되어 있어요.

가짜들이 득세하고 진짜는 무시를 당합니다.

가짜들은 모든 것을 가졌는데 진짜는 가진게 없어요.

 

‘거짓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다 큰 교회를 차지하고 있고!

교인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있고!

‘진짜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하나같이 무시당하고 비실비실해요.

이사야 53장의 메시야의 예언처럼 볼품이 없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를 않아요.

 

에이~ 저런 사람이 무슨 목사냐!

에이~ 저런 무식한 사람 입에서 무슨 복음이 나온단 말이야!

에이~ 저런 교회에서 무슨 복음이 증거 된단 말인가?

복음 전하는 교회가 왜? 부흥이 안 돼?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복음 전하면 부흥이 되어야 하잖아.

교회가 부흥이 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 영광이 되지!

저렇게 찌질이처럼 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지 않겠어!

그러니 교회가 크고!

교인들이 잘 살고 성공해야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 목사나 교인들의 논리입니다.

사람들이 압도당할 정도로 교회가 커야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세상의 ‘힘에 논리’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광야 사십일 동안 주리실 때에 마귀가 와서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예수야! 너 하나님 아들이 맞지!

하나님의 아들이 이러고 있으면 되겠니!

그렇게 힘이 없고 비실비실하면 누가 너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겠니!

하나님 아들다우려면 최소한도 모든 사람들이 압도당할만한 ‘힘’이 있어야 해!

 

그러면서 ‘힘’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 ‘힘’을 마귀가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든 사람들을 네 앞에 굴복 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의 이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마귀는 뿔 달리고, 무식하고, 경우도 없고, 몰상식하고, 인간들을 헤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 반대에요.

 

여러분이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말을 트집을 잡아 보세요.

이 시대 교인들이 교회 와서 찾는 하나님이잖아요.

목사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잖아요.

저도 과거에 이런 하나님을 찾았어요.

 

주여! 종에게 울산을 주옵소서!

대한민국을 제 구역이 되게 하옵소서!

한번 외칠 때마다 3천 명씩 회개하고 벌떼같이 구름떼 같이 몰려오게 하소서!

종이 손을 얻은즉 병이 낫게 하시고!

귀신을 명한즉 떠나게 하옵소서!

 

참으로 대단한 기도이지요.

가히 하나님의 종 다운 기도가 아닙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종이라고 명함을 내 밀수 있지 않겠어요.

이런 것을 얻고자 한 달씩 금식도 해 보았어요.

 

그런데 지금 마귀가 예수님에게 이런 것을 주겠대요.

딱 한번 절만 하면 준다고 하잖아요.

저 같으면 딱 한번 절하고 받겠어요.

 

그땐 왜? 마귀가 절 찾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예수님은 싫다고 하는데도 주겠다고 하고 있잖아요.

전 그렇게 달라고 했는데도 안 주고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요.

만약에 그 때 마귀가 제 기도를 들어주었다면 전 지금쯤 광명의 천사가 되어서 재림 예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 기도대로 되었다면 재림 예수이지요.

 

그런데 재수 없게(?)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답니다.

제가 원하는 것과 정 반대의 형편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전 하나님께 따질 일이 참 많아요?

 

전엔 그렇게 야속했는데 복음을 알고 나니 이게 왠 복입니까!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그 때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 주셨다면 전 지금쯤 하나님을 죽이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어요.

이것도 복음을 알고 나니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모르면 하나님이 야속하지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야속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이런 사고방식은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어 왔어요.

 

어제 오늘 새삼스럽게 갖는 생각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이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 첫째가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계기로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만 두었다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 같다고 느낀 겁니다.

 

예수님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왜? 내 밥그릇을 빼앗아 가느냐 에요.

예수를 그대로 방치 하다간 자기 교인들을 다 빼앗기게 생겼어요.

 

그러니 빨리 이단이라고 몰아서 교계에서 추방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교인들을 빼앗기지 않지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쏠리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류였으니 유대인이라 함은 바리새인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 유대인이라는 말은 곧 바리새인이라는 말과 같으니 동일한 의미로 들으세요.

제가 유대인 그러면 바리새인이구나 생각하세요.

역으로 바리새인 그러면 유대인이라고 동의어로 들으세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를 보면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잘 읽을 수 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힘’이에요.

 

국가적으로는 ‘부국강성’하는 것이고!

교회적으로는 ‘부흥’하는 것이고!

가정적으로는 다른 집보다 ‘잘 사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출세’하고 ‘성공’해서 ‘영웅’이 되는 겁니다.

 

이 시대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이지요.

목사들이 가르치고 교인들이 바라는 것 하나님이에요.

한국교회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요.

 

그런데 말이죠.

이건 모든 인간들이 소망하는 거예요.

이건 교회가 아니라도 교회 바깥에서도 다 이런 신을 원해요.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결국 신과 신의 ‘힘’에 싸움인 겁니다.

누구 신이 ‘힘’이 더 세냐!

누구 신이 더 능력이 있나!

어떤 신이 인간의 소원을 잘 들어주느냐!

 

교인들이 큰 교회로 몰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 교회 하나님이 더 세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야! 저 교회 다니면 복을 많이 받겠구나!

야! 저 목사 말 들으면 일이 잘 풀리겠구나!

 

저 목사에게 안수기도 한번만 받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믿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옮겨 다니잖아요.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 안 믿고 목사를 믿어요.

그러니 목사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겁니다.

 

자!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을 목사라고 합시다.

지금 ‘예수’라는 목사와 ‘바리새인’이라는 목사가 있어요.

예수라는 목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바리새인이라는 목사가 인기 짱이었어요.

수많은 교인들이 따랐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목사가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나타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는 겁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벌떼같이 몰리는 겁니다.

 

어느 시대고 교인들은 부평초에요.

누가 능력 있다 그러면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원래 인간들은 보이는 신을 원해요.

‘힘’ 있는 신 말이에요.

 

예수에게 몰려든 교인들도 ‘힘’을 따라왔기 때문에 언제 떠날지 몰라요.

예수보다 더 ‘힘’센 놈이 나타나면 그리로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이를 예수님은 잘 아시기 때문에 인간을 믿지 않은 겁니다.

결국 지금 예수에게 쏠린 인간들이 나중에 예수가 힘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죽였어요.

 

암튼 유대인들은 지금 비상인 겁니다.

예수를 그대로 두었다간 교회 문 닫게 생겼어요.

빨리 제거해야 해요.

 

이로보건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람을 힘’ 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이나 똑 같아요.

지금 이 시대 ‘목사’나 ‘중’들이 똑 같은 이유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힘’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 본질을 따라가면 누가 나오느냐 하면 마귀가 나와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잖아요.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이나 유대인이나 군중들이나 똑 같잖아요.

목사나 교인들 아비도 마귀지요.

그럼 ‘중’들의 아비가 마귀이나 ‘목사’들의 아비가 마귀이나 똑 같잖아요.

 

그렇다면 교회나 절간이나 똑 같은 겁니다.

‘목사’나 ‘스님’이나 같아요.

‘불자’들이나 ‘교인’들이나 같아요.

뭐가 다른가요.

 

추구하는 것이 같잖아요.

세상에 ‘힘’을 달라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돈’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불교 방송’이나 ‘기독교 방송’이나 똑 같은 겁니다.

똑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나 ‘중’이나 본질이 같으니 똑 같은 사고를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나 절간이나 신도들이 비는 것은 다 같은 내용인 겁니다.

‘절’에서 비나 ‘교회’에서 비나 그게 그거에요.

 

주일날 교회 안가고 등산 갔다가 마음이 찜찜하면 절간에 가서 시주하고 거기서 비세요.

괜찮아요.

어차피 같은 뿌리인데요.

뭐~ 어떻습니까?

 

‘절간’에서 빌어서 복을 받으나 ‘교회’에서 빌어서 복을 받으나 복만 받으면 되잖아요.

오만원권 신사임당 얼굴에 이건 교회 돈! 이건 절간에 돈이라고 쓰여 있지 않잖아요.

돈이면 다 되는거 아닙니까?

 

‘중’에게 안수 받으나 ‘목사’에게 안수 받으나 다 같아요.

어차피 그 애비가 같으니까요.

편한 대로 하세요.

제가 아주 파격적으로 가르쳐 드립니다.

목사들이 양심이 있어서 하지 못하는 말을 이 무식한 인사가 대신 말해주잖아요.

 

어차피 이 시대 목사들이나 교인들은 예수 안 믿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그 예수는 가짜 예수에요.

마귀라고요.

그러니 ‘힘(돈)’ 달라고 하지요.

 

세상에서 사람의 숫자는 곧 ‘힘’이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한국교회 풍토 속에선 교회만 부흥이 되면 정통이고 진리에요.

 

그렇게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사람들이 몰리니 이젠 구원파 신학도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국교계에서 심심찮게 말이 나와요.

곧 정통이 될 겁니다.

어차피 세상은 많은 사람을 확보한 것이 주류가 되어요.

 

지금 교회가 하는 짓을 2천 년 전에는 바리새인들이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느긋했어요.

그 누구도 자신들의 세력에 맞서지 못하였거든요.

백성들을 자기 수중에 넣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고 난 후론 이상하게 ‘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힘’의 균형이 예수님에게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나사렛 촌놈이 무슨 능력이 있겠나 싶어서 관심두지도 않았는데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는 것과 같이 갖가지 표적들을 일으키니 이젠 사태가 심각해 진겁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자신들이 입지가 흔들리게 생겼어요.

그러니 백성들이 요동하지 않는 구실을 찾아서 합법적으로 처단을 하여야지요.

 

그래서 낸 결론이 예수가 유대인을 둘로 분열시킨다고 조장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지켜온 신앙이 있어요.

모세가 준 율법신앙이에요..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그냥 혼자 어기면 두고 보겠는데 갖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어기니 사람들이 혹~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백성들은 율법에 눌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숨통을 터주니 속이 시원한 겁니다.

그러자 백성이 두 편으로 쫙~ 나누어지는 겁니다.

 

알다시피 지금 유대인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요.

그런데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지만 그들의 신앙은 간섭하지 않았어요.

식민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앙생활은 자유롭게 하도록 두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앙만큼은 하나로 결속이 되어 있었어요.

유대인들을 묶는 구심점이 율법신앙이에요.

비록 국가는 ‘힘’이 없어서 망했지만 그 신앙심만큼은 민족의 자긍심으로 지키고 있었어요.

 

로마가 유대인들이 신앙을 간섭하지 않는 것은 민란을 막기 위한 것이었어요.

유대인들은 모두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만 인정해 주면 민란이 일어날 확률은 적었어요. 

그래서 로마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적인 특권을 인정해 주는 회유책으로 포섭하여서 지배하였던 겁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대부분 권력에 빌붙어서 호사스럽게 잘 먹고 잘살고 있었어요.

종교지도자들은 식민지 생활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물론 겉으론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내심으론 좋아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면서부터 위기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율법신앙을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으로 밥 먹고 사는데 그걸 부정하니 가만있을 순 없지요.

 

백성들도 종교지도자들의 비리를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고 기존에 신앙을 공격하니 좋았던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종교 지도자들을 욕하고 싶었는데 예수가 대신 속 시원하게 욕을 해 주니까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모습을 종교지도자들이 손을 놓고 지켜볼 수만 없지요.

그래서 예수를 제거하는 일을 벌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 죄목이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에 진입한다는 명분입니다.

 

유대인들 내부에 신앙적인 분열이 생기면 이건 반드시 분열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럼 로마 군인들이 민란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예루살렘에 주둔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군인이 주둔하면 술집도 생기고 창녀들도 따라와요.

그러면 거룩한 도시가 졸지에 창기들이 노는 곳으로 변해요.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인데 개 같은 이방인들이 들어오면 안 되잖아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이에요.

개 같은 이방인이 들어 올 수가 없는 곳이에요.

이건 율법신앙에 정면으로 위배가 되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런 일이 일어 날수가 있는 일을 벌리고 있다고 본 겁니다.

민란을 일으켜 로마인들이 들어 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고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술책이에요.

 

그래서 당시 대 제사장인 가야바가 온 민족의 안녕을 위해서 예수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안하기에 이른 겁니다.

가야바는 육적 유대민족의 안전을 위해서 말을 했어요.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이 계략을 하나님은 영적인 참 이스라엘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즉 구원키 위함입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낸다고 하셨어요.

그럼 예수님이 죽어야 합니다.

죽는데 자살 할 순 없잖아요.

 

아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을 하도록 조치해 두셨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에요.

그럼 누가 ‘뱀의 후손’인지는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를 보면 알 수가 있겠지요.

예수를 공격하는 자는 ‘뱀의 후손’이라는 것이 드러나겠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뭐라고 했나요.

심판이라고 했잖아요.

심판이란? 갈라내는 일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지겠지요.

창세전 언약에서 천국백성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찾아낸다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이 죽어야 천국백성들이 찾아 질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음 속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첫 번째는, 누가 뱀의 후손인가를 드러내는 일이고!

두 번째는, 자기백성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자기백성을 찾아내는 것을 오늘 본문에선 자기 백성을 모은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천국백성들이 한 군데로 모이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오묘함을 읽을 수 있어야 해요.

자기 백성들을 어떤 식으로 찾아내는지를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유대인들 손에 죽임을 당하게 하셨느냐 에요.

우리 생각엔 진짜 마귀의 자식들인 이방인들 손에 죽임 당하게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백성들 손에 죽게 만들었어요.

알다시피 유대인은 하나님 백성이에요.

물론 유대인 중에는 마귀 자녀도 있어요.

하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유대인은 하나님 백성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하신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자기 백성이란? 좁은 의미에선 유대인을 말하고 넓은 의미에선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영적 유대인을 말해요.

우리가 영적 유대인이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지요.

저희 죄에요.

죄!

 

그럼 죄가 뭔지 알아봅시다.

죄가 뭐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겁니다.

 

죄인을 일컬어 뱀의 후손이라고 하지요.

성경이 말하는 뱀의 후손이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란 뜻이에요.

여러분 원수가 뭡니까?

내게 해악을 끼친 자란 말이지요.

 

우리가 흔히 부모를 죽인 자를 원수라고 하잖아요.

자기에서 손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 같은 놈이라고 하잖아요.

자기에게 손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원수라고 하지 않아요.

그렇지요.

 

원수란? 은혜를 해악으로 갚은 자를 말해요.

내 돈을 떼먹고 도망을 간 놈이라든가!

내 몸을 병신을 만들어 놓은 놈이라든가!내 자식을 죽이고 내 부모를 죽인 놈이라든가!

암튼 내게 아픔을 준 사람을 보고 원수라고 합니다.

 

죄인을 일컬어 하나님께 원수 된 자들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에요.

은혜를 욕으로 갚은 자들이에요.

이처럼 원수가 되려면 은혜를 욕으로 갚은 전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원수라고 할 순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물론 자기 백성들에게만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자기 백성들에겐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에요.

 

은혜란? 용서해 주는 겁니다.

잘못한 놈을 용서해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해요.

조금 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겐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그럼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원수진 일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용서가 되니까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 엄청난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어야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용서해 주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잘 이해하세요.

원수와 은혜 이 구도를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 틀을 가지고 일을 하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요.

하나님이 오신 겁니다.

왜? 오셨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오셨어요.

 

아까 죄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이 건져내야할 자기 백성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배은망덕한 모습으로 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욕으로 갚은 자들로 있겠지요.

하나님의 원수로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유대인)들에게 독사새끼라고 했지요.

독사라는 말의 원 뜻은 살모사라는 말입니다.

살모사란? 어미를 잡아먹는 뱀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유대인)을 살모사 새끼라고 한 것은 곧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은 배은망덕한 놈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종자들이란 말입니다.

누가요.

유대인들이 그래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산 민족이에요.

그런데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반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에이~ 이 더러운 살모사 새끼들이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을 배도한 놈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배도한 놈들을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보냈어요.

왜? 배도한 놈들을 구원하는가 하면 그 놈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나님의 은혜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에요.

하나님의 용서가 넘치는 자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유대인의 손에 죽게 만들고 예수님을 죽인 놈들을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마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용서해 주듯이 말이에요.

기껏 죄를 짓게 방치 해 두었다가 죄를 짓고 나면!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라고 추궁을 합니다.

그리곤 용서해 주세요.

물론 그 바탕엔 예수님의 피흘리심이 있어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거든요.

그러니 자기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난 자들이에요.

은혜는 반드시 범죄를 용서해 준 것을 바탕으로 주어져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죽이고 용서받았어요.

물론 모든 유대인이 아니고 선택된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회개해요.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고 난후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온 천하 각국으로부터 올라온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예수를 죽었다고 설교를 하잖아요.

그러자 어찌할꼬! 통회자복 했어요.

 

실제로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없었어요.

예수를 죽이는데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자기들이 그랬다는 것으로 인식이 된 겁니다.

 

야!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도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고 죽였겠구나! 를 안 겁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보게 된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덮쳐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몰라요.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살았어요.

우린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죽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유대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을 받은 성도이고 구원 받은 자에요.

유대인과 자신을 별개로 보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우린 지금도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요.

우린 한 번도 하나님 뜻대로 산 적이 없어요.

엄청난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감사하기는커녕 원망과 불평만 해요.

그러니 우리가 바로 살모사 새끼들인 겁니다.

이런 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덮친 겁니다.

 

죄인이란? 자기를 낳아준 자를 잡아먹는 자들이에요.

인간이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에요.

백번 잘하다가 한번 마음에 안 들면 원수처럼 돌변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인간은 자기 밖에 몰라요.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요.

그래서 교도소에 가면 다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는 겁니다.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 갚을 궁리를 하고 나와요.

 

갱생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적개심으로 나오기 때문에 또 죄를 짓는 겁니다.

왜? 전과자들을 관리하는가 하면 죄는 반복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에요.

죄란? 처음 지을 때가 어렵지 한 두 번 하면 이력이 생겨서 쉬워요.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죄도 지어본 사람이 잘 지어요.

반복하다가 보면 둔감해지고 둔감하면 대담해져요.

 

교회도 한번 빠지기가 어렵지!

한 두 번 빠져 보세요!

이젠 빠질 궁리를 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요.

 

마치 교회 안 오는게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별 희한한 자유도 다 있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 육신의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예수 믿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줄 알아요.

 

교회 안 가도 되고!

성경 안 보아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고!

연보 안 해도 되고!

충성 봉사 안 해도 되고!

 

그럼 뭘 하는가 하면 놀아요.

자기 육신이 이끄는 대로 놀아요.

그러면서 예수 믿는데요.

참으로 해괴한 믿음이에요.

 

구원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러 준 겁니다.

인간은 ‘수레’와 같아요.

짐을 싣는 ‘수레’ 말이에요.

‘수레’에는 항상 짐이 실려 있어요.

‘빈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짐을 사명이라고 합시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는 것은 사명자란 말입니다.

사명자를 다른 말로 증인이라고 해요.

증인 또는 증거자 라고 해요.

 

어느 특별한 사람만 사명자가 아니고 성도는 모두가 사명자에요.

짐꾼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지고 가는 수레란 말이에요.

내 마음대로 놀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는 면죄부가 되는 줄 착각하고 있어요.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주일날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마치 믿음 없는 것처럼 회자되고 있어요.

도리어 적당히 교회 다니면서 자기 즐길 것 다 즐기면서 교회는 동호회 모임처럼 필요하면 나가고 필요치 않으면 안 나가는 식의 믿음이 좋은 줄 착각하고 있어요.

 

술 처먹고 노는 것이 무슨 대단한 믿음인 냥 착각하고 있어요.

자유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여야 하는데 자기 쾌락을 위하여 도용하고 있어요.

이건 올바른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에요.

거짓 은혜에요.

 

초대교회 오순절에 성령 받고 난 후 성도들이 한 일을 보세요.

모이기를 힘썼어요.

모여서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했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성도를 섬기는 일로 찬양했어요.



열심히 교회에 모이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무엇을 위하여 모이느냐가 중요해요.

이 시대 교회처럼 복 받기 위해서 모인다면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모이는 것은 권면하고 장려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유대교 신자들이었어요.

그들은 율법 아래서 지긋지긋한 종노릇을 하고 살았어요.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을 섬겼다구요.

율법지킴이 신앙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 율법이라는 짐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율법에 의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모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복음을 찬양했어요.

서로 모여서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고 사랑했다구요.

 

이 시대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집구석에서 놀거나 아니면 놀러 다니지 않았다구요.

자기 마음대로 난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기 종이지 예수의 종이 아니에요.

예수의 종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없다구요.

 

제가 짱구라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줄 아세요.

누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돈이 나옵니까?

그렇다고 육신이 편합니까?

 

주의 사명이 내 몸에 짊어져 있기 때문에 소가 수레를 끌듯이 가고 있어요.

벧세메스로 가는 소가 왜? 울면서 간 줄 아세요.

자기 수레 위에 법궤가 실려 있기 때문이에요.

법궤가 이랴! 하고 끌고 가기 때문에 울었어요.

자기 새끼를 집에 두고 가야 하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천국에 온 성도들의 눈물을 씻겨 준다고 합니다.

이는 천국엔 눈물을 흘린 성도가 간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겁니다.

 

힘들어서 울고!

욕먹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고난당해서 울고!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살 소망까지 끊겼다고 하잖아요.

세상에 하나님이 사도인 자신들을 만물의 찌끼같이 두었다고 하잖아요.

구경거리로 두었대요.

 

이걸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주의 은혜가 덮쳐오면 자기를 부인하도록 이끌어요.

십자가의 길이 장난이 아니에요.

우린 싫다고 반발을 합니다.

하지만 주의 은혜가 나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결국 울면서도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요!

아니에요!

사랑은 아파요!

그것도 많이 아파요!

엄청 아파요!

너무 너무 아파요!

 

사랑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깨달으라는 겁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세요.

 

주님이 주인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만약에 말이죠.

자기 마음대로 살아진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라고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세요.

 

히브리서 12장을 보세요.

 

히 12:1-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2장은 11장의 믿음에 선진들을 말하고 증거하는 말이에요.

12장은 하나님의 아들에겐 반드시 징계가 있다고 합니다.

왜? 징계 합니까?

말 안 들으니 하지요.

 

그러니 12장을 말하면서 11장에 사람들을 보라고 합니다.

봐라!

11장의 허다한 증인들이 보고 있지 않느냐!

저 사람들이 바보라서 저렇게 산 줄 아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11장의 허다한 증인들이 어디 땅콩 까먹고 놀고 있었나요.

아니에요.

하나님 손에 질질 끌려 다닌 사람들이에요.

‘수레’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짐을 싣고 질질 끌려 다녔어요.

 

이 사람들은 전부 ‘믿음에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고 살았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삶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삶을 미리 선취적으로 살게 만들었어요.

11장에선 믿음이 그랬어요.

 

지금 우리와 비교해 보세요.

우리처럼 살지 않았어요.

우리처럼 복음을 핑계대고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았어요.

우리와 달라요.

 

그래서 전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신자로 보지 않아요.

이런 신자는 없어요.,

야고보서에선 이런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지 자기 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에요.

완벽하게 살란 말이 아니에요.

우린 완벽하게 살 수 없어요.

우린 자기 부인이 안 되기 때문에 늘 상한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상한 심령은 말씀에 순종을 해 보아야 나타나요.

야! 이래서 안 되는구나!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

말씀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항복을 합니다.

아! 내가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나의 구원에 능력이구나! 를 알게 되어요.

 

말씀대로 살고자 해 보아야 우린 순종이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 시키셨다는 것이 엄청난 은혜이고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걸 깨달아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에 감사가 나와요.

이런 깨달음이 없는 것은 ‘추상’이고 ‘관념’이에요.

 

복음이 관념이고 추상이니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라는 망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는다고 해요.

복음은 항상 안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폄훼당하여 왔어요.

복음을 이용하니 욕을 먹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들은 늘 간섭하는 것입니다.

간섭해서 어그러진 길에서 돌이키게 하고 넘어진 것에서 일으켜 세우세요.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간섭한다고 하세요.

간섭 안하면 ‘사생자’에요.

 

예를 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런 탈이 없으면 사생자에요.

사생자이니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두들겨 팹니다.

 

두들겨 패서 게으른 손을 성도들을 섬기도록 충성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손으로 움직이게 하고!

앉은뱅이처럼 남에 도움만 받던 앉아 있는 신앙을 남을 돕는 신앙으로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던 것을 마치 술 먹은 사람들이 걷는 것 같은 갈 지(之)가 행보를 곧게 해 준다고 하잖아요.

즉 자기 마음대로 사는 놈을 주의 사명자로 만든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빈둥거리고 노는 놈을 바빠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녀들을 니 마음대로 하라고 키우는가요?

그렇지 않지요.

맞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를 낳아준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모처럼 간섭하세요.

 

그래서 저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보면 교인이라고 하지 성도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인이 늘 간섭을 하기 때문에 편할 날이 없어요.

자꾸만 주인이 어떤 사건을 일으켜요.

짐을 싣고 날라요.

무슨 일을 만든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이에요.

자기 안에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괴물하고 싸우는 겁니다.

물론 못 이겨요.

하지만 싸워요.

지면서 싸워요.

싸워서 못 이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또 싸우는 겁니다.

야! 이래서 예수님이 필요하구나 를 알게 만들어요.

 

죽은 자는 싸우지 않아요.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 다녀요.

죽었기 때문에 세상풍조에 밀려서 부평초(浮萍草)처럼 떠다니는 겁니다.

 

성경은 죄를 문둥병으로 상징적으로 말을 합니다.

구약에 보면 문둥병을 의사가 판단하지 않고 제사장이 판단해요.

이는 문둥병은 병이 아니고 죄로 보기 때문입니다.

 

미리암이 모세에게 대 드니 하나님이 문둥병에 걸리게 하지요.

이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내어 쫓아서 격리시키는 겁니다.

 

문둥병의 특징이 살이 썩어도 아픔을 몰라요.

감각이 없어요.

둔감해요.

 

죄가 그래요.

죄인이 그래요.

늘 밥 먹듯이 죄를 지어 왔기 때문에 몰라요.

 

그래서 죄를 지적하면 그게 뭐 어때서 그래요.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고 도리어 화를 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요.

 

이 시대 교인들은 죄를 크고 작은 경중으로 따져요.

설교를 들으면 아! 난 이런 죄인이구나!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사는구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도리어 반발을 해요.

 

뭐라고 하면!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예를 들어서 주일날 놀러 가지 말고 교회에 오세요! 라고 하면 다른 사람은 나보다 더 하는데도 가만있다가 왜? 내가 주일날 한번 빠진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해요.

 

목사가 설교를 하면 대뜸 목사 자기는 그렇게 사냐?

그럽니다.

설교는 목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목사 자신도 자신이 한 설교에 비판을 받아야 해요.

목사라고 해서 말씀에 치외법권에 있지 않아요.

 

목사가 설교를 하려면 마귀가 시비를 걸어요.

넌 그렇게 사냐?

자기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어떻게 하느냐! 라고 참소해요.

저에게도 수시로 참소해요.

여기에 걸려들면 설교를 못해요.

 

그래서 전 그래 나 이런 놈이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

난 지금 예수님 피 들고 섰다!

그래요.

제 경우에 그렇다는 겁니다.

 

목사로서의 장점은 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이 발가벗김 당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거울 앞에서 자기 꼬라지를 늘 점검 받는다는 겁니다.

나아지는게 아니고 더 형편없음을 알게 되어요.

 

제가 목사가 된 것을 최고로 감사하는 것은 싫든 좋든 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말씀을 보면 전부 죄로 드러나요.

죄가 드러나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도 크게 다가와요.

 

아이러니 하게도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은혜를 배반하고 사는 자라는 것이 깨달아져요.

야! 내가 이런 죄인이구나!

야! 내가 이런 악당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죄가 뭐냐?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겁니다.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구나 를 알게 되어요.

흔히들 자식이 웬수라고 하지요.

맞아요.

금이야! 옥이냐! 키운 놈이 배신해요.

 

자식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냐고 하잖아요.

기껏 키워 놓았더니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지랄을 떨어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잖아요.

뭐라고 하면 다른 집 부모는 이러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락 바락 덤비잖아요.

 

공부 못하는 것도 부모 때문이고!

출세 못하는 것도 부모 때문이고!

결혼 못하는 것도 부모 때문이고!

모든 게 부모 탓이에요.

 

공부 못하고 출세 못하고 결혼 못하고 취직 못한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식에게 죄인이에요.

오죽 했으면 자식이 웬수라고 했겠어요.

이 말은 요새 만들어진 말이 아니고 인류역사가 시작 되면서부터 만들어졌어요.

 

부모가 누구에게 속을 썩느냐 하면 자식이에요.

자식이 부모에게 속을 썩이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속을 썩이는 것의 표상이에요.

우린 하나님을 밥 먹듯이 배반하고 살아요.

그런데 그걸 몰라요.

 

자식들에게 물어 보세요.

나 같은 아이가 어디 있겠느냐고 큰 소리 치잖아요.

없지요.

너 같은 놈이 세상에 또 있으면 어찌 하겠어요.

 

우린 늘 비교해도 못난 놈과 비교해요.

잘난 놈과 비교하는 인간이 없어요.

인간과 비교하지 마세요.

 

예수님과 비교해 보세요.

우리가 할 말이 있겠는가?

없어요.

 

예수님과 비교해야 우리가 죄인임이 드러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보아야 내가 악당임이 드러나요.

예수님은 거울이에요.

 

우리 죄를 고발하는 거울이에요.

예수님 앞에 서면 자기 죄가 밝히 드러나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여야 해요.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잘사니 못사니 따지는 것이 죄인 줄 알게 됩니다.

 

지금 내가 사는 그 바탕엔 한 남자가 죽었다는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이시고 그 터 위에 나를 살게 하셨어요.

내가 사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라고 그렇게 하셨어요.

 

이제 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죽여서 온 민족이 사는 길을 택하셨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한 통속으로 봅니다.

아담이라는 한 ‘항아리’ 속에 있는 자로 보아요.

물론 그 속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섞여 살고 있어요.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어요.

우린 선악과를 따 먹은 일도 없고 심지어 구경도 하지 않았는데 그만 죄인이 되고 말았어요.

난 죽기 싫은데 죽어요.

이 모두가 죄인을 조상으로 둔 덕분이에요.

 

하나님이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죄인이 된 것처럼!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 방법이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서 의에 조상을 삼으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아담이라는 항아리’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 내는 겁니다.

건져내서 ‘예수님 항아리’로 옮겨 두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옮겨 오는가 하면 죽여서 옮겨 와요.

아담 안에 있는 놈을 십자가에서 죽여요.

어떻게 죽이는가 하면 예수님 안에 집어넣고 죽여요.

예수님 안에서 ‘일괄처리’ 한 겁니다.

 

이건 마치 전쟁하는 것과 같아요.

전쟁을 할 때 온 백성들을 다 잡는 것이 아니고 왕(王)을 잡지요.

왕을 잡으면 그 백성을 다 잡는 것이 되어요.

왕이 항복을 하면 그 민족 전체가 항복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왕이 되어서 죽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에게 소속된 백성은 다 죽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 했어요.

그럼 이젠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자들도 같이 부활한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 혼자만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죽은 자로 간주하고!

예수님이 부활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도 다 부활을 해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죽였다 살렷다!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백성들은 왕의 결과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린 낄 자리가 없어요.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란 0.0000000001 %로 없어요.

이러면 자기가 살아 있는 인간 입장에서 은근히 화가 나지요.

그럼 난 뭐냐!

난 로봇트냐!

그래서 반기를 든 인간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바로 성화주의자들은 겁니다.

 

나도 좀 끼워 주세요! 하고 자기 행함을 예수님의 피 에다 쓰윽~ 끼워 넣는 겁니다.

난 목사다!

난 장로다!

난 교회 10개 개척했다!

난 100명 전도 했다!

난 헌금 10억 했다!난 교회 부흥시켰다!

난 50년 믿었다!

난 이 교회 개척멤버다!

 

특히 목사들이 그러지요.

성역 40주면 기념 예배를 드린다거나!

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린다거나!

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신앙으로 들고 나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예수와 함께 죽지 않고 자기 혼자 예수 믿는 인간들이에요.

한마디로 예수와 상관없이 자기 혼자 예수 믿는 흉내 내다가 지옥 가는 인간들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자기가 살아서 자기 흔적을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우고 난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이력서가 필요가 없어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력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족보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나 성도는 자기 족보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 살았다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결단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겁니다.

아니 정죄 할 수가 없어요.

정죄를 하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성도는 자기라는 실체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의 본성은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뭘 해도 자기 이력서를 쓰려고 해요.

육신이라는 놈이 자꾸만 독자적으로 살라고 해요.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자 해요.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겁니다.

 

맑았다!

개었다!

흐렸다!

천둥이 쳤다!

번개가 쳤다!

비가 왔다!

어느 놈이 자기인줄 몰라요.

 

그래서 성령이 날마다 넌 죽은 자인데 왜? 또 네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우리 인생을 삭제시켜요.

나라는 존재를 빈 수레로 만들어요.

거기다가 예수님의 인생을 실어 놓은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보세요.

우리 몸에다가 예수님의 인생을 실어 놓았다고 하잖아요.

날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분을 위해서 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성도에겐 자기 인생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도록 강권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살았다 반복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내 몸에 예수의 생명을 짊어지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 생명은 죽음에 넘기 운다고 한 겁니다.

난 죄로 인하여 죽었는데!

그 죄로 죽은 몸을 예수님의 생명이 덮쳐옴으로서 살고 있는 겁니다.

 

성령이 그럽니다.

정낙원이 넌! 죽은 자이다!

고로 네 업적은 없다!

네 업적이 없다는 것은 곧 네가 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네가 한 일이 삭제 당하였기 때문에 너의 행함으로 인한 것으로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일’을 해도 삭제당하고!

내가 ‘나쁜 일’을 해도 삭제 당하였어요.

내가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살면서 범죄 한 것도 다 함께 삭제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가 왜? 고민을 합니까?

죄 때문이잖아요.

죄 때문에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법이 살아 있다는 증거에요.

법이 살아서 내 양심을 주장하니 찜찜한 겁니다.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너~ 그 따위로 하고도 천당 간다고 하느냐!

너~ 그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

 

마귀가 자꾸만 나를 살려내서 법 앞에 세우는 겁니다.

부관참시해요.

죽은 시체를 관속에 끄집어내서 죄를 묻듯이 물으려고 해요.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어요.

법에 대하여 죽었어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너” 그따위로 살래!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도에겐 “너” 그따위로 살래가 적용이 안 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너” 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너” 가 없고, “예수 안에 나” 만 있어요.

독자적인 내가 없으니 정죄가 안 되는 거지요.

 

바울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롬 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이 지금 왜? ‘그러므로’ 라고 하는 줄 아세요.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귀신도 바울을 알아주었잖아요.

 

스게아의 일곱 아들이 귀신들린 자를 붙잡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바울의 흉내를 내니 귀신이 그러지요.

넌 누구냐!

난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라고 하면서 흠씬 두들겨 패잖아요.

 

그만큼 바울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신약 성경을 거의 다 쓰다시피 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특별하게 붙잡아서 쓴 사도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도 임명장을 받은 사람이라구요.

 

그런 그가 로마서 7장에서 성화하지 못해서 죽겠다고 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있었어요.

그런 그에게 성령이 알려주는 겁니다.

 

야! 임마!

너 왜? 그러는데!

넌 죽은 놈이야!

야! 임마 꼴값 떨지 말고 정신 차려!

죽은 놈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느냐!

넌 네 인생이 없어!

네 인생이 없는 놈이 무엇 때문에 죄 지었다고 징징거리고 있느냐고 엉덩이를 걷어차 버립니다.

성령에게 한방 걷어차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

 

그리곤 로마서 8장을 썼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하잖아요.

해방이 뭡니까?

풀어 놓았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법에서 풀어줬으니 이젠 안심하고 살라고 하잖아요.

 

한국이 36년 동안 일본에게 식민지 생활을 했어요.

그 당시엔 일본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그쳤어요.

그만큼 일본 놈들이 기세가 등등했어요.

일본 놈 앞에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었어요.

일본 천황이 항복했어요.

일본 천황이 항복하니 일본 놈들 전부가 두 손을 들었어요.

 

이제 일본 놈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일본 놈들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놈들로부터 해방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일본 놈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요.

예를 들어서 일본 놈들에게 식민지를 당할 때는 그 앞에서 술도 먹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이젠 술 처먹고 일본 놈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성도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죄라고 지적해 대는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율법이 힘을 쓰지 못한다구요.

율법이 너 왜? 죄 지었어!

그러지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어떤 것이라도 율법으로 정죄를 당하지 않는 겁니다.

이건 죄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는 자기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성도의 그 어떤 죄로부터 깨끗케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사실을 증거해 주었어요.

 

요일 1: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보세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라고 하지요.

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진리 가운데 있다는 말이에요.

진리는 곧 새 언약을 말합니다.

 

그러니 너 빛 가운데 있어! 라는 말은 곧 너 예수 믿어!

그 말이에요.

예수 믿는다면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하잖아요.

여기서 ‘모든’ 이라는 말씀에 괄호를 열어 놓으세요.

그리고 닫지 마세요.

 

여러분이 평생 살아가면서 죄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들을 그 속에 다 담으세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엄청난 죄들이 터져 나올 겁니다.

죄는 살아가면서 점점 새로운 형태로 생산이 되어요.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기대하세요.

 

요즈음에 의료실비 보장보험들을 다 들잖아요.

거기에 보면 앞으로 어떤 질병이 생기더라도 다 보장해 준다는 것이 있지요.

저도 과거에 들었다가 해약하고 다시 들었어요.

과거 것은 새로운 질병을 보장해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든 것은 새로운 질병을 다 보장해 주어요.

 

사도요한이 그럽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고 합니다.

제가 아니고 사도 요한이 그랬어요.

예수님 품에 안겼던 사도 요한 말이에요.

 

의료보장보험이 새로운 질병을 보장해 준다고 해서 일부러 질병에 걸리는 사람은 없지요.

맞아요.

우리의 죄도 그래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준다고 해서 야! 이제부터 마음 놓고 죄를 짓자 그럴 수는 없겠지요.

 

우리 몸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새로운 질병들이 툭툭 생겨나오듯이!

죄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모습으로 툭툭 터져 나와요.

그러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피가 다 용서해주시니까요.

 

예수님의 피가 다 용서 해준다고 하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살라는 말이지!

야! 이제부터 마음 놓고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짓고 싶으면 지으세요.

몽둥이는 폼으로 있지 않으니까요.

아까 살펴보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반드시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징계가 있다고!

죄 짓는 달콤함 보다 뭉둥이로 두들겨 맞는 아픔이 훨씬 더 클 겁니다.

알아서 하세요.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하나님께선 한 사람을 흩어져 있는 온 백성을 모으기 위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 하나만 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만 예수님이 죽을 때 자기 백성들을 몽땅 데리고 죽었어요.

그리곤 죽었던 자들을 몽땅 데리고 살아났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결단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다는데 왜? 자기가 정죄합니까?

이러면 되겠나!

저러면 벌 받지!

그러냐구요.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엔 예수님의 죽음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지요.

그런데 지금 인간은 ‘아담의 형상’으로 있지요.

아담의 형상이란? 죄인이란 말입니다.

 

세상엔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을 보냈어요.

아담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서 예수님 안으로 불러들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니 예수님 안에 들어간 성도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이 되지요.

 

어떻게 아담의 형상으로 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사는 방식으로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는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 안에서 함께 죽이시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려 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칼이라고 하지요.

왜? 칼이라고 합니까?

성도를 죽이기 위해서 에요.

 

성령이 성도를 말씀 앞에 세워서 너는 이런 죄인이라고 해요.

살리는 식으로 일하지 않고 죽이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러니 성령의 충만이란? 난 말씀대로 삽니다! 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난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나와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선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해요.

자신을 삭제 시키고 없애야 하는데 도리어 이력서에 빈칸들을 채우면서 살리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에 예수님의 이력서가 따라다니지 않고 자기 이력서가 따라다니는 겁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님은 죽지 않았어요.

아직 구약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지 신약이 열리는데!

아직도 예수님과 함께 죽지 못하고 있으니 죄를 씻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교인들 이력서마다 예수님의 피로 씻김 받은 흔적이 없는 겁니다.

 

신앙의 이력서에 난~ 이런 용서를 받았습니다! 가 쓰여 있어야 하는데!

난~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겁니다.

탕자처럼 아버지께 용서 받은 이력서가 붙어 있어야 하는데!

맏아들처럼 난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는 이력서가 붙어 있는 겁니다.

 

교인들마다 맏아들처럼 자기 이력서에 남아 있는 빈칸을 채운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고 또 뛰는 겁니다.

앞선 놈은 날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 라고 의기양양하고!

뒤처진 놈들은 야! 언제 따라잡지! 하면서 개 발에 땀나듯이 뛰고 또 뜁니다.

 

오호라 통재라!

아! 이 일을 어째야 합니까! 

부디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일괄처리 했다는 것이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라는 한 사람 안에서 내 운명이 통째로 담겨져 있게 하옵소서. 나는 이제 네가 아니고 예수라는 한 사람 안에서 나로 살게 하옵소서. 내 인생으로 살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게 하옵소서. 내 이력서는 다 삭제하시고 예수님의 이력서만 쓰여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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