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19강. 우리 신랑이 최고야! (아가 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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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2021. 10. 24.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9강. 우리 신랑이 최고야! (아가 5:9-16)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님을 실컷 자랑하게 도와주옵소서! 왜 예수님만 홀로 자랑되어져야 하는지도 알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귀한 것도 늘 누리게 되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사랑도 늘 받다가 보면 귀한 걸 모릅니다.

술람미가 그러합니다.

 

지난 시간 술람미가 신랑을 문전박대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은 신부가 보고 싶어서 밤이슬 맞아 가면서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잠에 빠져서 신랑의 오심을 귀찮게 여기고 외면하여 급기야 신랑을 떠나게 하고 맙니다.

 

술람미가 신랑이 왔음에도 잠을 깨우고 일어나기가 귀찮다고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신랑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녀간다는 표식만 해 놓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언제부터인가 예수가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린 술람미의 모습을 통하여서 우리들의 신앙에 허구성을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에 허상을 고발 하실 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했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말하는데 정작 그 마음에는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마음으로는 내 몸을 주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몸뚱아리는 상반되게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립니다.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린 술람미처럼 예수님을 마음에서 밀어 내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문 밖에서 문 열어 달라고 두드리고 계세요.

우리는 한 번도 마음속에 예수님을 품은 적이 없어요.

예수를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어요.

 

문전박대한 술람미에게 솔로몬은 흔적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는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외면함에도 영원히 떠나지 않고 자기 흔적을 남기고 간 솔로몬의 그 사랑이 있기에 안심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한 그 사랑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은 이러한 신랑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끝엔 죄인을 끝까지 사랑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만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결코 자랑거리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남이 아니라 주님의 희생과 사랑과 용서하심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술람미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문전박대를 하였지만 솔로몬이 자기 피(몰약)를 문빗장에 발라 놓고 간 것은 신랑의 피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희생한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빗장에 남긴 이 피 바름은 곧 내가 널 사랑한다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외면에도 피를 바르고 간 것은 솔로몬이 먼저 술람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술람미의 행동과 상관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베드로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가도 기어코 찾아 가서 구원을 해 내는 것과 같아요.

 

성도의 구원 속에는 목자가 양을 찾아낸 목자의 희생이 담겨 있어야 해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는 흔적이에요.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어요.

우린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순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순종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녀를 준 것과 같아요.

이삭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기 믿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하셨어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하여도 믿지 않고 비웃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준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아들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에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이 된 조상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믿음이” 아브라함을 구원한 것입니다.

 

“믿어서” 라는 말은 우리의 반응을 말하지만,

“믿음으로”는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내 행위가 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선물이 와서 그 믿음이 예수를 믿게 해 주어서 믿은 것이지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인간에겐 미련하게 보이고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성령)이 성도에게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믿어지게 해 준 것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우린 안 믿어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면 믿을 수밖에 없어요.

이게 믿어져야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볼 수가 있어요.

성도의 구원이란 이런 거예요.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셔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해 주어서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어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라 속에 이삭을 잉태케 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믿음이 잉태케 만들었어요.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으로 사라는 낳을 수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믿음으로 낳은 자식이지 사라가 믿어서 낳은 자식이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이와 동일해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순종과 상관없이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신 것과 같이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예수를 믿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가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해서 아내를 삼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술람미가 외면한 그 자리에 솔로몬의 사랑의 증표인 피를 발라 놓은 것입니다.

 

문빗장이란 마음이에요.

솔로몬이 술람미의 마음에 사랑을 작살처럼 확 박아 놓은 것입니다.

마치 고래 등에 작살을 박아 놓은 것과 같아요.

이 작살은 빠지지 않고 고래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녀요.

 

어부가 고래에게 작살을 박아 놓은 것은 기어코 고래를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에요.

고래가 도망을 가도 그 작살 때문에 어부는 따라가요.

그 작살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을 끌고 다닌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와서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어디로 가든지 함께 따라 다닌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이건 하나님이 야곱에게 화살(약속)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이 사랑의 화살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술람미가 싫다고 해도 솔로몬은 사랑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솔로몬이 지켜내어요.

 

그래서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반드시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아요.

성도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새 언약을 심어 놓았어요.

새 언약은 우리와 상의해서 심어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된 자들에게 화살처럼 박아 놓은 것입니다.

 

불(火) 도장을 찍어 놓았어요.

그래서 거듭남을 성령의 인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침이란? 노예에게 주인의 도장을 인두로 찍어서 이는 내 소유라고 표시해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인침이 되면 예수가 싫다고 도망을 가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와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게 끊을 수 없어요.

 

롬 8:35-39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마귀도 이 사랑을 끊지 못해요.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어요.

어미가 핏덩이 자식을 지켜 내듯이 아버지가 성도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화살처럼 박아 놓은 성도는 이 사실이 믿어져요.

그러니 환란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핍박 속에서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는 못 가게 하여도 예수를 믿는 믿음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해요.

이게 은혜에요.

 

우리들은 본성적으로 신랑을 버릴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 육신은 예수의 사랑을 담아내지를 못해요.

그래서 늘 배신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곧 우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신한 그 자리에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피를 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잔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술람미를 욕해서는 안 되어요.

술람미가 곧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술람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럴 때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솔로몬이 내 신랑이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왜 솔로몬을 문전박대 하였을까요?

이는 신랑을 가볍게 여겨서 그래요.

신랑의 사랑을 경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간사스러워서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술람미는 솔로몬을 위하여서라면 모든 것을 헌신하여야 해요.

천한 종을 고귀한 왕이 성은(聖恩)을 베풀어 주었잖아요.

이 엄청난 사랑을 안다면 어디 잠 자는 것을 깨운다고 귀찮아서 왕을 문전박대를 합니까?

절대로 그럴 순 없어요.

그런데 현실에선 그런 일을 하고 말았어요.

 

이 모두가 솔로몬의 사랑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왕의 사랑을 받다가 보니 왕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면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늘 받다가 보면 그 사랑이 귀한 줄 몰라요.

 

이기주의로 가득한 인간은 간사스러워서 남에게 사랑을 받다 보면 당연히 난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어요.

그럼 교만해져요.

교만해지면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죄는 생명을 주신 분을 경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게 불순종이에요.

죄가 불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한다는 말입니다.

 

우린 배은망덕(背恩忘德)하는 자들이에요.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잡아먹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죄인을 살모사 새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모사(殺母蛇)란?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는 뱀이란 말입니다.

죄인이 그러잖아요.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인간의 몸은 사망이 왕 노릇해요.

그래서 죄는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분을 우습게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모두가 죄가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힘을 무서워하고 사랑은 경홀히 여겨요.

인간들은 힘으로 다스리는 자에게는 굽신거려요.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생각하고 만만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은 힘에 논리로 다스려져요.

선악의 법이 자기를 힘으로 억압하는 사람은 무서워하게 하고 정말 아껴주고 사랑하고 잘해주는 사람은 만만하게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가정이에요.

자식들이 자기를 키워주고 돌보아 주는 부모 알기를 우습게 여긴다구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이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지요.

 

사 1:2-3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탄식을 합니다.

내가 자식을 키웠는데 그 놈들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은 알아보는데 이 이스라엘이라는 빌어먹을 놈들은 낳아주고 키워주고 보살펴주는 부모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를 하고 살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구원해 주었더니 십자가를 갖다 버리고 있어요.

 

인간들이 왜 십자가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줄 아세요.

십자가가 자꾸만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감추고 싶은 수치들을 자꾸만 드러낸단 말입니다.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인간은 자존심으로 살아가요.

인간의 자존심은 남에게 빚지고는 못 살아요.

남 앞에 당당하고 싶고 으뜸이 되고 싶어 해요.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당당하고 싶은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서 아버지 앞에 큰 소리치고 당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맨 날 예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 그만 하고 성도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성화주의에요.

 

이건 마치 옛날에 대감 집 머슴으로 살던 사람이 면책을 받고서 돈으로 양반의 명분을 사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자신이 머슴이었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과 같아요.

양반 행세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추한 과거를 감추고자 해요.

그런데 십자가가 그 추함을 자꾸만 까발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싫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떠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닭소리는 어떤 소리일까요?

베드로는 아마도 닭이 없었으면 했을 것입니다.

닭소리만 들리면 예수님을 저주했던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잖아요.

 

베드로에게는 닭소리가 고문이에요.

자신의 아픈 기억을 자꾸만 불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고기를 안 먹었다고 합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이지만 말이에요.

 

인간은 남에게 도움을 입으면 그것을 은혜로 두지 않고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겨요.

지금은 비록 내가 부족해서 당신에게 빚을 지지만 내가 성공하면 반드시 열배나 갚겠다고 해요.

이게 자존심이거든요.

그냥 빚진 자로서 감사함으로 가지고 있으면 좋은데 남에게 빚지곤 못 살겠다는 거예요.

 

이런 사고가 신앙에까지 자리해서 성화주의란 못된 신앙을 낳은 것입니다.

전 여태껏 성화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 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을 못 보았어요.

예수님 피를 자랑하는 인간을 만나보지 못했어요.

구원이후의 삶을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것에 두지 않고 예수의 피를 가리는 것으로 두고 있어요.

참으로 신기하지요.

 

예수의 피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면 그 피를 지키고 자랑하여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스러워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피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신앙의 자랑에 예수의 피에다가 자꾸만 인간의 공로를 섞어요.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에 구원의 능력을 두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으면 진짜 예수님의 피는 구원을 하는 데에만 필요한 일회용이 되어요.

그 후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예수의 피가 필요가 없어져요.

예수의 피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거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으면 예수의 피로 용서받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말씀대로 살아서 당당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 육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내지를 못해요.

우리의 의지나 각오가 약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의 피 뿌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화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십자가를 넘어서서 온전한 대로 나아가자고 해요.

어떻게 온전해지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지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피를 말하면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아직도 십자가에 머물러 있느냐고 비아냥거린단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 피는 이제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구원 받을 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예수의 피는 대학 합격통지서처럼 서랍 속에 다 처박아 놓았어요.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답게 떳떳해지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도다움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갖고 있어요.

 

이건 구약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 그대로에요.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틀리지 않아요.

그런데 그 당연함이 나중에는 신앙의 근본으로 자리잡고 만 것입니다.

율법대로 산 것을 의로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킨 자는 의로운 자라고 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는 죄인으로 취급하여서 상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율법 지킨 것으로 상좌에 앉아서 의인 행세를 하였단 말입니다.

 

이게 죄인들의 모습이에요.

아담 안에서 바라보는 어둠의 사고에요.

어둠의 사고는 인간이 뭔가 하면 의가 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밀어내고 인간의 행함을 끼워 넣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니까요.

 

꼭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아요.

성화주의자들도 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다고 해요.

그러나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구원 이후의 삶을 따로 챙겨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동일해요.

바리새인들의 착각은 율법을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함이에요.

죄를 고발하는 것은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이에요.

죄가 있어야 용서가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필요합니까.

 

율법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너희는 용서가 필요한 자라고 알려주어요.

하나님의 용서로 사는 자라고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으로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너희가 이런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했어요.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의를 주셔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의(義)를 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옷을 입듯이 의(義)를 입혀주세요.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거룩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주잖아요.

 

그러니 인간들 쪽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반칙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반칙을 신앙으로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서 넘어뜨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대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 것은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항복 하는 것이에요.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킨 것입니다.

 

이방인은 율법이 없으니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살아요.

이방인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내가 왜 죄인이냐고 화를 내잖아요.

율법이 없으니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겐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랑받고 산다는 것을 알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율법도 복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사랑받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때문임을 알아야 했어요.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대로 살았다는 것이 힘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교만했다구요.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고 지킨 것이 힘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모가지 빳빳하게 처 들고 내가 뭘 잘못 했느냐고 바락바락 덤비는 것과 같아요.

 

이걸 지금 성화주의자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되는 것이 하나님께 엄청난 영광이 된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예수님의 공로는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자랑스럽지 않고 자신이 성화된 것이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를 말하면 제발 십자가! 십자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십자가만 붙잡고 있을 거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마치 엄청난 것을 깨달은 신선들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이젠 십자가를 넘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본받고 살아야 한다고 해요.

이게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인 줄 꿈에도 몰라요.,

 

하나님의 백성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어야 해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똑같은 죄인인데 하나님 백성에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백성다움이에요.

 

우린 이렇게 못난 찌질이들인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살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해요.

이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인간들이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라고 선물로 주신 거에요.

구원을 선택으로 하는 이유가 인간의 자랑거리를 배제하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만 담아두고자 한 것입니다.

 

선택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이지 우리의 일함이 아니에요.

그러니 구원받은 자에겐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에 은혜가 담겨져 있어야 해요.

옆구리 쿡 찌르면 하나님의 은혜가 터져 나와야 해요.

난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삽니다! 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탕자가 맏아들 되면 안 되어요.

열심히 충성해서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하면 안 되어요.

열심히 충성하는 것은 아버지의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항상 기억할 것은 난 아버지의 용서로 살고 있는 탕자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어요.

이걸 잊으면 아버지 앞에 모가지를 세워요.

나도 할 만큼 했다고 덤빈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아니 아버지 재산을 다 말아 먹은 놈을 용서 했으면 충성을 다해서 아버지 일을 도와야지요.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 순 없잖아요.

스스로의 고백처럼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일을 해야지요.

그러나 종처럼 일을 했다고 해서 탕자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아요.

열심히 일해서 탕자의 잘못을 벗고자 한다면 이건 큰 착각이에요.

죽도록 충성해도 그건 벗겨지지 않아요.

죽도록 충성 한 것을 아버지 앞에 자랑으로 내어 놓으면 안 되어요.

 

아버지는 탕자에게 열심을 끄집어내려고 용서 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인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아버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 일방적인 사랑을 훼손하면 안 되어요.

 

아버진 탕자가 일을 하든 안하든 상관치 않고 용서 해 주셨어요.

그럼 탕자가 일을 하고 안하고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아들 됨을 거론하면 안 되지요.

일을 안 해도 고맙습니다! 하면서 살고 일을 해도 고맙습니다! 하고 살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하고 안 한 것으로 아버지의 용서하심을 훼손하면 안 되어요.

그건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짓을 한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살아야지!

우리가 율법을 지켰으니 괜찮지요! 라고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우리 율법을 지켰으니 괜찮지요 라고 했다구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잖아요.

너희들이 율법대로 산 것을 바라지 않고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이 사랑을 훼손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서 망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망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그건 그 어떤 짓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건 제사를 지낸 것이지 긍휼을 구한 것이 아니에요.

긍휼을 모르면 아무리 성화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저주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사 1:10-27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25.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27.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럽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직설적으로 말해도 양해하세요.

에라이! 이 소돔과 고모라 인간들처럼 저주 받을 놈들아!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새벽기도 나오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너희들 충성을 원하더냐!

이젠 너희들이 새벽기도로 모이고 철야기도로 모이고 주일이고 수요일이고 금요일이고 모이는데 질려 버렸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신앙생활을 하라고 했느냐!

이건 모두가 목사라는 도적놈들이 너희들 돈 뜯어내려고 만든 말이지 않느냐!

그래서 목사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버전으로 하면 독사새끼란 말입니다.

 

백날 모이면 무얼 하느냐!

내 속만 뒤집어 놓는데!

꼴보기 싫으니 당장 교회 문 닫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속 썩히는 자식들을 향하여 어휴~ 내가 저 원수 같은 새끼를 왜 낳아가지고 이 속을 썩이느냐고 하면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탄식하는 것과 같아요.

 

너희들이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한번 따져 보라고 합니다.

어느 놈이 그렇게 가르쳤냐고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가 인간들 자랑거리가 난무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었는지 살펴보자고 합니다.

 

은(銀)에는 찌끼가 끼고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는 것은 복음이 변질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이 된 것에 인간의 성화가 섞이느냐 에요.

왜 처음에 준 그 순수한 것들을 다 잃어버렸느냐 에요.

교회 안에 살인자들만 우굴거리고 예수 믿고 세상에서 복을 받겠다고 찾아온 창기들만 우굴거린다고 합니다.

 

목사라는 인간들은 전부 돈만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낸다고 하듯이 목사들이 돈 있는 놈들에겐 굽실거리면서 돈 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내가 가서 그 도적놈들을 다 때려잡고 원래 예수의 피로서만 주어지는 구원의 즐거움이 넘치는 의(義)에 성읍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외모로 차별이 없는 신실한 고을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사야를 통한 이러한 하나님의 탄식 소리는 자식을 키워보면 알 수가 있어요.

부모들이라면 다 겪는 일이에요.

자식들은 부모 귀한 줄 몰라요.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어디서 거저 주어지는 것인 줄 알아요.

그러니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남에겐 큰소리치지 못하면서 꼭 부모에게 큰소리치잖아요.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그것도 엄마에게 말이에요.

엄마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고 보살피고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 분이에요.

그럼에도 가장 쉽게 생각해요.

이 못난 놈들 눈에는 엄마가 제일 만만하게 보여요.

그러니 엄마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이게 뭔 줄 아세요.

교인들이 예수님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과 동일해요.

예수님은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고 우리를 낳으셨어요.

그러니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피를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구요.

그런데 우린 예수님의 피를 헌신짝 취급을 해요.

마치 수틀리면 엄마에게 바락 바락 덤비는 못된 새끼들처럼 말이에요.

 

며칠 전에 길을 가는 중에 남자와 여자 중학생들이 무리지어서 가는 뒤를 따라 가면서 본의 아니게 그놈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어요.

그 녀석들이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자기 부모에 대하여 불만을 토하면서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서로 욕을 하는 것입니다.

잔소리만 하고 자기들 뜻을 안 들어준다는 불평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근데 그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제가 머리를 뭔가에 맞은 듯이 번쩍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하나님 앞에 저 놈들이라는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저 놈들과 같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에선 그렇지 않잖아요.

맨 날 우리 뜻대로 안 된다고 불평만 하잖아요.

대 놓고 욕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엔 늘 불만이 가득하잖아요.

 

복음에 누가 태클을 걸면 속이 상하잖아요.

그럴 땐 하나님께 원망해요.

하나님 벼락은 뒀다가 무엇에 쓰려고 합니까?

저런 놈들을 그냥 확 태워버리지 않고 뭣합니까? 라고 한다구요.

하나님은 왜? 내 충심을 몰라줍니까? 라고 불평하잖아요.

속상하면 속으로 그런단 말입니다.

 

마음으로는 그래 복음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니 이해하자!

예수님이나 제자들도 다 이런 수모를 당했는데 뭐!

나도 당하는 것이구나 라고 당연한 것이란 것을 알아요.

그런데 아는 것하고 실제는 달라요.

 

마음 한 구석에선 아는 것과 정 반대의 모습이 튀어나와요.

욕이 먼저 튀어 나오지 용서가 나오지 않아요.

욕이 나온다는 게 하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님을 육두문자 써가면서 욕을 해 대는 그 철없는 녀석들처럼 말이에요.

 

제가 그래요.

여러분은 천사인줄 모르지만 전 천사표가 되지 못해요.

소리 나지 않는 총이 있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부모형제 처 자식부터 먼저 죽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제일 속을 썩이잖아요.

 

어렸을 땐 철없이 부모를 욕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부모를 수없이 욕하고 살았어요.

나 보다 사랑을 더 받는 형제가 있으면 죽이고 싶도록 미웠어요.

엄마 사랑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해서 동생을 괜히 미워하잖아요.

 

결혼해서 살다보면 아내나 남편이 얼마나 또 밉습니까.

자식은 또 어떤가요.

어느 한 놈이라도 속 섞이지 않은 놈이 있나요.

시어머니는 또 어떻구요.

얼마나 밉습니까.

 

이웃은 또 어떠합니까.

교회 안에서 안 그런가요.

누가 목사에게 사랑이라도 더 받는다 싶으면 시기하고 질투하잖아요.

목사도 밉잖아요.

 

목사는 안 그런 줄 아세요.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가보세요.

미워요.

목사들은 교인들을 자기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교회 있다가 다른 교회로 가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언제부터 자기 교인입니까?

그런데도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오면 그 사람은 태초부터 자기 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교회로 가면 미운 것입니다.

 

목사들끼리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다가도 교인 하나가 옮겨 가 보세요.

그것도 돈 많은 사람이 가 보세요.

그럼 원수가 되어요.

 

우린 나 이외 모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인간들 숲에 둘러싸여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리 나지 않는 총을 한 자루씩 주면 서로 서로 다 쏴 죽였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죽일 거구요.

그럼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인간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 다 쏴 죽였을 테니까요.

 

이런 인간들이 사랑을 한다고요.

지나가는 개가 웃습니다.

강아지가 지나가면서 야! 이 인간아! 사기 치지 말고 냉수마시고 정신 좀 차리라고 그런다구요.

강아지가 우리에게 니들이 서로 사랑을 하면 내 발에 장을 지진다고 합니다.

우린 누굴 사랑하거나 하는 인간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했으니 우린 매일 살인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살인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에요.

그 어떤 인간도 남을 사랑하는 인간은 없어요.

단 한 사람도!

 

제 안에는 선(善)이 없어요.

악(惡)만 가득해요.

하지만 겉으론 천사처럼 미소를 짓는 다구요.

이 웬수가!

 

솔직히 제가 복음 전하는 게 그게 어디 제 겁니까!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요.

설교는 하나님이 영감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마치 자식이 누리는 모든 것이 부모님의 것과 같아요.

 

그럼에도 난 내 실력이라도 되는 냥 유세를 떨어요.

꼴값을 떤다구요.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이 은혜 안 주시고 영감 안 주시면 설교 한편도 못해요.

그럼에도 감사치 않고 도리어 안 알아준다고 불평을 한다구요.

이런 몹쓸 놈이 어디에 있나요?

 

솔직히 자식들 속을 썩일 때 보면 버려두고 도망가고 싶지요.

하지만 그 놈들 버려두고 도망가면 그 놈들 거지가 되어요.

그걸 알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이 속을 썩여도 사랑으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속을 썩여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보듬고 키워요.

왜냐하면! 부모는 자식을 법으로 키우지 않고 사랑으로 키우기 때문이에요.

 

부모에겐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에요.

자식에겐 법이 없어요.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용서하고 안아주고 덮어주고 위로하고 달래주어요.

 

그럼에도 어디 자식들이 그걸 아나요.

몰라요.

그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지랄을 떨잖아요.

부모가 없어보아야 비로서 알아요.

아! 내가 부모님 귀한 줄 몰랐구나! 애통해 합니다.

 

지금 술람미가 그래요.

솔로몬은 밤 이슬 맞아가면서 사랑하는 님을 찾아 왔는데 술람미는 철없는 새끼들 마냥 자기 잠을 깨운다는 핑계로 솔로몬을 문전박대를 하고 말잖아요.

천한 노예 주제에 왕의 사랑을 거절한다구요.

세상에! 이런 몹쓸 인간이 있나요.

마치 부모에게 욕을 해 대는 철없는 자식들 같잖아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아는 그 녀석들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 헤요.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처럼 좋은 말이 없어요.

아담과 하와가 이 말만 알았더라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분수를 알고 그냥 피조물로 살았으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그만 홀라당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같이 되고자 한 것이 죄입니다.

죄인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예수를 닮겠다고 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예수는 안 믿고 성화 한다고 까불락 거리는 것이 죄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이게 죄인지 꿈에도 몰라요.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지고자 하는 것은 어둠의 사고에요.

어둠의 사고란? 인간의 가능성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사고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지 않아요.

 

자기 마음대로 막 살으라는 말이 아니고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고 해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어요.

이게 어둠의 사고란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나!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데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겠다고 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모두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 것이에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문전박대한 것은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잠 잔다고 밤이슬 맞아가면서 온 신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주인은 떠나요.

숨어 버려요.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고 패망의 선봉(先鋒)이라고 하지요.

선봉이란? 말은 칼 끝에 서서 까분다는 말이에요.

칼끝에 서서 까불면 어찌 되겠어요.

찔리지요.

 

신앙도 촐랑대면 넘어져요.

잘난 척 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다 아는 척 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주제를 알라고 넘어뜨려요.

우리는 수 없이 넘어뜨림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저도 수없이 촐랑대다가 넘어졌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주변에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거치는 일을 했어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잘난 척 하는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에요.

이건 아마도 죽어야 사라질 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는 교만한 자들이에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술람미의 이런 모습을 보면 화가 나요.

우리는 법이 가깝지 은혜가 가깝지 않아요.

우리 성질 같으면 그냥 에이~ 이 싸가지 없는 인간아!

그러면서 확 떠나 버리고 싶지요.

 

그럼에도 솔로몬은 술람미가 문을 안 열어주니 다른 집에 마실 가면서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표시로 자신의 피를 문에 발라 놓고 갑니다.

이는 곧 부모의 사랑과 같아요.

이러한 솔로몬의 부모와 같은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술람미가 외면해도 떠나지 않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깨달아지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신랑을 찾아 나서게 되어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깨달음이 은혜에요.

술람미는 신랑이 떠나고 난 뒤 문빗장에 발라진 피(몰약)를 보고서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뒤 늦게 잠이 깨어서 자신의 잘못을 안 술람미는 신랑을 찾으러 나섭니다.

동네방네 신랑을 찾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 신랑 못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다가 밤길에 깡패를 만나서 수모도 당합니다.

 

하지만 신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습니다.

여보시오!

내 신랑을 못 보았소!

 

그러자 사람들이 비아냥거립니다.

 

아 5: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야! 니네 신랑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우리더러 찾아달라고 하느냐!

니네 신랑이 우리 신랑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데 뭘 그리 찾느냐고 합니다.

다른 여자들에겐 솔로몬이 대수롭지 않겠지만 술람미에겐 너무도 귀한 분이에요.

 

그 신랑은 피 남편이에요.

피 남편이란 생명을 준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자기 신랑의 장점을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말이 있습니다.

솔로몬도 술람미를 엄청 자랑했어요.

그러자 술람미도 신랑을 자랑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방해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술라미를 검둥이라고 놀렸어요.

게달의 장막 같다고 조롱했어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니 조롱한 것과 같아요.

 

그러나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가 솔로몬 궁전에 휘장 같이 보였어요.

속된 말로 술람미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솔로몬의 취향이 검둥이를 좋아해요.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취미에요.

죄인을 사랑한단 말입니다.

검둥이는 바리새인들이 놀리던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의 상징이에요.

 

우리 예수님도 취향이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지금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보시기엔 세리와 창기들이에요.

이런 못난 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런 황감 할 때가 어디 있나요!

그러니 자기 주제 파악을 해야 합니다.

 

지금 술람미가 자기 신랑을 찾아다니자 사람들이 잘난 신랑도 아닌데 뭘 그리 찾느냐고 비아냥거리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이 비아냥 거렸어요.

야! 그 나사렛 촌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따르느냐고 했어요.

예루살렘엔 그 촌놈 보다 나은 선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거지깽깽이를 따라다니느냐고 조롱했어요.

 

그러자 술람미가 자기 신랑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아 5:10절.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사랑은 눈을 멀게 해요.

이걸 흔히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눈에 사랑이 뒤집어 쓰이니까 다 사랑스럽게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흠도 매력으로 보여요.

남이 하면 창피하게 보여도 내 애인이 하면 멋지게 보여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그래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요.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를 조롱하는 사람들 눈에는 솔로몬이 그저 그렇게 보였어요.

그러니 술람미에게 별로 잘난 신랑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아서 찾아다니느냐고 비웃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술람미 눈엔 내 사랑하는 님은 한마디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합니다.

뛰어나다는 말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입니다.

이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승(優勝)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의 특징을 말합니다.

내 님은 희고도 붉다고 합니다.

여기서 “희다” 라는 말은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난다는 말이에요.

이건 세상에 없는 빛을 말해요.

 

“붉다” 는 “아둠” 이라는 말인데,

“아둠”은 “담” 이라는 “피” 에서 유래된 말이에요.

그러니 ‘희고도 붉다’ 라는 말은 내 신랑은 아무 흠도 없는 깨끗한 피를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사람들이 술람미에게 우리 신랑이나 니네 신랑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뭘 그리 자랑하느냐 라고 비아냥거리자 깨끗한 피를 자랑하고 있어요.

다른 말로 자기 문빗장에 바르고 간 그 피를 상기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적으로는 그 피는 무흠하고 죄가 없는 분이란 뜻입니다.

의롭고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피가 희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피가 깨끗하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여자들이 술람미에게 네 신랑이 다른 신랑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느냐고 물으니 우리 신랑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뛰어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신랑은 인간이 아니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어저께 어떤 분이 블로그에 댓글로 질문을 하시더군요.

자기 교회 목사님은 성화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설교와 너무도 비슷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은 예수님을 본받자고 하지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글을 적었어요.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다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다 있는 것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고 종교 강론이라고 했어요.

 

설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도출해 내고자 인간의 감정을 자극해서 열심과 충성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설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측은지심(惻隱至心)을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그 피로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게 설교에요.

 

설교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여서 달콤하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린 그 무엇을 하여도 죄인일 수밖에 없고 이런 죄인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았습니다! 를 증거하여야 해요.

 

비록 배운 것 없고 말이 어눌하고 매끄럽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면 정답을 쓴 것입니다.

반대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서 청산유수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웃기면서 감동을 주어도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지 않으면 잡소리인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악한 것은 예수의 피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성화라는 인간의 행함으로 예수의 피를 감추어 버리기 때문이에요.

마귀는 예수의 피만 말하지 말고 다른 것 다하라고 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것 다 안 해도 예수의 피만 증거하라고 해요.

이게 다름이에요.

 

잘 분별하셔야 해요.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천국과 지옥처럼 완전히 달라요.

하나님은 우리 몸에 예수의 의를 남기고자 하고, 우린 우리 몸에 우리 의를 남기고자 해요.

저는 우리 몸에 예수의 의(義)를 남기라고 하고, 성화주의자들은 우리 몸에 인간의 의(義)를 남기라고 해요.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할지 그 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요.

좋은 게 좋지 않느냐 라는 식으로 흘러가요.

 

복음은 냉정해요.

그 어디에도 인간의 것이 끼일 틈을 주어선 안 되어요.

복음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구약에서 섞이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는지 아세요.

소와 나귀를 겨리하지 못하게 하고!

밭에 두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두 가지로 직조된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이방 결혼은 금하게 하였는가 하면 이는 거룩을 강조하기 위함이에요.

 

바울도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 될 수가 없다고 했어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진리문제이기 때문에 혼합을 금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에 인간의 행함을 섞으면 안 되어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경고한 것도 예수 믿음에 율법 지킴이라는 두 사상을 섞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포도주는 썪어버려요.

포도주란 예수님의 피(의, 義)이고 물은 인간의 행함(의, 義)이에요.

마귀는 항상 예수의 공로에 인간의 것을 섞어 왔어요.

교회 안에 교묘하게 두 물을 섞어 버리는 일을 해 왔다구요.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 두 물이 섞이지 않는 싸움을 게을리 하면 안 되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피가 없으면 죄사함이 없어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 흐르는 사상은 흠 없는 제물의 피에 있어요.

노아 홍수 이후의 이 땅은 정결한 제물의 피 흘림으로 유지가 되어요.

성도는 피를 지키는 싸움을 하야야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자기 신랑을 죄 없는 피를 소유한 자로 묘사한 것은 자기 신랑은 신(神)이란 말입니다.

신랑을 신으로 의역해서 말하면 솔로몬은 신들 중에서 으뜸 신이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33장 4절을 보면 여호와가 애굽에 신들을 혼을 냈다고 합니다.

여호와가 애굽에 신들을 혼냈다는 것은 곧 여호와만 신이고 다른 놈은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걸 신약에선 “만유의 주” 라고 합니다.

 

빌 2: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고 합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란 말입니다.

만물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主)라 고백케 하셨다고 합니다.

 

주란 주인이란 말입니다.

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만유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는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술람미는 자기 신랑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나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뛰어나다” 는 것은 깃발을 높이 세운 것과 같은 말이에요.

승리자가 깃발을 든 것과 같은 말이에요.

자기 신랑은 승리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뛰어나다는 것은 하나의 표식이에요.

기호(旗號)라고도 해요.

이 깃발을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사 11: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 11:12절.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離散)한 자를 모으시리니”

 

사 13:2절 “너희는 자산 위에 기호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로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은 하나님께서 깃발을 높이 단 것이에요.

깃발을 세워서 자기 백성을 모으세요.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과 땅 사방에서 흩어진 자들을 모아요.

 

이들이 바로 신약에서 흩어진 12지파들이에요.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말해요.

그러니 모든 성도는 예수의 깃발 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영적으로 새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깃발 아래 모인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모아서 존귀한 자의 문(門)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지요.

존귀한 자의 문이 어디입니까?

천국 문이에요.

결국 술람미는 자기 신랑은 메시야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의 모습을 온 몸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말하는 솔로몬의 모습들은 모두가 메시야의 모습들이에요.

신약에 이런 모습을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오늘은 술람미가 자랑하는 솔로몬의 온 몸 구석 구석을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은 도리어 신랑의 자랑을 곡해 할 수가 있기 때문에 큰 의미만 살펴볼게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자칫하면 메시야 됨을 손상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술람미가 자랑하는 신랑의 모습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무 흠이나 티가 없는 정결하고 순수한 귀공자의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꽃이 만발한 풀밭처럼 부드럽고 자상한 어머니의 품과 같기도 하고!

때로는 왕으로서 보좌에 앉아서 호령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화반석 기둥처럼 요지부동하면서 자기백성을 지키는 강하고 든든한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말처럼 힘 있고 역동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여 주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민을 터놓고 주고받을 수 있는 동무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술람미는 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신랑이시며!

우리의 친구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한마디로 완벽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엔 그 어느 신랑도 이런 신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술람미는 당당하게 자기 신랑을 자랑합니다.

 

성도는 신랑을 자랑하는 사람이에요.

바울은 예수를 자랑하는 자가 할례당 이라고 했어요.

할례당이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를 말해요.

즉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른 말로 새 언약이 심겨진 성도를 말해요.

 

마음에 새 언약이 심겨진 성도는 새 언약만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은 그것이 귀하고 가치가 있다고 할 때만 할 수가 있어요.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십자가 이외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는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이외는 다 배설물임을 알았어요.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했어요.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이러한 것들은 다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배설물은 영양분이 다 빠진 똥이란 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지키던 모든 절기를 한마디로 똥이라고 했어요.

 

말 2:3절.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견책한다고 합니다.

견책(譴責)은 “가아르” 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심하게 질책한다는 말이에요.

격분해서 쓸어버린다는 뜻이에요.

마치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은 의분(義憤)의 감정표현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무얼 나무랍니까?

그들이 지켜온 절기의 희생을 나무라고 있어요.

절기의 희생이란 율법 신앙 전부를 말해요.

제사와 성전에 모이는 것 모두를 말해요.

한마디로 신앙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똥이라고 합니다.

그 똥을 얼굴에 쳐 바른다고 하고 있어요.

 

똥이란? 영양분이 다 빠진 쓰레기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절기를 지키면서도 그 절기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고 지켰다는 말입니다.

왜 제사를 지내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지킨 것은 곧 쓰레기이고 똥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깃덩어리로 드려지는 그 제사를 받고자 함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고 살고 있음을 알기를 바랬어요.

 

너희들의 죄를 흠 없는 제물이 대신 담당해 주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랬어요.

장차 그리스도라는 메시야가 이렇게 흠 없는 제물처럼 오셔서 너희들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제사의 의미를 알기를 바란 것입니다.

제사의 의미를 모르면 양분 없는 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율법에 흠이 없이 산 것을 똥이라고 한 것은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지켰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율법이잖아요.

 

그럼 율법에 흠이 없다는 말은 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했어요.

그런데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땐 율법으로 나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했어요.

이게 비로 율법에 의미를 모르고 지킨 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 신앙을 배설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한 의미가 바로 하나님은 너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는 말씀이에요.

지금도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세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했어요.

우리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어요.

이는 곧 하나님께선 말씀으로 우리의 언행심사(言行心思) 모든 것을 해부해서 그 속에 죄를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고 했어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 피를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예수님 피를 붙잡는 것은 영양분을 먹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똥을 얼굴에 처바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말씀을 똥처럼 지키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하셨고 사도들이 새 언약 안에서 서신서들을 기록하였는지를 몰라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꼴값을 떠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겠다고 지랄을 떠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똥을 얼굴에 처바르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선 똥은 진 밖에 내다 버렸어요.

이스라엘의 진 밖은 어둠의 세계를 말해요.

즉 저주의 세계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끝을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으로 규정하고 심판했어요.

구약은 똥이라고!

껍데기라고!

불 태워 버릴 쓰레기라고!

 

그래서 구약의 끝을 기록한 말라기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른다고 한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저주로 그 땅을 쳐 버린다고 했어요.

초개같이 불살라버린다고 했다구요.

 

그런데 이런 일이 구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주님이 재림을 하실 때 똑같이 일어나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한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신약의 교회들이 또 그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빠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신앙의 양분이에요.

생명이고!

알맹이고!

의미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빠진 신앙은 전부가 똥인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가 자랑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변화된 것을 자랑해요.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고!

자기가 성화된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안 믿고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자기 얼굴에 똥을 처바르고 있으면서도 몰라요.

성화는 죄라고 하면 난리를 쳐요.

이 등신들이!

얼굴에 똥 묻었다고 하면 지랄을 떨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죄에요.

예수님 피를 믿는 게 의이고 신앙이에요.

믿음의 끝자락엔 항상 예수님의 피가 남아야 해요.

그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아야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는 내어 놓지 않고 자기가 행한 성화를 내어 놓느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안 믿는 자란 말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없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예수님을 자랑하는 자가 마음에 할례를 받은 거듭난 성도라고!

무엇을 자랑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어요.

 

누가 성도냐?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자가 거듭난 성도에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예수님을 자랑하면 신자이고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면 불신자에요.

예수님 자랑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요.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자랑 할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 끝을 따라가 보면 인간을 드러내요.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해요.

행함을 강조해요.

 

믿음 속에도 행함이 있어요.

그러나 그 행함은 예수님의 일하심이에요.

이 행함은 누가 강요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생명에 흐름이기 때문에 저절로 나타나요.

시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이 나타나요.

자신이 비록 뭔가를 하였다 할지라도 그 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요.

이걸 야고보서에서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했어요.

그 행함이란 바로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강도에게 매를 맞고 옷을 빼앗겨 가면서도 신랑을 자랑하고 있잖아요.

이게 신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의 모습이에요.

신랑 자랑하다가 보면 욕을 먹어요.

 

내가 욕을 먹는 것보다 신랑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욕을 먹고 매를 맞아 가면서도 신랑을 자랑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안에 믿음이 있는가 확증해 보세요.

 

나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예수님의 피가 자랑스럽습니까?

아니면 변화된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자랑스럽지 않으면 당신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자랑스럽지 않으면 당신은 성도가 아니고 종교인입니다.

 

부디 여러분 안에 예수의 피 이외는 모두가 배설물처럼 여겨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술람미처럼 매를 맞아 가면서도 신랑을 자랑하고!

옷을 빼앗겨 가면서도 신랑을 자랑하고!

조롱을 당하면서도 신랑을 자랑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배반을 하여도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깊디 깊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신랑의 사랑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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