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74강.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왕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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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10. 25.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74강.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왕 (요 12:12-19)

-.정낙원 목사

 

요 12:12-19=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언뜻 들으면 논리적으로 이라 할 수가 있어요.

 

없으면 없는 것이지!
어떻게 없다고 하면서 없는데서 있는 것이 나왔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까?

없으면 나오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나왔다고 합니다.

 

성경은 전부 이런 말로 되어 있어요.

죽어야 산다!

살았으나 죽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육에 속한 사람들에겐 성경을 주어도 몰라요.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보면 다 이해가 되어요.

믿음으로 받으면 다 이해가 되어요.

 

그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을 이해해 봅시다.

아주 쉽게 설명 할게요.

지금 제가 칠판에 그림을 그립니다.

 

처음엔 넓은 들판을 그립니다.

하늘에는 뭉게 구름이 떠 있습니다.

들판 가장자리 초원에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 자그마한 집을 그립니다.

집 앞엔 실개천이 흐릅니다.

해가 산마루에 걸렸네요.

석양(夕陽)이 가까이 오는 시간입니다.

집 마당 문 앞에서 사랑하는 님이 먼 곳을 응시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곁엔 강아지 한 마리도 같이 기다리고 있군요.

들판 저 쪽에서 사랑하는 낭군이 양 손에 커다란 선물을 사 가지고 껑충 껑충 오고 있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지금 제가 그린 이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보이는 곳에서 나왔습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왔습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왔지요.

제 머리 속에서 나왔잖아요.

 

제 머리 속에서 나왔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나온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칠판에 그려진 그림은 제 생각에 이미 그려져 있었어요.

다만 지금 칠판에 옮겨 놓은 것뿐이에요.

 

여러분은 제 머리 속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나온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제 생각이에요.

이 그림은 제 생각 속에 이미 오래 전에 있었어요.

 

오래 전을 성경 식으로 말하면 창세전이에요.

창세전에 있던 그림을 지금 칠판에 그렸어요.

하나님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된 것은 지금 역사라는 세상에 옮겨 놓은 겁니다.

그러니 보이는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지요.

 

소설가가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머리 속에 이미 글이 있어요.

흔히들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보이는 실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을 예술이라고 합니다.

예술이라는 말의 의미는 머리 속에 심겨진 꾀(그림)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을 말해요.

참 재미있지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그럽니다.

여러분~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예정한 것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머리 라고 그러니 좀 이상한데!

그럼 머리라 하지 말고 언약이라고 합시다.

 

언약이란?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요.

언약은 마치 영화 대본과 같아요.

대본 속엔 시작부터 끝이 다 들어가 있어요.

이걸 한 장면 한 장면 담아내면 멋진 한편의 영화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는 예레미야가 있어요.

이 사람은 국가의 멸망을 선포한 사람이에요.

자기 입으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말하려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애가라는 글을 썼어요.

 

애가(哀歌)란? 슬픈 노래에요.

예레미야가 토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가 슬픈 노래에요.

애가를 쓴 사람은 예레미야 한 사람뿐이에요.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해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자신은 복중에 짓기 전에 하나님이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고!

나오기 전에 이미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6=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찾아와서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야!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네가 살아갈 것을 미리 정해 놓았단다!



그게 뭔데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어!



선지자가 뭔데요? 

망한다고 외치는 자들이란다!

왜? 하필 나 입니까!

 

하나님이 배역을 정해놓고 예레미야를 만든 겁니다.

마치 영화감독이 대본을 보고선 그 배역을 아~! 이건 예레미야가 하면 되겠구나! 하고 점을 찍어 놓은 것과 같아요.

그러니 예레미야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운명이 결정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야~ 예레미야 넌 눈물의 선지자 해!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패망을 외치고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친구들에게 욕을 먹고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삶을 살았어요.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예레미야가 태어나고 이런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그렇게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슬프다고 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백성들ㅇ이 죄를 고발하다가 미움을 받고 죽는 것이니까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한국교회 교인들 같으면 할렐루야! 아멘! 이라고 할 텐데!

그러나 예레미야는 믿음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슬프데요.

왜? 슬프겠어요.

자기 인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언약이라는 영화 한편 찍기 위해서 창조가 되어졌잖아요.

 

그러니 예레미야는 언약 때문에 생겨난 겁니다.

예레미야만 그런가요?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그래요.

모든 만물이 이렇게 생겨났어요.

저와 여러분도 언약 때문에 생겨났어요.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나,

다른 복음을 증거하는 거짓 목사나,

절간에서 염불하는 스님이나,

점치고 굿하는 무당도 모두가 언약 때문에 생겨났고 언약을 위하여 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복중에 짓기도 전에 배역을 그렇게 맡긴 겁니다.

 

예수님도 언약 때문에 이 세상에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도 다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내용입니다.

이 또한 정한 때에 정한 시나리오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환호를 합니다.

 

마치 북한 인민들이 도로변에 서서 외국 국빈을 맞이할 때 꽃을 흔들면서 열광하는 것과 같아요.

북한 인민들이 각본에 따라서 움직이듯이 지금 유대인들도 뭔가 홀려서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구도 이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았어요.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러라고 시키지 않았어요.

종교지도자들도 시키지 않았어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는데 백성들에게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라고 할 리가 만무하지요.

그럼 누가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게 하셨을까요?

이는 주께서 백성들에 마음을 흥분시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움직여요.

하나님이 마음을 흥분시켜 주어야 해요.

 

학개 1장을 봅시다.

 

학 1: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학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짓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전을 짓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마음을 흥분시켜서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이 마음을 흥분을 시키시니까 이들이 성전을 짓는 역사에 동참을 한 겁니다.

 

그럼 묻습니다.

이 성전을 백성들이 지었는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지으신 건가요?

하나님이 지으신 거지요.

백성들은 그냥 사용이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세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이걸 알아요.

그래서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봉사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에이~ 뭐! 그딴거 가지고 그래 하지 마세요.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시키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물론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자 마음에도 없는 헌금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으로 우러나는 헌금은 아무나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시켜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교회에 청소하는 것이나!

성도를 섬기는 것이나!

하다못해 남에게 자짱면 한 그릇 사 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 시키셔야지만 기쁜 마음으로 할 수가 있어요.

 

다윗도 성전을 짓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헌물을 요구하자 백성들이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차고 넘치도록 바쳤어요.

그래서 다윗이 그럽니다.

 

역대상 29장을 봅시다.

 

대상 29:13-14=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너도 나도 힘에 넘치도록 헌물을 했어요.

다윗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이런 마음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헌물을 바친 백성들을 칭찬하지 않고 그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켜 주신 하나님께 찬송 하였어요.

우째 이런 마음을 주셨나이까! 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어요.

 

이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도 하나님께서 흥분시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흥분시켜주어서 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베푸는 것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시켜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사는게 그렇게 어려운데도 헌금하는게 풍성한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인색해요.

돈 많다고 자랑은 우라지게 하는데 섬기는 것을 보면 쪼잔 해서 콱~ 쥐어박고 싶어요.

 

돈 많다고 자랑이나 하지 말지!

꼴에 또 복음을 안대요.

주께 받은 은혜가 많으면 많이 감사할 것이고!

받은 은혜가 적으면 적게 토해 내게 되어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악성 변비에 걸렸어요.

변비가 왜? 걸리는 줄 아세요.

안 먹어서 그래요.

그냥 닥치는 대로 먹어 보세요.

쑥쑥 나와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마음이 여유가 생기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성도도 섬기지요.

받은 은혜가 없는데 어찌 교회를 위한 헌신이 나오겠어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요!

말씀을 많이 들어보세요.

은혜로운 삶들이 풀풀 나와요.

 

그러므로 제가 교인들에게 충성 봉사를 강요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받은 은혜가 없는데 억지로 사랑하라고 하면 신경질 내요.

그래서 전 교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아요.

 

지금 예루살렘 시민들이 뭔가에 홀렸어요.

하나님이 이들의 마음을 흥분시켰어요.

그러니 자기 옷을 바닥에 깔고 나귀 탄 예수님이 그 위로 지나가도록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 겁니다.

 

어서 오소서!

우리 왕이시여!

이 천한 것의 옷이라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러고 있어요.

 

물론 몇 일이 못가서 태도가 돌변하여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 되어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소리 치게 됩니다.

그 때도 집단 최면에 빠진 것처럼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나쁜 쪽으로 흥분시켜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셋트를 마련한 겁니다.

왜냐하면!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각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우연한 것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여지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없어요.

 

히브리서 1장 3절을 보면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고 하셨어요.

만물이 말씀에 따라서 척척 움직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책의 인봉을 하나씩 뗄 때마다 세상에 이상힌 일들이 일어나요.

 

그러니 세상은 대본에 따라서 각종 사건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대본에 의한 것이고!

홍수가 일어나는 것도 대본에 의한 것이고!

가뭄이 드는 것도 대본에 의한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기록된바”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기록된바” 란 말은 이미 대본에 있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대본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록된 바가 아니고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보고 대접했을 것 같으면 이미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랬어야 했어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아 오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알려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알려 주셨다구요.

그럼 그때 왕이시여 오서 오소서!

그래야 했어요. 

그럼에도 그 때는 오늘과 같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 왕이시여! 라고 환호하지 않았어요.

이는 그 때는 시나리오에 이런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것이나!

이를 보고 환호하는 군중들이나!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기록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두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언약대로 이루어진 겁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예루살렘에 몇 번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 때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알아보지 않았어요.

대접하지 않았고!

환영하지도 않았어요.

 

물론 예수님도 그 동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치도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왕의 등극(登極)식 모습이에요.

새로운 왕의 출현을 알리는 겁니다.

왕으로 입성 한다는 것은 정권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정권은 물러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겁니다.

다른 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겁니다.

이건 깜짝 놀랄 사건이에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시나리오대로 유월절이 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죽습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우리의 어린 양이 아니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에요.

이는 하나님이 준비한 양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거나 받지 않아요.

하나님이 준비한 것만 받아요.

 

아무나 죽는다고 죄사함이 주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죄 값을 치른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가 콱 죽어줄게요!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래 고맙다 네 죄를 사해주마 그러지 않아요.

죄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해지셔야 해요.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새 차를 구입했다고 합시다.

집 앞에 세워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들이 받아 버렸어요.

그리곤 변상을 한다고 중고차를 사 가지고 온 겁니다.

그럼 제가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당연히 안 받지요.

보상은 제 마음에 들어야 되는 거예요.

가해자 마음에 들고자 보상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피해자 마음을 위해서 보상 제도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피해자 이세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죄를 짓고 죽은 자가 되었어요.

태어나는 놈마다 죽음을 안고 태어나요.

그래서 죽는 겁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는 놈을 원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이 죽은 놈인지도 모른 체 자기 것을 들고 와서 하나님에게 변상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충성하고 봉사할게요!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할게요!

제가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그러고 있어요.

 

하나님이 싫대요.

인간들에겐 변상 받을 길이 없어요.

기껏 변상을 해 준다고 하는 것이 중고 고물 폐차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시고자 하셨어요.

그게 자기 아들을 보내서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겁니다.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놈을 대신하여서 죽어줌으로서 죄인의 죄가 대속을 받는 방법을 택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어린 양이 대신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습니까?

이는 자기백성들은 어린 양 안에 복속시키기 위함입니다.

어린 양 안에 복속시켜서 죄사함의 바탕에는 오직 어린 양의 공로만 남겨두기 위함이에요.

그래야 천국에서 어린 양만 세세토록 찬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도가 죄사함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제시한 방법인 겁니다.

우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이런 시나리오를 하나님이 썼어요.

그러니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박수만 치면 되어요.

 

예수님이 3년 동안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때마다 성경은 아직 “그 때” 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 때란? 정해진 시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때가 정해져 있어요.

그 때를 맞추어서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때가 지금인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도 양고기를 잡아서 하지 않고 자기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로 하셨던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피로서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하셨어요.

 

새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옛 언약 시대는 끝난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은 내가 내 죄를 책임지는 시대에요.

그러나 새 언약은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책임 져 주는 시대에요.

 

이젠 자기가 자기 죄를 책임지는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시대가 열린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젠 육적 이스라엘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정권이 바뀌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옛 언약이라는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율법 신앙의 근간인 성전을 허물어 버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시려고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은 것은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있어요.

결국 예수님은 이 일이 화근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순입니다.

새 성전을 짓기 위해서 옛 성전을 헐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기록된바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럼 기록된바 어떤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입성하는지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서 살펴봅시다.

구약 성경에 오늘 본문을 예언한 곳을 찾아봅시다.

 

스가랴서 9장입니다.

 

슥 9:9-12=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은 좋은 소식이란 말입니다.

왜? 기쁜 소식인가 하면 왕이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온다는 말은 지금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표상이기 때문에 육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세력들이 있었어요.

이들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건 하나의 모형적인 사건이에요.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에게서 꺼내는 것이 구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신약으로 오면 마귀의 권세로부터 빼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게 성령 강림 이후로는 율법과 비 언약적 사고로부터 빼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는 것이 구원이에요.

 

스가랴 9장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을 심판한다는 내용입니다.

스가랴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세력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은 마귀의 세력을 상징해요.

 

스가랴가 예언한 왕은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환호하는 백성들이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대로 왕이 되어서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이 새로운 왕이 되어 오신다는 말은 현재 왕이 있다는 말이지요.

현재 왕이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 딸들을 포로로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을 붙잡고 있는 그 왕이 누구입니까?

마귀이고 그 세력이지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어디에 포로 되어 있었나요.

육적으로는 로마이고 영적으로는 율법 아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어디서 건져 냅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버렸어요.

죄 아래 가두어졌다는 것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저주를 피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죄와 사망을 주관하는 그 왕을 박살내려고 새로운 왕으로 온다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언약의 피로 합니다.

스가랴가 예언하지요.

언약의 피로 갇힌 자들을 건져 낸다고!

 

믿음이 뭐냐?

예수님의 피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출 되었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내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에요.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에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쁨의 근거로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겁니다.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들에 기쁨에 근원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기쁨이 된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요.

 

율법신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에요.

 

말씀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는 그 저주가 짓누르기 때문에 자기가 그 저주를 풀어보려고 저주를 몰고 오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보세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잖아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저주를 피하기 위하여 자꾸만 뭔가 하여야 한다고 불안해하는 겁니다.

 

종처럼 일을 안 하면 불안한 겁니다.

혹시 주인이 너 왜? 일 안했어!

닦달할까봐 두려운 겁니다.

이게 죄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사고를 다 찢어버렸어요.

자기 행위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어요.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이 추궁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의문에 쓴 증서를 깨트리기 위해서 의문에 쓴 증서가 왕 노릇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겁니다.

알다시피 예루살렘은 율법 신앙의 중심지에요.

성전이 있어요.

율법 신앙의 근간은 성전이에요.

그 성전을 자기 몸으로 깨트리기 위해서 영적 왕으로 입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입성치 않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겁니다.

말은 힘을 상징합니다.

말이 힘 있음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힘없음을 상징합니다.

 

유대인에게 힘 있음은 율법지킴이에요.

예수님께서 난 율법에 의하여 죽임 당하여야 할 힘없는 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없음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의 힘에 의하여 죽임 당하기 위하여 힘없는 모습으로 입성하는 겁니다.

 

원래 왕들을 말을 타지 나귀를 타지 않아요.

나귀는 종들이 타고 다녀요.

예수님이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탔다는 것은 종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란 말입니다.

 

율법에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종처럼 비천한 자로 취급당하였어요.

법 아래선 법을 지킨 자는 힘 있는 강한 자이고 법을 지키지 않은 자는 죄인으로 약한 자에요.

세리와 창기들이 비천한 자로 취급당한 것도 모두가 율법으로 보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런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 할 힘없는 종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한 것은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왕이 아니란 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허구를 고발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세상의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힘을 가진 왕을 기다렸어요.

로마를 쓸어내고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로 만들어줄 그런 왕을 기다렸어요.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다윗 왕과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진 그런 왕 말이에요.

다윗 왕같이 오려면 백마를 타고 와야 해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땐 백마 타고 오세요.

그 땐 세상을 쓸어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왕과는 거리가 멀어요.

죽으러 오셨기 때문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마치 촌놈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구경 나온 것과 같이 초라해요.

이는 곧 예수님은 세상 왕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로마의 국가적인 왕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을 장악하고 있는 왕을 몰라요.

마귀가 자신들을 장악하여서 죽음으로 끌고 가는 줄 몰라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불행은 로마 식민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줄 왕을 기다린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를 괴롭히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왜? 로마의 식민지를 하고 있는 줄 몰라요.

세상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언약 백성이 세상에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민족이에요.

언약 민족이라 함은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 자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이 약속의 땅인 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하지요.

이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주어진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언약의 땅에서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고 있어요.

이건 수치에요.

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남에게 지배 받고 사는지 그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환경을 누가 조성했나요.

하나님이 그랬어요.

 

로마의 식민지로 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럼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언약백성을 로마의 식민지로 살게 했는지 알아야겠지요.

이걸 알려면 이스라엘이 왜?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는지를 거슬러 올라 가야해요.

 

그럼 왜? 이렇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

왜? 애굽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면 될 것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입니까?

이는 가나안 땅이 머금고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가나안은 아브라함과 언약한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가나안은 그냥 땅이 아니고 언약의 땅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아는 자가 사는 곳이란 말이 됩니다.

 

가나안을 젓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지요.

이는 땅이 기름진 곳이란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면 마음에 평강과 쉼을 누리므로 젓과 꿀처럼 달콤하게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준 땅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을 모르면 그 땅에선 살 수가 없어요.

언약을 아는 사람만이 살 수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가나안 땅은 애굽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애굽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곳이에요.

 

신명기 11장을 봅시다.

 

신 11:9-17=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지금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그 땅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들어가서 살 땅은 애굽과 다르다고 합니다.

거긴 인간의 힘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야 할 땅이라고 합니다.

 

이는 가나안은 애굽에 사고방식으로는 살 수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 땅에서 살려면 그 땅에 성질을 먼저 알아야 해요.

가나안에서 애굽 식으로 살려면 못 살아요.

가나안에서 살려면 가나안 땅이 주는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모세가 그걸 알려 주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인간이 땅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땅이 인간을 지배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어떤 농사를 지어도 그 땅에 맞는 농사를 지어야합니다.

지역마다 특산물이 있잖아요.

이는 그 지역 땅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지역에서 살려면 그 지역 땅의 특성에 맞는 농사를 지어야겠지요.

강원도 대관령을 예로 들어 봅시다.

대관령은 추운 곳이에요.

거긴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나 식물을 재배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누가 고집을 피우고 대관령 고랭지에다 난 여기서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감귤을 재배 할거야! 하면 그 땅이 미친놈 하고 감귤나무를 다 죽여 버리고 허락지 않아요.

거긴 고랭지 배추를 심어야 해요.

그 땅이 고랭지 채소만 심을 놈만 여기서 살어! 그래요.

이렇게 되면 결국 그 땅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했으니 잘 이해하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의 성질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 땅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땅이 합당치 않게 여기고 너희를 토해낼 것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18장을 봅시다.

 

레 18:24-28=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27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잘 보세요.

지금 이스라엘이 들어가는 땅이 가나안 땅이에요.

여기엔 원래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우리 생각에는 여호수아가 전쟁을 해서 빼앗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말하기를 땅이 그들을 토해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땅이 원주민을 토하여 낸 것같이 너희도 토해낸다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비 언약 백성이에요.

비 언약 백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하여 선택을 입은 민족이에요.

이는 곧 이스라엘의 삶에 목적은 언약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지요.

부모와 자식과 전토를 버리라고 하지요.

이는 자기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믿지 말란 말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믿으면 믿음이라는 토양이 토해내요.

믿음 안엔 자기를 위한 삶이 없어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버려지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과 같아요.

 

가나안 땅이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는 자를 토하여 내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것을 토해내요.

그러니 가나안 땅이나 예수 믿는 것이나 영적으로 동일합니다.

가나안 땅을 통하여서 어떤 자세로 예수를 믿어야 할지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럼 가나안 땅의 특성을 더 살펴봅시다.

가나안 땅은 비를 저축하는 땅이 아니고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흡수한다는 말은 물을 가둘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을 가둘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한마디로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애굽은 평지이지만 가나안은 산악지대에요.

농사를 짓고 살려면 평지라야 해요.

애굽에선 물을 저수지에 가두고선 필요에 따라서 길어다가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니 애굽에선 항상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산악 지대라서 물을 저축해 둘 수가 없어요.

그냥 파종을 하곤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야 해요.

산악은 물을 가둘 수가 없으니까 씨를 뿌리고는 오로지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살려주는 힘으로 산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살게 해 주셔서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가나안이 신약에선 예수 안이라고 했으니!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살게 해 주실까? 를 물어야 합니다.

나를 살게 한 목적이 있으니까요.

그 목적이 언약을 위해서 에요.

 

이스라엘이 언약 민족이듯이 성도도 언약 백성이에요.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만 관심이 있어요.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에요.

이스라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 땅에 관심이 있어요.

 

이 가나안 땅이 신약에 오면 예수 안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말이 되지요.

그래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합당치 않는 자는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이 친히 농부가 되셔서 합당치 않는 가지들은 다 제하여 버려요.

그래서 제가 구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이걸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묶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한 묶음 속에 있어요.

내 독자적으로 있지 않아요.

묶음이란? 그리스도의 몸이고 가현적으로 나타난 것은 교회에요.

 

그래서 제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에게 집구석에서 빈둥거리면서 놀지 말고 교회에 가라고 하는 겁니다.

가서 복음에 빚진 자로서 섬기라고 하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 를 따지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를 토하여 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향기를 밝히란 말이에요.

 

극단적인 말로 이단 속에서도 내가 받은 은혜는 이것이다!

내가 깨달은 복음은 이것이다! 라고 증거하란 말입니다.

그럼 욕을 먹든지!

아니면 그 말을 듣고 누가 돌아서든지!

그건 주께 맡기고 우린 우리가 받은 은혜를 토하여 내면 되어요.

 

베드로처럼 옥에 갇혀서 잠을 자고 있으니 천사가 와서 걷어차면서 나가라고 하잖아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가서 전하라고 하잖아요.

이단 속에 들어가서 뽑아내세요.

왜? 이단들은 기존 교회에 와서 뽑아 가는데!

우린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 이단들 속에 들어가서 뽑아내지 못합니까?

 

이단들은 추수한다고 지랄을 떠는데 왜? 우린 추수하지 않고 집구석에서 놀고 자빠졌습니까?

무슨 그런 믿음이 있나요.

주둥이로만 복음을 안다고 나불거리지 말고 가서 복음 때문에 코피 좀 터져 보세요.

그래야 아 ~ 이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구나! 를 알게 되지요.

 

우린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왔어요.

그럼 가나안 땅의 성질에 맞게 살아야지요.

죽든지 살든지 주께 맡기고 언약을 위하여 살아야지요.

그런데 우린 복음 아는 것으로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모세는 그 땅은 하나님이 권고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권고한다는 것은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눈을 부릅뜨고 세초부터 세말까지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 다 지켜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가 비를 주어야겠다 싶으면 비를 주신대요.

그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알아서 주신다고 하잖아요.

예를 들어 파종을 했는데도 물이 없어서 씨가 타 들어간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농사는 하나님이 지어주실 것이란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알다시피 가나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광야에서 난 자들이에요.

광야 사십년 동안에 살아오면서 매일같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어요.

자기 힘으로 살지 않았어요.

그럼 아~ 우리 인생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에선 믿음이 없으면 못 살아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서 비를 주시겠지 라는 믿음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가 있어요.

사람이란? 자기 손에 붙잡고 있어야 안심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농사를 지어도 곁에 저수지가 있어야 안심이 되어요.

언제든지 자기 힘으로 물을 퍼 다가 밭에 뿌릴 수가 있거든요.

이걸 저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저축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지형이 물을 가두지 못하는 산악 지대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는 족족 다 흘러 내려가요.

저축을 해야 안심이 되는데 저축 할 수가 없으니 늘 불안 불안 한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이방인들처럼 살고 싶은 겁니다.

이방인들은 자기가 알아서 저축을 해 놓고 살아요.

농사를 지어도 저수지에 물을 가두어 두고 자기가 필요 할 때마다 퍼다 나르면서 농사를 지어요.

그러니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이스라엘 입장에선 그렇게 부러운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은 손에 붙잡은 것 때문에 불행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힘의 세계에서는 힘과 힘 간에는 우열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2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15평에 사람보단 넉넉하지만 39평짜리를 보면 부족함을 느껴요.

30평짜리를 보는 순간 상대적으로 없음을 알고 불행하다고 느껴요.

그러므로 손에 붙잡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쫓기고 만족함을 못 느끼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자꾸만 만족하지 못하고 모으고 또 모으는 겁니다.

이게 애굽 사람의 특징입니다.

애굽 사람이란 육에 속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아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겐 안 주는 겁니다.

붙잡지 못하게 하는 거에요.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붙잡고자 하는 것에 종이 되어 평안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탐욕이 가득한 인간에겐 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안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걸 알 턱이 있나요.

저축치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인데도 복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왜? 하나님을 원망한지 아세요.

손에 붙잡히는 것이 없어서 그래요.

 

아니 만나를 주시려면 한 달 치씩 주던가 하지 매일 매일 배급 받듯이 하루분만 주어요.

이게 얼마나 신경질 나는 줄 아세요.

얻어먹으면서도 화가 나요.

 

하나님은 기껏 주고도 욕 뒤지게 먹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같이 얻어먹으면서도 에이~ 더러워서 못 살겠네!

에이!~ 안 먹고 말지!

더러워서 하나님 못 섬기겠다고 했어요.

 

인간이란? 얻어먹어도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얻어먹으면서도 감사치 못하고 화를 내요.

아주 이상한 종자에요.

누가 대접을 해 주어도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에이~ 입맛만 버렸네! 라고 해요.

사 준 사람은 생각지 않고 자기 입장만 주장한다구요.

이 고약한 인간들이!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이렇게 다루실까요?

이는 그들 속에 너희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배반한 자들이라는 흔적을 담아 놓고자 함입니다.

왜? 죄 지은 흔적을 남겨두고자 합니까?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에요.

 

천국에 누가 가느냐 하면 죄 용서 받은 자들이 갑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알고!

그 죄를 인하여 하나님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가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천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붙잡는 자들은 못가요.

탕자 비유에서처럼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다 지킨 착한 맏아들과 같이 성화 한 자들은 못가요.

천국은 탕자처럼 자기가 하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가요.

 

제가 지금 무지 무자하게 중요한 말을 했어요.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정 반대 되는 말을 했어요.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임을 아는 자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에게 영원토록 감사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살게 만들어요.

 

지금 천국엔 세리와 창기들이 있어요.

우편 강도가 있어요.

하나님에 대하여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던 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가 있어요.

세상에 이런 악당이 천국에 와 있다는 것에 놀라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착하디 착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은 섭씨 1000도가 되는 찜질방에서 땀을 빼고 있어요.

나사로보고 물 한 방울만 찍어 달라고 아우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들을 다 토하게 만든 겁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란 것을 깨닫게 만든 겁니다.

이런 놈을 천국에 갖다 놓아야 찍소리 못하고 세세토록 할렐루야만 외치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감사하게 말이에요.

 

암튼 이스라엘은 하나님 방식대로 사는게 갑갑하니 틈만 나면 이방인 방식으로 살고자 합니다.

이방인들을 따라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이방 신은 하루치씩 주지 않고 일 년치 십년 치씩 한꺼번에 주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화끈하고 좋아요.

일 년에 한 번, 십 년에 한 번만 신께 찾아가서 안녕하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절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겁니다.

석가탄신일 한 번만 가서 안녕하세요! 하고 시주하고 오면 부처님도 오케이 하잖아요.

일 년은 봐 주잖아요.

얼마나 쿨하고 편합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매일 오라고 해요.

아주 귀찮게!

일 년에 한 번씩 오면 노발대발해요.

매일 배급품 주듯이 하루치 주면서 매일 오라고 합니다.

그것도 새벽에 말이에요.

 

어디 좋은 것이나 주나요.

뭐 소고기 등심이라도 주면서 오라고 하면 모르지요.

기껏 해야 만나에요.

그것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나가야 얻어먹지 늦잠 자면 국물도 없어요.

쥐뿔도 많이 주지도 않고 갈급증 나게 하루치를 주면서 엄청 귀찮게 해요.

생색을 더럽게 내요.

 

그러니 애굽이 그리운 겁니다.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날 좀 애굽으로 보내 주면 안 됩니까!

애굽에 음식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서 생각나는 겁니다.

아~ 등심 스테이크 먹고 싶어! 아~ 장어구이 먹고 싶어!

아~ 킹 크랩 먹고 싶어!

 

사람이 먹는 끝에 마음 상해요.

애굽에선 몸은 좀 고생스러워도 맛난 것 먹고 살았어요.

자기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광야에선 인간의 가장 기본욕구인 먹는 것을 마음껏 먹지 못해요.

선택의 여지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주는 것만 먹어야 해요.

 

메뉴도 좀 다양하게 짜장면, 짬뽕, 해물찜 등등 이런 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메뉴라야 달랑 만나 하나뿐이에요.

이걸 사십년을 먹어 보세요.

짜증나지요.

그러니 만사가 짜증나는 겁니다.

 

지금도 보세요.

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교회도 못 오잖아요.

몸 아파도 직장엔 가도 교회엔 못 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예수 믿는 것도 식후경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배를 일컬어 신이라고 한 겁니다.

먹고 사는 일이 신보다 더 우선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어찌 할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통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못 섬겨요.

이건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을 못 섬긴다는 말이에요.

너희는 나를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못 섬기면 죽어야지요.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 있어요.

버젓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약 때문에 지켜주고 계세요.

그러니 언약을 모르면 그 땅에서 토해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가나안 땅이 그런 곳이에요.

농사도 자기 마음대로 지을 수 없고!

아주 진액을 빼요.

가나안에선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단 하루도 못살아요.

에라~ 모르겠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이소!

그러고 살아야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댕댕거리면 게거품 물다가 혈압 올라 죽어요.

 

예수 믿는 게 그래요.

세상 사람과 견주어서 살려고 하면 열 받아서 못살아요.

사나 죽으나 주님 뜻대로 하세요!

그러고 살아야 버텨내지!

그렇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십년 20년 후를 걱정하고 살면 근심 걱정이 되어서 못살아요.

 

저도 노후걱정 하면 이 짓을 그만 해야 해요.

하지만 하나님이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배짱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언제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볶아 잡숩든지 삶아 잡숩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살아요.

 

아침에 눈 뜨면 어~ 오늘 하루도 살게 해 주었네! 하고 살아야지 편해요.

이게 숙달이 되면 그렇게 편해요.

저도 서서히 숙달이 되어가고 있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물론 순간순간 불뚝거림이 일어나 하나님께 정말 이러기입니까? 하고 맞짱뜨자고 해요.

에이~ 나! 목사 안 해!

그런다구요.

 

제가 복음을 알아가면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고 자꾸만 힘을 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가요.

그래서 항복하게 한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영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고 있어요.

예수 안이 가나안 땅이에요.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나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동일하지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우리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면 우리도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암튼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면 애굽에서 살아야지 가나안에서 살면 안 되어요.

그 땅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살려면 그 땅에 순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땅에서 살게 한 것은 너희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건 광야 40년 동안 철저하게 깨달았잖아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았어요.

매일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 먹고 살았어요.

아침이면 어김없이 만나를 주었어요.

 

농사 짖지 못한 광야나 산악으로 이루어진 가나안이나 동일해요.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서 살게 해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이 알아서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믿지 못하였어요.

틈만 나면 이방신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화풀인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좇아내 버린 겁니다.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가나안에서 쫓겨나 열방 중에 흩어버린다고 했어요.

 

레위기 26장을 봅시다.

 

레 26:31-35=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32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33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4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보세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안식케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땅이 인간 같지 않는 놈들을 받아서 산다고 고생 했다고 쉬게 해 주겠대요.

참 이상하지요.

 

이 말은 하나님에겐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땅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땅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땅에 합당치 않는 놈들은 다 좇아 내겠다고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자기 힘을 믿고 하나님 믿지 않는 놈은 그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놈은 그 땅에서 살 자격이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라서 그래요.

천국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살지 은혜를 모르는 놈들은 살 수가 없어요.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은 못 들어가요.

 

그러니 가나안에서 살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씨를 뿌리면 반드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추수하게 하신다는 믿음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조급해서 애굽에서처럼 자기가 물을 길어다가 농사를 짓는 자는 다 쫓아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 가나안 땅에서 좇아내 버렸어요.

언약대로 좇아낸 겁니다.

그게 바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형벌을 받는 동안에 가나안 땅은 안식을 하는 겁니다.

 

레 26:42-45=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44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45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럼 유대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왜? 로마의 식민지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아~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세상 힘을 의지하고 살다가 망했구나 를 알아야지요.

그럼에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이 되어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와서도 또 그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힘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은 무엇을 힘으로 믿고 살아가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신자는 하나님의 힘을 믿고 살아가고, 불신자는 세상의 힘을 믿고 살아가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있어야 해요.

세상에서 통용되는 힘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까지 동원하여 세상의 힘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힘 있는 메시야를 소망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린 유대인들이 이런 사고 속에서 죄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것은 자신들의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힘만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자신들이 불행을 죄 문제로 두지 않고 삶에 환경에 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했어요.

사람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에 있다고 하셨어요.

성경은 인간의 불행은 죄 때문이라고 해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당하는 아픔이 죄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비 언약적인 사고 때문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로마에서 해방이 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식민지라는 환경을 개선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겁니다.

 

지금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환경에 따라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요.

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여기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께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라는 힘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한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다시 스가랴 9장을 봅시다.

 

슥 9:9-12=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이 나귀타고 오는데 뭘 하려고 오느냐 하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러 온다고 합니다.

이게 중요해요.

 

병거와 말과 활이란? 모두가 자기를 지키는 무기들이에요.

곧 힘이에요.

이 시대로 말하면 돈이에요.

개인적으로 말하면 돈이고 교회적으로 말하면 교회 부흥이에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주여~ 우리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그러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있던 교인들을 다 나가게 만드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힘을 주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힘을 거두는 메시야를 보낸 겁니다.

그러니 맞아 죽지요.

이런 예수를 어떻게 믿겠어요.

 

지금도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은 예수님을 믿고자 해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앞에 있어도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어요,

유대인들을 욕하지 마세요.

에휴~ 저것들 믿음 없는 놈들 그러지 마세요.

우리가 곧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인들이에요.

 

여기서 참 메시야와 거짓 메시야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참 메시야는 우리의 힘을 빼게 하시지만 거짓 메시야는 힘을 준다고 합니다.

누가 참 종이고!

누가 거짓 종이냐?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라고 하면 거짓 종이에요.

세상에서 잘 살라고 하면 거짓 종이에요.

신앙생활 잘하면 복 받는다고 하는 놈은 거짓 종이에요.

 

이러면 고지론을 외치는 이 시대 대다수의 목사들이 거짓 종이라는 것으로 드러나지요.

또 그들을 주의 종이라고 따르는 수많은 교인들도 가짜라는 것이 판명 나지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인 겁니다.

이를 두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병거를 끊고 말을 끊고 활을 끊어버리는 메시야를 이스라엘에 보냈는가요.

이는 이스라엘은 세상의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그런데 두 주인을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했어요.

 

재물을 하나님 위치에 두셨어요.

누가?

예수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재물이 그냥 돈이 아니고 신이에요.

그래서 바울도 재물을 따르는 자들을 행해서 너희 배는 신이라고 일갈한 겁니다.

 

사람이 힘을 필요로 여기는 것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힘을 빼앗는 것은, 네 힘으로 생명을 지키지 말라는 겁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죄란? 하나님을 힘으로 믿고 살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지 않고 빼앗아 가는 식으로 간섭하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의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믿음에서 이탈해요.

난 안 그래 하지 마세요.

 

인간은 편안한 것을 이기지 못해요.

바울이 자기 몸에 가시를 빼달라고 기도 했다가 된통 혼이 나지요.

고린도후서 12장을 봅시다.

 

고후 12: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삼층 천에 갔다 왔어요.

그러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방방 뛸 때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몸에 병이 있었어요.

성경에 무슨 병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데 어떤 분은 안질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많은 주경신학자들이 간질병이라고들 합니다.

저도 간질병으로 보고 싶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남의 병을 고치는 사도가 되어서 자기 병 하나 고치지 못한데서야 말이 됩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그래도 사도 아닙니까!

하나님이 삼층 천까지 구경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내가 복음 전하다가 게거품 물고 간질을 하면 복음이 얼마나 우습게 여겨지겠습니까!

그러니 제 병을 좀 고쳐 주세요!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어요.

천하에 사도 바울이 얼마나 소원이었으면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겠어요.

 

그러면 저 같으면 그래 바울아! 네 말이 맞다!

빨리 고쳐주지 않아서 미안 하다!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 자슥이~ 무슨 말을 하나!

내가 네가 잘나서 사용하고 있는 줄 아느냐!

일부러 너의 못남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가 잘나면 네가 하는 일들이 네가 잘나서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일부러 널 못나게 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네가 약해야 내 능력이 더 나타날 것이 아니냐! 라고 책망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에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더 잘 전해 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뽑아도 잘난 놈들을 뽑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잘난 놈들을 사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놈들을 사용하면 그 놈이 자랑되지 하나님이 자랑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를 안 믿고 목사를 믿어요.

그러니 사람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겁니다.

이건 자기 안에 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풍조에 끌려 다니는 겁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둔 사람은 사람을 추종하지 않아요.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곳에 있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아요.

속된 말로 거짓 목사가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춤추지 않는단 말입니다.

진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교회 따질 이유가 없어요.

어느 교회에 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한다면 말이에요.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지는 것이지 내 능력으로 지켜지지 않아요.

그러니 염려할 것이 없어요.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실력으로 전해지지 않아요.

 

요나를 보세요.

하나님이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 시큰둥한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에요.

하루 속히 망하길 바라고 있는 나라에요.

 

그런데 그런 나라에 가서 복음 전하래요.

그러니 뿔따구가 나서 도망을 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복음 전하는 시늉만 했어요.

지나가는 말로 야~ 너희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불벼락 내린다고 하더라!

시큰둥하게 전했어요.

 

그리고 산 꼭대가 올라가서 박 넝쿨 밑에서 저 인간들이 어쩌나 구경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강아지 새끼부터 어른에서 어린아이까지 몽땅 회개를 하는 겁니다.

이건 요나가 바라는 바가 아니거든요.

요나는 불벼락이 떨어지길 바랬거든요.

 

그런데 도리어 불벼락은 자기가 맞았어요.

박 넝쿨로 더위를 피하고 있는데 벌레 새끼가 그만 박 넝쿨을 다 쪼아 먹어버린 겁니다.

요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씩씩거리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그럽니다.

왜? 뿔따구 나냐!

니가 왜? 뿔따구 내는데!

야~ 이놈아!

너는 이 박 넝쿨을 언제 물이나 한 번 줬느냐!

네가 언제 이 박 넝쿨을 키웠느냐!

그래 박 넝쿨 하나 가지고 죽네 사네 하는 놈이!

여기 앞뒤 분간 못하는 12만 명을 내가 구원하는 것이 뭐가 그리 못 마땅하냐 라고 합니다.

그래 이 1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박 넝쿨 하나만 못하느냐 이 나쁜 놈아!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설교를 잘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겁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구원 할 자는 인간이 어떤 짓을 하여도 반드시 구원해 내고야 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 할 자는 반드시 구원해 낸다는 말이에요.

인간의 조건에 영향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것도 제 설교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 설교를 은혜 받게 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만약 제 설교가 구원받게 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다 구원을 받아야지요.

 

제 블로그에 120만 명이나 다녀갔어요.

그럼 120만 명 다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성화는 없습니다!

그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화가 비성경적이라고 하니까 전화를 해서 육두문자를 쓰면서 지랄 지랄을 해요.

 

그러니 그 누구의 설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을 구원케 하세요.

예를 들어서 어떤 거짓 목사가 한 시간 설교를 하면서 전부 자기 자랑하고 성화하라고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 5초 동안 여러분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라고 한 그 말 한마디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복음으로 들려져서 구원을 시켜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주변에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한다면 집에 있지 말고 가까운 교회에 가서 들으라고 합니다.

이단이든 삼단이든 들으라고 합니다.

진리에 속한 성도는 하나님이 알아서 다 그 말을 참과 거짓으로 걸러내게 하세요.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복음을 분별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분별케 해 주셨어요.

 

저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면 참으로 위태위태했어요.

이단에도 빠져 보았고!

종말론에도 빠져 보았고!

은사주의도 해 보았고!

성화론에도 심취해 보았고!

지독한 율법주의로 살기도 했어요.

 

그런데 주께서 귀를 여시고 복음을 듣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겁니다.

제게 복음을 깨닫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복음을 증거케 하신 이도 하나님이세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세요.

제가 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복음은 하나님 것이지 제 것이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소경이에요.

복음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아~ 목사 그만 하라는가 보다 하고 안 하면 되어요.

목사 안한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인간이 복음을 소유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세요.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에요.

하나님 앞엔 저 말고도 도구가 많아요.

 

그러니 누가 말씀 잘 전하더라고 추종하지 마세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엔 복음을 다 아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부분적으로 알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은 반드시 복음을 듣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고 네가 약할 그 때가 내 능력이 네게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강한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린 태생적으로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소유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께서 다 빼앗아 가세요.

 

우린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볼 땐 모든 것을 가진 자이고 모든 것을 얻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부족하여 결핍을 느껴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눈에 들어오면 자신이 불쌍하고 초라하게 보여져요.

그러면 땅강아지처럼 땅에 것을 움켜잡으려고 합니다.

땅강아지처럼 움켜잡으면 잡겠지요.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처럼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하나님 앞에 불쌍한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에요.

이 시대 교인들은 세상 적으로는 다 부요해요.

부족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선 가련하고, 곤고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어요.

 

그래서 신약이든 구약이든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는 자는 다 저주 받게 되는 겁니다.

신약에선 사도들이 경고 했다고 한다면 구약에선 선지자들이 경고 했어요.

이사야 31장입니다.

 

사 31:1-3=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 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보세요.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가지 말라고 하지요.

그들은 병거와 마병이 많은 것을 힘으로 삼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기 때문에 전부 진멸 대상이라고 합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애굽에 도움을 구하는 자도 넘어지고 도움을 주는 자도 넘어진다고 합니다.

이게 아주 무서운 말이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거짓 선지자를 돕는 자는 그도 거짓 신자로 취급하겠다는 말입니다.

거짓 목사를 돕는 교인은 거짓 교인이란 말이에요.

도우려면 복음 전하는 사람을 도우세요.

 

신앙은 인정에 매여선 안 되어요.

어차피 아담 안에서 맺어진 형제는 예수 안에선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진짜 형제는 동일한 복음 안에서 예수 믿는 자가 형제라고!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해요.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막아 버려요.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아 버려요.

 

호세아서를 보면 실감이 나요.

제가 참 좋아하는 대목인데 한번 봅시다.

 

호 2:5-9=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 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호세아라는 선지자와 그의 아내 고멜을 통하여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시간만 나면 바람을 피웁니다.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요.

이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말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세상 것을 쫓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아내를 찾아오라고 합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호세아도 미칠 지경인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고멜이 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가시와 담으로 막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아픈 일들이 생기게 한단 말입니다.

 

친구도 떠나고!

형제도 떠나고!

믿던 집사도 다른 교회로 옮기고!

의지 할 것을 다 잘라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지하던 것들을 다 빼앗아 버려요.

한마디로 지옥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은 겁니다.

그리곤 복음을 주세요.

 

호 2:14-17=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보세요.

거친 들로 데리고 나아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는다고 하잖아요.

아골 골짜기란? 지옥을 말해요.

 

지옥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고 하늘에 소망을 삼게 한단 말입니다.

아골 골짜기로 집어넣으니 더 의지 할 것이 없지요.

그러자 고멜이 에이~ 신랑에게나 돌아가야겠다고 합니다.

결국 믿을 것은 신랑 밖에 없구나! 하고 돌아 왔어요.

 

여기서 개유(開諭)한다는 말은 꼬신다는 말이에요.

마치 토론하는 것과 같아요.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제 이야기로 합니다.

 

봐라! 야~ 정낙원이 너 생각해 보아라!

너 믿을 것을 믿어야지!

왜? 인간들을 의지하려고 하느냐!

네가 인간들을 의지하려고 하니 내가 다 그 인간들을 막고 떠나게 한 것이란다!

 

만약에 내가 그 인간들을 막고 떠나게 하지 않으면 넌 자꾸만 그 사람들만 바라보려고 하지 날 바라보려고 하지 않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교인들을 다 떠나도록 했단다!

 

봐라! 네가 의지하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니 날 찾게 되지 않느냐!

너를 도울 자는 나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란다!

네가 의지할 것은 나 뿐이다!

결국 믿을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호 2:18-20=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리곤 내가 의지하고자 하던 활이나 칼 같은 것을 다 꺾고 언약을 세우고 평안히 눕게 해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장가를 들어서 은총과 긍휼로 여기심을 주겠다고 합니다.

즉 제가 추구하고자 하던 교회부흥이고! 성화고 하는 것들을 다 버리게 하시고 예수님의 피라는 새 언약을 주신 겁니다.

 

저는 가장 흑암의 깊음 중에서 복음을 만났어요.

복음을 깨닫고 난후 획기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만약에 경우 그 때 하나님께서 내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면 전 복음과 상관없이 교인들 위에서 군림하면서 거짓 선지가가 되어서 무당 노릇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전 그 때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하나님이 너무너무 고마운 겁니다.

물론 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길을 걷게 하셨어요.

 

호세아가 그러지요.

거친 들에서 하나님께 개유당하고 난 후엔 다시는 옛날 애인들의 이름도 부르지 않게 하겠다고 하지요.

제가 그런 겁니다.

 

제가 복음을 모를 때 추구하던 신앙이 제 애인이었어요.

지금 전 과거에 좋아하던 성화주의나 율법주의나 은사주의 같은 신앙을 생각지도 않아요.

그런 애인들은 다 잊었어요.

이젠 예수라는 새로운 신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전 골수 율법주의자였어요.

성화론에 푹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엔 도리어 율법주의 성화주의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이단이라고 호되게 몰아치고 있는 겁니다.

그 못된 애인 때문에 너무도 많은 아픔을 겪었거든요.

 

제가 설교를 간증적으로 풀어내는 것도 이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속지 않게 하기 위함이에요.

십자가 복음을 만나고 난 후 예수님이 저에게 장가를 들어서 얼마나 평안한지 몰라요.

거침이 없어요.

두려움도 없어요.

눈치 볼 것도 없어요.

이미지 관리하려고 제 자신을 포장 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제 심령에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의지하던 말과 병거와 활과 칼들을 다 꺾어 버리신 겁니다.

내가 나를 책임지고자 하던 인생에서 하나님이 책임져 주는 인생으로 바뀐 겁니다.

진정한 가나안 땅이 제 안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제가 온전하다는 것이 아니고 제 주제를 알게 되었단 말입니다.

물론 순간순간 불뚝 성질이 나와요.

하지만 나의 나 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주는 죄사함의 은총이 너무도 크기에 흔들림 없이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겐 반드시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는 사건들을 벌리십니다.

나귀타고 예수님이 입성하시면 우리 안에 있던 임금이 쫓겨나갑니다.

성령이 임하면 세상 임금이 쫓겨 간다고 하였지요.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는 나귀 타고 오신 예수님이 입성 할 때 이루어져요.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마음에서 세상 임금이 쫓겨나게 되어요.

세상 임금이란 마귀에요.

 

이 놈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목마르게 하였어요.

그래서 경쟁하게 하고!

결핍을 느끼게 하고!

세상 것이 없으면 죽는 줄 알게 만들었어요.

세상 임금은 예수님과 항상 반대되는 것을 갖도록 미혹을 해요.

 

그런데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 언약의 피로 세상 임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어요.

참으로 중요한 것은 죄사함에 문제가 해결 받으면 다른 것은 곁가지에 불과하게 느껴져요.

인생살이가 가벼워져요.

 

쫓기지 않아요.

일체의 경쟁상대가 없으니 쫓길 이유가 없지요.

또한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주는 자유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기지 않아요.

 

나귀타고 예수님이 입성하시면 우리를 무장해제 시켜요.

우리가 책임질 인생이 없게 만들어 주세요.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이 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가두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평안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믿어지면 하나님 말씀 한 구절구절들이 모두가 평안을 주는 말씀들로 다가와요.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 임금이 쫓겨나고 삼층 천에 올라가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여러분의 심령 속에 입성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 입성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를 장악하고 있던 세상 임금이 쫓겨나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언약의 피로서 구덩이에서 건져 주심이 문자가 아니라 생명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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