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84강. 예수님의 죽음과 새 계명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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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11. 2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4강. 예수님의 죽음과 새 계명 (요 13:31-35)

-.정낙원 목사

 

요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무(無)라고 하고 보이는 것을 유(有)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영이라고 하고, 보이는 세상을 육이라고 합니다.

그럼 영의 나라에서 육에 나라가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 밖에 몰라요.

믿음을 받아야 육에서 영을 보는 안목이 생겨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 밖에 있는 하나님 나라 라는 겁니다.

그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보이는 이 육에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본 따서 만든 것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는 이 세상의 존재에 근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보이는 이 세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말해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그림자이고 저 세상이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가나안 땅을 예를 들어서 말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들으면 가나안 땅은 젓과 꿀이 흐른다고 하였으니 그냥 씨만 뿌리면 농사가 저절로 되어서 풍년이 드는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에덴동산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보니 그 땅은 산악지대였습니다.

젓과 꿀은 고사하고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땅이었어요.

한마디로 농사를 짓고 살만 한 땅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명기 11장에서의 모세의 증거를 봅시다.

 

신 11:10-12=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세대들에게 가나안 땅의 특징을 애굽 땅과 비교해서 말해줍니다.

애굽은 물이 많아서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애굽과 반대로 산과 골짜기만 있는 험산준령이라 물을 가둘 수가 없어서 하늘만 쳐다보아야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땅이란? 하나님이 농사를 지어주는 땅이란 뜻이에요.

그러므로 애굽에서처럼 자기 능력으로 농사짓는 사람 입장에선 하늘만 쳐다보고 산다는 것은 속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농사를 지어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가나안은 한마디로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 땅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나안에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그리며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

 

본향이란? 태어난 근원이란 말입니다.

그럼 가나안의 근원이 하늘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가나안 땅은 천국을 가르쳐 주기 위한 시청각 교제였던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청각 교제가 역설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에요.

천국이 천국처럼 보이지 않고 지옥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평지가 아니고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는 산악지대였어요.

거저 주어도 싫다고 할 그런 땅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사람들이 없고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을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는 생명의 길과 죽음이 길이 역설적으로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선 비밀이고 역설적으로 와 있어요.

육적으로는 이 땅에서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 복이지만,

영적으로는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이 복이에요.

즉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이 아니고 예수 때문에 버림당하는 것이 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을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버림당해서 죽임 당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구약에선 선지자들이 그리하였고,

신약에선 12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어요.

 

뉘라서 이 비밀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로 난 자 외에는 알 수가 없어요.

성경은 이런 비밀스러운 하늘나라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이 바로 천국을 역설적으로 살아온 증거자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 중에 세상에서 연락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쫓기고 매 맞고 빼앗기는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이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싫어해요.

도리어 이들과 반대로 잘 먹고 잘 살고자 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 믿고 고난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믿음을 받지 않으면 역설적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육에 속한 자는 알아보지 못하고 영에 속한 자들만 알도록 해 놓으신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죽는 것이 영광입니까?

육적으로는 세상에 영웅호걸이 되어 세상을 호령 하여야 영광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힘없이 죽임 당하는 것이 영광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어찌 영광이 된단 말입니까?

이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도무지 수긍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보이는 것이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요.

 

암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어요.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세상은 천국을 말해주고자 하는 시청각 교제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그러니 세상에 안주하고자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이 세상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기존의 세상에서 떠나도록 하는 모습으로 간섭하세요.

이는 세상 것을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분깃도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세상을 육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영이라고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고 하였어요.

육은 후패하고, 영은 영원해요.

이렇게 되면 보이는 이 세상은 가짜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진짜란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두 세계와 두 가치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고,

땅에 기름진 복과 하늘에 신령한 복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보이는 세상의 육적 복이 복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적 복이 진정한 복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복은 하늘에 복을 바라보게 하는 의미에서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복으로 하늘에 신령한 복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땅에 복을 복으로 붙잡고 있으면 땅에 복이 곧 하늘에 신령한 복을 가리는 미혹의 대상이 되고 말아요.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늘에 가나안을 보아야지 그 땅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하늘에 있는 가나안은 잊고 이 세상에 속한 가나안을 보면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늘에 있는 본향을 그리며 살도록 인도 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늘은 보지 못하고 그 땅만 바라보다가 망해 버립니다.

땅만 바라보는 자들을 가나안 땅이 토해내서 이방에 객이 되게 만들어 버렸어요.

이건 모두가 보이는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는 다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예표적인 사건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 자가 있고 얻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교훈을 얻고,

육에 속한 사람은 못 얻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들만 알게 되어 있어요.

이들을 일컬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 둘이 한 집안에도 있고 한 교회 안에도 서로 섞여 있습니다.

누가 영에 속한 자이고,

누가 육에 속한 자인지 인간들은 몰라요.

 

오직 하나님만 아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나누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갈라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둘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늘 백성과 땅 백성을 갈라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둘로 나누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움직이면 이상하게 하늘에 속한 백성과, 땅에 속한 백성이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져요.

 

사람과 사람도 나누이지만 세상도 나누어집니다.

동일한 세상이지만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로 세대가 갈라집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나누이지만 세상의 구조는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입니다.

 

기원이란? 근본이란 말입니다.

기원전이란 말은 만물의 근본이신 분이 오시기 전이란 말이고,

기원후라는 말은 만물의 근본이신 분이 오신 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는 것은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의 연호도 세상의 주인인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고 하여서 주전(B. C)이라고 하고,

주인인 예수님이 오신 후라고 하여 주후(A. D)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전이니 주후라는 말은 주인이 오시기 전과, 주인이 오시고 난 후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에요.

예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들에게 맡기셨어요.

아담에게 맡겼어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어요.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했어요.

범죄한 인간이 마치 만물의 주인이라도 되는 냥 자기들 마음대로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야!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오신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포도원 비유로 말씀해 주셨어요.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주었어요.

그리곤 때가 되어서 포도원 세를 받고자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를 주인에게 바쳐야 할 놈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여 버렸어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이번에는 아들을 보냅니다.

설마 아들이 가면 세를 주지 않겠느냐 하고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당들이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 것이 되는 줄 알고 아들마저 죽여 버립니다.

이에 주인이 군대를 보내서 그 놈들을 진멸을 시키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인 것을 비유로 드신 겁니다.

그럼 비유 속에서 먼저 포도원을 세로 경작하려고 받은 자들은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구요.

아들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자 하나님은 유대인을 진멸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이방인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에게 국한 된 비유가 아니에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비유에요.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주신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주인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 속엔 우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럼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이 주인으로 오시기 전 시대와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시대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은 옛 사람은 주인이 오기 전인 기원전인 구약시대이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는 새 사람으로서 기원후인 신약시대가 되는 겁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기원전은 옛 사람은 어둠에 역사이고, 기원후인 새 사람은 빛의 역사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기점으로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역사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기원전을 밤의 역사라고 해서 태음력을 사용하고 기원후는 낮의 역사라고 하여서 태양력을 사용하는 겁니다.

음기는 땅의 기운이고,

양기는 하늘의 기운이에요.

그러므로 태음력은 땅의 역사이고 태양력은 하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예표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하나 하나를 예수님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전이니 주후니 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한 결과에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모두가 어둠이었어요.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우리는 빛에 속한 자가 되었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람은 구약의 옛 사람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사람은 신약의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사도 예수를 영접하기 전과 영접한 후의 세상이 달라요.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 내 역사를 썼어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누리며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어요.

내 역사는 없고 예수님의 역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역사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걸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그의 종으로 사는 역사인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뜻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으로서 간섭하시는 거에요.

 

포도원 비유를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 전에는 내 인생을 포도원을 맡았던 악한 종들처럼 내 마음대로 살았어요.

이게 예수를 모르고 살았던 우리 옛 사람의 인생입니다.

옛 사람이었을 때 우리는 예수 없이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 인생은 마치 포도원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악한 농부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 놈들은 강도로서 죽어야 할 놈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이고 살려 내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에게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놓았어요.

예수님이 오시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사람의 것은 다 빼앗아 가시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새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것을 하나둘씩 채워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내 인생은 다 빼앗아 가시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바꿔가세요.

이걸 상징적으로 말해주듯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세대 계산법은 삭제해 가지만,

예수님 오시고 난 후의 세대 계산법은 더해 가는 것입니다.

 

주전 세대와 주후 세대의 시간 계산법이 달라요.

주전 시대는 이미 정해 놓은 시간을 삭제해 가는 것으로 해요.

하지만 주후 시대는 계속해서 쌓이고 늘어가는 것입니다.

 

주전 시대인 B. C는 4천년에서 시작하여서 3천년으로 3천년에서 2천년으로 2천년에서 천년으로 천년에서 5백년으로 5백년에서 100년으로 100변에서 1년으로 지워나갔어요.

그러나 주후 시대인 A. D는 1년에서 시작하여 100년 500년 1000년 2000년으로 점점 더 많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인생은 망하는 인생이고,

예수님을 만난 후의 인생은 흥하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가요.

하지만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영생으로 점점 더 나아가는 소망스러운 인생을 살아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주인으로 오시기 전인 주전의 년수는 마이너스(-)로 계산이 되고,

예수님이 내 주인으로 오신 후의 주후의 년수는 플러스(+)로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마이너스는 죽음을 상징하고 플러스는 생명을 상징해요.

제가 지금 마이너스 인생이니 플러스 인생이니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를 영적으로 이해하세요.

 

알다시피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음을 안고 태어납니다.

쉬운 말로 인간의 수명은 마치 공장에서 출하되는 배터리와 같이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배터리가 방전이 되는 것과 같이 수명이 단축되어져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아담 안에 인생은 생명을 소진해 가는 마이너스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떨어진다고 했어요.

이는 참새도 하나님이 정해준 생명의 기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만물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기간을 다 타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받은 분량의 생명만큼 살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시편 기자는 주께서 호흡을 취하신다고 했어요.

 

시 104:29절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취한다는 말은 회수해 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가 이제 그만 살고 오라고 회수해 가시는 겁니다.

주인이 숨을 거두어 가시면 우린 그냥 흙으로 돌아가요.

 

그러니 우리가 숨 쉬는 숨도 정해진 양이 있는 겁니다.

주어진 양이 소진되어 가면 마치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인생도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기운이 소진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피조물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인간들에게 이 비밀을 알기를 바랐어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 알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자기 주제를 알라는 겁니다.

 

시편 90편을 봅시다.

 

시 90:3-12=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 ~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 하였나이다 10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보세요.

하나님이 숨 쉬는 인간들에게 이제 숨 그만 쉬고 티끌로 돌아가라고 하지요.

원래 인간을 만들 때 흙에다 숨을 불어 넣어 만들었잖아요.

마치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듯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만 숨을 쉬라고 회수해 간다는 겁니다.

인간은 숨을 그치면 본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요.

 

우리 인생은 모두가 칠, 팔십년을 살다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각자가 받은 날 만큼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날들이 신속하게 날아간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세월이 날아간다는 것을 실감해요.

 

흔히들 세월의 흐름을 나이의 수 대로 빠르다고 합니다.

 

10대에는 10km로 가고!

20대에는 20km로 가고!

40대에는 40km로 가고!

60대에는 60km로 가고!

80대에는 80km로 간다고 합니다.

 

그만큼 살수록 세월의 흐름을 감지하는 느낌이 빠르다는 말입니다.

늙을수록 죽음을 인지하는 능력이 예민해 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날아가는 인생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생이란? 죄로 인하여 주어진 형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은 오래 살수록 형벌의 기간을 많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걸 몰라요.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인의 인생이란 한낱 티끌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겁니다.

티끌 주제에 까불지 말라는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져요.

그래서 모세는 자기가 티끌인줄 아는 것을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지혜라고 합니다.

잘난 체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이란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단절된 인생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세계는 어둠이에요.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참 빛으로 오셨어요.

생명으로 오셨어요.

흑암에 사는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어요.

죽은 자에게 생명이 불어 닥친 겁니다.

 

예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기 백성들의 마이너스 인생을 영생으로 나아가는 플러스 인생으로 바꿔치기를 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죽어가는 인생에게 영생으로 나아가는 인생으로 바꿔 주시려고 오셨어요.

그런데 인생을 바꿔치기 해 주시는 것이 아주 역설적이에요.

인간의 생각과는 정 반대에요.

 

어떻게 역설적으로 일하시는가 하면 죽음에 쫓기는 자를 죽이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인간을 죽여 버려요.

죽음에 쫓기는 인간을 오래 살도록 그 생명을 연장 시켜주는 것이 아니고,

죽이고 다시 살려서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이건 히스기야를 통해서 말해주었어요.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어 갈 때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조금 연장 시켜 줍니다.

그러나 결국 죽습니다.

 

이는 인간이란 결국 다 죽는 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더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년이나 이십년을 더 살아본들 결국 죽을 것인데 십년 이십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에요.

 

어저께 뉴스에 암 환자들이 평균으로 5년을 더 연장하여서 산다고 합니다.

암을 조기 발견하여 수술을 하면 수명을 몇 년 연장을 할 수 있다고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5년 10년을 더 산다고 하여서 그게 소망일까요.

5년 10년 후면 또 다시 죽음이라는 괴물을 만나요.

결국 그 괴물에게 잡아먹힙니다.

 

그러니 죽음은 안고 사는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려주어도 그건 연장이지 살려주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년 이십년 더 살려 주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죽을 인생 더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하면서 아주 죽여 버려요.

그래서 바울이 병을 좀 고쳐 달라고 하니 그만 되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하는 일이 늘 이러해요.

살고자 하는 인간을 죽임으로서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십니다.

죽음을 모르는 인간으로 살려 내세요.

그러므로 죽음에 쫓기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에 쫓기는 인간은 죽이고 아예 죽음을 모르는 인간으로 다시 만들어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고 해요.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만나게 되면 새로운 인생길이 열리는데 이 새로운 인생길은 반드시 과거의 인생을 단절하면서 주어집니다.

즉 옛 사람을 죽이면서 주어진단 말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쇠하는 모습으로 주어져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선 옛 사람의 죽음은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 때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요.

 

옛 사람 입장에선 죽음은 끝인데 새로운 피조물 입장에선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은 더하는 인생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면 살아갈수록 소망이 없어지지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살아갈수록 소망이 점점 더 생겨납니다.

성도는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플러스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겉 사람은 후패하여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은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으니 후패해 가는 것이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천국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으니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 진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알아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의 특징 중 하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나이가 들고 늙어갈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더 새록 새록 드는 것입니다.

천국이 손에 집히듯이 현실화 되어 가는 겁니다.

 

이걸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면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했어요.

병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천국 문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늙고 병들수록 천국에 대한 꿈이 커져 가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성령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늙은 선지자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눅 2:25-30=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은 평상시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만나고 죽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어요.

한마디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죽지도 못할 팔자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자 성전에 데리고 오자 반가이 맞이하면서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이제 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인생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내용인가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시므온은 하나님께 이제 고달픈 인생살이를 제대시켜 주시니 감사하다고 한 것입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나기 고대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죽어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홀로 죽으심이 아니고 모든 성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는 죽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 모습이 곧 성도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보시고 맞이하십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우리도 죽음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합니다.

 

영광이란? 꽃이 활짝 피어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처럼 어떤 일에 아름다운 결과가 도출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인자가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도 기쁘고 자신도 기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잘 했다고 상을 받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도 인자를 통하여 영광을 얻었다고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할까요?

이는 곧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애당초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어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이건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전에 한 약속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약속을 이루려고 죽게 되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아뢰자!

이번에 하나님이 그래 알았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를 영광스럽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차질 없이 잘 죽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희한하지요.

아버지가 아들이 죽겠다고 하는데, 내가 잘 죽도록 도와줄게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아버지가 있습니까!?

아들이 죽는데 잘 죽으라고 도와준다니요!

이건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다시 말합니다.

알다시피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나갔어요.

다른 말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영광을 얻었다고 하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 아버지께도 기뻐하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야! 드디어 내가 죽게 되었구나!

이제 아버지가 기뻐하시겠구나!

앗싸!

그러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도가 죽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세요.

참 재미있지요.

 

도대체 하나님 아버지는 어째서 예수님이 죽는 것을 기뻐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창세전 언약대로 자기백성들이 죄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백성들을 죽음의 세계에서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인생은 출생에서부터 십자가의 길로 몰아져 가는 것입니다.

 

자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은 달라요.

하나님 나라는 영에 세계이고, 이 세상은 육의 세계에요.

하나님 나라는 창조주가 사는 신들의 세계이고, 이 세상은 피조물이 사는 인간들의 세계에요.

 

그럼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입장에선 끝인 겁니다.

끝이란 죽음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고 이 세상 입장에서 보면 출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서른 살 먹은 청년으로 오시지 않고 어린 아이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음과 출생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그런데 이게 이제 죽음을 통해서 역순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육신으로 온 예수님은 종말을 맞이하여서 원래 아버지와 창세전에 가졌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내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어요.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두 목숨이 나오지요.

버리는 목숨이 있고 얻을 목숨이 있지요.

버리는 목숨은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목숨이고 다시 얻는 목숨은 영에 속한 하늘나라 목숨인 겁니다.

쉬운 말로 죽을 목숨과 영생하는 목숨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 드디어 원래 목숨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라고 탄성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니 영광이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군대 생활을 완벽하게 완수하고 제대하는 군인과 같아요.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꽃이 만개 하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뜻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예수님의 인생에 최고로 빛이 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꽃을 활짝 피운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면 이기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이라고 하고 있어요.

성공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실패이고 실패인줄 알았는데 대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대단한 반전입니다.

마귀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뛰어야 할 형편이에요.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이 도리어 예수님을 도와준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이런 모습이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12제자들이나 스데반을 핍박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어찌하든지 12제자나 스데반이 예수님이 부활 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막으려고 공개적으로 처형을 했어요.

그런데 도리어 스데반이 천국 가는데 도움을 주고 말았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려고 12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협박하고 공갈을 치고 핍박을 가해서 예루살렘에서 쫓아냈어요.

그런데 쫓겨난 자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어요.

천하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전하게 만들었어요.

 

그냥 가만히 두었으면 예루살렘에 있었을 터인데 괜히 핍박을 해서 도망하게 만들어서 온 세상에 알리게 하고 만 겁니다.

마치 산불을 끄려고 작대기로 후려 쳤는데 그만 그 불씨들이 온 사방에 흩날려서 온 산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고 만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마귀의 수를 역으로 이용해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이건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어요.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으면 끝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요.

베드로나 요한도 고기 잡으러 갔어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역사를 이루어가셨어요.

제자들은 이 일에 증인으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고 천하만국으로부터 올라온 수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높이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하였던 겁니다.

 

결국 마귀가 이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겼어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마귀를 가지고 예수님을 승리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예수님을 승리자로 만드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룟유다 속에 마귀가 쏙 들어가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팔아먹는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을 통해서도 말해주고 있어요.

 

두 증인들이 나타나서 육적 신자들을 고발합니다.

그러자 육적 신자들이 화가 나서 두 증인을 죽여 버립니다.

두 증인을 죽이고 자신들 뜻대로 이겼다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기뻐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두 증인들을 살려내서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육적 신자들은 두 증인들을 천국으로 가게 하는데 도와준 꼴이 되고 만 겁니다.

 

스데반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누가 스데반을 죽여주어야 합니다.

산 사람은 데려 갈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고맙게도 스데반을 죽여준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으면서 자기를 죽이는 유대인들에게 고맙다고 한 겁니다.

 

이러한 일들인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다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자기 백성들을 죽여주어야 해요.

이 일에 동원 된 자들이 누군가 하면 육적 신자들이에요.

 

이 시대 십자가를 증거하면 육적 신자들이 발광을 하면서 덤벼 들여 이단이라고 물어뜯어요.

지금은 영적으로 죽이는 겁니다.

십자가 피를 전하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곧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이던 것과 같아요.

영적인 의미에선 돌에 맞아 죽는 것이나 이단소리 듣는 것이나 동일해요.

그러니 성도들 입장에선 육적 신자들이 고마운 겁니다.

 

육에 속한 자들이 복음을 증거하면 이단이라고 해 줌으로서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나게 해 주시는 겁니다.

소속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어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실제는 미워 죽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해 주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항상 마귀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세요.

 

성도를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하셨어요.

아벨을 죽이게 하고,

욥을 핍박하고 시험하는 일에 동원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마귀를 그렇게 시용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 몸으로 연합된 자로서 이 세상에 죽임 당하도록 던져져 있어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핍박을 해요.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으면 옛날에 선지자들도 다 그런 핍박을 당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겁니다.

 

성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어둠 속에 빛으로 있으니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어요.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편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연히 예수님께 속한 성도들도 미워하겠지요.

 

복음을 증거하면 미움을 받는 것은 복음이 인간들 편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이 미움을 당하는 것은 모두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안 받으면 그건 가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가짜에요.

마귀가 척 알아보고 핍박을 해 주어야 예수님에게 속한 진짜 신자인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받고서도 핍박이 없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에요.

아주 무섭지요.

 

우린 복음 전하고 대접을 받고자 하잖아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안 받고자 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핍박받는 곳으로 밀어 넣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순교자들이 빨리 세상을 심판해서 자기들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조금 기다려라 아직도 세상에 너희들처럼 복음 전하다가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죽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육적 신자들에게 맞아 죽어야 그 놈들이 마귀에게 속한 놈들이라는 것을 고발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육적 신자들에게 맞아 죽은 성도들을 예수님께 속한 자로 인정해서 천국백성으로 받으시고 성도를 죽인 놈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하여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면 핍박 받을 일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셨다고 하면 미움을 받아요.

십자가 안에선 성화란 없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인간의 의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 받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핍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에요.

마귀는 아무나 핍박하지 않아요.

꼭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도만 골라서 핍박을 해요.

이건 억지로 미움을 받으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 속하였으면 반드시 마귀가 알아보아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십자가 피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예수가 어떻고!

새 언약이 어떻고!

 

입술로는 달달 외워도 마귀는 그것이 지식인지 신앙인지 대번에 알아보아요.

입술로 나불거리는 놈들은 그냥 내버려둬요.

그 놈들은 마귀 편에 서서 주둥이로 도리어 십자가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핍박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겁니다.

 

마귀는 바울과 스게아의 일곱 아들처럼 누가 예수쟁이고 아닌지 구분해요.

스게아의 일곱 아들도 입으로는 예수! 예수 했어요.

그런데 마귀가 넌 가짜라고 하잖아요.

 

신앙이란? 내가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알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아주는 믿음은 마귀도 알아보고 핍박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피를 말해도,

다 진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마귀가 얼마든지 가짜들을 심어 놓아서 복음을 가리는 일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온 몸으로 믿는 겁니다.

즉 예수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로는 뭘 못하겠어요.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 겁니다.

능력이란 삶을 말해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는 마귀가 척 알아보아요.

예수님께 속하지 않는 자는 마귀가 가만히 둬요.

입술로 믿는 사람은 핍박하고 미워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은 속이고자 마귀가 심어 놓은 자기 졸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욕을 먹어야 정상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민족(교회)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친구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단 십자가 피 복음 때문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죽임 당하는 것이에요.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듯이 한 솥 밥을 먹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의인 사가랴의 피가 이 성에 가득하다고 하였어요.

예루살렘 성은 교회의 모형이에요.

아벨과 사가랴는 성도의 모형이구요.

그러니 아벨과 사가랴 속에는 모든 성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예루살렘 성에서 뿌림을 당한 것은 모든 성도가 육적 신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교회로부터 죽임 당해요.

교회에서 죽어요.

왜? 교회가 죽이는가 하면 예수님은 보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마귀가 장악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선 교회를 일컬어 음녀라고 하고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교회들이 육적 신자들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육적 신자들은 세상을 떠나고 죽는다는 것을 싫어해요.

예수님의 피를 싫어해요.

피 뿌림의 삶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피를 말한다고 이단이라고 하지 않아요.

오직 교회를 통해서 자기 영광을 받고자 하는 육적 신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마치 예수님이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듯이 성도들도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팔자는 예수님의 팔자와 동일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가룟 유다를 사용하였듯이,

성도들을 죽이는 데에는 육적 신자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 신자들은 마귀에게 속하여서 성도들을 죽여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니 야! 이제 내가 영광 받을 때가 되었다고 기뻐하시는 겁니다.

드디어 가룟 유다가 나를 죽이게 하는구나!

아버지여 드디어 마귀가 날 죽이고자 합니다!

아버지 영광 받으세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래 고맙다!

아들아!

네가 내 뜻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니 내가 억수로 기쁘구나!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네가 영광 받는 일에 도와줄게! 라고 하시면서 마귀를 마음껏 사용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하고 마귀하고 바둑을 두면서 수 싸움 하는 것과 같지요.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죽여서 하나님 일을 실패케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죽음을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죽이고 만세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죽었던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와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와 예수님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예수님이 죽는 것을 실패하고 망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성공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 말씀은 기독교의 최고의 신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진리에요.

이건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과 같아요.

 

만약에 마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성공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안 죽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죽겠다고 하여도 살렸을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자신이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하였다면 십자가에 안 죽었을 겁니다.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마귀와 싸워서 이겨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군사들에게 붙잡힐 때에 제자들에게 그랬잖아요.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12 영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저 놈들과 싸울 수 있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죽는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 것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살고자 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이 죽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요 12:23-2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보세요.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을 일컬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잖아요.

밀알이 죽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밀알이 죽는 것이야 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죽는 것이니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죽음이에요.

애초부터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예수님이 죽기로 작정이 되어 있어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백성들이 죽음 안에 가두어져 있어야겠지요.

그래야 예수님이 빼낼 것이 아닙니까.

알다시피 사망은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자기백성들은 죄에 갇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빼내 주시지요.

 

그럼 죄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거잖아요.

불순종이란? 쉬운 말로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죄에 가두어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에 가두어져 있다는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알았어요.

로마서 11장입니다.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죄가 하나님 뜻에 순종치 않는 것이니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은 곧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순종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순종이 안 되게 가두었으니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린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종 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이길 수 없도록 해 놓았어요.

이는 예수님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치 못하는 죄에서 빼내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하나님 뜻에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도 안 되어요.

육신이라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뚱이는 죄 아래 팔린 아담의 몸뚱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몸뚱이는 죄가 장악하고 있어요.

 

육신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만약에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죽지 말아야 해요.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도 육신은 죽어요.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사도바울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야! 내가 이래도 삼층천을 보고 온 사람 아니냐!

내가 그래도 성령의 감동으로 수많은 성경을 기록한 사도가 아니냐!

성경을 기록한 사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면 말이 안 되지!

그러니 와! 미치겠다고 하면서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탄식이란? 뻔히 보고도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못 지켜내니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종이 안 된다는 말은 완벽하게 지켜 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온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만 어기면 다 어기는 것처럼 우린 율법을 다 지켜 낼 수가 없어요.

물론 간헐적으로 부분적으로 지킬 수 있어요.

하지만 퍼펙트하게 100% 다 지켜내지 못해요.

 

하나님은 99% 지키고 1% 안 지켜도 다 안 지킨 것으로 간주해요.

우주로 날아가는 나로호가 다 고장 나서 추락한 것이 아니고 단 하나의 부속품이 고장 나서 실패한 것처럼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만 어기면 실패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탄식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에요.

성령의 충만함으로 산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탄식을 하고 있었어요.

바울이 열심이 부족하거나, 충성심이 모자라거나, 각오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은 본질적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탄식을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안 되느냐고 탄식하고 있으니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기 위해서 안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죄에 갇혀서 우리 힘으로 못 빠져 나와야 예수님이 와서 이끌어 내실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게 하려고 우리는 못하도록 해 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둔 것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구원은 긍휼로 받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면 긍휼이 필요 없어요.

긍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자들에게만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할 수 없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겁니다.

그리곤 불쌍히 여겨서 건져 내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구원 속에 예수님의 영광만 담아 놓기 위해서 에요.

구원받은 성도 속에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다는 것만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진짜 구원 받은 자는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에서 성도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걸 몰라요.

자신들이 죄 가운데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겁니다.

율법으로 너희들은 내 말을 안 들어 쳐 먹는 종자들이라고 알려 주었어요.

너희는 내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이걸 옛 언약이라 하고 또는 옛 계명이라고도 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새 계명을 준다고 하십니다.

 

새 계명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주어져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옛 계명이 완성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이라는 말은 옛 계명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기 전까지는 전부 옛 계명에 가두어져 있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옛 계명은 율법을 말해요.

그럼 옛 계명인 율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죽음에 가두는 것이라고 했어요.

율법은 마치 인간을 죽음이라는 항아리에 가두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율법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너희는 다 죽었어! 라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인간은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은 너희들은 지금 율법에 가두어져 있거든!

거기서 못 빠져 나오거든!

 

율법이 너희는 다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온 입을 막아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주둥이 닫으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이 너희는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존재들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고 있어요.

결국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들을 옛 계명에서 꺼내는 일을 시작하셨어요.

어떻게 옛 계명으로부터 꺼내는가 하면 옛 계명의 요구를 예수님이 담당하는 방식으로 꺼내는 것입니다.

옛 계명의 요구가 뭔가요?

말 안 들으면 죽는 다는 거잖아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 뜻에 순종이 안 되면 죽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서 순종이 안 되니 죽어야지요.

그런데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신 겁니다.

 

이걸 새 계명 혹은 새 언약이라고 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주셨어요.

 

하나님과 성도는 계명(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성도가 지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래요.

만약 새 계명을 인간과 맺었으면 인간이 새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예수님이 맺었어요.

예수님이 맺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킨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말이죠!

계명을 지키는 주체가 인간이 되면 구원문제는 예수님 손에서 떠나 있게 되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계명을 지키면 되니까요.

 

이렇게 되면 계명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는 것을 보고 구원을 시키든지 탈락을 시키든지 해야 되어요.

이렇게 되면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계명을 지켜서 따 내는 것이 되고 말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관이 바로 옛 언약(계명)식 구원관이에요.

 

새 계명이라 함은 옛 계명과 대조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 말씀이에요.

다시 말해서 새 계명은 옛 계명의 바탕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계명은 옛 계명을 쓸어 담고 완성하는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새로운 언약이 주어질 때마다 옛 언약은 새로운 언약 안으로 귀속이 되어요.

옛 언약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언약 안으로 흡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이 모세가 세운 옛 언약을 흡수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옛 계명식 구원관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새 계명에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 산까지 인도합니다.

시내 산은 모세가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을 빼내 오라고 사명을 받던 곳입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호렙 산 가시떨기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모세를 부르셨잖아요.

하나님이 가시떨기에 붙은 불로 나타나셔서 애굽에 있는 백성을 이 산으로 인도하라고 했어요.

 

출 3: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사명을 줄 때는 분명하게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어요.

이 산이란 모세가 사명을 받는 호렙 산을 말해요.

그런데 그 호렙 산이 바로 시내 산이에요.

호렙 산이나 시내 산이나 같은 산이에요.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시내 산까지 인도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꼭대기로 부릅니다.

그리곤 율법을 주어요.

율법이 옛 언약 즉 옛 계명이니 옛 언약이 체결되는 현장으로 가 봅시다.

 

출애굽기 19장입니다.

 

출 19:5-9=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꼭대기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법을 하나 줄 테니 저 놈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내 명령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이 들어가 있어요.

율법을 다 지키면 어떤 인간이 되는가 하면 죄 없는 인간이 되어요.

죄가 율법이 지적하는 죄악들을 몰고 온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인간을 원한다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너희들 이런 인간이 될 수 있느냐!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내는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이건 너희는 이런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깔려 있어요.

너희들이 만약 이런 인간일 것 같으면 율법을 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안 지었으면 율법을 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어요.

이는 곧 너희는 범법자란 말입니다.

범법자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희는 바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걸 모르는 겁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면 복을 준다고 하니 지키겠다고 덥석 문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저 놈들이 지키겠다고 하는데요!

그러자 하나님이 율법을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출 19장에서 23장까지를 보면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어요.

 

모세가 하나님께 들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말하자 일제히 자신들이 지키겠다고 응답을 합니다.

 

출 24:3-12=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

 

모세가 언약서를 낭독하자 백성들이 일제히 준행한다고 했어요.

이에 모세가 계약의 체결을 피를 뿌려서 맺습니다.

서로가 언약을 어기면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로서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언약을 맺었어요.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여 맺은 행위 언약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쌍무(雙務)언약이라고도 해요.

둘이 합의 하에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라도 언약을 어기면 피 흘려 죽은 짐승처럼 죽습니다.

그렇다면 피로 맺은 옛 언약은 누구든지 언약을 어기면 짐승과 같이 죽게 된다는 언약입니다.

결국 옛 언약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계약이 체결되고 난 후 모세는 그 계명이 적힌 돌 판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사십일 동안 모세에게 율법을 두 돌 판에 새겨 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언약의 돌 판을 받으려 올라간 사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금송아지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서 숭배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계약을 어기고 맙니다.

이건 애초부터 예견된 수순이에요.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덤벼든 것 자체가 죽음으로 기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 적힌 두 돌 판을 깨트려 버립니다.

이는 계약의 파기를 알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은 이미 깨어진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약속은 이미 깨어졌어요.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선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아요.

자신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여도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죽이든 살리든 할 말이 없어요.

죽이면 계약에 의하여 죽이는 것이고, 살려주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져 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 속에는 죽음이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선 율법 속에 범죄하면 속죄할 제사 제도를 담아 두셨어요.

이는 하나님께선 이미 이스라엘은 율법을 어길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어길 것을 알고 주신 것은 확인 사살을 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곤 그들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란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 언약은 뭔가요?

 

이는 일방적인 부르심과 선택에 의한 구원을 말합니다.

일방적인 부르심과 선택이란 말은 무조건적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해 준다는 언약입니다.

은혜언약이에요.

 

그럼 구원은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행위 언약인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이 맺어진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율법이 주어질 땐 아브라함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어요.

그러니 아브라함에겐 율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율법이 죽은 것과 다름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의아해 하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알다시피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란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언약으로 그들을 대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다스려 진다면 이스라엘은 율법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이 보장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내 산에 당도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행위 언약인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과는 모순처럼 들려요.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을 더욱 더 공고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제사 제도인 겁니다.

제사 제도란? 죄인을 위하여 제물이 대신 죽어줌으로서 범죄한 자가 용서 받는 것입니다.

이는 죄인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행위 언약인 율법을 주시면서 그 속에 대속하는 제사 제도를 주셨다는 것은 곧 율법을 주신 의미가 다른데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율법을 주신 뜻을 말했어요.

 

로마서 3장입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범죄한 자들에게 주신 것이잖아요.

율법은 죄인들의 입을 막고 너희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에요.

 

바울의 증거를 보면 율법은 이미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주었느냐 하면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었다고 합니다.

죄를 고발해서 넌 지옥에 가야 할 자라고 알려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은 구원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거나 의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무리 잘 지켜도 의가 나오지 않아요.

도리어 율법을 통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옛 언약인 율법은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옛 계명 아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새 계명을 주시는 것은 옛 계명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옛 계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면 새 계명을 주실 이유가 없지요.

옛 계명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은 옛 계명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서도 말했듯이 옛 계명인 새 계명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보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완성이 되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새 계명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살과 피를 가지고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새 계명도 옛 계명처럼 인간이 지켜야 된다고 한다면 굳이 새 계명을 줄 필요가 없어요.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엔 동일해요.

계명의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는 그 계명을 지키는 주체가 달라요.

옛 계명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했지만, 새 계명은 예수님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게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름이고 차이에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킨다는 뜻입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이에요.

 

애초부터 인간은 배제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님 홀로 지키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피로 맺어진 새 언약으로 얻어진 전리품이에요.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이루신 새 언약을 전리품들인 성도들에게 주세요.

 

성도들은 새 언약을 받았어요.

자기가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맺은 것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맺는다고 말하지 않고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주셨어요.

 

새 언약은 제자들이 맺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겁니다.

믿음을 주어서 예수님이 내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말씀을 대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다 지키셨다는 것을 앞세우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다는 것은 제자들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킨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에 문제이지 행함의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지켜야 할 것인가의 싸움이에요.

 

새 언약이란?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는 인간이 끼어 들 틈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맺은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것이지만,

새 언약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맺었어요.

그러니 새 계명은 인간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말씀이에요.

 

새 언약에선 말씀에 순종할 주체가 제자들 대신 예수님이 끼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선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믿을 것인가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말씀에 순종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순종하심을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새 계명을 준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의 내용은 동일하다고 했지요.

그러나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는 지키는 주체가 다르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옛 계명에서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지만 새 계명에선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준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역으로 이해하면 인간은 서로 사랑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랑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의 배후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새 계명이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전혀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열매는 가지가 맺지만 그 가지에 진액을 공급하는 것은 뿌리라고 했어요.

그러니 뿌리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성도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관심사를 예수님에게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하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보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노력으로 우리가 자의적으로 행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도구로 사용하세요.

우리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 몸은 우리의 본성과 다른 모습의 삶을 살게 되어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산 제물이라고 하고 영적 예배라고 했어요.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보세요.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지요.

이건 주께서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지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에요.

 

그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몸을 죽이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이건 우리 본성과 반(反)하는 일이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정과 욕심을 죽여주세요.

에이~ 손해 보고 말지!

에이~ 욕 먹고 말지!

에이~ 세상에서 망하면 어때! 천국이 있는데 라고 해요.

 

옛날 같으면 세상 것이 커보여서 세상 것을 잃으면 씩씩 거렸는데!

이젠 그래 망하기 밖에 더 하겠냐!

천국이 있는데! 뭐! 어때!

그러면서 세상 것을 세피하게 여긴단 말입니다.

아주 도통한 인간처럼 말이에요.

늘 그렇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젠 이상하게 세상이 작게 보여요.

옛 날에 자존심이 상하면 울그락 블그락 했는데 이젠 까짓거 무시당하고 말지 그래요.

세상 것으로 인하여 싸우기 싫어요.

그러니 지고도 웃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우겨쌈을 당해도 허허~하고!

핍박을 당한즉 축복을 하고!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았다고 하잖아요.

 

이건 바울만 살아내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내게 하세요.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제물의 각을 뜨듯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죽이면서 요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감히 할 수 없는 것들을 툭툭 토해내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뜻을 펼쳐 가는데 우리 몸을 도구로 사용하므로 우린 날마다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물이 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어요.

이는 죽은 자기 몸에 예수님이 일하신 생명의 흔적들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몸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 도구에요.

 

첫째로는 말씀 앞에 죄로 드러나게 되어요.

야! 나는 말씀대로 살수 없는 죄인이구나를 알게 되어요.

둘째로는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요.

세상에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있구나를 알게 되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떨어지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요.

취소되지 않아요.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그러므로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린 말씀 앞에서 죽어야 할 죄인으로 서 있게 되어요.

그럼 우린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서 피를 뿌려주시는 겁니다.

 

마치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지는 것과 같아요.

그럼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용서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죽어야 할 죄인이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은 믿어지게 하세요.

 

말씀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더욱 더 빛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자기 죄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말씀을 대하여도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피를 자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사랑이 없는 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확증하라고 한 겁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는 믿어집니다.

믿어지시면 담대하게 사세요.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면서 말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고 자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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