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90강. 성령이 하시는 일 (요 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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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1. 12. 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0강. 성령이 하시는 일 (요 14:20-24)

-.정낙원 목사

 

요 14:20-24=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오늘은 역설을 통하여서 일하시는 성령에 대하여 상고할까 합니다.

오늘의 글 역시 전반에는 정설로 풀어 가다가 후반부에는 역설로 풀어갈 것입니다.

미리 예단하지 마시고 끝까지 따로 오시기 바랍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곡언법이라고 합니다.

곡언법이란? 부정을 가지고 긍정을 들추어내거나 반대로 긍정을 가지고 부정을 들추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가능한 것을 알게 하려고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물을 채우라는 말이 아니고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말은 하라는 긍정의 말이지만 그 속 뜻은 깨어진 항아리에는 물을 채울 수가 없으니까 하지 말라는 부정을 깔고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게 하려고 가능으로 말하는 것을 역설적 화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죄인에게 이와 같이 주어진 것입니다.

너희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말씀을 지키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 실존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지 순종을 이끌어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에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지키십니다.

우린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죄인이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구조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은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으로서는 도저히 살아 낼 수가 없는 의인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였습니다.



어떤 왕이 군사 100만을 거느리고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있는 왕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언제 어느 때에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겠다고 알려 줍니다.

이건 싸움에서 이기도록 방비하라는 말이 아니고 싸우기 전에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왕이라고 한다면 빨리 전쟁을 포기하고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여야겠지요.

100만 군사를 거느린 왕이 통고해 주는 것은 싸우기 위함이 아니고 항복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군사 1만을 거느린 왕이 100만 대군을 맞아 싸우려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음입니다.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릅니다.

이에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나를 따르는 길은 부모나 자식을 버리고 전토나 재물도 버리고 자기목숨도 버리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는 날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너희들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건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린 이런 말씀 앞에 주여 난 못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죄인들에게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바탕을 깔고 주어졌습니다.

자기 주제를 알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걸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러한 역설의 의미로 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갖는 그 본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변화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이 오시면 우리와 예수님을 하나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건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죄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고!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습니다.

 

순종이란? 자아가 없을 때만 가능합니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나 뜻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뜻이 없다는 것은 하나 일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한 몸일 때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하여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창조주와 피조물은 하나였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안에서 나왔습니다.

안에서 나왔다는 말은 원래 하나란 말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피조물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럼 피조물은 창조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란? 하나님 말씀에 묶여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붙잡혀 있는 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창조란? 순종입니다.

거역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창조가 말씀 하신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꽃에게 노란 색을 피워라 하면 노란 색을 피웁니다.

이게 순종입니다.

만약에 꽃이 싫어 난 파란색을 피울래 그러면 그건 반(反) 창조가 됩니다.

이걸 불순종이라고 하고 합니다.

다른 말로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이게 창조입니다.

그래서 창조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관계 안에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라는 것은 내가 옳으냐! 그르냐!

선하냐! 악하냐! 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 안에 있느냐로 말합니다.

하나님과 순종의 관계 안에 있으면 의이고, 불순종의 관계 안에 있으면 불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결국 의는 하나님과의 하나 됨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의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 됨입니다.

 

요 17:11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께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우리와 같이" 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금은 둘이란 말입니다.

븐리되어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각자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듯이 이젠 성도가 하나님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 됨의 일이 성령이 오시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해 주신답니다. 

그럼 하나였던 것이 왜? 분리가 되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둘로 분리를 시켜 놓았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게 만든 겁니다.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를 지칭할 때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말할 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 말의 뒷편을 보면 원래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부터 인간들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파내고 말았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났어요.

마음에 하나님 두기가 싫다는 것은 혼자 살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창조 원리에서 벗어나 역리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로마서 1장입니다.

 

롬 1:28-31=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인간들이 범죄하자 마음에 하나님 두기가 싫어졌습니다.

부담스러운 겁니다.

하나님이 귀찮아진 겁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싫어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럼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에게서 악독한 것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옵니다.

죄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미움이 살인이라는 가현적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미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니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되더라는 겁니다.

위에 언급된 죄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면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짐승의 모습입니다.

결국 죄란? 나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십계명을 보아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둘 로 나누면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과 이웃을 해치는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왕 노릇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살인하고!

내 유익을 위해서 남에 것을 도적질하고!

내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남에게 사기치고!

내 쾌락을 위해서 간음을 행합니다.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이게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 이걸 역으로 살펴봅시다.

이러한 죄악성들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면 어찌 될까요?

이러한 것으로부터 금지하게 되겠지요.

안 하게 되겠지요.

안 하려고 하겠지요.

맞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 성도는 이러한 것을 금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죄라고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짓들을 하지 않고자 합니다.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걸 죄를 미워하고 거부하고자 하는 경향성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불신앙은 이러한 것을 즐기는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그래요.

항상 죄는 육신의 소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서신서마다 죄를 지적 할 때 인간의 부도덕성을 가지고 말하는 이유도 다 이러한 죄성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걸 이방인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니 마음대로 해! 라고 하면 그 아이는 악인이 됩니다.

아이는 부모의 통제 속에 있을 때 인간으로 자라갑니다.

만약에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살면 짐승이 됩니다.

인간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자식은 부모의 통제 속에서 자라가야 인간다워집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죽은 것입니다.

 

이걸 유다서에선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습니다.

유리한다는 말은 끈 떨어진 연처럼 저 혼자 떠돌아다닌다는 말입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말합니다.

마치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쫓겨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럼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짐승처럼 육신의 본능대로 살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의 삶을 일컬어 감각 없는 이방인들이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삶을 자기 몸을 방탕과 방임에 내어 맡겨 방종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 간섭하는 분이 없으니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주인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해도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 밖에 있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입니다.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온전하게 순종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순종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원래 유리하는 별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주인이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의 주인이라고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십니다.

간섭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 둘 차압해 가십니다.

 

얍복강에서 야곱의 인생을 차압하고 이스라엘로 만들었듯이 우리 인생도 바꿔치기 하십니다.

나를 위한 인생에서 예수를 위한 인생으로 바꿔치기 하십니다.

내 기쁨을 위하여 살던 인생에서 예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꿔치기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날마다 정과 욕심이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인생은 빼앗기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고난인 겁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임한 자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어떻게 회복하시느냐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회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가로 막힌 담을 자신의 죽음으로 허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힌 죄라는 담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겁니다.

이걸 화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성도가 화목 되었습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성도란?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자입니다.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조건으로 화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중보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중간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화해를 시키신 겁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과 너희를 화목케 하려고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고 합니다.

내가 가서 죽고 나서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면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 줄 터이니,

그가 오면 나의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 되게 하는 일을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나면 성령이 오실 터인데 ,

그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 된다는 말은 화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같은 틀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는 사랑과 순종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뭐냐? 순종입니다.

순종은 뭐냐?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의 뜻을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이는 죽음도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하신답니다.

이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손해 보는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낮아집니다.

 

사랑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걸 성도의 신앙으로 말하면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행함은 순종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고, 믿음 있으면 행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걸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이게 원초적인 아버지와 아들간의 하나 됨의 관계입니다.

이 하나 됨의 관계를 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 됨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을 부모와 자식 관계로 담아 놓았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로 있습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 할 때 부모 자식 관계가 유지가 됩니다.

만약에 불순종하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걸 보여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불순종 한다는 것은 창조의 원리가 깨어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를 두고 불의라고 합니다.

 

불의란? 관계가 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순종에서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가 없듯이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한 아담을 산 자의 동네에서 죽은 자의 동네로 추방하신 겁니다.

한 마디로 말 안 듣는 자는 꼴도 보기 싫다는 말입니다.

 

이건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부모 자식관계에서도 말 안 들으면 깨어집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데도 꾸역꾸역하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그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의 생각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이 피가 되듯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기도하였지만 끝내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자기 뜻을 포기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싶었는데 천사들의 도움으로 자기 뜻을 버리고 아버지 뜻에 굴복하였습니다.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신 것도 이처럼 우리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 뜻에 굴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이러한 자기 부인이 일어납니다.

자기 부인을 일컬어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성경이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도 다 이러한 창조의 속성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봅시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다가 짤렸습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합니다.

짐승에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도륙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아말렉을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마귀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내린 명령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좋은 것들을 남겨둡니다.

이에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에게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라고 알려 줍니다.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갖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는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불순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 속에는 내 생각이 없습니다.

내 뜻도 없습니다.

내 계획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에게 명령하신 그 분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이게 순종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해주고 싶어집니다.

그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집니다.

그가 하라는 일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안 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면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내 생각을 버리고 그가 원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기쁩니다.

이는 그의 기뻐함이 곧 나의 기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속엔 자존심이 없어요.

그래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좋아서 그의 말을 듣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을 신앙의 근본으로 말하는 것은 순종 속에 창조 정신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 속엔 십자가 정신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 속엔 자기 부인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부인 된 그 자리에 예수님의 것이 채워집니다.

이를 두고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합니다.

 

사랑 속엔 자기 생각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뜻만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이면 자기도 기쁘고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자기도 싫어져요.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은 하나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 속엔 싫어! 안 해! 가 없어요.

오직 알았어! 응! 만 있어요.

사랑 속엔 나를 포기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성경이 신앙을 순교로 말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최초의 순교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어요.

 

성경은 우리더러 이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으란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언제 주셨습니까?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의 마음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심겨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심겨지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와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행하십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럼 우린 여기서 묻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고 있느냐” 입니다.

“살 수 있느냐” 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을 역설적 의미로 찾아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고 하여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내지를 못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린 여기서 왜? 안 될까를 찾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신앙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답대로 사느냐 못 사느냐 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아버지의 뜻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우린 이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정답대로 살고 있지 않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함에도 우린 그렇게 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셨는데 우린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전하게 살아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왜? 를 찾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자 아담을 탓하지 않고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그 놈을 추궁합니다.

누구냐!

“누가” 너의 벌거벗음을 수치라고 하더냐?

“누가” 너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게 하였는지를 찾아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누구를 찾아내야 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그 놈을 찾아내야 합니다.

왜? 안 되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그렇게 살고 있지를 못합니다.

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심에도 안 될까요?

 

이는 바로 우리 몸이 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몸이란?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는 몸이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 없는 몸입니다.

이건 마치 고물차에다가 새 엔진을 장착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옛 사람에게 새 법을 심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안 돌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돌아가면 이상한 겁니다.

 

여기서 우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고장 난 몸에 새 엔진을 장착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이 옛 사람에게 새 법을 심어 놓았을까요?

이는 우리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것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고 있음을 알기를 바랍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의 바탕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고장 난 몸이 감당 할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이 죄라는 놈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예수를 믿은지 수십년이 지나고 난 후에 나온 고백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나온 고백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내 실존이 보입니다.

죄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 할꼬! 라는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게 성령의 충만한 상태입니다.

결국 성령 충만은 나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바울이 탄식하자 성령께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아! 내가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한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게 바울이 붙잡고 있었던 믿음입니다.

 

성도의 표시는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가!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

또한 내가 얼마나 변했는가도 아닙니다.

 

성도의 표시는 내가 어떤 자인가를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였는데 예수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시선을 떼고 예수님에게로 고정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기에 내가 이런 혜택을 입고 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면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셔야지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형편없는 자임을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고 깊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왜? 나는 안 되는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절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미워져야 합니다.

나에 대한 기대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난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를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일평생 이걸 알아가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예수님께서 죄인의 몸에 성령을 보내주신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죄인의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신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인의 몸으로는 하나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음과 예수님이 붙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 받아야 함에도 저주 받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하심이 있기 때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두 가지 의미를 깨닫도록 일을 하십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곡언법으로 해석을 하니 잘 이해하세요.

 

곡언법은 부정을 가지고 긍정을 말할 때도 있고, 긍정을 가지고 부정을 말할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긍정을 통해서 부정을 이끌어내고,

반대로 순종을 통해서 불순종을 이끌어낸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역설적 어법”입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율법이 역설적 어법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해 놓고선 너희는 못 지킨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역설적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이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종을 말하지만 도리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법은 은혜의 대척점에 있어요.

법과 은혜는 서로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겁니다.

법이 죄로 드러내 놓으면 은혜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건 옛 언약과 새 언약과 같아요.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죄를 고발하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고발당한 죄를 덮어주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 속에 새 언약이 숨겨져 있고, 새 언약 속에 옛 언약이 깔려져 있습니다.

 

이 둘은 한 짝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역설적 파트너인 겁니다.

성령이 이 역설적 일을 우리 몸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놓고선 그 뜻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십시오! 라고 하면,

이는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것을 말 하고자 함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순종하라는 말은 율법과 같이 넌 안 돼!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아라!

되는가?

안 되는가?

그럼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될 거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고자 하는 죄를 고발하려고 역(逆)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적 행위를 끄집어내고자 함이 아니고 죄를 고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 뜻을 이해해하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곡해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계속하여서 곡언법으로 증거 하였는데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엉뚱한 말을 하는 겁니다.

이건 믿음이 일으킨 행함과 인간이 한 행위를 구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행함을 행위로 둔갑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정죄하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행한 삶을 살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안 해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믿음이 일으킨 행함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도의 삶을 죄라고 하고 행위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서울 가 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싸우면 안 가본 사람이 이깁니다.

가 본 사람이 져요.

왜? 지는 줄 아세요.

안 가 보아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 줘도 모르니 그걸 이겨본들 무슨 유익이 있느냐 라는 뜻에서 시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 니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러고 맙니다.

그럼 안 가본 놈이 이긴 줄 알고 우쭐 거려요.

 

이건 성령을 받은 성도와 안 받은 자 간의 싸움도 똑 같아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분명히 자기 안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살아요.

주님이 자기 안에서 일하시고 계심을 믿어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하면 이건 자기가 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그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해요.

 

마태복은 25장의 양들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예수님이 그럽니다.

얘들아! 내가 주릴 때 너희들이 먹였고!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들이 간호해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들이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양들이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우린 기억이 없는데요.

그럽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양들로부터 이런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양들은 몰라요.

왜? 그런가요.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도 양들처럼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처럼 자기가 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시대 어떤 자들은 성도의 삶은 없다고 합니다.

성도의 행함을 말하는 자는 마귀라고 해요.

이런 자들은 한 번도 자기 안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막살아도 된다고 악을 쓰는 겁니다.

이 말이 목숨 바쳐 지켜야 할 무슨 진리라도 되는냥 끝까지 발악을 하면서 고수하고자 해요.

 

성령이 행하게 하는 삶이 있다고 하면 그게 무에 그리 화가 날 일인지 적개심이 가득해서 난리를 칩니다.

이는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행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행하게 하는 삶이 없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 막가파 식으로 사는 겁니다.

깡패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유리하는 별이라고 해요.

 

이건 마치 서울 안 가본 자가 우기는 것과 같아요.

이런 자들과 싸워 뭣하겠어요.

그냥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살라고 해야지 어쩌겠어요.

 

다시 말합니다.

제가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했습니다.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안 해보고 안 돼! 라고 하는 것과, 열심히 해 보고 안 돼! 라고 하는 것은 달라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감사가 되려면 죄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야! 난 진짜 저주 받아야 할 놈이라는 것을 알아야 감사가 되어요.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에 죄와 싸우는 것이 없는 겁니다.

자기가 진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자 합니다.

이건 본능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무겁게 받아요.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의 죄를 늘 고발당하면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음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이 감사가 자기를 부인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서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를 낱낱이 고발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말씀이 하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불가능한 한계성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아요.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보라고 하는 겁니다.

되는지? 안 되는지?

안 되면 왜? 안 되고?

되면 왜? 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순종하라는 말로서 불순종을 드러내고자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말씀에 순종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어요.

물론 되는 것은 잠깐이고 안 될 때가 거의 다 입니다.

주의 은혜가 깨달아지면 잠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건 내 실력이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서 간섭하셨다는 것을 알아요.

안 될 때는 내 죄를 알고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고!

될 때는 이는 주께서 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건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몸과 마음이 달라요.

몸이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살아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만이라도 생긴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마음은 예전엔 없던 마음입니다.

모두가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생긴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 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이 마음은 우리 마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성령이 심어준 마음입니다.

이걸 에스겔이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영을 주어서 새 마음을 주시고 새 법을 주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암튼 성령이 임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예전에 없던 마음이 생기니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도 달라져야 하는데 안 달라져요.

그런데 달라집니다.

 

아니? 안 달라지면 안 달라지는 것이지!

안 달라진다고 하면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지요.

 

달라져야 하는데 안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몸이 죄인의 몸이라서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그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향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전 같으면 불가능한 일을 행하기 때문에 달라진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안 달라지는 것은 우리 몸이 온전하게 말씀을 담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안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달라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천지와 같이 다릅니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실제의 삶”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를 “이해는 되는데” “표현이 안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전에 김갑수 라는 배우가 동성애를 다룬 내용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토크쇼에 나와서 그 때의 심경을 피력하는데 시나리오를 통해서는 동성애를 이해는 하겠는데 그것이 실제로 표현은 안 되더라고 합니다.

상대 배우와 키스를 하여야 하는데 도무지 감정이 안 살아나서 못하겠더라는 겁니다.

그건 상대 배우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둘이 술을 먹고 했다고 합니다.

왜? 동성애를 표현하지 못합니까?

그건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동성애자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내지를 못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동성애자가 아닌데 어찌 남자와 남자가 키스를 하는데 실감이 나겠어요.

그냥 술 기운으로 연기한 것이에요.

실제 동성애자면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게 사실적으로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 삶이고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성애자인 김갑수 씨에게는 동성애는 실제가 아니고 지식입니다.

 

그러니 이해는 하겠는데 표현이 안 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해하는 것하고, 표현하는 것은 달라요.

이게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의 차이에요.

이해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표현하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달라요.

 

이해는 지식이고, 표현은 실제에요.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삶이에요.

지식은 관념이고, 실제는 삶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이와 같아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지려면 그 속에 예수님이 와 계셔야지만 가능합니다.

 

성도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임한 성도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살아서 당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은 어렵지가 않아요.

이건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고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단 한 번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선뜻 연보를 했어요.

그것도 자신들도 궁핍한데 말이에요.

 

성경은 이들의 연보를 극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아깝게 여기거나 주저함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에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한 몸으로 생각하고 돈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본성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의 본능은 내 배가 고프면 내 입에 먼저 떡을 넣지 자기 입에 떡을 남에게 빼내 주지 않아요.

우리 몸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자기 입에 떡을 빼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넣어주었어요.

이건 난 죽을 테니 넌 살으라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 속에서 일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마음으로서의 삶이 나온 겁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연보하고 자랑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했어요.

이는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늘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순간 일어 난 겁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에게도 있어요.

어떨 땐 죽기 살기로 충성하고 봉사하다가 어느 땐 날 잡아 잡수세요 하고 있잖아요.

어떤 땐 주를 위하여 죽을 것 같다가도 어느 땐 내가 언제 예수 믿었나 라는 식으로 예수를 죽이고 있잖아요.

 

이런 롤러코스트 신앙은 모든 성도에게 다 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늘 우리 뜻과 같이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몸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애통은 하되 낙심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간헐적이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서의 삶이 일어나요.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은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 속엔 이런 성향이 있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수학공식 외우듯이 십자가 도에 원리를 아는 것이 아니에요.

원리를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원리로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몸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원수를 사랑해야지가 아니고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해야지가 아니고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야지가 아니고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주께서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을 몸으로 살게 하셨어요.

 

이들은 모두가 우리의 신앙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전 이렇게 살으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다만 성령이 간섭하시면 이렇게 살아지게 된다고 말할 뿐입니다.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셨던 그 성령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스데반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되고 우리는 안 되고가 없어요.

그들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도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상하게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가르쳐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면 자연적으로 나타나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오해 할까봐 못을 하나 치고 갑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완전하다거나 온전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없던 마음이 생겨난단 말입니다.

 

마치 베데스다 못가에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 못을 동하게 하듯이 주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은혜로운 사건들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소욕이 육신의 소욕을 이길 땐 우리 뜻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간헐적이지만 말이에요.

이럴 때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맺으신 것들입니다.

이건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들은 알아요.

깨닫는다니까요.

 

성령은 반드시 성도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전처럼 살아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성향이 생기는 깁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성령의 소욕대로 온전하게 살아내지를 못해요.

성도란 이걸 아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실제로 마음먹은 대로 안 살아지거든요.

그러므로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는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린 이 딜레마에 빠져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나를 강한 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약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잘난 자가 아니라 못난 자로 세우십니다.

죄인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는 자리로 밀어 넣는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 갈수록 입을 닫고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은 은혜를 받아야 나오는 고백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나오는 고백이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은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뱉어내는 고백이 아니에요.

이는 말씀 앞에서 난도질당하여 자기가 진짜 미운 사람이 뱉어내는 고백입니다.

도무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실감 한 자들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주술처럼 염불 외우듯이 말하는 자들이 뱉어 낼 수 있는 고백이 아니에요.

 

원리적으로는 성령이 임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그 죄의 깊이는 말씀에 부딪치면서 더 깊고 더 넓게 알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나” 라는 인간의 죄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가야합니다.

까발려질 때마다 우린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 때 비로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처럼 죄인의 자리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받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비로서 범사가 감사가 됩니다.

야!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설적인 말씀으로 우리를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을 지금 성령이 우리 몸에서 벌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몸에서 죄를 끄집어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끄집어내고 계세요.

죄가 끄집어지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게 되고,

은혜가 끄집어지면 주여 영광 받으소서! 라고 찬양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다고 하여서 낙심하지 마세요.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잘려 나가지 않습니다.

 

실패 할 수도 없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니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고아로 두지 않으시고 영원한 보혜사가 되셔서 지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죄들이 고발당할 때마다 감사케 하시고 주의 은혜를 더욱 더 사모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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