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105강.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 (요 17: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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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2. 1. 1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5강.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 (요 17:4-15)

-.정낙원 목사

 

요 17:4-15=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 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 자기 백성을 주고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사오며” 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간에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자기 백성들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걸 자기 백성들에게 줍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뭔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영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쉬운 말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보낸 겁니다.

무슨 심부름인가 하면 아버지가 선택한 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는 심부름입니다.

그럼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다시 정리해서 쉽게 설명합니다.

 

아버지가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자기 백성들에게 갖다 주라고 보냈어요.

그 편지 내용이 뭔고 하니!

내 백성들은 들을지어다!

지금 이 편지를 너희에게 전달하는 그가 바로 내 아들이니 너희들은 그를 내 아들로 영접하라는 내용입니다.

 

편지의 내용이 한마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다 위임했다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음성이 들리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잖아요.

이걸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예수가 바로 내가 보낸 아들이니 그에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그 아들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어요.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반대로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지 않는 자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왜? 망했는가 하면 아들을 영접하지 않아서입니다.

이방인은 왜? 구원 받았는가 하면 아들을 영접해서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를 믿으면 저주를 받고, 아들을 믿어야 구원을 받아요.

하나님 믿으면 지옥가고,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요.

 

이걸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이 사실은 오로지 아들이 전해 준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성도만이 알아요.

아들을 믿는 자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자에요.

아버지는 아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위임장을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택한 백성들에게 보여 줍니다.

봐라!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서 왔다고 합니다.

 

그럼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아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아버지를 대하듯이 대할 것입니다.

편지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들이 하는 말을 아버지의 뜻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있겠지요.

 

아들을 아버지를 섬기듯이 섬기겠지요.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에요.

아들을 공경치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치 않는 자에요.

그러니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서 저 놈들이 과연 나를 공경하고 내 말을 듣는 놈들인지 아닌지를 확인 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이란? 언약으로 난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들은 그 속에 언약을 품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그 속에 언약을 심어서 보냈어요.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 사람처럼 살고는 있지만 그 속에 아브라함 언약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때가 차매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 종살이 하던 자들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심겨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다 찾아오십니다.

그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뿌려서 죽음으로부터 구출해 내세요.

 

구약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하게 되는 그림은 창세전 언약의 그림이에요.

이 그림은 또한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그림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시는지를 시청각교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외모로 보면 이스라엘이나 애굽인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 사람으로 살았어요.

다만 애굽인과 이스라엘이 한 가지 다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을 담고 태어났어요.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태어나기 전에 조상과 맺은 언약이에요.

그러니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은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아니고 그냥 언약이 담고 있는 것을 받는 자들이에요.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은 언약을 구경도 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들 속엔 언약이 흐르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 언약을 보시고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모형이에요.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창세전 언약이 우리 몸에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속에 창세전 언약이 심겨진 자와 심겨지지 않은 자로 구분해 내세요.

창세전 언약이 심겨진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제 그 속에 언약이 심겨진 자기 백성과 아닌 자를 구분해 냅니다.

그러니 함께 살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게 된 겁니다.

함께 있다가 예수로 인하여 갈라지면 미움을 받아요.

서로 원수가 되어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들과 동문수학을 하고 호형호제하면서 지냈어요.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원수가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은 인간들을 두 편으로 편 가르기 하시는 분이에요.

 

이걸 창세기에서는 창조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가 곧 구원 이야기이고, 구원 이야기가 곧 창조 이야기에요.

창조와 구원은 영적으로는 같은 의미에요.

 

창세기 1장을 봅시다.

 

창 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란? 하늘과 땅이란 말입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라는 두 세계가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혼돈이란? 하늘과 땅이 섞여 있다는 말이고!

공허란?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섞여 있다는 것은 성질이 다른 두 가지가 혼합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질이 같은 것이 섞인 것은 연합이라고 하고,

성질이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은 혼합이라고 해요.

연합은 좋은 것이지만 혼합은 나쁜 것이에요.

 

지금 창세기에서는 혼돈이라고 말함으로서 성질이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무엇이 혼합이 되어 있나요?

빛과 어둠입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섞여 있어요.

하나님이 그 속에서 빛을 불러냅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어 버립니다.

이걸 창조라고 합니다.

 

빛을 낮이라 명명하고, 어둠을 밤이라고 명명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빛은 생명으로 말하고, 어둠은 죽음으로 말합니다.

낮을 천국이라 하고, 밤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빛을 예수님이라고 하고, 어둠을 마귀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속한 자는 빛에 아들이 되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어둠에 자식이 됩니다.

또한 낮에 속한 자는 천국 백성이고, 밤에 속한 자는 지옥백성이 됩니다.

 

쉬운 말로 산 자와 죽은 자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이라고 하지요.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을 말해요.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내러 오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엔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여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래요.

 

이 세상엔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여 있어요.

예수님으로부터 갈라짐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엿새 동안 빛에 속한 것과 어둠에 속한 것을 갈라냅니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들로 갈라냅니다.

그리고 갈라낸 곳에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일컬어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룬다고 합니다.

 

천지는 공간이고,

만물은 천지라는 공간 속에 담는 물건들이에요.

이 일이 다 끝나면 일곱째 날이 됩니다.

일곱째 날을 일컬어 거룩한 날이라고 하고 여호와께서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집을 짓고 살림들을 채우는 것과 같아요.

집을 짓고 살림살이들을 다 채우고 나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집들이를 하잖아요.

잔치를 벌이잖아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갈라내는 천지창조와 그들 속에 만물을 채우시는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을 엿새 동안 하십니다.

엿새가 지나면 일곱째 날에 천국에서 집들이 하듯이 잔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의 엿새가 이 세상의 역사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곱째 날은 시간의 흐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고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정이 되어 있다 함은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다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감상하는 것과 같아요.

 

시간의 흐름이 없다는 것은 완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안식의 세계를 천국이라고 해요.

또는 영원이라고도 하고 또는 묵시라고도 합니다.

 

다시 창조이야기로 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빛과 어둠이 섞여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의인화 하여서 말을 한다고 하면 세상 속에는 천국백성과 지옥 백성이 섞여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묻습니다.

누가 빛과 어둠을 섞어 놓았을까요?

하나님입니다.

 

이건 마치 어둠에 나라인 애굽에 빛에 속한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섞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분이 누구인가요?하나님이에요.

그리곤 나중에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 오라고 하잖아요.

 

모세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럼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신약의 성도의 구원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백성을 죄악 된 세상에 보내서 섞어 놓은 것은 장차 예수님을 보내서 빼내 오게 하시려고 섞어 놓은 것이 되어요.

 

예수님이 일을 하시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일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만물을 예수 안에서 서게 하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이에요.

 

왜? 언약의 후손들을 비 언약 백성들과 섞어 놓았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만물의 창조 목적을 알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만물의 창조 목적이 무엇인가요?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 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신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눈에 보여야 있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음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금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에요.

우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해요.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니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분리해서 보지 않아요.

동등하게 보아요.

 

이건 이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은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증거 하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 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원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그 원본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실체이고, 보이는 이 세상은 그림자에요.

이렇게 되면 보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은 짝과 같은 것이에요.

 

실상과 그림자는 짝이에요.

그림자는 실상을 보여주는 짝이에요.

우리는 그림자를 보고 실상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없으면 실상을 몰라요.

그러한 의미에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하려고 보이는 세상을 만들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아야 해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보이는 세상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아요.

즉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이라는 그림자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계시던 분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오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 보이는 세상에서는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보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들 속에는 이 믿음이 그 속에 내장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야기 합니다.

이건 그 동안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말씀이에요.

인간들 입장에선 처음 듣는 생경하고 이상한 소리인거에요.

 

그런데 사람들 숲에서 어떤 이들이 그 말을 알아듣는 자들이 일어나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니 여울이~ 일어나 온 호수를 물결로 뒤덮는 것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집권자들 입장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집권자들이 예수에게 야! 그런 말 하지마!

너 그럼 죽는다!

공갈과 협박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말에 동조하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죽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믿음이 내장이 되어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거에요.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아니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상하게 예전에 듣던 말씀으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친근하게 들려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협박 속에서도 우리는 듣고 본 것을 증거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 속에 믿음이 있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믿음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반응이 일어나요.

어~ 이상하다!

이 말은 우리가 예전에 들어 보았던 말씀인데!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동일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귀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렸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둥소리로 들립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어째서 바울의 귀에는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둥소리로 들릴까요.

이는 바울에겐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고, 다른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어서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 감으로서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다 똑 같은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바울은 예수님 음성으로 듣고 다른 사람들은 천둥소리로 들린 겁니다.

 

세상 사람들 입장에선 예수님의 말씀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요.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로지 바울처럼 택함을 입은 사람에게만 천둥소리가 예수님 음성으로 들려요.

이게 엄청 중요한 말이에요.

 

시편 19편을 봅시다.

 

시 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주만물이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가지고 온 세상에 말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 일행에게 들려졌던 천둥소리는 우주만물의 소리에요.

그런데 바울은 우주만물의 소리로 듣지 않고 예수님 음성으로 들었어요.

어째서 바울은 천둥소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었을까요?

이는 바울에겐 천둥소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편의상 천둥소리를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라고 합시다.

즉 천재지변이라고 합시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냥 천재지변으로만 보여요.

이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아요.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 아~ 천둥이 치는가 보다!

비가 오면 아~ 비가 오는가 보다!

가뭄이 들면 아~ 가뭄이 시작이 되나 보다!

파도가 울고 쓰나미가 일어나면 아~ 쓰나미가 일어나는가 보다!

땅이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나면 아~ 지진이 일어나는가 보다!

 

세상 사람들은 그냥 자연재해로만 보아요.

그런데 바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재해로만 보지 않아요.

자연재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하나님의 계시로 본단 말입니다.

 

아! 세상이 끝날 때가 다 되었나 보다!

우리 주님이 곧 오시려나 보다!

만물이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징조로서 소리치고 있다고 들어요.

 

누가복음 21장을 봅시다.

 

눅 21:25-28=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럽니다.

얘들아!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구 곳곳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너희들은 아! 우리 주님이 곧 오신다고 연락을 보내셨구나! 라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든 머리를 들라고 합니다.

머리를 들라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소리로 들으라는 말입니다.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땅강아지처럼 흙만 파 먹지 말고 하늘나라를 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조라고 하는 겁니다.

 

징조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이 알려주는 소리에요.

신호에요.

하나님은 일월성신으로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으로 싸인을 보내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신호를 보내주고 있는 것이에요.

신호는 자기편만 알아요.

그러니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도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를 징조로 보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사회현상을 통해서 영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일월성신의 징조는 마치 경부선 열차를 타고 종착역인 서울역에 다가 오면 승무원이 안내 방송을 하는 것과 같아요.

잠시 후면 이 열차는 서울역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잊으신 물건이 없도록 잘 챙기시고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무사히 잘 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잖아요.

 

지금 천재지변이 안내 방송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제 곧 이 세상 끝 날이 다가옵니다.

그러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들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세요! 라고 소리 치고 있어요.

 

지진이 터지고,

쓰나미가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태양이 불타고 있는 것은 어디로 피할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늘에도 피할 곳이 없고!

바다 속에도 피할 곳이 없고!

땅 속에도 피할 곳이 없어요.

그냥 쾅~! 하고 터지만 하늘과 땅은 다 날아가요.

 

피할 곳은 오직 하나 보이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상뿐이에요.

보이지 않는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왜? 보이는 이 세상에 오셨겠어요.

자기 백성들을 보이지 않는 나라로 이사를 시키고자 함이에요.

 

이 세상은 이 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이사를 시키는 일을 하시고자 만들었어요.

 

그래서 성경은 만물의 창조 목적을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일을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주와 그리스도란?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란 뜻입니다.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내려면 두 가지가 섞여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 하신 세상에 장치 분리 하여야 할 속성이 전혀 달라서 서로 섞일 수가 없는 이질적인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들을 섞어 놓으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땅에 코 박고 살 자와, 땅을 떠나 하늘로 갈 자를 섞어 놓으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주가 되어서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내는 심판을 하십니다.

빛과 어둠을 갈라내십니다.

빛은 빛이 있어야 할 곳으로 집어넣고,

어둠은 어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집어넣으십니다.

 

빛에 속한 자는 자기 안에 빛에 것으로 채우시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자기 안에 어둠에 것으로 채워요.

빛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 것으로 채우시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땅에 것으로 채워요.

 

빛에 속한 것을 성령의 소욕이라고 하고!

어둠에 속한 것은 육체의 소욕이라고 해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어떤 것들인지 살펴보고 갑시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 5:19-26=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육체의 소욕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헤치는 것으로 나타나요.

한 마디로 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자기를 비우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요.

 

육체의 소욕은 죽이는 것이고,

성령의 소욕은 살리는 것이에요.

육체의 소욕은 내가 살려고 남을 죽이지만,

성령의 소욕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어요.

 

우린 원래 죄 아래서 태어나 육체의 소욕으로 가득한 자들이었어요.

나 밖에 모르던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심으로서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합니다.

 

이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요.

예전에 안하던 짓을 해요.

남들이 볼 때는 어~ 저 사람 예수 믿더니 변했네! 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건 내가 변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겐 아주 낯설고 서툴러요.

섬기고 봉사하고 베풀고 나누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손해 보는 일만 하게 한단 말이에요.

이는 모두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 몸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그려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본성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그림들이 우리 삶에서 그려지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기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천지와 만물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루어 가세요.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 하면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형식으로 이루어 가세요.

 

이러한 일들이 하나 둘씩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차압을 당해요.

우리 인생이 주님께 차압을 당할 때마다 우리에겐 고난이고 환란으로 나타나요.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하늘에 것으로 채우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내어 놓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소속을 알 수가 있어요.

땅에 속한 사람인지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를 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섞여 있는 곳에서 빼내시고, 빼내심을 입은 자들에게 채우는 일을 하세요.

하늘에 속한 사람에겐 하늘에 것으로 채우시고, 땅에 속한 자들에겐 땅에 것으로 채우세요.

선에 속한 자는 선을 행하게 하시고, 악에 속한 자는 악을 행하게 하세요.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라고 하지요.

반대로 의로운 자는 의롭게 하고 거룩한 자는 거룩게 하라고 하지요.

이건 무엇인고 하니 각자의 삶이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냥 가만히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로 살 것이고, 그 속에 마귀가 있는 자는 마귀로 살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어요.

쉬운 말로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자기 맘대로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자는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쭉정이이에요.

반대로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성령의 소욕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하면서 사는 자는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알곡인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행위 차원의 말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속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요.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에 속한 자는 악을 행하고, 선에 속한 자는 선을 행한다는 말이에요.

속된 말로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갔던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어 있고!예수님이 그 안에 없는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곳이 공허하다고 했지요.

공허란? 비어있는 것이라고 했어요.

천지가 공허 하다는 말은 천국도 비어 있고, 지옥도 비어 있다는 말이에요.

 

이제 예수님이 비어 있는 곳을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천국에는 빛에 속한 자들로 채우시고,

지옥엔 어둠에 속한 자들로 채우십니다.

누가 채우는가 하면 예수님이 채우세요.

 

이걸 물고기 비유로 하셨어요.

예수님이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세상 끝 날에는 그물 속에 가득한 고기를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갈라낸다고 하셨지요.

 

세상 끝 날이란?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그날이 세상 끝 날이에요.

물론 장차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그 날도 세상 끝 날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 날이 바로 우리에겐 종말이에요.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가서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한 것이 아브람에겐 종말이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죽는 종말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부가 되어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갈라내세요.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좋은 고기이고,

예수님을 몰라보는 사람은 지옥에 들어갈 나쁜 고기에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는 예수님이 판단하세요.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을 통하여서 구분이 되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가 있다고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주신 자가 있다는 말은 아들에게 주시지 않는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두 부류가 하나로 섞여 있는데서 그 중에서 자기 백성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은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세요.

 

6절을 봅시다.

6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지요.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누가 구원 받을 자인지 몰라요.

예수님도 누군지 몰라요.

오직 아버지만 알아요.

 

예수로 구원 받을 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끌어 주세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 주신다고 하는 말씀을 들으면 뭔가 퍼뜩 생각나는 장면이 있지요.

바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이끌고 오는 모습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가 하면 어린양과 그 신부가 혼인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천국을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럼 왕의 아들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럼 천국에서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혼인 잔치 하는 곳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신랑이라고 하면 신부가 있어야 하잖아요.

 

유대인의 풍습을 보면 아들의 신부는 아버지가 준비하세요.

아들은 자기 신부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아버지가 이끌어 주어야지만 알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어요.

왜? 보냈나요?

자기 몸에서 나온 자기 신부 찾으러 보냈어요.

 

그런데 자기 신부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아버지만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이끌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신부될 성도들을 신랑이신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우리가 누구로부터 나왔나요?주께로부터 나왔지요.

 

이걸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해 봅시다.

아담의 신부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하와를 하나님이 이끌고 오기 전까지는 몰라요.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십니다.

그러자 아담이 본능적으로 아! 저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를 알아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예수님에게로 나왔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 보내졌어요.

 

아버지가 예수로부터 나온 자들을 이끌고 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오는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이 자기 몸에서 나온 자기 짝이라는 것을 알아보아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37-45=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4절을 보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다고 하지요.

이건 아무나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

 

아버지께서 믿게 해 주어야 하는 자들만 예수를 믿을 수가 있어요.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즉 예수를 믿게 하는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지만 자기에게로 올 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예수님에게 이끌어 주세요.

마치 아버지가 물건을 가지고 아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지요.

그럼 아들은 아버지가 준 것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요.

그 속에 자기 생명을 불어 넣어요.

 

그럼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불어 넣은바 된 성도들 속에서 예수님이 집어넣어 놓은 것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이걸 영광이라고 해요.

영광이란? 만든 분의 흔적을 자랑하는 거에요.

이걸 찬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이끌어 주는 자들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웠다는 것은 선제적으로 경험이 되어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험을 가진 자들은 아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를 알아보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 백성들은 척 알아들어요.

 

예수님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니까 어~ 이 이야기는 언제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아!~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들었지!

이걸 앞서서 성도들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믿음이 칩처럼 내장 되어 있다고 했어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참 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춥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는데 그를 몰라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접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누군가 하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예수를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눈에는 다 똑 같은 인간들이지만 예수님 앞에 서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요.

영접하는 자와 영접하지 않는 자로 말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 속에서도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과 배척하는 자들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건 이방인도 마찬가지에요.

 

유대인들 중에서도 두 부류가 있고, 이방인 중에서도 두 부류가 있어요.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고 배척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왜? 동일한 유대인이고 이방인인데도 누구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을 하고, 누구는 예수를 이단이라고 배척하고 죽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두 부류의 사람을 섞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온 세계 각국에서 올라온 유대인들 앞에서 외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된 앉은뱅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누가 이 사람을 고쳤습니까?

우리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을 고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고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증거하는 그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여러분들 앞에서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예수를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단이라고 죽인 이 예수를 살리셔서 이렇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 예수가 바로 너희의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할 뿐입니다.

성령이 이 일을 증거 하라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성령에 사로 잡혀서 마치 술 취한 사람들처럼 이 일을 여러분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이 사도들 안에서 행하게 하신 일들이에요.

그런데 사도들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는 백성들 속에서 두 가지 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 합니다.

한 쪽에선 어찌 할꼬!

탄식하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선 적개심이 가득하여 분노하면서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갈면서 예수쟁이들을 잡아서 죽이겠다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왜? 똑 같은 유대인들인데도 예수님을 이야기 하니까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들을 나타낼까요?

이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로 구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이 만인 구원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인 구원설”이란? 모든 인간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분의 주장은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어떻게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지옥에 갈 수 있느냐 입니다.

그건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누구는 천국으로 보내고 누구는 지옥을 보낼 수가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도 맞지 않다는 거에요.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속성에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요.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지요.

이 분은 신학교를 나오신 분이에요.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해요.

 

왜? 이러한 말을 하는고 하니 성경을 언약 중심으로 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만인구원설이 왜? 비 성격적인가 하면 인간들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출발점이 잘못 되었어요.

성경 해석을 언약으로 출발하지 않고 인간의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본주의 사고에요.

 

만인 구원설이 비성경적임을 살펴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가 있어요.

애초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가지고 너는 친국으로 가고 너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아요.

이미 너는 천국 백성, 너는 지옥 백성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말이에요.

이들이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 전이 엄마 뱃속에서 이미 결정이 났어요.

하나님은 야곱은 긍휼의 그릇으로 창조를 하였고, 에서는 진노의 그릇으로 창조를 했어요.

 

야곱이 천국 갈 짓을 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고!

에서가 지옥에 갈 짓을 해서 지옥에 간 것도 아니에요.

모두가 각자 언약에 따라서 창조가 되어서 각자의 속성으로 살다가 각자의 처소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야곱은 긍휼의 그릇으로 창조를 했기 때문에 야곱은 긍휼을 입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에서는 진노의 그릇으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진노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각각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하나님이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토기장이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처음부터 귀히 쓸 물건과 천히 쓸 물건으로 만들어요.

자신이 쓰기에 합당한 것으로 용도에 맞게 토기를 만든다구요.

토기는 용도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용도를 결정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애당초 필요한 그릇으로 만들었어요.

어떤 이는 천국에 사용되어질 그릇으로 어떤 이는 자옥에서 사용될 그릇으로 만들어 졌어요.

이걸 예수님이 오셔서 각자의 자리로 찾아서 정리정돈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들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의 창조(심판)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다 끝나면 일곱째 날이 되어서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엿새가 차기까지 갈라내고 채우는 구원이라는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 창세전 언약에 속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 민족과 비 언약 민족을 큰 틀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분을 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선택한 가정에서도 보여주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고!

이삭의 집안에서도 야곱과 에서가 있고!

야곱의 집안에서도 요셉과 그 형제들로서 핍박하는 자와 핍박당하는 자로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인 구원설이 있을 수가 없어요.

이는 두 부류가 반드시 갈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만인 구원설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언약 중심으로 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약 이야기에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주객이 전도되어서 해석을 하게 되어요.

주객이 전도가 된 설교가 어떤 것인가 하면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에요.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통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게 되어요.

그래서 목사님들은 예수를 믿으면 잘 살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게 되면 예수를 믿는 목적이 언약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에요.

이것은 예수가 내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해요.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면서 천지창조 이전에 태초가 있다고 말하지요.

이는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만물을 나 자신으로 보세요.

그럼 내가 있기 전에 누가 있었나요?

하나님입니다.

 

쉽게 말할게요.

나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럼 내가 먼저 입니까?

하나님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이지요.

 

하나님이 나를 왜? 만들었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들었어요.

나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나를 만들었어요.

 

다시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잘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지요.

가만히 보면 만물이 나오고 그가 나오지요.

만물을 “나”로 보라고 했어요.

 

그럼 “내”가 있고 “그”가 있어요.

나를 만든 “그”가 누구입니까?

“그”란? 예수님을 말해요.

 

나는 “그”에게서 창조가 되었지요.

창조란? “그”에게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왜? 창조 했다고 합니까?

“그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럼 나는 “나” 라는 존재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그” 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여야 합니까?

“그”라는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여야 하겠지요.

 

이게 중요해요.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그를 위해서” 에요.

이걸 다른 말로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가 뭔 줄 아세요.

“그를 위하지 않는 것”이에요.

예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내 존재 중심으로 하여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 중심으로 하여야 할까요?예수님 중심으로 하여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 하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하신 것이니까요.

 

예수님이 나를 왜? 창조 했을까요.

이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전에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을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을 아들로 삼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은 언약의 도구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먼저이고 인간의 창조가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니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내 중심이 아니고, 언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언약이 먼저이고 인간이 나중이에요.

내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에요.

내 삶이 우선이 아니고 언약을 위한 것이 먼저란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이걸 놓치면 신앙생활을 취미 생활 하듯이 하게 되어요.

취미 생활이 뭔가요?

내가 필요하면 하고 필요치 않으면 안하는 거잖아요.

 

신앙생활이 취미가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어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요.

신앙생활을 교회 생활로 비유합니다.

그럼 교회를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떠나가는 철새처럼 왔다 갔다 하게 되어요.

 

지금부터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자칫하면 오해 할 수가 있으니 잘 이해하세요.

 

여러분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뭔 줄 아세요.

교회로서의 모임이에요.

교회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에요.

이런 모임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해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에요.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교회에 열심히 모이게 되어 있어요.

모여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하는 일을 우선으로 하게 되어요.

그래서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교회로 모이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분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모임을 등한시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에요.

이런 분들은 복음을 뭔가 오해하고 있어요.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이에요.

교회의 모임은 일곱째 날로서의 모임이에요.

 

일곱째 날이 무슨 날인가요?

여호와의 안식일이에요.

우리의 안식일이 아니고 여호와의 안식일이에요.

 

성령이 강림하자 날마다 모였어요.

그러다가 주의 날에 모이는 것으로 바뀌어 갑니다.

왜? 주의 날에 모이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주의 날이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부활 하신 날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안식하는 날입니다.

 

영적으로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은 창조의 완성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자 예수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 주의 날에 교회로 모여서 주를 찬미하고 감사하면서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한 떡을 떼면서 즐기며 교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 날짜로 월화수목금토일 중에 일요일에 모이지만 일요일에 교회로 모이는 모임에 의미는 월화수목금토일 중에 일요일의 모임이 아니에요.

성도는 일요일을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이에요.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에요.

그냥 일요일이니까 교회 가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에서는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해서 지켰어요.

그래서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여호와의 안식을 범하는 자가 되므로 구약에선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안식일을 어기면 죽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의 날에 의미를 모르는 자는 안식일을 어긴 자와 동일해요.

일곱째 날에 의미를 모르고 교회에 모이는 것은 그냥 일요일 날 교회 온 것 밖에 안 되어요.

그것은 제사만 지내는 것이지 제사 속에 그 의미를 모르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아요.

제사 속에 의미를 원해요.

 

왜? 교회에 모여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모이면 교회에 모이고도 저주를 받아요.

교회에 모임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교회에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러한 사람들에겐 교회는 그냥 교회일 뿐이에요.

천국에서의 모임이라는 교회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모임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제발 무슨 뜻이지 잘 이해하세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자들이에요.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묵시적 존재가 되었어요.

묵시는 항상 일곱째 날이에요.

여호와의 안식 안에 있어요.

 

그러므로 묵시에 속한 성도에겐 월화수목금토일 모두가 일곱째 날이에요.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월요일에서부터 토요일까지 직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에 쉬기 때문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지만 성도는 일요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일곱째 날인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 속한 성도는 주일을 묵시 안에서 일곱째 날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뒷전으로 돌리고 자기 볼 일을 우선으로 두는 자들이 있어요.

교회에 모임을 차선으로 두고 등한시하는 것은 모두가 구원을 자기 용도로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성도는 교회의 모임을 우선으로 두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에 따라서 모임의 성격이 달라져요.

 

교회의 모임은 천국 백성으로서의 모임이므로 축제의 날인 겁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육적으로는 떡을 떼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에요.

 

교회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의 연합이에요.

연합이란? 동질성을 가진 자들의 모임을 말해요.

그래서 성도의 연합이라는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래서 사도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고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열심히 모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도 어떤 놈들이 교회에 모일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한 자들이 있었어요.

이런 자들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에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 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복음을 곡해하여 자기 사욕을 쫓는 자들이 있었듯이 지금도 교회 안에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이 있어요.

 

교회의 모임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있어요.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의 모임을 폐하는 것은 악한 것이에요.

핑계대지 말고 교회에 열심히 모여야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구원을 했어요.

즉 예수님의 신부로 구원을 했어요.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우선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교회의 모임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의 모임은 뒷전으로 미루고 내 볼 일 보는 것이 더 우선순위에 두고 있어요.

놀러 다니는 일에는 바쁜데 교회에 모이는 일은 싫어하고 있잖아요.

이는 모두가 복음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은 믿음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 할 때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로 말씀하셨어요.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고을 사람들에게 다 참석하라고 포고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갖가지 핑계로 참석치 않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이 바빠서 안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가게 문을 닫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안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참석을 못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친목회 모임 때문에 못 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군사들을 보내서 다 진멸해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의 처사가 틀렸다고 항의할 수가 있어요.

아니! 어떻게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죽일 수가 있습니까?

왜? 그럴까요?


이걸 일차적으로 예수님과 교회 이야기로 살펴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럼 왕의 아들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럼 천국에서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혼인 잔치 하는 곳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신랑이라고 하면 신부가 있어야 하잖아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에요.

그럼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는 예수님이 신부들과 잔치하는 교회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예수님의 신부들을 교회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자들이 거절합니다.

신부는 신랑과 함께 하는 자들이에요.

자기 삶이 따로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초대를 받은 자들은 모두가 자기 삶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일곱째 날에 의미로 모이는 주일날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은 자기 삶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랑이신 예수님이 혼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춤을 추고 싶어도 춤을 출 신부가 없는 겁니다.

곡을 하고 싶어도 울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신부가 될 사람들이 전부 놀러 가고 장사하러 가고 밭 갈러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초대 받은 자들은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다 쓸어버리고 신랑과 함께 놀아줄 자기 삶이 없는 죄인들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초대 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자들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이걸 다시 왕과 백성의 관계로 해석해 봅니다.

 

백성은 왕의 보호 아래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의 목숨은 왕에게 달렸어요.

이걸 아는 사람은 왕의 명을 거절 할 수가 없어요.

자기 삶이 아무리 중차대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왕의 일 보다 앞설 순 없어요.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왕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은 왕의 삶과 백성의 삶을 구분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삶이 곧 백성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지금 너희들이 내 보호 아래서 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면 왕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구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왕의 명을 거역한 사람들은 자기 삶을 따로 챙겨두고 있기 때문에 왕의 명을 거역하고 자기 볼일을 보러간 것입니다.

 

백성은 왕의 보호를 벗어나면 죽은 목숨이에요.

독자적으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들은 독자적으로 살고자 했어요.

이게 죄에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뭐냐?

독자적으로 사는 거에요.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된 자들이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 위배 되어요.

그래서 자기 사정을 핑계로 왕의 명령에 불복을 한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너희들 왜? 사는 줄 아느냐?

너희들 내가 왜? 십자가에 죽어서 너희를 구원해 주었는지 아느냐? 를 묻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도 왕의 명을 우습게 여긴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편리한데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엉터리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이 지식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념은 아픔이 없어요.

자기 부인도 없어요.

그냥 혼자 머릿 속으로 그렸다 지웠다 하면 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 삶은 생명으로 나타나요.

생명이란? 살아 움직인단 말입니다.

어떤 삶이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그 모습들로 나타나요.

그래서 예수 믿음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는 이런 고난이 없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요.

성경은 이런 자들을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종말이 되면 슬피 울면서 이를 가는 자들이 일어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일어 날 줄을 미리 아시고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이 되면 예수님 앞에서 서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인들은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님으로부터는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난 너희들을 모른다고 합니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지요.

이들은 그냥 주여 주여만 한 자들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한 자들입니다.

 

이걸 이 시대 교회에게 적용해 보세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나 집사 노릇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주일하고 교사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충성도 한 자들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난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는 말이 지금 누구에게 하신 말씀일까요?

바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되겠지요.

우린 이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들어야 해요.

 

바울처럼 이 복음 전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지옥 갈까봐 두려워 한 것이 아니에요.

행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까 염려한 것이에요.

우리도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해요.

 

우리의 구원을 에서처럼 장자권을 밭죽 한 그릇에 팔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세상 쾌락을 쫓아가는데 예수님의 피를 악용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는 행위 주의자들의 누룩도 경계하여야 하지만, 예수님이 피 흘려서 주신 구원을 세상 쾌락을 쫓아가는 색욕거리로 만들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잊지 마세요.

 

우린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을 지켜져요.

그럼에도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귀한 것이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마칩시다.

 

인간 쪽에선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은 없어요.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서 취소하고 싶다고 해서 취소되지도 않아요.

우리 행위로 취소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일방적으로 주고받은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진 자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낸 자들은 예수님이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실 몫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계획을 주시지 않았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으로 연합하여 살아가도록 이미 작정이 되어져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건 마치 컴퓨터가 공장에서 출하 될 때 내장시켜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기준 안에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서부터 살아가는 것까지 이미 기준이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우리의 원함과 상관이 없이 되었듯이 우리의 살아가는 길도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그 길이에요.

기차가 레일 위를 달려가듯이 우리는 예수라는 길 위를 달려가도록 되어 있어요.

이걸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라고 해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 쪽에서 이미 확정해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어졌어요.

이 확정된 삶이 너무도 아프고 힘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8-9=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왜?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오직 성도를 위해서만 기도하시는가요?

이는 성도는 이 세상에 남아서 예수님이 주신 것(약속, 말씀)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뭔가요?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을 말해요.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약속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은혜로운 새 언약을 받아 내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나라는 인간의 행함이라는 법으로 다스려져요.

인간 나라에서는 인간의 행함을 의로운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새 언약이 인간의 행함을 의라고 하는 것을 죄라고 하면서 주어져요.

새 언약을 옛 언약이 받아 내지를 못해요.

폭발해요.

이걸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가 감당치 못하고 터진다고 했어요.

 

새 언약은 옛 사람이 담아내지를 못해요.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를 다 쏟아버려요.

그러므로 새 언약을 말하면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을 미워해요.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왜?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을 미워할까요?

이는 새 언약 속에는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긍정 받고 싶어하고 자기가 한 일을 인정받고 싶어해요.

 

그런데 새 언약 속에는 인간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악이라고 합니다.

죄라고 한단 말이에요.

새 언약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요.

그러니 세상은 새 언약을 말하는 자들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럼 세상에 속한 자들이 미워해요.

왜냐하면! 새 언약을 받아들이면 자기들이 틀린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항상 자기는 옳고 남이 틀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하고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너무도 잘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이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더라도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과 타협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들이 시험에 들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랬지요.

사단이 밀까부리듯이 널 까부는데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했어요.

 

이건 베드로가 믿음을 철저히 지켜서 죄를 안 짓고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린 사단이 말 까불리듯이 까불면 넘어 질 수 밖에 없어요.

그러함에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그 구원을 자기 피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예수님은 자기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변호 하세요.

저 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용서 해 주세요.

 

이러한 말씀을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어요.

우린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을 받았어요.

이 말씀을 우리가 잊을까봐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악이란? 행동의 악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가리는 것이에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제가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고 잘못 했더라도 주께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꼬라지가 이렇게 때문에 더욱 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와서 조아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뭘 잘못하면 미안해서 교회 못 오겠다고 하는 것을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그렇게 잘났으면 예수 믿지 마세요?

잘난 사람이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는 못났기 때문에 믿는 거에요.

그러니 못난 짓을 하더라도 교회에 오란 말입니다.

 

와서 아버지와 변론하세요.

무엇이 문제인지 이야기 하란 말입니다.

혼자서 소설 쓰지 말고!

 

제발 언약을 믿으세요.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으세요.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닫도록 인도하세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더라도 실패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과 한 몸으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한 그대로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아프고 힘이 들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자기가 계획한대로 살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집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져 있어요.

성도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코스가 있어요.

그 코스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 코스대로 살아간 자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해요.

 

히브리서 12장을 봅시다.

 

히 12:1-3=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정한 길을 걸어갔어요.

믿음으로 예수님이 걸어간 코스를 걸어갔어요.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그 길을 미리 걸어간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 증인의 첫 주자가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너희는 믿음에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봐라! 예수도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결같이 이 길을 걸어갔어요.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셨어요.

구약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았고, 신약의 성도들도 살아가고 있어요.

 

성도마다 당하는 아픔은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자기 부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모두가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져 있어서 그래요.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또 우리에게 위로를 주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들의 결말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보고 “이긴 자”라고 합니다.

겉으론 분명히 진 자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은 이긴 자라고 한단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진 것처럼 보였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예수가 이긴 자라고 천명을 해 주신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이러한 증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낙심 할 때 말씀을 보내서 우리를 건져내세요.

봐라! 네 눈 앞에 예수가 보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소망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분이 우리 안에 와 계세요.

그러니 힘들고 치친 일이 있더라도 말씀으로 소망을 삼고 낙심치 말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말씀을 받았어요. 그리하여 내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이 너무도 놀랍고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주눅들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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