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107강. 예수 안에서 하나 됨 (요 17:20-26)

댓글 0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2. 1. 1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7강. 예수 안에서 하나 됨 (요 17:20-26)

-.정낙원 목사

 

요 17:20-26=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기도 속에는 아버지와 하신 약속의 내용들이 가득담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을 근거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참으로 놀라운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것인고 하니 죄인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온전함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만하는 사건입니다.

 

죄인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 입장에서 머리가 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사망 권세인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인들에게는 더 없이 즐겁고 감사해야 할 복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고 최고의 축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한 몸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를 때로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다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란 예수님과 한 몸이란 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참으로 즐거운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 됨 같이 제자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어서 온전함을 이룬다고 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 아버지를 온전히 알기를 바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온전이란? 완전함을 말합니다.

피조 세계에서는 온전이니 완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온전이니 완전이니 하는 말은 피조 세계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고 오직 창조 세계에서나 사용이 될 수 있는 말입니다.

창조의 세계만이 완성이고, 완료이고, 완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온전해 진다는 말은 피조 세계에 있던 자들이 창조 세계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자리인 창조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왔던 그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이건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흥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흥분은커녕 소 닭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감동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최고의 축복은 우리가 가야할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천국은 입술에만 있지 마음 속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가득 차 있어요.

온통 세상 것들로 차 있어요.



하늘나라 것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말씀을 들어도 기쁘지가 않는 겁니다.

우리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별로 감흥이 일어나지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키 위함입니다.

구원이란? 건져낸다는 말입니다.

그럼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님이 나를 어디에서 어디로 구원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참선하면서 도(道)를 닦는 것이 아니고 부딪치고 깨어지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삶에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구원 받은 자로서의 희노애락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희노애락 하십니까?

어떤 가치로서의 희노애락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희노애락은 모두가 세상 적인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가치의 희노애락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열면 성도는 세상적 가치로 희노애락 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가치로 희노애락 하는 자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데 우린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신앙이 얼마나 허구이고 추상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입을 열면 부활이니 천국을 주술처럼 외우지만 막상 지금 오늘 천국에 가자 라고 하면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은 관념이라는 증거입니다.

마르다처럼 먼 훗날의 부활을 꿈꾸고 있어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고 천국을 알고 구원을 안다는 것이 마치 고 3 학생들이 수능시험 준비하기 위하여 교과서를 암기하는 것처럼 그냥 머리 속에 암기가 된 지식일 뿐입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박사인데 예수로 사는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 대하여서 아는 것은 박사 논문을 쓸 정도로 풍부한데 천국의 삶이 없는 겁니다.

말은 현란한데 그 말이 우리 삶 속에서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動力)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우린 모두가 귀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도 아니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천국도 아니에요.

우리기 믿는 것은 돈이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입니다.

예수나 천국은 상상 속에만 있습니다.

믿어지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안 믿어진다고 해서 전혀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술이라고 하고, 십자가는 그냥 부적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실제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사건이고 실제입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도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도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가 숨을 쉬고 살고 있는 것이 실제이고 우리가 산다는 것 하나 하나가 사건이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하고 고백하는 내용들이 실제이어야 하고 삶 속에서 사건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과 삶이 따로 일수가 없고 하나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 우리와 하나 되어서 살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셨다가 다시 오시면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가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시지요.

이것은 성도들의 구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순리를 따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주가 되시면서도 모든 성도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일하심 속에는 성도의 삶에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돌아가심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님은 원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맺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출장을 오셔서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일을 다 마치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 하시기를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화를 다시 갖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영광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째서 영광된 일인가 하면 이 땅에서 아버지가 맡겨 주신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개선장군으로서 귀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시키신 일이 뭔가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래 의에 나라인 창세전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슴 뛰겠어요.

성도가 천국을 이야기하고 신랑을 이야기하는데도 무덤덤하다면 그건 뭔가 이상한 겁니다.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이 마음을 몰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천국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타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고향 소식을 전하면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처럼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없다면 그건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은 관념입니다.

 

예수를 믿는 척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척 하는 것하고, 믿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종교생활이지만, 믿는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적당히 하면 되지만, 믿는 것은 모든 삶을 다해서 합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사람들 눈을 의식하고 하지만,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는 척 하는 것에는 아픔이 없지만, 믿는 것엔 아픔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싶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보고 싶지 않다면 그건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 속에는 보고픔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움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품어진 그 사랑 때문에 기다리고 아픔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살아가는 의미이고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가서 1장 2절을 보면 술람미가 솔로몬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그리움인가 하면 입맞춤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아 1: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솔로몬은 궁중에 사는 왕이고, 술람미는 촌 구석에 사는 못난 여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촌에 순시를 갔다가 술람미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이걸 입맞춤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왕은 다시 온다는 약속만 남겨둔 채로 떠납니다.

내가 다시 너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면서 신랑의 물건들을 주고서 떠났습니다.

술람미는 왕이 떠난 후 그리움에 사무쳐 살아갑니다.

왕의 약속을 부여잡고 슬플 때나 아플 때나 힘들 때마다 신랑 되신 왕의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보다도 달콤하고 그 황홀한 입맞춤을 다시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과 사랑을 한 것의 모형입니다.

술람미의 모습은 예수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우리 성도들이 신랑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해 놓은 편지입니다.



우리도 술람미처럼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사랑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우린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소망을 삼고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그리워하면 살아야 합니다.

이 그리움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걸 묻고 있는 겁니다.

그 그리움이 있느냐! 입니다.

이 그리움이 없다고 한다면 당신의 신앙은 가짜일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겁니다.

믿는 척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애통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전혀 미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믿어도 앉은뱅이처럼 누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를 위해 아골골짜기라도 가겠다고 하면서도 실상에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중풍병자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디 육신이 연약하여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를 만난 사람은 중풍병에서 일어나고 앉은뱅이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주를 찬미하고 감사하면서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던 것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진단 말입니다.

현실은 변한 것이 없는데도 그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로서의 삶이 없다고 한다면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깨닫고 말을 한다고 하여도 다 부질없는 말쟁이들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은 사건이고 실제입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사건화 되어 나타나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먼저 우리 안에서 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임합니다.

그럼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상상 속으로만 있던 천국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천국에 가치로서 세상에 가치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마음은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 것으로 희노애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임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세상 것을 죽이시고 하늘에 것으로 채우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러한 채움을 입는 성도는 세상 가치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습니다.

이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실제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었어요.

성도는 이것이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와 신약에서는 교회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사건으로 일을 하시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 역사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오셨다는 것을 인지하는 성도는 예수와 하나 되어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단 말입니다.

의식이 되면 어떻게 살아갈까요?

그것이 비록 죄 아래서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그 새 언약을 믿음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이를 위함입니다.

예수와 하나 되어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비록 세상 속에서 살지만 창세전 그 자리로 돌아갈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 된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고 창세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말할 때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왔습니다.

만물을 우리라고 생각하세요.

만물이 곧 나 입니다.

 

우리는 원래 주 안에 있었습니다.

주 안에 있던 우리였는데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우리를 주께로부터 빼내셨습니다.

마치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내신 거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주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성도가 예수 안에서 나왔다가 다시 예수 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 안에서 나왔다가 다시 아담 안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시작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혼인하는 이야기로 말해주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성경을 닫으면서 천국에서 어린양과 그에 성도들이 혼인하는 것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과 끝이 혼인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혼인 이야기로 시작하여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이야기로 띁을 맺습니다.

그럼 성경 전체가 예수님과 성도의 혼인(구원)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남녀 간의 혼인을 가지고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혼인 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묵시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누가 계셨는가요?

창조주가 계셨지요.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있잖아요.

그 분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7=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잘 보세요.

“그”가 나오지요.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구속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두 나라가 나옵니다.

 

“흑암의 나라” 가 있고! “아들의 나라” 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있었나요?

흑암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흑암의 나라란 말은 천국을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세상나라를 말합니다.

 

흑암이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어둠을 죽음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곳에 가두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건져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구원을 하신 겁니다.

천국을 빛의 나라 라고 합니다.

이는 창조 세계를 말합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지는 과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과정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주심이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우리에게 자기 피를 수혈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 천국 백성들에겐 전부 예수 피가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자식들 속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를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피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때로는 부부로도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나 부부나 다 동일한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을 아버지와 아들로 때로는 부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골로새서 본문을 보세요.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분이 누구라고 했나요?

“그” 라고 했습니다.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고 합니다.

 

잘 보세요.

“그”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자 이걸 아담과 하와로 봅시다.

하나님이 아담 속에서 하와를 빼냅니다.

하와가 처음에 어디에 있었나요?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와가 되겠지요.

우리는 하와처럼 아담 안에 있다가 나왔습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언제 계시던 분입니까?

창세전에 계셨습니다.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계셨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아담 안에 하와가 선재해 있었듯이 우리도 예수 안에 선재해 있었습니다.

선재(先在)란 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누구 안에 존재하고 있었나요?

예수 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창세전에 있던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보세요.

예레미야 1장을 보고 갑시다.

 

렘 1:4-5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야! 예레미야 야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다고 합니다.

복 중에 짓기 전이란 말은 만들어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알았다고 합니다.

이미 알았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이라고 하면 없음 즉 무(無)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에 있어서 없음을 무(無)라고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가 감지(感知)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피조 세계에서는 창조 세계가 감지가 되지 않아요.

피조물의 능력으로는 감지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 여기 있다고 하듯이 계시(啓示) 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았는가요?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성령의 감동으로만 볼 수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만 공개가 되는 나라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보여 주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각 장마다 “본다” 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눈을 열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아라!

저기를 보아라!

 

온 세상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를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서 보여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가 없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피조 세계에서는 창조 세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선재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았다는 말은 예레미야는 이미 창조에 속하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이미 창세전에 존재하던 자였는데 내가 필요해서 너를 이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열방에 선지자 일을 시키기 위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예레미야만 창세전에 선재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이미 창세전에 선재해 있었숩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수 안에 있던 자들은 역사 세계에 잠시 출장을 보낸 것입니다.

왜? 출장을 보냈는가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골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지요.

만물을 “나” 라고 보세요.

우리가 만물 속에 있으니 만물을 곧 우리 자신으로 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서 나왔다고 합니까?

그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그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그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가 왜? 우리를 창조가 했다고 합니까?

그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왜? 생겼나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만들었어요.

 

쉽게 설명 할게요.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던 자들을 역사 속에 쏟아놓았어요.

마치 물고기가 알을 쏟아놓은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 놓고서는 예수님을 보냈어요.

예수님을 보내서 예수님이 쏟아 놓은 자기 알들을 자기 피를 뿌려서 수정(受精)을 해 부화시켜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거에요.

이걸 예수님은 암탉이 새끼를 품은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나온 자들을 다 찾아내서 그 속에 자기 피를 수혈을 시켜 살려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죽은 몸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남을 당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몸에서 뭔가 일을 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생명이란?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바탕에는 예수님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7절에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함께 섰다” 는 말은 예수 안에서 온전해 진다는 말입니다.

온전해 진다는 말은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걸 결혼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하나였다가 둘이 되어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나온 하와가 다시 들어 갈 때 둘 다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나왔다가 다시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온전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충만(充滿)이라고 합니다.

부부는 둘이 하나가 될 때 충만이 되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를 통해서 충만이 되고 아내는 남편을 통해서 충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 피를 흘려서 자기 백성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자기 안으로 다 들어 올 때 예수님도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걸 충만(充滿)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꽉 찬 상태! 더는 미흡한 것이 없고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어서 완전한 상태!

다 이루어져 안식하는 상태! 

이걸 창조의 완성이라고 하고!

이러한 상태를 안식이라고 합니다.



창조 세계는 완료이고 완성이고 완전한 다 이루심 안에서 쉼을 얻는 안식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지요.

이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이제 자기 백성들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자기 백성들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게 믿어지면 더 이상 예수와 나는 타자(他者)가 아닌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예수와 내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하나과 되어서 온전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는가요?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온전해 진다고 하지요.

이걸 골로새서에서는 만물이 그 안에서 함께 섰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 됨이나!

온전함이나!

안다는 것이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알면 온전해 집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우리의 변화됨을 말하지 않고 온전하신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은 온전하신 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하신 분 안에 거할 때 그 분을 안다고 합니다.

 

안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아는 것과 주관적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객관적 앎을 지식으로서 관념이라고 한다면 주관적 앎은 경험되어서 알아진 것으로서 실제입니다.

객관적 앎은 타자적 앎이고 주관적 앎은 한 몸으로서의 앎이에요.

다른 말로 객관적으로 아는 것은 표면적으로서 겉으로서의 앎이고, 주관적으로 아는 것은 이면적으로서 내용으로의 앎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저를 압니까? 라고 물으면 각 자 아는 것으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껍데기만 알아요.

그러니 제 아내가 저를 아는 것 하고 여러분이 저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겉으로 알아진 앎이지만 제 아내는 경험으로 알아진 앎을 가지고 있어요. 

겉으로 알아진 것은 지식이고 경험으로 알아진 것은 실제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은 같지만 그 앎에 내용을 들어다 보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고 다릅니다.

 

두 예수가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와 영으로 오신 예수가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누구나가 다 알아 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다 압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서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오직 택한 백성들만 압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표면적 예수라고 한다면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이면적입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의 남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알게 해 주시는 남편으로서 예수를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면 그 동안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밝히 보여지게 됩니다.

이 예수는 누구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어요.

성령이 알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도 알게 되어요.

예수가 알던 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5절 “나는 아버지를 알아사옵고 저희도 아버지가 나를 보낸 줄 알았삽나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란 말입니다.

예수로 알아진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아버지를 압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아버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알려주신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참 아버지는 예수 안에서만 알 수가 있고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참 아버지를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가지고 우리가 안다고 하는 하나님과 같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가 안다고 하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가짜가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내가 주님을 압니다” 라고 하여도 주님이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고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러한 자들이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했습니다.

집을 다 짓는데 반드시 그 집을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준공 검사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준공 검사를 받을 때 어떻게 받는가요?

 

설계도대로 지었는지 확인합니다.

자재는 올바른 것을 사용하였는지!

규격은 맞는지!

그리고 시방서대로 지었는지 확인을 합니다.

 

하나님도 장차 우리가 지은 집을 준공 검사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검증할 것입니다.

물론 선택을 입은 성도들은 날마다 점검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검사를 하십니까?

언약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우리의 신앙을 검사합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 예수의 피가 흐르는지 아니면 아담의 피가 흐르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피를 의라고 하면 예수의 의냐! 인간의 의냐! 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성막을 보면 법궤가 있어요.

이 법궤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지성소에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 지성소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법궤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두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담은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 모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 순종한 증거물들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다른 말로 증거궤 라고도 합니다.

증거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궤 속에 담긴 세 가지 증거물들은 모두가 불 순종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법궤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뚜껑이 덮고 있습니다.

그 뚜껑을 시은좌라고 합니다.

 

시은좌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자리 라는 뜻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가 하면 대 제사장이 그 위에 피를 뿌릴 때입니다.

대 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이 뚜껑에 피를 뿌립니다.

매년 7월 10일이 되면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피를 뿌립니다.

 

법궤 위에 피를 뿌린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속죄하기 위함입니다.

법궤 속에 담겨져 있는 세 가지 물건은 누구를 상징한다고 했나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즉 우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모든 성도가 법궤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 위에다가 대 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자기 피를 뿌리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지성소 속에 구름으로 덮어 버립니다.

이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자기 백성들을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시자 아버지가 영광을 받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앞서서 살펴보았잖아요.

예수님이 이방인들이 자기를 찾아오자 이제 자신의 죽음으로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다 하나로 모을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잖아요. 

아버지여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로서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시고 또한 아버지도 영광을 받으라고 하시잖아요.

이에 하나님이 내가 영광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건짐을 받고 살아나는 창세전 언약이 성취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임무를 다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겼던 그 영화를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면 자기 백성들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또한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가요!

 

부정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 인간은 죄인입니다.

거룩과 비거룩이 하나가 되면 둘 다 상합니다.

 

거룩과 비거룩이 썩이면 거룩의 순수함이 훼손이 당하고!

비거룩은 거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거룩과 죄라는 비거룩은 이질적이라서 본질적으로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 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 되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자기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수혈을 시켜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쉬운 말로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아버지와 아들은 피가 같습니다.

 

아버지의 피는 거룩한 피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에게도 거룩한 피가 흐르겠지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한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나서 아담의 죽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담 안에서 난 자들 중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피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물과 피를 땅에 쏟았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으로서 예수님이 쏟은 물과 피를 받은 겁니다.

물은 말씀(언약)을 상징하고 피는 생명을 말해요.

 

우린 티끌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예수의 피가 뿌려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예수님의 생명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하나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쏟은 그 피를 수혈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는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아버지와 한 피로서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과도 하나가 되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하고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피이니까요.

이해가 되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아버지와 하나를 만들어 주려고 온 메시야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피를 받아야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혈통(피)으로 말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피(혈통)로는 하나님 자녀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의 피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과 육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로 낳아진 자들만이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속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혈통 들고 까불지 말라는 거에요.

아브라함은 구약 마당에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신약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예수의 피를 받아야 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으로 중요한 말인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 난 자이고!

이삭은 약속(영)으로 난 자에요.

약속으로 낳았다는 말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낳아진 자란 뜻입니다.

 

구약은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삭은 하나의 예표적인 인물인 겁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가지고 뭔가 말씀을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낳아지는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셨듯이 예수님을 통해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진짜 아들은 약속으로 낳아진 이삭입니다.

약속이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피와 같은 것입니다.

이삭을 신약식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피로 낳아진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식으로 이해하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럼 영적으로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이삭과 같은 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아브라함 혈통을 들고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혈통을 들고 나온다는 것은 육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 아브라함의 혈통을 들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나온 유대인들은 구약식으로 말하면 이스마엘과 같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스마엘이 누구인가요?

육으로 난 자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에게서 낳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 난 자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아담 안에서 난 육을 말하고!

아브라함은 예수 안에서 난 영을 말합니다.

 

(이건 생각이 난 김에 참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예수님의 예표라고 했지요. 그럼 아브람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말하고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를 말해요. 성도는 누가 낳는가 하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가 낳아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셔서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낳았어요. 이걸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으로 있을 때 낳았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으로서 낳은 자식인 것입니다.

이걸 육이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육적 혈통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삭은 어떤 자인가요?

아브라함이 되어서 낳은 자식입니다. 

이삭은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난 후 아브라함이 되어서 낳았습니다.

아브람은 육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영이에요.

그러므로 이삭은 영으로 낳아진 자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자들이 누구 후손인가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들고 있나요?

혈통을 들고 있습니다.

혈통을 앞세워서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 임마!

그건 육이지 어째서 영이냐!

영은 나야!

내가 바로 영이란 말이야!

내 피로 낳아진 자가 바로 이삭과 같이 영으로 낳아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브라함 혈통 들고 나와서 나 하나님 백성인데요 라고 하고 있잖아!

하나님 백성은 아브라함 혈통으로 낳아지는 자가 아니고 내 피로 낳아지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피를 뿌려 주어야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후손은 곧 신약에서 예수의 후손을 보여주는 예표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이라는 혈통을 의지하여서 나오는 것은 육이고!

예수의 피를 들고 나오는 자가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아브라함 피를 앞세우고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모두가 육에 속한 유대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속에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서 자기 피를 뿌려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입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낳아진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으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구약 식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에서 약속으로 낳아진 이삭과 같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피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약 시대에 살았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 시대도 계셨어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예수님은 역사 바깥에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에도 항상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태초에도 계시던 분이 지금 역사 속에 현재로 계신단 말입니다.

역사의 그 어느 시대에도 예수님은 항상 계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도 자기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조상은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단지 구약 마당에서 역할극을 한 겁니다.

예수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 아브라함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실 일을 잠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면 되어요.

물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역할을 했다고 보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실상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아브라함을 가지고 그림으로 그려 주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그림을 실상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앞에 아브라함 혈통을 앞세우고 나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짜인데 진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 육이라는 비늘로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이 육에 비늘이 떨어지고 난 후에 영으로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영으로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자기 민족들에게 알려 주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울처럼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 아브라함 피 가지고 천국 못 간다!

천국은 내 피로 간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 것을 알아먹었어야 합니다.

야! 우리도 예수님 피 바르고 천국 가야 하는구나!

주여~! 우리에게도 당신의 피를 뿌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 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어요.

도리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그 증거를 대 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나를 믿기 싫으면 내가 하는 말을 믿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합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는 항상 아버지의 말을 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는 아버지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지 않은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내가 언제 나를 증거 하더냐!

내가 항상 아버지를 증거하지 않더냐!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내가 하는 말이 맞다고 너희들 앞에서 갖가지 기적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 보지 말고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자기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들이 내어 놓으라고 하는 증거는 다름 아닌 육적 증거들이에요.

이에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육에 속하였어요.

그러니까 육적 증거를 구하는 것입니다.

로마를 무찌르고 해방을 시켜서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는 그런 메시야 상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희들에게 그런 인정을 받아야 하느냐!

나는 너희가 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에게 증거를 받고자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를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누가 너를 증거 하느냐 라고 물으니 아버지께서 나를 증거한다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나를 알면 되었지!

뭐가 아쉬워서 너희들에게 날 하나님 아들로 인정해 달라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의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나를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너희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태여 너희들에게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검증 받을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동일하게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늘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목사가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우리의 신앙을 판단 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로부터 자기의 신앙을 판단 받고자 하지 마세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자기 신앙을 누구에게 검증 받고자 하지 않아요.

남의 판단에 희비하지 않아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만이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자기 신앙을 확인 받고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자기 안에 증거가 있어요.

성령이 증거해 주는 증거 말이에요.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혼자가 아니에요.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증거를 해 주세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늘 함께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증거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도 예수님이 아버지와 늘 함께 살았듯이 성도들도 예수님과 늘 함께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날 이단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인정하고 내가 이단이 아니면 괜찮잖아요.

 

누가 저 보고 이단이라고 해요.

그럼 전 씨익!~ 웃어요.

예전에는 방방 뛰었는데 이젠 맷집에 생겨서 그런지 덤덤해요.

대꾸하기가 싫어요.

그걸 대꾸하고 싸워서 무엇 하겠어요.

 

대꾸해서 그 놈에게 이단 아니라는 말을 들은들 내게 무슨 영향이 있나요?

없어요.

여전히 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에요.

그러니 사람의 증거에 희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 전한다고 그것이 증거가 되지 않아요.

수 많은 사람들이 자칭 복음 전한다고 해요.

그런데 그들을 보면 사람의 판단에 민감해요.

복음으로 누림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늘 쫓겨요.

 

자기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안심을 하고 떠나면 불안해요.

누가 자기보다 인기가 있으면 괜히 시기하고 질투해요.

아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잖아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사하여야 하잖아요.

 

저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고 하면 일체의 경쟁이나 다툼이 필요치 않아요.

그럼에도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이러한 일들에 자유하지 못해요.

누가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해서 깎아 내려요.

 

결국 복음 안에서 자유치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과 겉돌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직 자기만 으뜸이 되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육에 속하여서 그래요.

 

육이니까 자기만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육의 현상입니다.

이건 속이지 못해요.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전한다 하여도 성령의 은사로 증거되는 복음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안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은 해소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쉼을 누리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의 많고 적음으로 희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말로 목사 안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목사 안하고 복음 안 전한다고 복음이 증거되지 않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 일은 하나님이 하세요.

이 믿음이 있으면 내가 제일이라고 꼴값을 떨지 않아요.

나만 복음 안다고 나대지 않아요.

나만 복음 안다고 하는 것은 그건 아직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만 복음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 아는 사람은 나 복음 안다고 나대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복음은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은사로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우리가 조종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하여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게 하는 선생은 오직 성령 한 분 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선생이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 선생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는 유일한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일컬어 예수님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난다고 합니다.

성령이 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가르침이나 지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율법 아래서 그 많은 지식으로도 예수를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게 해 주시잖아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 복음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년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났어요.

만나서 자기가 받은 복음을 제자들과 나누었어요.

심지어 베드로를 책망까지 했어요.

 

만약에 베드로에게 배운 것이라고 하면 책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사로 알아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책망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의 은사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지식으로 아는 자들을 책망해요.

복음으로 자기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을 책망해요.

 

이 시대 목사들에게는 복음이 자기 지위를 공고하게 해 주는 수단이 되고 말았어요.

 

수많은 목사들이 복음으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있어요.

자기 이름을 내는데 사용하고 있어요.

자기가 스승이 되어서 교인들 위에 군림을 하여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자기를 바라보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나 아니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반드시 성령으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는 비켜 주어야 해요.

교인들 눈에 자기를 감추고 예수만 바라보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아니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경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르쳐 주는 것으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해 놓았어요.

자기가 해석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해 놓아서 교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보지 못하고 목사가 한 말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독자적인 말을 못하고 목사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내어놓지 못하고 목사의 앵무새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미혹입니다.

한국 교회의 대 부분의 대형 교회들의 목사들이 이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유명하다고 하는 놈들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사람의 수로 힘을 삼고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어요.

교인들을 자기 종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를 추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악함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말이에요.

 

성도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세요.

하나님은 성도들을 목사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예수님이 참 목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자들일 뿐입니다.

자기가 목자 노릇하고자 하면 안 되어요.

참 목자는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나는 중매쟁이다!

나는 여러분들을 예수라는 남편에게 중매하는 뚜쟁이라고 하잖아요.

 

사도행전 마지막 장을 보세요.

바울의 일생이 어떻게 끝나는가요.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다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찾아내시고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고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하면 목사가 성도들을 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를 관리하고자 한다는 것은 그들 위에서 군림하고 왕 노릇하고 싶어서 입니다.

 

이건 무성의하게 하란 말이 아니에요.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란 말입니다.

성도와 목사의 차별성을 두지 말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케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보자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진짜 복음을 받게 되면 자기는 자꾸만 빠지게 되어요.

예수를 앞세우게 됩니다.

나 아니라도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십니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주 되심과 일하심을 증거하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도 개의치 않았어요.

이는 자신은 늘 아버지와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도 동일해요.

내가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자연히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추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으로 힘을 삼고자 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 찾아 나십니다.

그리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예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떠난다고 하여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거는 반드시 언약이 믿어지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이 증거가 있으면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반면에 이러한 증거가 없는 사람은 시절을 따라서 흔들려요.

자기의 조건에 따라서 증거가 왔다 갔다 해요.

이 증거는 증거가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확신을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확신이라는 것을 보면 자기 것이에요.

자기에게 발생 된 것을 가지고 있어요.

보통 보면 자기 열심과 충성이라든가 하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적 확신이에요.

율법적 확신이란? 자기에게서 근거한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바리새인들도 확신이 대단했어요.

바리새인들이 내어 놓는 확신이 뭔가요?

율법 지킴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난 이렇게 살았노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았으면 어찌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런 자랑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랑한 근거가 자기가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내 세우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율법을 지킨 것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내어 놓은 확신은 자기 몸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난 너희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합니다.

 

왜? 자기 확신이 충만한 바리새인들이 지옥에 갔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으로 주어진 확신이 아니고 자기 열심으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은 이단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그들의 신앙을 진리라고 신봉하는 것도 다 그들의 확신입니다.

확신 없으면 그런 곳에 있을 수 없어요.

이런 확신은 흔히들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다고 하는 자들도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자기 확신 들고 오지 마세요.

우리가 내어 놓는 확신은 자기 몸에서 나온 행함입니다.

우리는 자기 행함을 믿음이라고 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몸에 컨디션에 따라서 춤을 추어요.

행함이 들쭉날쭉해요.

그런데 우린 이걸 확신이라고 붙잡고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 확신을 보고 구원하지 않아요.

언약으로 구원 하세요.

하나님은 언약이 심겨져 있느냐 없느냐 로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 로 가늠합니다.

 

언약이 심겨져 있으면 확신이 없어도 구원을 하고 언약이 심겨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큰 소리치면서 확신을 해도 구원되지 않아요.

이건 바리새인과 창기들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확신이 가득 찼어요.

그러나 창기들은 확신이 없어요.

창기들은 자기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엇을 보고 그랬나요.

자기들 꼬라지에요.

창기라는 꼬라지를 보니 스스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창기는 모두가 자기 꼬라지로 확신을 했어요.

 

바리새인은 천국 간다고 확신했고 창기들은 못 간다고 확신했어요.

모두가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확신과 상관없이 일을 처리 하셨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놀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왜? 우리가 아니냐고 놀라고!

창기들은 우째 이런 일이 있느냐고 놀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옥에서 왜? 우리가 아니냐고 슬피 울며 이빨을 부드득 부드득 갈고 있고!

창기들은 천국에서 우째 이런 일이 있느냐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세요.

시절을 쫓아서 변했어요.

틈만 나면 우상 숭배했어요.

그럼에도 그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들에게 심겨진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행위로 판단하지 않고 언약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들 속에 언약이 심겨져 있었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고 애굽에서 자랐지만 모세를 보내서 빼내 오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할 것은 언약이지 우리의 행함이 아니에요.

언약이 믿어지는 믿음이에야 합니다.

성령이 이 언약을 믿는 증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하나 같이 언약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증거가 있는 성도는 그냥 믿어져요.

믿어지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는 반드시 성령이 주시는 내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 내적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그 언약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지요.

이건 믿음이 살아서 뭔가 일으키는 사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살아서 일으키면 어떤 사건을 일으킬까요?

그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바울은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믿음이 함께 일을 하는 행함이 입으로만 나는 새 언약을 믿어 라고 하는 자들은 너희 확신은 가짜라고 걸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함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드러나도록 믿음이 함유하고 있는 행함이 나타나는지 안 나타나는지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복음 복음하면서도 왕노릇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에요.

복음 속엔 교인들 위에서 군림하여 하나님처럼 왕 노릇하는 것이 없어요.

도리어 종으로 섬기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종으로 섬기는 것은 은사가 아니면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려거니와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곧 하나님 아들 되심의 증거인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여도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자기 삶을 살지 않고 아버지의 삶을 사셨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가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사셨듯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금지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합니다.

법이란? 정해진 틀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개는 개 행세를 하고 사람은 사람 행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 행세를 하세요! 라는 말은 사람을 찾아내려는 것이지 사람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행세 하여서 사람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행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는 자기 몸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는 모습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하나 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함이란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몰라요.

소경입니다.

이 세상이 어디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인간의 존재 목적을 모른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이걸 알려 주려고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여서 세상에서 세상 사람이 아닌 하늘나라 사람으로 살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연히 세상과 다름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어떤 다름인가 하면 세상과 반대편에 서 있는 다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세상을 고발하는 자로서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목적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지만,

성도는 세상은 허상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떠나고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선지자적 삶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도는 세상에서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미움을 받게 되고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으면 황홀해하고 감사하여야지요.

그 사랑을 볼 때마다 혼자 후~ 후하고 웃으면서 기뻐하여야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이 좀 넉넉해 지셔야지요.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씨익~ 웃어 줄 수 있는 여유가 되어야지요.

제발 주변 환경에 요동치지 말고 술람미처럼 그 사랑으로 이겨내세요.

 

물론 잘 안 됩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인 줄은 알고 살아야 하지는 않습니까?

그 정답을 이마에 붙이고 사세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정답과 다르게 살고 있는지도 확인하세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받았음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 넉넉해지세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세요.

 

예전에 윤복희씨가 부른 “여러분”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윤복희씨가 가장 힘들고 어려워 할 때 오빠 윤향기씨가 만들어서 준 노래라고 합니다.

그 노랫말 중에 ‘내가 와 여러분’ 이라는 말이 원래는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 가요제에 나가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주님 대신 여러분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노랫말의 주어(主語)가 주님이에요.

그러니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준다고 하는 내가 가 바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받아야 할 위로는 “주님의 위로” 뿐이라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 (원곡 : 윤복희)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when you walk through the cloudy days

(네가 흐리고 어두운 날들을 살아 갈 때)

He said, I'll be the one to be your cane

(그가 말하길, “내가 너의 지팡이가 될게”)

when you need someone to shart your love

(네가 사랑을 나눌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He said, I'll be the one to be your love

(그가 말하길, “내가 바로 그 사랑이 될게”)

so smile and look at me, I'll tell you what

(그러나 웃어봐 나를 봐, 한 가지 말하자면)

every, every, everybody's passing through this way

(모든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간단다)

so have faith, and be tall you can't stop new

(그러니 믿음을 갖고 당당해져 멈출 수는 없어)

New is the start, this is the way and only way

(이제 시작이고, 이게 유일한 길이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나는 너의,,,,,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위로해 주지!

여러분!~

---------------------------

 

특히 영어 가사를 보세요.

얼마나 복음 적인가!

예수님으로 개사해서 불러 보세요.

 

그럼 은혜가 될 것입니다.

괜히 신자 티 낸다고 의미도 모른 채 찬송가만 부르지 말고 이런 노래도 복음 송으로 부르세요.

믿음으로 받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하늘 문은 밧모 섬에서 열려요.

밧모 섬은 죽음을 맞이한 자들의 유배지에요.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버려졌어요.

이 때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천국을 보게 하셨어요.

 

천국은 죽음 너머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을 만나거들랑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 주시려고 우리를 밧모 섬과 같은 환경으로 몰아가시구나 라고 생각을 하세요.

 

왜? 나는 하는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느냐고 짜증내지 말고!

아! 주님을 바라보라고 사면초가케 하시는구나!

내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그러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치게 하고 아프게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도 어그러지지 않고 착착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만 있어요.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세요.

그럼 진행도 하나님이 하시고!

마무리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안심하고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되어 하나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 된 자로서 누림을 갖게 하옵소서. 그 어떤 환경에서도 요동치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