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110강. 베드로의 배반 속에 담긴 복음 (요 18:15-27)

댓글 0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2. 1. 2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0강. 베드로의 배반 속에 담긴 복음 (요 18:15-27)

-.정낙원 목사

 

요 18:15-27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인간에게 있어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크고 시급한 문제가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쫓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가두어진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진노 아래 가두고 종국에는 죽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그 인생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여도 일평생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되는 실패한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일평생 모아둔 재물을 죽음에 모든 것을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오늘 본문을 추적하여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칭 예수님의 수 제자 라고 하는 베드로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동안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제자들은 입버릇처럼 예수님을 위하여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고 예수님을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자 그 각오는 다 사라지고 조그마한 계집아이 앞에서 초라한 변명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자기가 모시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째서 배와 그물과 가족까지 버리고 쫓았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을까요?

의리가 없어서입니까?

아니면 섭섭해서입니까?

그도 아니면 충성심과 각오가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단 하나입니다.

죽을까봐 두려워서입니다.

죽음 앞에 막상 서 보니 예수 보다 내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 보다 예수가 더 앞설 순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에 다다르지 않았을 때에는 목숨 걸고 예수를 지켜 주겠다고 다짐하고 각오를 불살랐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서고 보니 자신의 각오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각오나 의지는 죽음 앞에선 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란 듯이 면전에서 부인하고 저주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베드로를 욕해선 안 됩니다.

베드로 속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처지에 놓이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어요.

베드로는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욕할 순 없어요.

도리어 동질성을 느껴야 합니다.

 

베드로의 배반에 대하여 주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 있어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각오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배반을 통하여서 볼 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각오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각오는 죽음 앞에 서면 여지없이 무너져요.

그러니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 역시도 베드로처럼 죽음 앞에 서면 무기력해져요.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절대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자랑하는데 이 사람은 아직 임자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래요.

욥처럼 한번 혼이 나봐야 야~ 신앙은 장담 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바울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겠어요.

 

신앙은 장담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지켜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지켜 주세요.

 

그러니 맹세하고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 있는 사람들은 장담하지 않아요.

도리어 넘어질까 염려해요.

그리고 넘어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도 하지 않아요.

도리어 경계로 삼아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 바깥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주어야지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속하여 있어요.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은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얼마든지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하여 나타난 신앙이 열심과 충성이에요.

이는 열심과 충성이 나쁘다거나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러한 것으로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지켜내지 못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인간의 조건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목사님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에 결단을 촉구하고 열심을 독려합니다.

요즘처럼 연말연시가 되면 결단하라는 설교가 단골메뉴로 등장하잖아요.

 

우리가 겪어 보아서 알지만 연말연시를 맞아서 결단을 하면 그것이 며칠이나 가던가요.

길면 한 달이에요.

보통 두 세 주간도 못가서 결단은 다 엿 바꿔 먹고 없어요.

도로아미타불이에요.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열심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건 비 신앙이에요.

결단으로 신앙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하면 그건 종교에요.

 

종교 생활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해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인간의 의지로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이라 함은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요.

예수를 영접하는 것에서부터 믿음을 지켜 나가는 모든 것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은혜로 시작하여서 은혜로 유지되다가 은혜로 마감이 되어져요.

 

시작도 은혜이고,

과정도 은혜이고,

끝도 은혜에요.

신앙생활에는 시작과 끝까지 우리의 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렇다고 로봇처럼 가만히 있으란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강권하여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여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은사라고 해요.

 

믿음은 믿음을 주신 분이 지켜 주시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출처가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의지나 각오로 믿음을 지켜낸다고 하면 우린 그 믿음을 우리 자랑으로 내어 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요.

봐라 나 이만큼 했다!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바로 죄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결심하고 충성 맹세를 한다고 해서 기뻐하시지 않아요.

이런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켜 낼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우린 흔들리는 갈대에요.

믿을 수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결단이나 각오나 장담을 안 믿어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안 믿듯이 말이에요.

왜? 예수님이 베드로가 그토록 장담을 하는데도 기뻐하지 않았는가요?

고맙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베드로의 장담을 베드로가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장담은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 앞에서 장담하는 것과 같아요.

아빠는 아린아이의 장담을 믿지 않아요.

그것은 어린아이는 자기가 한 장담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효도하겠다고 다짐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되던가요?

안 되어요.

자기가 결혼해서 처 자식 먹여 살리다 보면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가를 알게 되어요.

 

도리어 자신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불효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걸 알기 때문에 어린 자식이 아빠 나중에 내가 아빠에게 효도 할게! 라고 하여도 그걸 믿는 부모는 없는 겁니다.

속으로 부모 등골 빼먹지 말고 너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하잖아요.

 

이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가 맹세하고 장담을 한다고 해서 그걸 지켜 낼만한 위인들이 못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주는 것으로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도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두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장담을 하면 오히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신앙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래서 때로는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어요.

불안한 일을 조성시켜서 우리가 다짐하고 각오 한 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세요.  

우리를 두려움 앞에 세워서 우리의 각오나 의지가 얼마나 무익한 것인가를 알게 하세요.

이게 오늘 본문이야기에요.

 

다시 본문 이야기로 가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면전에서 부인하고 저주를 하고 있지요.

이건 베드로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멋지게 지켜 주겠다고 장담을 했어요.

 

그 의지를 불태우려고 칼을 들고 말고의 귀까지 잘라냈어요.

오늘 본문이 일어나기 전에 베드로의 각오가 어땠는가요?

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내는 일을 했잖아요.

한마디로 사기충천했었어요.

그런데 그 사기충천하던 것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어요.

 

베드로에게 있어 칼이란 자기를 지키는 무기입니다.

베드로가 칼로서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한 것은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베드로의 굳은 의지였어요.

스스로 자신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조금 전에 베드로가 칼로서 예수님을 지키고자 하던 것과는 정 반대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를 합니다.

예수님을 굳게 지키겠다고 하던 그 의지와 기백은 어디로 가고 없는가요?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한 것은 허세에 불과한 것입니다.

막상 죽음 앞에 서 보니 인간의 의지나 각오는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성경에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예수님의 수 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의 배반을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인간의 의지나 각오가 신앙이 아님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은 인간의 뜻으로 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인간들의 굳은 의지도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하고 계신 것이에요.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베드로의 배반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이 담겨져 있어요.

 

그럼 베드로의 배반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살펴봅시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결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망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게 상징적으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힘없이 이방나라인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고 힘이 없어서 자기 백성들을 못 지켜서 세상 권세 아래 식민지로 두었을까요?

아니면 뭔가를 말해주고자 하심일까요?

 

이는 무엇인가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무엇이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저주를 불러 왔습니다.

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가두어지게 했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힘으로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놓았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힘을 축적해요.

이는 힘으로서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힘 있으면 살고 힘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도 나도 힘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을 소유한다고 해서 본능적으로 엄습하는 두려움을 해소시킬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 그 두려움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몰라요.

두려움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몰라요.

그러다 보니 겉으로 나타나는 두려움이라는 현상만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근원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죽음이에요.

죽음이 두려움을 주어요.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고자 행동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칼로서 말고의 귀를 자른 것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도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칼이 두려움을 해소 시켜줄 것이라고 믿고 살았어요.

그래서 칼을 소지하고 다닌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소지하고 다녔다는 것은 그 칼을 힘으로 삼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위험이 닥치자 본능적으로 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칼로서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어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을 보시고 베드로의 생각을 바꿔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하니 칼을 집에 넣으라고 합니다.

이는 칼의 힘으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두려움은 칼로서 해결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닥친 죽음이라는 두려움은 죄의 삯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범죄하고 난 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결국 죄가 두려움을 몰고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죽음이라는 두려움은 칼로 해소할 것이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 해요.

왜냐하면! 죄가 두려움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몰라요.

그 누구도 죄가 두려움을 몰고 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당연히 죄 문제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지도 몰라요.

 

인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너희가 죄인이라서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쫓긴다고 알려 주십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이러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지금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먹을 턱이 없지요.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두려움이 밀려오면 두려워지고 두려움이 물러가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란? 두려움 앞에선 그 어떤 방법도 없어요.

그냥 두려움이 주는 것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이처럼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두려움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심지어 자기 의지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무기력한 자들이에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걸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걸 알려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예수님이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자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 다니니까 신이 났어요.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에 의기 앙양했어요.

 

제자들이나 세상 사람들 눈에는 갖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있는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로마를 물리치고 정권을 잡을 것 같이 보였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치 큰 대감 집 머슴들처럼 마치 대감의 권세가 자기 권세라도 되는 냥 거드름을 피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정권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어요.

제자들은 그 때만을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웠던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반대급부를 바라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따라 다녔으면 당연히 예수가 정권을 잡으면 좋은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싶잖아요.

사람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냥 따라다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그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으면 돌변을 합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요.

원망과 적개심이 들어요.

이는 자기가 바라던 꿈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밉습니까?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꿈을 깨뜨리는 사람이에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면 누구라도 싫어해요.

 

그것이 친구이고 형제이고 이웃이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심지어 부모이고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기 꿈을 빼앗아 가면 미워요.

인간은 철저히 자기 계산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리고 사람은 본능적으로 좋은 미래를 꿈꾸어요.

그 꿈을 위해서 자신을 투자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데도 이러한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은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속에 자기 자화상을 심어 놓았어요.

그 꿈을 하나 하나씩 그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 직면하는 사건을 당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죽으면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힘없이 죽음 속으로 나아가는 예수님이 미운 겁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항거하여 싸워주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힘없이 죽을 자리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미운 겁니다.

아니 어떻게 등신처럼 얻어맞고 있느냐 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 속에는 이러한 섭섭한 마음도 들어가 있어요.

왜? 등신처럼 가만히 있느냐!

일어나서 좀 싸워 보라는 거에요.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그렇지 않던가요?

내 자식이 밖에 나가서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오면 화가 나잖아요.

이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이를 때린 놈도 밉지만 때린다고 맞고 온 자식 놈이 더 미워요.

그래서 넌 왜? 맞고 만 다니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너도 같이 때리라고 하잖아요.

 

그 어떤 부모도 얻어맞고 다니는 자식을 좋아 할리가 없어요.

부모는 강한 자식을 원해요.

지금 베드로의 마음이 부모님 마음처럼 그러해요.

자기가 모시는 주군이 힘 있는 주군이어야지 비실비실하는 주군을 누가 좋아 하겠어요.

힘없이 당하는 예수가 아니라 강한 예수님이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각에 부응하지 못하고 힘없이 얻어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마음은 화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속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드러냈는가 하면 예수님이 빤히 보는 면전에서 보란 듯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를 하는 식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물론 자기에게 위협을 가하는 자들로부터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함으로서 나는 예수와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 우선입니다.

코 앞에 닥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 맞아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도 담겨져 있어요.

분함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가 죽으면 자기 꿈이 박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극하여서 힘없이 잡히지 말고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있었어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만 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럽니까?

이는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이니 귀담아 들으세요.

 

예수님은 자신이 잡힌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은 모두가 성경을 응하기 위한 삶이에요.

즉 창세전 언약을 위한 삶을 사셨단 말입니다.

태어남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고 죽음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죽음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지금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습니다.

유월절 흠 없는 어린 양은 자기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살린다는 것은 곧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죽으시는 것은 베드로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베드로를 대신하여서 죽는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몰라요.

성령이 오시고 나면 알게 됩니다.

 

나중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베드로는 지금과 다르게 행동을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정면으로 대하면서 도리어 죽음을 불사하고 살았어요.

마치 지금 예수님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이는 모두가 예수님이 베드로의 죄와 사망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으로 두려워 떠는 베드로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부인은 이미 예언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도 다 성경을 응하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담을 할 때에, 아니다 너는 나를 배신 할 것이라고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담을 할 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라고 자세하게 알려 주셨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을 귀담아 두지 않았어요.

자기는 절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것도 정확하게 닭 울기 전에 세 번을 말이에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자 닭이 울잖아요.

이는 곧 베드로는 베드로의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이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된다고 말씀 하셨어요.

 

이건 예수님이 오늘 밤 베드로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림을 이미 보고 계신 겁니다.

즉 장차 전개 되어질 시나리오를 이미 보시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알 턱이 없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이 앞으로 전개가 될 시나리오를 베드로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나리오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시나리오에 약속된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해 주어야 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곧 실제로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조금 후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사건이 실제화 되어서 일어나야 해요.

아니~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예언대로 베드로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성취하는데 도우미로 이용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를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밤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잖아요.

이건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니라고 합니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어요.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내기 해 봅시다.

과연 베드로의 장담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는 식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가요?

 

베드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는지를 보면 베드로를 장악하고 움직이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만약에 베드로의 장담대로 베드로가 행하면 베드로의 인생은 베드로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베드로의 장담과는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을 하면 베드로를 붙잡고 사용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으로 판명이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각오와 상관없이 반대 되는 것으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장악하고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되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이것은 결국 베드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인생을 간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기의 원함대로가 아닌 예수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줄 알아야 시험에 들지 않아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사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심어 놓은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약속)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신다는 말은 곧 약속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으로 심겨져 있어요.

 

우리는 그 약속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 사실을 우리가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상관이 없고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이루어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드로를 보세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하나님은 베드로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으로 다스리고 계시잖아요.

속된 말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야! 너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해! 라고 하셨어요.

즉 하나님이 베드로 속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라는 약속을 심어 놓은 겁니다.

 

이 약속은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현이 되어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창조의 능력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약속)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담겨져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시면 반드시 그 명령대로 성취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창조에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에 조상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이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어요.

하나님이 아브람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을 하나님이 성취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심어 놓은 약속은 아브람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동의로 일을 하시지 않아요.

아브람은 그냥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사용되어지는 도구일 뿐이에요.

 

이삭을 보세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어떻게 낳았나요.

믿어서 낳았나요?

아니에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이삭을 준다고 할 때 안 믿었어요.

도리어 비 웃었어요.

그런데 이삭을 낳았어요.

누가 낳았나요?

하나님 말씀이 낳았어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왜 믿지 않고 비웃었나요.

이는 자기들 꼬라지를 보았기 때문이에요.

누가 봐도 사라가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여자가 월경이 있어야 하잖아요.

월경이 있어야 난자(卵子)가 생산이 되잖아요.

그런데 사라는 이미 월경이 끊어진지가 오래 되었어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죽은 여자에요.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죽은 몸을 전혀 고려치 않고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아브라함이나 사라 입장에선 놀리는 말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래서 웃기지 말라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었다고 생각하던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생산 되었어요.

이건 사라가 낳은 자식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낳았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자식이라고 하지 않고 약속(말씀)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베드로에게 적용해 봅시다.

 

베드로는 자기 의지와 각오를 믿었어요.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건 베드로의 굳은 의지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야! 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되어 있어!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성경에 미리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미리 예언된 시나리오를 본 겁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봅시다.

 

마 26:31-35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위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서 이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칠 테니 그럼 양의 떼가 흩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잡히시면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에요.

이걸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서 우린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다 도망을 갈지라도 자신만큼은 주님 곁을 지켜 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베드로의 진심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진심도 모른 채!

야~! 너의 진심을 알겠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아!

너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발끈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식으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더 힘주어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일사각오를 외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여기저기서 옳소!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이건 베드로와 제자들의 진심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면 제자들의 장담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이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자 법정에 서니까

예수님을 지키기는 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조금 전의 그 기백과 각오는 온대 간데없고 배신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예수님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나는 저런 놈을 모른다고 하고 거기다가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저주를 하고 있어요.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모두가 성경을 응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잡히면 제자들이 도망을 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흩어 버리게 하신다고 하셨어요.

이게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요.

 

스가랴 13장의 예언을 봅시다.

 

슥 13:7-9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자 보세요.

지금 만군의 여호와가 장차 일어날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칼” 에게 명합니다.

 

무슨 명입니까?

내 목자를 치라는 명이지요.

목자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다는 말입니다.

칼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고 하지요.

그럼 하나님이 그 흩어진 자들 위에 자비의 손을 드리우고 지켜 주신다고 합니다.

 

칼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는데 세 부분으로 흩어져요.

 

삼분지 일을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고!

삼분지 일은 불 가운데로 던져서 은같이 연단을 하고 금같이 시험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고,

이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칭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칼이란? 세상 권세를 말합니다.

사단의 권세를 말해요.

즉 하나님이 마귀에게 세상 권세를 가지고 예수를 죽이라고 명하신 겁니다.

그러면 세 부류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부류와,

그것을 구경하는 부류와,

도망치는 부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도망친 부류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내신다는 것이에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오늘 설교의 핵심이니 귀담아 두세요.

 

여기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그 복음에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지금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잡히심을 보고서 다 도망을 치지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선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나쁜 놈들이에요.

배은망덕한 원수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나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가 임하는가 하면 불 가운데 던져서 은처럼 연단하고 금처럼 시련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 속에 던져서 그들의 죄를 회개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는 내 백성들이라고 불러 준다고 합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바벨론 포로로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어요.

하나님이 말을 안 듣는 놈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종살이를 하게 하시고 거기서 회개를 시켜서 다시 돌아오게 하셨어요.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종살이 하면서 잘못을 회개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어요.

그러니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자들에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가랴가 장차 일어날 사건인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도 이러한 과정을 밟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다 아시고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제자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하지요.

 

그래서 제가 천국에는 누가 가느냐 하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자라는 것을 알고 회개 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죄인이 용서 받고 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업을 누가 물려받는지 아세요.

탕자가 받아요.

맏 아들은 못 받아요.

 

아버지가 탕자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지요.

가락지는 인감도장과 같아요.

그러니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는 것은 집안을 맡기는 것이에요.

 

우리 상식으로는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잘 지킨 맏아들이 아버지의 유업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모든 인간들은 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아요.

도리어 아버지 재산을 말아 먹은 불효자식에게 맡겨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여기서 아버지 집은 천국을 말해요.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긍휼로 다스려지는 나라에요.

 

그러므로 천국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긍휼을 입지 않은 자는 들어가지 못해요.

용서 받지 않은 자는 못 들어가요.

왜냐하면! 천국은 용서 받은 자가 세세토록 감사하고 찬양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용서 받은 자들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었다가 다시 찾아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다 흩으셨다가 다시 찾아오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자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장담을 하던 제자들이 도리어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다 도망을 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 가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흥분이 되지 않나요.

 

자 보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월절 양으로 죽입니다.

왜? 예수님을 죽입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와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닌데!

어떻게 너에게 구원을 받는단 말이냐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했어요.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을 하려고 예수님을 보냈어요.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고 있어요.

그럼 예수님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무의미해져요.

하나님만 실없는 짓을 하고 만 것이 되어요.

 

그럼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을 달성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자면 자기 백성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우리는 죄인이 아니니 다른데 가보라고 하고 있어요.

이러면 하나님이 가만 둘 수가 없지요.

이 놈들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을 해야지요.

 

너희들은 죄 아래 가두어졌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지금 12 제자들은 자기 백성들의 대표로 서 있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대신해서 서 있는 거에요.

그래서 12 제자에요.

12 제자 속에는 구원받을 모든 이스라엘이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을 하려면 이 놈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해요.

즉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죄에서 건져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저 준다는 말은 죄를 용서 해 준다는 말입니다.

죄를 용서 해 주려면 잘못한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뭔가 잘못 한 것이 있어야지 용서를 해 주지요.

 

만약에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싶어도 이 놈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용서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 난감해지잖아요.

즉 베드로처럼 우린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예수님 앞에 죄 짓지 않고 떳떳하게 서 있겠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이 놈들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을 가서 죄인이 되어야 해요.

스스로가 야!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을 친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놈들을 죄인 만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여서 배신자가 되어서 도망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배신자들을 고난 속으로 집어넣어서 회개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 우리가 잘못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울부짖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스가랴가 이미 예언을 했어요.

 

스가랴 12장을 봅니다.

 

슥 12:10-13:1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죽었던 예수가 부활 하신 것을 알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우리가 잘못을 했구나! 라고 큰 애통과 통곡이 일어나게 되어요.

그럼 더러운 죄를 씻는 은혜가 자기 백성들에게 임한단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22-4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 ~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설교합니다.

어떤 설교인가 하면!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설교에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를 죽인 놈들이 맞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못 했습니다!

그러니 긍휼을 베푸시고 용서 해 주세요! 라고 통곡과 애통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 해 주세요.

이렇게 자기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애통이 일어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가 되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아직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루어지기 전이에요.

예수님이 죽어야 할 시기에요.

성령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을 하여야 오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배신 할 것을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에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시나리오를 써 놓았단 말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이러한 것이 믿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든든하고 기쁜지 몰라요.

 

하나님은 지금 그 시나리오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여서 죄인이 되도록 일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이 우린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자!

아니야!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배신하게 되어 있어! 라고 다시 한 번 그들 속에 말씀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약속을 심어 놓은 겁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가 누가 이기나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고 도망친다! O

제자들은 우린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X

쉬운 말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맞다 틀리다 O . X 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당연히 예수님 말씀이 맞지요.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가 시험 앞에 서자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해 버립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을 쳐 버렸어요.

결국 예수님의 약속이 이긴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베드로의 부인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소망인가요?

우리 안에 심겨진 약속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세상에 오면서 약속을 담고 왔어요.

그 약속대로 우리의 운명은 결정이 되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놓은 약속대로 우리를 간섭을 해 가세요.

 

우리 안에 어떤 약속인가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는 약속이에요.

다른 말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여서 죄인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용서 받는 약속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일을 하고 용서 받게 되는 약속이 심겨져 있는 것이에요.

우린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수없이 원망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살아요.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진다고 악악거리고 있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 소원을 안 들어 준다고 원망하고 불평해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원망하고 있어요.

그럼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함에도 용서 받고 있어요.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이 우리 안에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드러나지 않고 늘 못 믿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그렇게 호락 호락 말을 안 들어 먹어요.

 

그러니 우린 늘 상한 심령일 수 밖에 없고 애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면 늘 죄인의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어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 받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고백을 하잖아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말이에요.

이렇게 곤고한 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서 용서 받게 된다고 하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올 때 이미 우리 안에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기로 된 약속을 품고 온 것입니다.

야곱처럼 말이에요.

그러니 당당하게 사세요.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심겨져 있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그 약속 말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를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이에요.

우린 그 약속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 약속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반드시 이루어져요.

하나님이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심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이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세요.

 

이걸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항거 할 수가 없는 상태란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우리는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팔자에요.

 

요나처럼 지옥에 들어가도 토해냄을 당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지옥은 예수님의 의를 입고 있는 자들을 수용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의가 입혀져 있어요.

 

그러니 지옥이 예수의 의로 둘둘 말린 성도를 소화시키고 감당 할 수가 없어서 물고가가 요나를 토해 내듯이 성도들을 토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죽음에서 토해냄을 당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죽음 속으로 들어가자 죽음이 야! 이건 우리가 소화 할 수가 없는 물건인데 하고 퀙~ 하고 토해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래요.

지옥이 야! 너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고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토해 내어요.

이건 마치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예수쟁이들 보고 다른데 가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진짜 용한 점쟁이들은 성도가 점치러 가면 점괘가 안 나온다고 가라고 해요.

 

그런다고 괜히 시험 삼아 점치러 가지 마세요.

괜히 갖다가 점쟁이 한데 점괘가 나와서 야! 나는 예수쟁이가 아닌가 보네! 라고 하면서 시험 들지 말고!

그러니 함부로 가지 마세요.

이런 말에 훅~ 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십중팔구 시험 들어요.

그러니 점치러 가지 마세요.

 

다시 말합니다.

성도에겐 예수님의 의가 씌워져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서 지옥에 가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구원을 받은 성도에요.

 

이건 개판으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우리 몸에 심어 놓은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그 약속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서 사용이 되어요.

 

어떻게 사용이 되어질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사용이 되어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사용이 되려면 우리는 정죄당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린 마땅히 정죄 당하여야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요.

즉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는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정죄 당하여야 해요.

그런데 정죄 당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약속이 우리에게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정죄함 없이 살게 하세요.

그럼 그 약속이 심겨졌는지 안 심겨졌는지 어떻게 압니까?

 

이는 마땅히 정죄당하여야 함에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로 알 수가 있어요.

믿어지는 사람은 약속이 그 속에 심겨져 있는 성도이고!

안 믿어지면 그 사람은 약속을 받지 못한 자에요.

 

그러니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못 믿는 것으로 살게 되어요.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곧 그가 약속의 자손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심겨진 사람은 하나님이 그 약속대로 간섭을 해 나가세요.

우리를 책임지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원함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결정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 줄 아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 좀 알고나 예수를 믿으세요.

 

속된 말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어도 천국 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어요.

이건 예수님을 저주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에요.

베드로의 저주와 상관없이 베드로는 용서 받고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선택을 할 때 베드로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하시고 난 후 베드로를 찾아가신 겁니다.

찾아가서 또 사명을 주잖아요.

약속을 하잖아요.

 

넌 니 맘대로 살지 못하고 앞으로 내가 이끈다고 말이에요.

지금까지는 너는 니 맘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니 맘대로 살지 못하고 내가 내 뜻대로 살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베드로의 인생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거꾸러 십자가에 매 달려 죽는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에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그 이끌림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추억해 보세요.

우리의 원함으로 여기까지 왔는가요?

단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저는 저의 원함과 상관없이 여기까지 이끌려 왔어요.

마치 코뚜레 당한 소처럼 이끌려 왔어요.

이게 믿어지니까 이젠 배짱이 생기는 겁니다.

내 인생 어차피 내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뜻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니까 인생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하세요!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아무렇게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어요.

예수님이 가신 길이에요.

우리 앞선 선배들이 걸어간 길이 있어요.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정해진 코스에요.

 

우리는 지금까지 정해진 그 코스로 여기까지 끌려 왔어요.

그럼 앞으로도 그 코스로 끌려 갈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팔자려니 하고 말이에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징징거린다고 고난이 피해지지 않아요.

피하지 못할 고난이라면 즐기고 가세요.

예수 믿으면서 당하는 고난도 쏠쏠해요.

 

복음으로 인하여 욕을 먹고 이단 소리 듣는 그 재미도 제법 맛이 있어요.

물론 몸뚱이는 아프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주어지는 주님의 위로 또한 만만치 않아요.

주님의 위로를 받으면 든든해요.

주님께 위로를 받으면 세상이 작아 보여요.

 

잠시 잠간 후면 주님이 오세요.

그러니 서로 위로하고 내 팔자는 이미 천국 가기로 정해졌구나 생각하시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고 하면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강아지가 짖어도 경부선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듯이 우리의 인생은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창세전에 약속된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남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며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바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입니다. 우린 늘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반하고 살고 있습니다. 마음은 주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이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비록 아버지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그 피로 인하여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그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믿어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