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112강. 왕이 행악자가 되다 (요 18: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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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2022. 1. 2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2강. 왕이 행악자가 되다 (요 18:28-37)

-.정낙원 목사

 

요 18:28-37=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큰 소리를 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격이라든가!

강도에게 좇기는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당신이 강도라고 하는 경우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그러해요.

이 세상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를 강도라고 하면서 죽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성경은 세상을 일컬어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럼 세상에 속한 모든 자들도 어둠에 속성을 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무엇에 대한 어둠인가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어둠인 것입니다.

 

어둠을 다른 말로 소경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뭔가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앞세워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세상이 소경이다 보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읽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란? 쉬운 말로 하나님과 다른 생각으로 사는 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생각으로 다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인간들은 선이라 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인간들은 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영광의 주를 못 박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한마디로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다면 구원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곧 인간들은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 증거입니다.

 

인간들은 각자의 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신을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하면서 신을 정형화 시켜 놓았습니다.

즉 각자의 개념으로 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걸 “신의 개념화” 라고 합니다.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이를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란?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유익을 위하여 찾는 신을 말합니다.

죄인에게 있어 모든 신은 우상이에요.

하나님도 우상인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유익을 위하여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이런 우상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와서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간섭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언약을 위한 것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광야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곳이며,

또한 내가 누구인지를 배워가는 장소인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고 살았는데,

광야에 나와서는 “내 인생은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모세와 다툼이 곧 하나님과의 다툼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모세와의 다툼은 신약에서 예수님과의 다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과 다투는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고 하는 애굽에서 난 자들을 다 죽이십니다.

너를 위한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에서 난 자들은 모두가 죽고 맙니다.

이는 신약적인 의미로서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난 자들은 다 죽이고 광야에서 난 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가나안의 약속은 애굽에서 나온 1 세대들에게 주어졌지만,

막상 그 약속은 광야에서 난 2 세대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건 영적으로 하나의 모형적 사건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예표합니다.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은 죄 아래서 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곧 애굽에서 난 1 세대들을 모형하고 있어요.

성경은 죄 아래서 난 자를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죽어야 할 자입니다.

왜냐하면! 옛 사람이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럼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어떤 싸움을 하게 됩니까?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을 뽑아내는 싸움을 당합니다.

즉 신관(神觀)을 교정당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는 신관을 바꿔치기 당하는 곳이에요.

 

광야는 신약에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알던 하나님을 바꿔치기 해 주는 곳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알던 하나님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로 왔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알던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알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입니다.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 관(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 관을 가지고 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곧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입니다.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 와서 알게 된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언약을 위하여 선택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는 내가 있고 하나님이 있었는데,

광야에 나와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건 주체(主體)가 바뀌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나를 위하여 살았어요.

모든 일을 내 중심으로 이해하였어요.

그런데 교회에 와서 알게 된 것은 나 보다 예수님이 먼저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요.

 

내가 있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계셨고...

예수님이 나를 창조 했는데 이는 나를 위하여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창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체가 바뀌는 일대 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모를 때는 괜찮았는데 알고 나니 우리 안에서 두 법이 충돌을 하는 겁니다.

우린 여기서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되고 신앙에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가나안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 갈 것인가?

결국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었던 그 과정을 우리는 교회에서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가 먹고 사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에만 관심이 있어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관심사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갖게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땅 사람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이 징징거림 속에서도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가나안으로 끌려갔듯이 성도들도 반드시 천국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언약 밖에 몰라요.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기에 발끈하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짐승이에요.

짐승은 누구라도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 가면 물어요.

주인이라고 하여도 물어 버려요.

 

이사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짐승만도 못한 종자들이라고 합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은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지키시고 인도하는 하나님을 몰라본다고 합니다.

 

어째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는가요?

자기 밥그릇을 자꾸만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뜻대로 못 살게 자꾸만 간섭을 하고 귀찮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싫은 것입니다.

 

그냥 떡이나 주고 가만 놔두면 좋겠는데 시시콜콜 간섭을 한단 말입니다.

자꾸만 자기 인생에 개입을 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을 하니 싫은 거에요.

인간은 누구에게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스스로 다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인생에 간섭하면 화를 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자기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본성으로 사람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판단을 합니다.

내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나를 귀찮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면 미운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죄인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호불호를 나눕니다. 

그래서 우린 본능적으로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멀리하고 유익을 주는 사람은 가까이하는 겁니다.

내게 손해가 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신도 예외가 아니에요.

 

우리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교회 안이든 교회 바깥이든 살펴보세요.

지금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요?

나는 지금 누구랑 사귐을 갖고 있는가요?

모두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과 사귐을 가지고 있어요.

 

우린 모두가 이런 사고로 사람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든 신이든 동일해요.

부모 형제라 할지라도 날 귀찮게 하면 싫어요.

하나님이라도 다르지 않아요.

 

이게 죄에요.

죄가 뭐냐?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모든 것이 죄에요.

 

나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그것이 죄이고!

나를 위하여서 구원을 받고자 하면 그것이 죄이고!

나를 위하여 천국에 가고 싶으면 그것이 죄에요.

 

내 존재로부터 출발을 하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도구에 불과해요.

 

내 부모도 나를 위한 수단이고!

내 형제도 나를 위한 수단이고!

내 자식도 나를 위한 수단이고!

내 남편이나 내 아내도 나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아요.

 

이 수단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린 다 버려요.

이게 죄인이고 우리에요.

우리 실존이에요.

 

지난 월요일에 대구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가졌습니다.

강의 내용은 “인간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린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있다고 했어요.

반면에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어요.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예수를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해요.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해요.

좋아한다는 것은 이용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껌이에요.

단물만 쏙 빼먹고는 뱉어버리는 그런 존재에요.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이용하는 자들이에요.

 

이러한 사실을 우린 날마다 말씀 앞에서 발각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인데...

이런 죄인이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곧 천국이 되고!

이 사실을 모르면 우린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아도 지옥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천국이고 하나님을 모르면 지옥입니다.

 

인간은 욕망의 화신이에요.

끊임없이 욕망을 분출해요.

그 욕망을 채우고자 우린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과 거래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 거래가 성사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신을 죽여요.

 

그래서 우린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빼앗고 우리 안에 욕망을 죽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고 도리어 그 소원을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니까 우린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라고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의를 마치고 난 후 어떤 분이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자기 안에 감추었던 것이 들키니까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몇 번을 말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죄인으로서 죄인의 존재 자체가 자기 있음으로부터 출발을 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라고 하니까 기분이 나쁘고 아프다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 실존이 고발당하면 기뻐해야 하는데 우린 그렇지가 않아요.

말씀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 유익에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이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수단으로 삼고자 한단 말입니다.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껌 속에 있는 단물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예수는 늘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이용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것을 역(逆)으로 이용하세요.

나를 위하여 예수를 찾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 인생을 예수님의 운명 안으로 끌어당긴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픈 겁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자기 운명 안으로 끌어 당겨서 살게 하는 것이 아플까요?

이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나는 엑스트라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우린 내 인생을 내가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어느 날 찾아와서 내 자리를 밀쳐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단 말입니다.

그게 싫은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싫어합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들의 가치가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살았습니다.

도포자락 휘날리고 시장 통에 나가면 사람들이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굽신거렸어요.

거룩하신 분들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와서는 돈을 밝히는 돈 버러지들이라 하고, 외식하는 자라고 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고, 지옥으로 갈 독사새끼 라고 한단 말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거룩한 산통을 다 깨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죽여야지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예수를 죽여야지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사건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이라 고소하는가 하면 “행악자” 라고 고소합니다.

“행악자”란? 강도란 말입니다.

즉 자기들에 것을 빼앗아 가는 자란 말입니다.

대 제사장 입장에서 예수는 자기들의 것을 빼앗아 가는 강도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들 돈줄을 끊고 있으니 도적인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가야바는 돈을 주고 대 제사장직을 샀어요.

왜? 많은 프리미엄을 주고 대 제사장 직을 샀을까요?

그야 그만큼 이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 제사장은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갖가지 장사에서 얻어지는 로열티가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좇아내 버린 것입니다.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급기야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합니다.

이거 가만 둘 수가 없지요.

가만 두면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예수가 자기 영광도 빼앗아 가고!

자기 밥줄도 빼앗아 가고 있는 겁니다.

대 제사장 입장에선 예수가 자기 것을 다 빼앗아 가는 강도에요.

그래서 자기 수하들을 앞세워서 예수를 행악자로 몰아서 죽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 놈을 살려 두면 두고 두고 자신들의 우환거리가 되므로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예수는 죽어도 마땅한 자라는 것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촛불 집회라도 해야지요.

당시 여론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러니 순식간에 온 예루살렘에 예수는 행악자라는 여론이 형성 되고 말았어요.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세가 없으니 로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죽여야 하니까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데리고 와서 행악자라고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법집행을 할 수가 없으니까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좀 내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뜻밖의 말을 합니다.

빌라도가 뜬금없이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래 맞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자기 왕을 행악자로 판단하고 죽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왕을 강도로 보는 이 현실이 곧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이 사건을 언약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몰라보는 이 어두운 세상에 왜? 예수님을 보냈을까요?

예수를 믿으라고 한 걸까요?

예수를 못 믿게 하려는 걸까요?

 

못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죽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죽이는 카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당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어야 할 자라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에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복음이 뭔가요?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 소경 된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뜨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때 예수님이 그 소경을 눈 뜨게 하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그냥 눈을 떠라 그러지 않고 어떤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어떤 수순인가 하면,

먼저 예수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고 밝히 보게 됩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로암이란?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느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지금 자기 백성들이 소경이에요.

예수를 몰라보고 있어요.

그래서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의 눈을 뜨게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소경을 시청각교제로 상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주님 저 소경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인가요?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할 일을 보여주려고 소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토기에요.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에서처럼 지옥으로 가는 도구로 창조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야곱처럼 천국으로 가는 도구로 창조가 되었어요.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그에 합당한 그릇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이 되어지고,

어떤 사람은 진노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 현실을 보고 비관하지 마세요.

우리도 도구로 쓰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전후(前後)를 살피시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내 인생이 훨씬 가벼워져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들어요.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야!

이건 내가 꿈꾸던 인생이 아니야! 라고 하면 내 인생이 원망스럽고 힘이 들어요.

그런다고 인생이 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변하게 해 주지 않으면 한 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 주의 뜻이려니 하고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어디 우리가 그런가요?

눈만 뜨면 자기 인생을 챙기고자 하잖아요.

모두가 소경이라서 그래요.

그러니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처럼 먹고 마실 것을 구하고 있으며 세상 가치에 따라서 희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린 소경 앞에서 내가 소경이라고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여 내 눈도 좀 떠지게 하소서!

예수를 밝히 보게 하옵소서!

내 인생이 주께 붙잡혀서 가는 인생임을 알게 하소서!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고 있지 않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당 푸닥거리 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속에 감추었던 것이 고발당하니까 기분이 나쁘고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오셨어요.

어떤 눈입니까?

왕을 행악자로 보는 어그러진 눈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행악자” 라는 말은 “카코포이오스” 라는 말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것은 예수님이 작심을 하고 이 세상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거잖아요.

이건 고발이에요.

 

어둠은 빛을 통해서 어둠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어둠 입장에선 예수님 자체가 행악자일 수밖에 없지요.

내가 어둠이라는 실체로 고발이 되는데 누가 좋아 하겠어요.

그래서 싫은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예수님 앞에 나오기를 거부한다고....

어둠이라서 빛을 싫어한다고...

예수 앞에 나가면 자기 실체가 폭로당하니 싫은 겁니다.

 

이건 모든 인간이 동일해요.

우리도 우리 실체가 폭로 당하면 싫어해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라고 하여야 체면이 선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눈치 없이 우리를 고발한단 말입니다.

우리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행악자라고 하는 “카코포이오스” 라는 말을 미 완료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한번만 우리 죄를 고발하는 행악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서 우리 죄를 까발리는 행악자 노릇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일평생 우리와 싸우겠다는 말입니다.

이게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와 싸울까요?

 

그건 우리가 날마다 죄를 생산해 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생산하는가 하면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을 내어 놓고 섬기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꾸만 자기 생각에 가두어서 판단을 합니다.

자기식으로 편집을 해서 판단을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과거에 경험된 것을 기초로 만들어져요.

우리는 자기가 경험된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자 해요.

이걸 “과거에 경험된 것으로 현재를 해석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 자 아는 하나님이 있어요.

이게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것으로 나타나요.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 한다” 라는 말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은 어떻게 알아진 하나님입니까?

이는 과거에 경험으로 알아진 하나님입니다.

예전에 알았던 그 하나님을 현재화 하여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은 내가 만든 신인 것입니다.

 

우린 역사에 속하여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사는 자들입니다.

역사에서는 미래는 미지의 세계로서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모르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과거에 경험된 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겪어 보니 그렇더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압니까?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 알잖아요.

아! 정낙원 목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했으니까 이런 사람이야! 라고 지금까지 저를 경험한 것으로 저를 해석하잖아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에요.

 

하나님도 그래요.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도 지금까지 경험한 과거를 가지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으로 광야에서도 그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현재의 하나님이에요.

현재이면서 미래의 하나님이에요.

이걸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날마다 새로운 창조의 모습으로 활동을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과거의 하나님으로는 날마다 창조하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과거의 애굽식 사고로는 하나님으로는 측량 할 수가 없어요.

날마다 새로운 일을 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도 예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과거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겁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옛날에 알던 하나님에 관한 정보는 다 삭제가 당하는 것입니다.

우린 옛 것을 축적하여 힘을 삼고 사는데 그 힘을 빼앗아 가니까 싫은 겁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행악자에요.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하지요.

무슨 근거로 그럽니까?

자기들이 지금까지 축적해 놓은 메시야 관으로 판단해 보니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정보로는 메시야는 자기들에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소원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행악자인 겁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런 일을 할 것이라는 예측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의 바램이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측한 메시야는 로마를 무찌르고 자기들을 해방 시키고 유대 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예측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이러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가 예측이 안 되어요.

예측이 안 되면 불안해요.

 

인간들은 예측이 가능한 신을 원해요.

자기 생각에 맞는 신을 원해요.

결국 신의 일하심을 자기 안에 가두어 두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미리 예측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 하나님은 인간 속에 가두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예측된 것으로 하나님을 부려 먹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상이에요.

 

우상이란? 예측 가능한 신을 말해요.

내가 이렇게 하면 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예측이에요. 지

성이면 감천하여야 해요.

나의 정성에 따라서 응답의 강도도 정해져 있어요.

 

우리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기도의 강약을 조절해요.

많이 얻어야 할 것이 있으면 많이 기도하고 적게 얻고자 하면 적게 기도해요.

급한 게 없으면 기도 안하고 급한 게 있으면 기도해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아쉬운 만큼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필요하면 새벽기도 하고!

조금 큰 것 필요하면 철야 기도하고!

아주 큰 것이 필요하면 사십일 금식 기도를 해요.

 

이게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고 알아왔던 하나님이에요.

결국 우리는 내가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각 사람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렇다 라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하였더니 이런 복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걸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이란? 경험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틀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가 자꾸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측 가능하도록 한단 말입니다.

이게 애굽식 사고이거든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바느하스가 블레셋과 전쟁을 하면서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간 것도 다 이런 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에요.

이들은 과거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법궤가 능력을 발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과거에 경험은 곧 법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 그러면 아! 전쟁에서 싸우는 하나님이 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법궤만 있으면 이긴다” 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법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다가 생각 난 것입니다.

전쟁에서 지니까 갑자기 법궤가 생각이 난 겁니다.

 

아! 그렇지 법궤가 있잖아!

그리곤 법궤를 전쟁터에 들고 옵니다.

너희들 이제 다 죽었어!

군사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러자 저쪽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진에서 나는 환성을 듣고 저 놈들 왜? 저러느냐고 합니다.

정탐꾼을 보내서 알아보니 법궤가 진중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블레셋 군대가 법궤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아연실색을 합니다.

 

아이쿠 이제 우리 죽었구나!

낙심천만 합니다.

자기들도 법궤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블레셋이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한 사고의 신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니 블레셋이나 다 똑 같은 놈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가 침묵을 합니다.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입니다.

법궤가 이스라엘의 장단에 춤을 춰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멘붕이 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던 법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궤가 왜 침묵을 하였나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고착화 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우상성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과거에 경험한 것을 현재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애굽적 신앙이거든요.

 

애굽의 신은 예측 가능한 신이에요.

자기들의 정성에 따라서 움직여 주거든요.

애굽의 신은 내가 비는 것만큼 움직여 주어요.

 

애굽의 신은 우리 장단에 춤을 춰 주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장단에 춤을 춰 주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식의 공식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신을 섬기던 것을 고집하는 자들 입장에서는 환장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 너희는 너희 인생을 예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그냥 내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 오라는 겁니다.

이게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정지하면 거기다 성막을 치고 살았어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움직일 때까지 말이에요.

구름 기둥의 움직임에 따라서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광야 길은 자기 계산으로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애굽식으로 살면 큰일 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거기서는 절대로 너희들 계산으로 살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애굽과 가나안의 땅은 다른 땅이라고 알려 줍니다.

 

신명기 11장을 봅시다.

 

신 11:10-21=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모세는 지금 가나안으로 들어갈 백성들에게 애굽과 가나안의 차이를 말해 줍니다.

가나안은 애굽과 다르다고 합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애굽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 나일 강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길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물을 가둘수가 없어서 자기 방식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는 하늘을 쳐다 볼 필요가 없어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지으면 되어요.

예를 들어서 비가 안 와서 밭에 물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나일 강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밭에 물을 주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나안 땅은 물을 저축 할 수가 없는 땅이에요.

거기는 산악지대로서 비가 오면 다 흘려 내려요.

애굽식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농사를 지으려면 하늘만 쳐다보아야 해요.

즉 하나님께 믿고 맡겨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 조급하여 애굽에서처럼 하면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 없다고 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살라고 이마에도 율법을 써 붙이고 손목에도 율법을 써 붙이고 다니라고 하는 겁니다.

즉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가나안에서는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르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너희 방법으로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경험된 것을 가지고 살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나안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해요.

언제 비가 오고 언제 가뭄이 들지를 몰라요.

그래서 가나안에서는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난 후 광야 사십년 동안 매일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어도 신경질을 낸 이유가 뭔 줄 아세요.

내일을 예측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아 두어야 인심이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를 하루치만 주고 있어요.

한 달 치씩 주든가 아니면 일주일 치라도 주던가 하여야지 안심이 되는데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손에 뭔가 붙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어요.

자기 손에 없으면 없다고 생각해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있다고 해요.

이게 역사적 사고에요.

 

역사적 사고에는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보이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으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묵시적 사고에요.

 

믿음이란? 맡기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맡기는 거에요.

오늘도 주셨으니 내일도 주시겠지 하고 맡기는 겁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내일을 믿을 수가 없어요.

오늘은 만나를 주고 내일은 안 줄지 어떻게 압니까?

혹시라도 하나님이 내일에 기분이 나빠 삐져서 만나를 안 주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게 되어요.  

그러니 손에 붙잡은 것이 없으면 불안 한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경험되지 않은 것은 불안해요.

손에 있는 것을 보고 믿는 것은 경험이라고 하고,

손에 없는데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해요.

 

믿음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하나님도 눈에 보여야 안심이 되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꾸만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신전을 짓는 겁니다.

목사라도 있어야 안심이 되어요.

목사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정을 하고 따라야 안심이 되어요.

믿음 없는 자들에겐 교회나 목사는 신적 존재에요.

그래서 이단들이 생기고 교주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교인들에게는 교회와 목사라는 것이 예측 가능한 신이 되었어요.

 

교인들이 목사를 추종하는 이유는 목사가 보이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없으면 은혜를 못 받는 줄 알아요.

목사가 성경을 해석해 주어야지만 말씀을 깨닫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곧 우상성이에요.



노파심에 말씀 드리지만 이것은 교회 무용론을 말하거나 목사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 속에 있는 우상성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속에 있는 우상성이 교회와 목사를 신격화하여서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건 아니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오해해서 그래 그러니까 교회 갈 필요가 없고 목사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우리끼리 하면 되지 라고 무교회 주의로 빠지면 안 되어요.



교회나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귀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릇된 것은 따르면 안 되어요.

마귀는 항상 교히를 타락케 하고 목사를 경시하도록 미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특정인을 추종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그럼 성령이 감동을 하시면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겠지요.

성도는 모두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에요.

그럼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세요.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우리 안에 기름 부음이 거한다고 하지요.

이는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말이에요.

성령이 왜? 우리 안에 내주 하십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이에요.

 

그러니 어느 특정한 목사가 성경을 해석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면 안 되어요.

그 목사가 없어도 주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믿음이 있으면 목사가 있으나 없으나 걱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목사가 없으면 불안하고 보이는 목사를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그 사람에겐 그 목사는 곧 우상이 되고 말아요.

 

제가 지금 목사님들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특정한 목사를 통해서만이 성경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목사 추종론을 경계하는 말이에요.

어느 목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럼 여러분은 그 목사에게 가두어지게 되어요.

그러면 그 목사는 여러분의 영원한 스승이 되고 여러분은 그의 꼬붕이 되는 겁니다.

 

어느 목사를 추종하게 되면 그 목사의 말이 진리가 되어요.

그 목사가 성경을 해석해 주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그 목사를 통해서만 성경을 해석할 수가 있어져요.

다른 사람이 말하면 거부하게 되어요.

그 목사의 말 이외는 다름 사람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이러면 결국 그 목사의 말만 진리로 따르게 되는 사이비 신앙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다 이러한 바탕에서 출발을 해요.

왜 이단들에게는 항상 교주가 생깁니까?

사람들이 추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은 반드시 어느 특정한 사람을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추종하는 것입니다.

교주들은 특별한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 특별한 것이 기적일 수도 있고,

탁월한 지식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화려한 언변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스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사람은 미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아요.

베뢰아 교인들처럼 성경이 그러한가 늘 성경을 상고하게 되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스승으로 주셨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목사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세요.

 

내가 창세로부터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자라고 하면 주께서 반드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고 말씀이 깨달아지도록 해 주세요.

우리를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럼 그 하나님이 반드시 영생을 주시고야 말아요.

말씀이 깨달아지고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겐 천둥소리로 들려요.

오직 바울에게만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이는 바울이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자라고 하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하나님께서 들어야 할 것은 듣게 하시고 듣지 못할 것은 듣지 못하게 하세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앉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이걸 믿으세요.

 

어느 특정한 교회나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 안에 빛이 없다는 말이에요.

빛이 없으니 사람을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빛이 있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아요.

분별해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을 보세요.

다 어느 특정한 사람의 말을 추종하잖아요.

그 사람의 말만 진리라고 하잖아요.

하는 짓이 전혀 아닌데도 그것이 진리라고 따라요.

 

대표적으로 이00나 정00이나 문00이를 따르는 자들을 보세요.

이러한 부류들이 지천에 깔려 있어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류의 집단들이 많이 있어요.

바깥에서 보면 전혀 아닌데도 본인들은 몰라요.

남에 말을 안 들어요.

이는 어둠이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하여도 따르지 말고 저기 있다 하여도 미혹당하지 말라고 했어요.

골방에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말고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어디 특별하다고 하는 것에 미혹당하지 말란 말입니다.

 

어디에 누가 복음 잘 전한다더라 거기 가야만 한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의 눈에 사람이 보이면 당신은 지금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에요.

사람을 스승 삼지 말고 성령을 스승으로 삼고 사세요.

 

아니 예수가 믿어지면 되잖아요.

어디 성경 많이 알아야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예수가 믿어지면 되잖아요.

 

예수가 믿어지는 것은 성경 많이 아는 것과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그냥 믿어져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가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세요.

 

성도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에요.

우리가 애쓰고 따내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가만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자기 백성을 다 찾아내세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나 잃은 양을 찾는 비유를 보세요.

주인이 찾아내고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서 데리고 오잖아요.

그들이 언제 노력했나요.

주인님 나 여기 있어요! 라고 했나요.

아니에요.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데 주인이 쓸고 닦고 해서 찾았고 목자가 찾아왔어요.

 

내가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라고 하면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내세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이게 안 믿어지니까 미친년처럼 쫓아다니다가 이상한 놈을 만나고 이단에 빠져서 패가망신을 당하고 심령이 강퍅해지고 악독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면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주어지고 자기 백성 아닌 자에게는 염려해도 구원이 안 주어져요.

그러니 염려는 하나님께 붙들어 매고 안심하고 사세요.

믿음을 받은 자는 절대로 두려워하자 않아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는다고 했잖아요.

사랑 받은 자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요.

그 사랑이 성령이고 예수에요.

 

그러니 신앙에 호들갑을 떨지 마세요.

그냥 어떤 환경에서든지 평온하게 주님께 맡기고 살면 되어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하루 하루 교회 생활 재미있게 하면서 믿고 살면 되어요.

 

비록 성경을 해박하게 몰라도 예수가 믿어지면 안심하고 사세요.

어디 안 쫓아 다녀도 되어요.

그 속에 빛이 없으니 빛을 찾아다닌다고 설레발을 떠는 겁니다.

빛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빛에 거하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빛은 바깥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오시면 빛을 몰고 오세요.

그러니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빛을 찾아다니지 않아요.

빛 안에서 살아요.

빛이 들어오면 자연히 빛에 거하게 되어요.

그 빛이 어둠에 다니지 않게 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여요.

 

그러니 어디 특정한 교회나 특정한 목사의 말씀을 들어야지만 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그 생각이 곧 애굽적 사고에요.

목사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교회에 가서 어떤 목사에 말씀을 들어야지만 은혜가 된다고 하는 그런 역사적 사고의 신앙관을 경계하는 말이에요.

 

이런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에 교주가 생기고 사이비 집단이 생기고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이 이렇게 생겼어요.

자기 집단이나 자기 교회에만 진리가 있다고 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이런 자들이 이단 되기 십상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경계하고 이해하고 들으세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생각에 가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생각에 가두면 그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 생각에 조정 당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아는 하나님으로 믿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경험 속에 가두어지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장악 당하게 되어 있어요.

내 경험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예측하게 되어요.

 

아! 지난번에 이렇게 하여서 복을 받았고!

저렇게 해서 저주를 받았지!

그럼 이제는 저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하여야겠구나!

그래서 경험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일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동일한 방법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에요.

쉬운 말로 지난번에 이렇게 해서 병을 고쳐 주었으니 오늘도 이렇게 하면 병을 고쳐 주시겠지 라고 하면 더 아프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만든 공식을 깨트리기 위함이에요.

 

신앙엔 비결은 없어요.

신앙은 은혜로 하는 것이지 비결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비결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은혜는 예측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비결 신앙을 따라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겐 방법론이 제일 좋아요.

그것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수 많은 비결 신앙이 난무하고 있어요.

 

복 받는 비결,

은혜 받는 비결,,

구원 받는 비결,,,

 

이러한 비결 신앙들이 난무하는 것은 삯꾼 목사들이 고객 관리 차원에서 종교적 서비스로 교인들에게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 것이에요.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 불편함을 덜어 주려고 이렇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믿음이 있는 줄 착각에 빠져요.

신앙은 배우고 익히는 학문적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신앙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만들어 낼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요.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지식의 습득이지요.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목사가 가르쳐준 지식을 습득하면 그게 믿음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해요.

그건 믿는 척 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측 가능한 시스템을 주어야 움직여요.

자기 생각에 맞아 떨어져야 신을 섬겨요.

이러면 신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시다바리(시종)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이게 아담 안에서 난 죄인들이 신을 섬기는 특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감지 할 수 없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아담 안에서 신을 섬기던 방식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기 안에 가두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에요.

예측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우리 쪽에서 끌어당긴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원인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삯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삯으로 일하지 않아요.

은혜로 일 하세요.

 

그래서 하늘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니까 우리 인간 쪽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한 겁니다.

언제 주실지 모르잖아요.

언제 주실지 모르니까 우리 쪽에서 어떤 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장단에 춤을 춰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아 합니까?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어요.

에라~ 모르겠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이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아주 쉽죠.

 

그런데 이게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불 가능해요.

아주 쉬운데도 아주 불가능해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지 않으면 자꾸만 자기 경험을 끄집어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경험된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겁니다.

“난 이런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배척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도 가짜인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세요.

그것이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 생각대로 움직여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세요.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오빠가 병에 걸리자 예수님을 초대해서 고쳐 달라고 하잖아요.

이건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에요.

그러니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경험된 예수가 있어요.

그 예수는 자기들이 병 들었을 때 고쳐주는 예수에요.

 

마르다와 마리아는 과거에 경험된 것을 현재도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뜻에 반하는 방식으로 나사로를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 펄쩍 뛰는 겁니다.

 

이건 마르다와 마리아가 바라는 믿음이 아니에요.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면 예수님이 얼른 와서 고쳐주어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았어요.

그러니 신경질을 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고 나흘 만에 가니까

가시나들이 찬바람이 쌩쌩 돌고 예수님을 싸늘하게 대하잖아요.

흥~ 하면서..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이미 끝나고 다 지났는데!

오라고 할 때는 안 오고..

왜? 지금 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일찍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터인데 늦게 와서 죽었다고 원망하잖아요.

이게 마르다와 마리아 속에 법으로 새겨진 예수에요.

이 예수는 바로 우상이에요.

 

유대인들도 이런 예수를 가지고 있어요.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을 양식을 만들고!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을 잔잔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의 예수에요.

 

그래서 예수에게 끊임없이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게 없다고 하지요.

즉 예수님 자신이 요나처럼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너희들 손에 내가 죽임 당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신관이 결국엔 하나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신관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어요.

 

신앙에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아세요.

과거에 하나님을 현재화 시켜서 믿는 거에요.

이걸 예측 가능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건 믿음 없어도 돼요.

과거에 경험한 그대로 하면 되니까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병이 들어서 사십일 금식해서 병을 고쳤다고 합시다.

그럼 지금도 병들면 사십일 금식하면 된다고 생각을 해요.

이게 법이고 예측 가능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상숭배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옛날에 하였던 그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동원하는 거에요.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자기가 그동안 경험하였던 것은 방법론으로 축적해 놓은 행위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어요.

믿음은 미래적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에요.

약속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약속은 아직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약속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내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게 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된다고 했어요.

 

죽어도 감사!

살아도 감사!

망해도 감사!

흥해도 감사!

병들어도 감사!

나아도 감사!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감사에요.

예수님 자체가 감사이고 기쁨이고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예수 안에서 아무 염려가 안 되고,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어요.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내가 매를 맞으면 아! 사람들이 주님을 때리는구나 생각하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이단이라고 하면!

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이단이라고 하는구나! 생각하고!

내가 당하는 모든 것은 주 안에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수와 내 인생을 따로 보지 말로 하나로 보세요.

우리의 삶을 예수님과 따로 분리하지 마세요.

내가 주 안에 있고 주가 내 안에 있어요.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살면 인생이 가벼워져요.

 

그렇지 않고 자기와 예수님을 분리해서 살면 만사가 힘들고 짜증나요.

자기가 생각하는 인생을 만들어 가려고 하면 힘이 들어요.

그냥 내 생각을 빼 버리세요.

내가 사는 모든 것이 주께서 일으키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편해요.

 

그렇지 않고 자기가 그려 놓은 인생이라는 그림에 맞추어가고자 하면 힘들어요.

맞추어지지도 않아요.

자기 마음에 충족 되지 않으면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요.

급기야 그 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리는 그림에 예수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리는 겁니다.

이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는 자기들이 짓고자 하는 집에 재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집을 짓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율법신앙을 허문단 말입니다.

예수가 자꾸만 어이~ 바리새인씨!

집은 그렇게 짓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넌 뭐냐! 라고 하면서 골고다에 갖다 버린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그리고 있는 하나님 상을 깨트려주어야 하잖아요.

그게 안 깨어지면 계속하여 그 짓을 할 것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죽여주어야지요.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 속에 있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셨다”고 하는 겁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뜨리게 하는 돌이란 말이에요.

가만히 두면 애굽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엎어치기 하게 하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그에 반하는 모습으로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겁니다.

예수를 죽임으로서 죄 가운데 가두는 일을 하시고 계신 거에요.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자기들이 아는 메시야는 이런 메시야가 아니란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이 안 하나님은 자기들 편을 들어주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데 유대인들을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신앙을 지금 우리가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자꾸만 하나님이 내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모두가 자기가 아는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누구 중심의 하나님 관이냐! 하면 자기중심의 하나님 관이냐! 에요.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예수를 내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편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날마다 찾아다니고 있어요.

우리 몸뚱이 중심의 하나님을 믿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옛날에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었는데 지금은 왜 안 주시지 하면서 자꾸만 방법론을 구한단 말입니다.

 

방법론은 법이지 은혜가 아니에요.

은혜는 방법이 없어요.

은혜는 우리 쪽에서의 행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행하여서 받아낼 방법이 없어요.

 

신앙생활에는 방법이 필요가 없어요.

받은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믿음으로 사니까 무조건 은혜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 죄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측 시스템을 붕괴하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이게 낯선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생각을 비껴가시면서 일을 하니까

우리 안에서 짜증이 나는 겁니다.

요놈에 짜증이 바로 죄라고 지적을 하는 겁니다.

너 왜? 짜증내는데!

 

짜증을 낸다는 것은 곧 자기 계획이 틀어졌다는 뜻이에요.

자기 꿈이 깨어졌다는 거에요.

그러니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래요.

너 왜? 화를 내는데,,,

지음을 받은 물건이 왜? 지으신 분이 쓰는데 불평을 하느냐고,,,,

 

예전에 “동갑내기 과외” 라는 영화를 보면 김하늘이가 권상우에게 “나는 선생이고 넌 제자야” 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둘이 동갑이에요.

그런데 김하늘이는 대학생으로서 과외 선생이고, 권상우는 재수생으로 제자에요.

 

그런데 권상우가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과외 선생인 김하늘이에게 동갑내기라고 하면서 자꾸만 장난을 치고 수작을 거는 겁니다.

그래서 과외 선생인 김하늘이가 “야! 난 선생이고 넌 제자야!” 라고 해요.

난 너와 급이 다르단 말이에요.

까불지 말라는 거에요.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고 계세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하나님 왜? 내 인생이 내 맘대로 안살아 집니까!

내 인생에 좀 태클을 걸지 마세요! 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야! 이 놈아!

넌 피조물이고!

난 창조주야!

 

이게 어따 대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런데 우리가 고분고분 하나요.

아니에요.

권상우처럼 말을 안 들어 쳐 먹어요.

도리어 대들어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다구요.

이 웬수들이!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원자를 죽였단 말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나요?

이 모순을 극복하지 않으면 신앙이 종교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종교와 신앙은 달라요.

 

종교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는 것이고,

신앙은 신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신에게 선택을 당하는 것이에요.

종교에서 신을 찾는 것은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하지만, 신앙은 내 것을 빼앗기는 일을 당해요.

 

종교의 근본 바탕에는 내가 있지만, 신앙의 근본 바탕에는 신이 있어요.

종교에서는 내가 주인이고 신이 종이에요.

그러니 신앙에는 내가 종이고 신이 나의 주인이에요.

 

예수가 종교가 되면 수단이 되어서 죽일 이유가 없어요.

그냥 적당히 섬겨 주고 내가 챙길 것을 챙기면 되어요.

그러나 예수가 신앙이 되면 이건 복잡해져요.

왜냐하면! 내 것이 빼앗기게 된단 말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게 되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종교로 접근을 하는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유대인은 예수를 통해서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을 빼앗고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예수가 자기들 인생을 힘들게 하는 행악자로 보인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자를 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강도처럼 쳐 들어와서 자기들의 인생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신앙으로 자기 유익을 챙기고 살았어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 잘난 사람으로 존경도 받고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가 와서 자기들의 꿈을 산산조각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율법신앙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좋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저 놈은 우리 것을 빼앗아가는 깡패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 발각 당하는 일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죄를 숨기려고 하고 하나님은 까발려요.

우리는 우리 마음을 감추려고 하고 하나님은 들추어내요.

 

어떻게 들추어내는가 하면 우리 안에 죄가 좋아하는 것으로 끄집어내요.

마치 이이제이와 같아요.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오랑캐를 가지고 오랑캐로 무찌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죄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죄를 미끼로 사용을 하신단 말입니다.

즉 죄를 가지고 죄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다윗이 여기에 걸려들었잖아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백주대낮에 다윗의 눈 앞에 여자가 목욕을 하게 만들었어요.

벗은 밧세바를 보자 다윗 속에 숨어 있던 음욕이 발동하기 시작을 하였어요.

남자가 벗은 여자를 보고서 음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에요.

다윗은 본능적으로 행하였어요.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요.

 

먹을 때는 입에 달콤했는데...

막상 먹고 나니 쓰디 쓴 겁니다.

이 여자가 덜컹 임신했네요.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이 일을 수습하려니까 보통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죄는 달지만 그 열매는 쓰다고 하는 겁니다.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그런데 먹고 나면 죽어요.

죄가 그래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죄가 우리에게 달콤한 신앙을 추구 하도록 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주어요.

 

마귀가 우리에게 다정하게 다가와서 니가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

하나님 아들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그건 하나님 망신시키는 거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잘 살아야지!

성공해서 보란 듯이 살아야지 사람들이 우러러 볼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자기 말만 들으라고 합니다.

자기가 다 책임져 주겠다고 합니다.

결국 마귀의 말을 들으면 죽게 되는 겁니다.

 

암튼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 할 때는 달콤했어요.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어요.

간음 사건을 덮으려다가 밧세바의 남편인 충신인 우리야를 죽이는 일로 발전을 하고 말았어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박게 생겼어요.

이러한 사실이 들키면 왕의 직무를 수행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요?

들키면 왕으로서 개망신이잖아요.

군사들은 지금 한창 암몬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 왕이라는 놈이 남에 마누라를 빼앗아 버렸으니 졸지에 폭군이 되고 말잖아요.

그것도 전장에서 유명하게 싸우는 장군의 부인을 빼앗았으니 얼마나 나쁩니까.

이건 탄핵감이에요.

 

이러면 왕의 영이 서지 않아요.

영이 서지 않으면 나라가 붕괴되어요.

그럴 순 없잖아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그래서 자기를 지키기에 앞장섭니다.

어떻게 지키는가 하면 간음 사건을 감추기 위하여 나라를 지키려고 전쟁에 나간 그 남편인 우리야 라는 장수를 죽이는 것으로 지켜요.

우리야는 다윗의 간음을 감추기 위하여 죽임 당했어요.

이건 오늘 본문에서처럼 대 제사장이라는 자가 자기 탐욕을 위해서 예수를 죽이는 것과 같아요.

 

아주 웃기지요.

아니~ 나라를 잘 지키는 장군을 죽이면 우짭니까..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키는데,,

 

다윗은 지금 나라 걱정은 안중에도 없어요.

어떻게 하든지 자기 체신머리를 지켜야 해요.

그래야 백성들 위에서 큰소리치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완전히 묵사발 내는 일을 하십니다.

다윗이 은밀히 행한 것을 하나님은 온 나라에 공포하고 맙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완전범죄를 확 까발리지요.

 

니가 왕이냐!

왕이라는 놈이 그래 자기 간음한 것을 숨기고자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장수를 죽이느냐!

그러고도 백성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넌 왕 자격이 없는 놈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언제 니가 왕 자격이 있어서 왕이 되었느냐!]

넌 원래 양치기였어!

 

양치기 주제에 하나님 은혜로 왕이 되었으면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하나님 나는 나라를 못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다스려 주세요!

양치기 주제에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린단 말입니까!

못합니다!

 

보세요.

욕정 하나 참지 못하고 이런 죄를 짓고 마는 자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으니 용서 해주세요!

나 왕 안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 시켜 주세요! 라고 했어야 하여야지요.

 

그런데 다윗은 왕 노릇 조금 하더니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를 잊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확 까발리는 일을 하신 겁니다.

왕 자격이 없는 놈이라는 것으로 말이에요.

결국 하나님은 죄를 가지고 다윗 속에 있던 죄를 끄집어 낸 것입니다.

넌 이런 죄인이라고 알려 주신 겁니다.

 

그리고는 왕 직을 박탈하지 않고 그대로 왕 노릇하게 합니다.

이건 완전히 쪽 팔리는 일이에요.

다윗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에요.

 

흠 많은 자가 왕 노릇을 해 보세요.

신하들이 수군거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쪽 팔리겠어요.

하나님은 마음껏 쪽 팔리라고 다윗의 왕권을 박탈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게 하신 겁니다.

 

네가 왕 노릇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실감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기 후궁을 백주 대낮에 겁간을 해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다윗이 범죄를 했지만 왕이에요.

하나님의 긍휼로 왕 노릇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놈이 당신 그러고도 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따지면 그 놈은 죽여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다윗에게 왕의 자격을 따지는 그 놈도 자기 꼬라지를 근거로 해서 따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약에 다윗처럼 범죄 했다고 하면 못 따지겠지요.

자기는 간음 안 했다고 하니까 따지는 거잖아요.

이게 하나님 앞에서 죽일 죄에요.

자기 행위를 근거로 죄다 아니다 를 따지는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항상 자기 행위를 근거로 죄다 아니다 를 보게 만들어요.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보는데,,,

마귀는 인간의 행위로 죄인이 안 되게 하는 일을 한단 말이에요.

즉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으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을 하나 안 하나 죄인으로 보고, 간음을 하나 안 하나 죄인으로 보는데!

마귀는 인간의 행위로 죄다 아니다로 판단하게 한단 말이에요.

여기에 걸려들면 자기 행위를 신앙의 근거로 붙잡게 되어요.

 

이걸 율법지킴으로 보세요.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 하고 안 지키면 죄인이라고 하잖아요.

결국 자기 행위로 죄인이 되었다가 의인이 되었다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의 행위를 가지고 당신이 어떻게 왕이야! 라고 따지는 그 놈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놈들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들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로 세워져가는 나라에요.

그들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세워져 가는 나라에요.

여기에 가장 잘 맞는 왕이 다윗이에요.

 

왕 자격이 없는 자를 왕을 삼았고,,,

왕 삼아 놨더니 남에 여자를 뺏기나 하고 충신을 죽이는 그런 짓 거리만 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런 자가 왕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난 왕 자격 없습니다! 를 보여주기 위하여 세워진 자에요.

행여라도 자기에게 무슨 근거라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죽임당할 죄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난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난 복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니가 과연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인지, 없는 자인지 내가 알려 줄게!

그리고는 우리 안에 있던 죄를 확 까발려 버리는 일을 하세요.

 

복은 고사하고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우리 일생이 이렇게 살아지도록 되어 있어요.

일평생 우리 안에 죄가 폭로 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도 이런 과정을 걷고 있는 겁니다.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서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에 가두어 놓고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에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거든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지금 예수님을 행악자로 취급을 하여서 죽이게 되는 것은 모두가 죄인을 만들기 위한 수순인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낱낱이 끄집어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날개로 감싸주고 덮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가 들추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덮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죄를 끄집어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이 이렇게 고약한 인생이에요.

우린 우리 가치를 챙기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무가치한 자로 만들어 버려요.

난 괜찮은 인간이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넌 사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해요.

 

다윗의 말년을 보세요.

그만큼 하나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면 잠자코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내일 모래 죽을 놈이 인구 조사 한다고 시건방을 떨잖아요.

 

인구 조사를 한다는 것은 자기 공로 챙긴다는 말이에요.

야! 내가 이렇게 정치를 잘해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죄에요.

 

천국에는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가는 곳이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막게 해서 천국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러한 과정을 밟게 되어 있어요.

믿음 있는 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로 드러나게 되어요.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고 이용하려는 자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만들어요.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만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자기 자신에게 점점 절망하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나중은 창대 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시작은 창대 하였는데 나중은 망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가면 갈수록 자기를 포기하게 되어 있어요.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어요.

그리하여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어요.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방법이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도 갈수록 초라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만 크게 보여지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렇게 살아도 죄인이고 저렇게 살아도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 행위로 인하여 잘났다고 꼴값을 떨지도 말고 못났다고 낙심하지도 마세요.

이러나 저러나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자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갈수록 깨닫는 것이 참으로 나는 형편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란 것을 살아가면서 절감하게 되어요.

할 말이 없어지게 되어요.

 

그리고 내가 한 일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요.

예전에는 복음 전한다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느꼈는데 이젠 그것도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거저 주셔서 하는 것을 마치 내가 한 것이라도 되는 냥 거드름을 피웠구나 를 생각하게 되어요.

나는 점점 쪼그라들고 하나님의 은혜만 크게 덮쳐 오는 것을 느껴요.

내가 산다는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와요.

 

신앙생활이라는 게 말이에요.

처음에는 믿음이 엄청 좋은 것이라 생각을 하다가 하면 할수록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내 안에 선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어요.

나는 진짜 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주여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되고!

그리하여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 길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어떠한 일에 처하더라도 주의 긍휼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구원자를 행악자라고 죽일 수밖에 없는 이런 악당을 오늘도 주의 은혜를 보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얼굴이 뜨뜻해서 감히 주를 쳐다보기에도 민망합니다. 하지만 또 쳐다봅니다. 어린아이가 어미의 젖을 사모하듯이 주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합니다.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주시고 주만 바라보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구하게 하시고 주만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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