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성경강해)1강. 믿음의 본질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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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2022. 1. 2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강. 믿음의 본질 (히 11:1-3)

-.정낙원 목사

 

히 11: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오늘은 히 11장이 말하는 믿음에 대한 특강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특강을 하기 전에 알려 둘 일이 있습니다.

 

군인들을 상대로 실험한 결과입니다.

행군을 하는데 어떤 때가 가장 힘든가? 라는 실험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실험입니다.

 

첫째, 행군을 하는데 오늘은 확실하게 몇 km를 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둘째, 30km로 행군을 한다고 해 놓곤 40km를 했습니다.

셋째,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행군을 하였습니다.

 

어느 때가 가장 힘이 들고,

어느 때가 가장 쉬웠느냐 고 물었습니다.

목적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행군 할 때가 가장 쉬었고,

어디를 얼마나 가는지를 모르면서 무작정 행군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연구를 해보니 첫째 시험처럼 분명하게 몇 km를 간다고 하면 머리가 그것을 입력하여 몸에 전달을 하면 몸이 거기에 맞는 에너지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머리가 정보를 수집하여서 입력된 정보를 몸에게 주면 몸이 알아서 아! 오늘 어느 정도 힘을 써야겠구나? 계산하여 알아서 거기에 맞는 에너지를 사용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시험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간다고 한 곳까지는 잘 갔는데, 더 간다고 하니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몸이 간다고 한 것보다 오버를 하면 그 시점에 도달하면 몸이 이상징후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점을 지나면서 급격하게 에너지가 저하되어 힘들어진다고 합니다.

마치 늘 밥을 먹는 시간에 밥을 먹지 않으면 갑자기 허기를 느끼는 것과 같답니다.

몸은 그 시간에 밥이 들어 올 것을 기다리는데 제 때 안 들어오면 왜? 안주느냐고 꼬로록하며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게 되면 처음부터 몸이 긴장을 하여 가면 갈수록 지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몸이 정보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하여 긴장을 하니 세포들이 경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한 마음에 정신과 육체가 지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자식이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콩닥거리면서 좌불안석하는 상태로 있다가 막상 들어오면 맥이 풀리고 화가 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몸은 과학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설교 시간 서두에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설교가 특강이라서 좀 길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특강이라서 약 두 시간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을 드려야 몸이 정보를 입력하여 거기에 맞도록 컨디션을 조정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길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이 오시면 커피도 타 잡수시면서 긴장을 푸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약 두 시간 정도 성경 속으로 푹 빠져 드시기 바랍니다.

 

그럼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시다.

교인들마다 믿음 믿음 하는데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내어 놓는 믿음하고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을 죄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죄가 알려주는 정보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죄가 알려준 정보로 알아진 하나님이므로 가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가짜 하나님”을 “다른 신(神)”이라고 하고 또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들 머릿속에는 “다른 신” 이 입력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다시피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교육을 받고,

애굽에서 자란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은 죄악된 세상을 말합니다.

애굽에 산다는 것은 죄가 알려준 정보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에 정보는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틀린 것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기껏 하나님을 안다고 하여도 애굽 지식으로 아는 것 밖에 없어요.

애굽의 사고를 죄라고 하면 죄로 알아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죄로 알아진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거짓 하나님입니다.

 

애굽에 정보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틀린 사랑인 겁니다.

애굽에 정보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여도 틀린 믿음이고 틀린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가 입력시켜준 정보로 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시켜서 광야에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다른 신을 뽑아내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입력되어진 가짜 하나님을 뽑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즉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자리에 참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서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이 곧 마귀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자신들이 마귀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거짓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섬겨온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빼낸 이유가 그것입니다.

 

애굽에 정보를 다 삭제하고 새로운 정보를 입력시키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알고 있던 하나님과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다른 하나님인가를 광야에서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전혀 낯선 하나님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나를 죽이려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경악을 합니다.

 

그러니 당황하고 사사건건 불평이 쏟아지고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런 하나님이라면 죽이겠다고 모세에게 돌을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 섬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홍해 바다를 건너 온 그들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홍해바다는 인간의 재주로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 남은 것은 광야에서 자기 속에 입력된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을 뽑아내고 모세에게 나타난 그 참 하나님을 입력시키는 길 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려보내 주면 편한데 돌려보내 주지도 않고 개인 교습을 시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 오려고 죄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어린 양의 피가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속에도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피가 발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꼬라지가 이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귀에게 빼내 오려고 예수님과 바꾸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성도를 볼 때 마다 누구를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생각해요.

그러니 가만 둘 수가 없지요.

 

우리는 자식을 금(金)이야 옥(玉)이야 키워 왔습니다.

강보에 쌓인 피 덩어리를 지금까지 모든 정성을 다해서 키워왔습니다.

그런데 자식 놈이 농약병을 들고 마시고 죽겠다고 한다면 그래 잘 죽어라 할 부모가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 아닙니까?

 

이 놈에 새끼가 무슨 짓거리를 하느냐?

내가 너를 지금 뒈지라고 키워 온 줄 아느냐? 라고 길길이 날뛰지 않겠느냔 말이지요.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너 죽는 꼴은 못 보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이와같이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죽을 권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피가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 구원을 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마귀가 와서 하나님에게 저 놈은 진짜 더럽고 나쁜 놈이거든요! 라고 해도 하나님은 너 저 아이 때문에 내 아들이 죽은 것 모르느냐! 라고 합니다.

저 꼴 같지 않은 인간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그래 마귀 너 말대로 저 놈 지옥 보내면 내 아들은 개죽음 당한 것 아니냐!

난 그럴 수 없다!

저 놈을 천국에 데려다가 영원토록 부려 먹으면서 본전을 빼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귀가 참소해도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집요한 하나님의 고집 때문에 성도의 구원이 중도에 포기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느냐 말입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이 이와 같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애굽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하나님이 너무 많이 투자를 했거든요.

그 투자금을 회수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붙잡고 패가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의 길은 자기 안에 죄를 몽땅 끄집어내는 세월을 산 것입니다.

광야 사십년이란? 우리 일생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사 전부는 내 속에 꼬깃꼬깃 숨어 있던 죄를 토하여 내는 일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엔 내가 이렇게 악한 죄인인줄 몰랐는데 하루하루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만큼 내 죄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고난인 이유는 날마다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상고하여야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함입니다.

아! 나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그 인간이 아니구나!

난! 죄인이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 지른 그 유대인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 때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잘살든 못살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대로 살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일평생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가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가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나아가 들면 들수록 부모님을 더 깊이 아는 것처럼 성도 또한 믿음으로 사는 날 수가 많을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아는 성도일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깊어지고 많아집니다.

 

성도는 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부대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많이 알수록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가 있어집니다.

 

자기 혼자 살기 위해서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었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어지기까지는 수많은 실수와 부대낌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철이 들기까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열심히 간섭하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간섭하시지 않았다면 여기에 계실 분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부터 말입니다.

 

저는 목사가 될 사람도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할 자가 아니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58세에 어머니가 47세에 낳았어요.

즉 할아버지 할머니가 낳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삭처럼 없는 자인데 있게 된 것이지요.

 

더군다나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서도 이런 목회를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열심히 한국 교회를 개혁하고 반듯한 교회를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창세전 언약이라는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태어날 수도 없는 자였고,

목사도 꿈 꾸지 않은 자가 목사가 되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간섭해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만큼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이 쉬지 않고 간섭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흔히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場)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 시대 믿음에 사람들의 역사를 짧게나마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히 11장의 기록된 사람들을 일컬어 믿음에 “거성(巨星)”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이들의 삶을 본받을 것을 설교로 강요합니다.

 

이들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면 성도들은 기가 죽어 버립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사람들과 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대로라면 히 11장의 사람들은 초인(超人)적인 삶들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은 부담스러운 큰 짐으로 남게 됩니다.

구원 받음에 대한 기쁨은 사라지고 어떻게 살지? 라는 고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히 11장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채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구원하심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되어야 함에도 아! 나는 언제 저런 사람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느냐? 라고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러한 설교는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또한 성경이 바라는 신앙도 아닙니다.

 

완전하고 바른 사람이 되려고 고민하지 마세요.

그러면 실수 하면 낙심하게 됩니다.

죄인이 낙심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마치 돼지가 흙탕물에 뒹군다고 자책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은 낙심할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 속에는 의가 없고 온통 죄만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삽시다가 안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갓난아이를 키워보면 압니다.

 

엄마가 밥을 먹여주면 굳이 자기가 퍼 먹겠다고 숟가락을 달라고 하지요.

안주면 울고 해서 귀찮아서 그릇에 담아 옆으로 밀어 퍼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온 얼굴에 범벅을 해 놓고 난리입니다.

그걸 엄마는 너 왜 이렇게 했느냐 하지 않아요.

바랄 걸 바래야지,,

엄마가 밥을 주면서 흘리지 말고 먹으라 하는 것은 흘리지 않기를 바램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너는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도 뭘 바래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넌 이런 것도 못하는 놈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올바른 행함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올바른 행함을 요구한다면 인간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올바른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인간의 몫으로 두지 않고 하나님의 소관에 두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간섭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자기 식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는 가짜 예수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행함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문둥병이나, 중풍병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풍 병자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 노는 게 중풍병자입니다.

 

죄인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와 같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 된 병자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으로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물이 동하면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것을 알아도 그림의 떡입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그저 바라만 볼뿐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38년 동안 탄식하면서 못에 물이 동하는 것을 멀뚱히 구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을 거의 다 기록하고 예수님과 방불한 모습으로 살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도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은데 마음 속에 또 다른 법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면서 다가오는 것은 인간에겐 기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것을 성도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 홀로 다 하시는 이유는 그 일을 죄인은 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서 예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성령을 보내서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야!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그러고 말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죄인은 예수님을 믿는 것조차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으니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게 해 줘서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 영적 중풍병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아버지와 아들 간에 둘이서 사바사바해서 뚝딱해 치우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인이라 함은 인간에게선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죄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그것도 잠시도 쉬지 않고 주야장창 뽑아낸단 말입니다.

 

죄인이란? 본성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입니다.

달리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만약에 말씀을 지킬 수 있으면 죄인이라 하지 말고 의인이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참 우습지요.

어째 이 시대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내용과는 사뭇 다르지요.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시간 시간마다 닦달하잖아요.

 

라디오고 TV고 틀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거기에 나오는 목사님들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며 말하잖아요.

아주 심하게 말하면 제가 틀리든지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목사님들이 틀리든지 둘 중 하나는 틀린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해서 죄인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수많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들은 무엇이냐? 라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지킬 수도 없는 죄인에게 지키라고 명령을 할 때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발 하겠지요.

아니! 하나님께서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인간에게 왜 명령하겠느냐?

다 지킬 만하니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못 지킬 것을 뻔히 알고도 지키라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모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갖고 노는 것이라고 항의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인간들을 갖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갖고 놀기 위해서 애당초 지킬 수도 없는 것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명령하신 목적이 다름에 있다는 것으로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생각으로 왜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를 알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면서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앙푼이에 피를 담아서 됐냐! 됐다! 라고 약속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동안 율법을 받을 동안 산 아래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계약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미 계약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적힌 두 돌 판을 깨트린 것입니다.

 

이젠 계약이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하나님 손에 맡겨진 것입니다.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약대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일순간에 삼천 명이나 비명횡사를 합니다.

 

그걸 지켜보던 모세가 하나님 앞을 가로막으면서 저 놈들을 죽이려면 먼저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계약을 어기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 아닌 자가 죄인을 대신하여 죽겠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이에요.

맞아요.

모세의 이런 모습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니다.

모세는 지금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예표적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세의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누구든지 모세의 말을 거역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곤 처음 것과 똑같은 내용을 적은 돌 판을 다시 줍니다.

두 번째 돌 판도 말씀을 지키라는 내용입니다.

이미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준 두 번째 돌 판은 이스라엘에겐 계약을 어긴 증거물입니다.

그래서 영영히 법궤에 담아 보관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법궤에 담긴 돌판을 볼 때마다 “우린 안 되는데요” 라고 해야 합니다.

“이미 못 지켰는데요”라고 해야 합니다.

“한번 잘 지켜볼께요”하는 것은 마음은 가상하지만 악이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 판을 보관하라는 것은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나와 계약을 어겼는데 내가 용서함으로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돌 판을 보면서 할 말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 말 이외에 어떻게 “잘 해 볼께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모르고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키겠다며 살아왔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단한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이미 옛날에 깨어진 것을 계약서라고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을 지킨 것을 의로 붙잡고 있는 놈들을 몽땅 잡아서 지옥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은 율법 지킴을 의롭다고 가르치고 살아온 자들을 저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최고로 율법을 지키며 의인이라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에게 지옥에 갈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 하신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왜 율법을 지킨 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저주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율법을 주신 목적이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고 인간의 입을 막고 너희는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라고 증거해 주었습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위 말씀을 보면 율법을 주신 세 가지 목적을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입을 막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둘째, “너희들은 다 죽었어” 라고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셋째,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너희는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여 난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찍소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렵다느니!

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느냐 라는 둥 불평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율법을 받고도 찍소리 하잖아요.

찍 소리하지 말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찍소리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율법을 주신 목적에 부합합니다.

 

율법의 정답은 오직 하나 “난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난 하나님 요구대로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설교는 모두가 틀린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옳은 설교란? 하나님의 요구는 이러한데 우리는 죄인이므로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우린 이미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죽을 날자만 기다립시다! 라고 해야 해요.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 대신에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십니다.

과거 모세 때문에 용서 해 준 것 같이 지금은 예수님 때문에 용서해 준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아이구! 이게 왠 떡입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주여! 고맙습니다!

난 예수님 때문에 사는군요! 하면서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못 사는 이유는 다 죄가 우리를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죄가 똥고집을 부리게 해서입니다.

사단이 밀까부리듯이 가지고 놀고 있어서 그래요.

 

구약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도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구약에 인간들이 정답을 못 적었으면 신약시대 인간들도 정답을 못 씁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시대를 초월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담 시대 인간이나,

노아 시대 인간이나,

아브라함 시대 인간이나,

예수님 당시 인간이나,

지금 이 시대 인간이나 조금도 다르지가 않습니다.

다 동일한 아담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종말 때 인간들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도 인간들은 홍수가 올 줄을 꿈에도 생각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살았어요.

땅강아지 같이 땅에 것만 파먹고 살았어요.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똑 같아요.

다른 것은 그 시대는 당나귀 타고 다녔고,

지금은 자동차 타고 다니는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옛날엔 움막 짓고 살았고, 지금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옛날엔 손빨래 했고, 지금은 세탁기로 빨래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 때도 밥을 먹었고, 지금도 밥을 먹어요.

옛날에도 병들어 죽었고, 지금도 병들어 죽어요.

노아야 방주를 짓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한다는 소리라야 기껏 해서 어이구! 저 영감탱이가 어쩌다가 노망이 들어서 홍수로 심판한다고 헛소리 하고 다닌다고 했어요.

아니 배를 만들려면 바닷가에서나 만들지!

왜 산꼭대기에다 만들고 지랄이냐? 고 비웃었어요.

 

지금도 아무리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외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라고 해도 또 헛소리하네! 라고 치부해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지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 고맙습니다! 라는 말 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짜증을 내요.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도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가?

주식 값 떨어진다고 아우성은 쳐도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에는 생각하지 않아요.

자식 성적 떨어지면 난리를 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라고 해도 관심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자기 자식 성적 떨어지는 것만도 관심 없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뚝뚝 흘리는 예수님은 재수 없다고 쳐다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주일이면 습관적으로 의미 없이 왔다가 예배 끝나면 가고 마치 무뇌아와 같습니다.

그러니 노아 시대 인간과 뭐가 다릅니까?

똑 같지!

이처럼 시대를 초월해서 인간 자체는 하나도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적한 자이고 원망하며 돌을 던진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여! 저는 죽을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고 비웃는다면 자기가 아직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약에 하나님께 반항하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우리 입에서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고서는 주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가 토설되어 집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 때 비로서 마음속에서부터 애통함이 일어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라고 소리 지른다고 애통이 나오지 않아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요상해서 겉에선 아무리 요구해도 꿈쩍 안 해요.

오로지 본능의 지시만 받고 움직여요.

본능이 불평해! 라고 하면 입술로 불평이 툭 튀어 나와요.

본능이 미워해! 라고 하면 갑자기 그 인간이 미워져요.

 

지혜로움이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도 모르면서 날뛰는 것은 교만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자기 주제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알아서 기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 전 죄인이 맞습니다.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죽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살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자신은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지옥엔 잘난 놈들이 가는 곳이고,

천국엔 못난 놈들이 가는 곳입니다.

 

혼자서도 잘하는 에서는 지옥에 갔고,

마마보이 같이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사는 찌질이 같은 야곱은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니 말씀 앞에서 지키겠다고 꼴값 떨면서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과연 율법을 지켜 낼 수가 있겠느냐? 가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이라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의인이라 함은 죄 없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잖아요.

그럼 인간 중엔 말씀을 지킬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담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인간이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라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결국 죄가 없는 사람이 하늘에서 와야 한다는 답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온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이 율법을 지킬 사람이 과연 누구이냐? 를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명령을 지켜낼 의인이냐? 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의인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당연히 인간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는데요!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말하십니다.

너희가 못하는 것은 내가 한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라고 하십니다.

너희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보라고 하십니다.

육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시느냐 하면 죄 없는 아들을 인간의 육신으로 보내서 인간들 대신 벌을 받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내용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육신의 죄를 정하사” 라는 대목입니다.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것은 육신이 받아야 할 죄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정한다” 는 말은 “죄를 뒤집어 씌워서 없애 준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죄가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성도가 죄에서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

“정한다” 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들어가 있지만,

또한 이러한 식으로 성도가 “깨끗하게 되었다” 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죄는 죽음으로서만 없앨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서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것은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으라고 보낸 것입니다.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다는 것은 원래는 육신이 아닌데 잠시 잠깐 육신을 입고 보내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이 담당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해내기(구원)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의 죄를 정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성령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이 모든 것이 믿어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과 성령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경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라고 합니다.

구약은 신약을 전제로 하여 기록이 되어졌고,

신약은 구약을 배경으로 기록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조명(照明)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약은 장차 신약에 나타나고 벌어질 것을 내다보고 기록하였고,

신약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미리 약속 되어진 것들이 펼쳐졌다는 뜻입니다.

 

약속의 실체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렇다면 구약 시대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런 일을 하시고 이런 분이라는 것을 표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된 토대 위에서 오셨고, 그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히 11장의 사람들을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한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을 그림자라고 한다면 신약에서의 실체는 바로 성령님(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믿음은 곧 신약에선 성령님 즉 예수님이다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 11장의 사람들 앞에다가 믿음으로 이들을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을 믿음 대신에 성령님 혹은 예수님이 이들을 이렇게 살게 하셨고 저렇게 살게 하셨다! 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구약 시대 성도들도 예수님에 의하여서 구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신약에 오셨으니까 구약에는 안 계셨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도 계셨고 신약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 한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 말을 알아먹지 못해서 니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 오십도 안 된 놈이 약 2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 라고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서 신약에서 하나님이 성도를 어떻게 다스려 가는지를 미리 알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토대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 역사세계에 어떻게 펼쳐졌는가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들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떤 사상을 습득하고 교양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떻게 다가오시고 인간들은 그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이 비록 역사적 사실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이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백성들만 알아먹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을 벌리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를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누가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 할 수가 있는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인간의 지혜로 율법을 해석하여 열심을 다하여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지혜로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고전 2:9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도록 일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자기 백성들만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 비밀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도를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의 믿음에 사람들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비밀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고, 알지 못하는 자는 사랑을 입지 못한 자입니다.

 

마치 야곱처럼 사랑을 입은 자는 알아먹고,

에서처럼 사랑을 입지 못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알아먹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라야 이해가 됩니다.

즉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성령의 지혜를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방의 객이 되어서 종노릇 하다가 4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창 15:13-18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사백 년이라는 세월을 이방의 객으로 살게 하신 것은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사백년 전에 자기들 할아버지와 약속한 것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자기 공로와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신약의 성도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2천 년 전에 예수님과 약속한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면서 피 흘리며 죽었는데 손자가 혜택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에선 아브라함과 한 약속을 430년 후에 이스라엘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신약에선 예수님과 약속한 것을 2천년 후에 성도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하신 약속에 덕을 보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나하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하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한 약속이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우리에게 그 효력이 미쳐 온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이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애굽 땅만 알 뿐입니다.

 

이들에겐 가나안 땅은 보이지 않는 미지(未知)의 세상일 뿐입니다.

애굽에서 볼 때는 그저 막연한 곳일 뿐입니다.

이해를 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땅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상상 속의 나라일 뿐입니다.

이 막연한 상상 속의 땅을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지요.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영웅들을 거론하기 전에 믿음 이야기로 시작을 알리는 것은 다 이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고 합니다.

 

히 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이 있는데 지금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본 것처럼 갖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증거란? 본 것입니다.

 

증거란? 이미 본 것처럼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법정에서 증인을 세우는데 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증거입니다.

증인이란? 본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증거가 확실해! 라고 묻는 것은 당신 본 것이 확실해!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증거라고 하는 것은 믿음 속에 이미 본 것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무엇이냐 하면 지금은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본 것처럼 믿어지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왜 필요한가? 하늘에 있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땅에 것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 없어요.

믿음 속에는 보이는 땅(육)에 것이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늘(영)에 것만 담겨져 있습니다.

 

애굽의 입장에서 가나안은 땅이 아니고 하늘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구약에서의 하늘에 것이란?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늘에 것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땐 가나안은 땅이 되고,

애굽에서 바라보았던 가나안과 같은 세상에 없는 미지의 세계가 주어집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은 곧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서 미지의 세계란 바로 하늘에 있는 본향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면서도 그 곳에서 나그네와 외국인들처럼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히 11:13-16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 속에는 땅 이야기는 없고 하늘에 것만 담겨져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들 이야기는 없고 온통 하나님 이야기뿐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란? 다름 아닌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이니까 결국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만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이니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운운하면서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 부자 되게 해 준다거나, 병을 고쳐 준다거나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모두가 엉터리이고 사기 치는 것입니다.

 

약속이란이란? 땅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믿음 속애는 세상에서 잘되게 해 준다는 것이 없어요.

마음 속에 혹시라도 예수 잘 믿으면 땅에서 행복하게 해 주겠지! 라는 생각은 버리세요.

그걸 바라고 예수를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어서 미움 받고 고생이 심할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예수와 함께 고난 받자 그랬지, 예수 이용해서 출세하라고 하진 않았어요.

 

물론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도 부자가 있을 수 있어요.

성경은 부자와 가난의 차이는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말하지 않고 하늘을 지향하고 사느냐 땅을 지향하고 사느냐로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합니다.

 

부자라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면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가난하여도 세상 것을 쫓아가면 그는 마음이 교만한 땅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에 적을 두면 가난한 사람이라도 물질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들이 먹고 살게 하는 이야기는 복음 속에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믿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고 사는 것들을 구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했어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란 다름 아닌 천국입니다.

천국이 구약의 믿음에 사람들이 사모하던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눈으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들에게만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을 말하면서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쉽게 번역을 한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말하겠습니다.

 

11:3절.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 보십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이 말은 곧 “유(有)”에서 “유(有)”가 나온 것이 아니고,

“무(無)”에서 “유(有)”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이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다시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 때 있는 것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고 없는데서 만들었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일컬어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대치되는 말이에요.

인간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성에 입력된 창조는 있는 것을 가지고 만드는 겁니다.

아무리 재주가 출중한 목수라도 재료가 없으면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손으로 만진바 되고 눈으로 본 것을 믿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거대로 보이지 않는 무(無)에서 보이는 유(有)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반(反) 이성적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게 인간의 이성에 한계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불신자들에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라고 하면 니가 죽어 봤냐?

죽어 봐야 천당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알 것 아니야? 라고 비아냥거리지요.

맞아요.

 

이 사람들은 죽어 봐야?

아~ 그렇구나! 진짜 천당이 있고 지옥이 있었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게 인간의 이성이에요.

그러나 믿음을 받으면 안 죽어 보고도 믿어져요.

 

하나님 나라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산 사람과 믿음으로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입니다.

부자는 죽고 보니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탄원을 합니다.

자신은 이미 지옥에 왔으니 어쩔 수 없지만 자기 동생들은 아직도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세상에 살고 있으니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딴엔 형이라고 의협심은 있어서인지 몰라도 하나님에게 제발 나사로를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 주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으니 제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해 주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을 놈은 나사로가 안가도 믿고, 못 믿을 놈은 나사로가 가도 안 믿는다고 부자의 간청을 일축해 버립니다.

믿을 사람들은 나사로가 안 가도 이런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에 말을 들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성도들에게 들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은 성도는 죽은 나사로가 안와도 믿어요.

기적이 없어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신기해 할 뿐이지 믿지는 않아요.

신기해하는 것하고 믿는 것은 다릅니다.

 

은사주의자들의 신앙에 허구성은 맨 날 뭘 보고 믿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가슴이 뜨거워야 기도 한 것 같고!

찬송을 불러도 손에 불이 나도록 손뼉을 치면서 불러야 부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 뭔가 자꾸만 현상학적으로 나타나고 경험하여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모두가 경험된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자 하는 불신앙입니다.

 

기적을 보고서 믿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도 과거엔 은사 신앙에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방언에다 통역에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곤 했으니까요.

기도를 많이 할 때라 환상도 많이 보고, 영몽도 많이 꾸고, 음성도 듣고, 입신도 들어가곤 했습니다.

 

목사님이 뭐라고 말하면 속으로는 비웃었어요.

방언도 못하면서,,,,

목사님 방언 해 봤어요.

환상 봤어요.

보지 못했으면 말하지 마세요! 라고 비웃었어요.

그 땐 그게 전부인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은사 받지 못한 사람은 신자 취급도 하지 않았어요.

마치 개그 콘서트에 달인이라는 코너에 보면 유상무가 김병만이에게 묻잖아요.

어떤 주제를 놓고 물으면 김병만이가 ‘너 그거 해봤어! 안 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하지요.

 

은사 받은 사람들이 그래요

목사가 뭐라고 해도 은사 받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라고 우습게 여겼어요.

제가 옛날에 그랬다니까요.

 

목사님은 방언을 못해요.

소위 말하는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방언을 한다거나 겉으로 드러난 은사가 없어요.

그러나 전 분명이 그런 것 하거든요.

환상도 보고, 입신도 들어가고, 방언도 하고, 꿈도 꾸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거든요.

분명한 사실이니 안 따를 수가 없어요.

 

목사님이 아무리 은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해도 말 안 들어요.

왜냐하면! 내겐 분명한 경험이 있거든요.

이 때는 예수님이 와서 말려도 말 안 들어요.

만약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났으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을 하였어도 마음 한켠에는 늘 곤고함이 있었어요.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어서 은사를 행하면 행할수록 점점 더 큰 기적을 바라게 되요.

더 크고 쎈 것을 바랍니다.

크고 세다는 것은 뭔가 인간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고정시키기 위해 엄청난 능력을 행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즉 죽은 자를 살린다거나, 물위를 걷는다거나, 산을 바다로 던진다거나, 누가 나를 비판하면 내가 째려만 봐도 그 인간이 확 뒈지는 그런 능력을 바래요.

 

그래서 자신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남기고 싶어합니다.

이런 유혹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점점 더 이상힌 짓거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사가 항상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듣거나 입신하는 이런 일들이 늘 일어나지 않아요.

이런 일이 안 일어나면 불안해요.

 

왜 이러지?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는가?

내 기도가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정성이 부족해서인가?

늘 자기반성을 합니다.

 

그래서 끊긴 필름을 연결시키려고 강도를 더 높입니다.

산 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흔히 불 받으러 간다고 하지요.

자기 열심으로 능력을 보충 받으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하게 되요.

 

마치 갈멜산에 바알 선지자들 같이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신이시여 이래도 내 정성을 무시 할 것입니까? 라고 항의한 것처럼 말입니다.

산에서 밤이슬 맞아 가면서 소나무 잡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대요.

그땐 그게 믿음인 줄 알았으니까요.

한국교회 은사주의자들이 다 그렇게 가르쳤어요.

 

지금도 그래요.

0시 예배다, 철야예배다,,,

그냥 철야 예배라고 하면 안 되고 일 년 365일 철야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꾸만 뭔가 특별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이벤트화 하게 됩니다.

 

일천번제 드리기, 여리고성 허물기, 요단강 건너기, 다니엘 특별기도회, 사순절 새벽기도회,,,,갖가지 이름의 종교적 행사를 만들고 벌리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라도 해야 뭔가 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안하면 안 되어요.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땐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뭔가 붙 잡히는 게 있어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 내가 경험한 것을 믿었어요.

내게 경험된 것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고 낙심을 했으니깐요.

그러니 믿음이 아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은사를 이렇게 생각해요.

은사는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마귀도 은사로 미혹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돼요.

성령의 은사와 마귀의 은사를 어떻게 분별하느냐 하면,,,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도합니다.

예수님만 붙잡도록 합니다.

즉 은사로 하여금 예수님에게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을 만나면 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게 보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진다고 하였지요.

 

고전 13:8-13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자 보세요.

예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여진다고 하지요.

이런 것은 모두가 부분적인 것이라고 했어요.

온전한 것이 오면 다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장남감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 같은 것들이라고 했으니 편의상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이나 딱지나 구슬이나 총이나 칼과 같은 장난감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때는 그것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보물들이었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다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장난감 없어도 전혀 불편하거나 아쉽지가 않아요.

어른이 되어서 아직도 딱지를 모으고 구슬을 모으고 그것 안 사준다고 떼를 쓴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장난감 총 가지고 두~두~두~두~퐁 ~퐁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를 어찌 어른이라 하겠습니까? 어린아이지,,,

장난감은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것들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찾는다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은사도 이와 같아요.

만약에 목사가 되어서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을 끌고 가야하는데 방언하고 병고치고 안수나 하고 그림책 보듯이 무당 짓을 하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단단한 음식을 먹여야 하는데 아직도 젖이나 먹이고 있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은사란? 단단함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커 가는 과정에서는 귀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가 되었으면 이젠 젖 먹는 신앙은 버려야지요.

어른이 되어서 젖병이나 물고 다니면 어찌합니까?

 

진리를 모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고 새 언약도 모르고 할 때는 그것으로 믿음을 지탱해 나갔어요.

그러나 온전한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있으니 과거에 것들은 돌아볼 겨를이 없어요.

은사가 아예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은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온전한 것은 예수님이에요.

하나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면 부분적인 은사들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을 만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전 지금 옛날에 하던 은사들을 안 해요.

그런데 하나도 아쉽지가 않아요.

예수님을 만났거든요.

예수님 안엔 그보다 더 풍성한 것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런 것 안준다고 하나님 앞에 땡깡 부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할 이유도 없고, 산 기도를 갈 이유도 없고, 철야기도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 이벤트를 만들어서 교인들을 충동질 할 이유도 없어요.

몸을 학대할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은 그런 것 안 해도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서 찾을 필요가 없어졌어요.

내 안에 계시니까,,,,

 

예수님을 바깥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그 예수님은 자기 속으로 모셔 들이지 못해요.

예수님은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아서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을 찾아가서 동의도 구하지 않고 불쑥 들어가 자리를 깔고 주인으로 기거를 하십니다.

이러면 이상하게 하나님의 약속들이 믿어져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란 것도 믿어지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믿어져요.

 

천국도 믿어지고, 부활도 믿어지고, 다 믿어져요.

예전엔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그 믿어지는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눈치 볼 필요도 없어지고 오로지 예수님이 좋아져요.

 

그러나 마귀가 주는 은사는 마약처럼 하면 할수록 갈급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마귀의 은사를 분별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자기를 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은사를 행한다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그들 입에선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하나님 약속을 말하지 않아요.

 

물론 사람을 끌기 위해서 상투적으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잡게 하지 않고 은근히 은사를 행한 자기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대접받기를 바라고 상좌에 앉기를 바랍니다.

 

꼭 병을 자기가 고쳐 준 것같이 행세를 하게 되요.

저 사람 병 내가 고쳐 주었는데,,,

내 공도 모르고 나를 업신여기면 안 되지,,,

자기를 멀리하면 저주라도 받는 것처럼 은근히 공포심을 주고 자기를 추종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그 사람을 위해서 늘 기도해 준다고 합니다.

자기가 중보자로 앉아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해요.

이렇게 되면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무당처럼 받들게 돼요.

그 사람 말 안 듣고 마음 아프게 하면 꼭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한 것처럼 두려워져요.

결국 마귀는 은사를 가지고 사람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은사와 은사주의는 달라요.

은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 귀속되었으니 결국 약속을 붙잡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붙잡게 된다는 뜻입니다.

 

은사주의에 빠지면 예수님이 안보이고 자기가 행하고 듣고 본 것들을 붙잡게 되어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말해도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아요.

일명 고집이 셉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듣고 보았거든요..

 

과거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설치던 이장림 휴거파 들이 그랬어요.

그들은 분명히 환상을 보았고 음성으로 들었어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명심과 정의감에 불타서 한국교회를 휘젓고 다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가 듣고 본 것을 믿었어요.

그러니 사기가 된 것이지요.

이들은 마귀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그 추종자들이 지금도 남아서 0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못 벗어나요.

우리 주변에도 이런 교회가 아직도 성행하고 있어요.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 쳐 먹는 귀머거리 독사들입니다.

결국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 밖에 없어요.

 

제일 나쁜 사람들이 이런 부류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와서 설교를 해도 안 들어요.

자기가 본 것을 붙들지 예수님을 붙잡지 않아요.

 

그래서 바울이 경고 한 것입니다.

 

골 2:18-19절.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보세요.

은사주의자들은 자기가 본 것을 의지하여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는다고 하지요.

은사주의자들은 예수님 말씀보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을 안들어요.

자기는 분명하게 들었고 보았으니까요.

 

어떤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자기 교회 목사가 남의 설교를 도용하는 것 같다고,,,

아마 제 블로그에 실린 글을 보고 자기 교회 목사가 똑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몰랐었는데 제 블로그를 보고 알았대요.

추적해 보니 제가 올린 글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자기 교회 부 목사가 제 설교를 카피한 것이 아니냐 라고 문의한 것입니다.

저작권법 위반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제가 설교를 세상 가치관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어요.

누구 설교를 하면 어떻느냐?

증거되는 것이 그리스도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어요.

중요 한 것은 설교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완전히 소화하여서 자기 것으로 토해 낸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어요.

그랬더니 그 목사의 비리를 말하면서 지금 교회가 분란에 빠져 있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는데 이사야서의 말씀을 주시더래요.

흔히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교회를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거든요.

그 교회가 가짜라면 가짜 목사를 세워서 가짜 신자들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라고,,,

교회가 어떻게 되느냐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신앙이나 신경 쓰라고 했어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분이 제 말을 들을까요?

안 들을 까요?

안 듣습니다.

왠 줄 아세요.

자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입니다.

꼭 과거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더 연민이 가요.

자기에게 음성을 들려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일한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자기가 교회를 자기 마음에 맞도록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붙잡기 때문에 교회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목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교회로 세워가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서 제 설교는 너무 한국교회를 비판하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나요,,

결국 이 사람 속에는 진리 보다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으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성전을 헐면 안 된다고 해요.

성도에겐 관심사가 오직 예수뿐이어야지 그 외에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도, 목사도, 자기 자신도 보이면 안 되어요.

 

이 글을 혹시 그 분이 보실 수가 있겠지요.

다행히 이 글을 보고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렸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은혜가 그 분에게 아니 이런 사고를 가지신 분들에게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런 일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이유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려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혹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살후 2:9-12절.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귀는 항상 인간들이 신비해 하는 것으로 유혹을 합니다.

기적을 쫓아가게 합니다.

기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놓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해요.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에게 귀속되었다고 했지요.

그럼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증거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것은 다 가짜 은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힘주어서 말하였어요.

그 어떤 은사라 할지라도 그 끝은 ‘아!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을 받는구나!’

‘내 행위엔 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만 의가 되는구나!’

무엇을 하여도 예수님이 자랑되어지면 그 은사는 성령이 주신 은사가 맞습니다.

 

하지만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에게 귀의하지 않고 자기가 행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면 그 은사는 마귀가 주는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어요.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교회 다닌다고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불렀다고 참 신앙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합니다.

주님 앞에 나온 자들이 자신들이 귀신도 좇아내고, 병도 고치고,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행한 일들을 영웅담처럼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쫓아 내 버립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들을 자랑하였지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내어 놓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고 곧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예수님만 드러나기를 바라십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만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늘나라에선 이름이 없었어요.

그냥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긴 일만 해야 하니까요.

 

이런 상태를 종속(從屬)적인 관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종속 되었습니까?

아버지이지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보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이름으로 왔다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싫었는데도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했잖아요.

즉 십자가에 안 죽을래요!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천사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라고 수종을 든 것입니다.

천사들까지 동원해서 죽으라고 하는 하나님을 이해하시겠어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좁은 길로 협착한 길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사들이 동원되어서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집념입니까?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시면 천사를 동원시키고 성령을 동원시켜서 반드시 그 일을 해 내시고야 마는 분입니다.

이것을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나 천국 가기 싫어! 라고 해도 천사가 덜렁 들어서 천국으로 던져 버립니다.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낸 뜻대로 십자가에 죽었어요.

이제 죽었던 그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어요.

그리곤 아버지 곁에 계시던 성령님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에게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일은 성도들이 죄를 위한 죽음이라고 믿어지게 하라는 명을 받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종속이 된 것입니다.

성령님을 예수님께 종속시킨 이유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한 일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공연히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성도들 속에서 믿어지게 하시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은 인간을 개과천선 시켜서 착한 사람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의로만 하나님 앞에 나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가 자랑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온 자들은 자기들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이들이 행한 은사들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 말한 것처럼 사단이 일으킨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은 것입니다.

 

은사를 붙잡아도 안 되고,

교회를 붙잡아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세우신 새 언약만을 붙잡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붙잡아 지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억지로 자랑하라고 해서 자랑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과거에 율법에 특심할 때 한 설교 테잎이 있는데 그 설교를 들어보면 열심은 엄청나고 열정은 엄청난데 예수 이야기가 없어요.

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식의 인간들에게 강요하는 것들뿐입니다.

 

그땐 나름대로 설교 잘 한다고 했는데,,

지금 들어보면 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떻게 이렇게도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라며 신기해 할 뿐입니다.

그 당시엔 내 속엔 예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입만 열면 인간의 행함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엔 늘 곤고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설교를 잘하진 못하지만 입만 열면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가 술술술 흘러나와요.

이젠 성경 어디를 보아도 다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져요.

그건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고지식할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만 해요.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육에 속한 사람들 입장에선 육적 즐거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따분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를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자는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을 참 신앙이라고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들은 환청이 진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하는 말이 모두가 나는 이런 것을 들었다 나는 이런 것을 보았다 라는 식의 자기 경험만 풀어 놓고 사로 자화자찬하며 신앙이라고 내어 놓습니다.

 

그러니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시켜서 유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툭 던져 주면 마치 물고기가 미끼를 보고 덮석 물듯이 다 걸려듭니다.

 

그러니 은사니 표적이니 하는 것들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도마가 나는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지 않겠다고 하니 손에 못 자국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 주면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 되다 고 말입니다.

 

그러니 난 왜 나타나는 은사가 없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가 믿어진다면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은사는 없어요.

최고의 은사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믿어지면 더 이상 큰 축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지면 다 받은 겁니다.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어요.

남은 건 그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예수님처럼 미친 소리 듣고 이단소리 듣다가 죽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죽으면 하나님은 예수님처럼 버려짐을 당한 이런 성도들은 데려다가 천국에 성전을 짓습니다.

 

벧전 2:3-8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보세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예수님처럼 버림당한다고 하잖아요.

뭔가 모순되지 않아요.

인자란 사랑인데,,

사랑받았으니 죽으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사랑한다고 하면서 귀싸대기를 때리는 것과 같아요.

무슨 사랑이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한다 하고선 죽으라고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사랑은 세상엔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선 역설적으로 주어져요.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주면 뭐 이런 것을 줘! 하고 내 팽개쳐 버립니다.

 

세상에 무슨 인자가 그래요.

우리는 인자하심 이러면 잘 풀리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버림당하게 한다고 합니다.

완전히 인간의 생각과 다르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을 비켜 가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버려진 예수님을 성전의 모퉁이 머릿돌로 삼았다고 하지요.

그리곤 예수님처럼 버려짐을 당한 성도들을 가지고 벽돌을 쌓듯이 하나하나 천국에 성전으로 쌓아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 피 증거하다가 이단 소리 듣고 기존교회로부터 버림당하면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춤을 추어야 합니다.

원리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화가 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복음을 알아도 육에 본능이 그렇게 나타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서 이단 소리 안 들으면 수상합니다.

복음은 반드시 이단 소리 듣게 되어 있어요.

 

물론 육적으로는 속상하고 아프지요.

아니 욕을 먹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데 어찌 안 아프겠습니까?

그렇다고 돈이라도 많아서 먹고 사는데 걱정하지 않으면 참을 만도 할 텐데,,,

먹고 사는 것도 시원치 않으니 우째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선 성도들을 그런 아픔 속으로 밀어 넣어서 예수님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말과 같이 생각과 같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우리가 걸어갈 정해진 코스입니다.

이처럼 믿음 속에는 예수님이 당한 아픔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까 믿음을 뭐라고 했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지요.

보이지 않는 것은 약속이에요.

약속은 지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예배 끝나고 돈 1억씩 드릴게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돈은 예배가 끝나야 받아요.

지금은 아니잖아요.

현 시점에선 미래 일이예요.

미래 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볼 수가 없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믿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믿음이지요.

 

믿어지면 약속 속에 이미 1억원이 담겨져 있지요.

이제 끝나면 현찰로 받으면 되요.

그러면 제 말을 믿는 사람은 아! 목사님이 예배 끝나면 1억 준다고 했지!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겠어요.

아! 언제 끝나지!

 

그러나 제 약속이 안 믿어지면 속으로 그럴 겁니다.

미친놈 지가 돈이 있기는 있데! 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럼 예배 시간 내내 불평으로 가득 차요.

시간도 지겨워 지고 예배도 흥이 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짜증이 나요.

왜 믿어지지 않는 말을 하니까요.

결국 믿어지는 사람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안 믿어지는 사람은 불만으로 충만해 집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실 때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지요.

얘들아! 내 갔다가 곧 올께!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러면 그 약속이 믿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살겠어요.

 

아! 우리 주님이 오신다고 했어!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주님이 오실 텐데 뭐!

어이! 김 집사 힘들지!

우리 조금만 참자 주님이 곧 오신다고 했으니,,,

곧 오실 꺼야!

그래 이 집사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 믿고 견딥시다! 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가 설레임과 기쁨과 행복함으로 살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약속이 안 믿어지면 소망이 없기 때문에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은사를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그래서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즉 무(無)에서 유(有)가 나왔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믿음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이야기 하나 더 합니다.

 

믿음을 받으면 유(有)에서 유(有)를 찾지 않고!

유(有)에서 무(無)를 이해하게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해가 가야 할텐데! 고민입니다.

유(有)에서 유(有)를 찾지 않고, 유(有)에서 무(無)를 찾는다는 말은 보이는 세계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으로 따지면 신약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러면 믿음을 받으면 신약이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당연히 보이지요.

 

구약에서 신약을 본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아까 아브라함이라고 했잖아요.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미리 보고 즐거워했다고 했지요.

다윗도 그랬고 히브리서에 나와 있는 믿음에 사람들도 그랬어요.

 

이들은 유(현재)에서, 무(미래)를 미리 보고 산 것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지금도 성령을 받은 성도는 말씀으로 천국을 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현재 있으니 유(有)가 되고,

천국은 아직 보지 못하고 장차 올 미래의 것이니 무(無)가 되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 믿음을 받으면 약속으로 보지 못한 것들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증거로 구약의 성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럼 대표적으로 믿음에 선진인 아브라함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창 12: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세 였더라”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좇아서 정든 부모형제 일가친척들을 뒤로 한 채 대책도 없이 아주 낯선 길을 떠납니다.

한 번도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낯선 땅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것도 누가 길잡이가 와서 모셔 가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간다고 합니다.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미쳤다고 해야 합니까?

아마도 미쳤다고 해야 하겠지요.

 

맞습니다.

아브라함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런 미친 짓을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갔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니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갈 수가 있습니까?

인간의 이성으로는 정든 부모형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실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뭔가가 아브라함을 끌고 간 것입니다.

누군가가 끌고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뭔가에 홀려서 따라 간 것입니다.

 

속된 말로 귀신이 쒼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데 아브라함만 하나님이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라는 말을 듣고 따라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뭔가에 홀린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소고삐를 잡고 끌듯이 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질질 끌려 간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믿음이 끌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구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히 11:13-16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구약의 성도들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각오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대를 걸게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선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오시면 성도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과 한 몸을 만들어 버려요.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립니다.

이제 나라는 존재는 없고 오직 예수 안에 나만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곧 자신이 한 일처럼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였습니다.

 

갈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약속의 실체가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간에 세우신 새 언약을 믿어지도록 하십니다.

 

성령이 제시하는 약속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입니다.

자신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난 이미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대신 말씀을 지켜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종국적으로 믿음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싸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내 행위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을 것인가? 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넌 무슨 짓을 해도 천국 가게 되어 있어! 라고 합니다.

넌 반드시 천국에 가야만 돼!

왜냐하면! 그렇게 작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무슨 짓을 해도 천국에 가야만 하고, 에서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놀라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선택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탕자같이 살면서도 난 천국 간다 라고 큰소리치는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바리새인들 앞에서 세리와 창기들이 난 천국 간다 라고 해 보세요.

얼마나 비웃겠어요.

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얼마나 우스워 보였겠어요.

 

좌우지간 믿음은 상식을 파괴하고 초월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잘 해 봅시다가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만 믿읍시다 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피 흘리셨습니다! 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믿음을 안 받으면 안 됩니다.

자꾸만 자기행실을 돌아보게 되고 반성하고 갈고 닦으려고 합니다.

내 꼬라지가 이래서 되겠나?

자신의 행함에 눈을 두고 있다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정리합시다.

 

믿음 속에는 바라는 것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라는 것은 이 땅에 없는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이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했어요.

 

천국은 이 땅에 없는데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천국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천국을 근거로 세워진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천국을 증거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천국에 모습들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를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앙고백 위에 세웠습니다.

결국 교회란? 예수님인 셈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 교회입니다.

그럼 동일한 고백을 하는 분들이 모이면 그것도 교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교회는 둘이 모였든 백이 모였든 예수님만이 이야기가 되어져야 합니다.

역으로 둘이 모이든 5만 명이 모이든 예수님만이 이야기가 되어 지지 않으면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 교회를 분멸하는 기준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주변에 교회를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이외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더라” 가 되어서 이 땅에 변화 산으로서의 교회로 존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교회로 남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믿어지지 않는 세계를 믿어지도록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믿음이 세상 사랑갈 동안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끌고가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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