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히브리서 강해)16강. 피 안에서 바라 본 애굽 (히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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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2022. 4. 1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6강. 피 안에서 바라 본 애굽 (히 11:28)

-.정낙원 목사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禮)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오늘은 지난 시간 유월절에 대하여서 못 다한 이야기를 보충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설교를 하고 나면 늘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아! 이런 말을 해야 하는데!

또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왜? 그런 말 밖에 못했을까? 라는 아쉬움 말입니다.

 

이는 말씀이라는 것이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쌓여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언제든지 꺼내서 쓸 수가 있어요.

이렇게 쌓여 있는 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지식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은사로 증거하여야 하는 겁니다.

은사는 쌓아 두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때 그때 구재(口才)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로는 다 알 수 없어요.

오늘은 이렇게 깨달았는데 자고 나면 또 다른 깨달음으로 다가와요.

동일한 본문도 볼 때마다 다르게 다가와요.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풍성한 은혜가 담겨져 있어요.

 

바울은 이 깊은 은혜를 알아가라고 기도했어요.

이는 마치 사람이 자라가면서 사물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져 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씀을 깨닫는 깊이와 넓이도 신앙의 경륜과 함께 깊고 넓어져 가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엡 3:14-18=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왜? 기도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어떤 은혜를 입고 있는지 알라는 겁니다.

 

충만이란?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득찬 은혜를 부분적으로만 알아요.

지극히 미미한 것만 맛보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닫고 더 많은 것을 맛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말씀 속에 담겨져 있거든요.

성경을 볼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볼 때마다 새롭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더 깊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과 비례하여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더 진지하게 알아가게 되는 것도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과거엔 특별한 일을 당하여야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았는데 이젠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조금 깨닫고 보니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은혜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예전엔 감사의 조건을 찾았는데 이젠 모든게 감사로 보여요.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없습니다.

범사가 은혜입니다.

그러니 범사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각자 다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설교를 듣고 보아야 해요.

아! 저 분은 이렇게 은혜를 받는구나!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은혜를 깨닫는구나!

아! 저런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 한 모습이었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가 다 달라요.

그러므로 남에 말도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은 다른 분을 통해서 깨닫게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깨닫는 일엔 목사와 성도가 다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깨닫게 해 주시면 알아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깨닫게 해 주는 최고의 스승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데에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비록 세상적인 학문이 일천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그러므로 어린아이서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스승들인 것입니다.

 

표현하는 데에는 지혜와 지식에 따라서 조금 다를 수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은혜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교만케 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을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다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는 진리를 아는 성도는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다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이단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기 위해서도 들어 보아야 해요.

 

어떤 한 사람에 설교만 들으면 자칫하면 그 사람의 말만 진리가 되어 남의 말은 듣고자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가 한 사람에게 가두어지게 됩니다.

 

자칫하면 그 사람을 신봉하게 됩니다.

이건 아주 경계하여야 할 대목입니다.

실제 이런 우려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이미 있었습니다.

 

나는 바울 파다!

나는 계바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라고 다투었어요.

 

계보(系譜)가 형성 되었다는 말은 곧 사람을 추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볼로가 계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파벌을 형성하는 것은 은혜 받은 성도의 삶에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계파 형성을 혁파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를 졌느냐!

우리가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아닌데 왜? 어느 사람을 신봉하느냐? 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서 그 누구도 신봉 받을 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다만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니 자라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야지 왜? 자라게도 못할 인간들을 추종하느냐 입니다.

씨 뿌린 것이 자랑일 수 없고, 물을 준 것이 자랑일 수 없어요.

 

복음을 깨달은 것은 자기 지혜로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합니다.

 

이단이 생기고 사이비가 생기는 이유는 모두가 한 사람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교주의 말만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집단에선 교주가 하는 말이나 일이 모두가 진리처럼 통용되는 것은 신자들이 성경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행여라도 지금까진 복음을 전하였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일입니다.

 

목사도 죄인이기 때문에 늘 마귀의 유혹을 받습니다.

육신의 소욕은 복음을 안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늘 육신 앞에선 상한 심령 수밖에 없어요.

육신 앞에 늘 넘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을 정죄하거나 비판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잘 전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인간의 죄성은 거부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항상 으뜸 되고 싶어 하고, 군림하고 싶어 하고, 스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려요.

자기를 알아주면 기분이 좋고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요.

이건 죽을 때까지 버려지지 않아요.

 

그래서 늘 자기 주변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들로 포진을 시키고자 합니다.

누구라도 자기를 비판하거나 부정을 하면 밉고 멀리 하고 싶어요.

이는 사랑하는 일가친척 가족일지라도 예외일 수가 없어요.

 

마귀는 항상 성전 꼭대기에 세워서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영웅이 되고, 능력자가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 되라고 합니다.

세상에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으뜸 되고 싶어 하고 목사들 세계에서도 으뜸 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유혹에 빠지면 남에게 배우고자 하지 않고 가르치고자만 해요.

배우고 깨닫고자 하지 않고 맨 날 가르치려고만 들어요.

아주 교만 한 겁니다.

이 모두가 죄가 하나님 같이 되라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나도 성경을 곡해 할 수가 있으니 다른 목사님들이 설교도 듣고 읽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TV에 나오는 목사들의 설교도 들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비 복음적 설교가 무엇이 틀렸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복음 전한다고 하는 목사도 마귀에게 미혹당해서 어느 순간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지 정낙원 목사가 아닙니다.

전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어요.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절대 진리로 남기시고 나머진 전부 가변성을 두시고 보셔야 합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 눈치 볼 생각이 없습니다.

천부께서 심지 않았으면 다 뽑힙니다.

누가 암까마귀고 누가 수까마귀 인지는 하나님만 아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알면 감사하고 못 알아도 제가 탓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주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는 지혜에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못을 박아 주셨어요.

그러므로 성경 어디를 해석한다 하여도 예수님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인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셨다는 것만 증거되어져야 해요.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님뿐이므로 예수님만 남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예수의 피를 전했고!

바울도 예수의 피만 전했고!

나머지 11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도 오직 예수의 피만 증거했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생명이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하나님 앞에 의가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잇는 것은 인간의 열심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고 희생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어요.

 

애굽에 장자가 죽어질 때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붙잡아야 합니다.

피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안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다.

이건 그 어떤 것으로도 양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되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어떤 말을 하여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자고 하면 왜? 그리 못 마땅해 하십니까?

 

무슨 말을 해야 좋아라 하겠습니까?

복 받는 이야기를 해야 좋습니까?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말을 해야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오래 오래 산다고 하여야 좋아 합니까?

 

아니! 예수쟁이가 예수 십자가로 만족 해야지 왜? 다른 것을 말하라고 합니까?

교회는 오직 예수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부자 되고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은 세상에서 들으십시오.

 

교회는 세상에서 듣지 못한 하늘에 소리를 말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듣지 못하는 말을 듣고자 교회를 찾으십시오.

성경을 상고 하십시오.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 말고 세상 사는 이야기라든가,

인간이 복 받고 잘 사는 이야기라든가,

병고치고 귀신 쫓는 이야기라든가,

인류평화를 외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하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이런 일에 이용하면 안 됩니다.

설령 성경 속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이야기 하고자 언급된 것이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살아갈 땅을 저주 하십니까?

 

이는 하나님 앞에선 땅은 철거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은 장차 불로 태워질 곳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천지 창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에덴동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출애굽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홍해바다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만나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반석에서 솟은 물도 예수님 이야기에요.

할례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율법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가나안 정복도 예수님 이야기에요.

 

아브라함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요셉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모세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이스라엘도 예수님 이야기이에요.

 

교회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성도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그 어느 것도 예수님 이야기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을 맺는 것이 성경이고 세상이고 인간의 역사입니다.

 

만물이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만물이 다 주를 말하고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해도 주를 말하고,

달도 주를 말하고,

비 바람도 주를 말하고,

낮과 밤도 주를 말하고,

풀과 나무도 주를 말하고,

참새나 짐승도 주를 말하고,

돌맹이 하나까지라도 모든 피조물들이 주를 말해주지 아니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물을가지고 자신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나무를 저주하시고!

당나귀를 사용하시고!

물고기를 사용하시고!

인간들도 사용하고!

천사도 사용하고!

귀신도 사용하셨습니다.

심지어 병 조차도 사용하셨어요.

 

이 모두의 주인이기 때문에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 예수님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내 발등상” 이라고 했습니다.

땅도 하나님 것이고, 하늘도 하나님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 것이고, 내 아내도 하나님 것이고, 내 자식도 하나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이 목적으로 남아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 둘씩 차압당하여 가는 것이 성도의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부모와 자식과 전토와 자기 자신까지 버리라고 하신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기 때문에 버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야금 야금 차압해 가십니다.

 

여러분 이단이란? 목적이 빗나간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증거되고, 예수님만 남겨야 하는데, 교회가 증거되고, 인간이 남겨지면 안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남기지 않으면 모두가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 피 이외는 모두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전해야 합니다.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어요.

십자가 피는 전해도 되고 안 전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 증거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했으면 다 전한 것이 되지만, 다른 것 다 전했으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증거 되지 않으면 하나도 전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것저것 전하는데 양념처럼 끼워질 악세tu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전부이지 설교에 끼워 넣을 양념도 악세셔리도 아닙니다.

교회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를 위한 교회여야 합니다.

성도를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성도여야 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세요.

그럼 이 시대 증거되는 설교는 너무 엉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이고,

다른 영을 전하고 있어요.

 

이런 설교가 횡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교인들 또한 가짜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예수의 말을 듣지 타인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잘살까? 를 말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천국을 이야기 했고 아버지의 뜻만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는 12제자나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령 받은 성도들도 동일했어요.

지금도 바울이 받았던 성령을 받은 성도는 동일한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받은 성령을 안 받았단 말입니다.

소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바울과 같은 한 성령을 마셨다면 당연히 바울과 같은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성령을 마신 자입니다.

 

어떤 목사는 성경에 나와 있는 물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듯이 말하면서 좋은 물을 먹어야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침 튀겨 가면서 말합니다.

성경에 원래 인간에겐 씨 맺는 풀과 과실을 주었기 때문에 그걸 먹어야 한답니다.

성경대로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걸 깨닫고부터 견과류만 먹는데요.

그러면서 자기는 성경대로 가르친대요.

 

여러분 성경대로 살면 지옥 갑니다.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이야기 알지요.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다 지켰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옥 갔어요.

 

성경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성경대로 살 수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시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이미 하나님 백성이 된 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면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서 지키는 자만 하나님 백성 만들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미 하나님 백성인 자에게 율법을 주었어요.

왜? 그런가요?

율법을 받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말씀을 보니 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셨구나!

이렇게 감사 할 때가 어디 있는가!

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셨구나!

이런 황망할 때가 있나! 라고 감탄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 백성 된 자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는가요.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으면 맨 날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합니다.

 

너무 중요한 말이니 다시 한 번 설명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이렉트로 오지 않고 예수님을 거쳐서 와요.

예수님을 거쳐서 주는 이유는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과 상관없어요.

성도가 율법 안 지킨다고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이는 구원이 먼저이고 율법은 나중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진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을 때 율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럼 아브라함은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은 거지요.

그렇잖아요.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졌잖아요.

그러니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어요.

모두가 율법 받기 이전에 사람들이니까요.

 

도리어 율법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드러내서 선택으로 구원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지요.

그렇잖아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니까요.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어 살다가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어요.

이삭이 태어나기 전이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생겨난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이라는 보따리를 줬어요.

그 보따리를 풀어 보니 그 속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신약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라는 보따리 속에는 저와 여러분도 들어가 있었어요.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는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이 되었어요.

그럼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주어진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든 안지키든 그 신분에는 변함이 없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이해가 되셔야 해요.

그래야 진도가 나갈 수 있어요.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사기꾼들의 말에 홀딱 넘어가게 되요.

 

제가 지금 사기 치는 목사 입장에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반박해 보세요.

이게 반박이 되어야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난 이런 인간을 원한다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온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케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을 받아서 거룩해져야 하고 온전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서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가 지켜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처럼 넘어지지 말라고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언뜻 들으면 다 맞는 말입니다.

 

자! 여기에 반박을 해보세요.

 

이건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 밖에서 성경을 보면 이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예수 밖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있으니 신앙의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어요.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말씀도 내가 지켜야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이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찾아 나온 청년과 같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어요.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이 뭐라고 묻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지요.

그럼 이 청년은 영생 안에 있다는 겁니까?

영생 밖에 있다는 겁니까?

영생 밖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거잖아요.

 

그래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성경이 뭐라고 하던데!

예! 성경에 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대로 해라.

나 그런 것 어려서부터 다 지켰는데요.

 

그런데 왜? 날 찾아 왔어!

저! 근데요.

하나님 말씀을 다 지켰는데도 아직까지 영생을 못 받았거든요?

그래 그럼 네가 소유한 것을 다 팔아서 이웃에게 나눠주고 날 따라와!

예!

그럼 난 어떻게 사는데요.

난 거지되라고요.

그럼 가봐!

부자청년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부자청년의 신앙이 유대인들 신앙을 대표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다 부자 청년처럼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였거든요.

마치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과 같아요.

 

여러분 부자 청년이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영생을 인간 쪽에서 행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에요.

영생을 구원이라고 봅시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거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지킨 것 아닙니까?

 

아까 이스라엘은 언제 생겨났다고 했습니까?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다고 했지요.

아브라함 언약은 율법과 상관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지요.

 

그럼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은 지켜지겠지요.

그렇잖아요.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보다 430년 후에 주어졌으니까요.

 

그럼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이미 구원이 된 것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래야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후손이 되니까요.

이해되세요.

 

그럼 아브라함 언약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돼지요.

이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 언약 백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너희들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이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펄쩍 뛰는 겁니다.

아니 우리 조상이 분명히 아브라함인데 어째서 마귀라고 하느냐?

 

그러자 예수님이 아브라함은 나 한데 이러지 않았다! 라고 합니다.

아니 이놈이 오십 살도 안 된 놈이 버르장머리 없이 2천 년 전 어른을 언제 봤다고 까부느냐? 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 부터 있었거든!

???

 

야! 이놈 미쳤네!

에라이! 저 미친놈 죽여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참람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靈)으로 말하는데 유대인은 육(肉)으로 듣는 겁니다.

육과 영은 접점이 없어요.

대화가 안 통해요.

왜냐하면!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혈통 들고 나오고, 이면적 유대인은 약속 들고 나와요.

혈통 들고 나오는 자는 유대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유대인은 약속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적 유대인은 말씀을 다이렉트로 받는 겁니다.

그렇게 받으니 전부 자기들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영적 유대인은 예수 안에서 말씀을 받아요.

 

예수님을 거쳐서 말씀을 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거쳐서 말씀을 보니 그 말씀들은 전부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말씀이든지 예수님을 거쳐서 대하기 때문에 자기가 지켜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미 지킨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지키세요! 라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지켜주셨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께서 이것도 지켜 주셨고, 저것도 지켜주셨습니다.

어이쿠! 이것도 지켰네!

아! 저기 저것도 지켰네!

 

야! 우리는 하나도 못 지키겠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 주셨네!

예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것을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겁니다.

 

신자의 신앙생활 속에는 온통 예수님 자랑 밖에 없어요.

말씀 때문에 고민 할 것도 없고 염려 할 것도 없어요.

이걸 진리(예수님) 안에서 자유한다고 하는 겁니다.

아들이 자유케 해주면 자유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다 지켜 주셨으니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예수님을 거쳐서 보게 되니 복음이 되는 겁니다.

율법도 복음이고, 믿음도 복음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그 말씀으로 예수님 안에서 구원된 것이 엄청난 은혜(복음)라는 사실을 더 깊이 알아가겠지요.

말씀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사가 더 깊어지겠지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말씀을 보면 볼수록 감사가 넘쳐나요.

반대로 예수 밖에서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말씀을 보면 볼수록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 짐스러워지겠지요.

맞아요.

 

그래서 성경을 덮어 버리는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그게 그것 같으니 교회나 열심히 다니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 충성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 라는 인간의 종교성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덮고 교회 충성하는 겁니다.

성경은 목사들이 전문가니까 목사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목사는 자연적으로 스승이 되어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다스리고 군림하게 되는 겁니다.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목사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써 있었어요.

 

고후 11:13-20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役軍)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사단의 일꾼들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서 교인들을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다스렸어요.

뺨을 때리고 재물을 빼앗아도 교인들이 옳게 여겼어요.

그게 신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이 시대 대 부분의 목사들이 그러잖아요

목사가 예수님 자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잖아요.

자기는 다 아는 것처럼 유세를 떨면서 명령하잖아요.

자기 말대로만 하면 천국에 가는 것처럼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은 일사분란하게 로봇트처럼 알아서 척척 움직입니다.

목사가 심방을 와서 안수라도 한 번 해주면 뽕 가잖아요.

목사를 신처럼 떠받들지 않습니까?

물론 거짓 종들이 그래요.

 

제 친척이 나가는 교회 목사가 그래요.

그 교회 교인들에겐 그 목사는 신(神)입니다.

교인들이 목사의 말에 꼼짝을 못해요.

교인들에게 자기가 손만 되면 복이 넝쿨채 굴러 들어가는 줄 알도록 가르쳐 놓았어요.

 

설교 시간에 아이들 머리에 손을 얹고 앞으로 세계를 짊어질 거목이 될찌어다! 라고 하면 아멘 하고 난리입니다.

거룩한 주의 종이 축복을 해 줬으니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그 부모들은 녹아 버립니다.

다른 부모들은 왜? 내 새끼는 안 해주나! 라고 시기하고 목사에게 잘 보이려고 난리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교인들은 이름 한번 불러주면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풀려서 흐믈흐믈해져요.

수천 수백 명 모이는 자리에서 이름 불러 주면서 일어나라 앉으라 해 보세요.

집을 팔아서라도 갖다 바쳐요.

 

모르면 속아요.

속지 않기 위해서 알아둬야 합니다.

지천에 이런 목사들이 우굴거리잖아요.

 

무슨 말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요?

그렇지요.

예수 안에서 성경을 보는 것과 예수 밖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살펴보았지요.

 

예수 밖에서 성경을 보면 전부 육적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했지요.

내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어요.

그럼 계속해서 육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어떻게 보는지 살펴봅시다.

 

육적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흉내 내고자 합니다.

병도 고치고, 귀신도 좇아내고, 방언도 해야 하고, 기적도 행하여야해요.

목사들마다 이런 것 하라고 하지요.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에 이런 일들이 기록된 것은 우리더러 하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표적이라고 하지요.

표적이란? 하나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병을 고쳐 주려고 오셨을 것 같으면 모든 병자를 다 고쳐 주어야 했어요.,

가난을 해결하고자 하셨으면 모든 가난을 해결해 주셨어야 했어요.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온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있어도 이방인 나아만만 고쳐주었고,

온 이스라엘에 과부가 있어도 사렙다 지역의 한 과부만 먹게 해 주었어요.

 

예수님이 만약 병을 고치려 오셨다면 베데스다 못가에 수많은 환자들 다 고쳐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달랑 38년 된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었어요.

이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가난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고치시지요.

그리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병은 죄와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죄 때문에 병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 고침은 곧 죄사함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다 이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운운하면서 육신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것은 다 이단인 것입니다.

하늘 이야기를 땅 이야기로 말하는 것은 그의 본질이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뱀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복 받는 일도 아니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일도 아니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도 아니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일도 아닙니다.

 

교회 부흥이 내 죄를 사해 주지 못하고,

나의 착한 삶이 죄를 사해 줄 수가 없으며,

세상에서 성공함이 내 죄를 사해 줄 수가 없고,

복 받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내 죄를 사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내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 로서만 사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피만 증거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다 가졌는데도 예수의 피가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예수의 피를 가졌다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안에 있음에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예수 안에 있음으로 실패가 아니므로 감사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과거 최양락씨와 김학래씨가 하던 코메디 중에 괜찮아유~ 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김학래가 최양락이 한데 와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약을 잔뜩 올립니다.

예를 들어서 소가 콩 밭에 들어가 콩 잎을 죄다 뜯어 먹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최양락씨가 하는 말이 충청도 특유의 말투로 괜찮아유~

고구마 밭이 있잖아유~ 라고 합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하면 해 볼까요?

 

세상에 망했습니까?

괜찮아유~

예수가 있잖아유~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까?

괜찮아유~

예수가 있잖아유~

 

교회에 교인들이 없습니까?

괜찮아유~

예수가 있잖아유~

 

부모 자식이 속을 썩입니까?

괜찮아유~

예수가 있잖아유~

 

지금 죽어갑니까?

괜찮아유~

주님 생명이 있잖아유~

 

이혼하고, 사기 당하고, 누가 욕을 합니까?

괜찮아유~

예수가 있는데~ 라고 해야 합니다.

 

이걸 바울을 로마서 8장에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고 말해 준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행복이란? “예수 안에 있음” 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예수 없음은 불행이고, 모든 것 없어도 예수 안에 있음은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길은 부모와 자식과 전토와 자기 자신까지 다 버리고 따르는 길이라고 한 것은 예수 하나 붙잡으면 모든 걸 가졌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잖아요.

겉보기엔 망한 자 같으나 실상은 성공한 자라고 합니다.

 

고후 6:4-10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지금 너희들 보기엔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난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위 내용대로의 모습을 한번 그려 보세요.

완전히 거지입니다.

거지도 이런 상 거지가 없을 겁니다.

 

이 시대 우리들이 하는 간증과 비교해 보세요.

완전히 다르지요.

그래요.

달라요.

예수가 다르고, 복음이 다르고, 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겁니다.

 

요즘 목사들 보고 이렇게 살라고 하면 다 목사 안 할 겁니다.

신학교 가는 학생들에게 목사는 이런 거란다 라고 하면 한명도 안 갈 겁니다.

이런데도 여러분 자식들 신학교 보내서 목사 만들고 싶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떤 부모가 이런 상 거지 만들려고 자식을 목사 만들고자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자식을 신학교 보내고 목사 만들고자 하는 것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기꾼 목사들을 보고서 보내는 겁니다.

좋은 집에 좋은 음식에 좋은 차에 좋은 대접을 받는 것 보니 목사 시킬 만 하지요.

그래서 공부는 머리가 딸려서 좋은 대학을 못 가겠으니까 신학교에나 가서 목사가 되라고 하잖아요.

 

무슨 사명이라고 핑계되면서 말입니다.

이게 다 무당 같은 목사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요.

바울을 보고 12제자를 보았으면 절대로 목사 시키지 않아요.

저 역시 제 자식을 목사 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행여 여러분 자식이 엄마 나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될래!

그러면 말리세요.

아서라!

차라리 집에서 놀아라!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야! 난 너 거지꼴로 사는 것 못 본다 라고!

 

그럼에도 바울은 상거지로 살면서도 다 가졌다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로 보니 몽땅 배설물들인 겁니다.

 

예수 밖에 있는 놈들은 전부 똥덩어리들만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보화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큰 소리치지요.

니들이 게맛을 알어!

니들이 예수를 알어! 라고,,,

 

예수님 안에는 만유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다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가진 것이 됩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세상 것으로 인하여 울고 불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 것으로 인하여 울고 분다는 것은 곧 세상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밖에서 보면 세상 것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세상 속에 갇혀 있으니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내용이 그 내용입니다.

 

피 안에서 애굽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피 안에서 애굽을 바라보니 온통 죽음인 겁니다.

피 안에만 생명이 있어요.

 

피 안은 천국이고, 피 밖은 지옥입니다.

그러니 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탈출하였다는 말입니다.

탈출을 성경에선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어디에서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받았다고 할 때에는 내가 어디서 건짐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란? 죄의 세력에게 갇혀 있다는 겁니다.

죄가 주인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모든 인간은 사망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을 붙잡아 가두고 있는 것이 바로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밑에서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로에게 갇혀서 죽어가는 것은 피 안으로 불러들인 겁니다.

바로 밑에서 죽어가는 것을 피 안으로 불러 들여서 살려 준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이 마귀에게 붙잡혀서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서 사망에 갇혀 있는 겁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죽음의 늪에서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권세에서 단 한 사람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은 인간이 이길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빼내 주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갇혀 있는 자를 누군가가 빼내 주었다는 말입니다.

죄에서 빼내 줬다는 것은 구원자는 죄 밖에 있다는 말이지요.

같이 갇혀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 구원자는 죽음 밖에 있는 분이라야 하겠지요?

 

구원이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밖에서 누군가가 대신 이루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 뒤에는 항상 날 구원해 주신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나 구원 받았다!

난 행복하다! 라고 하면 하면 안 됩니다.

날 구원해 주신 분께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구원자를 위한 구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구원이 올바른 구원입니다.

죄는 구원해 주신 분을 잊는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분을 잊고 사는 것이 죄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타락한 것은 교인들의 시선을 구원해 주신 분께 고정시키지 않고, 구원 받은 자기 자신에게 고정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고정을 시키니 맨날 다고 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고 좌우지간 달라는 겁니다.

입만 열면 감사가 나와야 하는데 달라는 것만 나와요.

 

구원자를 보면 감사가 나오는데, 구원자는 안 보이고 자기만 보이니 난 살아야 돼! 하는 겁니다.

난 살아야 되니 달라는 겁니다.

광야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 시켜준 하나님을 안 보고 자기를 보기 때문에 야!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사느냐! 라고 징징거린 겁니다.

아니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보았다면 뭘 걱정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안보이고 광야만 보이니 원망하고 불평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였음에도 자기를 구원해 주신 분께 관심을 두지 않고 매 순간마다 자기들에게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백성이란? 언약으로 생겨난 백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이 중요한 겁니다.

언약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는 언약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니 출애굽이란? 어떤 장소에서 빠져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한 것은 이런 구원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출애굽 하였음에도 여전히 애굽에 갇혀 있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에 있으나 광야에 있으나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면 그것은 애굽인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언약의 실체가 예수님이니 예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은 애굽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하여도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여전히 바로 밑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이 아니고 마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어디서 건져 주었습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이지요.

사망이 뭡니까?

죽음이잖아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진드기처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겁을 주고 괴롭혀요.

그러니 이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평안 할 수가 없어요.

상대적으로 죽음에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심합니다.

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걱정을 안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업에 실패해서도 아니고, 병들어서도 아닙니다.

모두가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세상에 것들이 커 보이는 것입니다.

돈 없으면 죽는 줄 아는 겁니다.

실패하면 죽는 줄 압니다.

병들고 아플까봐서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애굽에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애굽에 사람이 죽고,

말씀으로 사는 가나안에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진정한 출애굽입니다.

떡에 가치로 살면 교회에 와도 세상이고, 말씀에 가치로 살면 세상에 있어도 교회입니다.

다른 말로 피 안은 천국이고 피 밖은 애굽이고 세상입니다.

 

피 밖에서 자신을 보니 죽음에 쫓기는 겁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살고자 하는 겁니다.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인간은 일평생 쫓아다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라고 했어요.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지요.

예수 밖에 나가면 죄다 이런 것들이 나를 괴롭혀요.

이건 광야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들입니다.

 

세상은 애굽입니다.

그럼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출애굽 한 것입니다.

벗어난다는 말은 육신의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영생의 가치관으로 살란 말입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면 그 환경에 만족하고 살아지게 되요.

바울처럼 풍부에 처할 때도 있고 비천에 처할 때도 있어요.

그 때 그 때 모든 환경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면 감사가 됩니다.

 

이걸 예수님께선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난 행복하게 살아야 되라고 하면 불행해지고,

난 불행해도 괜찮아 라고 하면 행복해요.

어휴! 이렇게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 라고 생각하면 살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은 애굽에서 나왔는데 마음은 나오지 못했어요.

그러니 광야에서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고 늘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살아야 할 곳에 와서 애굽에 양식을 그리니 그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마음속에 애굽의 것이 살아서 펄펄 거리는데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장 배가 고픈데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도 좋지 않은 겁니다.

좋지 않으니 원망하고 불평하고 궁시렁거리는 겁니다.

 

마귀는 평생 이런 것 가지고 사람을 괴롭혀요.

이런 것 가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거짓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신토록 흙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것 가져도 행복할 수가 없어요.

부자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세요.

대통령에게 물어보세요.

배용준이 이영애에게 물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 어떤 인간도 고민 없고, 두려움 없고,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근심 걱정을 몇 가마니씩 안고 살아가고 있어요.

속된 말로 이런 것 다 가졌다고 하여도 생노병사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서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괴롭힙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는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졌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안방마님처럼 마음속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괴롭혀요.

오라 하지 않았는데도 몸은 늙어가고, 병이 들고, 죽어가고 있어요.

 

아침에 거울 앞에 서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서 있지 않나요.

어느새 부모님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날 바라보고 있지요.

머리는 어느덧 하얀 서리가 내려 있고, 얼굴은 쪼글쪼글 무말랭이처럼 되어 있지요.

그 곱디고운 피부도 이젠 곰 발바닥처럼 거칠지요.

 

목욕탕에 가서 거울 앞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세요.

S 라인 같던 몸매는 간 곳없고 뱃살은 출렁이고, 토실토실하던 엉덩인 푹 처지고!

아! 언제 이렇게 되었지!

한숨이 나오지요.

 

그렇다고 요구르트 마사지하고 우유로 목욕하지 마세요.

설령 돈 들여서 주름살 없애고 보톡스 맞아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주름살은 자고나면 또 생겨요.

 

주름살 하나 펴진 것 가지고 기뻐하는 것은 마치 대학생이 구구단 외우고 난 참 똑똑해 라고 희죽거리는 것 같아요.

주름살 몇 개 펴졌다고 예뻐진 줄 아세요.

아니예요.

 

남들이 예쁘다고 하는 말은 이쁘다고 자꾸만 물으니 귀찮아서 그렇다고 하는 말입니다.

말하고선 속으로 어휴! 저 병신! 자기 주제도 모르고 돈 좀 있다고 지랄을 떤다고 욕을 합니다.

겉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다 밥 얻어먹고자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김태희 같아지지 않아요.

젊음은 젊음대로 매력이 있고,

늙음은 늙음대로 매력이 있어요.

제발 회춘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시간에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보세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소망이 생깁니다.

염려 근심이 사라집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지, 백날 거울 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묻지 마세요.

우리가 그럴 때마다 거울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요.

한 숨 푹푹 쉽니다.

예쁘지도 않은 것을 예쁘다고 물으면 그 물음에 답을 해야 하는 거울 입장을 한번 헤아려 보았어요.

 

이건 마치 가나안에 와서 애굽을 그리는 것과 같아요.

애굽으로는 다시 돌아 갈 수가 없어요.

그 시절이 오지 않아요.

 

출애굽을 했으면 이젠 죽으나 사나 가나안으로 가야만 해요.

여러분이 원하든 원치 않튼 하나님이 질질 끌고 가십니다.

어떻게 데리고 가는지 이건 다음 시간에 살펴 볼 겁니다.

 

암튼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세요.

누구는 간암 이래!

누구는 교통사고로 죽었데!

세상에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데!

 

주변에 들리는 소리가 누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자식 결혼 시킨다, 죽었다 하면서 부조금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던가요.

부조금 내라는 소식이 오면 여러분도 이제 인생 제대 할 때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행복하게 해 주시지 않아요.

아담이 범죄하자 그가 살아가야 할 땅을 저주 했어요.

이거 놓치면 안돼요.

땅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은 죄인이 잘 사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애굽이 어떤 곳이던가요?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애굽에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실상을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재앙이 일어나고,

뜻하지 않는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귀찮은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엔 죽어나가 자빠진다는 겁니다.

 

모세가 시편 90편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인생이란? 칠팔십년을 살아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하나님의 분노 중에서 살아간다고 하지 않던가요?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가 싶으면 근심 걱정이 겨울철 문풍지 사이로 바람 들어 오듯이 들어와서 을씨년스럽게 하지 않던가요?

이게 죄 아래서 살아가는 죄인들의 삶입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너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이렇다고 알려 준 겁니다.

그걸 알기나 하고 사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바로나 애굽에 백성들은 자기들이 등짝 붙이고 사는 땅이 이런 곳인 줄 몰랐어요.

 

지금까지 퍼 먹던 나일강물이 피인 줄 몰랐어요.

지금까지 즐겨 먹던 떡이 개구리밥인 줄 몰랐어요.

죽음 냄새가 풀풀 나는 곳에 코 쳐 박고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와서야 비로서 알게 된 겁니다.

우리도 예수 안에 들어와서 알게 된 겁니다.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일평생 갖가지 고통이 끊이지 않고 파도처럼 밀어 닥치는 곳입니다.

하나 해결 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고,

이것 막으면 저것 터지고, 저것 막으면 또 이것 터지고 하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자식들도 하나 근심을 던다 싶으면 다른 놈이 걱정거리 한 다발 들고 오지요.

적금 탈 때 되면 시집이나 친정이나 귀신같이 돈 냄새 맞고 손 벌리지 않던가요.

뜻하지 않게 돈 쓸 일이 생기지요.

단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는 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인생사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삶 속에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이 교차적으로 찾아 들고 있지 않나요.

그럼에도 그 어느 누구도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펴고 하나님이 알려 주니 아! 세상이 이런 것이구나! 를 알게 된 겁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갇혀 있었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봐라! 이 놈들아!

저기 애굽 놈들이 살고 있는 땅이 어떤 곳인 줄 똑똑히 보라고 합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저런 곳에 살고 있었다! 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런 걸 알고도 그런 땅에서 살고 싶으냐? 이 말입니다.

 

너희가 사는 땅이 이런 곳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땅 덩어리가 살 곳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질 곳입니다.

장차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 태워질 곳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자 되고 출세하고 성공해서 사는게 복이라고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목사들이 그러지요.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하면 세상에서 복을 준다고!

 

모세는 애굽을 떠나라고 하고,

바로는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이 시대 목사들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라고 가르치는 놈들은 모두가 바로와 한패거리라는 것이 자연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런 목사들의 말은 그렇게도 잘 듣습니까?

어찌하여서 세상을 떠나라고 하는 목사는 이단이라고 하고,

떠나지 말라고 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바리 바리 싸들고 대접을 합니까?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이사야 선지아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한번 들어 볼까요?

 

사 1:2-6=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이 탄식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늘과 땅에다 대고 말을 하겠습니까!

인간들이 못 알아먹으니 소리치는 겁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어째서 그렇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느냐고 탄식하고 있잖아요.

이 탄식이 지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안 들릴 겁니다.

모두 귀때기에 귀머거리 독사가 착 달라붙어서 못 듣게 하는 겁니다.

세상에 비파와 수금 소리는 들리는데 하나님의 울음소리는 안 들리지요.

 

말씀 들으라고 교회 오라고 하면 밍기적 밍기적 하다가 예배시간 지나서 오지만, 어디 놀러 가자고 하면 새벽같이 오지요.

설교시간이 얼마나 지겨운지 시계만 들여다보지요.

그만큼 우리가 패역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게 작대기로 후려 패서 애굽에서 내어 쫓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안 살아지도록 강도를 만나게 하고,

사고를 당하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자식들이 사고 치게 만들고,

옆집 사람들과 같이 지나가는데 하필이면 내 머리에 간판이 떨어져 머리가 터지게 만듭니다.

하필이면 새벽기도 가는데 강도를 만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게 복인 줄 모르지요.

그 강도를 하나님이 보낸 천사인줄 몰라요.

어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랄까봐서 그렇게도 고집이 세고 목이 곧습니까?

고집 피우는 놈에겐 매가 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성도를 세상에서 왜? 나그네와 외국인과 행인으로 두셨는지를 알겠습니까?

떠나야 하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야 할 곳이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고센 땅은 재앙이 없었지요.

왜? 같은 애굽인데도 하나님이 있는 고센 땅은 재앙이 없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계신 곳은 애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 안은 애굽이 아닙니다.

거기는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죽음이 엄습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피 밖에 세상은 울고불고 죽어가는 곳이지만 피 안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안은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아픔이나 곡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는 곳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 안이 천국인줄 모릅니다.

마귀가 주는 안락함에 푹 빠져서 세상이 천국이라고 믿고 사는 겁니다.

 

지금도 지구상에 일어나는 갖가지 재앙들은 지구의 실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세상에 닥치는 갖가지 재앙은 곧 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의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징조를 보여주시는 것은 성도들에게 피할 길을 찾으라는 싸인 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의미는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사건들입니다.

인간은 일평생 열 가지 재앙과 같은 갖가지 고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도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열 가지 재앙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어가는 것이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인간은 죽고 맙니다.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권세도 열 가지 재앙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진나라 시 황제도 죽었고,

지혜자의 상징인 공자도 죽었고,

종교가의 상징인 석가모니도 죽었고,

권력의 상징인 나폴레옹도 죽었고,

부자의 상징인 카네기도 죽었고,

이름 없는 필부에 불과한 우리도 죽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인간도 결국 생노병사를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재앙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겪는 재앙의 끝이 사망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다가 죽어갑니다.

그렇다면 모든 재앙의 끝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이 됩니다.

죽음에서 벗어난다면 생노병사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도 애굽 사람과 똑같이 죽어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피 때문에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신에 흠 없는 제물이 희생하였고,

그 흠 없는 제물의 피만이 죽음에서 건져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은 오직 하나 어린양의 피입니다.

역설적으로 어린 양의 피만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오직 어린양의 피뿐입니다.

 

비록 죽음이 넘실거리는 애굽 땅에 있지만 어린 양의 피 안은 죽음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피 뿌리는 예(例)로 정하셔서 대대로 가르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例)란? 일회성이 아니고 계속되는 반복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죽음에서 건짐 받는다는 것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알리기 위해서 유월절을 기념케 하신 것입니다.

기념케 한다는 것은 현재 사건화 시킨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 그 피 안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 너머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나를 죽이고 나면 세상이 두렵지가 않아집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고 나면 바울처럼 감옥 속에서도 찬송과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는 십자가에 끌고 가 죽이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넌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자기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말씀은 밥과 같아서 지나고 나면 배가 고파집니다.

다 까먹어요.

그러니 말씀을 밥처럼 끼니 끼니 거르지 말고 먹고 또 먹으세요.

 

말씀이 마음속에 풍성해지면 지금까지 크게 보이던 세상의 문제들이 작게 보입니다.

말씀이 내 속에서 달음질하면 별것 아닌 것을 고민하고 염려 했구나! 를 알게 됩니다.

죽음조차도 기쁨으로 받아 들일수가 있어집니다.

 

이거 하나만 말하고 마칠게요.

제가 어릴 때 살던 고향 집에 가면 집 주변에 아주 작은 도랑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땐 그 도랑이 나를 너무너무 힘들게 했어요.

건너다가 물에 빠져서 양말을 적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도랑을 메우라고 엄청 떼를 썼습니다.

도랑을 한번 건너려면 10미터 밖에서 종종 걸음으로 뛰어 오는 탄력으로 건너곤 했습니다.

어쩌다 짚는 발을 너무 멀리 짚으면 영락없이 도랑에 풍덩 빠지고 맙니다.

그러면 어린 나이에 신발이 젖고 양말이 젖었다고 울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보면 한 뼘도 안돼요.

지난번에 자식들 데리고 고향집에 가서 도랑에 대해서 믿음과 결부해서 말해주었어요.

그땐 그렇게 도랑이 시험거리였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밖에선 그렇게 커 보이던 문젯거리들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아니게 보입니다.

단적인 예로 죽는다는 것이 예수 밖에서 보면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것인데, 예수 안에 들어가면 전혀 두렵지 않아집니다.

 

그러니 세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 밖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두려운 것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증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 안에서 사건을 보았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그런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들어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부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들이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애굽을 바라 볼 수 있는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로 살게 마옵시고 항상 예수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늘 애굽을 피 안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은혜로 주장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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