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히브리서.강해)17강. 믿음으로 건넌 홍해바다 (히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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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2022. 4. 1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7강. 믿음으로 건넌 홍해바다 (히 11:29)

-.정낙원 목사

 

히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 구원도 인간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도 성도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구원을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인물들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삶을 살도록 간섭하신 믿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심에 인간들이 동의하고 흔쾌히 순종하였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정반대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면 제가 예!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라고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반하는 것으로 주어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 뜻을 거부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항상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죄인이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사기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불순종의 바탕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에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각엔 믿음에 조상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으리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불순종하며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

그 불순종의 대표적 사건이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불순종으로 낳았고 이삭도 불순종으로 낳았어요.

이들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증표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순종한 것은 있지만 그 순종을 이끌어 내기까지 하나님께서 수없이 간섭하셔서 거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속의 어느 인물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 뜻에 순종하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이끌고 오셨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설교의 초점이 누구를 본 받읍시다! 라고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간섭하셨습니다! 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것이지 인간의 순종이나 충성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죄인을 용서하시고 끝까지 자기 백성들은 은혜와 긍휼로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항상 인간의 불순종을 바탕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민족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같은 인간이지만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욕이 저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아니 그토록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은혜를 주셨으면 늘 하나님만 섬기고 살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섬기고 그랬어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신앙생활을 할 때는 구약 이스라엘을 이해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무슨 놈에 인간들이 이러냐?

나 같으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먹여주시면 하나님을 진짜 잘 섬겼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어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구약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제가 있었다면 내가 그 놈들을 다 잡아 죽였을 것처럼 비분강개 하였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구약 이스라엘이 바로 나였다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바로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엔 저 놈들은 당연히 죽어도 싼 놈들이야 라고 했는데!

이젠 주여! 제가 바로 구약의 불순종한 이스라엘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엔 누가 죄를 지으면 욕을 했는데 이젠 욕을 할 수가 없어요.

남에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내 일처럼 느껴져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율법 아래서 열심과 충성과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한 일들이 전부 내 열심이었고 나를 위한 충성이었고 나를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허울이고 실제론 모든 일들 속에 나를 드러내고자 한 일들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어떤 일에 결과를 항상 챙기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누가 알아주면 기분이 좋고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나를 위한 열심과 충성이었음이 확실히 드러나는 일이에요.

 

은혜를 받고 보니 제가 일한다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난 하나님을 믿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끌고 오셨구나! 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여도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라는 것이 깨달아 진단 말입니다.

 

이런 마음은 율법 아래 있었을 때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율법 아래선 모든 것이 립서비스 였어요.

모두가 하나님의 열심을 가장한 내 열심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성경의 증거는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적이 없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자이지 절대로 도움을 주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들이 솔선수범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을 것 같으면 구태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무슨 무슨 일을 하였다고 증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거론하면서 앞서 믿음으로 누구는 이런 일을 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거역하였음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일을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빠뜨려짐 없이 다 이루어 가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지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에부터 가나안까지 단 한 번도 순종으로 따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불순종하였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였다고 말해주는 것은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열 가지 재앙을 당한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도 열 번 하나님은 거역하였고, 이스라엘도 열 번 거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고 바로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들을 잡아 끈 믿음이 있었고, 바로에겐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끄셨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는 차차 이야기 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이 무엇인가 분명하게 아셔야 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은 그들이 순종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은 아브라함과 한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남과 못남과 상관없이 430년 전에 아브라함과 한 약속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 속에서도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믿지 않았음에도 기어코 이삭을 준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했기 때문에 불순종해도 준 것이에요.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삽니다.

그럼에도 천국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속에 천국에 보내준다는 약속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 때문에 영생을 받은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이니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약속 때문이지 우리가 예수 잘 믿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겐 하나님께서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홍해바다에서 살아난 것이고 애굽의 바로에겐 약속이 심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홍해에서 몰살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와 같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대적하였음에도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심어 놓은 그 약속 때문에 은혜로 대해서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신자나 불신자나 살아가는 모습은 대동소이합니다.

모두가 한 지붕 아래서 범죄하면서 살아갑니다.

 

불신자도 죄 짓고 살아가고 신자도 죄 짓고 삽니다.

불신자는 죄 짓고 신자는 죄 안 짓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죄의 몸으로 죄의 권세가 넘실대는 저주 받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천국에 가고 불 신자는 지옥에 갑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겐 언약이 담겨져 있고 불신자에겐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구원 받고 불신자는 믿음이 없어서 저주를 받아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 백성이 똑 같이 홍해를 건넜는데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안 죽고 애굽 군대는 믿음이 없어서 죽은 것과 같아요.

이는 이스라엘 속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었고 애굽 사람들에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여서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제사는 열심히 지내는데 하나님께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은 모른다는 겁니다.

 

죄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 안타까움은 버리시고 하나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감사가 되어야지 내가 뭔가를 한 것이 자랑스러워지면 안 됩니다.

 

일평생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한 유대인은 지옥에 갔고, 하나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리와 창기들이 천국에 갔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살란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선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긍휼이 여겨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맨 날 소를 잡고 양을 잡는 제사 드리기에 바쁘지,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복음으로 인한 기쁨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차려 놓은 밥상에 여러분 것을 얹으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벌려 놓은 잔치 집엔 빈손으로 가세요.

잔치를 준비한 쪽에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수저에서부터 음료수에다 이쑤시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손님이 준비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인장에서 너무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세요.

주인을 영화롭게 하세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로 비유하셨잖아요.

그 혼인 잔치엔 입을 옷까지 다 준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옷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천국에선 당신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잔치 집에 초대해 준 것만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왕이 차려 놓은 상에 음식을 마음껏 잡수시면 됩니다.

그리곤 왕에게 감사하다고 하십시오.

왕이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왕이 여러분에게 일하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왕의 아들에 혼인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만 하면 됩니다.

아들 참 잘 생겼습니다!

음식 참 맛있습니다!

내 생전에 이렇게 맛있고 귀한 음식은 처음 먹어봅니다!

이런 영광된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만 하면 됩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이 소리가 안 나옵니까?

하나님이 언제 여러분들에게 뭘 가지고 오라고 합디까?

왜? 호흡하는 것에서부터 목구멍에 넘어가는 것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첫째도 감사!

둘째도 감사!

셋째도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얻어먹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자식이 아침에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미안해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자식이 엄마가 미안해하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십니까?

아니잖아요.

 

너는 왜? 아침 일찍 일어나 엄마를 돕지 않는냐고 화를 냅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밥 한 그릇 뚝딱 먹곤 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단 말이야! 라고 하면 엄마는 흡족해 하십니다.

 

너 왜? 내 공을 모르느냐 하지 않아요.

엄마는 자신이 해준 음식을 맛나게 먹는 자식의 모습만 보아도 흐믓해 하십니다.

이게 부모입니다.

이게 부모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살면서 이런 못난 인간을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자세로 살면 됩니다.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속을 너무 썩이셨구나! 를 아세요.

 

그 부모님의 마음을 여러분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기 자식 낳아 키우면서 그들에게 갚으세요.

그게 인간입니다.

“내리(아래) 사랑은 있어도 치(위) 사랑은 없다” 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선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부모에게 은혜를 갚은 자식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돈 좀 드렸다고 부모님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부모님의 은혜는 돈으로 계산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돈으로 계산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입니다.

제발 그 알량한 돈 몇 푼 가지고 자식 도리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깟 봉사 좀 하고, 헌금 좀 하고, 충성했다고 하나님 일 했다고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하면 얼마나 했다고 꼴값들을 떱니까?

 

최고의 자식 도리는 부모님의 은혜로 세상에 나오고 자라고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늙은 부모라 할지라도 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난 엄마 없으면 못살아! 라고 응석을 부리세요.

그게 제일 큰 효도입니다.

부모라는 존재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마세요.

 

부모님은 여러분들이 응석이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그래 내 새끼야! 라고 하면서 흐뭇해하십니다.

부모님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부모님 은혜를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제가 지금 효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를 부모를 시청각 교제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한 것을 들어보세요.

 

사 1:2-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했으면 하늘과 땅에다 대고 말하고 있겠습니까?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소도 제 구유를 지켜준 주인은 아는데 내 백성은 모른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탄식을 하고 계십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죽 하셨으면 하늘에다가 소리치고 땅에다 소리치겠습니까?

이는 지나가는 길손을 붙잡고 탄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보시오!

벗님네들 이내 말씀 좀 들어보소!

내가 자식을 키웠더니 이 새끼들이 지 애미 애비도 몰라본답니다! 라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아픔이 여러분 속에 전이가 되지 않습니까?

이 아픔이 전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철이 없거나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 속엔 성령이 임재해 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울면 우리도 울고,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아파하면 우리도 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통하여서 아픔을 토해내고 울고 계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가 하나님 대신 울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성도가 울어야 합니다.

 

가족이란?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자입니다.

부모가 울면 자식도 울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으로 다가 올 때 비로서 가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때 비로서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울고 계시는 그 통절함이 와 닿지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도 낫지 않아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남에 자식은 잘못을 하면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여도 내 자식은 그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욕할 수 없고 도리어 보듬는 것은 내 피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하늘과 땅을 향해서 통곡을 하면서도 이스라엘을 내 칠 수 없는 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뭐길래!

불순종까지도 용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순종까지도 다 용납하시는 능력입니다.

두들겨 패면서도 아이쿠 내 새끼라고 아픈 상처를 보듬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찬송가가 있는데 한번 불러볼까요.

 

찬송가 한 번 불러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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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장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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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스스로 일을 이루어 갈 수가 없는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두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못 드렸다고 애통해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살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세요.

460장 찬송을 개념 없이 부르지 말고 가사 하나 하나 음미하면서 불러 보세요.

 

지난 시간 피 안에서ㅜ 바라본 애굽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피 안이란? 예수 안을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죽은 자로 보이는데 예수 밖에선 산 자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예수 밖에선 살아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

예수 안에선 죽었기 때문에 긍휼을 구합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항상 자신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라 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는 모두가 말씀이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믿음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 밖에 사람과 예수 안에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지 자기가 한 일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안한다는 말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제가 앞선 시간에서 인형극 비유에서 인형 속의 손으로 비유하였어요.

이를 안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겁니다.

바울은 자기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은 모두가 주께서 하신 것이라고 고백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폼 잡고 겸양을 떨고자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울의 이 고백을 자기 품위 지키는데 사용하고 있어요.

특히 목사들이 그래요.

 

말로는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지요! 라고 하면서도 자기가 한 것이라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얼마나 부흥을 시켰는데 왜? 내 공을 무시하느냐 라고 합니다.

이건 완전이 사기꾼입니다.

아니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한다면 자기 앞에 닥친 그 어떤 좋고 나쁨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야 할 것 아닙니까?

 

목사에게 적용한다면 교회에 있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걸 믿는다면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예! 하고 나가야지요.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내가 왜? 나가느냐?

내가 못한 것이 뭐가 있느냐?

왜? 내 공을 몰라주느냐? 라고 악다구니를 씁니다.

이게 전형적인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이 믿음을 흉내 내고자 하는 짓거리들입니다.

믿음은 없으면서 믿는 척을 하여야 하겠기에 믿음을 말하면서 자기 행위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예수 밖에 있을 때 그랬습니다.

율법으로 신앙생활 할 때입니다.

그 땐 내 열심과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였으니까요.

그러니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한 겁니다.

목사님이 남들과 달리 대우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열심도 많이 하고, 충성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저에게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잘하세요!

그러면 그게 어디 제가 했나요!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해요.

말은 청산유수에요.

 

성경을 많이 읽으니 자연히 성경적인 말을 하지요.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선 너희들하고 난 다르다고 우쭐합니다.

이런 차별성이 교회에서도 항상 으뜸이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알아주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면서 어디 이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는가 보자! 라고 해요.

 

실제로 제가 목사님과 트러블이 생겨서 교회를 옮긴 적이 있거든요.

먼저 있던 목사님이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다른 곳으로 가고 새로운 목사님이 왔어요.

처음엔 잘하는 것 같더니만 2-3년 지나면서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지역에 이상한 여 전도사가 성령에 은사를 보따리장사 하듯이 교인들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기도해 준다고 하면서 그러는 겁니다.

교인들은 너도 나도 여전도사를 불러서 집에서 집회를 하는 겁니다.

잘 아는 집사님이 하도 오라고 하길래 어떻게 하는가 관찰하려고 저도 참석을 해 보았어요.

그런데 영 아닌 겁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에게 이건 아니지 않느냐 라고 따졌습니다.

 

그런데 이 때가 마치 목사님이 위임을 하고자 교인들을 포섭을 할 때입니다.

의성인가 하는 시골에서 왔는데 목사가 된 지 삼년 밖에 안 되었다고 해요.

늦게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그래서 시골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고향인 집사님 우리교회에 한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그 목사님을 청빙하자고 해서 오게 된 겁니다.

 

목회한지도 얼마 안 되고 시골에 있다가 도시에 와서 해 보니 월급도 많이 주고 대접이 좋으니 완전이 땡 잡았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눌러앉으려고 약 2년 지나고 나니 위임을 시켜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때 제가 대단한 열심이었거든요.

열심도 많고 봉사와 충성도 잘하고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많이 하고 갖가지 은사 체험도 하던 때입니다.

헌금도 교회에서 제일 많이 하던 때였어요.

그때 성경도 엄청 많이 읽었을 때입니다.

또 한창 방언을 받고 환상을 보고 하던 때였어요.

그러니 나도 성령에 은사 그러면 한 가닥 하던 때였으니 내 나름대로 분별력을 갖고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였는데도 그땐 그게 그렇게 신이 나고 황홀했어요.

예수 안에 들어오고 보니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 그 당시 그게 최고인줄 알았어요.

누가 뭐라고 하면 당신 방언 해 봤어!

안 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당신 환상 봤어!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그 땐 그랬어요.

 

솔직히 목사님도 방언을 못하고 환상도 못 보면 세피하게 보았어요.

성경 말씀도 제가 더 많이 아는 것 같았어요.

하도 부흥회를 많이 쫓아다녀서 들은 것은 엄청 많았거든요.

유명한 목사들 흉내를 냈으니까요.

그러니 목사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겠어요.

안 들어와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목사님이 골치께나 아팠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은 교인이 똑똑하면 피곤하잖아요.

교인들이 성경도 모르고 기도도 안하고 열심도 없고 적당히 죄도 짓고 해야 목사가 큰 소리 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건 목사보다 기도도 많이 하지 성경도 많이 보지 거기다 교회 일은 도 맡아서 다하지

이건 완전히 버리지도 못하고 안지도 못하는 계륵입니다.

 

암튼 성령 보따리 장사하는 여 전도사 문제로 성경 공부하는 시간에 따진 겁니다.

만약에 혼자 종용히 찾아가서 말했으면 내 말에 동의를 해 주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성경 공부하는 시간에 따지니 위임식 표 때문에 내 편을 안 들어주고 교인들 편을 들어주는 겁니다.

위임을 하자면 교인들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교인들을 단속하다보면 마음을 빼앗길까봐서 그냥 두라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다투고 교회를 옮기게 된 겁니다.

왜? 내 충심을 몰라주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드시 내 편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주 웃기지요.

하지만 그 땐 예수 밖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펄펄 살아 있어서 그랬어요.

 

교회를 옮기면서 이놈에 교회 어디 한번 잘되는지 두고 보자 그랬어요.

교회조차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이놈에 교회였어요?

세상에 교회를 향하여 이놈에 교회라고 저주를 했어요.

참 대단힌 믿음이지요?

맞아요.

율법 아래선 내 행위가 모든 믿음의 척도가 되기 때문에 열심과 충성이 특심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이놈에 교회 어디 잘 되는가 보자?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말입니까?

날 알아주지 않는 교회는 망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을 최고로 많이하고 충성스러웠거든요.

그러니 날 알아주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닌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 때 안수집사 두 가정하고 여섯 가정이 옮겼어요.

모두가 저를 따라 나온 겁니다.

크고 작은 교회마다 알력들이 있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목사님 청빙 할 때 꼬깝게 생각한 사람들이었는데 막상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 내 편을 들어 준 겁니다.

그래서 함께 행동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목사나 저나 똑같이 예수 밖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니 누가 잘하고 못하고가 없어요

다 무당 노릇한 것이니까요.

그 땐 비록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여도 목사님이 하는 짓이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은 알았어요.

그래서 그땐 정의감에 불타서 그런 짓을 하였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예수 밖에 있으면 이렇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예수 밖에 있으면 자기 부인이 안돼요.

모든 일에 중심엔 내가 있어요.

 

항상 내가 한 것입니다.

주님이 한 것이 없어요.

주님이 하였다는 것은 립 서비스 일 뿐입니다.

그러니 항상 무슨 일 끝엔 내가 있는 겁니다.

 

예수 밖은 절대로 자기 부인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무슨 캠페인 벌리고 무슨 운동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육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부인은 믿음이 와서 자기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믿어질 때만 가능해 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 때는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비로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 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오늘본문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는 건넌 것은 믿음으로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건너게 하셨다는 것은 불순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누누이 말했습니다.

순종하였으면 믿음으로 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출애굽기에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널 당시를 살펴보면 이들이 과연 하나님께 순종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한번 살펴봅시다.

 

출 14:8-12=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 데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의 증거를 보면 이스라엘은 홍해바다 앞에서 하나님께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럴 줄 알고 애굽에서 바로 왕을 섬기고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꼬드겨서 이런 개 고생을 당하게 하느냐? 라고 악악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추상적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할렐루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멘! 할렐루야는 인간의 육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인간은 아멘! 할렐루야가 아니라 원망과 불평을 토해냅니다.

지금 홍해 바다를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홍해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어서 건넌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이들을 건너게 한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군대는 왜? 홍해바다에서 죽었으며 이스라엘은 왜? 안 죽었을까요?

바로의 군대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죽었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믿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대로 살면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뭔가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행함의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예수 밖에 있는 유대교 사고방식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밖에 있으므로 지금도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착실하게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눈엔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주께서 하신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그럼 우리는 로보트냐?!

그럼 예수 믿는 우리는 무엇이냐?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신앙이냐? 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악함은 자기가 배제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기도 끼워 달라는 겁니다.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 라고 성질을 냅니다.

이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자기가 움직여야 믿음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항상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으로 안식하지 못하고 늘 주님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고자 합니다.

나도 밥상 차리는데 거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고맙습니다! 가 안 나오고 나도 이런 일을 했습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왜?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고 알아주지 않느냐? 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 이루심 안에서 감사하며 살면 되는데 끝까지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주께서 다 이루심을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입술로는 엄청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행함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행함에 따라 춤을 추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해 놓은 규범에서 이탈이라도 하면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다리오 왕처럼 자기가 만든 법에 걸려서 스스로가 용납을 못하고 괴로워하는 겁니다.

사십일 특별 새벽기도라도 하는 기간에 하루하루 일수 도장을 찍는데 행여 한번이라도 빠져 보세요.

안타깝고 신경질 나고 괴롭습니다.

 

그러니 늘 자기 행함에 춤을 추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요.

이건 대책이 없어요.

그럼 그렇게 사세요! 라고 해야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박수를 치고 감사하며 살면 되는데 자신이 나서서 뭔가 하나님 일에 보탬을 주어야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데서야 어찌 말리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사세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늘 이벤트 하듯이 오늘은 어디서 어디까지 하고 내일은 어디서 어디까지 하듯이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는 보람으로 삽니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가 송편을 빚는다고 하니 어린아이가 자기도 하겠다고 팔 걷어 부치고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 놓고선 자기가 했다고 뿌듯해 하고 자랑해요

이런 사람에겐 그게 아니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그래 잘했다 그래야지 이걸 어찌 말리겠습니까?

 

제 글에도 수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주로 성화주의자들과의 논쟁들인데 단 한 사람도 자기 뜻을 포기한 사람이 없어요.

자기 딴엔 정답이라고 생각하니 포기 할 수가 없지요.

포기 시킬 이유도 없어요.

스스로가 아! 내가 잘못 알았네요! 라고 할 때 까지 내 벼려 두어야 해요.

 

신앙생활은 자기가 깨닫는 것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까만 안경을 쓰고 까맣다고 하는데서야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아니 본인이 까맣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걸 어째 하얗다고 합니까?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율법이라는 성화주의 안경을 쓰고 온 세상을 성화주의로 판단 할 때와 같아요.

돌아다니면서 자기 딴에 하나님께 충성 한답시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눈에 율법이라는 성화주의 비늘이 떨어지고 나서야 율법으로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단인줄 알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안경이 문제이지 그 사람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주님이 심방을 해서 눈에 비늘을 떼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가르치는 믿음을 보세요.

여러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바라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선 이런 믿음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은 믿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속에서 살아남았으면 하나님을 믿을 만도 한데 이들은 안 믿었어요.

그토록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체험하였으면서도 안 믿었단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기적을 맛보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다 미련하고 덜 똑똑해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그 때 뿐입니다.

인간은 늘 두려움이 엄습해요.

한 번 두려움을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래서 기적을 맛 보았다고 그 약효가 평생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마치 한끼 푸짐하게 밥을 먹었다고 해서 영원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돌아서고 나면 금새 또 배고파집니다.

아무리 점심을 배부르게 먹었어도 저녁 밥 안 먹으면 육신은 밥 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 무슨 은사를 행하였다거나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믿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이란?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동의하면 믿는 것이고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지 우리가 동의하고 안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원망이 나옵니까?

여러분 뜻대로 안 될 때 원망이 나오지요.

자기 뜻대로 되면 원망하지 않아요.

부모도 자식도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원망스럽고 속이 상해요.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자기들 생각대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뜻대로 하나님이 척척 알아서 해주면 왜? 원망하겠습니까?

자기들이 만약 일한다면 이처럼 벼랑 끝 전술을 쓰지 않아요.

바로 왕이 꼼짝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지 끈질기게 쫓아와서 자기들을 위협하게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항상 못 믿을 것으로 하게 합니다.

오금이 저려서 더 못 따라 다녀요.

가슴이 타들어 갑니다.

그러니 원망이 터지는 겁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원망으로 지샌 것도 자신들 같으면 이렇게 인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점보기에 태워서 날아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뭘 복잡하게 홍해를 건너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합니까?

광야에서 밥 주는 것도 그래요.

그냥 자고 일어나면 우렁각시가 차려 놓은 밥을 먹게 하지요.

 

그런데 새벽마다 일어나서 만나를 주워 먹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늦잠 자고 나면 다 썩어버리고!

또 만나를 주시더라도 한 달 치 한꺼번에 주면 어디 덧납니까?

사람 고달프게 매일 매일 왜? 꼭 하루치를 주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를 내 버려두라고 하는 겁니다.

제발 좀 간섭하지 말고 자기들이 하고픈 대로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를 키워보면 알지요.

그 쬐끄만 놈도 간섭하면 신경질을 냅니다.

엄마 젓을 빨다가도 잘 나오지 않으면 콱 깨물어 버려요.

 

이스라엘이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은 거기선 시키는 일만 하면 간섭하는게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시키지 않고 간섭을 해 댑니다.

이게 환장할 노릇입니다.

차라리 뭘 하라고 하면 좋아요.

밭을 갈라고 하면 밭을 갈고 꼴을 베 오라고 하면 꼴을 베 오겠어요.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사람을 깝깝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기도해라 전도해라 봉사해라 충성해라 헌금해라 그러면 좋겠는데!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니 답답한 겁니다.

믿어지지는 않지!

그렇다고 포기 할 수는 없고!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려니 얼마나 힘이 들어요.

그렇다고 마음이 개운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늘 불안 불안 한 겁니다.

 

누가 예수 만났다고 하면 그래 예수가 어떻게 생겼던데!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으니 맨 날 남이 만난 예수를 이야기 해 달라는 겁니다.

자기가 믿어지는 것이 없으니 맨 날 남이 말하는 믿음을 구경하는 겁니다.

그래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이 알려준다고 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지 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어요.

뭔가 잡히는게 있어야지요.

아무리 믿음으로 사세요! 라고 해도 뜬구름 잡기 식으로 허한 겁니다.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러는 겁니다.

아무 일도 안 시키고 하나님이 하는 일이나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맨날 기적을 베풀어도 기쁘지 않은 겁니다.

 

애굽에서 자란 종(從)에 근성이 있어서 나도 일 좀 시켜 달라는 겁니다.

나도 하나님 일에 참여시켜 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께!

내 품에 둥지를 틀어! 라고 합니다.

 

이 정도 되면 원망이 안 나오면 죄인이 아니겠지요.

왜? 우리를 배제하고 하나님 혼자 설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매일 매일 만나를 얻어먹는 것도 귀찮아요.

고맙지도 않아요.

아니 언제 공짜로 밥 달라고 했습니까?

일을 시키란 말입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밥 먹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불평과 똑 같아요?

열심히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만 믿으라 하지 말고 뭘 시켜 달라는 겁니다.

믿어지게 해 주는 예수는 재미없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고 일을 해도 내가 해야 된다는 겁니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 지려는 것입니다.

제발 떳떳해 지려고 하지 마시고 바보 쪼다 같이 사세요.

하나님께 빌어먹고 산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께 빌어먹는 것을 수치라고 여겨지십니까?

수치라고 여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는 말이 듣기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해 지려는 교만입니다.

이름하여 죄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히 출애굽기를 보면 믿지 않았는데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건넜다고 하고 있으니 성경이 어렵고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는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믿음이 건네주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믿음이 노아의 방주처럼 이스라엘을 태워서 홍해를 건너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쉽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안 믿었어요.

원망하고 불평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에 태워서 홍해를 건너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데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믿었느냐 안 믿었는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 속에 아브라함 언약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믿지 않았음에도 믿음으로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 언약이 고래 등에 꽂힌 작살처럼 꽂혀 있으니 믿음으로 그들을 구원해 낸 것입니다.

성도가 천국에 가는 데에는 내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믿음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춤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믿음으로 구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요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몸에 심겨져 있느냐 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 얻기로 작정이 되어 있느냐 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 얻기로 작정 된 사람이라면 그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구원하시기로 약속을 해 놓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으로 구원을 해 가십니다.

 

어째 우리가 알고 있던 믿음 관과 전혀 다르지요.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믿음 관과 전혀 다르지요.

맞아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달라요.

인간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의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고백하라고 강요하잖아요.

믿는다고 하면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타박하잖아요.

 

그런데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에게 너희들 하나님 믿었어! 라고 물으면 우린 안 믿었는데요! 라고 말해요.

그런데 어떻게 홍해를 건넜어!

하나님이 믿음으로 건너게 해 주었어요!

아니 안 믿었다면서!

예! 안 믿었어요!

그래서 믿음으로 건너게 해 준 것입니다.

 

바로 군대는 왜? 홍해바다에 몽땅 빠져 죽었습니까?

그거야 그들에겐 하나님이 믿음으로 건너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애굽에 군대는 홍해를 건너게 해주는 믿음이 없었고, 이스라엘에겐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니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쪽에서 있다 없다 말할 성질이 아니지요.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이 순종하든 순종하지 않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구원해 낸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구원해요!

 

그럼 구원을 받은 성도는 어떻게 고백을 하여야 합니까?

내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해야 하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내가 행사한 내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자랑할 데가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구원해 준 겁니다.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난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믿음이 덮쳐와서 나를 죄와 사망이라는 홍해바다에서 낚아챈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어렵습니까?

아주 생경하게 들립니까?.

이런 말이 생경하게 들린다는 것은 그 만큼 믿음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육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생경하면 읽고 또 읽고 소화를 하셔야 해요.

설교를 빨리 읽으려고 하지 말고 완전하게 이해를 하셔야 해요.

진도 나가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시면 또 보시고 또 보시고 그래도 안 되면 질문해서라도 완전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홍해는 수영을 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려면 파도에 끄떡없는 잠수함이 있어야 해요.

그 잠수함 이름이 믿음이에요.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잠수함은 이스라엘은 있었는데 애굽 군대에겐 없었어요.

 

애굽 군대 눈에는 믿음이라는 잠수함이 안 보였어요.

투명 유리로 되었으니 보일 턱이 없지요.

그 투명 유리는 믿음의 눈으로만 보여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투명 유리로 된 잠수함을 타고 홍해를 건너고 있는데, 애굽 군대의 눈에는 그냥 건너는 것으로 보인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에 뛰어 들자 자기들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고 뛰어든 겁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이스라엘은 잠수함에 타고 있었던 겁니다.

그 잠수함이 바로 신약에선 예수님입니다.

 

자 이걸 죄 문제로 접근해 봅시다.

예수를 믿는 성도도 죄를 짓고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

살인죄라고 봅시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살인죄를 지었으니 감옥에 가거나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성도는 석방을 시켜주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사형을 시킵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이건 불공평 하다고 따집니다.

왜?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성도는 살려주고 난 안 살려 줍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하는 말이 그야 성도에겐 예수가 있고, 넌 예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니 예수가 뭔데!

살인을 저지른 성도들을 살려 줍니까?

응! 예수가 누구냐고!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시는 분이야!

성도들 죄를 예수가 다 담당했어!

성도들이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가 다 담당해 줬거든!

 

그래서 내가 성도들에겐 죄를 물을 수가 없는거야!

너와 성도의 차이는 너는 예수가 없고, 성도들에겐 예수가 있다는 것이야!

성도가 잘나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 때문에 살려주는 거야!

넌 너의 죄를 누가 대신 담당해 줄 사람이 없으니 너는 네 죄 값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성도가 살인한다고 해서 너도 살인하면 큰일 나!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살인하기 때문에 쟤네들에겐 죄를 물을 수가 없어!

성도들이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죄로 다스릴 수가 없어!

왜? 그런 줄 알어!

그건 저 놈들 죄를 예수가 다 담당했거든!

그러니 죄를 지어도 죄로 여길 수가 없는 거야!

넌 죄 값으로 죽는 것은 예수가 없기 때문이야!

이게 성도와 너의 차이점이야!

 

이걸 홍해바다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예수가 있었고, 애굽에 군대는 예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다고 애굽이니 따라 건너다가 몽땅 몰살당한 겁니다.

구약에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고, 신약에선 예수님으로 건넌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는 건넌 것을 세례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구약 이스라엘은 지금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란? 죽음을 말합니다.

성도가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니 율법으로부터 자유자입니다.

 

교회에서 세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난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라는 고백적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라는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세례는 받고서도 율법신앙으로 살면 그 사람은 세례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머리에 물만 끼얹은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반대로 머리에 물은 끼얹는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하여도 믿음으로 살면 그 사람은 세례 받은 것이 됩니다.

세례는 의식이 아니고 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실제로 세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적 신앙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면 그는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속량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자유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누누이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으로부터도 자유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애굽 사람이지 홍해 바다를 건넌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이 이루어진 자들입니다.

앞선 시간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 백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도이기 때문에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자에겐 하나님 말씀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지 예수 밖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산자와 연관성이 있지 죽은 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 필요가 없어요.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은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말씀이 주어진 것은 그 말씀으로 복음을 더욱 더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지키려고 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얻어진 구원의 풍성함을 더 많이 더 깊게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 밖에 있는 자들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차별성을 알게 됩니다.

 

야! 내가 저런 곳에서 구출을 받았구나!

저 지긋지긋한 애굽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던 곳에서 어린 양의 피로서 구원을 받았구나!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구나!

그러니 성도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짐이 아니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더 알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성도에게 있어 말씀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고 감사할 것입니다.

말씀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 밖에서 말씀을 대하는 자와, 예수 안에서 말씀을 대하는 자는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말씀을 대하는 자는 그 말씀을 예수 안에서 보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대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대신 다 지켜 주신 것으로 대하기 때문에 감사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밖에서 말씀을 대하는 자는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대하기 때문에 말씀은 항상 지켜야 하는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성화주의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서 홍해란 그져 바다를 건넌 의미가 아니고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세례는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함께 죽었다는 것은 한 몸으로 연합하였다는 말입니다.

연합이란? 예수님과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롬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과의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다면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줄만 알았는데 다시 살아남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났습니까?

죄와 사망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난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율법이 어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죄와 사망도 어쩌지 못하지만 율법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 영역에서 벗어나 다른 영역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의 영역이 다름을 홍해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중심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홍해 이전의 세상은 죄와 사망이 넘실대는 세상이지만, 홍해 저쪽은 죄와 사망이 근접할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홍해 이쪽은 죽음이지만, 홍해 저쪽은 생명입니다.

 

그러니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은 이제 애굽에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왕을 두려워 할 종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의 종으로서의 애굽에 이스라엘은 홍해바다에서 다 죽었습니다.

 

바로의 권세 아래 쩔쩔매던 종은 죽었습니다.

이젠 바로가 만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성도를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죽음과 상관이 없는 세상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오니 땅에 음식을 안주고 하늘에 음식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라는 겁니다.

존재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는 전혀 보지도 못한 양식을 주시는 겁니다.

이제는 너희들은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말씀(약속)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광야에서 애굽에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은 자는 출애굽 한 자가 아니라는 것으로 간주되어 징벌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엔 떡 먹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약속을 믿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록 몸은 출애굽 하였을지라도 애굽에 떡을 달라고 하는 자는 마음은 애굽에 마음 그대로이니까 출애굽한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넣어 주어 보아야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가나안은 애굽에 마음으로는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애굽에 근성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애굽에서 태어난 1 세대들을 몽땅 광야에서 죽이고 가나안엔 광야에서 태어난 2 세대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세대들은 우리 옛 사람을 싱징하고 2 세대들은 새 사람을 상징해요.

 

이걸 신약에서는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갈라낸다고 합니다.

 

롬 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유대인은 몸에 할례를 한 자이고, 이면적 유대인은 마음에 할례를 한 자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할례(세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가 할례라고 합니다.

몸뚱이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할례란 세례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할례나 세례나 홍해 건넘이나 다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니 할례나 세례나 홍해를 건넌 것은 의식이 아니고 그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난 죽은 자라는 것으로 사느냐 입니다.

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예수 안에서 사는 나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살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것들만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떡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의식만 붙잡고 있는 표면적 유대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진짜 이면적 유대인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은 내 나라가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사는 자입니다.

 

이런 상태를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니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가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자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이고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출애굽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만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표면적 이스라엘 속에서 이면적 이스라엘을 골라내십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 속에서 진짜 아브라함 후손을 찾아내신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진짜 유대인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마귀 새끼라고 합니다.

 

참 아브라함 후손은 누구냐?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으로 되는 자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12제자들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선택으로 되어진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겁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언약이 담겨져 있으면 믿음이 이들을 간섭해 나가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기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즉 내 믿음과 상관없이 믿음이 덮쳐와서 구원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덮쳐오면 나를 산 자로 두지 않고 죽은 자로 만듭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산 것이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그러니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사는 내가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사는 성도는 자기를 보지 않아요.

항상 자기를 살게 해주신 분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살게 해 주신 분만 증거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씀에 순종하고 살도록 인도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이 대신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았다 하여도 그 삶은 내가 살아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낸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산 것을 내가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말씀대로 산 것이 자랑이 아니라 나를 간섭하신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그저 살게 해 주시는 분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성령이 때를 따라 간섭하시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어떤 정형화된 틀이 없습니다.

그 때 그때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그 때 그 때 주께서 인도하는대로 살아요.

주님이 우발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사람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살아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계획이나 자기 뜻이 없어요.

그러니 자기 것이 없지요.

부모도 내 것이 아니고 자식도 내 것이 아니고 전토도 내 것이 아니예요.

때로는 복음을 위해서 부모를 버리라고 하면 예! 하고 버립니다.

자식을 버리라고 하면 예! 하고 버립니다.

전토를 버리라고 하면 예! 하고 버려요.

 

여기서 버린다 함은 복음 보다 더 가치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모나 자식이 복음에 반하는 일을 하면 정을 둘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부모나 자식보다 복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중심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복음을 알고 나서 세속적인 말로해서 눈에 뵈는게 없어졌어요.

예수 이외는 다 지엽적인 것들로 보여져요.

나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지 가족이 아니거든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 아니고 주님 보다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아내나 자식일지라도 복음에 관심이 없으면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자식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건 말건 행복하건 말건 큰 신경을 안 써요.

자식들 인생을 내가 살아줄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간섭하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식들 인생 때문에 내가 희비 할 이유가 없지요.

 

물론 부모로서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지 아니할 수는 없어요.

늘 걱정은 해요.

하지만 복음 보다 앞설 순 없단 말입니다.

 

내가 희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이러한 것은 내가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나 모든 것들을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 솔직히 아내나 자식들에게 그럽니다.

난 가족이라 할지라도 복음 보다 앞설 순 없다고 합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서운 할 수가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복음 중심으로 살면 주님께서 아내나 자식의 마음까지도 간섭해 주세요.

내 자식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가 어찌하지 못합니다.

마음을 지으신 분이 간섭해 주어야 해요.

그러니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어요.

 

내가 자식들을 관리하려면 관리 할 수도 없을뿐더러 스트레스 받아서 못삽니다.

왜? 내가 어찌하지도 못할 것으로 고민합니까?

우린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어요.

이건 무책임 한 것이 아니에요.

정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열 받는 것은 그 자식이 자기 마음에 들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식을 자기 소유화 하고 싶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식은 또 다른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간섭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자식도 죄인입니다.

죄가 그를 주장해요.

죄가 뭡니까?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부모 간섭 받기 싫어하는 겁니다.

왜? 내 인생을 부모가 간섭하느냐? 라고 반항하는 겁니다.

반항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자신도 죄인으로서 당당히 살겠다는데 왜? 부모가 간섭합니까?

 

자식이 내 것이라고 여겨지면 맨 날 싸워야 해요.

자기 것도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예수 안에서 자식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고민 할 일이 전혀 없어요.

 

아브라함이 할례로 죽고 나니 이삭을 자기 자식으로 안 본 겁니다.

그러니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 군말 없이 예!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것을 하나님이 달라고 하는데 반발할 이유가 없잖아요.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자기 것이라고 했으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살아온 과정으로 비교한다면 절대로 바칠 수가 없어요.

할례로 죽고 나서 하나님 안에서 보니 자식이나 아내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믿음에 따른 행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덮쳐오니 자식이 하나님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니 바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뭐냐?

난 없는 자,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난 없는 자이니 두려울 것이 없지요.

두려움이 없으니 세상과 타협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자 이상한 사람으로 돌변했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죽을까봐서 문도 걸어 잠그고 안절부절 못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한마디로 겁 대가리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붙잡고 너 예수 증거하면 죽어?

협박하고 공갈을 쳤어요.

과거 같으면 살려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젠 안 그래요.

알았어!

죽이려면 죽여!

죽음 안에 있는 자들과 타협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니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응! 이런 놈들이 예수 안에 수두룩하게 있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 있을 뿐이고!

너희는 사망 안에 있을 뿐이고!

우리는 배타고 홍해를 건너고 있을 뿐이고!

너희는 배 없이 홍해를 건너고 있을 뿐이고!

 

예수라는 배를 타고 홍해(죽음)를 건너면 전혀 두렵지가 않아요.

이게 바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사람들이 모습들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죽음(홍해)을 바라보니 전혀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너 죽을래! 하면 그래 날 죽여라! 라고 해요.

죽음이 복이라고 여겨지면 마귀가 너 죽을래! 하면 그래 고맙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귀가 죽음 가지고 장난을 치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에겐 죽음이 먹혀들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신앙생활은 현실이지 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입니다.

도(道)가 아니고 삶입니다.

 

십자가가 삶이 아니고 도(道)가 되면 아무리 입으로 십자가! 십자가! 해도 홍해를 건너오고도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던 사람들과 같아요.

만나를 먹으면서도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666표를 가지고 인(印) 친다고 하지요.

누구든지 그 666표가 없으면 먹고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말론하는 목사들이 666표를 안 받는 비결을 가르친다고 사기를 치고 다닙니다.

교인들은 그 비결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비결을 알려 드릴까요?

아주 간단해요.

적그리스도가 주는 양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면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먹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666표를 받아야 해요.

 

666표는 누가 안 받느냐?

하늘에서 주는 만나를 먹는 사람이에요.

만나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양식입니다.

가나안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 안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적그리스도 표를 안 받아요.

 

666표 안 받으면 굶어죽지요.

그럼 죽음에 쫓기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666표를 거부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666표는 땅에 속한 사람은 다 받을 수밖에 없어요.

땅은 애굽입니다.

홍해(죽음)를 건너오지 못한 사람은 다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은 사람은 다 받게 되어 있어요.

666표는 예수와 함께 죽음을 넘어온 사람들만 안 받아요.

 

적그리스도가 너 나한데 절하지 않으면 밥 안 준다.

주지마라!

너 밥 안 먹으면 죽는데!

죽지 뭐!

그럼 적그리스도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서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라고 길길이 날뛸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나 예수 안에 있거든! 이라고 하세요.

 

죽음이 두렵습니까?

홍해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홍해를 건너셨군요!

축하합니다.

 

홍해를 어떻게 건넙니까?

믿음으로 건넙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주셔야지만 됩니다.

인간 쪽에선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은 홍해를 건넌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당신은 홍해를 건넜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죽음에서 건져 주셨는가를 깨달으십시오.

당신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희생을 치루셨는지를 아세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댔다는 것을 아십시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시고 인내하시고 용서하시고 아파 하셨는가를 아십시오.

그리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십시오.

 

무엇이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사업에 실패 했습니까?

삼층 천에서 바라보십시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병들어서 죽어갑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세요!

기쁜 소식입니다.

 

자식이 말을 안 듣습니까?

하나님 품에서 바라보세요!

그 새끼는 내 새끼가 아닙니다.

남에 것 가지고 속 터지지 마세요.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터지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높은데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만큼이라도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하는데 자꾸만 남과 비교하니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식도 남의 자식과 비교하니 불만이고 남편과 남의 남편과 비교하니 불만이고 아내도 남의 아내와 비교하니 감사가 안되는 겁니다.

 

비교를 해도 부족하고 못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꼭 세상적으로 항상 잘난 사람과 비교합니다.

그러니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볼 때마다 속이 터지는 겁니다.

공부 못한다고 속상해 하지 말고 그래도 큰 사고 안치고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 라고 생각 해 보세요.

 

그러면 범사가 감사거리로 넘쳐납니다.

낮은데 눈을 두면 감사 아닌 것이 없어요.

하나님은 다 감사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우리의 탐욕이 감사거리를 놓치게 만드는 겁니다.

탐욕이 불평하게 하고 결핍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결핍이 생기면 감사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어요.

원망과 불평과 신경질만 나타납니다.

그러니 원래 없던 것인데 이만큼 있구나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모든게 고맙지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했지요.

그러니 있는 것을 족한 줄 알고 살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하지 않던가요.

예수 안에선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바라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으면 세상이 커 보이고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면 작아 보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살았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백날 교회 다니고 예수를 말하고 기도를 해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죽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죽여주실 것입니다.

죽여주시던가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으니 감사하며 사세요.

 

아직 안 죽여주시던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곧 죽여주실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십시오.

억지로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염려가 생기는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삶인가 알게 될 것입니다.

힘들다고 느껴질 때 말씀을 보세요.

예수 안에서 난 죽은 자라는 것이 깨달아 질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힘들다고 여겨지는 것도 감사하다는 것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홀연히 믿음이 덮쳐오면 가능해 집니다.

믿음이 오면 불평이 감사로 바뀝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 때문에 고민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믿음이 오면 고민거리로 보여지지 않을 때가 일어납니다.

커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작아 보일 때가 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내서 그 믿음이 여러분을 덮쳐와서 홍해를 건너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으로 간섭하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 사랑을 입은 자녀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날이 속히 이를 것입니다.

그런 날이 이르거든 아!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시키려고 오셨구나! 생각하고 감사하세요.

 

홍해와 같은 사건들은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늘 일어납니다.

그 때마다 믿음으로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내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 깨달아지면 지금까지 고민하고 염려하던 일들이 작은 것이라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 고민거리들을 이기도록 해 주십니다.

고민거리들을 치워주는 것이 아니라 고민거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해 주십니다.

염려 근심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기 때문에 염려 근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며 사세요.

 

믿음이 오면 괜한 것으로 고민 하였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물론 이 깨달음도 그리 오래 가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깨달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주께서 열심히 날 간섭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이 작아 보이면 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를 세상을 건너가게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앞에 홍해바다가 넘실거린다 하여도 나 홀로 건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건너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세상에 대하여 산 자로 살게 마옵시고 죽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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