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로마서.강해)13강. 간섭과 유기 그리고 사랑과 미움 (롬 1:24-32)

댓글 0

♣.성경강해/로마서 강해

2022. 4. 2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3강. 간섭과 유기 그리고 사랑과 미움 (롬 1:24-32)

-.정낙원 목사

 

롬 1:24-3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 하셨는가 하면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곧 피조물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곧 피조물과 창조주를 연결해 주고 있는 생명줄이기도 합니다.

 

이러면 피조물은 하나님 말씀과 떨어지면 죽음이 됩니다.

생명줄로부터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피조물 입장에선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고 “최악의 저주”는 하나님 말씀과 끊어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과 끊어져 있다 함은 독자적(獨自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죄(罪)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 로부터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 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외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피조물인 만물은 “그 말씀” 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을 때만 산 자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된 상태를 의(義)라고 합니다.

 

의(義)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義)를 순종”이라고 하고, “불의(不義) 곧 죄를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 말씀에 매여 있다는 뜻이고!

불순종이라 함은 말씀과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을 하자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한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서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라고 자증(自證)을 하고 만 것입니다.

 

왜? 불순종을 합니까?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죄”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에 토를 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불순종을 불러 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자기 생각으로 아말렉을 다 진멸치 않고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가상하지만 이 가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말렉을 마귀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을 하실 때 내가 광야 길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추억하노니 라고 언급을 하셨던 것입니다.

저 놈들은 내 백성을 괴롭힌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육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놈들은 살려두고 잔챙이들만 죽였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저주 받은 자들의 안목입니다.

 

이걸 악(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서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인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아벨에게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가인은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하나님의 처사를 용납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정성껏 제사를 지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의 정성을 보아서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한 것은 가인의 제사에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신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정성에 문제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성으로 판단치 않고 “어떤 제물이냐”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지목한 제물이냐”를 보십니다.

이를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십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우린 그 제물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보다 제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제사보다 앎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만 앞세우고 나가면 그 제물을 보시고 흠향하십니다.

제물을 드린 사람을 보고 흠향하는 것이 아니고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대로 내가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이레의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받으시는 제물이 따로 있습니다.

“그 제물의 제사”를 원하십니다.

 

그 제물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속에서 양으로 나타납니다.

양은 장차 오신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를 두고 아벨은 믿음으로 더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으로 제사를 지낸 아벨의 제사를 흠향하신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피가 있습니다.

그 피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를 예표 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인간의 정성만 있었지 의인의 희생으로 죄인이 구속을 받는 대속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걸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고 화를 발한 것입니다.

가인의 생각은 자신의 제사를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준 하나님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생각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하나님이 제사를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굴복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가인이나 사울은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 생각을 거부하는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울이나 가인의 모습을 일컬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불순종을 한 것이지 불순종을 하였기 때문에 악(惡)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세요.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도 사단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두고 자기 길로 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항상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죄는 항상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의 부모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부모란?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입니다.

부모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같은 동일한 중수의 죄로 물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론 적으로도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다 죄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이 부모에요.

이상하지요.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하니까 가장 존경하고 감사하고 두려워하여야 할 분이 부모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 모든 자식들은 부모를 가장 우습게 여겨요.

만만하게 보고 말을 안 들어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가장 어리석음이 생명을 주신 분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뱀(살모사) 새끼들이라서 죄가 그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죄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곧 하나님 앞에서 아이들처럼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곧 참 부모이신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자식과 같아요.

죄인은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을 죽인 패륜아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꼭 너희 자식들처럼 내 말을 안 듣는 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단절이 된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절(斷絶)이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님으로부터 단절이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보게 되면 피조물은 늘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는 것은 곧 피조물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순종의 끝엔 생명이 있고, 불순종의 끝엔 죽음이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란? 어원적으로 보면 “살으라는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살어!

그러면 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생명의 능력(能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의 기운(氣運)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나무에게 꽃을 피워! 그러면 나무는 꽃을 피워내고!

바람아 불어! 그러면 바람이 불어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너 예수 믿어! 그러면 예수가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그대로 보여주셨어요.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잠에서 깬 예수님이 바람을 보고 꾸짖습니다.

 

바람아! 이제 그만 잠잠해라!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 집니다.

바람이 예수님 말씀에 잔잔해 진다는 것은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잠잠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는다는 것은 바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조용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이나 병도 말씀으로 고칩니다.

귀신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나가고!

병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고쳐집니다.

이는 귀신이나 병도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귀신이나 병도 만물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만물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순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이 수천 년 동안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고 돌아도 어김없이 그 자리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또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어김없이 철을 따라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피고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달래” 보고 너~ “봄”에 꽃을 피워! 그러니 “진달래”는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국화”에게 너~ “가을”에 꽃을 피워! 그러니 “국화”는 어김없이 가을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백”을 보고 야! 너는 “겨울”에 꽃을 피워! 그러니 “동백”은 그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새에게 살라고 하니 참새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살어! 그러니 제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이고 창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말씀대로 되시니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 보시기에 봏은 것이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뭐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깨어졌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어요.

죄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게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생명의 공급이 끊겨버렸습니다.

그럼 피조물은 자기 안에 있는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수한(壽限)이 다 하였다는 것은 정한 기간 동안만 살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7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3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1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습니다.

 

마치 핸드폰 밧데리가 정한 시간이 되면 방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밧데리는 충전을 하여야 살아 있어요.

밧데리에게는 충전기가 곧 생명의 끈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삽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자기 수한(壽限)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산 영(靈)”이라고 합니다.

산 영(靈)은 밧데리처럼 자기 수한(壽限) 만큼만 살아요.

계속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충전(充電) 받지 않으면 죽어요.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靈)”으로 오셨습니다.

살려주는 영(靈)이란? 글자 그대로 살려주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주세요.

마치 방전된 밧데리에 전기를 공급하여서 충전으로 살려내듯이 예수님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려내고 생명을 계속하여 공급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생명의 말씀에서 떨어진 것을 다시 생명의 말씀에 붙잡아 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순종이란? 완전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붙좇게 되는 경향성(傾向性)을 말합니다.

이는 성령이 그 안에서 “순종하는 영(靈)”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죄에 대한 형벌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버려주셨다는 것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입니다.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아가는 피조물이 생명줄에서 끊어져서 홀로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저주(詛呪)가 뭐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유기(遺棄)시켜 버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함이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니까”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무당을 찾고 귀신을 섬기느냐 하면 하나님이 방치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죽을 짓을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니까” 이성(理性)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 사랑을 하지 않고 생명도 낳지 못하는 동성(同姓)을 사랑하는 역리(逆理) 현상이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이건 단순하게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떠나 생명과 상관없는 일을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으면 생명을 낳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하나님과 떨어지면 생명을 낳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되어요.

 

하나님은 이성을 통하여서 생명을 낳게 하셨습니다.

동성(同性)이란? 같은 종이란 말입니다.

이성(理性)이란? 다른 종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났습니다.

흙이 흙을 사랑하는 것은 동성(同性)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흙에게 있어 이성(理性)이란? 하늘입니다.

하늘에 것을 사랑하여야 생명이 잉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후 흙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 세상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귀가 준 것입니다.

세상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면 생명이 잉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자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어요.

흙이 흙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게 영적 동성애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낳지 못하는 동성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을 흙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시니까” 이웃을 헤치는 살인과 미움과 강포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생명을 죽이고 파멸케 하는 것으로 역사를 합니다.

이는 죄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한 각각의 말씀 속에서 특히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버려두셨다”는 말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니 죄인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죽음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셨다 함은 죽게 내 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그렇게 흙에서 나서 흙을 퍼 먹고 살다가 죽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냥 죄 아래서 태어나서 죄의 종노릇하다가 그 죄값으로 죽습니다.

 

이걸 신약의 유다에서는 흑암으로 돌아가는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어요.

죄인은 끈 떨어진 연처럼 죄 아래서 출생하여서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자기 맘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은 죄에 대한 보응으로 그럼 “니 맘대로 살라”고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포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은 죄인 입장에선 야~ 이제부터 자유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건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름과 제목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이 가물가물한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섭을 당하는 자와 간섭을 당하지 않는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니 내용이 동화와 다르더라도 의미만 참고하세요.

 

헤클베리 핀은 자유 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 합니다.

반면에 톰 소여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사건건 간섭을 받습니다.

톰 소여는 간섭하는 사람이 있고 헤클베리 핀은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섭 당하는 톰 소여의 눈에는 헤클베리 핀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나도 내 맘대로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도 잠시입니다.

장성하고 난 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허클베리 핀은 망나니로 살고 톰 소여는 예의범절을 갖춘 자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신자와 불신자의 이야기로 적용해 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 당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간섭 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이라는 삶에서는 불신자들이 훨씬 편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지옥입니다.

 

신자는 지독하게 간섭 당합니다.

간섭 당할 때마다 아픕니다.

그러나 그 끝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은 자일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독하게 간섭을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얼마나 간섭을 당하였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욕을 먹고, 얻어맞고, 헐 벗고, 굶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간섭 당할수록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곤핍해지고 아픕니다.

 

반면에 간섭 당하지 않으면 편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간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허클베리 핀처럼 자기 맘대로 살아가겠지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하면 어찌 될까요?그야 당연히 죄 짓다가 죽겠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죄인은 죽을 짓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이니 죽을 짓만 하다가 영원한 죽음인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 버려주셨다는 것은 저주가 됩니다.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복(福)이란?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이 마음을 간섭하지 않으면 죄인들 맘대로 살게 됩니다.

죄인 맘대로 살면 죽을 짓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저주란? 내가 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본능(本能)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죄인이 본능대로 살면 파멸이에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살아가면 어떤 식으로서 살게 될까요?

 

나만 살고 남을 다 죽이게 되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남도 있어요.

내가 있고 부모형제도 있어요.

자식도 나 보다 앞설 순 없어요.

아내나 남편도 나 보다 앞 설 순 없어요.

그 누구라도 날 힘들게 하면 싫어요.

 

내가 신(神)이에요.

내가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나는 나 이외 다른 신(神)이 없어요.

하나님도 나 보단 우선하지 못해요.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어요.

이게 죄인이에요.

 

죄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얼마든지 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선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적질로 나타나고, 사기로 나타나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으로 이를 말해주셨어요.

 

십계명(十誡命)은 죄의 근원을 말해주고 있어요.

죄의 모습이 십계명에서 이웃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사기나, 간음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헤치는 것들입니다.

 

십계명(十誡命)은 인간의 어그러진 면(面)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가 십계명(十誡命)이 말하는 악함 들을 생산해 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근본(根本)은 자기 유익을 챙기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죄인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자기중심으로 살게 되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럼 모든 피조물이 전부 자기 유익으로 산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형국이 되겠지요.

 

그래요.

인간들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살아가고 있어요.

내게 유익이 된다고 하면 남이야 죽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헤친다고 하면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의 삶에 모습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유기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제부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 당함이 왜? 무서운지 중요한 말을 하니 깊이 생각을 하시면서 들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묵시 속에 있는 천국의 모형(模型)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낙원이라고 합니다.

낙원(樂園)이란? 즐겁고 기쁜 동산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평화” 라고 합니다.

 

평화(平和)란? 구분이 없고 하나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차별이나 차등이 없으니 만족함이 되는 것입니다.

만족할 때 마음에 쉼을 얻고 안식이 되어요.

그러므로 천국을 일컬어 안식(安息)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언제 안식을 합니까?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요.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시고 쉬신 날입니다.

더 이상 일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창조 사건으로 보면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날입니다.

안식이란? 더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할 일이 남아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안식이 되려면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 되어요.

완료(完了) 상태가 되어야 다 이루심의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완료(完了)란?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온전한 자로서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더 장성 할 것이 없는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온전한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고 영생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미완료에요.

영생이라는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로 창조가 된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자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정도로서의 어른이라는 입장에서 온전하다고 하는 말이니 참고하세요.

 

아담은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천국에서의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장성한 자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장성하였다 함은 더 이상의 자람이 필요치 않는 생명의 완전(完全)함 또는 완성(完成)된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은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곳입니다.

 

“완전(完全)의 세계이고!”

“완성(完成)의 세계이고”

“완료(完了)의 세계!” 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니 천국은 완전하고 완성되고 완료되어서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더 자람이 필요가 없는 온전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자람이나 변화됨이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야~ 이 말이 중요한데,,,,

영적으로 들으세요.

동의가 되면 받으시고 동의 되지 않으면 흘러 보내세요.

전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어떤 사람들이 계대결혼 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잖아요.

어떤 집에 형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하는데 그 동생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어버렸어요.

이러한 식으로 일곱 형제가 계대혼인 법에 의하여 형수와 관계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럼 천국에 가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아주 난감한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 세상 관점에서의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대답을 합니다.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라는 것이 없지요.

오로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니 아이를 낳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곳이 아니에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미완료가 되면 완료를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요.

그럼 안식이 되지 않잖아요.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자라가야 하는 미완료의 상태가 되어요.

그럼 에덴동산은 안식의 세계가 될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미완료로서의 상태가 되면 안 되잖아요.

 

갓난아이는 성장을 전제로 하는 미완료 상태에요.

키워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 키울 때까지 안식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이 된 “완료(完了)”의 세계인 것입니다.

“완(完)” 자가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모두가 어린 양의 신부로서 충만한 자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의 삶은 창조 사건으로 보면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미숙아(未熟兒)로 낳지 않고 아담을 창조하듯이 장성한 아이로 낳으면 자람이 필요치 않겠지요.

아이의 출생을 성도의 구원으로 이해하여 봅시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거듭나자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하는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역사 속에 둘 필요가 없어요.

더 가르치고 배울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역사라는 고난 속에 던져둡니까?

얼른 데리고 가야지요.

 

하지만 역사 속에 남겨 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라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온 세계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영광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알아가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니 성도는 이 역사라는 곳에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미하여야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찬미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생애를 마치고 공생애를 시작하잖아요.

사생애란? 나를 위하여 살던 때를 말하고!

공생애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30세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역사 속에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이 장성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제 장성한 자로서 아버지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에선 30세가 되면 장성한 자로 간주해요.

그래서 회막에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어요.

 

30세란? 완전한 자를 상징해요.

요셉이 30세 때 총리가 되어서 나라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됩니다.

또한 다윗도 30세에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30세가 되어서 제사장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창조 된 아담처럼 자람이 필요치 않는 장성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아이를 낳아도 30살짜리를 낳아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를 낳으면 안 되어요.

30살짜리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키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낳아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 갈 테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장성한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없어요.

전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부모님이 보살핌이 필요한 자로 태어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부모의 보살핌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미숙아(未熟兒)란? “아닐 미(未)”에, “익을 숙(熟)”에, “아이 아(兒)” 자를 써요.

어원적으로 말하면 “아직 익지 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덜 익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아직 온전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는 자”란 뜻입니다.

온전한 자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질수 있는 자란 말입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 질수가 없어요.

 

과실로 말하면 땡감처럼 텁텁하단 말입니다.

홍시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하려면 변화와 자람이 있어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아직 홍시처럼 익어야 함이 남아 있는 미완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은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되고 완료(完了)된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의 보호함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미완료(未完了)로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완료(完了)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존재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생명줄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어째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았을까요?

이는 에덴동산 바깥은 역사로서 미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로 필요한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완료인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겠지요.

간섭하지 않고 버려두셨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간섭하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알겠습니까?

 

성경은 “완료의 세계를 묵시”라고 하고, “미완료의 세계를 역사”라고 해요.

에덴동산은 묵시(黙示)이고, 에덴동산 밖은 역사(歷史)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완료(完了)”의 세계이고, “에덴동산 밖은 미완료(未完了)”인 세계인 것입니다.

 

미완료(未完了)란? 아직 다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완료를 향하여서 뭔가 변화하고 장성하여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부모의 간섭이 필요해요.

마치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과 같이 아직 장성하도록 이르러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에서는 계속하여 장성한 것으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안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자람이 있으면 안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이고!

미완성(未完成)이고!

미완전(未完全)입니다.

 

안식(安息)이 되려면 “미(未)” 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未)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을 하려면 미(未) 라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안식이 됩니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상태로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진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치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한 아이의 출생이 없는 것입니다.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혼인(婚姻)을 하였어도 아이를 낳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국에 모습을 보아도 어린양과 혼인하는 것은 있어도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하는 것은 역사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묵시의 반대입니다.

묵시가 완료(完了)라고 한다면, 역사는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묵시가 쉼이라고 하면, 역사는 수고로움입니다.

“묵시는 부족함이 없는 완(完)이고!”

“역사는 아직 이르러야 하고 모자라는 미(未)”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묵시와 다른 세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묵시는 일곱째 날로서 안식일이지만 역사는 수고하는 여섯째 날에 속하여 있습니다.

성경에 일곱째 날 이후에 다른 날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순환하는 주기(週期)를 일주일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게 하신 것도 모두가 창조의 사건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서 엿새까지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해 놓은 것은 묵시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잠깐 살펴보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지요.

이는 엿새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은 묵시에 속한 날을 상징해요.

그래서 엿새 동안은 수고하는 날로 살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건 안식일을 통해서 장차 역사를 떠나 묵시인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함이에요.

 

엿새는 일곱째 날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을 겨냥하고 있어요.

모든 수고가 일곱째 날 안에서 완료가 되어요.

이게 창조 사건이 주는 교훈이에요.

 

우리가 일곱째 날인 주일날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과 다른 천국에서의 안식을 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가르치려고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안식을 한다고 하니 각자의 집에서 쉬게 한 것이 아니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케 하였어요.

 

안식일에는 축제를 벌였어요.

이건 천국에서의 기쁘고 즐거운 삶에 모습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장차 가야 할 천국이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일곱째 날 안식일에 성회(聖會)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에선 안식일 날 일을 해서도 안 되지만, 성회에 참석치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아도 돌로 쳐 죽였어요.

그건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에는 모두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떡을 떼고 나누면서 축제를 벌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이 의미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은 일곱째 날을 상징하는 묵시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라는 말은 이러한 일곱째 날의 의미 안에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모인다면 그냥 엿새에 속한 날에 모임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요.

그건 주일로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로 쉬는 것이에요.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듯이 주일을 기다려야 해요.

교회가 그리워져야 해요.

그래서 주일을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식으로서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의 날”이란 말이에요.

 

“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로서 묵시에 속한 날이에요.

주의 날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과 달라요.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 월요일도 주의 날이고, 화요일도 주의 날이고, 수요일도 주의 날이고, 목요일도 주의 날이고, 금요일도 주의 날이고, 토요일도 주의 날이고, 일요일도 주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성도는 묵시에 속한 자로서 항상 주의 날로 사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역사와 묵시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열심히 모이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이라 생각지 말고 천국백성으로서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모이세요.

그럼 교회에서 성도들과의 모임이 곧 천국에서의 모임과 같은 의미가 되잖아요.

그러니 주일날 놀러 가지 말고 교회에 모이세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 주셨으니까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천국에 모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열심히 교회에 모여야지요.

성경에서 열심히 모이라고 하였지 교회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했지!

교회 안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교회에 가면 곡식도 있고 가리지도 있어요.

흔히 복음 아는 성도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내가 구분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따지지 말고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섬기세요.

 

어떤 분들은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해요.

그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게으름을 복음으로 합리화시켜 주려고 공교하게 지은 말이에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자기 몸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이에요.

이건 악한 것이에요.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의 전부가 아니에요.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사귐이에요.

그래서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교회(敎會)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모임을 말합니다.

 

예배란? 말씀을 듣는 것도 있지만 성도의 교제가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면 성전에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제사도 드리고 만남을 통하여서 교제하고 축제를 벌이라고 하셨어요.

이건 새 언약 안에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이 되어 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날마다 교회로 모인 것도 다 이러한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모이는 것보다 더 잘 모여야 하는 것이어야 해요.

옛 언약에선 이레 중에 하루가 안식일이었지만 새 언약에선 날마다 안식일이에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에요.

그러니 천국에 모형인 교회에 날마다 모여서 말씀도 듣고 교제도 하였던 것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는 억지로 모였지만 새 언약 안에선 자발적으로 모여요.

구약은 법적으로 모였지만 신약엔 은혜로 모이는 것이에요.

그러니 모인다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름이 없어요.

장차 예수 안에서 모두가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차압을 합니다.

그러니 주변에 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이런 저런 핑계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악한 것이에요.

여러분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속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 따지지 말고 복음을 받은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말 자체가 모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에요.

왜? 모임을 전제로 하는 교회라고 하는가 하면 교회는 이 땅에 천국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는 반드시 교회라는 모임을 갖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서 교회로 모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경은 열심히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온 몸과 맘으로 믿는 거에요.

복음을 머릿속으로 알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이제는 손과 발로 움직여서 복음으로 사세요.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하지요.

마음으로 믿는 것은 “내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외적인 믿음”이에요.

이 둘은 하나에요.

마음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행함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고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부인한다고 하잖아요.

 

제자들이 누구 앞에서 예수를 시인합니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시인했어요.

이건 내가 믿는 예수를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빛을 말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드러내 밝히란 말입니다.

나 예수 믿는다!

교회 가서 복음 모르는 분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교회에 더 열심히 가야지요.

 

성경을 보세요.

성령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러면서 집에서 놀았는가요.

아니잖아요.

 

날마다 모여서 주를 찬미하고 했잖아요.

직장 때문에 날마다 못 모이면 모두가 모이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고 교제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찬미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날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어요.

성령이 임하자 역사에 속한 자들이 묵시로 편입이 되었어요.

땅에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이 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역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묵시에 속한 사람이에요.

묵시에 속하였으니 이 세상에 비록 살아도 묵시적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표시로 일곱째 날에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묵시에 속한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주의 날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묵시의 날이에요.

교회도 묵시의 세계에요.

성도도 묵시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묵시에 속한 자들이 묵시의 날에 묵시적인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묵시는 완료된 세계이므로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날마다가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럼 이 시대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는 사회의 구조가 일요일에는 쉬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선 매일 모여서 천국 생활을 맛보면 좋겠지만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럴 순 없잖아요.

직장도 다니고, 학교도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사회가 정한 6일 동안은 열심히 직장 생활 하다가 일요일은 출 애굽한 것과 같은 맘으로 역사에서 묵시로 탈출한 것과 같이 주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간과하지 마세요.

귀하게 여기셔야 해요.

교회가 타락했다 아니다 말하지 말고!

내 자신이 교회의 가치를 주님의 몸이라 생각하고 모이면 비록 그 교회가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타락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서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모이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정하다고 여기면 부정한 것이 되고 내가 정하다고 하면 정한 것이 되어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보자기를 내려 주잖아요.

그 속에 각양 더러운 곤충들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율법에 금하는 것들이므로 싫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네가 왜? 부정하여서 못 먹겠다고 하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보자기 속에 담겨진 곤충은 이방인인 고넬료를 상징해요.

고넬료는 이방인이에요.

그러니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과 같아요.

 

이런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어요.

고넬료는 구제도 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고넬료는 아직 예수를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옛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만 있는 것입니다.

 

그 섬김으론 구원 못 받아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의(義)가 있어야 해요.

고넬료는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는 것은 있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가서 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율법에 의(義)는 다 헛 것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알려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서 예수라는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자 성령이 임하고 고넬료가 세례를 받잖아요.

아! 내가 지금까지 쌓은 의(義)는 의(義)가 아니었군요!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 안에 있군요!

고넬료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택한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서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옛 언약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잖아요.

베드로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어요.

 

하나님은 빼내시곤 다시 그 곳으로 보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베드로처럼 가야지요.

가서 그게 아니고 예수라고 복음을 전해야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그 의(義)를 전해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 교회는 복음 없으니 나 안 가!

그럽니까?

어디서 듣고 배운 복음입니까?

어떻게 목사라는 인간이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까?

이건 복음을 빙자한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아주 사악한 자에요.

 

그건 복음도 아니고 공교하게 만든 인본주의 사상으로 전하는 말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자기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긍정해주고 달래주는 죽은 뱀의 말이에요.

이런 사람을 따르는 자들도 유유상종이라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켜서 달콤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말이 복음인줄 알고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뱀의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 복음 하면서도 그 복음으로 말장난하면서 자기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못해!

나 안 가!

내 맘대로 살거야!

그러는 거에요.

이런 복음은 없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삶을 합리화하여 결국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간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뱀의 독(毒)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해요.

 

복음 속엔 내 가치 챙기기가 없어요.

복음 안에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는 것이 없어요.

육신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의 소욕이 죄라고 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니 복음 알았으니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네 맘대로 살지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살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이러한 간섭하심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 식으로 하나님이 버려두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이 네 맘대로 살지 말라고 하여도 우린 내 맘대로 살고자 합니다.

죄가 나를 내 몸 편한대로 끌고 가니까요.

그러니 성도는 상한 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한계를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오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을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억지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에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으로서의 자기 부인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반드시 인도하세요.

 

이런 삶이 안 나타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신 사생아에요.

그가 믿는 예수는 관념이고!

그가 아는 복음은 지식이고!

그에 신앙은 추상이고!

그에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에요.

 

제가 교회에 가라는 말은 강요가 아니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가든 안가든 신경 쓰지 않아요.

그건 제가 소리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에서 제 말이 동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말하는 것은 다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안 간다고 하는 그 사상이 뱀의 사상으로서 악하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이건 제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다만 예수님의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신앙은 누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그 예수님이 반드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예수님의 증거자로 사용하세요.

복음 주고서 빈둥거리고 놀게 하지 않아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 생활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은 내 생각을 긍정해 주고 우리 육신의 편안한 삶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천사가 깨우지요.

왜? 깨웁니까?

아직도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 성(城)이 어디인가요?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인 원수들이 있는 곳이에요.

지금 베드로가 거기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또 가래요.

가서 또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으래요!

 

이게 성령을 받은 성도의 운명이에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 안에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복음 들고 오셨어요.

빛이 어둠에 오셨다구요.

오셔서 죽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시곤 어둠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로 보내는 거에요.

죽은 곳에 생명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게 두 증인들이에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세요.

그리곤 그 복음으로 율법이 전해지는 곳으로 보냅니다.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고 율법 교회로 가라고 궁둥이를 확 차버립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자들은 거기서 죽어요.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뿌려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교회에요.

복음을 받은 성도가 묻힐 무덤이 바로 교회에요.

제발 하나님의 일하심을 좀 아세요.

 

다시 완료와 미완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은 완료이고 에덴동산 바깥은 미완료에요.

에덴동산 바깥을 역사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역사에 와서 아이를 낳지요.

 

미완료에서 아이를 생산하지요.

그러니 역사에서 낳아지는 아이는 전부가 다 미숙아(未熟兒)인 겁니다.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역사에 속한 모든 생명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미숙아(未熟兒)란? 자람을 전제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장성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아요.

다 보살핌으로 자라서 장성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과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의 천국을 보면 생명수 강가에 달마다 과실이 맺힌다고 하지요.

달마다 실과가 맺힌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다 자란 완성이란 말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역사와 다르다는 의미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유기시킨 것이 그렇게 큰 저주인지를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자람을 전제로 하는 미숙아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아야 합니다.

 

갓난아이는 미숙아(未熟兒)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아직 덜 익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덜 자라서 영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글다” 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지 못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讚美)케 하고자 함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고 하지요.

“우리” 라는 어떤 무리들을 선택 하셨습니다.

어떤 집단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 집단을 누구 안에서 선택했다고 합니까?“그리스도 안에서” 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그 “우리” 라는 무리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 “우리” 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이 “우리” 속에 속한 “나” 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흠 있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여기서 흠이란? 죄와 사망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흠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살려 준다는 뜻입니다.

왜? 죽은 자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 냅니까?

 

그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날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걸 찬미(讚美)라고 합니다.

찬미(讚美)란? 아름다움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에 가면 난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라고 찬미해요.

이 찬미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어집니다.

내가 어떤 자였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해요.

그래야 자발적으로 친미하게 되어집니다.

 

이 땅에서 이 은혜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기도하지요.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더 길게 알아가기를 기도하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어요.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이건 양적(量的)인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인 이야기에요.

 

이 깨달음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람이에요.

우린 모두가 초등학문 아래서 태어났어요.

초등학문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우린 법 아래서 태어났고!

법 아래서 자랐고!

법 아래서 살았어요.

그래서 우린 법이 편해요.

 

법이란? 타율이에요.

강제에요.

지키면 상(賞)을 받고 안 지키면 벌(罰)을 받아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도 상(賞)은 받고 벌(罰)을 안 받고자 섬겼어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섬기지 않았어요.

이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가 누구인지 감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원래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 사실을 감추어 버렸어요.

죄가 내가 찬양 받도록 살게 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린 무슨 일을 하여도 내 가치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날 알아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영광 챙기기입니다.

 

그러니 법을 지켜도 자기 영광을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자기 영광을 챙겨요.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고 깨달아야 하는데 우린 그걸 모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부모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아요.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우린 우리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쥐뿔도 없는 것이 뭘 쬐끔하고 나면 그걸 힘을 삼고 꼴값을 떠는 것입니다.

이 꼴값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엔 미숙아(未熟兒)에요.

아직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인 것입니다.

우린 영적으로 미숙아(未熟兒)에요.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할 자들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완전(完全)과 완성(完成)과 완료(完了)로 나아가야 하는 자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 자람이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은혜 가운데 강건한 자로 자라가야 한단 말입니다.

한번 은혜 받는 것이 끝이 아니고 그 깊이를 끊임없이 알아가고 자라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적 미숙아(未熟兒)에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 뭐냐?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은혜를 알아야 하잖아요.

알아야 감사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간섭 당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고난이 많을수록 신앙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생각과 달라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토록 아픈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얼마나 고난이 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겠어요.

이건 자살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놈에 이런 사랑이 다 있나요?

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독한 간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많이 부대낄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얼마나 잠기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져요.

아주 푹 잠기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물에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이 발목에 잠기면 내 힘으로 살아가요!

물이 무릎에 잠기면 조금 불편해도 자기 힘으로 살아가요!

허리에 잠기면 힘이 부치지만 그래도 자기 힘과 물의 힘 반반으로 살아가요!

그러나 온 몸이 푹 잠기면 그 땐 내 힘으로 살수가 없어요.

물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요.

 

이건 우리의 신앙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알면 조금 감사하고 조금 찬미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알면 알수록 많이 감사하고 많이 찬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고난을 통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빛을 알게 하려고 어둠을 두신 것과 같습니다.

영생을 알게 하려고 죽음을 경험케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곧 배가 많이 고플수록 음식의 귀중함과 고마움을 많이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아파본 사람일수록 건강의 귀함을 아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천국이 귀함은 이 땅에서 지옥을 많이 경험한 사람에게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깊이 알수록 감사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어렵거나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지옥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으로 육신이 편한 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데 두고 쫓아갑니다.

이러한 안락한 삶을 재물이 준다고 믿어요.

그래서 재물을 쫓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네에 재물이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고 “내 영혼아 즐거워하자” 라고 했어요.

이 사람은 재물이 영혼에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서 야~! 이 놈아!

오늘 밤 내가 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이 쌓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제물이 너의 죽음을 막아 줄 수가 있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알려주는 말은 사람이 사는 것은 보이는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재물만 모았지 하나님은 잊고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부자는 어리석지 않아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다 꿈꾸는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우린 이 부자처럼 살고자 합니다.

교회에서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가치를 가지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늠을 합니다.

너 하나님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너 예수를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가 없는 일에 다다라야 신(神)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神)을 찾지 않아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돈이면 다 해결이 됩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란?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진시황이 그렇게 찾고 찾았던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화려함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화려함도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권세도 잃어버립니다.

결국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일평생 잃어버릴 것들을 붙잡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럼 어리석지 않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건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하신 말을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지혜로움입니다.

그럼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한 것을 내 것으로 살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이 됩니까?

그건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답이 나옵니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라는 것을 알아야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건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떨 때 밉습니까?

우리 뜻대로 살게 하지 않을 때 밉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면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반대로 간섭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적개심이 발동을 해요.

그럼 우린 죄인으로 드러나요.

날 힘들게 하는데 감사가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없어요.

본능적으로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토설케 만들어요.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살도록 가만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두면 우린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간섭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적개심이 생깁니다.

그 적개심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미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내가 하나님을 많이 미워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깊어갈수록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더욱 더 자각(自覺)하게 되어요.

이러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自覺)이 급기야는 내 자신이 미워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 난 진짜 지독한 악당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내가 악당임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일수록 지독하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세요.

이 간섭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사람은 누구로부터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는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간섭 당함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을 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입장에선 하나님의 간섭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가만 둘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사랑 속에는 예뻐함도 있지만 미워함도 있습니다.

예쁨과 미움은 모두가 사랑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도 많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나만 그를 독점하고 싶어해요.

그러니 사랑이 자연히 당신은 나만 바라보라는 식으로서의 간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이기주의에요.

간섭한다는 것은 간섭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엄청난 고통입니다.

만약에 자신을 간섭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간섭이라는 사랑을 미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깊이에 따라서 간섭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간섭하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간섭해요.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 보세요.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어디에서 무얼 할까?

누구랑 있을까?

그러니 수시로 전화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이 간섭이 싫어지면 사랑도 깨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뒷면이 미움이고, 미움의 뒷면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질투는 사랑의 다른 면이에요.

질투가 강할수록 많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 주라고 합니다.

사랑해서 그런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도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에 종살이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미워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사랑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말대로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포로로 보내놓고선 잠시도 잊지 않았어요.

나중에 자기백성을 학대 하였다는 죄목으로 바벨론은 멸망시켜 버립니다.

 

간섭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타인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타인으로 보이면 간섭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좋아 할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챙길 뿐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는 하나 라는 한 몸으로 보지만 좋아하는 것은 너는 너 나는 나 둘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깊을수록 간섭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 할수록 많이 간섭합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저주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이에요.

이걸 유기라고 합니다.

무관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형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면 멸망입니다.

죄인의 길은 멸망의 길이에요.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의 일생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았어요.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을 하는가 하면 야곱이 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인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을 간섭하심으로 나타났고!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에서를 유기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 언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언약 백성은 새 언약의 길로 간섭을 하십니다.

이게 또 보통 아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율법이 편합니다.

또한 자연적으로 율법적 신앙을 선호합니다.

 

율법적 신앙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신앙은 좋을수록 자아가 확장됩니다.

율법 신앙이 좋을수록 내 자랑이 많아지고 내 자랑이 많아지면 내 영광으로 채워집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 반(反)하는 악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에요.

그런데 영광을 돌려야 할 자가 영광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게 율법 신앙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런 신앙 안에 있지 못하게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뜨리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 것을 의(義)로 붙잡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는 식으로 간섭해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옳음이 아니라 틀림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간섭을 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려 버리십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대역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걸려들었어요.

자기 딴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어요.

추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을 시켜서 죄인을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입고 보니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넘어져도 감사하고 일어나도 감사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우리를 간섭하실 것입니다.

이 간섭이 끝나는 날엔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하는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되어 가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우린 모두가 “주여 나의 나됨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그러므로 물에도 집어넣었다가 불에도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담금질을 하신답니다.

그러니 불같은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모두가 널 사랑해서 라고 합니다.

 

그토록 간섭을 당한 바울이 외칩니다.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위험이냐 칼이냐!

곤고나 적신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하늘에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 이 아이러니한 사랑을 뉘라서 알까요?

부디 이 사랑을 깊이 알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간섭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내 곁에 서서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우겨쌈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거꾸러뜨림을 당함 속에서도 좌절치 말고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