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히브리서-강해)24강. 예수님과 마지막 때 (히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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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2022. 5. 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4강. 예수님과 마지막 때 (히 1:1-3)

-.히 1:1-3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세상에는 두 가지 사상의 종교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와,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를 헬레니즘 사상의 종교라고 하고,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를 히브리즘 사상의 종교라고 합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헬레니즘을 이방 사상이고, 히브리즘은 기독교 사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곤 에덴동산의 문을 걸어 잠가 버렸습니다.

이 문은 인간 쪽에선 열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지만 열립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안에 계시고 인간은 에덴동산 밖에 잇습니다.

밖에선 에덴동산 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인간으로선 에덴동산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나 달라고 하여도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마음대로 만날 수 있다면 굳이 에덴동산에서 좇아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는 것은 죄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과 상종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거룩과 비 거룩이 만나면 비 거룩은 죽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로 인하여 비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좇아낸 것은 죄인을 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쫓아내실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보낸 것입니다.

가죽옷이란? 의로운 제물의 희생을 말합니다.

장차 여자의 후손이 와서 의로운 제물과 같은 희생으로 죄인의 수치를 가려줌으로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죄인은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가죽옷을 입고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에게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죄인에게 있어 소망이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죄인을 위하여 희생당할 분으로 오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기 위하여 제물이 죽임 당하였듯이 죽임을 당하려고 오십니다.

 

아무튼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처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하나님 쪽에서 에덴동산의 문을 열어 주지 않는 한 만날 수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만나 주셔야지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만나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비우셔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늘 에덴동산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궁리만 합니다.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모습과 과거 에덴동산에서 살던 모습과 비교하면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선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피 땀 흘려야 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잊지 못하고 돌아가고자 애를 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것은 재벌회장이 망하여서 노숙자 신세가 된 것과 같아요.

그러니 얼마나 과거가 그립겠습니까?

달리 저주가 아닙니다.

과거 그 화려하고 행복하였던 시절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지옥인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부자가 달리 지옥이 아니에요.

거지로 살던 나사로와 자기 처지를 비교하니 환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인 것입니다.

 

옛날 세상에서 그 화려하게 살 던 것을 생각하니 죽을 맛인 것입니다.

아! 옛날이여!

하지만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영원토록 좋고 화려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고통 중에 목말라 하는 지옥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 화려함을 꿈꾸면 마음은 지옥입니다.

교회 나와도 재미가 없어요.

복음을 들어도 재미가 없어요.

교회에 와도 세상 것이 눈앞에서 아른 거려요.

 

친구는 성공하여서 고급차를 타고 해외로 골프 치러 다니고 있어요.

그 놈과 비교하면 잠이 안와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친구 놈 보다 못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현실은 정 반대예요.

그러니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도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교회에 와도 미음은 지옥이고 집에 가도 마음은 지옥입니다.

이래저래 지옥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알기 때문에 지옥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에덴동산을 모르니 그런대로 지낼 만 합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알아요.

그러니 나오는 게 한숨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만큼은 집 쫓겨난 이 개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가르쳤어요.

시간마다 틈 날 때마다 에덴동산에 대하여서도 가르쳐 주었어요.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에덴동산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로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아담도 죽고 가인도 죽고 그 후손들도 또 죽어 갔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듣고 들어오던 하나님은 조상이 바뀌면서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귀가 인간들로 하여금 왜곡된 하나님 상을 심어놓았습니다.

죄가 전달해준 정보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조상들에게 들어서 막연하게 알던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서 스스로 계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찾아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서만 알 수가 있어졌습니다.

노아가 말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전부 가짜입니다.

노아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싫든 좋든 하나님을 섬기려면 노아가 말하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 자기가 최고로 사는 자들 아닙니까?

 

그리고 노아가 말하는 하나님이 아무리 진짜 하나님이라도 사람들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섬기고 싶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과 어울렁 더울렁 섞여 살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섬겨야 해요.

노아 같이 하면 왕따를 당합니다.

 

인간은 혼지 살 수 없는 사회성을 가진 종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따돌림 당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이 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진리로 믿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노아 혼자서 아무리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여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노아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도 섬길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냉엄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건 믿지 않건 노아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노아만 찜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노아는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가짜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혼자서만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노아는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세상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를 일컬어 성경은 의인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암튼 하나님은 노아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고 노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하면 옛적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는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에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노아는 장차 오실 참 아들이신 예수님의 그림자로 선취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부턴 노아가 아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노아 이외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세상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하나님을 섬기는 쪽과 조상들이 알려준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나누이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아의 가정과 세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지연적으로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심판이니 종말이니 하는 말은 갈라진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한 통속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찾아감으로서 세상은 두 쪽으로 나누이게 된 것입니다.

노아 편이냐! 아니냐! 로 나누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 하겠다는 하나님입니다.

심판이란 두 쪽으로 갈라내겠다는 말입니다.

이름하여 종말인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방주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방주에 타면 구원을 받고,

그 누구라도 방주를 타지 않으면 멸망을 당합니다.

이제 구원과 멸망의 조건이 제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살았느냐 따지지 않겠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노아로 하여금 제시한 것에 순종하면 살고 순종치 않으면 죽습니다.

오로지 방주에 타느냐! 안 타느냐! 로만 따지겠다고 하십니다.

방주 안과, 방주 밖으로 나누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조건은 하나님의 구원과 멸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았든지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살인자 강도라 할지라도 방주를 타면 구원을 받고, 순박한 사람일지라도 방주를 타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로지 방주로만 결정이 됩니다.

한 쪽은 방주를 통하여서 구원을 받고, 한 쪽은 방주가 없어서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정신 나간 노인네의 헛소리로만 여겼던 노아의 말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농담이라 여기던 그 홍수가 임하고 만 것입니다.

 

노아의 예언대로 홍수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방주에 타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오다가 그치겠지 하곤 여전히 농담으로 여깁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선 노아의 가족들을 강제로 방주 속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 버립니다.

이제 밖에서 열어 달라고 하여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죽고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찾아가 주셨으면 그 사람들도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노아에게만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찾아간 것은 성경은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고 합니다.

 

창 6: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차별성을 둡니다.

모두에게 임하면 은혜가 아니지요.

모두가 다 죽는데 노아 가족만 살아남아야 은혜가 됩니다.

 

이러 보건데 하나님은 인간을 애초부터 차별을 하신 셈입니다.

왜 노아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시느냐 입니다.

멸망당하는 인간들 쪽에선 항의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라고 항의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왜 노아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겐 안 주시느냐! 라고 따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인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죽은 자 중에서 일방적으로 살려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죽은 자로 있는데 노아를 살려낸 것입니다.

그러니 따질 일이 아니지요.

불평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불평이란? 억울하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죽은 자를 그냥 죽도록 한 것은 억울해 할 일이 아니에요.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왜? 난 안 살려 줍니까? 라고 하면 안 되지요.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의절(義絶)을 선언 하셨습니다.

다시는 너희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에덴동산에서 좇아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쪽에선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안 만나 주어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노아를 찾아간 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안 만나 주어도 할 말이 없는데 만나 주시니 자비이지요.

다 죽어 가는데 한 사람이라도 살려주니 감사하여야지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노아를 통하여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에는 감사치 못하고 도리어 불평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왜 날 구원 해 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이 죄입니다.

 

초두에 이 세상의 사고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사람들이 왜 신을 찾습니까?

인간이란? 아쉽지 않으면 찾지 않아요.

누군가를 찾을 땐 다 뭔가 아쉬워서 찾아요.

 

그럼 인간이 신을 왜 찾겠어요.

그건 신의 힘을 빌려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고자 함입니다.

신에게 나와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의 뜻을 들어 줄 테니 대신 구원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묻습니다.

왜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너희들이 뭔데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 라고 합니다.

 

아니! 죄를 범하였으면 당연히 저주 받아야 합니다! 라고 해야지!

왜 구원 해 달라고 합니까?

 

죄인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저주란 말입니다.

죄인이 저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는 구원을 받아야 하겠다고 합니다.

신에게 찾아와서 구원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해 줄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원해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죄인의 이기심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안다면 마땅히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해야 옳습니다.

저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자기 주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한 것은 얼마나 자기 주제를 잘 안 것입니까?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왔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서 세상을 심판하였습니다.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렸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린 것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싶은 자만 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십니다.

 

출 33:19절.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다행스럽게도 노아가 하나님이 살려주고자 하는 명단에 포함이 된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마치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은혜 주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노아도 그렇게 해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기로 작정하여서 살아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살 수 잇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 쪽에서 그 어떤 방법을 하여도 살 수가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환경에 처하여도 복된 것입니다.

속된 말로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도 복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망하여도 괜찮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바울처럼 감옥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어집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노아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인류 최초로 한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께서 한 가족을 구원하시겠다는 싸인 입니다.

개인으로 구원 하지 않고 가족으로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가족이 신약에 오면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도를 한 권속(眷屬)이라고 말을 합니다.

 

엡 2: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9절.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낯선 나그네나 손님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늘의 시민이요, 가족입니다.” (쉬운 성경)

 

권속이란? 가족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집단에 부속된 지체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속에서 살아난 노아를 통하여서 다시 인류가 번성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창 9: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이제 노아의 가족으로 인하여 세상에 인종(人種)이 번성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갈대아우르에 있는 아브람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람아! 하시면서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하십니다.

전혀 다른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지금까지 조상들이 알려준 하나님이 있어요.

조상들이 알려준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열심히 빌고 빌면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을 복의 조상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너로 하여금 복과 저주가 나누이게 하겠다고 합니다.

 

아브람을 복의 조상으로 삼겠다는 말은 나머진 모두가 저주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부모 친척이라 할지라도 저주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부터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의 후손 이외엔 모두가 저주의 후손이 됩니다.

 

이건 마치 노아 가족만 구원 시키고 나머진 모두 몰살 시킨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부모형제 친척이 있는 고향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부모형제 친척들과 인연(因緣)을 끊으라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결행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고 빨리 떠나라고 합니다.

스스로 떠나지 않으니 믿음이 밀어낸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종말이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모형제 친척으로부터 갈라내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심판 한 것입니다.

육이라는 혈통 속에서 뽑아 낸 것입니다.

추수 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아브람 이외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모두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조차도 가짜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으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부모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서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부모님이 가르쳐 준 하나님이 가짜라고 해야 합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교인들이 다 복 받는 예수를 알고 있는데, 저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심판하는 예수를 말한다는 것은 핍박 받을 일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가르쳐온 예수와 다른 예수를 말한다는 것은 이단으로 자초하는 일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그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아버지가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오냐! 내가 잘못 알았다!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 이놈에 새끼가 뭘 잘못 쳐 먹었나!

어디서 조상님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가짜라고 하느냐! 라고 흠씬 두들겨 팰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나 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 시대 십자가 피만 증거하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단이란? 그 시대가 말하는 것과 다른 예수님을 전한단 말입니다.

정통 신앙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브람 식으로 말하면 조상님들이 섬기던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은 집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떠날 수밖에 없어요.

서로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서야 어찌 집안이 편하겠습니까?

요즘 식으로 예수 신과 부처가 한 집안에 있으면 집구석은 쑥대밭이 나고 맙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일가친척 형제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당한 것을 이해하시겠어요?

예수님만 미친 사람 취급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친 사람 취급당하는 그 예수를 믿는 사람도 미친 사람 취급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 시대 미친 소리 안 듣는 그 예수는 가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엔 정통신앙을 자랑하던 유대교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어요.

지금은 정통 신앙을 자랑하는 교단들이 십자가 피를 전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모두가 영적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이제부터 아브람을 통하여서 나타난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하여서만 계시(啓示)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 하고만 소통을 하십니다.

 

이제 세상은 아브람에게 속한 사람과 아브람 반대편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아브람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기준으로 세상을 두 쪽으로 갈라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각자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브람에게 계시(啓示)하신 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람과만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아브람은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豫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브람을 영접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거부하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과 저주는 아브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아브람은 복과 저주의 빙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고 아브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판단하십니다.

 

이로보건데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지목하면 마지막 때가 됩니다.

즉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두 쪽으로 갈라지니 심판이고 종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맥(脈)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아들이 왔으니 마지막이라고 하잖아요.

 

히 1:1-3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옛적과 지금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적엔 선지자들로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날 마지막엔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옛적엔 여러 부분으로 계시(啓示)하였지만 이제는 아들로 통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들 이외엔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啓示)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알아진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눅 10: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속에 감추어져 계십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통하여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알아진 하나님은 전부 가짜 하나님입니다.

 

십계명이 말하는 다른 신(神)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요 14: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形狀)이라고 하지요.

 

히 1: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골 1: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형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이건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이 주는 계시만 참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진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서만 알 수가 있습니다.

옛적에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알 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아들로 단일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심판의 기준인 셈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 때문에 저주 받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오심을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종말이란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오심이 종말입니까?

 

이제부터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쪽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편이냐! 아니냐! 로 갈라집니다.

인간의 조건은 따지지 않습니다.

 

단 하나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로 판단합니다.

즉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판단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습니다.

 

후사란? 후계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서 세상을 심판 하십니다.

 

요 5: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심판권을 위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릴 자와 죽일 자를 구분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요 3: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이해하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예수 믿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입으로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안 믿는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다는 말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안 믿는다는 말이 전제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불가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 할 수가 없습니다.

본성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롬 10: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입으로 주를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입으로 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믿는 것은 마음이 하는 일이고, 고백하는 것은 입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누군가가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지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있지요.

그게 뭡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고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왜 예수님이 죽고!

왜 예수님이 살아나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모르고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허구이고 관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리 단순한 말이 아니에요.

이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다 믿을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가이사라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나 선생으로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나 선생은 믿을 분이 아니고 본받을 분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하고 예수를 본받는 것하고는 달라요.

본받는 것은 같은 동류(同類)라는 의미이고, 믿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내 생사여탈권을 다 맡기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동류(同類)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이라는 몸은 우리와 같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의인이세요.

의인이 죄인의 몸을 잠시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으로서 죄인의 일을 뭔가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잠시 죄인의 몸을 입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몸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몸을 갖고 계세요.

이를 일컬어 몸은 있으시되 죄가 없으시다고 해요.

 

히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은 무덤이 예수님을 가두어 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죄인만 가둘 수가 있어요.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이 무덤 속으로 들어오니 감당하지 못하고 토해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토해내어짐을 당한 것과 같아요.

왜 고기가 요나를 토해냈을까요?

이는 고기가 요나를 소화 시킬 수가 없고 감당하지 못하고 담아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기 뱃속은 무덤과 같아요.

그러면 요나는 예수님의 예표가 되지요.

맞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 날 것을 요나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한 것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대신 담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사로 오시지 않고 육신으로 오신 것은 죄인이 당할 고통을 다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자기 백성들의 아픔을 다 담당 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음에 가두어지지는 않지만 인간의 육신이 당할 고통은 다 감당하셨어요.

 

우리가 당할 고통을 다 담당 하셨기 때문에 대속주(代贖主)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속주란 말은 대신 제물로 바쳐진 분이란 뜻입니다.

즉 대신 죽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한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샴쌍둥이와 같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란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동일한 팔자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셨다는 말은 내 아픔을 그대로 다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흘간 무덤 속에 계신 것은 나의 죽음을 맛보기 위함입니다.

나는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고 살아났을 때 같이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지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주어야 입으로 고백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꼬라지를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나의 어떠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예수 안에 잇는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살았든지!

네가 어떤 놈인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믿음을 받지 않으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고 하여도 인간의 이성은 자기 꼬라지를 늘 살피게 되어 있어요.

이건 본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자는 전혀 요동치 않아요.

믿어지기 때문에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내가 예수를 안 믿는 것조차도 다 용납이 되요.

내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여도 구원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믿어져야 비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헷갈리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예수를 믿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예수 안 믿겠다 하여도 안 믿을 수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를 안 믿을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이 팔지를 누가 관리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세요.

그래서 성도의 팔자는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말인데도 굉장히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믿게 해 주어야 믿어지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히브리서의 개요에 대하여서 간략하게 살펴보았지요.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는 구약의 율법을 아들이신 예수님이 다 완성 하셨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님 안에서 율법이 이루어졌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자유란? 가둘 수 없다는 말이지요.

제재를 받지 않는단 말이지요.

 

율법이 뭘 합니까?

죄를 지적하지요.

죄를 지적해서 넌 죽었어! 라고 하잖아요.

 

그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죄를 지적 받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율법으로부터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일체의 율법적인 행위로 인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우리 행위로 추궁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성도를 추궁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에는 죽은 자이기 때문이에요.

 

갈 2: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율법은 인간의 몸을 근거로 활동해요.

그래서 율법은 항상 몸에 행실을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 했어! 안 했어!

이것 지켰어! 안 지켰어!

이것 했냐! 안했냐! 는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산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요.

 

죽은 사람에게 너 이것 지켰냐! 안 지켰냐! 라고 할 수 없어요.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송장들에게 법을 가지고 가서 따지진 않아요.

성도는 율법 아래서 죽은 송장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몸의 행실로 인하여 정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과는 상관이 없어요.

이건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추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이 성도들 대신 다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추궁을 하면 예수님이 변호해 주세요.

 

요일 2:1-2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사도요한이 지금 예수님의 심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들이 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편지를 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는 죄를 범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은 죄를 범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호사가 되어서 변호 해 준다고 합니다.

대언자란 변호사란 말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나님 앞에 변호해 주십니다.

어떻게 변호해 주시느냐 하면 자기 피를 앞세우고 변호를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물이 되어서 죽으신 것을 근거로 변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예수님이 내가 저 놈들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저 놈이 잘못한 것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시고 성도의 죄를 간과해 주시는 것입니다.

간과한다는 말은 죄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넘어가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의인이 아니에요.

예수 믿어도 여전히 죄인이에요.

다만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인데!

성도가 의인이 되면 예수님이 변호해 줄 필요가 없어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소용없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늘 간구하는 이유는 성도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 8: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 7: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서 항상 간구하신다고 하지요.

왜 항상 간구하겠어요?

성도가 자체적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추궁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작동해요.

육신이 없으면 죄 지을 일도 없어요.

육신이 죽어 송장이 되고 나면 죄를 지을 일이 없어요.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은 그대로 가지고 예수를 믿어요.

그러니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연약해서가 아니라 몸이 죄를 이길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항상 살아서 성도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행실로 인하여 자책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살지 마세요.

이건 마음껏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책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죄인에게선 아주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죄책감이 뭡니까?

죄 지은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것 아닙니까?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속 제물로 보내신 것이잖아요.

만약에 인간이 죄를 안 지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을 대속 제물로 보내실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을 대속 제물로 보내신 것은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보낸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론자들이 오해하는 것이 성도에게 죄 짓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면 흡사 제가 죄 짓도록 장려하는 꼴이 되고 마는데!

죄 지으라고 장려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죄인의 한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보내신 것은 죄인을 죄 안 짓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인을 죄 안 짓게 할 목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 전에 성령을 보내서 죄를 안 짓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어져요.

예수님을 육신의 몸을 입게 해서 보낼 필요가 없이 성령을 보내서 죄 안 짓도록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육신의 몸을 입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고 난 후에 성령을 보내셨어요.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지요.

이건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보내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도를 죄 안 짓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죄를 이길 수가 없고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을 받으면 죄를 인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를 이길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이 아니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어 가는 자가 아닙니다.

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뭘 하겠다고 덤비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말입니다.

설사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라고 해도 살 수가 없어요.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육신이 여러분의 의지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인간도 육신을 이길 장사는 없어요.

육신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미움은 내가 억제 할 수가 없어요.

미움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마음 속에서부터 밀려 나와요.

 

마음은 우리가 통제 할 수가 없어요.

통제가 안돼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워지는 것입니다.

 

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했다고 하지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통제할 인간은 없어요.

여자를 보면 음욕이 일어나는 것은 본능이에요.

 

이걸 동물로 표현하면 발정기와 같아요.

남자나 여자나 이성을 만나면 성적 호르몬이 분비가 되고 가슴이 콩닥거리게 되어 있어요.

장애인도 이런 성적 본능은 있어요.

이런 본능은 나이와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일어나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죄를 안 짓고 삽니까?

이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제가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피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가장 좋은 신앙은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고마워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고마워야지!

자기가 착하게 산 것이 흐뭇하면 안 돼요.

그건 불교에요.

 

불교는 스스로 거룩해 지라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예수 안에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의를 얻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겠지요.

왜 예수님의 오심을 마지막이라고 했는지도 알겠지요.

 

예수님을 만나면 마지막이 됩니다.

자기 인생은 종 칩니다.

이제 나 라는 존재가 없어요.

예수 안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더 이상 내가 관리할 내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관리를 해줘요.

예수 안에 있는 존재로 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같이 행복한 말이 없어요.

 

제가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에 느끼는 행복감이에요.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하나에서 열까지 온통 내가 책임을 져야 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물론 율법대로 살았을 때 오는 보람도 있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서 얻어지는 행복감도 있어요.

하지만 그 행복감은 금새 날아가 버려요.

또 다른 율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주는 행복감은 30초짜리예요.

그 순간만 행복해요.

돌아서고 나면 율법은 여전히 추상같이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밤 이슬 맞아가면서 산 기도를 다니고 충성하고 봉사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안하면 어깨가 무거워요.

 

물론 이런 것도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나 느끼는 감정들입니다.

취미생활 하듯 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쁨도 없어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예수님의 오심을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초림으로 오신 것은 구약의 마지막이 됩니다.

이걸 사람에게 적용하면 율법에 사람으로서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으로서의 사울이 죽은 것과 같아요.

 

율법에 사울이 죽고 예수 안에 바울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 안에 바울은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그러니 거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살필 이유도 없어요.

사람을 기쁘게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여요.

세상이나 사람은 안중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침없이 산 것입니다.

옥에 가두어도 거침없이 살았고 밖에 풀어 놓아도 거침없이 살았어요.

이런 상태를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면 담대해 집니다.

겁이 없어져요.

누가 나를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아요.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요.

 

성도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살아난 사람은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란 말이 아니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야 성도가 아니라, 하늘에 가치관으로 사는 자가 성도란 말입니다.

 

성령이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도록 인도해요.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그렇게 살도록 몰아갑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것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는 것으로 산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책임져 주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고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삽니까? 묻지 마세요.

그런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가르쳐 준다고 하여도 살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믿어진다는 것은 천사도 흠모할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스스로가 이 믿음에 복이 자기 안에 있는가 스스로 확증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는 은혜가 항상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게 해 주심을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 믿음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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