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사랑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로마서 강해)14강.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롬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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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2022. 5. 1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4강.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롬 2:1-5)

-.정낙원 목사

 

롬 2:1-5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누워서 침 뱉기란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말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남을 판단하는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인 줄을 왜?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는 것은 곧 그 판단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건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판단을 합니까?

자신이 상대방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잘난 척하는 자들이 정죄하고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살면서도 그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용서치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왜? 진노 받을 죄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스려지는 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주어지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일컬어 젓과 꿀이 흐르는 “은혜의 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약속이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약속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언약 정신을 모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땅이 비 언약 백성을 토해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십니다.

쌍무(雙務) 언약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거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일컬어 언약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간에는 차별이나 차등이 없습니다.

모두가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이나 차등이 없다 함은 누가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르심과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차별 없이 차등 없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차등을 하면 언약정신에 위배됩니다.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예표하므로 교회 안에는 인간의 외모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이나 차등이 생긴다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비 언약 집단입니다.

 

이스라엘을 일컬어 언약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언약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그 언약을 위하여서 이스라엘을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무관심이고 사랑은 관심입니다.

말이 좋아 사랑이지 이건 아주 죽이는 일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 줍니다.

너희가 들어가서 살 땅은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거저 주어지는 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를 약속대로 권고하신다고 합니다.

 

신명기 11장을 봅시다.

 

신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歲初)부터 세말(歲末)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 땅은 여호와가 권고하시는 땅이라고 합니다.

권고하심이란? 늘 지키시고 돌아본다는 말입니다.

잘 사는지 못 사는지 살펴보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간섭하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부모의 간섭을 사랑으로 느낄 때가 언제인가요?

부모가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될 때가 있었잖아요.

그 시절이 어느 때였습니까?

바로 어린아이 때입니다.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곁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안심을 하고 놉니다.

그러나 엄마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웁니다.

울다가도 엄마 목소리만 들리면 금방 뚝 그칩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 때는 곁에 부모가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항상 엄마 곁에 졸졸 따라 다닙니다.

날 혼자 두고 어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때는 부모가 사라질까봐 겁을 냈습니다.

부모가 자기 눈에 안 보이면 불안했습니다.

 

성경에선 어린아이를 자기 생각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를 어린아이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 갖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가 없다고 하실 때 이 어린 아이는 자기 생각이 없고 오로지 부모에게 자기 인생을 다 맡긴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부모가 곁에 있는 것이 싫어집니까?

자아(自我)가 깨어나면서부터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죄가 자아를 일깨워서 독립적인 존재로 살게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는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자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부모의 말은 잔소리로 들리고 부모의 간섭이 억압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늘 간섭하신다고 합니다.

죄인은 자아가 있어요.

내 생각이 있고 내 주장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사춘기 시절을 맞이한 아이를 부모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간 거북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思春期)를 맞이한 아이들은 부모의 간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자유가 박탈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날 들들 볶느냐고 합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아이가 부모의 바램과 같이 허튼 짓을 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하면 부모가 지켜본다고 하여도 불편할 이유가 없겠지요.

도리어 자신을 돌보고 계심을 감사하게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부모의 뜻에 반하는 엉뚱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부모는 거추장스럽습니다.

부모가 거추장스러워지면 이 때부터는 부모가 미워집니다.

부모의 그 어떤 말도 귀찮은 잔소리로 들립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제발 날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도망쳐서 혼자 살고 싶어 합니다.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성경에 이런 사람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탕자이야기입니다.

 

왜? 아버지 곁을 떠난 자를 탕자(蕩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아버지를 떠나면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강도들이 우굴 거리고 있어요.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망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우린 우리 생각대로 간섭하지 않고 내 버려두면 잘 살 것 같지요.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우린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유혹을 감당 할 수가 없어요.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좀 알아보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12명이 정탐꾼으로 갑니다.

 

정탐꾼들이 갖다 와서 하는 말이 그 땅은 얼마나 농사가 잘되는지 포도송이 하나를 두 사람이 어깨에 울러 매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백성들이 얼마나 잘 처먹었는지 전부 거인이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애굽에서 종 노릇하던 자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포도송이 하나가 두 사람이 어깨에 매고 다닐 정도로 살기 좋은 땅으로 들어갑니다.

자신들은 종노릇하면서 먹지 못해서 메뚜기 같이 초라한데 가나안 사람들은 거대한 족속들입니다.

 

그럼 메뚜기 같이 못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가나안 사람들과 금방 동화되겠지요.

이건 사사기를 보면 잘 나왔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툭 하면 가나안 신(神)을 섬겼어요.

왜? 가나안 신(神)을 섬깁니까?

 

가나안에서 잘 살고 싶어서입니다.

거기서 복 받고 잘 살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神)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야 살수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등 따습고 배부르게 가나안 백성들 방식으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틈만 나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물가에 아이 세워 놓은 것과 같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간섭이 없으면 금방 다 망하고 말아요.

언약이고 뭐고 다 엿 바꿔 먹어요.

언약을 잊으면 약속의 땅에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을 잊지 말라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망하지 않게 하려고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러니 아픕니다.

상처투성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달콤함으로 다가오지 않고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모가 되어서 간섭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안한 역사가 아니고 맨 날 얻어터지는 질곡(桎梏)의 역사로 점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 간섭하신다고 하십니까?

세초부터 세말까지입니다.

세초(歲初)란? 시작을 말하고!

세말(歲末)이란? 끝을 말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시고 간섭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세초부터 세말까지 여호와의 눈으로 감찰당하시고 간섭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야곱입니다.

야곱은 엄마 복중(腹中)에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세초부터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찜 당한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곡(哭)소리 나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 손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울면서 살아간 인생입니다.

 

누가 야곱의 인생을 부럽다고 할까요?

없습니다.

야곱 스스로 참으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토설하고 있습니다.

왜? 야곱은 이런 인생을 살았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세초부터 세말까지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너무도 간섭을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 모두가 여호와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야곱은 더럽게 재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 번도 자기 인생을 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요하신 간섭에 시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입에서 단 내가 날 정도로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간섭한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야곱처럼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야곱입니다.

아!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우린 야곱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우린 이런 사랑을 원치 않아요.

차라리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복중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짝이 되도록 한 셋트를 창조하셨어요.

 

빛을 위하여 어둠을 창조하셨습니다.

천국을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어요.

구원 받은 야곱을 위해서 저주 받은 에서를 창조했어요.

 

이사야 53장을 보면 우리가 나음을 입는데 그가 아픔을 당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성경은 이걸 대속(代贖)이라고 하고 “대신 내어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내가 구원을 받은 그 바탕엔 반드시 누군가가 버려짐을 당한 것이 있어요.

내가 복(福)을 받았으면 누군가 저주(詛呪)를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기 위해서 에서는 내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위해서 애굽을 징벌하고 바벨론을 징벌하고 앗수르를 징벌하였습니다.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 태워버렸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값을 너무도 많이 지불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섭을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엔 하나님이 엄청난 댓가를 치렀어요.

 

너무도 큰 값을 치렀기 때문에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 우리가 불평 할 수가 없어요.

모르기 때문에 징징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말이에요.

 

아무리 사실이 그러하다고 하여도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간섭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간섭당하면서 살아온 인생은 고달픕니다.

한마디로 험악한 세월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성도들입니다.

우린 이 세상에서 험악한 인생을 살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만사형통을 외칩니다.

눈물 없고 고통 없는 삶을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는 정 반대로 눈물골짜기로 통행케 하고 고통의 골짜기로 몰아넣으십니다.

이를 어찌하오리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우리 인생이 고달프고!

그렇다고 우리 뜻대로 살자니 간섭당하는 아픔이 따라 다닙니다.

 

피하지 못할 고난이라면 차라리 즐기셔야 합니다.

운다고 숙제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면 징징 거릴 것이 아니라 해야지요.

하늘 한번 쳐다보고 까짓거~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야! 말은 쉽다!

그래요.

말이라도 쉽게 합시다.

 

지난 시간 최고의 저주가 하나님의 유기하심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자기 맘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파멸이고 죽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자기 뜻대로 살면 결국 저주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산상보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門)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門)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 앞에 사는 길과 죽는 길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과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서로 상반된 두 가지 길입니다.

 

두 문(門)과, 두 길이 있습니다.

큰 문(門)과, 좁은 문(門)!이 있고!

넓은 길과 협착한 길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門)”은 크고 그 길이 넓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門)”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크고 넓은 길을 가고자 합니다.

좁고 협착한 길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門)”을 들어가는 사람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門)”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고 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인간을 평가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이런 자들이다”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 두면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고” “적다” 라는 의미는 숫자적인 의미보다는 인간의 성향(性向)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큰 문(門)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고자 하지!

좁은 문(門)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門)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지 않으면 모두가 멸망으로 가는 문(門)으로 들어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엔 우리의 자랑 거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로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끝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讚美)하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을 받고 난 후에서야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사랑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깨달음으로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는 세세토록 하나님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말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 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혹독한 고난을 거치면서 말이에요.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손에 질질 끌려가고 있지만 그래도 때로는 아주 간헐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베데스다 못에 물이 가끔 동하는 것과 같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가 있다니까요.

그럼 하나님의 은혜에 사랑비가 우리 맘에 촉촉이 뿌려집니다.

 

그럼 그때는 베데스다의 물이 동할 때 그 어떤 병도 다 고침을 받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비가 뿌려지면 우리 안에 모든 근심 걱정과 염려를 다 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할 때가 바로 천국을 맛보게 되는 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주 맛 보고 어떤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이 맛 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맛을 보게 해 주십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그 순간은 베드로처럼 변화산에서 경험하였던 그 황홀함을 맛보게 되어요.

그럼 이 세상이 작아 보여요.

빨리 주님 품에 가고 싶어요.

 

주님 품에 가려면 익어야 가지요.

땡감 같은 놈을 데리고 가서 뭐하겠어요.

천국에서 세세토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외치자면 구원해 주심에 고마움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고마움은 이 땅에서 야곱처럼 바울처럼 고난이라는 풀무불 속에서 시달려 보아야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양에게 찬송을 하게 하려고 이 땅에서는 지옥 같은 환경으로 몰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고난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밧모 섬에서 하늘 문이 열려요.

이걸 맛 보지 않은 사람은 말을 하지 마세요?

 

여기서 고난에 대해서 이해하고 갑시다.

고난이라고 하니 어떤 분들은 세상에서 거지같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성경은 거지같이 사는 것을 고난이라 하지 않아요.

고난이란?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이끌림 당한다는 뜻이에요.

우리의 관심사를 하늘에 것으로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우리가 기도하여야 하는 것은 천국을 맛 보는 날들이 많아지기 위해서입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우리 삶 속에서 자주 일어나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원망하고 저주하여야 할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한다는 것은 그 안에 천국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면 천국이고 못 깨달으면 지옥입니다.

 

성도에겐 환경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어요.

다만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바라보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이면 감사가 나오고 안 보이면 원망이 나옵니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의 차이입니다.

천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깨달아져서 천국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이 성도를 간섭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간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그 어떤 자식들치고 부모님의 간섭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합니다.

 

이게 우리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간섭 당함을 싫어합니다.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길에서 잘 보여 주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길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열 번이나 거역하였다고 합니다.

열 번이란?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고 끝까지란 말입니다.

너희는 항상 나를 거역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열 번을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애굽의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도 고집을 피우고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애굽의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안 듣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목이 곧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멸망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째서 똑 같은 인간인데 전혀 다른가요?

 

이는 바로는 하나님이 강퍅한 마음 그대로 두셨고, 이스라엘은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바로는 간섭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간섭하셨나요?

이는 이스라엘 속엔 하나님의 언약(言約)이 담겨져 있고, 바로에겐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언약을 심어 놓고 그 언약을 위해서 간섭을 하십니다.

언약 때문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언약이 심겨진 성도는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늘 하나님으로부터 간섭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간섭이 결국엔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협착한 길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인간들이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린 예수를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것도 눈만 뜨면 날마다 죽이고 있습니다.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미워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린 생각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해요.

그러나 우리 맘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 갈 수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인줄 알면서도 그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요.

너 그러면 죽는다!

그래도 그 짓을 합니다.

잘못을 보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자행하고 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욕을 하면서도 실제로 자기도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은 같아요.

성경은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롬 1:29-32=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면 불의하고, 추악하고, 탐욕이 가득하고, 남 비방하기를 잘하고, 교만하고, 자기 자랑하고, 무정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다 동일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가 잘못을 하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그러면서 자기는 그와 다른 존재로 두고선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위에 말씀을 직역하면 저 놈 죽여라! 죽여라 하면서 자기가 그 죽일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남을 판단하면서도 내가 판단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잘못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욕을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욕을 하는 그 사람처럼 똑같이 그런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게 우리들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책망을 합니다.

속된 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느냐!

넌 도대체 누구관대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느냐! 라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정말 그 사람을 판단 할 수 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우린 입만 열면 남을 판단하고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이 모두가 우리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선악의 법이란? 심판하는 법입니다.

죽이는 법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은 비판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에 익숙한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남을 심판하려면 오직 죄가 없고 공의로우신 분만이 하실 수가 있어요.

죄 없고 공의로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인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피조물은 심판하는 권세를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심판하는 권세를 갖게 되면 공정하지 못합니다.

편파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입장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좋도록 창조 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도 그들 중에 하나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조화롭게 창조 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입장에서 보면 부조화처럼 보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도 피조물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는 보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쉬운 말로 내가 좋은 것이 남에게도 좋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피조물마다 다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 판단 기준은 십(十)이면 십(十) 다 다릅니다.

그러니 나에겐 선(善)이 되는 것도 남에겐 악(惡)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얼마든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는 인간은 언제든지 자기 유익에 따라서 모였다 헤어졌다 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정치판입니다.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적(敵)도 없고, 영원한 동지(同志)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동지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에 동지가 내일에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적이 내일에 동지가 되기도 해요.

이게 인간사에요.

 

정치판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축소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날마다 정치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정치란? 쉬운 말로 셈을 하는 것과 같아요.

손익계산(損益計算)을 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에요.

철저하게 손익계산(損益計算)을 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그러므로 인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내게 유리(有利)하느냐! 아니면 불리(不利)하느냐! 를 셈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아요.

복음을 알아도 항상 우리는 자신의 유(有), 불리(不利)를 따져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요.

내게 유리하면 안고 불리하면 멀리 합니다.

 

신(神)을 섬기는 것도 동일합니다.

내게 유익이 되면 섬기고 불리하면 떠납니다.

내가 있고 신(神)이 있어요.

나 없는 신은 헛 것이에요.

 

내가 곧 신(神)입니다.

그러므로 나 에게 유익을 주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선(善)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게 해를 주면 다 악(惡)이에요.

결국 선과 악은 나의 이익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선악의 법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남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판단하지 말라고 하여도 우리는 판단 할 수밖에 없어요.

본능(本能)이라서 그래요.

 

그러니 오늘 본문도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 서면 우린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죄인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이 판단하지 말라고 하여도 소 귀에 경(經)읽기 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역설로 읽으셔야 해요.

 

오늘 본문은 니가 뭔데!

남을 판단하느냐!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넌 무슨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느냐!

판단을 받아야 할 놈이 판단을 한다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남은 항상 틀렸다고 생각해요.

나는 옳은 자리에 앉혀놓고 남은 그른 자리에 앉혀놓고 난도질을 해 댑니다.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 하는 소리로 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건 누가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꼭 남을 지적하는데 사용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도 그 책망을 내 것으로 두지 않고 꼭 남에게 전가시켜요.

 

이처럼 인간들은 자신은 항상 치외법권(治外法權)에 두어요.

성경을 보아도 항상 나는 착한 사람 편에 서 있지, 악당들 편에 서 있지 않아요.

복 받은 사람 편에 세우지, 저주받은 자들 속에 두지 않아요.

그만큼 우리들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의 잘못은 실수로 돌리고 남에 잘못은 고의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다 있겠어요.

우린 항상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왜? 나와 상대를 다르게 볼까요?

이게 모두가 다 죄 때문입니다.

죄가 나와 상대방을 타인으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너와 나를 구분시켜서 그래요.

그래서 같이 죄를 지어도 상대방에게 전가를 시키는 것입니다.

난 저 사람보다 적다고 합니다.

항상 상대방에게 짐을 더 지우고 자기는 빠져나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난 책임 없어!

다 저 사람이 그랬어!

이건 본능적으로 자기방어를 하고자 해서 그래요.

 

우린 원래 한 아비로부터 출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너와 나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나와 너로 갈라지면 자연히 분리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어요.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해도 안 되어요.

형제가 잘되면 은근히 시기가 나요.

 

항상 남보다 내가 우월하여야 하고!

내가 상대에게 뒤지는 것은 용납이 안 되어요.

이는 죄가 항상 상대방을 경쟁상대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남을 칭찬하기 보다는 헐뜯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을 알아도 달라지지 않아요.

다만 복음으로 이러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알 뿐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지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나아질 수도 없을뿐더러 나아지지도 않아요.

다만 잠시 나아진 척 할 뿐입니다.

언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여 사랑합니다” 라고 소리쳐도 기뻐하지 않아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막아서고 내가 예수님을 지켜주겠다고 하여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야~! 이놈아!

오늘밤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난 저 사람을 도무지 모른다고 고래 고래 소리를 칩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남을 사랑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남이 잘 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겠어요.

없어요.

그래서 씹어대는 것입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뒤집어 씌워서 기어코 자신은 상대방 보다 낫다고 포장을 해 버립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서도 나 보다 잘난 놈이 있으면 안 되어요.

내가 으뜸이어야 해요.

인간이 모인 집단 속에는 항상 이 법칙이 진리처럼 통용이 되고 있어요.

1 인자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 인간들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가 관리를 해야 직성이 풀려요.

다 내 말을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응징 대상입니다.

교회이든 조직이든 어디서든지 인간이 모인 곳에는 항상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해 보세요.

그럼 사울은 뿔따구가 납니다.

자기가 왕인데 다윗이 인기가 더 많아요.

그러니 돌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엉뚱한 싸움을 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데 다윗을 죽이고자 했으니 안 죽고 배기겠어요.

 

이러한 것은 어느 조직에서도 나타나요.

누가 인기가 있다고 하면 다 쫓아내요.

이는 모두가 상대가 나보다 나으면 왠지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상대를 폄훼하고 깎아 내리는 겁니다.

비판하고 판단하고 결국엔 쫓아내고 죽이는 것입니다.

어느 조직에서도 잘 나가면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알아주면 미움을 받아요.

그럼 언제 무슨 핑계로 쫓겨날지 몰라요.

 

왜? 함께 가지 못합니까?

이는 죄가 타자로 보게 하고 으뜸 되고자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뒷전이고 자기 잇속 챙기기가 우선인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요.

항상 차등(次等)을 두고 서열(序列)을 정합니다.

이는 모두가 법이 그 안에서 작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입장에서 보면 나와 다름도 용납이 되어요.

 

나와 다르더라도 아! 하나님께서 저 사람은 저렇게 사용하고 있구나!

나와 저 사람은 그릇이 다르구나!

용도가 달리하여 쓰임 받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다 포용이 되어요.

 

전체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전체를 위하여서 쓰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 편” 이라고 생각이 되면 다르더라도 수용이 되어요.

그런데 죄가 “우리”에서 “나”로 갈라놓아 버렸어요.

전체(全體) 입장에서 객체(客體) 입장으로 바꾸어버렸어요.

 

죄가 “나” 라는 객체 입장에서 상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경쟁 상대가 되어요.

내게 유익이냐! 아니냐! 로 따지게 됩니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자기 입장에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넌 누구냐?”입니다.

넌 무슨 기준으로!

무슨 근거로 남을 판단하느냐! 입니다.

 

네가 뭔데 남을 함부로 판단하느냐!

네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느냐! 입니다.

너도 판단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굴 판단할 수 있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야고보서 4장을 봅시다.

 

약 4:11-12절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법을 집행하는 자가 아니라 법에 다스림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알라고 합니다.

 

지혜로움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을 받아야 할 자인지!

판단을 할 자인지 아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남을 판단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란? 앞에서 말한 것을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니 인간이 불의로 진리를 막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어 버려두었더니 창조의 목적에서 위배하는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위로는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아래로는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나의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말라기 2장입니다.

 

말 2:15 “여호와는 영(靈)이 유여(有餘)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영(靈)이 유여(有餘)하다는 것은 많은 영(靈)을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영(靈)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쉬운 말로 하나님은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구인이나 외계인처럼 종(種)이 서로 다른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종(種)인 인간을 만든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란? 하나의 사상을 가진 자를 얻고자 함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 자손(子孫)”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의 자손이 곧 경건한 자손” 입니다.

 

경건이란? 섞이지 않은 하나 됨을 말합니다.

경건을 다른 말로 거룩이라고 합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인 상태가 거룩이고 경건입니다.

 

그럼 성도에게 있어 경건이란?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됨을 말합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하나”인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합니다.

 

경건이 무엇인지는 죄성(罪性)을 역(逆)으로 이해해 보면 쉬워요.

죄가 경건을 깨트렸잖아요.

그럼 죄와 다른 모습이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죄가 뭡니까?

불순종이지요.

불순종이란?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순종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자기 생각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죄가 인간을 신(神)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만유가 함께 살도록 창조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태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란? “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개인이 아니고 “우리” 라는 “한 무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라는 “한 무리” 를 위하여 “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 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나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나”라는 독자적으로 살던 인생을 “우리” 라는 “한 무리” 속으로 이입(移入)시킨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 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라고 합니다.

통일(統一)이란? 하나란 뜻입니다.

 

죄가 각자로 흩어져 살게 한 것을 예수님이 하나로 통일한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그러니 구원은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인 것입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성도에게 있어서 이걸 잊는 것이 죄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영(靈)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나만 만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였던 것을 여럿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가 여럿을 만든 것을 다시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를 만듭니다.

이렇게 하나 된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경건은 인간의 착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예수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 앞에선 예수님만 경건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는 예수 밖에서 살라고 미혹하겠지요.

예수 밖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경건을 추구하라고 하겠지요.

결국 인간의 행함으로 경건을 얻어내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독자적인 경건을 추구하라고 해요.

 

성경에선 독자적인 경건은 없어요.

예수 안에서만 경건해요.

그러니 성도의 경건은 예수님의 경건인 것입니다.

 

우리의 착함도 예수 안에서의 착함이에요.

우린 착하게 살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착함이란? 남에게 이로움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남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오로지 자기 이로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죄는 한 무리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살라고 역사를 합니다.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한 무리 안에서의 연합을 깨트리게 됩니다.

한 무리에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해요.

 

내 유익을 위하여 살게 되니까 자연히 남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남을 헤치는 것을 비윤리(非倫理)라고 합니다.

또는 비도덕(非道德)이라고 해요.

 

윤리(倫理)란?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란 뜻입니다.

도덕(道德)이란?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인간을 이롭게 하며 사는 것을 인간다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다움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도 여기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윤리나 도덕은 집단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타인을 위한 것이에요.

윤리와 도덕은 내가 타인을 위하여 존재케 하는 것이에요.

세상은 이 규범으로 돌아가요.

이 규범을 벗어나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 놓았어요.

 

이러한 것을 법으로 만든 것은 죄가 이에 반(反)하는 모습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항상 집단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때 남을 해롭게 하는 비윤리성(非倫理性)과 비도덕성(非道德性)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十誡命)이나 사도 서신서들이 성도들에게 비윤리와 비도덕으로 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죄가 비윤리성과 비도덕성으로 삶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멀리하고 죄가 지향하는 것을 금하라는 의미에서 이방인들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인의 특징을 비윤리와 비도덕적 삶으로 말합니다.

비윤리와 비도덕적인 삶에 모습이 방탕과 방종과 방임이에요.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러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른 인간이란 말입니다.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가치관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관으로서의 삶이 바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에요.

결국 세상 사람과 다름으로서 세상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를 세상에 둔 목적이에요.

이걸 잘 이해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오해하여 죄의식이 없이 살아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살고 있어요.

자기 맘대로 살아요.

이건 복음 속에 담겨 있는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 짓고 사는 것을 합리화 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죄를 고발하고 금하게 해요.

복음을 곡해(曲解)하면 자기를 위한 것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 시대 복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러니까 복음 복음하면서 반(反) 성경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나 죄인이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뭐 어때! 라고 죄에 대하여 아파함이 없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 죄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해요.

그게 죄를 아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 짓고 사는 것을 면죄부를 주려고 십자가 죽은 것이 아니에요.

진정으로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안다면 죄에 대한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모습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 나 죄인이다! 어쩔래! 라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우리 몸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온전하게 순종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성향(性向)은 있어요.

이는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린 그 성향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윤리와 도덕적 삶을 살라고 명령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함과 동시에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라고 하면 우린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함에도 이렇게 용서 받고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작아지고 예수님의 공로만 커지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 수가 없어요.

이는 우리 안에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에 지향성과 성령의 지향성은 극과 극으로 다릅니다.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성향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게 됩니다.

 

암튼 죄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이탈하는지 아담의 후손을 통해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 속에서 죄가 어떻게 꽃을 피웠습니까?

남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났지요.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죄가 가인을 통해서 아우를 죽이는 모습으로 발현(發現)을 하잖아요.

가인이 왜? 아벨을 죽입니까?

아벨과 타인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인이 아벨을 자기와 하나로 보았다고 한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르다고 생각하니 시기가 생기고 미움이 생긴 겁니다.

미우면 미운 대상을 제거해야지 그냥 두고서는 자기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러니 죽인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은 영에 유여하실지라도 하나를 만든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지요.

경건한 자손은 한 영(靈) 안에 있는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런 인간을 창조했어요.

창세전 언약 안엔 이런 인간이 있어요.

 

가인과 아벨이 죄가 없었으면 한 몸이 됩니다.

그런데 죄가 두 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인은 죄의 눈으로 아벨을 자기와 다름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왜? 판단합니까?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간음 중에 잡힌 판단 받아야 할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간음한 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게 됩니다.

“저 여인이 바로 나입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난 간음 안 했는데요! 라면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고 있어요.

우린 항상 난 아니라고 해요.

난 죄 안 지었는데요!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을 향한 긍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린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범죄한 일이 있거든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는 용서 받을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앞에 어떤 범죄한 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곤 그 사람을 가지고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너” 라고 합니다.

 

내가 살인자이고!

내가 도적놈이고!

내가 간음한 자에요.

그러니 우린 누굴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나의 자화상(自畵像)이에요.

 

하나님이 상대방을 통해서 내 안에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나를 비취고 있는 거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잘못한 사람을 통해서 나를 찾아 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지금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 할지라도 판단 받아야 할 그 사람과 내 자신을 동일시하고 보셔야 해요.

이게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에요.

경건한 자손이에요.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상은 선악의 사상입니다.

선악의 법은 나와 상대는 둘로 보게 하여요.

너는 너고!

나는 나에요.

 

그러므로 선악의 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남을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선악의 법으로 신앙을 지켜온 자들이 바로 유대주의에요.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유대교는 철저하게 인간을 두 부류로 구분해서 판단했어요.

법을 지킨 자와 지키지 않은 자로 구분 했어요.

 

유대교에서는 율법 지킴이라는 행함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법 지킴이라는 행함이 곧 의(義)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법을 지켜서 의(義)를 만들어 낸 꼴입니다.

 

결국 이 사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됩니다.

그러니 율법 지킴이 곧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맞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켰다는 그 행함이 곧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원함은 있으나 그 원함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말씀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이상하리 만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성도는 말씀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마귀는 우리더러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해요.

살인하지 말라고 하고!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살인 할 수밖에 없는 자이고!

도적질 할 수밖에 없는 자이고!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자라고 합니다.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살인자이고, 도적놈이고, 간음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하나 안 하나 우린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살인자이고!

우린 도적놈이고!

우린 간음한 자에요.

 

살인이 뭔가요?

 

미움이잖아요.

가인처럼 아벨을 미워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했어요.

 

미움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미움은 본능이에요.

이건 우리가 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안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서 툭툭 삐져나와요.

 

이 미움이 결국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린 다만 억제 할 뿐이에요.

환경만 되면 밖으로 실체로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린 다 살인자들인 것입니다.

 

도적질이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런데 우린 감사하지 않아요.

 

피조물이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에요.

그럼에도 우린 모르고 살아요.

범사가 다 감사거리인데도 우린 선별해서 감사해요.

그러니 눈만 뜨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이 뭔가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세상을 사랑하고 있어요.

야고보서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는 오직 그에 나라와 그에 의(義)를 구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린 그에 나라와 그에 의(義)는 구하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만을 구하고 있어요.

구하라는 것은 구하지 않고 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구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린 날마다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하나님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없어요.

그 누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성령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그 요구가 도리어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그 정답대로 살 수가 없는 중풍병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중풍병자에요.

 

그러므로 우린 그 어떤 말씀 앞에서라도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선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라고 알려 주셨듯이!

신약에서도 성경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라고 알려주십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道理)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해부(解剖)한다고 하지요.

우리의 마음과 뜻을 해부하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해부하십니다.

완전히 발가벗기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다 죄라고 고발한단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우리의 눈을 어디로 향하게 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십니다.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하지요.

“믿는 도리(道理)”란? 예수님의 십자가 도(道)에요.

그러니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굳게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道)가 뭔가요?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란?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할 말씀을 예수님이 대신 다 지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너 이것 했어! 안했어!

말씀대로 살았어! 못 살았어! 라고 물으면!

“예수님이 다 하셨는데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나 대신 예수님이 다 지키셨는데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도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추상같이 너 앞으로 남을 판단하지 마! 라고 하여도 우린 안 할게요! 라고 하고서도 돌아서고 나면 여전히 또 남을 판단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가 없어요.

우린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수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은 우리더러 이런 짓을 하지 않는 자로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회개란? 탕자처럼 탕자 모습 그대로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가지고 회개 한다고 하면 “주여 난 안 됩니다!”

또 남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니 난 저주 받아야 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하여도 우린 그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의 끝엔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야 해요.

 

탕자의 회개 끝에는 아버지의 용서하심이 나타났어요.

그럼 우리들의 회개의 끝에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 잘났어! 가 아니라!

주여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의 끝자락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야 해요.

 

그렇지 않고 우리의 잘남이 나타나면 그건 가짜에요.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어요! 가 나오면 안 돼요.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에요.

성경은 이걸 악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에요.

천국은 잘난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못난 자가 들어가는 곳이에요.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세리와 창기들이 들어가는 곳이에요.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세요.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하세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난도질을 하세요.

어떻게 난도질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해요.

네가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인가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말씀 앞에 세워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항복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 부복케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한번 지켜보시란 말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싶으면 항복하세요.

항복이란?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도무지 이길 수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것은 거짓이에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 얼마나 무기력하고 형편없는 자인가를 알아야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투사해 보지도 않고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건 관념이에요.

 

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먼저 율법 아래 나게 하신지 아세요.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해 보아야 율법 아래서 건져준 은혜를 알게 되어요.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신앙생활도 좀 해보아야 해요.

옛 언약 아래서 종 노릇을 해 보아야 새 언약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어요.

새 언약은 반드시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반드시 지옥을 경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옥을 모르면 천국에 대한 축복과 고마움을 몰라요.

 

법을 모르면 은혜에 감사함을 몰라요.

그러므로 은혜는 항상 법을 바탕으로 하여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법을 통해서 은혜를 은혜 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많이 깨닫는 자는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사랑할 것이라고!

어떻게 깨닫습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처절하게 깨어지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거지가 되어서야 비로서 아버지 집에 고마움을 알았어요.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은 관념이었어요.

그러니 집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탕자가 집을 떠나겠다고 하여도 붙잡지 않은 것은 탕자에게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의 고마움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건 돈 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 자식이 감당하기도 힘든 많은 돈을 주고서 나가서 살아보라고 한 것입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서 비로서 아버지 집에 고마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주 비싼 수업료를 주고 배운 것입니다.

탕자와 맏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깊이가 달라요.

맏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추상적으로 알지만 탕자는 몸으로 느껴요.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축복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의 모든 것이 감사거리임을 알았어요.

아버지 집에서 죽도록 충성을 해도 감사가 되어요.

탕자는 비록 뼈 빠지게 일을 해도 맏아들처럼 자기가 한 일을 근거로 아버지에게 대 들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탕자 만들기를 하세요.

 

말씀 앞에서 우리가 탕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앞에 많이 부서지고 깨어진 사람과 하나님 말씀을 구경만 한 사람과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깊이가 달라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 달라요.

 

말씀에 부딪쳐서 깨어지지 않으면 신앙이 관념으로 흘러요.

이런 사람들은 말쟁이가 되어요.

진짜 복음을 맛 본 사람은 복음 안다고 자랑하지 않아요.

남을 판단하지도 않아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

 

복음 아는 것을 자기고 남을 판단하거나 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복음을 맛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건 지식에요.

복음을 귀로만 듣고 구경만 하였어요.

그러니까 주둥이로는 복음 복음하는데 그 속에선 복음에 본질인 은혜가 나오지 않고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짜 말씀 앞에 해부당한 사람은 할 말이 없어요.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요.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을 유구무언(有口無言)케 하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 바울은 로마서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간과하지 마세요.

당시 교회 안에는 유대교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었어요.

어느 시대이고 교회마다 말씀대로 산 것을 의(義)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있어요.

 

유대인들은 인간을 율법 안에 있는 자들과 율법 밖에 있는 자들로 구분했어요.

율법을 지키는 자는 경건하다고 하였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자기 우월성으로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 심판자가 되어서 남을 판단하고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그건 아니지! 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의 주장은 네가 지금 남을 판단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선 너나! 네가 판단하는 그 사람이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 유대인이나 율법을 안 지킨 이방인이나 동일하다고 합니다.

다 한 통속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을 말하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인간을 나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남자와 여자는 성별(性別)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의 차이는 없는 것과 같아요.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하고 사람이라는 것에는 차별이 없는 것과 같아요.

남자와 여자 통틀어서 인간이에요.

죄인이에요.

 

남자도 죄인이고 여자도 죄인입니다.

키 큰 사람도 죄인이고 키 작은 사람도 죄인이에요.

흑인도 죄인이고 백인도 죄인이에요.

어른도 죄인이고 아이도 죄인이에요.

죄인이라는 의미에선 차별이 없어요.

 

이처럼 율법을 지킨 유대인도 죄인이고!

율법을 안 지킨 이방인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함으로 죄인이다 의인이다 차별한다는 것 자체가 틀린 거에요.

인간 자체가 동일한 죄인인데 뭘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눌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 할 때는 그 기준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 기준이 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심판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누구를 판단 한다고 합시다.

남을 판단하는 그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복음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니까 넌 틀렸어 라고 하는 것이잖아요.

 

그럼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맞는다고 하는 그 복음은 누구에게 인정받은 것입니까?

물론 성경에서 인정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는 것은 무오(無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어느 집단에서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도 자기들은 성경적이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망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신앙이 성경적이라고 믿었어요.

자기들의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했어요.

추호도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이 판단 할 때는 율법 지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 옳으냐 입니다.

하나님도 그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판단하는 기준이 유대인들이 판단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판단하는 그 판단은 틀린 것이 됩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 판단 기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건 바울 자신이 잘 알아요.

 

바울도 예전에 유대인들이 그 기준으로 판단했어요.

그 기준으로 스데반도 죽였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럼 스데반을 잘못 죽인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기 기준으로 스데반을 죽인 것이 곧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은 곧 자기 자신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전에 자신이 스데반을 판단하던 그 때를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함은 거듭나지 않았단 말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였을 때란 말입니다.

 

바울이 이 말은 곧 판단 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판단하실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만 죄 없는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굴 판단하자 않았어요.

왜냐하면! 판단할 몫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고전 4:3-5절󰡒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교회 안에는 갖가지 문제들이 있었어요.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났고!

각양의 범죄의 모습들이 나타났어요.

 

그럼에도 바울이 극단적으로 너희들 이단이지 그러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기의 계모와 간통한 사람이 있어도 너 지옥 가 그러지 않았어요.

만약에 간통을 하여서 지옥에 간다고 하면 행위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행위로 끊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호되게 책망을 하지만 그가 마귀새끼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어요.

바울이 책망 한 것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교회 안에 이러한 죄성들을 방치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썩은 과일을 상자에서 골라내듯이 잘라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건 죄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에요.

너희들 개판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바울은 개판으로 산 자들을 엄청 나무랐어요.

 

바울이 책망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아파하지 않는 그 그릇된 사고를 책망하는 것이에요.

죄인이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죄 짓는데 뭐!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가 진심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런 성향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죄인이 죄 짓는데 뭐 어때서! 라고 하지 않아요.

이런 자들은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은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인 척하는 자들이에요.

어느 시대고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서 복음을 훼방했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다시 우리가 누구를 판단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누구를 판단하려면 의인이라야 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판단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만 의인이세요.

 

의인이란? 자기 생각이 없어요.

하나님 생각뿐이에요.

모든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심판권을 주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마음으로 판단하세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판단만이 옳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만 심판자가 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창조주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복음도 늘 판단 받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늘 점검 받아야 해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읽어낼 수가 없어요.

알아도 부분적인 것이에요.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계시를 다 주시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 다 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메시야가 되어요.

심판주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겸손하여야 합니다.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고!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그러니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그 사람만이 받은 은혜가 있단 말입니다.

그럼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라고 하나님은 한 몸에 은혜로 부르신 각각의 지체들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살펴보고 마칩시다.

 

고전 12:4-3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고 하지요.

여기서 은사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해요.

그러니 그 일을 행하게 하는 능력은 성령이세요.

성령이 각양의 것으로 나타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타나는 것마다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천하냐!

없어요.

다 귀해요.

 

그래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각 그 뜻대로 나누어 주셨어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몸에 지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몸이란? 지체의 연합이에요.

지체와 지체가 하나로 모여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지체 중 하나만 없어도 불완전해요.

병신이에요.

그러므로 몸에 속한 것은 다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있나요?

없잖아요.

손톱도 귀하고!

눈썹도 귀해요.

머리카락도 귀해요.

 

바울은 이 몸에 지체를 교회 안에 직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각양의 성도들이 모입니다.

모두가 직분 자들이에요.

모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모인 자들이기 때문에 다 직분 자들인 것입니다.

 

이 모두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나누어주셨어요.

세우셨어요.

그러니 성도 간에는 차등이 없어요.

 

모두가 한 몸이기 때문에 서열이나 차등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사랑 안에서 공유하고 있어요.

그러니 서로 돌아보고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판단하여서 잘라 내면 안 되어요.

설령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함께 아파하고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이게 한 몸이에요.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인자하심을 맛 보았어요.

긍휼을 입었어요.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남도 긍휼로 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욕되게 하지 마세요.

멸시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긍휼을 욕되게 하는 것이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를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을 통해서 내 눈에 들보를 보셔야 합니다.

나는 그 보다 더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그래서 내가 엄청난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서 꽃이 피고 새들이 날고 풍성한 열매들이 맺히는 사랑의 동산이 이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엄청난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비판과 정죄와 심판이 사라지게 하시고 용서와 사랑이 넘치게 하옵소서. 주께서 일을 시작하였사오니 세초부터 세말까지 주께서 권고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는 바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추상이 아니라 실상으로 보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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