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권동철(權銅哲) 2014. 10. 30. 17:51

 

 

60.5×72.7, 삼베위에 옻칠, 흙가루, 숯가루, 뼈 가루, 자개, 2009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막 눈을 떴을 때, 방 안엔 은빛 빗줄기가 주르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선명히 드러나는 연보라 빛줄기. 성령의 흐름, 이마 짚는 손길의 확신에 그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무념무상 호흡의 세계. 깊은 바다 속,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듯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촉감으로 당겨오는 비어있는 대().

 

 

 162×130, 삼베위에 옻칠, 흙가루, 숯가루, 뼈 가루, 자개, 2008

 

 

정결(淨潔)의 마음 위에 삼베를 펼쳐놓았다. 삶과 죽음의 기로점. 휘적휘적 먼 길 가는 망자(亡者)가 이별의 아픔을 가리는 옷깃. 늦은 밤 여인의 한() 다스린 고행의 산물. 그것을 걸치는 회개, 순종, 섬김이라는 이름의 덕목들.

 

삼베는 옻을 만나 조화로워진다. 손가락이나 손바닥에 직접 묻혀 손으로 문질러가며 삼베가 바탕 재료로 되어 있는 캔버스 위를 채운다. 천연의 옻칠로 깊고도 은은하게 거듭 피어난다. 한 방울, 한 방울 피 같은 수액을 떨어트리고 나무가 죽음으로 빚어낸 천년(千年)의 빛!

 

 

 

  

 

옻칠과 흙을 섞은 우아하고 지혜로움 배어 있는 한국적 정서의 바탕에 숯이며 돌가루와 뼛가루, 뜨거운 불을 인내한 정금(正金)가루가 뿌려져 산과 돌이 되고 구름으로 흐른다. “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네가 꽃 피었다면? 나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네가 꽃피었다면? , 자연의 길은 그렇다. 바라건대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모든 건 꽃핀다.”<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진주(珍珠)의 모태는 자개. 더 내려놓아야만, 더 낮춰야만 비로써 쪼개진 자개들은 수공의 정신을 만난다. 진리인가, 낮 달 같은 원()은 빛나고 인간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인가. 때 묻지 않은 세계에서 대나무는 악기는 물고기로 사람으로도 승화되어 희망과 기쁨의 상징이 되는가.

 

이윽고 자연이 준 화려한 매력의 극치가 화면에 펼쳐진다. 삼베 위 매끈한 평면이 아닌 입체감이 드러나는, 매우 간결하고 내추럴하게 표현된 작품세계에 순수의 상태, 평화를 꿈꾸는 동산, 영혼의 평강이 넘치는 신창세기(Re Genesis)’가 온전하게 깨어나는 것이다.

 

 

   

72.7×91, 삼베위에 옻칠, 흙가루, 숯가루, 뼈 가루, 자개, 2010

 

 

사다리를 한 단계씩 믿음의 담력으로 넘는 묵언의 행()에는 연두빛 생기가 감돈다. 일본 미술평론가 시바 시게오(Chiba Shigeo)씨는 그녀는 아마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렀다라는 것은 자신의 뿌리, 자신이 나온 곳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고 했다.

 

대지 위를 구르는 나뭇잎, 이름 모를 꽃잎들, 누군가 홀로 걸어간 발자국. 화면에 얼룩져있는 생의 편린(片鱗). 자연의 슬하에 거룩하고도 참된 충만감이 은비 속에 반짝인다. 맨손, 맨발로 지난한 편력의 흔적들을 천연덕스럽게 담아내고서 그녀는 어느새 해맑게 돌아와 있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201151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