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라잡이

Panna Vamsa 2009. 4. 26. 14:36


간화선의 수행

1. 서언:간화선의 수행 구조

송대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에 의해 제기된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의 수행은 대혜종고(大慧宗┳) 선사가 새로운 선수행 방법으로 대성시켰다. 송대의 간화선은 당대(唐代) 조사선(祖師禪)의 정신(불교의 경전·어록·禪問答 등)을 공안으로 간주하고 이를 마음의 눈으로 읽고(看) 공부하여 깨달음의 경지와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 창안된 새로운 선수행이다.

중국인들이 선례(先例)를 중시하는 상고(尙古)주의적인 정신으로 대승 경전과 당대 조사들의 선문답을 깨달음의 선례(判例)인 공안으로 간주하고 이를 참구하여 각자의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正法眼藏)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 간화선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 불성)을 깨닫는 무자 공안 참구와 여타의 수많은 공안의 다양한 사례와 판례를 공부(看)하여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고 구족하는 공안 공부를 병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간화선의 수행은 조주의 무자 화두 참구와 공안 공부(看經·看話) 이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에서는 고려시대 보조지눌(普照知訥)과 혜심(慧諶) 등 수선사의 정혜결사 이후로 간화선의 수행체계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선수행만이 중심이 되고 있고, 주지나 조실이 어록이나 《벽암록》 《무문관》 등을 제창(提唱)하여 정법안목(正法眼目)을 갖추는 간경과 간화의 본질적인 공안 공부는 등한시되고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정법의 안목 없는 선사들이 경전이나 어록, 공안집을 제대로 후학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학인들이 경전이나 어록 등을 읽고 보는 것조차도 못하게 하여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모르는 불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철저히 교육을 통해서 배우고 익히지 못한 불교인은 자기 자신이 불교인으로서 올바른 안목을 갖춘 수행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불교의 정신과 가치관을 토대로 지혜로운 삶과 인격형성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중생 구제의 보살도를 실행할 수가 없다. 요즘 제기되고 있는 한국불교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을 아예 무시하고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의 제반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성하여, 올바른 간화선의 수행 방법과 공안 공부, 지도 방법 등을 바르게 파악하여 이 시대에 맞도록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현재 한국불교는 교단과 학교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제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이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출가, 재가의 불교인이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나 실천 수행 방법의 문제, 불법 정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더군다나 불교인들이 불법의 정신을 제대로 모르고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슨 말로서 대변해야 하는가?

불교인들은 철저히 아프게 각성해야 한다. 선불교의 수행과 정신으로 이 시대와 미래 인류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갈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시대적인 요청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필자의 이 논문이 불교인들이 새롭게 발심하여 경전이나 어록·공안을 참구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불법 공부를 하고, 자기 자신을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깨달음의 불심으로 전환하여 지혜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구도자의 수행생활을 철저히 확립하고, 한국불교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재정립하여 올바른 선수행이 실행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선수행의 기본 구조

대승불교의 실천체계를 정립한 《대승기신론》의 〈지관문(止觀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불교의 실천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지란 마음을 안정(집중)하여 대상의 모양(相)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곧 心眞如를 念하는 것)이다. 범어로 사마타(奢摩他, samatha:寂靜)의 수행(觀)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관이란 여러 가지 현상의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모양(心生滅의 相)을 분명히 파악하는 지혜이다.

이것은 범어로 비발사나(毘鉢舍那, vipasyna:智慧. 正見)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수순(隨順)해야 하는가?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수행을 점차로 수습하여 이 두 가지의 수행이 하나가 되어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다.(大正藏32권 582쪽上) 여기서 말하는 지란 삼마파(sammatha)로서 적지(寂止)·적멸(寂滅)·무념(無念)의 실천을 말한다.

즉 일체의 산란심이나 망념·망상을 멈추고 마음이 본래 적정의 세계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을 말한다. 좌선 수행을 통하여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든다고 함은 지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삼마타(止)의 실천으로 근본 무별지(根本 無分別智)를 체득하는 요인이 되며, 이로 인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문(眞如門)에 들게 된다. 그리고 관이란 비파사나(vipasyana)로서 직관(直觀)·지혜(智慧)·정견(正見)이란 의미인데 일체의 만법의 실상을 관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즉 관찰수습(觀察修習)하는 수행으로 진리나 진실, 일체의 모든 만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 진리인 사성제나 연기의 법칙 등의 일체의 생멸법은 붓다의 지관 수행으로 체득된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만법이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중생의 생멸문(生滅門)에 들어가는 지혜로 후득지(後得智)를 체득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중국불교의 금자탑을 세운 천태지의(天台智확, 538∼597)는 이러한 《대승기신론》의 지관 수행을 토대로 《차제선문(次第禪門)》 《마하지관(摩訶止觀)》 등 많은 저술을 통하여 전불교의 수행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승기신론》의 지관 수행의 체계를 송대의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공안 공부로 새롭게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의 대성자인 대혜종고는 귀양지에서 사대부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대혜서(大慧書)》에서 묵조사선(默照邪禪)을 비판하고 배척하면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을 사대부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간절히 제시하고 있다. 대혜가 제시하고 있는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수행인 것이다. 그리고 대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3권을 편집하여 661칙의 공안에 착어(着語)와 코멘트를 첨가하여 제자들에게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게 하기 위하여 공안집을 편찬하고 있다. 사실 대혜의 《정법안장》은 다양한 종류의 공안집이며 사례와 판례집이다.

다양한 현상세계의 생멸법에 끄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과 현상·환경·조건·사건·사물 등을 통하여 정법을 바로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구족해야 하는 것이다. 즉 간화선에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공부는 사마타(止)의 실천으로 일체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근본 무분별지(根本智)를 계발(啓發)하게 하는 수행인 것이며, 기타 많은 경전과 어록, 1,700공안 등 수많은 사례와 판례인 공안을 참구하도록 하는 것은 비파사나(觀)의 수행으로 일체 만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正法眼藏)을 구족하게 하는 수행으로 즉 다양한 후득지를 체득하게 하는 공부인 것이다.

즉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은 각자가 일체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근본지를 체득하는 수행이며, 《정법안장》 등 수많은 사례와 판례인 공안을 공부하는 것은 정법의 안목을 점검하고 조고(照顧)해 불법의 지혜(後得智)를 체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본래심의 근본지와 현상세계의 생멸법인 후득지를 많이 체득하여 근본지와 후득지가 일체(隨順)가 되어 일상 생활 속에서 일체의 경계에 끄달려 자아가 매몰되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로 일상 생활을 창조적인 삶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이하 절을 바꾸어 간화선의 공안 공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3. 간화선의 화두 참구는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공안

대혜가 주장한 간화선은 각자의 번뇌망념(不覺)을 조주의 무자 공안이라는 방편을 참구(始覺)하여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참선 수행을 말한다. 즉 번뇌망념과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본래심의 세계(還歸本處)로 되돌아가 열반적정의 경지를 체득하게 하는 참선 수행인 것이다.

즉 무자 공안을 방편으로 스스로 고(苦)에서 해탈하는 자각의 종교인 것이다.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게 하는 수행인 것이다. 대혜가 제시한 간화선의 유일한 화두(공안)는 조주의 무자 화두뿐이다. 수많은 공안 가운데 특히 조주 무자 공안을 찾아내어 참구하도록 한 것이 대혜에 의해 대성된 간화선의 역사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대혜어록》 제24권 〈시묘명거사(示妙明居士)〉에 다음과 같이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주장하고 있다. 생(生:번뇌 망념이 일어남)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사(死:일어난 번뇌 망념이 없어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을 의심하여 잊지 않으면 즉 이것은 생사가 교가(交加)하는 것이다. 생사가 교가하는 곳에 이 화두를 간(看)하도록 하라.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질문하니, 조주스님이 “무”라고 말한 화두를.(大正藏 47권 911쪽 上) 대혜가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제시한 화두는 조주의 무자 화두가 유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혜의 어록과 《대혜서》 등에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으며, 또 《인천보감(人天寶鑑)》 〈진국부인(秦國夫人) 법진(法眞) 비구니〉장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법진 비구니가 어느날 겸(謙)선사에게 질문했다. “경산대혜(徑山大慧) 선사는 평소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습니까?” “스님께선 오직 사람들에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무자 화두만을 들어 참구하도록 합니다.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그곳에는 발을 붙여도 안 되고, 이리 저리 헤아려서도 안 됩니다. 오직 “구자(狗子)에게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 스님이 “무”라고 한 그 말만을 들으라고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續藏經 148권 70, d) 대혜의 간화선의 특징은 조주의 무자 화두(공안)만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며 참선 공부하도록 하고 있는 점이다.

《대혜서》나 《대혜어록》 등에서는 다른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나 ‘마삼근(麻三斤)’ 그 밖의 공안도 제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공안은 선문답의 의미를 참구하여 정법안목을 구족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화두인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을 계승하여 체계화시킨 무문혜개(無門慧開)의 《무문관(無門關)》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사실 간화선의 근본은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며, 간화선의 수행에서 본래심을 조고해보는 도구(방편)로서 조주 무자 공안을 능가하는 체계적인 공안은 없다.

조주 무자 화두를 간하여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송대의 간화선은 오조법연(? ∼1104)의 법문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으며, 대혜종고에 의해 간화선으로 대성되었고, 무문혜개(1183∼1260)의 《무문관》에서 수행체계가 완성되었다. 먼저 간화선의 중심적인 공안인 조주의 무자 공안에 주목한 오조법연 선사의 설법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법연선사어록》 하권에는 조주 무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법어가 보인다.

상당(上堂)하여 조주의 무자 공안을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狗,犬)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은 “없다(無).”고 답했다. 그 스님은 다시 말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狗子)는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합니까?” 조주 스님은 “그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법연 선사가 말씀하였다. “대중 여러분들은 평소 어떻게 불법을 알고 있는가? 노승은 평소 다만 이 조주의 무자만을 들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네들이 만약 이 조주의 무자를 투득(透得)한다면 천하의 사람들 그 누구도 자네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다. 자네들은 도대체 어떻게 투득할 것인가? 철저히 투득한 사람이 있는가? 만약 있으면 이리 나와서 대답해 보도록 하라. 나는 자네들이 ‘유(有)’라고 대답하는 것도 요구하지 않고, 또한 ‘무(無)’라고 대답하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 자네들 도대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大正藏 47권 665. 中) 오조법연 선사가 조주의 무자 공안을 강조하여 제자들을 지도했었다는 사실은 대혜의 《대혜서》 〈답고산체장로(答鼓山逮長老)〉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오조법연 선사가 백운(白雲)에 머물고 있을 때, 어느날 영원(靈源) 화상에게 보내는 답장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번 하안거에 여러 장원의 벼 수확을 하지 못해도 근심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근심 걱정해야 할 것은 한 승당에 수백 명의 납자(衲子)가 이번 하안거에 한 사람도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를 투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불법이 장차 멸망될까 염려스러울 뿐입니다.(大正藏 47권 942. 下) 송대 간화선 수행의 방편으로 조주의 무자 화두가 제기된 것은 오조법연 선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법연 선사는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것으로 참선 수행은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이 조주의 무자 화두를 투득하면 천하의 사람들 그 누구도 자네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생사의 차별심을 벗어나 본래심을 깨달아 사바세계를 해탈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법연 선사는 구체적으로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유나 무의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견해에 떨어지지 말고, 유와 무를 모두 초월한 경지를 체득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법연 선사가 조주 무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으로 절대의 경지인 불성을 체득하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조법연 선사가 조주 무자 화두를 제시하여 선수행에 참구하도록 한 것은 송대 간화선의 출발점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했는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교시가 전하지 않고 있어 잘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대혜의 간화선 참구 방법과 매우 비슷하리라고 추측된다. 법연 선사에 의해 다시 발견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선 수행으로 구체적으로 개발하고 제시하여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도록 간화선으로 대성시킨 사람이 대혜종고이기 때문이다. 대혜의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유일한 공안으로 하여 참구하고, 참선공부하도록 하는 것이며, 바로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그의 간화선을 송대 간화선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인천보감》 〈진국부인 법진 비구니〉장에서 전하고 있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대혜의 공안선에 대한 주장을 《대혜서》 등을 통해서 살펴보자. 《대혜서》 〈답왕내한(答汪內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구자(狗子,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 스님 은 “없다(無).”라고 대답한 공안을 참구하시오. 부디 쓸데없는 사량분별의 마음을 ‘무’ 위에 옮겨 놓고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량을 초월한 곳에서 (生死의 분별심인) 일념(一念)이 타파된다면 그것이 삼세(三世)에 통달하는 것입니다.(大正藏 47권 928.下) 《대혜서》 〈답영시랑(答榮侍郞)〉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직 이렇게 되지 않으면 먼저 세간의 번뇌를 사량(思量)하는 마음을 사량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돌려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어떤 곳이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가?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구자(狗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는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무’라는 한 자를 만약 당신이 어떤 기량이 있으면 잘 안배(按排)해서 조절해 보시오. 계교(計較) 분별해 보시오. 그리고 사량하고 분별하고, 안배(조절)해서 무자를 처치할 수가 없고 다만 가슴 속에서 고민하다 심중(心中)이 괴로움을 느낄 때야말로 정말 이것이 좋은 시절이 된 것입니다. 제8식(識)도 계속해서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자각했을 때 내던져 버려서는 안 됩니다.

단지 이 무자 위에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도록 하시오. 공부에 공부를 거듭할 때 생처(生處)에 스스로 익어가고, 익은 곳에서 스스로 홀로 살아나게 됩니다.(大正藏 47권 939. 中) 대혜가 무자 공안을 참구하도록 하는 것은 생사심(生死心)인 일체의 사량분별을 끊고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그곳에서 근원적인 자기의 자각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선수행의 방편으로 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혜의 간화선은 생사를 타파하고 불안의 의심(疑心)을 끊는 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대혜서》 〈답진경(答陳少卿)〉의 다음의 일단을 살펴보자. 원하건대 당신은 오로지 의정(疑情)이 깨어지지 않은 그곳을 향해서 참구하도록 하시오.행주좌와(行住坐臥)에 정신을 느슨히 풀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구자(狗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는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주의 무야말로 생사의 번뇌를 타파하고 불안의 의심을 끊는 (지혜) 칼인 것입니다.이 칼자루는 다만 각자의 손에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손을 쓰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손을 써서 타파하고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大正藏 47권 923. 上) 또 대혜는 조주의 무자 공안은 사량분별과 나쁜 지해(知解)를 타파하는 무기라고 《대혜서》의 〈부추밀(富樞密)에 답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만약 곧바로 단번에 깨닫고저 한다면 이 일념(一念)이 쫙 찢어질 때 비로소 생사를 깨달을 수가 있으며 이를 깨달음(悟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마음에 깨달음의 순간 찢어지는 것(破處)을 기대하는 것을 가진다면 영겁이 지나도 이러한 기회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망상전도(妄想顚倒)된 마음, 사량 분별의 마음, 생을 좋아하고 사를 싫어하는 마음, 지견해회(知見解會)의 마음, 조용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꽉 누르고, 그 꽉 누른 곳에서 화두를 간(看)하도록 하십시오. 예를 들면,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狗子)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는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무’라는 한 자야말로 온갖 잘못되고 그릇된 지해를 쳐부수는 무기입니다. 이 무를 깨달으려면 유무의 상대적인 의식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도리(道理)로서 무를 알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의식으로 사량하여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동자를 굴리는 곳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말하는 그곳에 생활을 삼아서도 안 됩니다. 무사(無事)한 가운데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제시된 공안에 대하여 곧바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문자 가운데서 증거를 찾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한결같이 하루종일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언제나 무자 공안을 들고 정신차려 참구해야 합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라는 문제를 일상생활 가운데서 잠시라도 놓치지 말고 이와 같이 공부하게 되면 한 열흘만에 곧 바로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大正藏 47권 921. 下)

대혜는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을 억누르고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조주의 무자 공안은 지견해회(知見會解)를 때려 부수는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대혜의 간화선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참선 수행의 방법이며, 이러한 공안 참구로서 일체의 사량 분별이 일어나지 않은 근원적인 자기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간화선의 공안은 자기의 본래심인 불성을 조고(照顧)해 보는 도구인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은 주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의 공안은 1,700 종류가 있다고 하지만 조주의 무자 공안(화두)이 기본이 되고 있으며 사실 대혜의 간화선은 이 공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대혜는 간화선의 참구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이 간화선의 선병(禪病)에 떨어지기 쉬운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이 무를 깨달으려고 하면 유무의 상대적인 의식을 일으켜서도 안 되며, 도리로서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의식으로 사량해서 판단해서도 안 되며,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동자를 굴리는 곳에 머물러서도 안 되며, 말하는 그곳에 생활을 삼아서도 안 되며, 무사 그 가운데 머물러서도 안 된다. 제시한 공안에 대해서 바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문자 가운데서 그 증거를 찾으려 해서도 안 된다’라고 하는 공안 참구의 주의 사항이다. 고려시대에 공안선을 도입하여 고려불교 선종의 새로운 선불교 실천을 주장한 보조지눌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저술하여 이것을 ‘간화10병’으로 규정하고 간화선 수행자들을 주의시키고 있다.1) . 1) 《한국불교전서》 제4권 765항 참조. 《보조전서》 163항. 《선가귀감》에서도 인용함.

지눌이 《간화결의론》에서 간화선병의 근거로 의용한 것이 《대혜서》인데 그 가운데서 〈답장사인장원(答張舍人狀元)〉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의시키고 있다. 정식(情識)이 타파되지 않으면 심중(心中)의 불길이 타게 된다. 이러한 때 오로지 의문으로 하는 화두를 들고 공부하시오. 예를 들면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개(狗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가 “없다(無).”라고 대답한 이 무를 한결같이 들고 참구하도록 하시오. 왼쪽으로 갖고 와도 안 되고 오른쪽으로 갖고 와도 안 됩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공안을 제기한 그곳을 향해서 납득해서도 안 됩니다.

현묘(玄妙)한 영해(領解)를 해서도 안 됩니다. 유나 무로 추측해서도 안 됩니다. 진무(眞無)의 무라고 하는 억측을 해서도 안 됩니다. 무사(無事) 그 자체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격석화섬전광처(擊石火閃電光處)를 향해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곧바로 마음의 작용이 없이 마음의 행처(行處)가 없을 때 공(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참구할 때 좋은 공부가 됩니다. 곧바로 쥐가 소의 뿔 속에 들어가 진퇴할 수 없을 때, 곧바로 미혹함과 전도망상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大正藏 47권 941. 中) 또 《대혜서》 〈답종직각(答宗直閣)〉에도 다음과 같이 간화선병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인연에 응할 경우 다시 한 번 차별의 경계를 만났다고 느낄 때에는 다만 그 차별의 장소에 대하여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를 들고 참구(看)하시오.

번뇌를 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정진(情塵)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차별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불법(佛法)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구자무불성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시오. 오로지 이 무자 하나만 들고서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만약에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계도 차별하고, 불법도 차별하고, 정진(情塵)도 차별하고, 구자무불성 화두도 차별하고, 중단하는 경우에도 차별하고, 중단하지 않을 경우에도 차별하고, 정진에 혹란(惑亂)되어 신심(身心)이 안락하지 않은 경우도 차별하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차별해서 잘 아는 것도 차별하게 됩니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고자 한다면, 오로지 무자를 참구하도록 하시오.(大正藏 47권 933. 中)

대혜는 간화선의 수행에서 일어나기 쉬운 여러 가지 선병을 지적하고 이러한 일체의 차별심, 분별심이 일어나는 그곳에 무자 공안을 들어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대혜는 간화선의 공안 참구 목적에 대해 《위산경책(펨山警策)》의 ‘이오위칙(以悟爲則)’ 즉 ‘깨달음을 원칙으로 한다’는 말을 여러 곳에 인용하여 강조하였고, 이것이 간화선의 목적처럼 간주하기 쉽게 되었다. 그래서 묵조선에서 간화선을 비판하기를 ‘깨달음을 기다리는 대오선(待悟禪)’이라고 지적하면서 비난하였던 것이다.2) 2) 道元의 《永平廣錄》 제8권(法語 11)에 ‘諸宗坐禪 待悟爲則’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道元은 《正法眼藏》 〈大悟〉 등에서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대혜가 간화선의 수행에서 선병에 떨어지기 쉬운 여러 개의 항목을 열거한 가운데 몇 차례나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는 것으로 간화선이 대오선이 아님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체적인 무자 공안의 참구는 앞에서 대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가사량저(不可思量底)의 사량인 것이다. 즉 불가사량인 그곳에 무자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것이기에 여기에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개입하거나 존재할 틈이 없는 것이다. 즉 대오(待悟)의 마음을 부정하고 개오(開悟)를 기대하는 마음을 일체 끊는 것이 무자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것이다.

또한 대오의 마음뿐만 아니라 문자나 이치로 무자 공안을 이해하려는 마음, 유무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나 일체의 사량 분별심이 무자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순간 일시에 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이 무자야말로 “생사의 번뇌망념을 타파하고 일체의 의심을 끊는 지혜의 칼”이라고 하며, “일체의 나쁜 지견해회(知見會解)를 쳐부수는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혜는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 의미를 《대혜서》 〈답탕승상(答湯丞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 언제라도 마음을 텅 비워서 일상생활의 할 일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고 경계를 만나거나 인연을 만나면 때때로 무자 화두를 들고 참구하시오. 빨리 어떤 효과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무상의 도리를 연마하고 궁구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법칙(기준)으로 합니다.(硏窮至理 以悟爲則) 그러나 제일 먼저 마음 속으로 깨달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대하면 기대하는 마음에 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게 되어 급히 서두르면 급히 서두를수록 지체되고 맙니다. 오직(조주 무자) 화두를 들고 참구하시오.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그곳에 곧바로 생사의 번뇌심이 끊어지니 이곳이 즉 자기의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 이를 수가 있다면, 자연히 옛사람의 여러 가지 방편 법문을 알아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저절로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大正藏 47권 941. 下) 대혜는 무자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그곳이 다름아닌 생사의 번뇌심이 끊어진 귀가온좌지처(歸家穩坐之處)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대혜서》 〈답이보문(答李寶文)〉에서도 ‘귀가온좌저로두(歸家穩坐底路頭)’3)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곧 선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본래심인 집에 되돌아가서 일체의 근심걱정과 불안(苦)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大慧語錄》 제29권 (T. 47∼935. 下)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행상의 구조는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정신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집(家)을 중심으로 가정생활과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한 동양인들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집인 것이기에 밖에 외출했다가 집으로 되돌아 옴은 일체의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십우도(十牛圖)》에서도 소를 찾아 나갔다가 소를 찾아 소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기우귀가(騎牛歸家)’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동양종교의 본질을 숲의 종교로 파악하여 논한 바 있다. 여기서 숲의 종교의 구조를 장황하게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집(家)과 숲(자연, 農土)과의 구조적인 관계에서 살아가는 동양인의 사고에서 귀가온좌가 선불교의 안심입명처가 되는 그 정신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4) 4) 필자는 인간의 환경과 사고, 내지 종교관의 형성을 풍토에서 규명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약간의 언급은 졸저, 《선의 역사와 사상》(불교시대사, 1994년)에 ‘숲의 종교와 사막의 종교’라는 테마로 제시한 바 있다.

이처럼, 대혜는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을 개발하여 근원적인 인간의 불성을 깨닫고 개발하여 안심입명처를 얻도록 하는 송대의 새로운 선수행론을 제시한 것이다.

《무문관(無門關)》 제1칙에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체계 있게 제시하고 있다. 조주 화상은 어떤 스님이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는 “없다(無).”고 대답했다. 무문이 말했다. “참선은 반드시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절묘한 깨달음(妙悟)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심(心路)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조사의 관문을 뚫는 체험도 없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심을 완전히 끊어버린 수행의 경험도 없이 선이 이렇고 저렇고 평하는 사람은 마치 초목에 붙어 사는 유령과 같은 존재와 같다. 어떤 것이 조사의 관문인가? 여기 본칙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무자 공안 이것이야말로 선종의 제1관문이다.

그래서 이를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고 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 관문을 뚫는다면 그는 친히 조주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대의 모든 조사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진리의 세계를 걸어가며, 역대의 모든 조사들과 함께 눈썹을 결합하여 그들과 똑같은 안목(眼目)으로 진실(불법)을 보고, 똑같은 경지의 귀로서 만법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자! 여러분들도 이 조사의 관문을 뚫어보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360골절, 84,000 털구멍, 몸 전체가 바로 의심덩어리(疑團)를 일으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밤낮으로 이 문제에 전심 전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함에 있어 이 ‘무’를 노장(老莊)에서 설하는 허무(虛無)의 무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유무의 차별적인 무로 이해하고 참구해서도 안 된다.

일단 이렇게 ‘무’자 공안을 문제로 삼고 참구함은,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입에 넣고 뱉을래야 뱉을 수도 없고, 삼킬래야 삼킬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진 것처럼, 지금까지 익히고 배워온 일체의 모든 견해와 식견을 전부 탕진하고, 오래오래 오로지 일념으로 순수하게 공부하여 익혀 나가면, 자연히 자신의 의식과 일체의 외부경계(內外)의 차별 구별이 없어져 하나가 되는(打成一片:一行三昧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처럼, 단지 스스로 자각하여 맛볼 수 있을 뿐이지 깨달음의 경지를 남에게 언어 문자로서 전하거나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不立文字, 敎外別傳의 세계) 일단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여 조사의 관문을 뚫게 되면(驀然),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하며, 옛날 관우 장군이 큰 칼을 손에 쥐고 자유 자재롭게 휘두르는 것처럼,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지혜의 칼로 일체의 번뇌 망상을 끊고 대자유의 해탈경지에서 살 수가 있다.)

또 이러한 경지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생사 망념의 언덕을 뛰어 넘어 대자유(해탈 열반)를 얻을 수 있고, 육도(六道)나 사생(四生)의 사바세계에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에서 노닐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무자 공안을 참구해야 하는가? 온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이 무자 공안을 참구해야 한다. 무자 공안을 참구함에 일념으로 의심을 일으켜 끊어짐(間斷)이 없고 중지하는 일이 없으면 여러분의 심중에 불법의 촛불이 일시에 켜지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게송으로 읊기를, 개한테도 불성이 있는가? 전부 그대로 제시된 부처님의 명령(命令) 조금이라도 유무의 분별심에 떨어지면, 곧바로 목숨을 잃게 되리라. 무문은 이처럼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함에 전신이 의단(疑團)이 되어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사실 대혜가 주장한 무자 공안은 무문의 《무문관》에 이르러 간화선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좌선과 명상(사유)를 통한 자기의 심지(心地)를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해온 중국선종의 오랜 구도행각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사유와 의식집중의 훈련은 여기 조주 무자 공안 참구에 의한 대의(大疑)의 응결(凝結)과 이 의단(疑團)을 타파한다고 하는 간단하고도 적절한 2단계의 수행구조로 통일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북종선에서 주장한 간심간정(看心看淨)의 좌선과 남종선에서 주장한 견성체험의 선사상을 새롭게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대혜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새로운 간화선을 도입한 보조지눌은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간화결의론》을 저술하였고, 그의 제자 혜심 역시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학인들이 조주 무자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저술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태고보우, 현대의 경허(鏡虛)·만공(滿空) 선사도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법을 설하고 있다.

최근에 입적하신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鏡峯) 선사도 모두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을 ‘소염(小艶)의 시(詩)’를 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소염의 시는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간화선의 수행구조에 많이 응용되고 있다. 오조법연 선사가 소염의 시를 진제나(陳提邢)에게 설하는 말을 창밖에서 듣고 원오극근 선사가 깨달음을 체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면 소염의 시가 공안선(간화선)의 참구에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유명한 소염의 시 원문은 다음과 같다.5) 5) ‘소염의 시’ 전문은 《전등록》 제28권 〈國師三喚 侍者訟〉(Z.137∼200. c)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一段風光畵難成. 洞房深處暢予情.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글자에 약간의 출입이 보인다. 일본 夢窓疎石의 《夢中問答》 권 하(岩波文庫本)에도 수록하고 있다.

一段風光畵難成 洞房深處陳愁情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저 큰 저 댁의 우아한 풍경,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어라! 지금 저 깊숙한 여인의 방에서 사랑에 괴로워하는 여인이 있네. 그녀는 자주 소옥아! 소옥아!라고 시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원래 그에게 시킬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의 속샘은 소옥아!라고 부르는 자기의 목소리를 밖에 있는 낭군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보통 선종에서는 이상의 ‘소염의 시’ 가운데 뒤의 두 구절만을 주로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앞의 두 구절은 잘 사용하지 않고 있어 생소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소옥이는 당대 양귀비의 시녀 이름이다. 양귀비는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낭군(안록산)에게 자기의 존재와 현재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서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암호로 시녀인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아무리 부른다고 해서 그 누가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양귀비가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면 지금 현종은 돌아가고 자기는 지금 혼자 있다는 자기의 현재 상황을 전하는 약속이 두 사람 사이에 암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있는 낭군에게 시녀 소옥이 이름을 불러서 자기의 현재 상황과 자기의 목소리 들려주려고 별 볼일도 없는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양귀비의 입 밖에로 엉뚱하게 튀어나온 ‘소옥아!’라는 소리와 양귀비의 마음 속의 ‘님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의지’를 간화선의 수행에서는 언어문자와 근원적인 본래심에 비유하고 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없는 낭군에게 안방 깊숙이 앉아 있는 미인이 창밖에 있는 낭군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킬 일도 없는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대어 자기의 존재와 현재 상황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즉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할 때 의심으로 응어리진 화두를 ‘무!’라고 하면서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님이 그리워(의심)’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옥아! 소옥아!(無!)’라고 불러대는 목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무!’라고 하는 그 자기의 본래심의 목소리를 자기의 본래심이 알아듣도록(自覺) 하게 하는 것은 ‘소옥아!’라고 부르는 그 소리를 밖에 있는 낭군이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한다고 하는 것은 무자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양귀비가 시녀 소옥이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소옥아! 소옥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공안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인 것이다. 즉 자기의 본래심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무자’이다. 본래심의 자기 집 대문에 ‘무!’라는 기왓조각으로 두드리고 깨달음으로 들어가 안온하게 앉아 안심입명의 삶을 가꾸는 것이 간화선 수행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소염의 시가 풍기고 있는 은유적인 암시가 마치 이러한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 수행의 실천 구조와 같은 내용를 제시하고 있기에 이를 간화선의 공안 참구에 널리 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부처나 깨달음이 멀고먼 저쪽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부처나 깨달음을 그리는 구도적인 마음(菩提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문제제기(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부처나 깨달음은 없는 것이나 같은 것이 아닌가? 추구하고 찾는 부처나 깨달음은 자신의 문제제기(의식)를 벗어난 먼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자신의 문제제기(의심) 그 가운데 있다. 문제의식(의심, 질문)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오의(奧義)는 통하지 않는다.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그 마음의 목소리에 부처가 있으며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사실 ‘부처님!’이라는 그 소리가 이미 나의 목소리가 아닌 자기 법신불(法身佛)의 법음(法音)인 것이다.

여기에는 질문과 대답이 둘이지만 이미 둘이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부처님!’이라는 그 소리는 ‘부처는 여기에 있다!’라는 부처의 소리(法音)인 것이다. 《열반경》 20권에 “일체의 모든 소리는 부처의 소리(一切聲是佛聲)”라고 설하고 있으며,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에서도 “부처가 어디 있는지 알려고 하는가? 단지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저 소리가 바로 그것(欲知佛何在,只這語聲是)”이라고 읊고 있다.6) 6) 《열반경》 제20권 〈범행품〉(《大正藏》 12권 485쪽上). 《선혜대사어록》 제3권 〈게송〉(續藏經 120책∼12, c)

조주의 무자 화두를 통해 주체적인 의심으로 문제제기하여 ‘무!’라고 참구하는 그 본래심의 목소리는 이미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일체의 선악, 범성(凡聖) 등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의 경지(숲의 세계)를 모두 한꺼번에 초월한 법신불의 법음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라는 본래심의 목소리를 본래심의 귀로 또렷하게 듣는 자각이 있어야 부처(불성)의 지혜작용이 이루어지며, 안심입명처의 활성화된 살림살이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철저한 본래심 자각으로 근원적인 본래심과 본래심과의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라는 그 법음의 소리를 듣는 또렷한 자각이 자기를 본래심(깨달음)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살림살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철저한 자각을 통해서 자기 변혁과 돈오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의미 없는 무자 공안을 ‘무! 무!’라고 소리만 아무리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자각이 없는 행위는 자기를 깨달음으로 전환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본래심의 자각이 없는 선수행은 멍청한 범부의 일상생활이 되는 것이며, 몰자각은 무기(無記)에 떨어지고 공허에 타락된 엉터리 수행이 된다. 대혜는 이러한 선 수행자를 ‘흑산귀굴(黑山鬼窟)’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배척하며, 또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魂不散底死人)’이라고 비난하고 있다.《전등록(傳燈錄)》 제14권 〈운암담성(雲巖曇晟)〉장에 “잠시라도 있지 않으면 죽은 사람과 같다(暫時不在 如同死人).”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7) 7) 《대혜서》 〈답종직각〉에 ‘如是見解 卽是落空亡底外道,魂不散底死人’(《大正藏》 47권, 933,中) 《전등록》 14권 운암장(《大正藏》 51권, 315쪽 上)

임제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주장한 것은 자각적인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지혜 작용을 강조한 것이다. ‘이뭣고?’ 화두의 문제점 그런데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한다. ‘이뭣고?’라는 화두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주장되어 많은 한국 선원의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화두가 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으나, 간화선의 수행에서 볼 때 ‘이뭣고?’ 화두는 올바른 간화선의 수행을 할 수 있는 화두라고 할 수가 없다.

‘이뭣고?’라고 의심을 하는 것이 화두라고 한다면 이것은 간화선의 올바른 수행 구조와 정신을 잘 모르는 말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각자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도록 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간화선의 의심은 본래심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문제제기만 하고 본래심의 자각적인 깨달음으로 전향하는 자각이 없다면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의심으로 이루어진 분별망념의 시간만 지속될 뿐이다. 또한 의심을 참구해서는 안 된다. ‘이뭣고?’라는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을 참구한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본래심의 참구가 될 수 없고, 본래심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연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원오극근 선사가 화두를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敲門瓦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본래심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라는 문제제기만으로는 본래심의 대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왓조각이 될 수 없으며, 깨달음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조주의 무자 화두의 경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처님은 《열반경》 등에서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스님은 ‘왜 개한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라는 의심(문제제기)을 일으켜서, ‘무!’라는 마음의 목소리를 참구하여 마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라고 하는 각자의 마음의 목소리는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과 같은 것이며, ‘무!’라고 하는 각자의 마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자각하는 것은 본래심을 깨닫는 것으로 본래심의 집에 들어가 안심입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의 무자 화두는 일체의 지견해회(知見解會, 알음알이)와 분별심·의심·번뇌망념을 끊는 지혜의 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많은 선승들의 설법집에는 ‘화두 드는 법’이라는 법문에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무자에 대하여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허무(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 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하고만 생각해라. 조주 스님이 무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무자 화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하지 말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조주 화상의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의심을 참구하도록 설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조주의 무자 공안을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하라”고, 이렇게 화두를 의심으로 참구토록 한다면 대혜종고가 제시하고 있는 간화선의 올바른 실천 수행이 된다고 할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간화선에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은 오조법연 선사가 제시한 소염의 시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많은 선사들의 설법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마삼근(麻三斤)’ ‘판치생모(板齒生毛)’ 등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러한 공안 역시 조주 무자 공안처럼 본래심을 깨닫도록 참구하는 공안이 아니라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공안(화두)인 것이다.

 

4. 간화선의 공안공부:간경(看經)과 간화(看話)

간화선에서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는 공안은 일체의 경전과 어록이며, 학인들의 정법안목을 체득하게 하는 교육이 선지식의 어록 제창(提唱)과 상당(上堂)·시중(示衆)·소참법문(小參法門) 등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제시한 진실된 불법을 배우고 익혀서 각자가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인격을 구족하기 위해 수행하고 또한 중생 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이타행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부처님이 밝힌 불법은 45년간 중생 교화의 설법을 기록한 대소승 경전에 모두 밝혀 놓고 있다.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득한 연기의 법칙이나 인연법·삼법인과 사성제·팔정도·육바라밀·삼학 등의 실천 정신도 모두 대소승 경전에 전부 제시되고 있다. 불교는 붓다의 교설을 배우고 익히고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이러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여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을 경전과 어록 등을 통해서 간경·간화를 학습하여 본인이 각자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도록 새로운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의 참된 의미는 이러한 경전과 조사들이 깨달음을 체득한 선례(判例)인 공안을 공부하고 간(看:참구)하여 각자가 깨달음을 이룸과 동시에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後得智)을 체득하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경전과 어록 등에서 수많은 정법의 안목을 체득한 사례와 판례(공안)를 공부하여 스스로 간접체험을 체득하고 자신이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공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매사가 선각자들의 체험과 깨달음으로 제시한 생활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서 우리들 각자의 실생활에 지혜롭게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의 운전을 배우고 익혀서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나, 컴퓨터·전화기·복사기 등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 체득한 후득지(後得智)로서 생활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선불교는 일체의 대소승 경전과 논장, 율장 그리고 각 종파불교에서 주장하는 논서, 중국고전과 문학 작품, 그리고 모든 조사들의 선문답과 언행록 등에서 많은 공안을 채택하여 사물을 보는 정법의 안목을 어떠한 사건이나 상황에서도 올바르게 체득하도록 문제제기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보림전》 10권, 《조당집》 20권 및 《전등록》 30권 등에 전하는 소위 1,700공안이나, 《벽암록》 100칙, 《종용록》 100칙, 《무문관》 48칙, 고려시대 혜심이 편집한 《선문염송집》(30권) 1,125칙 등의 많은 공안집에는 대소승 경전의 중요한 내용과 선승들이 불법의 안목을 체득한 좋은 사례의 선문답을 채택하여 전하고 있다. 송대 간화선의 대성자인 대혜종고는 《대혜서》 《대혜보설(大慧普說)》 《대혜어록》 등에서 간화선의 수행 구조로서 시각문(始覺門)을 제시하고, 시각에서 본각(本覺)으로 되돌아가는 수행방법으로 오로지 조주의 무자 화두만을 참구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대혜는 또 달리 경전과 당대 조사들의 어록에서 661칙의 공안을 채택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 3권을 편집하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661칙의 공안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착어와 평창을 붙이고 있는 것도 후학들에게 정법의 안목을 점검하고 공안 공부(看話)를 통하여 정법을 볼 수 있는 안목과 불법의 지혜(後得智)를 체득하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선종의 공안집에 수록된 공안들은 조주의 무자 공안처럼,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참구하기 위한 공안이 아니라, 다양한 사례 혹은 판례인 공안을 공부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선불교(간화선)의 교과서인 것이다.

사실 공안이란 말은 법률용어로서 판례이며 사례인 것이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체험적인 사례이며 지혜로운 안목의 판례인 것이다. 따라서 선어록을 공안집이라고 함은 깨달음을 체득한 사례와 판례를 모은 기록이라는 말이다. 고려시대 수선사 결사로서 올바른 선수행을 지도한 보조지눌과 혜심이 간화선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대혜서》에 의거하여 조주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올바른 간화선 수행의 지침서를 저술하고, 또 달리 수행자들이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기 위한 교재로서 《육조단경》을 선양하고, 대승경전과 많은 어록과 전등록 등에서 1,125칙의 공안을 수집하여 《선문염송집》 30권을 편집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혜심은 《선문염송집》 서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편집의도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방의 큰스님들이 문자를 무시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불법을 추궁(徵)하고, 염출(拈出)하고, 대어(代語)로 대답하고, 별도로 제시하기도 하고, 게송으로 읊기도 하고, 노래로 부르면서 깊은 이치를 들어내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으니, 정법의 안목을 열고, 현기(玄機)를 갖추어, 삼계를 뒤덮고, 사생을 건져주고자 하는 이라면 이를 버리고서 무슨 방법이 있으랴! (중략) 선종의 이치를 깨닫고 불도를 토론할 자료가 이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으므로 종문(宗門)의 학자들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기다리듯, 시장할 때 먹을 것을 생각하듯 하였다. 특히 《선문염송집》은 《보림전(寶林傳)》의 편집과 마찬가지로 경전 중에서 중요한 말씀을 부처님의 어록으로 간주하여 처음에 싣고, 서천(西天) 28조, 통토(東土) 6조 및 당송대(唐宋代) 여러 조사와 선지식, 선승들을 시대별로 배열하여 공안을 편집하였다.

보조지눌과 혜심의 수선사에서 실행된 간화선의 수행과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게 하기 위한 공안 공부의 교재로 편집한 것이다. 또 혜심의 문인인 각운(覺雲)은 《선문염송집》 30권 가운데서 요어(要語)를 뽑아 다시 설화(說話)를 붙인 《선문염송설화》 30권을 편집하였다. 이 책은 《선문염송집》에 대한 일종의 주소(注疏)라고 할 수 있는데, 《선문염송집》 1,125칙에다 각운이 347칙을 첨가하여 편집한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선문(禪門)의 정신을 간략히 익히고 배워 정법의 안목을 갖추도록 편집한 서산휴정(1520∼1604)의 《선가귀감》 역시 선불교의 정법안목을 체득하게 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 당대의 옛 조사들의 《보림전》 10권, 《조당집》 20권, 《전등록》 30권과 송대의 대표적인 5등(五燈)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선문의 수많은 공안집을 다양하게 편찬한 것은 다양한 깨달음의 체험과 정법의 안목을 공안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 각자 정법의 안목을 깊고 넓히는 판례와 사례로 삼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옛 조사들과 선각자의 선문답(공안)을 통하여 다양한 사건과 사실에 대한 후득지(後得智)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넓히고 사상을 심화시키기 위한 교재인 것이다. 즉 다양한 사건과 사례를 통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상황이나 사건(일)에 대하여 정법안목의 판결(공안)을 조명하며 공부하여 간접체험으로 후득지를 얻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게 하기 위한 선불교의 기본 교재로서 편집된 것이다. 붓다의 설법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중생의 번뇌가 팔만사천이나 되기 때문이며, 수많은 중생들의 번뇌(고뇌),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팔만사천이나 되는 다양한 법문의 처방약이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사례의 선문답(공안)을 통하여 다양한 불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자신의 일상생활 매사를 정법의 안목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건과 고뇌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올바른 정법의 안목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송대 이후의 선원에서는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좌선 수행 이외에 선지식의 상당법문과 소참법문, 《임제록》 《벽암록》 《무문관》 《종용록》 등의 공안집을 교재로 한 조실 스님의 실천 수행적인 어록제창(강의)이 실행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정신과 정법의 안목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한다고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무자’ 공안 혹은 ‘이뭣고?’ 등의 화두를 참구한다 할지라도 불법의 정신과 안목은 체득되지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은 각자의 번뇌망념에서 초월하여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방편일 뿐이다.

대혜의 설명으로 말하자면, 시각(始覺)이 본각(本覺)에 합치는 수행인 것이다. 무자 공안(始覺)을 참구하여 각자의 본래심(本覺)으로 되돌아갈 때 일체의 사량분별에서 초월하고, 편안한 열반적정의 경지에서 근원적인 본래심의 근본지(根本智)가 함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소승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불법의 본질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불법을 볼 수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은 구족되지 않는다. 일체의 경계에 대한 사실이나 진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올바른 견해나 지혜로운 안목은 사례나 판례를 통한 공안집이나 경전 어록 등을 배우고 익혀서 후득지를 체득해야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어떤 사물에 대한 차별경계나 분별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념·무심·무상(無相)의 실천을 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념·무심·무상의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무념·무심·무상을 배우고 익혀 후득지를 갖추지 못했다면 생활의 지혜로 생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깨닫게 되면 무슨 신통 묘용이 이루어져 만법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참선하는 잘못된 수행자가 많은데, 이러한 지도자를 만나면 평생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귀중한 인생을 무모하게 낭비하는 것이 된다.

깨달음의 지혜는 많은 사례와 판례를 통해서 깊고 넓은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사건과 일, 상황은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숙달되고 연달(練達)되어 무심의 경지에서 지혜롭게 작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운전할 때 자동차에 대한 기초지식, 운전방법, 교통법규 등을 충분히 배우고 익혀서 많이 연습하고 숙달해서 후득지를 체득해야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매사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살려면 그만큼 많은 경험과 체험을 배우고 익혀서 숙달되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숙달되지 않고 의식적으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나 서툴고 부자연스럽다. 몸에 익지 않은 것은 힘들다. 그러나 반복해서 배우고 익힌 것은 습성화되어 자연스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불법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며, 중생 구제의 이타행을 통하여 자비구현으로 인격화하여야 한다. 부처님이 명행족(明行足)·세간해(世間解)·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 등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가장 잘 알고, 지혜와 인격을 구족한 인천의 스승이라고 칭송받고 있는 것도 그만큼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중생들의 고뇌 등 많은 일을 경험하고 깨달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중생들의 고뇌(病)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藥)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맺는 말

이상 간화선의 수행을 본래심을 자각하는 조주 무자 공안 참구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공안 공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 구조를 전통적인 선수행의 입장에서 지관(止觀)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samadhi):허지(寂止)·적멸(寂滅)·무념(無念)으로 일체 번뇌 망념(妄念)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의 적정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으로 근본 무분별지를 얻는 요인이 된다. 간화선에서는 조주의 무자를 참구하는 수행으로 시각이 본각에 합치되도록 한다.관(vipasyna):혜(慧)·정견(正見)·관념수습(觀念修習)하는 것으로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진리나 진실, 제법을 관찰하는 지혜. 즉 생멸문에 들어가는 지혜로서 후득지를 얻는 요인이 된다. 간화선에서는 간경(看經)·간화(看話)의 공안 공부로서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체득하도록 하며, 불법의 사상적인 심화와 다양한 방편지(方便智)와 생활의 지혜(後得智)를 구족하게 하는 수행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선수행은 지와 관이 나누어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지관이 하나로 실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은 조주의 무자 공안 참구는 각자의 본래심을 체득하고 일체의 사량분별과 괴로움(苦)에서 해탈할 수 있는 수행을 이룸과 동시에, 간경과 간화의 공안 공부를 통해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정법안장을 구비한 수행자가 되어야 불조의 혜명을 계승할 수가 있으며, 다양한 후득지와 방편지로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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